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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그네 <14부>

14부-범인을 찾아서.

“끄어어....”

준후는 아직도 숙취가 가시지 않는듯,샤워를 하고 나오고도 힘겨워 했다.수능이 끝난걸 알고는 시험장 앞으로 음악을 하는 준후의 친구들이 찾아왔었고,준후는 또 그들과 함께 부어라 마셔라 한 것이었다.그날 만큼은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기에 좋았다.수능이 끝난 날은 암묵적으로 ‘터치불가’인 날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준후 역시 어젯밤 필름이 끊어질때까지 마신것이었다.고3인 준후이지만,친구들은 한살이 많은 덕에 호프집에 출입하는것이 그닥 어렵진 않았다. 그날,친구들은 자신들을 따라다니는 여자들을 잔뜩 데려오기도 해서 준후를 환영해주었지만,정작 준후는 그 여자애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술만 마셨기도 했다.

똑똑.

방안에 있는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알몸으로 나온 준후는 누군가의 노크소리에 긴장을 했다.아무래도 다 벗고 있으니,그가 놀라는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들어가도 되지?”

준후는 미진의 목소리가 들리자 긴장을 풀고 아무렇지 않게 몸을 닦아내었다.미진은 대답이 없자 문을 열고 들어왔고,알몸의 준후를 마주보게 되었다.

“어머.씻고 있었던 거야?”

“아..응.”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오히려 준후의 중심부를 빤히 들여다 보기까지 한다.

“어제 술 너무 많이 먹었더라.”

“아.수능이 끝나서 .”

준후는 퉁명스럽게 이야기했고,미진은 괜시리 베시시 하고 웃어보인다.원피스에 앞치마 차림인 그녀.육감적인 몸매였지만 준후는 더이상 그녀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오랜만에 보네.그거.”

미진이 살며시 준후에게 다가왔다.준후는 애초에 선을 그어 버리겠다는 듯,문쪽을 바라보았다.

“식구들은 다 있지?”

“회장님빼고 다있지.애석하게도.”

미진의 야릇한 목소리에 준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그에게 미진이 눈에 들어올리가 없었다.마음만 먹으면 그녀보다 훨씬 젊고,이쁘면서도 테크닉역시 뒤지지 않는 은하를 품을수 있다.게다가 처녀인 은영역시 불미스런 일(?)로 거사를 치루지 못한 그에게,지금 미진이 눈에 들어올리 만무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준후에게로 밀착하여 왔다.처음에 방에서 준후가 보는 앞에서 자위를 하며 그를 유혹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준후와 관계를 맺은것도 꽤 오래지났고,그녀는 굶주릴때로 굶주린 것처럼 보였다.

“잠깐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난 별로 생각이 없어서.”

준후는 미진을 살짝 밀어내고는 옷을 입었다.미진은 살짝 기분상한 표정으로 준후를 흘겨보았다. 그는 그녀의 시선은 무시한채로 대충 옷을 입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컴퓨터를 켜고 있었다.미진은 알수 없는 얼굴로 잠시 그를 응시하더니 이내 방문쪽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식탁위에 차려놨으니까,배고프면 내려와서 먹어.”

준후는 뒤를 돌아 나가는 미진을 힐끗 바라보았다.어찌보면 아까운 여자일지 모른다.하지만 이미 준후는 그녀에게 있어서 흥미를 잃은지 오래였다.

어쩌면,그녀와 몸을 섞는 그 순간 잃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모든 게임은 클리어 하는 순간 흥미를 잃는 법이었다.자위를 하던 그녀를 보며 적잖이 흥분을 했던 준후.그 자위행위라는 묘한 환상이 깨지고 나면,미진은 준후에게 있어서 언제나 따기 쉬운 꽃일뿐이었다. 반대로 은하의 경우는 몇번을 플레이해도 준후에게 즐거움을 주는 경우이기도 했지만.

“흠…”

인터넷 뉴스를 뒤적거리던 준후는 한 기사를 보고는 턱을 매만졌다.남들은 다들 가채점을 끝내 놨을 테지만,준후에게는 그것은 관심밖이었다.그냥 결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릴뿐.

-자신의 여동생들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25세 남성 검거-

‘근친상간…이라는 건가.’

준후는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자연스레,준후는 은하와 자신을 대입해 보았다.그것역시 근친이라는 죄악의 범주로 넣을수 있을까?자신의 경우 역시,사회적인 도덕의 관념을 밖으로 도는 일인 걸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저들은 남남일 뿐이지.’

그는 애써 합리화 하는것이 아니었다.단 한번도,준후는 그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해본적이 없었다.애초에 가족이란것을 가져보지도 못했으니,가족개념이 무언지도 그는 알고 있지 않았다.그저 준후의 머릿속에 있는 그들은,타인보다 조금더 가까운 존재일 뿐이었다. 문득 자신의 머릿속에서 환하게 웃는 은채의 얼굴이 떠오르자 준후는 괜시리 인상을 썼다.

‘그래.아주 빌어먹을 일이지.’

차라리 진짜 가족이었다면,죄책감이라도 느낄것이다.아니,이런 감정이 아예 안들것이 뻔했다.하지만 준후의 경우는 달랐다.준후는 은채를 사랑했고,그 사랑을 감추고 부정해야만 한다.인위적으로 엮여진 것이긴 하지만,은채와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이기 때문이었다.

‘시덥잖은 생각은 그만두자.나답지 않잖아.’

요 며칠.은채때문에(?)침대에서 곤란에 빠져야만 했던 준후는 다시금 불만 가득찬 표정으로 돌아왔다.괜시리 겁이 벌컥 드는 그. 아무리 십대 같지 않다 하더라도 그는 너무나 어렸다.

‘이러다가 평생 여자와 못자는게 아닐까?’

죽기보다 싫은 생각이었다.사춘기가 늦게 온 편인 준후에게는 여자란 묘한 쾌감이자 활력소와도 같았다.그런데 그 여자와의 성관계가 되지 않는다니.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특히,음악적 감성이 풍부한 준후에게는 음악과 섹스는 묘한 관계마저 잡혀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머릿속의 잡념을 떨치려,동영상 플레이어를 켰다.하드에 가득한 라이브 콘서트 동영상이라도 감상하자는 생각에서 였다.파일을 불러오려고 했던 준후는 흠칫 놀라 화면을 바라보았다.

‘뭐지?’

불러오려는 폴더에는 라이브실황 동영상이 아닌,은하의 동영상이 들어있었다.늘상 보던 음악동영상이 아닌,은하의 동영상이 나온다는 것은 최신 실행파일이 은하의 섹스동영상 이라는 뜻이 되었다.게다가 준후는 최근에 그것을 본 기억이 단 한차례도 없었다.맘만 먹으면 은하와 몸을 섞을 수 있는데,그 동영상을 볼리가 없지 않은가.

‘누군가가 봤다.’

준후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가족중에 누군가가 본 것이 틀림없었다.그리고 은하의 동영상을 자신이 갖고 있는것을 식구들이 알게 된다면,그것은 역시 큰 일이었다.왠만한 일에는 잘 당황하지 않는 준후도 등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도대체 누가…본거야?’

준후는 당황하지 않으려 애쓰며 생각에 잠겼다.만약 이것을 본 것이 은하라면,큰 문제가 될리는 없다.하지만 어째서 은하가 자신의 동영상을 보고도 그냥 비치하는 것일까?이미 자신과의 관계를 즐기기 때문일 수도 있다.이런 경우라면 준후는 크게 안좋아 질리가 없는 것이다.

두번째는 미진이 봤을 경우다.이것 역시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오히려 미진은 은하와 관계를 맺어보라고 부추기기 까지 했었으니까.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빌미로 섹스를 요구한다면?준후에게는 그것역시 약간은 귀찮은 일이다.

마지막은 은채나 은수가 봤을 경우였다.이 경우야 말로 최악이었다.자신에 대해 실망하는 동시에,이 집안에서의 자신의 입지는 아예 없어질 것이다.강회장의 귀에 들어간다면,자신은 아마 강씨 집안에서 파문을 당할 것도 자명했다.

‘비밀번호를 걸어두는 건데.너무 무심했군.’

준후는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누가봤건간에,그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임에 틀림없었다.이 사태를 잘 넘어가지 않으면,최악의 경우까지 오게 될지도 모른다.

‘별수 없어.찾아내는 수밖에.’

생각을 정리한 준후는 벌떡 일어났다.머릿속이 어지러울 정도로 심했던 숙취는 싹 달아나 버렸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조심스레 밖으로 나갔다.

그는 최대한 발소리가 나지 않게 주의하며,살짝 난간으로 다가가 1층의 동향을 살폈다.우선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 미진의 모습이 보인다.

‘그것때문에 아침에 날 찾아왔던 걸까?’

준후는 잠시후 고개를 저었다.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섹스를 거부했을때,동영상 핑계를 대었을 것이다.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알고 있는 눈치가 아니었다.

자연스레 시선은 쇼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는 은채를 향했다.집안이지만 늘 흐트러짐 없는 단아한 스커트를 입고 있는 은채.그녀는 티비를 보고 있는 듯했다.쇼프로그램 재방송을 보면서 살짝 웃기도 하는것을 보면,은채역시 아니었다.

‘은채 성격에 그것을 보고 저렇게 웃고 있을리가 없지.’

마음이 약한 그녀라면 틀림없이 안절부절 할것이고,준후에게 대화를 요청하러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은수녀석은 보이지 않잖아.’

워낙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아이이니,준후는 그저 놀러 나간것 아니면 방에 있겠거니 하고는 눈앞에 있는 은하의 방문으로 눈을 돌렸다.아까 미진이 분명 강회장 빼고 모두 있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준후는 천천히 은하의 방으로 다가갔다.그리고는 망설임없이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그녀의 방에 들어갈때,이미 노크라는 개념은 예전에 버린지 오래였다.

“이..일어났어?”

은하는 어설프게 인사하며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활동적인 나시차림에 트레이닝 바지.치렁치렁한 웨이브 머리까지 어우러져 섹시한 인상을 자아내고 있었다.

“뭐하고 있었어?”

“그..그냥 뭐 잡지보고 있었지 뭐.”

은하는 계속해서 준후를 어려워했다.물론 그럴만한 사건이 있기도 했지만,예전의 까칠했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수 없었다.그녀는 준후에게 있어 가장 껄끄러운 사람에서,가장 쉬운사람으로 바뀌어 버린지 오래였다.

“시험은 잘 봤니?”

“그럭저럭. 잘 안보기만을 바라는거 아니었어?”

“아..아니야.”

“어째서?그래야 내가 이 집안에서 사라져줄텐데 왜.”

준후의 말에 은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이나 어색한 표정으로 있던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그런거 원하지 않아.”

준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은하를 내려보았다.나시티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가슴골.몇번을 탐해도 질리지 않는 육감적인 몸이었다.준후는 간만에 살짝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지만,지금은 그것이 중요한게 아니었다.물론 은채를 떠올리지 않으면 섹스하는데는 문제가 없을지 모른다.하지만 목적이 그것이 아니었다.

“너 혹시.내 컴퓨터 쓴적있어?”

“컴퓨터?아니.없는데.내방에도 있는데 뭘.”

준후는 은하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침대에서는 한없이 색기가 흐르는 그 두 눈망울이 자신을 향한다.분명 동영상을 보았다면,거짓말을 하는 사람 특유의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준후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오히려 맥이 탁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은하가 아닌건가.’

가장 안전한 것이 바로 은하에게 발각되는 것인데,그녀의 반응으로 봐선 아무리 봐도 은하인것 같지는 않았다.

“그거 물어보려고 온거야?”

은하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준후는 다시 은하를 바라보았다.그녀의 질문,그리고 눈망울에는 많은것이 담겨있는 듯했다.천성적으로 섹스를 좋아하는 여자.이미 준후와의 관계에서 전례에 없던 짜릿함에 흠뻑 빠져있는 그녀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내가 왜 왔다고 생각해?”

“그건…”

“말해봐.뭔데?”

준후는 알고 있으면서도 은하를 다그치듯 물었다.그녀는 천천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하..하러 온줄알고.”

“그게 그렇게 좋아?”

은하는 그녀답지 않게 살짝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누가봐도 당장 덮치고 싶을 정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지만,애석하게도 준후는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이 아이에게는 말 안하는것이 좋겠지.’

누군가가 그 동영상을 봤다는 말은 은하에게는 안하는것이 좋을것만 같았다.딱히 이유는 알수 없지만,득이 될게 없을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나중에.지금은 식구들이 있잖아.조금 피곤하기도 하고.”

“아..응.”

은하는 준후의 말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준후는 한결 착잡해진 마음으로 은하의 방문을 나서,계단쪽으로 향했다.

‘은채…인걸까?설마..아니겠지?’

계단을 내려가면서도,준후의 시선은 티비를 보는 은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인기척이 느껴지자,그녀의 시선이 서서히 준후를 향한다.

“일어났어?”

상큼하게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준후는 저도 모르게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은채는 싱긋 웃어주더니,이내 티비의 전원을 꺼버렸다.

“준후야.잠깐 누나방에서 이야기좀 할래?”

준후는 순간 심장이 멎는듯한 착각을 느꼈다.등뒤에서는 식은땀이 마구 흘러내린다.은채는 준후에게 손짓을 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사뿐사뿐 걸어들어갔다.그녀의 방으로 들어가면서,준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에게 아니라고 해달라고 빌고 있었다.

“여기 앉아.”

“무슨이야긴데?”

급하긴 한 모양인지,준후는 재촉하듯 은채에게 묻고 말았다.그녀의 미소가 이제는 조금씩 불안하기 까지 했다.향긋한 내음이 나는 은채의 방.수수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녀의 방 의자에 준후가 앉았고,그 앞으로 놓인 침대에 은채가 그를 마주보며 앉았다.

“시험 잘봤어?”

“그냥 뭐..잘본거 같아.”

“그렇구나.”

다시 적막이 흐르는 방.준후는 살짝 긴장하며 은채의 눈치를 살폈다.그녀는 옆에 놓인 베게를 꼼지락 거리며 무언가를 망설이는 눈치였다.

‘빌어먹을.뭐야.은채가 본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다.하필이면 은채라니.준후는 떠보기라도 하듯 그녀에게 물었다.

“할말이라는게 그거야?”

“아니…그게 아니고.”

은채는 뭔가 분명 망설이고 있었다.그녀가 망설이는 시간이 길면 길어질수록,준후가 초조해하는 시간은 비례하며 늘어났다.

“그럼 뭔데?”

준후의 질문에 은채는 용기를 내어 말하듯 고운 입술을 열었다.

“어제 누구랑 그렇게 술을 마신거니?”

“그냥 친구들.그것 때문에 그래?”

준후는 제발 그것때문이기만을 바랬다.그것은 그저 수능끝난 학생의 해방감으로 설명될수 있는 것이니까.

“너..어제 많이 취했지?”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도대체 왜그러는건데?”

답답해진 준후는 괜시리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은채의 얼굴은 살짝 붉어지기 까지 한다.한참 지난 후에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나한테 왜그랬니?”

“뭐?”

준후는 순간 멍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이건 또 무슨소리야.’

머리가 복잡해져 왔다.어젯밤에 왜 그랬냐니.생소하다 못해 의도를 전혀 알수 없는 질문이었다.하지만 준후는 마음한구석이 살짝 안심되는게 느껴졌다.은채가 말하고 싶다는 것의 주제가 자신의 컴퓨터 안에 있는 동영상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내가…무슨짓을 했는데?”

사실 준후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친구들이 주는 술을 넙죽넙죽 먹고,완전 뻗은것까지는 기억이 난다.하지만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었다.눈을 떠보니 침대였고,숙취에 샤워를 했으며,지난밤 내가 뭘 했더라 하는 생각이 들기 전에 누군가가 자신의 동영상을 봤다는 것만이 머릿속에 가득했었기 때문에 필름이 끊긴것에 그닥 신경도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필름이 끊어진 그 사이에 그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준후의 질문에,은채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조용히 말했다.

“너 다들 잘때 니 친구들에게 업혀서 왔어.마침 내가 잠에서 깨서 문열어줬고…”

은채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윽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 ,나한테…키스하고 몸 더듬었어.”

준후는 의자뒤로 넘어갈뻔한것을 겨우 참아내었다.평소의 그답지 않게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한참이나 머뭇머뭇 거린끝에 준후는 겨우 한마디를 뱉었을 뿐이었다.

“미..미안해.”

“기억이 안나니?”

“응…”

은채는 뭔가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준후를 바라보고 있었다.준후는 왠지 그런 은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수 없었다.맙소사.평소의 자신이었으면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은하도 아니고,하필 은채에게 키스를 하며 더듬다니.

“누나한테…자꾸만 사랑한다고 했던것도 기억이 안나?”

“뭐?”

준후의 머릿속은 이제 아예 패닉상태가 되어버린다.부끄러운듯,조용조용히 꺼내는 은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준후의 입술을 계속 다물게 만들고 있었다.방안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흐른다.

“내가 그랬다면.미안해.너무 취했었나봐.미안.”

준후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것은 처음이었다.준후는 은채가 애써 웃으려 했지만,왠지 그녀의 눈빛은 슬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왜일까?준후는 이런 상황에서도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뛴다.그의 머릿속에는 은채의 입술을 덮치는 자신의 모습만이 쉴새없이 펼쳐질 뿐이었다.

‘가만히…있었던 걸까?’

순간 준후는 은채가 자신을 거부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져 들어왔다.은연중에,거부하지 않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준후야 너 그거..실수였지?술마시고 한 실수.”

준후는 은채의 말에 무언가 담겨져 있는것만 같아 쉽사리 대답할수 없었다.방안에는 묘한기류가 흐른다.준후는 당장이라도 입을 열고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것을 애써 참아내었다.그래서는 안되었다.은채와는 오누이관계가 아니지만,그렇다고 타인으로 규정할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실수였을꺼야.술마시고.”

준후는 자기도 모르게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어 버렸다.더욱더 무거운 적막이 흘렀고,준후가 고개를 들었을때,은채는 살짝 웃고 있었다.

“다음부턴…그렇게 마시지마 준후야.누나랑 약속하자.”

준후는 이번만큼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수 밖에 없었다.그녀는 이런일을 집안에 떠벌리고 다닐만큼 경솔한 인물이 아니었다.은채가 제안한 약속에는 이 일을 비밀로 부치자는 내용이 은연중에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가볼게.”

준후는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왠지 모르지만 나가본다고 하는 자신의 말은 떨리고 있었다.은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준후는 몸을 일으켜 은채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그가 바라는것은 오직 한가지,자신이 은채에게 키스한 일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았기를 바라는것 뿐이었다.

“어맛!”

은채의 방을 열고 나왔을때,주방에서 물을 마시던 은수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쨍그랑!

준후는 살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은수를 바라보았다.

“너 뭘 그렇게 놀래?”

“아..아..아냐!”

“컵 깨졌잖아.움직이지마.발 베일거야.”

부리나케 미진이 걸레를 들고 달려왔고,준후는 은수쪽으로 다가갔다.

‘이 녀석 왜이래.’

준후는 은수의 표정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연신 자신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안절부절 했다.마치 죄를 지은 사람마냥,은수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베이진 않았어?”

“네.”

미진의 물음에 은수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미진이 깨진 조각을 주워내고,작은 유리조각까지 걸레로 싹 훔치고 나자,은수는 준후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쏜살같이 방안으로 뛰어들어가 버린다.

‘뭐야 저녀석 뭐 마려운 강아지 처럼…’

그냥 돌아서려던 준후의 몸이 갑자기 우뚝 정지했다.그의 고개가 황급히 은수의 방쪽으로 돌려졌다.

‘저녀석…설마?’

강은수.준후의 여동생이자 집안의 막내.

처음부터 준후를 잘 따르던 그녀가,오늘은 이상한 반응을 보인다.바로 전날인 수능시험날에는 잘보고 오라고 화이팅까지 외쳤던 그녀가,어째서 단 하루만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혹시.내 방 컴퓨터 쓴적있어?”

준후는 혹시 있을지 모를 유리조각까지 샅샅히 닦아내는 미진을 보며 물었다.이것은 거의 확인사살과 같은 질문이었고,미진은 아까의 일로 기분이 아직 상해있는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준후의 표정은 그대로 경직되어 버렸다.

‘강은수….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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