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그네 <24부>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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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회전그네 <2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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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부 조심스런 시작


아침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또래에 비해 잠이 없는편인 그였지만,준후는 오늘만큼은 다른날보다 더욱 빨리 일어났다.으레 자다가 일어나면 정신이 몽롱해야 하는 것이거늘 이상하게도 쌩쌩했다.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간밤에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쏴아아.

샤워를 하려고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뜨거운물을 맞으며 그의 머릿속에는 간밤의 일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대담하게도 모두 다 집에 있을때 찾아온 은수.그리고 언제나처럼 그녀의 몸을 탐닉했고,그녀가 가버리고 나서는 은하의 흐느낌소리를 들어야만 했다.그제서야,준후는 자신을 향한 은하의 마음이 진심임을 깨달을수 있었다.

‘어째서 저렇게 변해버린거지?’

알수 없는 일이었다.은하와의 섬씽이 있기전의 은하는,그저 냉랭하고 까칠하고,거기다가 허영심까지 넘치는 여자였을 뿐이었다.덧붙여 사랑이라는게 뭔지나 알까 싶을 정도로 차가운 여자가 그녀였다.

어느날 부터 그런 은하가 바뀌었다.준후에게 약점을 잡히고 나서는,그녀는 단지 그 약점을 지우기 위해 준후의 말을 들어주며,그의 욕구를 해소하는 역할로 바뀌어 버렸지만,어느순간부터 자신의 치부인 그 동영상들을 지워달라는 요청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그에게 고백아닌 고백을 했던 것이었다.

‘강은하도..나와 같은 걸까.’

어쩌면 은채를 쭈욱 동경하고 사랑했던 자신이,최근에 들어서야 그 마음이 걷잡을수 없을 정도로 바뀐것은 은하가 자신을 향한 마음과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제서야 준후는 할 수있었다.

그는 샤워를 하고,그 어느때보다 신경서서 옷을 입었다.대학교에 갈때도 외모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그이지만,오늘만큼은 자신도 모르는 동안에 무려 네번이나 거울을 보며 신경을 썼다.

‘다들 나간 모양이군.’

방문을 열자 휑해져 있는 은하의 방과,역시나 적막이 흐르는 1층의 거실이 보인다.은수는 토요일이니 학교에 갔을것이고,강회장역시 일찌감치 나갔을것이었다.준후는 은채를 부를까 하다가 그냥 1층으로 내려갔다.

“준후 일어났니?”

은채의 방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방문이 닫혀있는 것으로 봐선 은채도 준비중인 모양이었다.

“아..응.”

“잠깐만 기다려.금방나갈게 미안해.”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것일까.준후는 괜시리 투덜거렸다.언제까지 일어나서 나가자고 정한것도 아닌데,은채는 자신이 기다린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 미안한 모양이었다.

‘어라?그런데..’

준후는 집안을 슬쩍 둘러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늘상 이 시간이면 청소다 뭐다 바쁜 미진도 집에 없었기 때문이었다.간혹 장을 보거나,주말에는 밖에 나가는 일이 잦으니 준후는 별생각없이 다시 은채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많이 기다렸지?”

방문이 열리고 나온 은채의 모습에 준후는 몇초간 넋을 잃고 말았다. 몸에 딱 맞는 티셔츠에 아주 얇은 순백색의 가디건.그리고 공주님을 보는것만 같은 하늘하늘한 치마까지.은하나 민지와는 정반대되는 듯한 얌전하면서도 단아한 옷차림.긴 생머리를 위로 살짝 묶어 올려 하얀 턱선과 목선을 보이게 한 그녀가 베시시 웃으며 방에서 나온다. 마치 백사장 위에 있는 검정색 조약돌 처럼,너무나 맑고 이쁜 눈을 한 그녀가,준후의 쪽으로 걸어나왔다,

“준비 다했어?”

“으..응?아..응.”

“얼른가자.아빠가 기사님 보내주셨데.”

“아.그래?”

면허가 없는 준후와 은채였기에,기차역까지 바래다줄 차를 강회장이 보낸 모양이었다.자기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은 강회장을 제외하고는 은하 뿐이기에,준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은채를 따라나섰다.

햇살이 눈부신지,나가자마자 살짝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가리는 은채.바람이 희미하게 불며 그녀의 향기를 준후의 코로 전달해 주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빛이 나는것만 같은 그녀.준후는 애써 마음을 진정하고는 문 밖에 주차되어 있는 차에 은채와 함께 올라탔다.

“역까지 가시죠?”

“네.부탁드려요.”

“아이고.오늘 어디 가시길래 그렇게 이쁘게 입으셨어요?준후군 좋겠네?이쁜 누나랑 다녀서 하하.”

기사의 넉살좋은 농담에도 준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은채는 괜시리 베시시 웃으며 준후의 팔을 잡고는 말했다.

“누가 보면 누나 동생이 아니라 연인같을거 같지 않나요?”

“그러게.준후와 은채는 별로 안닮았으니까.하하하.”

준후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모르는 기사는 은채의 농담에 장단을 맞춰 주었지만,준후는 괜히 창문만 응시할 뿐이었다.

“날씨 정말 좋다.그치 준후야?”

“아..뭐.그러네.”

“치.재미없게 왜그래?누나랑 같이 여행가는데.”

“비라도 그냥 시원하게 후려쳤으면 좋겠다.”

“......”

은채는 준후의 대답에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불만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이내 살짝 웃으며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

주말의 거리,주말의 번화가.그리고 주말의 화창한 날씨보다도,바로 옆에 앉은 은채의 향기에 준후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언제부터일까, 은채가 곁에 있을때 두근거리는 증상은 더더욱 심해져 버린것만 같았다.

“자자자.다왔습니다.”

“아저씨 감사해요.”

“뭘요.부산까지 모셔다 드리고 싶은데 그렇게 못해서 오히려 죄송하죠.얼른 가세요.기차 시간 늦겠어요.”

“네!”

목례만 슬쩍 하고 내린 준후와 정반대로,은채는 기사에게 수고하시라는 인사까지 하고 나서야 차에서 내렸다.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준후를 본 은채는 얼른 뛰어가며 준후의 옆으로 붙었다.

“얼른가자 준후야.KTX시간 늦겠어.”

고개를 끄덕거리려던 준후는,문득 은채가 자신의 손을 잡아 끌자 본이 아니게 당황해버렸다.그녀로써는 빨리 타는곳까지 준후를 데리고 가려고 급한데로 잡은 손이겠지만,준후에게는 그 하나하나가 모두 다 떨림이었다.하얗고 부드러운 그녀의 손.뻣뻣하게 손을 펴고 있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은채의 손을 손가락으로 감싸쥐었다.






대낮이지만 커튼이 드리워져 어두운 사무실.멋드러진 가죽쇼파위에는 두 남녀가 민망한 자세로 엉겨붙어 있었다.

쇼파 위의 손잡이를 잡고 엎드려 있는 여성.그녀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있는 알몸이었다.군살하나 없는 탄탄하고 미끈한 몸매.20대의 그것이라 해도 믿을수 있을정도의 바디라인을 가진 그녀는 바로 미진이었다.

그런 미진의 허리를 잡고 있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남성이 정장 바지를 발목에 건채로 연신 미진의 보지속으로 거대하게 발기된 자지를 밀어넣고 있었다.그는 바로 기주의 위에 있는 보스이자,프로젝트에 대해 기주가 아닌 다른 부하들에게 이야기 했던 바로 그 남자였다.

“흑..아흑..”

“후..더 조여봐.그렇지 그렇게..좋아.”

미진은 쾌감에 젖은 표정으로 쇼파 손잡이를 움켜쥔채 힘겹게 중년남성의 자지를 받아 내었다.미진의 애액덕에 번들번들해진 그의 자지는 이윽고 미진의 등위로 허연 정액을 몇번이고 토해내었다.

“하아..하아..”

당연한 순서라는 듯이,그는 사정이 끝난 자지를 미진의 입속에 우왁스럽게 밀어넣었다.미진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킬틈도 없이 시커먼 중년남성의 자지를 입에 물고 괴로워했다.

“하아..언제봐도 정말 씹질은 잘하는 년이라니까.”

마치 성노리개를 다루는 듯한 그의 말에 미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는 티슈로 자신의 몸을 닦아낼 뿐이었다.성욕을 충족한 남성은 이내 바지를 올리고는 미진의 건너편 쇼파에 털썩 주저 앉았다.그녀가 자신의 몸을 옷을 입으며 가리는 것을 탐욕스런 눈으로 지켜본 그는, 테이블에 놓인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미진을 향해 물었다.

“어때.일은 잘 되가나?”

“그게..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뭐?몸으로 하는 일인데 그게 뭐가 어려워? 할줄아는건 섹스밖에 없는년이.”

남자의 불호령에 미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기죽은듯 얼굴을 떨궜다.그런 취급을 당해서 오는 수치심보다,앞에 있는 남자가 무섭다는 생각이 더 크기 때문이었다.

“왜..?그 자식이 너랑 자는걸 거부하더냐?”

“네.은근히 유혹도 해보고 했지만,처음 며칠한 이후로는 저를 쳐다보지도 않아요.”

“이런 등신같은년.뭔짓을 해서라도 계속 그 새끼랑 몸을 섞어.임신을 하면 더할나위 없고 말이야.”

“그렇지만..”

“왜?그래도 니 난자로 태어난 놈이라 혈육의 정이 느껴지냐?”

“그런게 아니라..그아이..그 집 여자들을 건든 모양이에요.”

“뭐어?지 누나들을?”

“다는 아닌것 같지만..눈치가 그래요.그러니 자연히 제 쪽은 보지도 않구요.”

미진의 말에 보스는 뭐가 우스운지 낄낄거리며 웃었다.

“고아새끼 하나가 멀쩡한 집안 아주 개판 만드는 구만.하지만 그 새끼는 무시못할 놈이야.강주현이가 왜 그 딸내미가 셋이나 되는데 그 녀석을 입양했겠어?강주현이는 얼마 못살아.곧 재산에 대한 상속권이나 회사 경영권이 아마 그 강준후라는 놈에게 고스란히 넘겨줄거야.예전에 나와 손잡고 만들어낸 그 고아 새끼들중에,강준후가 가장 뛰어났기 때문에 입양한 거거든.크크큭!”

“네에..”

“그전에 미진이 너는 어떻게든 그새끼랑 엉겨 붙으란 말이야.뭔말인지 몰라?”

“그렇지만...그 아이는 저에게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해요.”

“그러니 니년이 더 악착같이 붙어서 꼬시란 말이야 이년아.강준후라는 녀석.네 난자로 지가 태어났다는 걸 알아도,눈하나 깜짝 안할 놈이야.알아들어?그러니까 어떻게든 강준후에게 엉겨붙어.왜..싫어?”

“아..아니에요.”

보스는 천천히 일어나 앉아있는 미진에게 걸어갔다.그의 우왁스런 손길이 이제야 겨우 옷가지를 추스린 미진의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미진은 그저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네년이 굶어 뒤질뻔한거 거둬준거..나라는거 잘 알고 있겠지?엉?”

“네에..”

“그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강준후 눈에 들어.그 다음부터는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테니까.3년이다 3년.강주현이는 가족들에게 숨기고 있지만,그 놈은 남은 날이 얼마 없거든.3년안에 너와 내가 그 집 재산을 먹는거다.니년이 이 몸뚱이.어떻게든 굴려서 강준후에게 엉겨붙어.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말이야.”

“흑..”

이윽고 다시한번,사내의 손길에 의해 미진의 옷가지는 찢겨지다 시피 벗겨져 나갔다.미진은 아무런 거부조차 하지 못하고,사내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보스가 바지지퍼를 내리자,축 늘어진 그의 자지가 나왔고,그녀는 기계적으로 그것을 입에 물며 열심히 고개를 흔들어댈 뿐이었다.



‘말도..안되는..’

안에서 들려오는 미진의 신음소리.문밖에서는 기주가 언제 왔는지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 앉고 말았다.일이있어 잠시 들렀다가,자신의 보스와 미진의 대화를 들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내가..여태까지 보스라며 따랐던 사람이...나를 만든 그 증오스런 프로젝트의 기획자라는 건가..덧붙여..준이의 아버지도..’

기주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려 애썼다.머리가 아찔하다.다리가 후들후들 떨렸고,배신감에 주먹은 강하게 쥐어졌다. 기주는 자신의 친구를 떠올렸다.몇번이고 죽고싶을때에 옆에 있어준 자신의 친구.자신은 몰라도,준후만큼은 지금의 행복을 계속 누려야만 했다.

-흑!아흑!아항!-

기주는 살짝 주변을 바라보았다.족히 50명은 넘는 인원이 검정 양복을 입고는 건물에 즐비해 있었다.속주머니에 날카로운 나이프가 들어있지만,지금은 그 나이프를 쓸수 없을것만 같았다.

그는 방문쪽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갔다.보스의 부하들은 중간보스 중 하나인 기주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가자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누구하나 그에게 말을 걸수 있을 정도의 레벨은 없었다.기주는 떨리는 주먹을 손으로 꼭 쥐며,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은 못했지만..이제 곧 모든것을 바로잡을 기회가 오겠지.’








기차는 쉴새 없이 달렸다.은채는 연신 창밖을 보며 신기한듯이 눈망울을 빛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해?”

“그냥..다 신기해.왠지 기차 너무 재밌어.그치?”

“별게 다 재밌다.”

퉁명스럽게 말한 준후였지만,그 역시 은채의 마음을 이해할수 있었다.부잣집 여식으로 자란 그녀가 기차를 탈 기회는 아마도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테니까.

“기차 얼마 못타봤어?”

“아니.가끔 탔어.”

“언제?”

준후의 물음에 은채는 잠시 입을 다물어 버린다.준후가 살짝 당황할때쯤에.그녀의 표정은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지금 가는 은숙이 아줌마라는 분네 집에..내가 늘 심부름을 갔거든.”

“아..그래?근데 그 아줌마는 뭐하는 분인데?”

“그냥...아빠 친구야..”

준후는 창문을 보고 말하는 은채의 눈망울에 괜시리 가슴이 두근거렸지만,꾹 참아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왜 맨날 너가 가?”

“응?”

“아버지가 갈수도 있고,은하..아니,은하 누나나 은수도 있잖아.왜 너만 가냐고.”

죽어도 은채는 누나라고 부르지 않는 그였지만,은채는 이제 더이상 지적을 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싱긋 웃어보였다.

“내가 가장 착해서가 아닐까?하하.”

“말은 잘하는군.”

준후의 냉랭한 말에도 은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기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달렸고,갑자기 은채는 스르르 준후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왜.,,왜그래..”

기차가 달리는 특유의 철길음과 동시에 준후의 심장도 어딘가로 내달린다.별거 아닌 스킨쉽일지는 몰라도 준후에게는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냥..조금만 이러고 있을게.조금 졸려서 그래.”

준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스르르 눈을 감아 버린 그녀.준후는 순간 은채의 작은 어깨를 보고 갈등하기 시작했다.너무나 감싸쥐고 싶은 작은어깨.하지만 늘 상상속에서밖에 만질수 없던 그녀의 몸.

이윽고 은채의 몸이 위아래로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준후의 어깨에 기댄채로,그녀는 살짝 잠이 든 것이었다.

준후는 용기를 내어 한쪽팔을 은채의 등뒤로 올렸다.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떨리는 팔.준후의 팔은 감히 그녀의 허리를 감싸지 못한채,은채의 팔부분을 살며시 감싸 안을 뿐이었다.

살짝 움찔하는 그녀의 몸.하지만 이윽고 다시 잠이 들었는지 그녀는 쎄근쎄근 거리며 숨을 쉬기 시작했다.긴 속눈썹에 덮힌채 감겨있는 눈.적당한 콧날과 반짝이는 입술.준후는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형상이 되어버린 은채를.그렇게 몇시간이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여기야?”

“응.벨 눌러보자.”

준후는 살짝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했다.기차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찾아온 어느 아파트.그것은 너무나 허름한 아파트였기 때문이었다.물론 생활이 어려워 강회장이 도와준다는 것은 준후도 알고 있지만,이정도일줄은 준후에게도 의외인 사실이었다.

“으..은채니?”

두꺼운 철문이 열리고,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은채를 보고 깜짝 놀라고 있었다.아무렇게나 빗어올린 머리.역시나 아무 옷이나 걸친 그녀.꽤나 미인인 듯한 인상이었지만 전혀 꾸미지 않아서 인지 평범해 보이기 까지했다. 그런 그녀가한참이나 은채의 손을 부여잡고 반가워하더니,그제서야 준후쪽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누..누구?”

“아..아줌마.제 동생이에요.준후.”

“으..응?남동생이 있었니?”

“처음뵙겠습니다.강준후입니다.”

“그래.어서 들어와 어서.”

집안의 광경은 더욱더 가난해보였지만,은채는 조금의 거부감 없이 은숙이라는 여자와 함께 들어갔다.

‘응?’

준후는 뭔가 은숙의 행동이 석연찮다는 생각이 들었다.강회장의 친구라면,그저 은숙에게 있어서 은채는 친구의 딸일 뿐일것이다.그런데 왠지 그녀의 행동이 이상했다.연신 은채의 얼굴을 매만지고,껴안기도 했다.착한 은채역시 밝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모두 들어주고 있었다.

‘단순히..돈을 보내준다면 통장으로 보내면 간단하다.그런데 은채는 저 은숙이라는 여자에게 자주 왔다고 했었지.’

준후는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은채를 보는 은숙의 눈은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듯한 그런 감격에 여린 눈이었다.그런것을 아는지 모르는지,은채는 연신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이거..아빠가 드리래요.”

“또 가져왔니?”

“또 저번처럼 어디다가 기부해버리거나 하지 마세요.아줌마를 위해서도 좀 쓰셔야죠.”

“아니다..은채야 나는..그냥 먹고살수 있으면 돼..정말로.”

준후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두 여인을 바라볼 뿐이었다.준후는 잠시 하나의 가설을 세워보았다.정상적인 가정에 자라지 않은,고아로 자라온 준후라서 일까?은숙의 모습은 왠지 그저 남같지가 않아 보였다.게다가,준후는 묘하게 둘이 닮은구석이 있다는 것을 캐치해내었다.

‘설마...그런것은 아닐까?’

준후는 이내 머릿속에 떠오른 가설을 지워버렸다.그럴리가 없었다.부자집의 둘째딸로,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을 은채가 아니던가.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착하고,너무나 맑고 순수하게 자란 그녀였다.

“은채 오랜만에 왔는데..밥도 해줘야 하는데..”

“아니에요 아줌마.배 안고픈걸요.”

“아니야!그래도 동생이랑 같이 왔는데 해줘야지..가만있어봐..”

은숙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은채는 한사코 괜찮다고 했지만 은숙은 절대 그럴수 없다며 계속해서 서랍장이며 천장을 뒤져 나갔다.하지만 멀리서 보는 준후의 눈에도 먹을거리라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서 뭐좀 사와.”

“응?”

준후의 속삭임에 은채는 시선을 준후쪽으로 돌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 아주머니가 너위해서 뭐라도 해주려고 하잖아.빈손으로 온것도 그런데..가서 뭐 좀 사오라고.”

“아..그래야겠다.너도 갈래?”

“난 여기 있을테니까.다녀와.”

“알았어.그럼 아빠 친구분이니까 말 잘 하고 있어.누나 다녀올게.”

준후의 제안에 착한 은채는 살짝 손뼉까지 치며,행여 은숙이 말릴까 얼른 지갑을 들고 문밖으로 나섰다.준후는 아직도 찬장이며 서랍장들을 뒤지기 바쁜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저기요.”

나즈막히 부르는 준후의 목소리에,찬장을 뒤지던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렸고,이내 그녀는 눈으로 은채를 찾기 시작했다.

“은채..아니 누나 잠깐 뭐 사러 간다고 나갔어요.”

“아..그래요?”

그녀는 이내 준후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듯 다시금 찬장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린다.

“은채 누나와..어떤 사이죠?”

얼만큼일까.순간 정적이 흘렀다.은숙은 마치 시간을 멈춘것처럼 아무런 동작도 하지 않고는 이윽고 준후에게 등을 돌린 그 자세 그대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무슨소리에요?그냥 절친한 친구의 딸일 뿐이에요.”

“그런가요.”

준후는 맞장구를 쳐주었지만,그의 말투에서 은숙을 신뢰하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왜 그걸 묻죠?”

“전 고아였어요.입양되서 은채와 남매사이가 되었죠.”

“...”

“어머니의 사랑.이런거 잘 몰라요.늘 상상속에서 엄마의 사랑을 그려보기는 했었지만요.근데 확실한건,아주머니가 은채를 바라볼때의 모습이, 제가 상상하던 그 모습과 너무 똑같더군요.”

“무슨말을 하고싶은 거에요?”

“처음에 물었던 질문 그 자체가 궁금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준후는 조용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그녀의 어깨가 조금씩 위아래로 흔들린다.준후는 그저 말없이 그런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엄마가 없다고 했죠?”

“네.고아니까요.”

“사랑하는 자식을 보내고 사는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질까요?”

“역시 은채의 어머니가 맞는 모양이군요.”

“흑..”

그녀는 이내 참았던 눈물이 터진듯 흐느끼기 시작했다.다시금 준후쪽으로 등을 돌린 은숙의 얼굴은 눈물로 가득차 있었고,그녀는 흐느끼듯 주저 앉았다.

“은채는 알고 있나요?”

“몰라요..그 아이는..아무것도 몰라요.”

준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은채의 성격에,은숙이 친모인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편하게 지낼리가 없다.그녀는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준후는 더이상 묻지 않았지만,대충 짐작은 할수 있을것만 같았다.정확한 정황은 그가 알리가 없었고,또 묻지도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강회장이 은채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맞다는 것이었다.

‘저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게 은채라는 건가.그럼 은채의 친모를 이런곳에..’

준후는 괜시리 주먹이 꽉 쥐어 지는게 느껴졌다.그것이 강회장의 이중성이라는게 느껴지자 열이 받았다.더욱더 열이 받는것은,그것이 마치 배려인양 당당하게 은채를 은숙에게 매번 보내는 그의 뻔뻔함이었다.

“그 아이..흑..은채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줘요..아무말도..그리고 아무것도 묻지 말아줘요..”

은숙은 애원하듯 준후를 보며 말했고,준후는 굳은 표정으로 한없이 흐느끼는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준후는 가슴이 찢어지는게 느껴졌다.왜일까.자신이 더욱 불쌍한 고아였으면서,한없이 착한 미소를 짓는 은채에게 이런 비밀이 있다는 사실이...그의 심장을 몇번이나 도려내고 있었다.






쏴아아아..

어둑어둑했던 하늘에서 부터,순식간에 엄청난 소리를 내며 많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준후는 비를 상당히 맞았는지,창문에 서서 옷을 짜내 보이고는 은채를 돌아보았다.살짝 젖은 머리카락.그녀는 뭐가 재밌는지 살짝 미소짓고 있었다.

“거봐.누나 대단하지?”

“이게 뭐가 대단해.”

“치.나 없었음 너 비 엄청 맞았을거다!”

"무슨소리.여기 오자고 해서 이렇게 비맞은 거잖아.예정대로라면 호텔안에 있을텐데."

"이게 다 니가 비나 내렸음 좋겠다고 해서 그래."

준후는 새초롬한 은채의 표정을 보며,그냥 푸하하 하고 웃어버렸다.갑자기 이렇게 젖어서 들어온 꼴이 웃기다는듯이.그런 준후를 보며 은채도 쿡쿡 거리며 같이 웃었다.

은숙의 집을 나오고 나서,은채는 가볼곳이 있다고 했다.준후는 별 말없이 따라나섰고,결국엔 바다가 보이는 작은 언덕위에 조그만 통나무집에 다다른 것이었다. 은채의 말로는 그 통나무집은 강회장이 예전에 사둔것이라고 했다.가족별장을 위해 사둔 그 통나무집은 지금까지 한번도 이용된적이 없었다.그곳에 종종 놀러간 것은 은채 뿐이었다.

준후는 그제서야 집안을 둘러보았다.그리 크진 않지만 포근한 통나무집.은채는 오래 안와서 더럽다며 걸레를 가져와 청소를 시작했다.

통나무 집에 있는 자그마한 공터같은 앞마당에는 작은 그네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바다가 보이는 큰 언덕위의 통나무집.거기를 들르자는 은채의 말에 언덕을 오르다가 그만 둘은 비를 흠뻑 맞아버린 것이었다.

쏴아아아

지나가는 비는 아닌것일까? 저녁이 넘은 시간이지만 비는 그칠줄 몰랐다.

“계속 오려나봐”

준후의 중얼거림에 은채는 싱긋 웃어주었다.뭐가 그리 즐거운 걸까.준후는 은채의 그런 미소에 너무나 기분이 묘해지는게 느껴졌다.

“와와!있다 있어!”

“뭐가?”

은채의 외침에 준후는 고개를 갸웃했지만,이내 은채가 말한 그것의 정체를 알고는 실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야.그냥 말라 비틀어진 나뭇가지들이잖아.”

“그치만 비가 와서 다 젖었잖아.이게 있으니 벽난로에 불도 때울수 있단 말이야.”

은채는 이내 그 하얗고 작은 손으로,아무렇게나 한쪽에 쌓여있던 나무를 하나씩 옮기기 시작했다.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준후역시 한숨을 푹 쉬고는 은채쪽으로 다가갔다.

“비켜.”

“응?”

“비키라고.잘못하면 손다쳐.”

“괜찮은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다치면 또 누구 탓하려고.”

은채는 젖은 머리칼을 살짝 귀 뒤로 넘기며 베시시 웃는다.준후는 묵묵히 먼지가 잔뜩 쌓인 나무를 벽난로 안에 집어 넣었다.

“여기 기름도 있어.조금만 써보자.”

“연기는?”

“이거 환풍구로 다 빠져 나갈거야.잠깐만.”

은채는 한두번 와본 것이 아닌듯 능숙하게 환풍기를 작동시켰다.아담하고 이쁜 집이지만,벽난로를 켜는것은 꽤나 번거로운 일이었다.은채와 준후가 같이 몇번을 왔다갔다 한 끝에,이윽고 둘의 볼은 벽난로에서 치지직 거리며 타오르는 불길덕에 붉게 물들게 되었다.

“휴..이게 뭐냐?좋은 호텔에서 잘수도 있는데.”

“왜?준후 넌 이곳이 싫어?”

“그런건 아니지만.”

“여긴 내가 어릴적에 매일 같이 오던 곳이야.”

은채의 말에 준후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벽난로의 불길덕에 붉게 물든 그녀의 양 볼.앉은 채로 자신의 무릎을 끌어 안고는,그녀는 옛일을 회상하는듯 포근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렸을때는 부산에 있었어.너 오늘 보기로 한 분사있지?그게 사실 원래는 아빠회사의 시작이었거든.”

“그랬군.”

“난 저기 있는 그네가 너무 좋았어.무서워서 타지도 못했지만..맨날 혼자 여기 오고 그랬어.”

“친구가 없었구나 그때도?”

“그랬나봐..히히.”

“...말을 말자.”

준후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그것은 은채를 향한 심장이 엄청나게 두근거리는게 민망해서 였다.그런 그의 말을 아는지 모르는지,그녀는 계속 입을 열었다.

“여긴 늘 내 아지트였어.지금 집앞에 있는 놀이터 그네 위처럼.”

언제부터일까.준후는 은채와 자신이 너무 붙어 앉아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다.그녀의 숨소리 하나하나,그리고 젖어있는 머릿결 한올한올이 손에 잡힐듯 가까웠다.

“여기서 이사갈때 진짜 펑펑 울었는데.”

“여기가 뭐가 좋다고.”

“내 아지트 였는걸 뭐.지금은 아쉬운대로 놀이터로 하고 있지만.”

준후는 가슴이 아파오는것이 느껴졌다.왜일까.왜 이렇게 착한 은채가 생모의 존재도 모른체 살아야만 할까.죽은 강회장의 부인.아마도 그녀는 은하와 은수의 엄마일 것이다.그리고 은채는 그 부인을 자신의 엄마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그냥..어렸을적에 돌아가신 자신의 엄마로 말이다.

“꼭 아지트가..있어야 하는건 아니잖아.”

“응?”

준후의 중얼거림에 은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준후를 바라보았다.준후는 여전히,타다닥 거리며 타오르는 벽난로를 응시하다가,이내 바닥에 깔아놓은 마른 장작을 하나 집어 넣었다.

“그 아지트가 꼭 필요한거야?”

“그래서 내가 바본가봐.꼭 그렇게 안정을 취할 어딘가가 있어야 하고..그치?”

“그 아지트가 꼭 장소여야만 해?”

준후는 말을 뱉어 놓고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해버렸다. 은채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준후를 바라볼뿐이었다.

“무슨 뜻이야?”

“그 아지트가...사람일수도 있잖아.늘 너 옆에서 널 안정시켜 줄수 있는...사람.”

심장은 미친듯이 달음박질 친다.은채의 눈망울이 떨리기 시작했고,준후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벽난로의 타오르는 소리와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만이 작은 통나무집을 채워가고 있었다.

“그..그게 누군데.”

은채는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했다.준후는 참고 또 참았다.이대로라면,은채의 입술에 강제로 입을 맞춰버릴것만 같았다.마치 오래된 장작이 더욱더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은채를 향한 마음을 오래 묵인해왔던 준후의 마음도 뜨거울 정도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되주고 싶어.늘..그렇게 생각했어.”

준후의 말이 떨어지자,분위기는 더욱더 조용해졌다.은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모든것을 말해주는것만 같았다.하지만 준후는 그녀의 입술이 떨어지기만을 묵묵히 기다렸다.

“고마워.누나를 그렇게 생각해줘서.”

“누나로써가 아닌거..알잖아.”

준후의 말이 맞았다.둘은 이미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고백아닌 고백도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넘겨버렸으니까.그렇기에 둘은 더욱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우리는..”

은채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준후는 알고 있었다.언젠가 은채가 말했던 그 사람.사랑하지만 이룰수 없다는 그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바로 며칠전 은채가 했던 말에서 충분히 알수 있었다.

은채 역시 버스안에서 준후가 혼잣말 처럼 했던 고백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완전히 잠들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뭐?가족이라고?그런거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

“어떻게...안생각해.”

“가족이 아니니까.”

준후의 말에 은채는 고개를 숙여버렸다.그제서야 준후는 알수 있었다.은채라는 존재는 지우려고 한다고 해서 지워지는 존재가 아님을.수없이 은채를 잊고 그냥 동생으로써 살자고 했던 자신의 다짐도,불과 하루만에 이렇게 거품처럼 날아가 버린다는 것을 말이었다.

준후는 천천히 은채의 젖은 머리결을 뒤로 넘겨주었다.부드럽기 까지 한 준후의 손길.은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떨리는 눈망울로 준후를 바라보았다.이윽고 준후의 팔이 용기를 내어 은채의 어깨를 잡았고,서로의 떨림을 주고 받은 그들은 이내 서로를 끌어안았다.

“한번만...이렇게 안고 싶었어.진심이야.”

준후의 말에 은채는 그의 품에 안겨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왜일까.준후는 그저 은채를 안은 것만으로도 미친듯이 심장이 떨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조용히 자신의 품에서 흐느낀다.빗소리가 너무 커서 묻히고 있었지만,준후는 알수 있었다.자신이 은채를 끌어안은 그순간 느껴지는 감동의 크기만큼,그녀 역시 반응하고 있었다.

“나..무서워.무서워 준후야.”

“뭐가 무서워.세상의 시선?그런게 무서운거야?”

“응..그게 무서워.가족이 아니지만,우린 가족이어야만 하니까.그게 무서워.”

흐느끼는 은채의 목소리.하지만 준후는 더욱 힘주어 은채를 안았다.은채의 살결에서 나는 부드러운 향기가 그의 가슴을 더욱더 요분질 친다.

“내가 받으면 되잖아.시선,비난 이딴거 다 내가 떠 안으면 되잖아.”

“준후야.나..어깨좀 빌려줄래?아침이 올때까지만..”

준후는 안고 있던 그녀를 품에서 떼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서운했다.하지만 그는 이윽고 은채를 놓아주었고,은채는 준후의 어깨에 한쪽 고개를 올려놓았다.

쏴아아

비는 더욱더 거세게 창문을 때렸다.활활 타오르던 장작불도 조금 불이 약해진 것도 같았다.준후는 움찔하며 옆을 바라보았다.은채가,너무도 하얗고 고운 손으로 자신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나...겁이 많고 한 나지만...언제나 내 편이 되줄래?”

준후는 대답대신 은채의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은채는 스르르 눈을 감았고,준후는 비가 더욱더 거세게 떨어져 내리는 창밖의 까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시간이..이대로 멈춰 줬으면.’

준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보같은 바람을 했다.이윽고 자신의 어깨에 기댄 은채. 준후는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쥐며,아침의 햇볕이 둘을 밝힐때까지,그렇게 계속 은채의 옆에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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