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판타지] 세자르씨의 유쾌한 전원생활 20
19.
부장들과의 짧지만, 자신에게 결코 짧게 만은 느껴지지 않은 회의를 끝낸 세자르는 중앙막사 뒤쪽에 있는 이자벨라의 막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두 여자의 처소만큼이나 크고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그 막사 앞에 도착한 세자르는 곧 자신의 처지에 크게 한숨을 쉬고는 결심을 굳혔는지 시종을 통해 고한 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막사 안은 세자르가 예상한 것 보다는 훨씬 수수한 편이었다. 클로에의 막사마냥 화려하게 치장했거나, 아이린처럼 서적이나 신기한 마법도구들로 그 안을 가득 채운 것이 아닌, 군인답게 철저히 필요한 것만 놓인 덕분에 그 안은 다른 두 여자의 막사보다 훨씬 넓게 느껴졌다. 하지만, 거기 놓인 가구 하나하나의 값어치는 자신의 년 수입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값비쌀 것임을 세자르는 직감하고 있었다.
이자벨라는 그 한가운데 위치한 업무용 책상에 앉아있었다. 좀 전까지 입고 있던 갑옷은 옆에 있는 거치대에 걸쳐놓고, 간편한 실내복 차림으로 붉은 색 세단으로 장식된 푹신한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자신의 검 ‘하얀 섬광’을 천으로 닦으면서 손질하고 있던 이자벨라는 세자르가 탁자 앞에 다가가자 고개를 들어 세자르를 바라보았다.
“예상보다 일찍 왔군.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인원이 별로 없다보니 당장 정해야 하는 사안들이 생각 외로 적더군요.”
“너무 대충 하고 끝낸 것 아닌가? 부장들이 잘 안 따라 주던가?”
“그런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들도 군인인데 그 정도는 다들 납득하고 넘어가더군요.”
“그래? 그럼 보고해봐.”
이자벨라는 광이 나게 잘 닦은 검을 칼집에 넣고는 갑옷이 놓여있는 거치대에 걸쳐놓았다. 그리고 다리를 꼬고 의자에 기댄 편한 자세로 세자르를 바라보았다. 세자르는 그런 이자벨라의 시선에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똑바로 서서 새로운 인원 편성과 조장들의 배치, 부대 운영에 대해 보고하기 시작했다. 이자벨라는 보고에 대해 별다른 말없이 가끔 고개만 끄덕이면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렇게 세자르가 짤막한 설명을 끝내자, 이자벨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좋아. 깔끔하군. 그대로 하도록. 근데 더 할 말이 남았나?”
그 말에 세자르는 침을 한 번 삼키더니 결심한 듯이 다음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가?”
“저를 총 지휘관으로 임명하신 좀 전의 말씀을 제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이유로?”
“전 고용된 용병입니다. 정규군도 아닌 제가 군 전체를 통솔한다고 하면,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입니다.”
“그건 허가할 수 없군. 그 이유는 아까 회의에서 검토한 걸로도 충분할 텐데?”
“하지만 제 자신이 그런 중요한 직책을 맡은 경험도 충분치 않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자신이 없습니다. 다른 방안을 생각해 보심이.......”
“난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세자르. 지금 여기에 남아있는 자들 중에서 자네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어.”
“그건 충분한 이유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같이 신분이 낮은 자가 왕국의 정예군과 다름없는 백작님의 군대를 지휘한다는 것은 백작님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일 겁니다.”
“그래서, 자넨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기꺼이 앞에 나서긴 커녕, 혼자 살겠다고 뒤로 빠지겠다는 건가?”
“굳이 부인은 않겠습니다. 누구라도 하나 뿐인 목숨은 소중하니까요. 하지만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은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는 겁니다. 백작님의 군대를 통솔하기엔 제 능력이 많이 모자란다는 것이지요. 여기 모두가 다 같이 죽으러 돌아다닐 순 없는 것 아닙니까?”
“이거 좀 실망인데.”
그 말과 함께 이자벨라는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책상 옆을 돌아 세자르가 서있는 앞쪽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곤 세자르를 마주보는 자세로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좀 더 가까워지자 세자르는 이자벨라에게서 살랑살랑 펴져오는 향긋한 체취와 함께 하얀 웃옷 너머로 희미하게 비치는 검은색 브래지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위로 특유의 얼음송곳 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자벨라의 눈동자는 그런 세자르의 기분을 싹 가 더욱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잠시 동안 세자르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이자벨라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왕국사관학교 전술과목 최초의 만점 졸업자. 전설적인 첼로시니 전투에서의 빛나는 승리의 주역. 항상 영광과 찬사가 끊이지 않던 불패의 젊은 천재 지휘관. 과연 그런 자보다 더 자격 있는 사람이 지금 여기 있을까?”
“무, 무슨 말씀이신지.......”
“이렇게 어려울 땐 서로 도와주는 게 친구사이 아닌가? 그렇지 않은가, 세자르?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군. 전 국왕의 외척이자 세르빌리아 지방의 영주였던 보두앵 바자르 백작의 아들, 세바스티앙 바자르.”
그 말을 듣는 순간, 세자르는 자신의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이번 탐사에서 가장 우려했던 일이 방금 터진 것이었다. 하지만 세자르는 애써 표정을 숨기면서 말했다.
“저, 백작님, 사람을 잘못 알아보신 듯 합니다.”
그런 세자르를 바라보면서, 이자벨라는 처음으로 사람다운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거짓말엔 서툴군, 세바스티앙. 이럴 땐, 사람을 잘못 봤다고 하기보단 그게 누구냐고 물었어야 의심을 안사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군요.”
“아직도 시치미 때는 건가? 그런 농담은 철지난지 꽤 됐는데.”
이자벨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세자르 주위를 돌면서 말했다.
“너는 내가 고용하는 사람의 신상도 제대로 조사 안했을 줄 알았나? 그렇다면 나를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거 갰군. 아니, 안일하게 생각한 게 맞겠지. 내 앞에서 버젓이 성과 이름만 줄인 세자르라는 가명을 쓰고 다니는 걸 보면 말이야.”
“그, 그게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난 네가 로스넬 전투에 참가했던 것도 다 알고 있어. 나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하루 종일 투구를 쓰고 다니던 것도 기억나는군. 하긴 그 땐 둘 다 아직 젊었으니까 얼굴만 봐도 금세 알아봤을 거라 생각한 거겠지. 때문에 용병단에 이번 일을 의뢰할 땐, 일부러 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어. 너를 끌어 드리려면 이 방식이 가장 확실해 보였지. 너희 단장은 돈다발을 안겨주니 얼씨구나 하면서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잘 따르던데.”
이제 이자벨라는 세자르 옆을 바짝 돌아 나오면서 세자르의 면도한 자국이 선명한 푸르스름한 빰과 턱선을 손가락으로 쓰윽 건드리며 속삭였다.
“그동안 네 정체를 숨기겠다고 일부러 수염도 기르고, 허름한 복장으로 돌아다녔던 모양이더군. 한데 여자입장에서 말하자면, 너는 확실히 면도한 얼굴이 더 잘 어울려. 이 멋진 턱선이 들어나니 훨씬 보기 좋잖아. 단장한테 얘기해서 그 지저분한 수염을 싹 밀게 한 보람이 있었어. 한눈에 알아보기도 쉽고 말이야.”
세자르는 그 말에 속으로 괜스레 자크가 원망스러워졌다. 그러는 동안 세자르 앞으로 돌아온 이자벨라는 세자르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며 말했다.
“솔직히 로스넬 전투 이후 12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어 기뻐. 너도 참 동안이야.”
“백작님, 사람을 잘 못 보셨습니다. 전 백작님이 아는 사람이 아닌 그저 일개 용병일 뿐입니다.”
세자르의 계속되는 부인과 태평해 보이는 태도에 이자벨라는 맥 빠진다는 듯이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게 나온다면 할 수 없지. 네가 계속 인정하지 않겠다면, 내 병사들에게 용병들을 공격하라고 명령할 수 밖에.”
세자르는 그 말에 순간 흠칫했다.
“용병단을 공격한다고요? 제정신이십니까? 이 시점에서요? 그럼 탐사가 제대로 진행되겠습니까? 용병들 없이는 여길 살아서 탈출하기도 힘들 텐데요.”
“아니, 너도 아까 들었으면 금방 눈치 챘을 텐데. 요정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남은 관문은 하나. 그 정도면 내 병사들로도 충분해. 오히려 걱정할 쪽은 내가 아니라 너야.”
“지금 용병단은 백작님의 병사들보다 수적으로 우위에 있습니다. 상대가 가능할까요?”
“수적 우위가 반드시 전투의 우위로 이어지지 않는 것 정도는 너야말로 잘 알고 있을 텐데. 이래봬도 내 병사들은 그동안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베테랑들이야. 비록 여기 유적에 들어와 개고생을 하고는 있지만, 처음 접하는 함정이나 괴물들을 상대하는 것과 평범한 군인들을 상대하는 것은 얘기가 다르지.”
이자벨라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아무리 백작의 군대가 지치고 인원이 모자란다 하지만, 이곳에서 백병전을 벌인다면, 전투경험과 훈련량에서 용병들이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을 것임은 불 보듯이 뻔했다. 세자르는 지금 구석에 몰린 입장에서 자신과 용병들의 운명에 대해 재빨리 판단을 내려해야 했다.
“네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더 이상의 이야기는 시간낭비 같군.”
이자벨라는 사람을 부르기 위해 막사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세자르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세자르는 뭔가가 눈에 띠었다. 이자벨라의 갑옷과 칼은 모두 책상 건너 거치대에 놓여있었다. 이자벨라는 지금 완전히 비무장 상태였다.
“거기 밖에 누구 없, 으, 으으읍.”
세자르는 이자벨라의 뒤쪽 바짝 붙어서 한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에 든 단검을 이자벨라의 목에 갖다 대며 속삭였다.
“쉿. 조용히 해! 입 다물면 해지지는 않아, 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