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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번역] La Hache - 상편

La Hache (상편)
 

 

 
  아르노 요새는 해가 중천에 떴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분위기에 휩싸여있었다.
  갑옷으로 몸을 감싼 파수꾼도, 상처 입은 육체를 붕대로 가리고 있는 이도, 방어구랑 무기에 달라붙은 피랑 진흙을 떼어내는 이도, 한결 같이 패배의 과도한 무게에 머리가 짓눌려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다. 프란츠는 그렇게 생각했다. 서전에서 전군의 4할 넘는 수를 잃고 그에 더해 지휘관인 빌란 백(伯) 가스파르가 전사했다는 대패배 뒤에는. 하물며 그게 적장의 화려한 전술 이전에 지휘관의 미련한 작전에 의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들은 소식에 따르면 빌란 평원에 전개하고 있던 『소수의』 적군에게 도발 같은 문건이 전해져 그것을 보고 격노한 빌란 백이 각개격파의 호기라 보아 빌란 성을 나와 출격했는데, 눈치채보니 대군에게 둘러싸여 포위섬멸 당했다던가…. 군무에 썩 자세하지 않은 프란츠가 봐도 눈 뜨고 볼 수 없는 실책이었다.
  자기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프란츠는 생각했다. 빌란 성을 방기하고 이 곳 아르노 요새에 전군을 모아… 어찌되었든 간에 탁상공론이며 그에게 그 권한이 없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는 사고였지만.
  프란츠는 하늘로 떠나버린 고인에게 생각이 닿아 중얼거렸다. 그는 고인의 사람됨을 잘 아는 입장이었다.
 

  "여하간 신경질적에다 격발하기 쉬운 분이셨지…. 거기에 주위에 그 점을 충고할만한 사람을 두고 싶어하지 않았으니 어느 면으로 보아 이 결과는 당연한가."
 

  아르노 요새에 현재 농성하고 있는 병사들 중 실제로 적군과 창을 섞었던 고(故) 빌란 백 휘하의 병졸은 소수. 그만큼 참패였던 것이다. 후방 부대로서 전장에 향하고 있던 에놈 백 구스타프의 군세가 역으로 각개격파 당하지 않았던 것도 구스타프가 대군에 두려움을 느껴 온힘을 다해 아르노 요새에 도망간 것과, 적군이 어찌된 영문인지 쫓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불과하다.
  어찌되었든 간에 개전 전과 비교해 반수가 되어버린 군세로 병력이 거의 줄지 않은 적군과 지금부터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질 싸움이 눈에 뻔한 상황에서 병사의 사기도 오를 턱이 없다. 도망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지만 그 부분은 구스타프의 측근인 『충신』들이 병사들을 잘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프란츠는 한숨을 쉬고 뒤집어쓰고 있던 깃털 달린 모자로 가볍게 부채질했다. 덥지야 않지만 주위의 싫은 분위기를 쫓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기사 부채질해서 나오는 것도 주위의 싫은 분위기였지만.
  그런 프란츠를 원망스러운 듯한 눈으로 보는 병사가 있었다. 그 시선에 눈치채려는 차에 그 병사는 확 시선을 피했다.
 

  "뭐, 그들 입장에서 보면 나도 동류인가."
 

  프란츠는 이번엔 내심으로 한숨을 쉬었다. 화려하지야 않으나 전장에선 희한한 고상한 차림새. 프란츠는 그런 식의 차림새가 당연한 특권 계급에 속해있었다. 왕족이라는 이름의 ,그들을 손가락 하나로 사지로 내몰아버릴 수 있는 특권 계급에.
  모자를 고쳐쓰고 시선을 피하듯이 돌로 만들어진 복도를 걸어가자 나무 문이 그를 맞이했다. 안에서는 뭔가 미친 듯이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츠는 그 문을 열었다.
  넓은 홀에는 앉아있는 남자가 한 사람, 그리고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한 팔에 투구를 안은 기사가 몇 명 서있었다. 앉아있는 남자의 앞에 있는 탁자에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갖가지 요리와 술이 비치되어있어, 옆도 보지 않고 음식을 열중해서 집어먹고는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마구잡이로 고함치면서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명백하게 초조해하고 있었다. 공황에 빠져있군. 프란츠는 그렇게 간파했다. 그는 닥쳐오는 공포를 잊기 위해서 폭식과 폭음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알겠느냐, 병사들에게 고해라! 졸병 하나라도 살아돌아가려들다니 이는 용서치 않는다! 이 아르노에서 고국을 지키기 위한 방패가 되는 것이다! 도망치지 마! 싸워! 그리고 죽어!"
 

  하는 소리야 버젓하지만, 이래서야 설득력이 없다…고 프란츠가 생각했을 때, 그가 홀에 들어온 것을 남자들이 알게 되어 방은 일단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남자도, 기사들도 한결 같이 프란츠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프란츠는 대강 예를 취해 모자를 벗긴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인사를 늘어놓았다.
 

  "형님, 아니 에놈 백작님. 프란츠, 공(公)의 명에 따라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흥, 프란츠냐. 5년만이라 해야되려나. 이런 곳까지 무슨 용무냐."
 

  술에 찌든 숨을 뱉으면서 에놈 백 구스타프, 즉 그의 형이 밉살스럽단 듯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프란츠가 둘째 형 구스타프와 만나는 건 5년만인데, 원래부터 통통한 형이었지만 5년 사이에 허리 둘레와 목 둘레가 어지간히도 커져있었다. 수염도 머리카락도 멋대로 기르고 멋대로 흐트러뜨렸으며 난잡하게 식사에 달려들다보니 수염은 이런저런 음식으로 더러워져있었다. 그 나름대로 깔끔하게 굴고 있는 프란츠와는 정반대였다.
 

  "아바마마는 아르노로 부임해 군의 일부를 이끌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네 놈 같은 애송이가 군대를 이끌 수 있겠나. 우습구나."
 

  프란츠의 말을 가로막고 구스타프가 매도하듯이 말을 퍼부었다.
  확실히, 프란츠에게 애송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는 건 본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피부는 하얀데다 손발도 가늘고,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단정한 용모를 하고 있는 프란츠였지만 전장에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요소였다. 마을처녀에겐 호감받겠지만 병사의 신뢰를 얻기엔 미덥지 않았다.
  그리고 프란츠는 구스타프가 자기 권한이 다른 사람에게 침범 당하는 것을 싫어하고 있으며, 그 이상으로 프란츠 자신의 존재를 싫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당초부터 이렇게 말하고 물러날 셈이었다.
 

  "말씀하시는 대로입니다. 저는 병졸 하나도 이끈 적이 없지요. 전술의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하옵기에, 형님께 전부 맡기려 하는 바인데……"
 

  "제 분수를 알고 있구나. 허면 냉큼 돌아가라. 여기는 너 같은 병아리가 얼쩡거릴 곳이 못된다."
 

  웃기 시작한 구스타프에 맞추듯이 주위의 기사들도 웃었다. 프란츠는 이를 굴욕으론 생각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내심 웃어줘야만 할 기사들에게 동정했다.
 

  "하오나, 한 가지 청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만."
 

  "뭐냐. 일단 들어는 주마."
 

  "지금부터 빌란에 가서 적장과 교섭을 행하고 싶습니다."
 

  "교섭이라고?"
 

  의심스러운 듯이 되묻는 형을 무시하는 것 같이 프란츠는 진언을 계속했다.
 

  "예. 교섭으로 시간을 벌 수 있으면 군의 재편도 할 수 있고, 그리하면 이길 기회도 늘어날까 싶으니…"
 

  "네 이놈. 우리 군이 진다고라도 생각하는 거냐!"
 

  눈에 핏발을 세우며 침과 음식찌꺼기를 튀기면서 구스타프가 탁자를 내려치고 일어섰다. 와인을 가득 채운 포도주잔이 그 바람에 쓰러져 탁자에서 바닥 쪽으로 붉은 폭포를 만들었다.
  막 참패한 직후잖아. 프란츠는 그리 생각했지만 상대를 자극할 말을 해봤자 이득될 게 없다며, 되도록 냉정하게 말을 받았다.
 

  "……아니요. 그렇지야 않습니다만 어찌되었든 우리 군에겐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을 들이면 적군의 양식은 부족해질 것이요, 이웃나라의 원군도 기대할 수 있겠지요. 그리 되면 적을 무찌르는 것도 용이하지 않을른지요."
 

  프란츠는 생각도 안한 추측을 늘어놓았다. 빌란 성이 적의 손에 떨어진 이상 보급은 쉬울테니 필경 적은 이미 외교를 통해 이웃나라에 우리 편으로의 참전을 견제하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이득에 밝은 군주라면 견제가 아니라도 우리 편을 드는 건 득책이 아니라고 판단할 터. 멸망해가는 공국과 동반자살해야만 되는 이유 따위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탁한 눈을 한 구스타프는 쓰러지고 만 와인잔을 잡았다가 내용물이 비었다는 걸 눈치채자 그것을 내던졌다. 그리고 뚜껑이 따인 와인 병을 손에 쥐고는 직접 와인을 목에다 부어넣고 술냄새 나는 숨을 하나 뱉고 나서, 프란츠를 가리키면서 답했다.
 

  "흥, 뭐 상관없겠지. 마음대로 해라. 허나 어디까지나 내 명령으로 간 것이다. 그 점을 명심하도록. 이 곳의 지휘관은 어디까지나 여기 있는 나다. 알고 있겠지, 프란츠. 그리고 네가 붙잡혔다 한들 구하러는 못 간다고 알아라."
 

  다시 말해, 공적은 자기 것. 실패하면 맘대로 죽어, 라는 소리였다. 프란츠는 욕망에 찌든 형다운 말버릇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걸로 목적은 달성했기에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반드시 성공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호위의 기사를 2명쯤 빌리고 싶습니다만……."
 

  "이 위급한 때에 기사를 내놓으라고……? 뭐 상관없겠지. 마침 오르몬가(家)의 형제가 있었지. 그들을 네게 붙이마. 이제 됐겠지? 냉큼 물러가라. 나는 바쁘니라."
 

  그리 말하고나자 형은 다시 눈 앞의 닭고기에 달라붙었다.
  프란츠는 가볍게 목례하고는 홀에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이거야 원, 답이 없는 형님이셔……."
 

  그렇다고는 해도 회견의 본래 목적인 『호위할 기사를 빌린다』는 것에는 성공했다. 프란츠에게 검 실력이 있었다면 이런 곳에는 들르지 않고 단독으로 빌란으로 향했을 테지만, 공교롭게도 하늘은 그에게 그 방면의 재능을 주지 않았다. 따라서 빌란까지의 호위가 필요했던 것이다. 교섭에 이르기 전에 객사해버려서야 아무 의미도 없다.
  싸워선 안되는 상대와 싸워버렸다. 프란츠는 그리 생각했다. 적군은 싸운 상대는 용서치 않지만, 항복한 상대에겐 관대하게 대한다고 들었다. 애초부터 군사에 힘을 쏟지 않았던 우리가 싸워서야 안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전력을 잘못 보고 자기만족으로 군을 움직인 형들이 모조리 박살내고 말았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 이상의 병사 및 민중의 희생을 내지 않기 위해서도 프란츠는 빌란으로 향해야만 했다. 그에겐 승산이 있었다.
 

  "하기사 운 좋으면 봉잡는다 정도라지만 말이지…."
 

  어깨를 으쓱이며 자중하듯이 중얼거린 프란츠의 말은 돌의 복도에 울리는 일 없이 사라져갔다.
 

 
 

  약 100년 전, 현제(賢帝) 우르기우스의 암살에 의해 그 상속을 둘러싸고 대제국은 일곱으로 분열했다. 각지를 다스리고 있던 대공들이 각자 독립을 선언하고 제국의 후계자 어드메뇨라며 군사를 내세웠던 것이다. 후세에 《7대공 시대》라고 불린 시대의 개막이었다.
  제국은 분열이야 하긴 했으나 주변국으로부터의 침입은 이 시대를 통틀어 거의 없었다. 그만큼 제국이 정강했음을 얘기하고 있다. 일곱 개의 대공국은 처음엔 격하게, 곧 이어 산발적으로 싸움을 반복했지만 한편이 다른 편을 삼키는 경우는 없었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구제국을 아는 이는 모두 천국으로 떠나고, 일곱으로 나뉜 상태 쪽이 당연하다고 사람들이 생각한 그 때. 대공국의 하나인 레디우스가 움직였다. 강력한 군비와 풍부한 국력, 그리고 한 명의 영웅적인 지휘관을 얻은 레디우스는 다른 대공국을 잇달아 병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 7대공국 중 남아있는 건 가장 동방 끄트머리에 위치하고 있던 풀하이크 공국만이 되었다.
  풀하이크 공국은 대륙을 남북으로 꿰뚫는 오한스 산맥과 크란도 산맥의 딱 중간에 위치해 동서교역의 거점으로서 재산을 일군 나라였다. 풀하이크령을 통과하지 않고 동서의 교역을 행하기엔 크란도 산맥을 크게 남쪽으로 우회할 수밖에 없어서 커다란 시간과 금전의 낭비를 낳는다. 그러한 사정으로 공령(公領)의 수도 슈바이크 성 밑에는 대륙 동서의 갖가지 물품이 흘러들어와 상업도시로서 크게 번영하게 되었다.
  하기사 상인 보고 말하라면 "이제 대공만 없으면 더할 나위 없다"고 한다지만. 현 풀하이크 대공 윌름 2세는 미술 및 골동품, 그리고 애처인 제3부인 아만다의 사치에 국고를 사용함에 아무런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으며, 그에 뒤따른 세금의 무게만 없다면 보다 장사가 잘된다는 것이 한결 같은 평판이었다.



  프란츠는 그런 공국의 제3왕자로서 태어났다. 일반적으로 다들 그렇듯이 셋째 아들인 프란츠도 형들에게 이변이 일어나지 않으면 단순한 지방 영주나, 혹은 집을 나와 승려 · 학자 · 예술가로서 생애를 마칠 몸이었다. 허나, 그의 출생에는 한 가지 성가신 요소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세상을 뜬 빌란 백 가스파르, 그리고 에놈 백 구스타프는 그의 배다른 형이지만 윌름 2세의 제3부인 아만다의 자식이었다. 공비(公妃)씩이나 되면 명가에서 시집 오는 게 당연하지만, 아만다는 작위가 있긴커녕 단순한 평민의 딸에 불과했다. 매 사냥하러 나간 젊은 풀하이크 공이 길가에서 처음 본 처녀에게 하룻밤 수청을 명하고, 머잖아 그 처자가 아이를 배었음을 알게 되자마자 일단 로자인 백작가에 양자로 삼아 들이고 나서 제3부인으로서 시집 오게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남방의 대국 나실림 왕가에서 맞은 제1부인 에메노아에겐 아이가 없었고, 후계자를 바라고 있던 풀하이크가로선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사내아이가 필요했었던 것이다.
  풀하이크 공은 아이와 공비의 미모를 바랐고, 아만다는 금전과 호사를 누리길 바랐다. 양자의 타산에 의해 또 한 사람의 자식 구스타프가 태어나게 되었지만, 그 뒤 몇 년이 지나 제1부인 에메노아의 회임이 밝혀지게 되어 사태는 복잡하게 변한다. 이 아이야말로 프란츠였다.
  윌름 2세는 태어난 프란츠에게 계승권 제3위를 주어 어디까지나 형제의 서열을 우선시했지만 두 형은 프란츠의 뛰어난 『혈통』을 부러워하고, 시기하며, 그리고 증오했다. 그리고 『혈통』을 방패 삼아 머잖아 자신들을 내쫓는 게 아닐지 멋대로 두려워한 것이었다.
  허나 당사자인 프란츠는 정치에도 군무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고 속편한 셋째 아들이기 때문인지 학문에만 흥미를 보였다. 이게 행운이라는 양 제1부인 에메노아가 『불의의 죽음』을 맞이하자 두 형과 그들의 어머니는 대공을 움직여 남방의 자유도시 나뮈로 『유학』을 보내버렸던 것이다. 프란츠 본인은 어머니라는 정치적 뒷배를 잃고 궁정에서의 승강이에 넌더리가 난 참이었으므로 이대로 풀하이크에 돌아오지 않을 작정으로 그 유학 얘기를 이용한 것이었다. 5년 전의 일이다.


  나뮈에서 프란츠는 아카데미에 입학해 거기서 어학과 약학 및 천문학, 그리고 연금학을 배웠다. 신분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악우라고도 할 수 있는 친구가 생기거나, 연인도 생겼다가 헤어졌다가, 조금 유복한 평민 같은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그의 왕족답잖은 서민적인 사리판단은 여기서 길러졌다 봐도 좋다.
  그런 아카데미 생활을 보내고 있던 프란츠가 있는 곳에 주변국을 통해서 갖가지 정보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제국의 재통일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항상 레디우스국의 승리 이야기뿐이었다. 한 사람의 천재적 지휘관의 활약으로 100년 동안이나 통일되지 못했던 주변의 5개국이 불과 2년에 병합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또 한 가지 충격적인 이야기가 따라붙어있었다.



  그 지휘관의 이름은, 갈라드리엘 레이자 레디우스.
  레디우스국 제1황녀였다.


 
 

 

  "아름다운 거리로구나."
 

  빌란 성의 첨탑 창에서 저녁 노을에 물든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갈라드리엘은 말했다. 주위의 안전이 확보되어있기에 갑옷을 벗고 경장이 되어있다. 창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길게 아름다운 금발을 쓰다듬었다.
  아름다운 건 머리카락만이 아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귀족이랑 제국(諸國)의 왕자들로부터의 구혼이 끊기지 않았다는 그 미모는, 전장을 헤쳐나온 덕분에 살짝 햇빛에 그을려있었지만 그런데도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았다. 다만, 궁정 깊숙한 곳에서 얌전히 좌정하고 있기만 하는 공주와는, 감도는 풍격이 전연 달랐다. 아름다움 속에 병사를 통솔해 지휘하는, 늠름한 표정이 갖춰져있었다.
 

  "네. 빌란이라 하면 서방 3대 명성(名城) 중 하나니까요."
 

  그녀의 뒤에서 직립부동의 자세로 부관 에파리스 서가임이 대답했다. 갈라드리엘과 달리 에파리스는 흑발을 어깨 위에서 잘라 가지런히 하고 있었다. 나이는 갈라드리엘과 같았지만 키는 에파리스 쪽이 약간 컸다.
  그리고 그녀는 총지휘관인 갈라드리엘의 부관과 몇 명의 여성 병사로만으로 구성된 경호대의 대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입장으로 인해 지금도 목 아래부터는 갑옷을 몸에 둘러 무장하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거리에 상처를 주지 않고 손에 넣을 수 있던 건 다행이었어. 하기야 아무리 명성이라도 성 안에서는 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없지만."
 

  "맞는 말씀이세요."
 

  그리 말하고 갈라드리엘은 웃음을 흘리고 에파리스도 키득 웃었다.
  에파리스도 서가임 후작가의 사람이었지만, 신분차가 있는 두 사람이 이런 식으로 대화할 수 있는 것도 갈라드리엘이 에파리스의 어머니인 서가임 후작부인을 유모로 두어 자랐기 때문으로, 갈라드리엘은 자신의 석 달 전에 탄생한 에파리스를 친언니나 마찬가지로 여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신분을 넘어 뭐든지 얘기를 나누고, 우의를 다지며, 그리고 절대적인 신뢰를 두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갈라드리엘은 거리의 광경에서 눈을 떼고 후방의 에파리스를 돌아보아 아주 살짝 그녀를 올려다보듯이 말했다.
 

  "에파, 후방의 노르넨 경의 부대는 언제 도착하지?"
 

  그녀는 어디까지나 부관으로서의 서가임 경이란 게 아니라, 언니와도 같은 존재인 에파라고 불렀다.
 

  "서두르게 하지 않으면 내일 정오에는 빌란에 입성할 수 있을까 해요……. 서두르게 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아르노 공격은 모레야. 오늘 밤은 병사를 쉬게 해. 술도 허가하겠지만…… 아무쪼록 도가 지나치지 않도록 다짐을 받아둬. 저항이야 받지 않았으나 우리들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침략자다. 절도를 지켜 행동하지 않으면 봉기로 이어져."
 

  "알겠습니다. 병사들에겐 아무쪼록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전하겠습니다."
 

  레디우스의 통일전쟁이 능숙히 진행되고 있는 까닭도, 철저한 군규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점령지에선 병사에 의한 약탈 및 여성에 대한 폭행이 일어나기 십상이었지만 갈라드리엘은 여성인 까닭인지 그러한 만행을 단단히 단속하였고, 그런데도 발생했을 경우는 즉시 붙잡아 공개처형시켰다. 이에 의해 풍기단속과 민심안정 양쪽을 꾀한다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또, 점령지에 유능한 행정관을 파견해 귀족들의 부정축재를 몰수하고 민중에게 나누어주는 등을 한 결과 점령지에서의 반란은 전무해졌으며, 민중들의 갈라드리엘에 대한 인기는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원래 동일한 민족이었던 7대공 제국이었기에 언어나 종교에 의한 대립이 일어나기 어렵다는 사실도 그녀를 도왔다.
 

  "좋아. 자, 해도 저물기 시작했고, 나도 감기에 걸리기 전에 내 방로 돌아갈까……. 하기야 전영주의 그 취미 나쁜 장식물이 있는 방으로 돌아가는 건 고통이다만. 나중에 경호대원 보고 떼어내도록 시킬까."
 

  "공주님."
 

  농담인 체 뭐라 말한 갈라드리엘을 향해 에파리스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갈라드리엘은 뜻밖이라 생각하면서 되물었다.
 

  "왜 그러지? 에파."
 

  "공주님. 오늘 싸움 말입니다만, 왜 추격을 명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갈라드리엘에게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건 에파리스 뿐이었다. 애초에 갈라드리엘의 작전지휘가 틀렸던 경우는 없었으니 에파리스조차도 의견을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 만큼은 에파리스도 도저히 진언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항이 있었다.
 

  "우리 군은 빌란 백군을 꾀어내는데 성공해 빌란 평원에서 포위, 섬멸에 성공했습니다."
 

  "어리석은 지휘관이었지. 소수의 부대를 미끼로 사용해 시험 삼아 도발문을 던져넣었더니 보기 좋게 걸려들었어. 저렇게까지 보기 좋게 걸려서야 어리석다고밖에 할 도리가 없지."
 

  갈라드리엘은 에파의 통렬한 시선에서 도망치듯이 눈을 돌리고 나서 웃었다.
  그러나 에파의 말은 계속되었다.
 

  "더욱이, 후방에 전개하고 있던 적 증원군을 그대로 급습할 기회는 있었습니다. 아니오. 마땅히 급습해야했습니다. 빌란의 점거를 제쳐두고 즉시 습격하면 각개격파로 적 전군을 괴멸시키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하오면 적군이 아르노 요새에 농성할 리도 없고, 모레에는 공주님이 여기 빌란이 아니라 공도 슈바이크 성에 계셨을 테지요."
 

  "……복병을 경계해야 하는 법이지. 숫자로 우세하다 해도 우리 군은 지리에도 익숙치 못해. 옆에서 습격 당하면…"
 

  "풀하이크에 그런 군세 따위 없는 건 공주님이 제일 잘 알고 계실텐데요. 게다가 공주님의 용병(用兵)은 대담하고 신속한 것이……"
 

  "닥쳐라!"
 

  갈라드리엘은 에파에게 일갈하듯이 외쳤다. 그것이 허세인 것은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외쳐야만 했던 것이다.
 

  "공주님……."
 

  갈라드리엘은 얼떨떨한 표정의 에파에게 추가타를 더했다.
 

  "지휘관은, 누구냐."
 

  "……공주님, 아니요. 갈라드리엘 님입니다."
 

  "바로 그거다. 이번엔 우선 빌란 성을 점거하고, 이 곳을 거점으로서 보급과 증원을 기다려 모레 아르노 요새를 공격하겠다. 이건 결정이야. 이제 물러가도 좋다."
 

  "네……."
 

  쇼크를 받은 듯한 표정으로 물러가는 에파리스의 등을 보면서 갈라드리엘은 입 안에 쓴 맛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에파. 네가 말하는 대로야. 허나, 이는 내 마지막 투정이니라……. 내가 자유롭게 있을 수 있는 건,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오밤 중, 갈라드리엘은 얇은 잠옷에 몸을 감싸고 접수한 사실(私室)에서 촛대의 빛에 의자해 일어선 채로 탁자에 지도를 펼쳐 금후의 작전을 짜고 있었다. 전 영주 가스파르가 남긴 장식물 중 대다수는 이미 정리되어있어 방 안에는 나무 탁자와 지붕 딸린 커다란 침대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아르노 요새…… 듣고는 있었지만 그야말로 굴지의 요충지로군."
 

  턱에 가느다란 손가락을 대고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다.
  그것도 무리는 없다. 아르노 요새는 슈바이크 성에 이어지는 유일한 길 위에 있어 이 곳을 빠져나가지 않으면 풀하이크 공국을 복속시키는 건 이루지지 않는다. 그러나 요새의 주변은 길이 좁은데 더해 골짜기 밑에 있어서 대군을 움직인다 쳐도 쉽사리 돌파하는 것은 어렵다.
  일찌기 풀하이크가 7공국 중 하나 렌그란트와 전쟁이 되었을 때, 아르노 요새에서 5배의 적군에 버텨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런 요새가 있으면서 적장은 어슬렁어슬렁 빌란 평원으로 나와서 『정정당당히』 싸움을 걸어왔던 것이다. 갈라드리엘은 적군에는 제대로 된 부관, 에파 같은 유능한 부관이 없던지, 그 이상으로 지휘관이 무능하던지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정상적인 전략사고의 소유자라면 지키기 어려운 빌란을 포기하고 처음부터 아르노 요새에서 농성했음이 분명하다. 원래 전력차는 비교할 것도 못되며, 그리 함으로써 간신히 갈라드리엘의 코 앞에 장갑을 내던질 권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기야 그 덕분에 우리 군에도 승산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아르노 요새가 제 아무리 견고하다고는 해도 이미 전력차는 10배를 넘고 있다. 5배의 적에게 버틸 수 있어도 10배는 무리일 것이다. 그저 단순하게 진군을 되풀이해 아주 조금씩 요새의 수비에 금이 가게 만들어, 깨진 곳으로부터 교두보를 확보해서 적군을 무너뜨려갈 뿐이다. 전술적으로는 아름답지 않지만 전략적으로는 지극히 올바른 작전이다.
  물론 희생이 되는 병사의 수를 무시할 경우라면.
 

  "에파가 한 말도 지당해. 알고 있어. 적이 멋대로 요새를 포기해줬으니 일부러 놔줄 필요는 없었던 거지. 병사의 희생도 적게 끝나. 허나……"
 

  고뇌의 표정으로 쥐어짜내듯이 중얼거리는 갈라드리엘. 그리고 이어지는 말을 삼킨 그 때, 문의 입구를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문 쪽을 뒤돌아봐 누군지 물었다.
 

  "누구냐."
 

  "공주님, 저에요……."
 

  에파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답답해져있던 마음 속이 확 밝아졌다.
  첨탑에서의 엇갈림 이후, 몇 시간이긴 하지만 얼굴을 맞대지 않았었다. 서로 업무를 걸머진 탓이었지만 거북했었던 것도 있다.
  갈라드리엘은 아까 전에는 말이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작전을 바꿀 수는 없지만 이 속앓이는 해소해두리라. 방 안은 둘 뿐이니 일국의 공주가 후작의 자녀 나부랭이에게 머리를 숙이는 광경을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끝난다.
  갈라드리엘은 마침 잘됐다는 양 에파리스를 불러들였다.
 

  "그런가. 들어오지 그래."
 

  "실례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에파리스가 들어왔다. 아무리 그래도 심야이다보니 그녀는 잠자기 쉬운 경장이 되어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차할 때에는 그대로 싸울 수 있을 법한 차림새로는 되어있다. 그러나, 뭔가 상태가 이상하다. 평소의 바짝 긴장한 듯한 분위기가 아니라 어딘가 취해있는 듯이. 그러나, 갈라드리엘은 성실하기만 한 에파리스가 술에 약해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에파리스는 혼자서 온 게 아니었다. 뒤에 남자가 한 명 따라오고 있었다. 미남자라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 나름대로 단정한 생김새의 품위있어보이는 남자였다.
  갈라드리엘은 눈썹을 찌푸리고 경계심을 드러내면서 따져물었다.
 

  "누구냐, 뒤에 있는 남자는."
 

  "공주님……. 이쪽 분은 풀하이크 공국의 프란츠 전하라 하십니다……."
 

  "뭣이!?"
 

  반사적으로 갈라드리엘은 기대어 세워놓은 검에 달려가 칼집에서 뽑아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군무만이 아니라 검으로의 싸움에서도 진 적이 없다.
 

  "어떻게 된 일이냐, 에파!"
 

  "야밤에 찾아뵈어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프란츠 윌름 풀하이크라 합니다, 공주. 나는 단지 정전교섭의 사자로서 찾아왔을 뿐. 결코 공주 전하를 해치려는 생각은 일말도 없습니다."
 

  뒤에 있는 남자, 프란츠가 무릎 꿇고 말을 늘어놓았다. 상태가 이상한 건 에파만이 아니라 프란츠도 마찬가지였다. 온몸을 망토로 가리고, 망토 틈으로 아주 살짝 보이는 목덜미나 무릎은 천에 덮여있지 않았다. 마치, 망토 너머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을까 싶도록. 가려진 부분의 다부진 남자의 육체를 상상하니 ……,
 

  "……윽,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나는."
 

  갈라드리엘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 사념(邪念)을 쫓아버리려고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동요를 감추듯이 필요 이상의 큰소리로 외쳤다.
 

  "서, 설명해라, 에파! 사자가 왔다면 우선 알현실로 안내하는 게 도리가 아니더냐. 그런데 왜 사실로 직접 데려왔느냐!"
 

  "공주님, 그건, 그건……"
 

  에파리스의 상태가 이상하다. 얼굴을 붉히며 뭔가를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양팔로 몸을 껴안아 작게 바르르 떨기조차 했다.
 

  "에파……?"
 

  "그건……, 프란츠 전하가 공주님을 직접 뵙고 싶으시다하여……, 그게……"
 

  다음 순간, 갈라드리엘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에파리스가 프란츠에게 갑자기 자빠트리듯이 안겨들어 망토를 벗겨냈다. 갈라드리엘이 생각한대로 프란츠는 아무것도 입지 않아 근육이 울퉁불퉁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팽팽한, 젊은 육체가 드러났다.
  그리고 갈라드리엘은 보고 말았다. 프란츠가 남성이란 사실의 증거가, 단단하게 우뚝 솟아있는 광경을. 갈라드리엘은 왠지 처음으로 본 그 육봉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뭐, 뭐야…….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심장이 크게 뛰며 혼란스러워하는 갈라드리엘을 뒷전에 두고 에파리스는 반쯤 광란하며 외쳤다.
 

  "전하! 프란츠 전하! 명하신대로 공주님이 계신 곳까지 모셔다드렸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제게, 전하……!"
 

  에파리스는 외치면서 스스로의 옷을 찢겠다는 식의 기세로 벗기 시작했다. 앗하는 사이에 풍성한 유방도, 결코 남의 눈에 드러내서는 안되는 비부도 전부 밖에다 꺼내고 말았다.
 

  "에, 에파……"
 

  "아아, 프란츠 전하……. 멋지신 몸……. 부디, 부디 천한 제게 자비를……"
 

  여태까지 들은 적 없는 것 같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면서, 창녀처럼 몸을 꼬아가며 프란츠의 몸에 엉겨붙어 추잡하게 그와 입술을 포개는 에파리스를, 갈라드리엘은 그저 검을 잡으면서 멍청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체내에, 뜨겁게 욱신거리는 감각이 싹트는 것을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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