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라인(REDLINE) 1부-3
3. 아빠의 불륜.
수지는 별 탈없이 잘 자랐다.
한때나마, 혹여 내 아이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수지를 멀리했었던 나는 그 날 이후로 다시금 평정을 되찾고서 수지를 동생으로 받아들였다. 수지는 얼마를 많이 닮았다. 큰 눈망울이며, 오똑하니 선 콧날, 갸냘픈 턱선, 시원시원한 팔 다리가 정말 엄마를 많이 닮았다. 그렇게 확연하게 엄마를 닮아가면서, 한때 아빠를 닮았다고 하던 사람들도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째건, 우리 집은 다시금 평화를 되찾았다. 뭐 그렇게 심각하게 외부로 붉어진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저 나만 굳게 입을 다물고, 내 기억에서 그 기억을 완전하게 지워버리면 우리 집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되었다. 아빠는 승진해서 부장이 되었고, 엄마는 다시 외할아버지의 회사로 출근하면서 지극히 평범하게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아빠가 바람을 핀 것이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1학년으로 막 기말고사를 끝낸 시점이었다. 기말고사를 모두 치르고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던 나는 온통 주말 여행뿐이었다. 중간고사를 치르고 난 다음부터 친구들과 계획한 여행이었다.
기차를 타고 정동진의 일출을 보는 것이 여행의 전부였지만, 사실 그 여행이 진짜 목적은 미팅이었다. 시시하게 유흥거리에서 만나서 짝짓기하는 그런 미팅이 싫었던 나는 친구들에게 그런 내 의견을 제안했고, 친구들도 곧 흔쾌히 받아들였다. 물론, 내가 어울리던 친구들은 대부분 수재라 불리는 애들이어서 일종의 어떤 권위의식 같은 것이 있던 애들이었다. 그랬기에 그 애들도 흔히 하는 미팅은 왠지 모르게 천박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물론, 내 생각도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정말 동해안의 일출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홀로 그 곳에 간다고 하면 부모님이 허락을 할 것 같지 않아 친구들을 끌어 들인 거고, 그 여행에 여자가 동참한다면 더 없이 좋을 것은 뻔한 거 아닌가 말이다.
그런 생각만 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들어간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집안 분위기에 어쩌면 여행을 못 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예감했다.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단지, 기분 탓이려니 하고, 엄마의 침울한 표정을 애써 무시하고서 내 방에서 늦은 밤기차를 떠올리며 시험으로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낮참을 청했던 나는 엄마의 다소 높은 말소리에 잠에서 깼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엄마의 목소리는 상당한 노기가 섞여 있었다.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니? 당신이 여자야? 강간이라도 당한 거란 거야?”
“정말이야.. 믿어 줘.. 자고 일어나니까 그 여자가 내 옆에 있었어..”
“그래서?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만난 거라고? 그게 말이 돼?”
“만나주지 않으면 당신에게 말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엄마의 목소리는 낮고 컸다. 터질 듯한 분노가 그 음성에 모두 녹아있는 듯, 단지 듣기만 하는 나마저도 겁이 날 정도였다.
“그 여자가 나 찾아와서 뭐라 말했는 줄 알아?
“그 여자가? 언제…”
아빠는 놀란 듯 반문했다.
“오늘.. 사무실로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더라구..”
“사무실로?”
앵무새도 아니고 아빠는 엄마의 말만 재차 확인했다.
“그래..! 나 보고 이혼 해줄 수 없냐고 했어.”
“……….”
아빠는 말이 없었다.
“자기가 당신 아이를 가졌다면서, 자신은 이미 이혼절차 밟고 있으니 나 보고도 가능한 빨리 이혼 해주었으면 했어.. 하… 하…..”
엄마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했다. 반면에 아빠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엄마의 그 말은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아빠가 바람을 폈다는 사실에 나도 경악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빠에겐 엄마 밖에 없다고 생각한 나는 아빠의 불륜에 머리를 한대 얻어 맞은 듯한 기분에 정신이 멍해졌다.
게다가 아빠의 불륜 상대가 임신까지…
결국 난 여행을 가지 못했다.
아빠는 이웃 동에 사는 여자와 불륜을 저질렀다. 그 여자는 아빠의 직속 부하였는데,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서 아빠 회사에서 8년째 근무를 하고 있고, 남편은 행정고시를 패스한 공무원이었다. 그것만 본다면, 그 여자는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모두 성공한 여자였다. 하지만, 그 부부는 아이가 없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여자의 남편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무정자증 환자였다. 그런 탓에 겉보기에는 화목한 부부처럼 보였을 뿐, 실상은 이미 별거 아닌 별거에 들어 간지 오래였었다. 그런데, 우연히 같이 출장을 갔다가 그만 아빠와 그 여자가 술김에 동침을 하게 되었고, 아빠는 자신의 생식능력이 보통사람보다 약하다는 것만 생각하고 간혹 피임을 하지 않고 관계를 가졌었던 것이다.
엄마는 크게 분노했다.
처음 몇 일은 회사 출근도, 식사도 하지 않았다. 큰소리를 내며 시끌벅적하게 남들처럼 싸우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엄마의 행동은 그 보다 더 무서웠다. 아빠도 아무런 말도 없이 나와 수지의 식사를 챙기며 생활했지만, 표정은 엄마 못지 않게 굳어 있었고,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익살스런 말 같은 것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의 내가 여름 방학을 한 날이었다. 자다가 목이 말라 주방으로 향하던 나는 안방에서 들려오는 엄마와 아빠의 대화소리를 들었다.
“다시 생각해 줄 순 없어?”
아빠의 목소리는 다소 애원조 였다.
“그 여자는 내가 지금 설득하고 있는 중이야…”
“그걸 말이라고 해?”
“우리 이대로 끝낼 수는 없잖아..”
“당신이 자초한 일이야..”
“여보.. 제발…”
“우리 이대로 헤어져.. 그 여자가 아이를 떼어내고, 당신과 헤어진다고 해도… 난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어.”
“그래도 다시 생각을….”
아빠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아빠의 말을 자르면서 엄마가 말을 이었다.
“지난 6개월 동안 당신은 나 아닌 다른 여자를 가슴에 담아 준 사람이야. 그것도 아주 도덕적인 것처럼 위선을 떨면서.. 난 당신이란 사람을 믿을 수 없어. 당신과 마주앉아 있는 지금도 너무 싫어서 소름이 돋을 정도야. 지금 나 최대한으로 참는 거야. 우리 추하게 헤어지진 말자. 그냥 깨끗하게 정리해.. 아이들은 내가 키울께. 당신은 그 여자와 살든 말든.. 알아서 해..”
엄마의 말은 단호했다. 아빠는 말이 없었고, 방에서는 더 이상의 대화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 후,
아빠는 우리와 열흘을 같이 더 살았지만, 결국 열흘 뒤 아빠는 우리 집에서 나갔다. 집을 떠나던 날, 아빠는 지수를 꼭 끌어안고서 한참을 있었고, 나에게는 악수를 청했다.
“엄마 잘 보살펴 드려라..”
아빠는 손에 힘을 주며 그렇게 말했다. 아주 슬픈 눈을 하고서…
그렇게 어이가 없을 정도로 아빠는 쉽게 우리 곁을 떠났다. 엄마는 아빠가 떠나는 모습을 보지 않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으로 다시 출근을 했다.
하지만, 당시 17살이었던 나에게 아빠와의 이별은 꽤 큰 충격이었다. 17년을 같이 한 아빠가 그렇게 쉽게 내 곁을 떠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은 잘 돌아갔고, 이웃들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우리를 대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런데, 불행은 연속으로 찾아온다고 했던가?
아빠가 집을 떠나고, 엄마와 정식으로 이혼을 한지 3개월 가량이 흘렀을 때였다. 주말을 이용해 엄마와 나, 그리고 수지는 할인점으로 쇼핑을 갔다. 원래 할인점 쇼핑에는 아빠가 동행을 하였지만, 아빠가 떠난 후 엄마 곁에는 내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엄마의 쇼핑은 정말 길고도 지루했다. 각 코너에서 이것 저것 꼼꼼히 살펴보고, 따져보았다. 나 같으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을 텐데 말이다.
“엄마 그만 가자…”
“조금만 기다려..”
내 짜증을 엄마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그렇게 받아 넘겼다. 하지만, 난 내 앞가슴에 안겨있는 지수가 여간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양 팔에는 쇼핑으로 산 물건이 잔뜩 들려져 있었다. 혹여 같은 학교 여학생이라도 만난다면 나는 콱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기만을 기도하고 기도 했다.
그런 나를 더 짜증나게 만드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내가 엄마에게 “엄마”라고 부를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왠일이니?”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데, 정말이지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나와 엄마를 부부사이로라도 보는 것일까?
하지만, 엄마는 그렇게 어려 보이지는 않았다. 옷도 아주 세련되게 입고, 깔끔한 화장으로 샤프하면서 섹시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결코 나와 어울릴 정도로 어려 보이지는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현실은 그 것과는 달랐다.
“지혁이 너는 어쩜 그렇게 어른스럽니.. 우리 병수친구라고 해도 믿겠다.”
한 아파트에서 17년을 나를 보아온 반장 아주머니는 자신의 큰 아들과 나를 종종 비교했는데, 그 아주머니의 큰 아들은 나 보다 무려 7살이나 많았다. 평소라면, 그런 말들을 그냥 웃어넘기겠지만, 엄마와 쇼핑할 때 지수를 안고서 그런 생각을 하니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다들 나를 지수의 아빠로 생각하는 것 같고, 엄마를 내 아내 쯤으로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상황을 뒤집어 생각하면,
반대로 엄마가 그렇게 어려 보인다는 것이 된다. 34살의 아줌마를 20대 중반의 아가씨 즘으로 말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난 속으로 꾹 참으며 최대한 엄마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서 엄마 뒤를 따라다녔다.
그런데, 그 곳에서 우린 아빠와 마주쳤다.
아빠는 한 여자와 같이 있었는데, 그 여자는 배도 나와 보이지 않는데 임산부 복을 입고 있었다.
“어…..아빠..”
아빠를 먼저 알아본 나는 아빠를 불렀다. 하지만, 내 말에 아빠도, 엄마도, 그 여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놀란 듯 서로를 응시했다.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엄마였다. 엄마는 아빠와 그 여자를 보면서 가볍게 목례를 했는데, 그것을 받는 것은 아빠 옆에 있는 여자였다.
“쇼핑 왔나보지…”
어색하게 아빠가 말을 꺼내었다.
“예..”
“우리도 쇼핑 왔어.. 집에 찬거리도 떨어지고 해서 말이야..”
“예.. 그랬군요.”
엄마는 이상하게 아빠에게 존칭어를 썼다.
“많이 샀어?”
아빠는 내 양 손에 가득 들려있는 쇼핑백을 보았으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예.. 거의 다 샀어요. 이제 들어가려 구요.”
“응… 우린 막 나왔어. 이 사람이 해물탕을 해먹자고 해서 막 그 쪽 코너를 나오는 길이야..”
아빠의 말은 뭔지 모르게 어색했다. 내 기억대로라면 아빠가 말하는 “이 사람”은 엄마여야만 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엄마와 그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엄마는 태연해 보였다. 마치 미리 예상이라도 한 사람마냥 정해진 말과 표정을 지어내 보이는 것 같았다. 그에 반해 아빠 옆에 있는 여자는 당황한 눈빛이 역력했다. 처음 엄마와 아빠의 말을 들었을 때라면 아주 당차고 야무져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순정파적인 모습이 전신에 가득했고, 상당한 미인형의 얼굴에 눈매가 보름달을 연상하게 했다. 나는 다소 얼떨떨 했다. 얼굴도 보지 못했었지만, 난 아빠를 뺏어간 그 여자를 사실 증오하고 있었는데, 막상 실제로 보니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보호해주고 싶은 충동이 일만큼 약해 보였다.
“그랬군요. 지금 6개월쯤 되었겠네요?”
아빠에게 가볍게 답하고는 엄마는 그 여자에게 말을 건네었다.
“예…”
“한창 먹고 싶은 게 많을 때죠. 많이 해 달라고 하세요.”
“예…”
그 여자는 죄송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엄마에게 목례까지 하며 답했다. 정말 선이 가는 여자였다. 평소 엄마의 선이 가늘고 시원스럽다고 느꼈는데, 그 여자에 비하면 엄마는 되려 선이 굵은 편이었다. 그런데 가늘어도 너무 가늘었다.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말이다.
“그럼 이만…”
엄마는 여자의 목례에 답하듯 같이 목례를 하고는 아빠와 잠시 눈을 마주친 후 나에게 가자는 눈짓을 했다.
아빠와 헤어진 후 첫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난 아빠와 한 마디의 대화도 못 나누었고, 아빠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엉겁결에 엄마를 따라 아빠와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아빠와 이야기도 못했다면서 투덜거렸지만, 엄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난 엄마에게 그렇게 냉정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그 냉정한 모습은 채 1주일이 가지 않았다. 1주일 후 엄마는 창백하게 질려서 집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엄마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고, 몸에 모든 힘이 빠진 듯 위태위태했다.
그날 엄마는 심하게 앓았다.
병원 의사가 왕진을 하고, 외할머니가 급하게 달려왔지만, 도무지 40도를 육박하는 고열은 가라앉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난 나는 나도 모르게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아빠의 반응은 의외로 차분했다.
“괜찮아… 곧 괜찮아 질 거야… 걱정 말거라..”
아빠의 말은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엄마는 1주일을 더 앓으며 사경 헤매었다.
그 후 다시 아빠를 만난 것은 1년 뒤였다.
1년 사이 엄마는 외할아버지 회사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부상하면서 무척이나 바빠졌다. 원래는 엄마의 오빠인 외숙부가 후계자였으나, 학문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외숙부는 결국 40세의 나이에 학문의 길로 들어서면서 가업을 포기했고, 엄마의 남동생은 일찌감치 판사의 길을 걷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다른 이모들은 그냥 평범한 주부로서의 삶을 살고 있어서 외할아버지의 후계자로 엄마가 지목이 되었던 것이다.
엄마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만 매달렸던 덕에 엄마의 회사는 1년 동안 매출이 2배로 성장하고, 이익은 4배로 증가하면서 급성장 가도를 달렸다. 나는 엄마에게 그렇게 열정적인 모습이 있으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다. 엄마는 일이 재미있다고 했지만, 늘 얼굴은 피곤에 지쳐있었고, 밤 늦게 퇴근하는 날은 나와 지수의 안부를 살피기는커녕 옷 입은 채로 그대로 침대에 쓰려져 잤다.
일도 좋지만 엄마의 모습은 너무 안쓰럽다 못해 가슴이 아팠다.
“엄마 쉬어가며 해…”
“괜찮아… “
내 말에 엄마는 찡긋 윙크를 하면서 그렇게 넘겼다. 그러나 그런 엄마의 뒷 모습은 그리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1년 전보다 10kg은 빠진 듯 엄마는 더없이 가냘퍼 보였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일에 매달리는지 나로선 이해가 안되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엄마를 도울 수 있는 다른 것이 있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아빠가 집으로 불쑥 찾아왔다.
“어 아빠….”
나는 반가움과 당황스런 느낌으로 아빠를 불렀다.
“그래.. 잘 지냈니?”
“응.. 아빠는 어때?”
“나도 잘 지냈지.. 엄마 계시니?
“응 안방에 있어…”
“그래…”
나는 아빠의 대답을 뒤로하고 급히 안방으로 달려가 아빠의 방문을 엄마에게 알렸다. 그런데, 엄마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 날,
아빠와 엄마는 안방에서 한 참을 이야기 하고서는 나에게 다음 주에 보자는 말만 하고 그대로 가셨다. 모처럼 만난 아빠와 많은 이야기를 기대했던 나는 적잖이 실망했지만, 어쩌랴. 아빠에게도 이제 나름의 가정이 별도로 있으니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나에게 닥칠 일을 짐작도 못했다. 그저 내게 있어 일상은 지리 할 만큼 따분한 공부의 연속선 상에 존재했다. 눈뜨고, 눈을 감을 때까지 내 고민의 전부는 공부와의 전쟁 그 자체였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중학교 때처럼 공부해서는 상위 1%안에 들 수 없었을 뿐더러, 전국단위의 모의고사에서 1%에 들기가 매우 힘들었기에 엄마와 쇼핑하거나, 지수를 돌봐주는 일 외에는 나는 늘 책을 붙들고 살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훌쩍 지나가고, 다시 일요일이 되었다.
“지혁아.. 가자..”
“응…. 근데 지수는?”
“아주머니가 돌볼 거야..”
“그럼 엄마와 나랑만 가는거야?”
“그래…”
“아빠랑 만나는 거 아냐?”
“맞아..”
“근데 왜 지수는 안 데리고 가?”
“다음에 데리고 가자 오늘은 너랑 네 아빠랑만 만날 거야..”
“그럼 나도 안 갈래..”
“안돼…”
“나도 안가.. 그냥 엄마 아빠 둘이서 만나..”
“안돼! 너도 가야만 하는 자리야..”
“………”
엄마의 단호한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엄마를 따라 나섰다.
엄마와 함께 도착한 곳은 시외의 한적한 한정식 집이었다. 실내 장식이 아주 고급스러웠지만, 음식가격은 평범한 샐러니맨은 엄두도 못 낼 만큼 비쌌다. 그 음식집은 모두 룸으로만 되어 있었는데, 방과 방 사이가 임시칸막이가 아닌 벽돌로 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건축한 듯했다.
“아빠….”
엄마와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아빠는 와 있었다.
“그래.. 어서 오너라..”
“일찍 오셨군요..”
내가 미처 아빠의 말에 대답할 새도 없이 엄마가 먼저 말하면서 아빠의 반대편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 공부는 여전히 잘 한다며?”
내가 자리에 앉자 아빠가 말을 건네었다.
“뭐 그럭저럭 하고 있어요..”
“전교에서 1등을 한다면서 그게 그럭저럭이냐… 하하하…….”
“항상 1등은 아닌 걸요 뭐.. 어쩌다 한번씩 하는 게 무슨…”
나는 쑥스러워 뒷 머리를 극적이며 답했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 이 아빠는 고등학교 때 1등은 한번도 못 해봤는데…”
“정말요?”
아빠가 공부를 잘했다는 말만 들었던 나는 아빠의 말에 다소 놀랐다.
“아무래도 넌 나보다는 네 엄마를 많이 닮았나 보구나. 네 엄마는 고등학교 때 이 아빠와 다투었을 때를 빼고는 줄곧 1등만 했었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요.”
엄마가 아빠의 말을 끊었지만, 싫지는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엄마가 아빠의 말을 끊은 것은 아마도 고등학교 때 나를 임신하여 출산했다는 말이 나올까 해서 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어째건, 우리는 가벼운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지수가 참석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시 엄마, 아빠와 식사를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나는 무척이나 즐거웠다.
하지만, 식사가 끝나고 차가 나왔을 때,
나는 청천벽력 같은 엄마 아빠의 말에 하마터면 정신을 잃고서 기절할 뻔 했었다. 아빠는 먼저 엄마의 재혼이야기부터 꺼내었다.
“지혁아.. 이제 너도 다 크고 했으니 이해할 거라 믿는다.”
“예…”
“네 엄마.. 언제까지 혼자 살 수는 없지 않니?”
“예..?”
“네 엄마도 이제 재혼을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너무 놀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까지 엄마는 물론이고, 외가 가족 모두가 그런 내색을 한번도 하지 않았었기에 나로선 황당했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너는 이 아빠와 살아야 될 것 같다. 너도 알 듯 너는 우리집 장손이다. 언제까지 제사에 참석 안 할 수는 없단다. 지금까지는 이 아빠가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했지만, 이제는 때가 된 것 같다.”
“…….”
아빠의 말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난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아빠의 집은 지금 사는 곳과 너무나 멀었다. 즉, 나로선 전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네 엄마 다음 주에 선 본다. 이미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 아마 빠르면 1달 안에 결혼을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네가 그 분하고 지내는 것보다 나랑 지내는 것이 낳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싫어요..”
나는 일단 거부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말이다.
“이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다.”
“무슨 말이야?”
“네 엄마가 너를 불편하게 생각해..”
“예…?”
갑작스런 말에 나는 멍한 느낌을 받았다. 엄마가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다. 내가 엄마를 불편하게 한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던 나는 멍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그런 나를 이해해달라는 듯한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고는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아빠는 탁자 위로 서류 봉투 하나를 내려 놓았다.
나는 말없이 아빠를 바라보았다.
“이건 내 혈액형과 지수의 유전자 검사 서류란다.”
순간, 내 머리 속으로 번개처럼 어떤 사건이 스쳐 지나갔다. 끝장이란 생각과 함께… 그래도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계속 이어지는 아빠의 말을 들었다.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이 사실만은 끝까지 숨기고 싶었단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네 엄마에게 거짓말을 해가면서까지 숨기려고 했지만, 네 엄마가 내 혈액형을 알아버렸다.”
그렇게 시작된 아빠의 말은 장황하게 계속 이어졌다.
요약하면, 1년 전 엄마는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아빠와 사는 여자와 다시 마주쳤는데, 그 때 그 여자는 복부에 통증을 호소하고 있어서 엄마는 그 여자를 데리고 산부인과로 갔었다. 그리고 그 병원에서는 엄마는 아빠의 혈액형이 정상적인 AB형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사실은 곧 지수의 존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되는 것이었다. 아빠 외에 다른 남자를 접한 적이 없는 엄마는 지수가 다른 아이와 바뀐 것이 아닐까 의심을 하게 되었고, 아빠의 친구분이자 엄마가 지수를 출산한 산부인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 곳에서 엄마는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건 아빠의 부탁으로 엄마를 비롯하여 다른 가족들에게 아빠의 혈액형이 변이 AB형이라고 말한 것이다. 엄마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고, 엄마의 전화를 받은 아빠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엄마에게 사실대로 털어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빠는 내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막연하게 엄마에게 다른 남자가 있기를 바랬었다고 했는데, 아빠 외에 다른 남자가 없는 엄마로선 더 없이 혼란스러워 했다. 그러다, 엄마는 직감적으로 3년 전의 그 일을 말하며, 혹시 술에 취해 잠자고 자신에게 섹스 한 거 맞는지 물어보았다. 아빠는 맞다고 딱 잡아 떼었고, 그날부터 엄마는 1주일을 앓았다고 한다.
엄마로선 완전히 동정녀 마리아처럼 임신을 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엄마가 누군가에게 자신도 모르게 강간을 당했다는 것 밖에 안되었다. 그 후로 엄마는 미친 듯이 일을 했다. 하지만, 여자의 직감은 그렇게 쉽게 사그러 들지 않는 법, 언제부터인가 지수가 아들인 지혁과 자신을 닮았다는 소리를 들은 엄마는 자신과 나의 머리카락 그리고 지수의 머리카락을 유전자 검사소에 보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 전에 나와서 아빠를 다시 찾아 갔고, 그때에서야 아빠는 3년 전의 일을 실토한 것이다.
“나로선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다 아는 듯한 태도로 나를 추궁하더구나. 마치 내가 너를 시켜서 일부러 네 엄마에게 몹쓸 짓을 하게 한 것이 아니냔 식으로 말이야. 나를 화를 내고 싶었지만, 네 엄마의 야윈 모습을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기까지 말한 아빠는 나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컵에 있는 물을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엄마에게 잠시 시선을 보낸 뒤 창 밖을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미 너도 알 테니 사실 그대로 말하겠다. 난 옷을 벗고 침대에 그대로 누웠다. 그런데, 침대가 젖어 있더구나. 나는 불을 켜고서 이불을 걷었지. 침대 중앙 부위가 흥건하게 타액으로 젖어 있었지. 나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때 내 눈에 방바닥에 있는 정액 한 방울이 보였고, 나는 반사적으로 네 엄마의 소중한 곳을 확인했단다. 예감은 맞았다. 그리고, 그 정액의 주인공이 너라는 것도 직감했다.”
아빠의 말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나는 현기증을 느꼈지만,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왠지 나는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미 도망갈 곳은 없었다. 유전자 검사로 친자확인까지 한 상태에서 다른 변명의 여지가 있을 리 만무했다.
“엄마 재혼에 찬성할 수 없어요.”
갑작스런 내 말에 엄마와 아빠 모두 나를 응시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존칭어를 사용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엄마에게 남자가 필요하다면 내가 그 남자가 될게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엄마가 발끈하며 말을 하려다 삼켰다. 나는 직감적으로 엄마도 이미 오래 전부터 지수의 친 아빠가 내가 아닐까하고 의심했을 것이라 느꼈다. 최근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엄마는 1년 전 그날 직감적으로 지수의 아빠가 나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야만, 1년 전의 그 원인불명의 고열이 이해가 된다.
“이미 아이까지 낳았잖아요. 안 될게 뭐가 있어요?”
순간, 내 얼굴에 물이 날아왔다. 그리고 엄마는 빈 컵을 소리 나게 탁자에 내려 놓고서 밖으로 나갔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지혁아.. 너는 엄마가 이성으로서 좋은 거냐?”
아빠가 차분하게 말을 꺼내었다.
“예…”
나는 그냥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분위기상 그렇게 말해야만 될 것 같았지, 맹세코 난 엄마를 늘 이성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순간의 욕망을 찾지 못하고 사고를 쳤고, 몇 번 불결한 생각을 한 적은 있었지만, 늘 엄마를 상대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다.”
“예..?”
“아까 네 엄마의 행동은 엄마로서의 행동이 아냐.. 여자로서의 행동이지. 이렇게 말하면 네가 나를 이상한 변태로 생각할는지 모르겠다만, 난 상관없다. 네가 네 엄마의 남자가 된다고 하여도.. 한때 너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지만, 그러면서도 왠지 그래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
“하지만, 분명히 이건 알아두어라. 너는 내 아들이고, 네 엄마의 아들이란 사실을.. 그건 네가 네 엄마의 남자가 된다고 하여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네 엄마도 분명 너를 한명의 남자로 인식하고 있을 거다. 어째건 네가 지수의 친아버지란 것 역시 사실이니까 말이다.”
“…….”
“네 엄마 정말 대단한 여자란다. 사업가로도, 어머니로서도, 며느리로서도… 가식적이었건 어째건 이 사실을 알고서도 네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지금까지 생활해 왔으니까 말이다.”
“………”
“이건 내 느낌이다만, 네 엄마. 아마도 1년 전에 너란 것을 알았을 거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버텨온 거지. 하지만, 네 엄마의 연극도 1년이 한계인가보다. 내게 찾아와 네가 얼마나 나쁜 짓을 저질렀는지 말하자고 한 거 보면…”
그리고 아빠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아빠와 내가 밖으로 나왔을 때, 엄마는 이미 먼저 출발한 뒤였다. 어쩔 수 없이 아빠의 차를 타고 오는 동안 아빠와 난 단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수지는 별 탈없이 잘 자랐다.
한때나마, 혹여 내 아이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수지를 멀리했었던 나는 그 날 이후로 다시금 평정을 되찾고서 수지를 동생으로 받아들였다. 수지는 얼마를 많이 닮았다. 큰 눈망울이며, 오똑하니 선 콧날, 갸냘픈 턱선, 시원시원한 팔 다리가 정말 엄마를 많이 닮았다. 그렇게 확연하게 엄마를 닮아가면서, 한때 아빠를 닮았다고 하던 사람들도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째건, 우리 집은 다시금 평화를 되찾았다. 뭐 그렇게 심각하게 외부로 붉어진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저 나만 굳게 입을 다물고, 내 기억에서 그 기억을 완전하게 지워버리면 우리 집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되었다. 아빠는 승진해서 부장이 되었고, 엄마는 다시 외할아버지의 회사로 출근하면서 지극히 평범하게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아빠가 바람을 핀 것이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1학년으로 막 기말고사를 끝낸 시점이었다. 기말고사를 모두 치르고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던 나는 온통 주말 여행뿐이었다. 중간고사를 치르고 난 다음부터 친구들과 계획한 여행이었다.
기차를 타고 정동진의 일출을 보는 것이 여행의 전부였지만, 사실 그 여행이 진짜 목적은 미팅이었다. 시시하게 유흥거리에서 만나서 짝짓기하는 그런 미팅이 싫었던 나는 친구들에게 그런 내 의견을 제안했고, 친구들도 곧 흔쾌히 받아들였다. 물론, 내가 어울리던 친구들은 대부분 수재라 불리는 애들이어서 일종의 어떤 권위의식 같은 것이 있던 애들이었다. 그랬기에 그 애들도 흔히 하는 미팅은 왠지 모르게 천박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물론, 내 생각도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정말 동해안의 일출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홀로 그 곳에 간다고 하면 부모님이 허락을 할 것 같지 않아 친구들을 끌어 들인 거고, 그 여행에 여자가 동참한다면 더 없이 좋을 것은 뻔한 거 아닌가 말이다.
그런 생각만 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들어간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집안 분위기에 어쩌면 여행을 못 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예감했다.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단지, 기분 탓이려니 하고, 엄마의 침울한 표정을 애써 무시하고서 내 방에서 늦은 밤기차를 떠올리며 시험으로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낮참을 청했던 나는 엄마의 다소 높은 말소리에 잠에서 깼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엄마의 목소리는 상당한 노기가 섞여 있었다.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니? 당신이 여자야? 강간이라도 당한 거란 거야?”
“정말이야.. 믿어 줘.. 자고 일어나니까 그 여자가 내 옆에 있었어..”
“그래서?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만난 거라고? 그게 말이 돼?”
“만나주지 않으면 당신에게 말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엄마의 목소리는 낮고 컸다. 터질 듯한 분노가 그 음성에 모두 녹아있는 듯, 단지 듣기만 하는 나마저도 겁이 날 정도였다.
“그 여자가 나 찾아와서 뭐라 말했는 줄 알아?
“그 여자가? 언제…”
아빠는 놀란 듯 반문했다.
“오늘.. 사무실로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더라구..”
“사무실로?”
앵무새도 아니고 아빠는 엄마의 말만 재차 확인했다.
“그래..! 나 보고 이혼 해줄 수 없냐고 했어.”
“……….”
아빠는 말이 없었다.
“자기가 당신 아이를 가졌다면서, 자신은 이미 이혼절차 밟고 있으니 나 보고도 가능한 빨리 이혼 해주었으면 했어.. 하… 하…..”
엄마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했다. 반면에 아빠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엄마의 그 말은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아빠가 바람을 폈다는 사실에 나도 경악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빠에겐 엄마 밖에 없다고 생각한 나는 아빠의 불륜에 머리를 한대 얻어 맞은 듯한 기분에 정신이 멍해졌다.
게다가 아빠의 불륜 상대가 임신까지…
결국 난 여행을 가지 못했다.
아빠는 이웃 동에 사는 여자와 불륜을 저질렀다. 그 여자는 아빠의 직속 부하였는데,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서 아빠 회사에서 8년째 근무를 하고 있고, 남편은 행정고시를 패스한 공무원이었다. 그것만 본다면, 그 여자는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모두 성공한 여자였다. 하지만, 그 부부는 아이가 없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여자의 남편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무정자증 환자였다. 그런 탓에 겉보기에는 화목한 부부처럼 보였을 뿐, 실상은 이미 별거 아닌 별거에 들어 간지 오래였었다. 그런데, 우연히 같이 출장을 갔다가 그만 아빠와 그 여자가 술김에 동침을 하게 되었고, 아빠는 자신의 생식능력이 보통사람보다 약하다는 것만 생각하고 간혹 피임을 하지 않고 관계를 가졌었던 것이다.
엄마는 크게 분노했다.
처음 몇 일은 회사 출근도, 식사도 하지 않았다. 큰소리를 내며 시끌벅적하게 남들처럼 싸우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엄마의 행동은 그 보다 더 무서웠다. 아빠도 아무런 말도 없이 나와 수지의 식사를 챙기며 생활했지만, 표정은 엄마 못지 않게 굳어 있었고,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익살스런 말 같은 것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의 내가 여름 방학을 한 날이었다. 자다가 목이 말라 주방으로 향하던 나는 안방에서 들려오는 엄마와 아빠의 대화소리를 들었다.
“다시 생각해 줄 순 없어?”
아빠의 목소리는 다소 애원조 였다.
“그 여자는 내가 지금 설득하고 있는 중이야…”
“그걸 말이라고 해?”
“우리 이대로 끝낼 수는 없잖아..”
“당신이 자초한 일이야..”
“여보.. 제발…”
“우리 이대로 헤어져.. 그 여자가 아이를 떼어내고, 당신과 헤어진다고 해도… 난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어.”
“그래도 다시 생각을….”
아빠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아빠의 말을 자르면서 엄마가 말을 이었다.
“지난 6개월 동안 당신은 나 아닌 다른 여자를 가슴에 담아 준 사람이야. 그것도 아주 도덕적인 것처럼 위선을 떨면서.. 난 당신이란 사람을 믿을 수 없어. 당신과 마주앉아 있는 지금도 너무 싫어서 소름이 돋을 정도야. 지금 나 최대한으로 참는 거야. 우리 추하게 헤어지진 말자. 그냥 깨끗하게 정리해.. 아이들은 내가 키울께. 당신은 그 여자와 살든 말든.. 알아서 해..”
엄마의 말은 단호했다. 아빠는 말이 없었고, 방에서는 더 이상의 대화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 후,
아빠는 우리와 열흘을 같이 더 살았지만, 결국 열흘 뒤 아빠는 우리 집에서 나갔다. 집을 떠나던 날, 아빠는 지수를 꼭 끌어안고서 한참을 있었고, 나에게는 악수를 청했다.
“엄마 잘 보살펴 드려라..”
아빠는 손에 힘을 주며 그렇게 말했다. 아주 슬픈 눈을 하고서…
그렇게 어이가 없을 정도로 아빠는 쉽게 우리 곁을 떠났다. 엄마는 아빠가 떠나는 모습을 보지 않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으로 다시 출근을 했다.
하지만, 당시 17살이었던 나에게 아빠와의 이별은 꽤 큰 충격이었다. 17년을 같이 한 아빠가 그렇게 쉽게 내 곁을 떠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은 잘 돌아갔고, 이웃들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우리를 대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런데, 불행은 연속으로 찾아온다고 했던가?
아빠가 집을 떠나고, 엄마와 정식으로 이혼을 한지 3개월 가량이 흘렀을 때였다. 주말을 이용해 엄마와 나, 그리고 수지는 할인점으로 쇼핑을 갔다. 원래 할인점 쇼핑에는 아빠가 동행을 하였지만, 아빠가 떠난 후 엄마 곁에는 내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엄마의 쇼핑은 정말 길고도 지루했다. 각 코너에서 이것 저것 꼼꼼히 살펴보고, 따져보았다. 나 같으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을 텐데 말이다.
“엄마 그만 가자…”
“조금만 기다려..”
내 짜증을 엄마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그렇게 받아 넘겼다. 하지만, 난 내 앞가슴에 안겨있는 지수가 여간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양 팔에는 쇼핑으로 산 물건이 잔뜩 들려져 있었다. 혹여 같은 학교 여학생이라도 만난다면 나는 콱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기만을 기도하고 기도 했다.
그런 나를 더 짜증나게 만드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내가 엄마에게 “엄마”라고 부를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왠일이니?”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데, 정말이지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나와 엄마를 부부사이로라도 보는 것일까?
하지만, 엄마는 그렇게 어려 보이지는 않았다. 옷도 아주 세련되게 입고, 깔끔한 화장으로 샤프하면서 섹시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결코 나와 어울릴 정도로 어려 보이지는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현실은 그 것과는 달랐다.
“지혁이 너는 어쩜 그렇게 어른스럽니.. 우리 병수친구라고 해도 믿겠다.”
한 아파트에서 17년을 나를 보아온 반장 아주머니는 자신의 큰 아들과 나를 종종 비교했는데, 그 아주머니의 큰 아들은 나 보다 무려 7살이나 많았다. 평소라면, 그런 말들을 그냥 웃어넘기겠지만, 엄마와 쇼핑할 때 지수를 안고서 그런 생각을 하니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다들 나를 지수의 아빠로 생각하는 것 같고, 엄마를 내 아내 쯤으로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상황을 뒤집어 생각하면,
반대로 엄마가 그렇게 어려 보인다는 것이 된다. 34살의 아줌마를 20대 중반의 아가씨 즘으로 말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난 속으로 꾹 참으며 최대한 엄마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서 엄마 뒤를 따라다녔다.
그런데, 그 곳에서 우린 아빠와 마주쳤다.
아빠는 한 여자와 같이 있었는데, 그 여자는 배도 나와 보이지 않는데 임산부 복을 입고 있었다.
“어…..아빠..”
아빠를 먼저 알아본 나는 아빠를 불렀다. 하지만, 내 말에 아빠도, 엄마도, 그 여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놀란 듯 서로를 응시했다.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엄마였다. 엄마는 아빠와 그 여자를 보면서 가볍게 목례를 했는데, 그것을 받는 것은 아빠 옆에 있는 여자였다.
“쇼핑 왔나보지…”
어색하게 아빠가 말을 꺼내었다.
“예..”
“우리도 쇼핑 왔어.. 집에 찬거리도 떨어지고 해서 말이야..”
“예.. 그랬군요.”
엄마는 이상하게 아빠에게 존칭어를 썼다.
“많이 샀어?”
아빠는 내 양 손에 가득 들려있는 쇼핑백을 보았으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예.. 거의 다 샀어요. 이제 들어가려 구요.”
“응… 우린 막 나왔어. 이 사람이 해물탕을 해먹자고 해서 막 그 쪽 코너를 나오는 길이야..”
아빠의 말은 뭔지 모르게 어색했다. 내 기억대로라면 아빠가 말하는 “이 사람”은 엄마여야만 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엄마와 그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엄마는 태연해 보였다. 마치 미리 예상이라도 한 사람마냥 정해진 말과 표정을 지어내 보이는 것 같았다. 그에 반해 아빠 옆에 있는 여자는 당황한 눈빛이 역력했다. 처음 엄마와 아빠의 말을 들었을 때라면 아주 당차고 야무져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순정파적인 모습이 전신에 가득했고, 상당한 미인형의 얼굴에 눈매가 보름달을 연상하게 했다. 나는 다소 얼떨떨 했다. 얼굴도 보지 못했었지만, 난 아빠를 뺏어간 그 여자를 사실 증오하고 있었는데, 막상 실제로 보니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보호해주고 싶은 충동이 일만큼 약해 보였다.
“그랬군요. 지금 6개월쯤 되었겠네요?”
아빠에게 가볍게 답하고는 엄마는 그 여자에게 말을 건네었다.
“예…”
“한창 먹고 싶은 게 많을 때죠. 많이 해 달라고 하세요.”
“예…”
그 여자는 죄송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엄마에게 목례까지 하며 답했다. 정말 선이 가는 여자였다. 평소 엄마의 선이 가늘고 시원스럽다고 느꼈는데, 그 여자에 비하면 엄마는 되려 선이 굵은 편이었다. 그런데 가늘어도 너무 가늘었다.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말이다.
“그럼 이만…”
엄마는 여자의 목례에 답하듯 같이 목례를 하고는 아빠와 잠시 눈을 마주친 후 나에게 가자는 눈짓을 했다.
아빠와 헤어진 후 첫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난 아빠와 한 마디의 대화도 못 나누었고, 아빠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엉겁결에 엄마를 따라 아빠와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아빠와 이야기도 못했다면서 투덜거렸지만, 엄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난 엄마에게 그렇게 냉정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그 냉정한 모습은 채 1주일이 가지 않았다. 1주일 후 엄마는 창백하게 질려서 집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엄마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고, 몸에 모든 힘이 빠진 듯 위태위태했다.
그날 엄마는 심하게 앓았다.
병원 의사가 왕진을 하고, 외할머니가 급하게 달려왔지만, 도무지 40도를 육박하는 고열은 가라앉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난 나는 나도 모르게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아빠의 반응은 의외로 차분했다.
“괜찮아… 곧 괜찮아 질 거야… 걱정 말거라..”
아빠의 말은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엄마는 1주일을 더 앓으며 사경 헤매었다.
그 후 다시 아빠를 만난 것은 1년 뒤였다.
1년 사이 엄마는 외할아버지 회사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부상하면서 무척이나 바빠졌다. 원래는 엄마의 오빠인 외숙부가 후계자였으나, 학문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외숙부는 결국 40세의 나이에 학문의 길로 들어서면서 가업을 포기했고, 엄마의 남동생은 일찌감치 판사의 길을 걷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다른 이모들은 그냥 평범한 주부로서의 삶을 살고 있어서 외할아버지의 후계자로 엄마가 지목이 되었던 것이다.
엄마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만 매달렸던 덕에 엄마의 회사는 1년 동안 매출이 2배로 성장하고, 이익은 4배로 증가하면서 급성장 가도를 달렸다. 나는 엄마에게 그렇게 열정적인 모습이 있으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다. 엄마는 일이 재미있다고 했지만, 늘 얼굴은 피곤에 지쳐있었고, 밤 늦게 퇴근하는 날은 나와 지수의 안부를 살피기는커녕 옷 입은 채로 그대로 침대에 쓰려져 잤다.
일도 좋지만 엄마의 모습은 너무 안쓰럽다 못해 가슴이 아팠다.
“엄마 쉬어가며 해…”
“괜찮아… “
내 말에 엄마는 찡긋 윙크를 하면서 그렇게 넘겼다. 그러나 그런 엄마의 뒷 모습은 그리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1년 전보다 10kg은 빠진 듯 엄마는 더없이 가냘퍼 보였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일에 매달리는지 나로선 이해가 안되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엄마를 도울 수 있는 다른 것이 있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아빠가 집으로 불쑥 찾아왔다.
“어 아빠….”
나는 반가움과 당황스런 느낌으로 아빠를 불렀다.
“그래.. 잘 지냈니?”
“응.. 아빠는 어때?”
“나도 잘 지냈지.. 엄마 계시니?
“응 안방에 있어…”
“그래…”
나는 아빠의 대답을 뒤로하고 급히 안방으로 달려가 아빠의 방문을 엄마에게 알렸다. 그런데, 엄마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 날,
아빠와 엄마는 안방에서 한 참을 이야기 하고서는 나에게 다음 주에 보자는 말만 하고 그대로 가셨다. 모처럼 만난 아빠와 많은 이야기를 기대했던 나는 적잖이 실망했지만, 어쩌랴. 아빠에게도 이제 나름의 가정이 별도로 있으니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나에게 닥칠 일을 짐작도 못했다. 그저 내게 있어 일상은 지리 할 만큼 따분한 공부의 연속선 상에 존재했다. 눈뜨고, 눈을 감을 때까지 내 고민의 전부는 공부와의 전쟁 그 자체였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중학교 때처럼 공부해서는 상위 1%안에 들 수 없었을 뿐더러, 전국단위의 모의고사에서 1%에 들기가 매우 힘들었기에 엄마와 쇼핑하거나, 지수를 돌봐주는 일 외에는 나는 늘 책을 붙들고 살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훌쩍 지나가고, 다시 일요일이 되었다.
“지혁아.. 가자..”
“응…. 근데 지수는?”
“아주머니가 돌볼 거야..”
“그럼 엄마와 나랑만 가는거야?”
“그래…”
“아빠랑 만나는 거 아냐?”
“맞아..”
“근데 왜 지수는 안 데리고 가?”
“다음에 데리고 가자 오늘은 너랑 네 아빠랑만 만날 거야..”
“그럼 나도 안 갈래..”
“안돼…”
“나도 안가.. 그냥 엄마 아빠 둘이서 만나..”
“안돼! 너도 가야만 하는 자리야..”
“………”
엄마의 단호한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엄마를 따라 나섰다.
엄마와 함께 도착한 곳은 시외의 한적한 한정식 집이었다. 실내 장식이 아주 고급스러웠지만, 음식가격은 평범한 샐러니맨은 엄두도 못 낼 만큼 비쌌다. 그 음식집은 모두 룸으로만 되어 있었는데, 방과 방 사이가 임시칸막이가 아닌 벽돌로 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건축한 듯했다.
“아빠….”
엄마와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아빠는 와 있었다.
“그래.. 어서 오너라..”
“일찍 오셨군요..”
내가 미처 아빠의 말에 대답할 새도 없이 엄마가 먼저 말하면서 아빠의 반대편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 공부는 여전히 잘 한다며?”
내가 자리에 앉자 아빠가 말을 건네었다.
“뭐 그럭저럭 하고 있어요..”
“전교에서 1등을 한다면서 그게 그럭저럭이냐… 하하하…….”
“항상 1등은 아닌 걸요 뭐.. 어쩌다 한번씩 하는 게 무슨…”
나는 쑥스러워 뒷 머리를 극적이며 답했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 이 아빠는 고등학교 때 1등은 한번도 못 해봤는데…”
“정말요?”
아빠가 공부를 잘했다는 말만 들었던 나는 아빠의 말에 다소 놀랐다.
“아무래도 넌 나보다는 네 엄마를 많이 닮았나 보구나. 네 엄마는 고등학교 때 이 아빠와 다투었을 때를 빼고는 줄곧 1등만 했었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요.”
엄마가 아빠의 말을 끊었지만, 싫지는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엄마가 아빠의 말을 끊은 것은 아마도 고등학교 때 나를 임신하여 출산했다는 말이 나올까 해서 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어째건, 우리는 가벼운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지수가 참석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시 엄마, 아빠와 식사를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나는 무척이나 즐거웠다.
하지만, 식사가 끝나고 차가 나왔을 때,
나는 청천벽력 같은 엄마 아빠의 말에 하마터면 정신을 잃고서 기절할 뻔 했었다. 아빠는 먼저 엄마의 재혼이야기부터 꺼내었다.
“지혁아.. 이제 너도 다 크고 했으니 이해할 거라 믿는다.”
“예…”
“네 엄마.. 언제까지 혼자 살 수는 없지 않니?”
“예..?”
“네 엄마도 이제 재혼을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너무 놀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까지 엄마는 물론이고, 외가 가족 모두가 그런 내색을 한번도 하지 않았었기에 나로선 황당했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너는 이 아빠와 살아야 될 것 같다. 너도 알 듯 너는 우리집 장손이다. 언제까지 제사에 참석 안 할 수는 없단다. 지금까지는 이 아빠가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했지만, 이제는 때가 된 것 같다.”
“…….”
아빠의 말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난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아빠의 집은 지금 사는 곳과 너무나 멀었다. 즉, 나로선 전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네 엄마 다음 주에 선 본다. 이미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 아마 빠르면 1달 안에 결혼을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네가 그 분하고 지내는 것보다 나랑 지내는 것이 낳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싫어요..”
나는 일단 거부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말이다.
“이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다.”
“무슨 말이야?”
“네 엄마가 너를 불편하게 생각해..”
“예…?”
갑작스런 말에 나는 멍한 느낌을 받았다. 엄마가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다. 내가 엄마를 불편하게 한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던 나는 멍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그런 나를 이해해달라는 듯한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고는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아빠는 탁자 위로 서류 봉투 하나를 내려 놓았다.
나는 말없이 아빠를 바라보았다.
“이건 내 혈액형과 지수의 유전자 검사 서류란다.”
순간, 내 머리 속으로 번개처럼 어떤 사건이 스쳐 지나갔다. 끝장이란 생각과 함께… 그래도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계속 이어지는 아빠의 말을 들었다.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이 사실만은 끝까지 숨기고 싶었단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네 엄마에게 거짓말을 해가면서까지 숨기려고 했지만, 네 엄마가 내 혈액형을 알아버렸다.”
그렇게 시작된 아빠의 말은 장황하게 계속 이어졌다.
요약하면, 1년 전 엄마는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아빠와 사는 여자와 다시 마주쳤는데, 그 때 그 여자는 복부에 통증을 호소하고 있어서 엄마는 그 여자를 데리고 산부인과로 갔었다. 그리고 그 병원에서는 엄마는 아빠의 혈액형이 정상적인 AB형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사실은 곧 지수의 존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되는 것이었다. 아빠 외에 다른 남자를 접한 적이 없는 엄마는 지수가 다른 아이와 바뀐 것이 아닐까 의심을 하게 되었고, 아빠의 친구분이자 엄마가 지수를 출산한 산부인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 곳에서 엄마는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건 아빠의 부탁으로 엄마를 비롯하여 다른 가족들에게 아빠의 혈액형이 변이 AB형이라고 말한 것이다. 엄마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고, 엄마의 전화를 받은 아빠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엄마에게 사실대로 털어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빠는 내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막연하게 엄마에게 다른 남자가 있기를 바랬었다고 했는데, 아빠 외에 다른 남자가 없는 엄마로선 더 없이 혼란스러워 했다. 그러다, 엄마는 직감적으로 3년 전의 그 일을 말하며, 혹시 술에 취해 잠자고 자신에게 섹스 한 거 맞는지 물어보았다. 아빠는 맞다고 딱 잡아 떼었고, 그날부터 엄마는 1주일을 앓았다고 한다.
엄마로선 완전히 동정녀 마리아처럼 임신을 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엄마가 누군가에게 자신도 모르게 강간을 당했다는 것 밖에 안되었다. 그 후로 엄마는 미친 듯이 일을 했다. 하지만, 여자의 직감은 그렇게 쉽게 사그러 들지 않는 법, 언제부터인가 지수가 아들인 지혁과 자신을 닮았다는 소리를 들은 엄마는 자신과 나의 머리카락 그리고 지수의 머리카락을 유전자 검사소에 보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 전에 나와서 아빠를 다시 찾아 갔고, 그때에서야 아빠는 3년 전의 일을 실토한 것이다.
“나로선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다 아는 듯한 태도로 나를 추궁하더구나. 마치 내가 너를 시켜서 일부러 네 엄마에게 몹쓸 짓을 하게 한 것이 아니냔 식으로 말이야. 나를 화를 내고 싶었지만, 네 엄마의 야윈 모습을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기까지 말한 아빠는 나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컵에 있는 물을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엄마에게 잠시 시선을 보낸 뒤 창 밖을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미 너도 알 테니 사실 그대로 말하겠다. 난 옷을 벗고 침대에 그대로 누웠다. 그런데, 침대가 젖어 있더구나. 나는 불을 켜고서 이불을 걷었지. 침대 중앙 부위가 흥건하게 타액으로 젖어 있었지. 나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때 내 눈에 방바닥에 있는 정액 한 방울이 보였고, 나는 반사적으로 네 엄마의 소중한 곳을 확인했단다. 예감은 맞았다. 그리고, 그 정액의 주인공이 너라는 것도 직감했다.”
아빠의 말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나는 현기증을 느꼈지만,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왠지 나는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미 도망갈 곳은 없었다. 유전자 검사로 친자확인까지 한 상태에서 다른 변명의 여지가 있을 리 만무했다.
“엄마 재혼에 찬성할 수 없어요.”
갑작스런 내 말에 엄마와 아빠 모두 나를 응시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존칭어를 사용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엄마에게 남자가 필요하다면 내가 그 남자가 될게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엄마가 발끈하며 말을 하려다 삼켰다. 나는 직감적으로 엄마도 이미 오래 전부터 지수의 친 아빠가 내가 아닐까하고 의심했을 것이라 느꼈다. 최근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엄마는 1년 전 그날 직감적으로 지수의 아빠가 나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야만, 1년 전의 그 원인불명의 고열이 이해가 된다.
“이미 아이까지 낳았잖아요. 안 될게 뭐가 있어요?”
순간, 내 얼굴에 물이 날아왔다. 그리고 엄마는 빈 컵을 소리 나게 탁자에 내려 놓고서 밖으로 나갔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지혁아.. 너는 엄마가 이성으로서 좋은 거냐?”
아빠가 차분하게 말을 꺼내었다.
“예…”
나는 그냥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분위기상 그렇게 말해야만 될 것 같았지, 맹세코 난 엄마를 늘 이성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순간의 욕망을 찾지 못하고 사고를 쳤고, 몇 번 불결한 생각을 한 적은 있었지만, 늘 엄마를 상대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다.”
“예..?”
“아까 네 엄마의 행동은 엄마로서의 행동이 아냐.. 여자로서의 행동이지. 이렇게 말하면 네가 나를 이상한 변태로 생각할는지 모르겠다만, 난 상관없다. 네가 네 엄마의 남자가 된다고 하여도.. 한때 너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지만, 그러면서도 왠지 그래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
“하지만, 분명히 이건 알아두어라. 너는 내 아들이고, 네 엄마의 아들이란 사실을.. 그건 네가 네 엄마의 남자가 된다고 하여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네 엄마도 분명 너를 한명의 남자로 인식하고 있을 거다. 어째건 네가 지수의 친아버지란 것 역시 사실이니까 말이다.”
“…….”
“네 엄마 정말 대단한 여자란다. 사업가로도, 어머니로서도, 며느리로서도… 가식적이었건 어째건 이 사실을 알고서도 네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지금까지 생활해 왔으니까 말이다.”
“………”
“이건 내 느낌이다만, 네 엄마. 아마도 1년 전에 너란 것을 알았을 거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버텨온 거지. 하지만, 네 엄마의 연극도 1년이 한계인가보다. 내게 찾아와 네가 얼마나 나쁜 짓을 저질렀는지 말하자고 한 거 보면…”
그리고 아빠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아빠와 내가 밖으로 나왔을 때, 엄마는 이미 먼저 출발한 뒤였다. 어쩔 수 없이 아빠의 차를 타고 오는 동안 아빠와 난 단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추천60 비추천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