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라 7
적당히 거리를 걷다가 준영이가 앞장 서서 들어간 호프의 이름은 -블랙 홀-이었다.
어두운 분위기를 잘 활용한 상태여서 정말로 블랙홀 안에 들어온 듯한 묘한 느낌을 주었다.
준영이가 술자리 겸 친구들과 심심치 않게 찾는 곳이기도 했다.
꽤나 왁자지껄 떠드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적잖게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블랙홀 안으로 들어서는 준영과 수라를 떠들어대다가 흘낏 일별한 사람들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남자들은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아마 잠시동안 얼이 나갔을 것이다. 수라의 외모는 그런 시선들을 받을 만한 자격(?)이 차고도 넘쳤다.
나이 좀 지긋하신 아저씨들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보나마나 영계를 원한다는 그런 눈빛이 틀림없다. 그리고 술이 좀 얼큰하게 취한 젊은 남자들 중의 몇은 싱글거리면서 손으로 휘파람을 불러 대기도 했다.
여자들의 표정은 수라를 보더니 적개심을 드러냈다....가 아니라 그냥 슬쩍 보면서 옆에 남자친구들 허리를 꼬집는 정도였다. 수라의 외모는 물론 예뻤지만, 귀여움도 곳곳이 배여 있어서 묘한 매력을 뿜어 내었기 때문이다. 왠지 얼굴만 가지고 따진다면 화가 별로 안 나는 여자애였다.
실제로 "귀엽네" 라고 나직하게 중얼거린 젊은 여성들과 중년 아주머니들이 적잖기도 했다.
그리고 일제히 그들의 눈은 잠시 준영을 향했다. 저런 외모의 여자애와 어울리는 남자애의 얼굴을 그냥 한번 봐두려는 것이리라. 그리고 준영을 본 모두의 공통된 생각은...
"남자답다"
끝이었다. 준영의 외모는 패기가 넘쳐 보였다. 아무튼 그런데로 잘 어울리는 한 쌍 같아 보이는 것이다.
손님들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고 적당한 자리에 곧장 가서 털썩 앉은 수라였다. 수라의 등 뒤를 따라 가며 손님들의 부러워하는 듯한 시선을 의식하고 있던 준영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수라가 아직 자신의 애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시선을 받으니 왠지 잘 해 보라고 독려하는 느낌을 받는 듯해서였기 때문이다.
알바 뛰는 것으로 유력해 보이는 젊은 남자 종업원이 다가 와서 수라를 보면서 물었다. 아마 주문을 받더라도 수라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이라.
"뭘로 하시겠습니까?"
주문 대신에 수라는 마주 앉은 준영을 봤다. 그가 데려 온 곳이기도 하고, 그가 사는 것이기도 하니 알아서 주문하라는 뜻이었다. 준영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문을 했다.
"흑맥주 두병에....치킨?"
치킨 좋아하냐는 뜻으로 슬쩍 수라를 보자 수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그렇게 주세요."
종업원은 아쉬워하면서 수라를 잠시 보고는 물러 갔다. 종업원의 뜨거운 시선을 의식 못할리 없던 준영은 종업원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속으로 고소를 지었다.
"크흐흐~ 언감생심 어딜 넘봐. 얜 내가 찍었다구 임마 ~ 크흐흐~~"
"뭘 실실 거리냐?"
지혼자 씨익 미소 짓고 있는 준영을 보면서 수라가 물었다.
"아니다. 흑맥주 마셔봤냐?"
수라는 고개를 저었다. 준영이 의아하다는 듯 또 물었다.
"안 마셔봤는데 내가 시킬 동안 왜 가만 있었어? 맛 없으면 어쩌려구?"
"그러는 너는 왜 서슴없이 흑맥주를 시켰어? 내가 마셔본지 안 마셔본지 어찌 알고."
치킨 좋아하냐는 것만 물었지 흑맥주에 관해선 의사를 묻지 않고 주문을 시킨 준영은 잠시간 할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얼른 씩 웃었다.
"이왕 시켰으니 먹어봐. 안 먹어봤다니 오늘 한번 먹어보는것도 괜찮을 거다. 그거 기분 꽤 괜찮거든."
"그래?"
"그럼. 그리고 여기 블랙홀은 흑맥주를 잘 만들기로 유명하지. 주위를 봐봐라. 꽤 많이들 시켜 먹고 있지 않냐?"
수라는 말 없이 주위를 슬쩍 보았다. 과연 흑맥주를 마셔 대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런 것 같네. 기대할께."
"큭큭, 그래. 한번 마셔봐 오늘."
사실 준영이 수라에게 흑맥주를 권한 이유는 이곳 블랙홀이 흑맥주를 잘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다.
"흐흐~ 흑맥주는 일반 맥주보다 훨씬 더 쎄지. 몇 잔 마시지도 않아서 금방 취할 거다 아마 ~ 흐흐흐~~"
흑맥주는 맥주보다는 더 강하고 소주 보다는 좀 약했다. 애인들이 마시기에는 괜찮은 술이기도 하다. 여자는 소주 마시기를 힘겨워하고 남자는 맥주는 싱거워하니까.
양 볼을 붉게 물들인 채 헤롱거릴 수라를 생각 하니 속으로 통쾌하지 않을 수 없는 준영이었다. 하지만 일단 내심은 내심. 어느 새 기본 안주와 맥주 두병을 들고 온 종업원이 맛있게 드시라며 물러 가자, 준영은 검은 맥주를 수라의 잔에 먼저 채워 줬다.
수라는 말없이 있다가 준영에게서 맥주병을 건네 받아 그의 잔에 진하게 검은 맥주를 따라 주었다.
"원 샷"
준영의 말에 수라는 말없이 피식 웃더니 짱- 하게 소리가 나도록 치고는 첫잔을 들이켰다.
준영은 재빨리 비우곤 잔을 내려놓은 후 맛있게 마시는 수라를 웃으며 지켜 보았다.
꿀꺽꿀꺽
"휴우~ 과연...괜찮네. 일반 맥주하곤 느낌이 좀 틀린 것 같다."
"그렇지? 먹을 만하지?"
수라가 만족해 하는 듯하자 입이 귀에 걸리는 준영이었다. 수라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그래. 좋아."
둘은 말없이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술맛을 음미하는 분위기로 가는 수라를 보면서 준영이 일부러 말을 걸지 않고 묵묵히 잔만 비워 갔기 때문이다. 둘의 잔이 몇차례 왔다 갔다 하는 중에 본메뉴인 치킨까지 왔고, 둘은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치킨 한조각을 집어든 채로 준영이 물었다.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 솔직히 아직도 실감이 안 가네. 어떻게 그렇게 잘 싸울 수 있냐?"
수라도 한조각을 집어 든채 입가로 가져 가다가 피식 웃더니 대답해 줬다.
"말했잖아. 니가 싸움을 시작할때부터 최선을 다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공수를 나누는 중에, 넌 내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아 보려 했어. 맞지?"
끄덕
"그럼 안되지. 힘이나 스피드 중에 하나라도 우위를 점하고 있다면 모를까. 뭔 배짱으로 탐색전에서 그렇게 장난으로 하냐?"
준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네 몸만 봐서는 도저히 그런 힘과 속도가 불가능한 법인데..."
수라는 재미 있다는 듯 웃었다.
"세상엔 종종 정상적이지 않은 것도 있는 법이지."
"그렇기야 하지만...."
한동안 말을 맺지 못하다가 준영이 문득 물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몸으로 그런 움직임이 가능하냐?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싸워?"
수라가 툭 내뱉었다.
"손 가는데로 발이 가는데로 따라 갈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그것만 이해하면 돼."
준영은 멍한 표정이었다. 손 가는대로, 발 가는대로?
수라는 생글거렸다.
"그 말을 이해하려면, 좀 걸릴 거야 너."
준영은 약간 기분이 상한 듯했지만 자신이 그녀에게 패한 것이 사실이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싸움 할때는 세가지만 잘 하면 돼."
"뭔데?"
"권. 장. 각"
"무협 소설에 많이 나오는 말이군."
"무협 소설이라는 것. 재미 있어서 읽어 봤더니 그렇게 표현 하더군. 좋은 표현이야. 읽어보고 재미 있었어. 인간들은 말재주가 참 좋단 말이야."
"마치 넌 인간이 아니라는 듯한 말투다?"
준영의 물음에 수라는 대답 않고 생글거리기만 했다.
"말로는 쉽지, 그걸 누가 모르냐? 그래. 니 말대로 손과 발을 잘 놀리면 당연히 잘 싸우겠지. 하지만 그게 실행이 잘 안 되니까 문제지. 너의 몸매로 고려해볼때 그런 움직임은 정상이 아니라니까?"
"내가 말하는 손과 발의 움직임은 그런 뜻이 아니지."
"그럼 뭔데?"
"그러니까 이해할려면 더 걸릴 거래두?"
"너는 아직 한~참 멀었어. 나도 그거 깨닫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라고 수라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킥킥거렸다.
준영은 또 물었다.
"수라 "
"응?"
"너.....태어나서 져 본적 있냐? 말했지만 난 오늘이 처음이야. 오늘, 너한테 처음 진 거다. 넌 져본 적이 있냐?"
너를 이길 수 있는 자가 있을까 하고 속으로 준영은 생각했지만 입 밖으론 좀 다르게 물은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엔 눈앞의 이 여자애를 이길 수 있는 자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강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수라는 잠시 자신의 맥주잔을 들여다 봤다. 준영은 그녀의 잔이 어느 샌가 비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다시 잔을 채워 주었다. 수라는 생긋 웃어주더니 한잔을 다시 시원스레 쭉 들이켜고 나선 또 다시 비어버린 맥주잔을 공허한 눈빛으로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살면서 져본 적은 없어. 딱 한명, 비긴 녀석은 있었지."
준영은 궁금해 했다. 자신이 태어나서 만나본 최강의 실력자인 이 눈앞의 소녀와 비겼다는 단 한명의 존재가 참을 수 없이 궁금했다.
"누군데?"
준영은 짤막짤막하게 묻기로 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라 앉은 눈을 보면 머나먼 과거를 회상 하는 것 같았는데, 그 눈이 그리움과 괴로움,그리고 뭔가 더욱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내면이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것 같아서 준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수라는 줄곧 준영과 마주보지도 않은 채 그렇게 빈 잔만 응시하면서 또 입을 열었다.
"내가 좋아하게 될 뻔했던 녀석."
준영은 이번엔 침을 꿀꺽 삼켰다. 안되는데...이 여자는 내꺼인데....그러고 보니 물어보지 않았다. 이 여자애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어쩌나? 어쩌면 이미 애인도 있지 않을까?
준영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너....애인 있어?"
수라는 맥주잔에서 눈을 떼고는 살짝 웃으면서 준영을 마주 봤다. 그녀의 양 볼은 어느새 제법 발그레해져 있었다.
취기가 달아 오른 그녀의 얼굴을 아까 보았으면 흥분도 되었겠지만, 지금 중요한 질문을 던진 터라 그의 음성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수라는 잠시 준영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어."
다행이다 하고 속으로 가슴을 쓸어 내린 준영이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수라가 계속 말을 해줬다.
"내가 태어나서 마음이 흔들렸던 애는 그녀석 하나 뿐이었어.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다시 가슴이 철렁 하는 준영이었다. 수라의 저 몽롱한 시선은 뭐란 말인가. 그녀석이 누군진 모르지만 무척이나 부러웠다. 수라가 저런 눈빛으로 회상하는 그 녀석이 눈물나게 부러웠다.
수라는 혀를 슬쩍 내밀면서 귀엽게 웃었다.
"에헤헤....계속 같이 있으면 어찌 될지 몰라서 도망왔어. 후후~"
"도망?"
"같이 있으면 정말 어떻게 되버릴 것 같아서."
"너와 비겼다면 대단히 잘 싸우겠네."
"그렇지....내가 아는 중에선 세상에서 그녀석보다 강한 녀석은 없을 거야. 아니, 없다고 확신해. 그리고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그녀석이 인정한 유일한 상대도 나밖에 없었지."
"넌 그런 말을 할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킥킥...글쎄..."
그냥 킥킥 웃어대는 수라의 빈 잔에 또 맥주를 가득 따라주고는 준영은 또 물었다.
"근데 왜 안 사귀었어?"
솔직히 이런 질문을 별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수라가 제법 술이 들어간 이런 때가 아니라면 어쩌면 이런 내면의 이야기는 안 해줄지도 몰랐기에 궁금한 것은 이것 저것 물어보는 그였다.
수라는 쿡쿡거렸다.
"난 연하는 관심 없어. 정확히 말하면 남성에게 관심이 없는 거지. 그녀석은 그걸 통과한 유일한 녀석이었어. 뭐...그래도 나이 핑계 대면서 내가 거절했지만."
"너보다 어려?"
"연하래두."
"얼마나 어린데?"
"엄청 많이."
"참 나. 황당하군. 너보다 훨씬 어린데 비슷하게 싸웠다니...초딩이나 중딩이겠네?"
수라는 대답 안하곤 미소만 지었다.
"거절 했다는 거 보면 그쪽에서 매달렸나 보네?"
"응. 어느 날 갑자기 자기랑 사귀자고 하더군. 난 나이를 핑계로 거절 했지. 그런데 그녀석이 마구 떼를 쓰는 거야. 정말 애먹었었지..."
"큭큭...그렇군."
"처음에 그녀석과 만났을 땐 박터지게 싸웠어. 내가 최선을 다한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것도 그녀석뿐이었고, 그건 그쪽 역시 마찬가지였지. 그래서 가까워진 거야. 아아...그녀석이랑 싸울 때가 참 재미 있었지...그놈 빼곤 상대가 없으니 답답해서 원...하긴 내가 자초한 일이니까....아아~~ 그래도 아깝다. 그녀석 봉 쓰는 솜씨가 정말 일품이었는데."
수라가 하는 말을 주욱 듣고 있다가 준영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봉? 무슨 봉? 막대기 말이야?"
수라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석이 최고로 아끼는 물건이 막대기로 전락하는 순간이군. 하기사...넌 그래도 낫다. 면봉이라고만 하지마. 어떤 놈이 그 소리 했다가 그녀석한테 뒤지게 맞았거든. "
준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검도도 아니고....봉으로 싸운다는 사람은 또 처음 듣네."
수라는 킥킥 거렸다.
"킥킥.....이런 말 하긴 좀 뭐하지만, 넌 그 <막대기>의 한방도 못 받아 낼꺼야."
"뭐?"
준영은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상대가 무기를 쓴다고 하지만 자신이 한방 감이라니...말이 되는가? 하긴...수라를 한대도 못 때려보고 진 걸 생각하면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발끈 하는건 사실이었다.
"좀 심한 거 아냐? 내가 한 방에 간다니, 과장을 너무 하는 것 같다."
"아냐. 절대."
속으로 씨근거리면서 준영은 또 물었다.
"그래...니가 유일하게 넘어갈 뻔했다는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냐?"
"귀엽게 생겼어"
"......그게 다야?"
"음....고집쟁이에....자기 뜻대로 안 되면 마구 떼쓰는 녀석. 정말 그래서 내가 애를 죽도록 먹었다니까. 오죽하면 도망 쳤겠냐?"
"으음....."
거기까지 말하더니 수라는 나직하게 말했다.
"날 어찌나 얻고 싶어 했는지....아 정말. 그녀석이 부린 수작을 생각하면 지금도 열받네. 그녀석 덕분에 난 지금도 힘들다구...."
준영은 귀가 솔깃했다.
"무슨 짓을 했나 보지?"
"말도 마......힘으로는 만만치 않으니까, 꼼수를 부렸는데....하아....아직도 그것때문에 고생이야. 휴~ 지독한 녀석. 아무리 내가 좋아도 그렇지...하여튼 귀여우니까 봐준거지. 철없는 녀석 같으니...."
수라는 자세히는 이야기해주질 않았다. 거기까지만 신경질적으로 이야기 하더니 맥주잔을 들어올려 벌컥벌컥 들이키곤 재빨리 빈잔에 맥주를 또 따르기 시작했다. 어찌나 재빠른 기세였는지 준영이 따라주지도 못했다.
수라는 과거의 "그 녀석"이 잠시 그렇게 이야기의 도마에 오르자 입을 뾰로통하게 부풀리고는 잔을 빨리빨리 비워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을 보면 그를 무척이나 그리워하는 듯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준영은 약간 씁쓸한 기분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솔로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그를 기쁘게 했다. 그렇게 생각의 방향을 돌리니 그도 기분이 좋아져서 오히려 수라보다도 더욱 잔을 빨리 비워 가기 시작했다.
"흐흐~ 어쨌거나 이젠 내거래두"
상당히 발그레해진 수라의 얼굴을 보면서 준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키득거렸다. 물론 수라에게 내색하지 않았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한명은 과거의 회상에, 한명은 미래의 행복에 대해 마냥 잠겨 있는 채 시간은 흘러 가고 있었다.
어두운 분위기를 잘 활용한 상태여서 정말로 블랙홀 안에 들어온 듯한 묘한 느낌을 주었다.
준영이가 술자리 겸 친구들과 심심치 않게 찾는 곳이기도 했다.
꽤나 왁자지껄 떠드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적잖게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블랙홀 안으로 들어서는 준영과 수라를 떠들어대다가 흘낏 일별한 사람들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남자들은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아마 잠시동안 얼이 나갔을 것이다. 수라의 외모는 그런 시선들을 받을 만한 자격(?)이 차고도 넘쳤다.
나이 좀 지긋하신 아저씨들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보나마나 영계를 원한다는 그런 눈빛이 틀림없다. 그리고 술이 좀 얼큰하게 취한 젊은 남자들 중의 몇은 싱글거리면서 손으로 휘파람을 불러 대기도 했다.
여자들의 표정은 수라를 보더니 적개심을 드러냈다....가 아니라 그냥 슬쩍 보면서 옆에 남자친구들 허리를 꼬집는 정도였다. 수라의 외모는 물론 예뻤지만, 귀여움도 곳곳이 배여 있어서 묘한 매력을 뿜어 내었기 때문이다. 왠지 얼굴만 가지고 따진다면 화가 별로 안 나는 여자애였다.
실제로 "귀엽네" 라고 나직하게 중얼거린 젊은 여성들과 중년 아주머니들이 적잖기도 했다.
그리고 일제히 그들의 눈은 잠시 준영을 향했다. 저런 외모의 여자애와 어울리는 남자애의 얼굴을 그냥 한번 봐두려는 것이리라. 그리고 준영을 본 모두의 공통된 생각은...
"남자답다"
끝이었다. 준영의 외모는 패기가 넘쳐 보였다. 아무튼 그런데로 잘 어울리는 한 쌍 같아 보이는 것이다.
손님들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고 적당한 자리에 곧장 가서 털썩 앉은 수라였다. 수라의 등 뒤를 따라 가며 손님들의 부러워하는 듯한 시선을 의식하고 있던 준영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수라가 아직 자신의 애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시선을 받으니 왠지 잘 해 보라고 독려하는 느낌을 받는 듯해서였기 때문이다.
알바 뛰는 것으로 유력해 보이는 젊은 남자 종업원이 다가 와서 수라를 보면서 물었다. 아마 주문을 받더라도 수라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이라.
"뭘로 하시겠습니까?"
주문 대신에 수라는 마주 앉은 준영을 봤다. 그가 데려 온 곳이기도 하고, 그가 사는 것이기도 하니 알아서 주문하라는 뜻이었다. 준영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문을 했다.
"흑맥주 두병에....치킨?"
치킨 좋아하냐는 뜻으로 슬쩍 수라를 보자 수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그렇게 주세요."
종업원은 아쉬워하면서 수라를 잠시 보고는 물러 갔다. 종업원의 뜨거운 시선을 의식 못할리 없던 준영은 종업원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속으로 고소를 지었다.
"크흐흐~ 언감생심 어딜 넘봐. 얜 내가 찍었다구 임마 ~ 크흐흐~~"
"뭘 실실 거리냐?"
지혼자 씨익 미소 짓고 있는 준영을 보면서 수라가 물었다.
"아니다. 흑맥주 마셔봤냐?"
수라는 고개를 저었다. 준영이 의아하다는 듯 또 물었다.
"안 마셔봤는데 내가 시킬 동안 왜 가만 있었어? 맛 없으면 어쩌려구?"
"그러는 너는 왜 서슴없이 흑맥주를 시켰어? 내가 마셔본지 안 마셔본지 어찌 알고."
치킨 좋아하냐는 것만 물었지 흑맥주에 관해선 의사를 묻지 않고 주문을 시킨 준영은 잠시간 할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얼른 씩 웃었다.
"이왕 시켰으니 먹어봐. 안 먹어봤다니 오늘 한번 먹어보는것도 괜찮을 거다. 그거 기분 꽤 괜찮거든."
"그래?"
"그럼. 그리고 여기 블랙홀은 흑맥주를 잘 만들기로 유명하지. 주위를 봐봐라. 꽤 많이들 시켜 먹고 있지 않냐?"
수라는 말 없이 주위를 슬쩍 보았다. 과연 흑맥주를 마셔 대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런 것 같네. 기대할께."
"큭큭, 그래. 한번 마셔봐 오늘."
사실 준영이 수라에게 흑맥주를 권한 이유는 이곳 블랙홀이 흑맥주를 잘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다.
"흐흐~ 흑맥주는 일반 맥주보다 훨씬 더 쎄지. 몇 잔 마시지도 않아서 금방 취할 거다 아마 ~ 흐흐흐~~"
흑맥주는 맥주보다는 더 강하고 소주 보다는 좀 약했다. 애인들이 마시기에는 괜찮은 술이기도 하다. 여자는 소주 마시기를 힘겨워하고 남자는 맥주는 싱거워하니까.
양 볼을 붉게 물들인 채 헤롱거릴 수라를 생각 하니 속으로 통쾌하지 않을 수 없는 준영이었다. 하지만 일단 내심은 내심. 어느 새 기본 안주와 맥주 두병을 들고 온 종업원이 맛있게 드시라며 물러 가자, 준영은 검은 맥주를 수라의 잔에 먼저 채워 줬다.
수라는 말없이 있다가 준영에게서 맥주병을 건네 받아 그의 잔에 진하게 검은 맥주를 따라 주었다.
"원 샷"
준영의 말에 수라는 말없이 피식 웃더니 짱- 하게 소리가 나도록 치고는 첫잔을 들이켰다.
준영은 재빨리 비우곤 잔을 내려놓은 후 맛있게 마시는 수라를 웃으며 지켜 보았다.
꿀꺽꿀꺽
"휴우~ 과연...괜찮네. 일반 맥주하곤 느낌이 좀 틀린 것 같다."
"그렇지? 먹을 만하지?"
수라가 만족해 하는 듯하자 입이 귀에 걸리는 준영이었다. 수라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그래. 좋아."
둘은 말없이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술맛을 음미하는 분위기로 가는 수라를 보면서 준영이 일부러 말을 걸지 않고 묵묵히 잔만 비워 갔기 때문이다. 둘의 잔이 몇차례 왔다 갔다 하는 중에 본메뉴인 치킨까지 왔고, 둘은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치킨 한조각을 집어든 채로 준영이 물었다.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 솔직히 아직도 실감이 안 가네. 어떻게 그렇게 잘 싸울 수 있냐?"
수라도 한조각을 집어 든채 입가로 가져 가다가 피식 웃더니 대답해 줬다.
"말했잖아. 니가 싸움을 시작할때부터 최선을 다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공수를 나누는 중에, 넌 내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아 보려 했어. 맞지?"
끄덕
"그럼 안되지. 힘이나 스피드 중에 하나라도 우위를 점하고 있다면 모를까. 뭔 배짱으로 탐색전에서 그렇게 장난으로 하냐?"
준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네 몸만 봐서는 도저히 그런 힘과 속도가 불가능한 법인데..."
수라는 재미 있다는 듯 웃었다.
"세상엔 종종 정상적이지 않은 것도 있는 법이지."
"그렇기야 하지만...."
한동안 말을 맺지 못하다가 준영이 문득 물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몸으로 그런 움직임이 가능하냐?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싸워?"
수라가 툭 내뱉었다.
"손 가는데로 발이 가는데로 따라 갈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그것만 이해하면 돼."
준영은 멍한 표정이었다. 손 가는대로, 발 가는대로?
수라는 생글거렸다.
"그 말을 이해하려면, 좀 걸릴 거야 너."
준영은 약간 기분이 상한 듯했지만 자신이 그녀에게 패한 것이 사실이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싸움 할때는 세가지만 잘 하면 돼."
"뭔데?"
"권. 장. 각"
"무협 소설에 많이 나오는 말이군."
"무협 소설이라는 것. 재미 있어서 읽어 봤더니 그렇게 표현 하더군. 좋은 표현이야. 읽어보고 재미 있었어. 인간들은 말재주가 참 좋단 말이야."
"마치 넌 인간이 아니라는 듯한 말투다?"
준영의 물음에 수라는 대답 않고 생글거리기만 했다.
"말로는 쉽지, 그걸 누가 모르냐? 그래. 니 말대로 손과 발을 잘 놀리면 당연히 잘 싸우겠지. 하지만 그게 실행이 잘 안 되니까 문제지. 너의 몸매로 고려해볼때 그런 움직임은 정상이 아니라니까?"
"내가 말하는 손과 발의 움직임은 그런 뜻이 아니지."
"그럼 뭔데?"
"그러니까 이해할려면 더 걸릴 거래두?"
"너는 아직 한~참 멀었어. 나도 그거 깨닫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라고 수라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킥킥거렸다.
준영은 또 물었다.
"수라 "
"응?"
"너.....태어나서 져 본적 있냐? 말했지만 난 오늘이 처음이야. 오늘, 너한테 처음 진 거다. 넌 져본 적이 있냐?"
너를 이길 수 있는 자가 있을까 하고 속으로 준영은 생각했지만 입 밖으론 좀 다르게 물은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엔 눈앞의 이 여자애를 이길 수 있는 자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강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수라는 잠시 자신의 맥주잔을 들여다 봤다. 준영은 그녀의 잔이 어느 샌가 비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다시 잔을 채워 주었다. 수라는 생긋 웃어주더니 한잔을 다시 시원스레 쭉 들이켜고 나선 또 다시 비어버린 맥주잔을 공허한 눈빛으로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살면서 져본 적은 없어. 딱 한명, 비긴 녀석은 있었지."
준영은 궁금해 했다. 자신이 태어나서 만나본 최강의 실력자인 이 눈앞의 소녀와 비겼다는 단 한명의 존재가 참을 수 없이 궁금했다.
"누군데?"
준영은 짤막짤막하게 묻기로 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라 앉은 눈을 보면 머나먼 과거를 회상 하는 것 같았는데, 그 눈이 그리움과 괴로움,그리고 뭔가 더욱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내면이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것 같아서 준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수라는 줄곧 준영과 마주보지도 않은 채 그렇게 빈 잔만 응시하면서 또 입을 열었다.
"내가 좋아하게 될 뻔했던 녀석."
준영은 이번엔 침을 꿀꺽 삼켰다. 안되는데...이 여자는 내꺼인데....그러고 보니 물어보지 않았다. 이 여자애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어쩌나? 어쩌면 이미 애인도 있지 않을까?
준영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너....애인 있어?"
수라는 맥주잔에서 눈을 떼고는 살짝 웃으면서 준영을 마주 봤다. 그녀의 양 볼은 어느새 제법 발그레해져 있었다.
취기가 달아 오른 그녀의 얼굴을 아까 보았으면 흥분도 되었겠지만, 지금 중요한 질문을 던진 터라 그의 음성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수라는 잠시 준영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어."
다행이다 하고 속으로 가슴을 쓸어 내린 준영이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수라가 계속 말을 해줬다.
"내가 태어나서 마음이 흔들렸던 애는 그녀석 하나 뿐이었어.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다시 가슴이 철렁 하는 준영이었다. 수라의 저 몽롱한 시선은 뭐란 말인가. 그녀석이 누군진 모르지만 무척이나 부러웠다. 수라가 저런 눈빛으로 회상하는 그 녀석이 눈물나게 부러웠다.
수라는 혀를 슬쩍 내밀면서 귀엽게 웃었다.
"에헤헤....계속 같이 있으면 어찌 될지 몰라서 도망왔어. 후후~"
"도망?"
"같이 있으면 정말 어떻게 되버릴 것 같아서."
"너와 비겼다면 대단히 잘 싸우겠네."
"그렇지....내가 아는 중에선 세상에서 그녀석보다 강한 녀석은 없을 거야. 아니, 없다고 확신해. 그리고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그녀석이 인정한 유일한 상대도 나밖에 없었지."
"넌 그런 말을 할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킥킥...글쎄..."
그냥 킥킥 웃어대는 수라의 빈 잔에 또 맥주를 가득 따라주고는 준영은 또 물었다.
"근데 왜 안 사귀었어?"
솔직히 이런 질문을 별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수라가 제법 술이 들어간 이런 때가 아니라면 어쩌면 이런 내면의 이야기는 안 해줄지도 몰랐기에 궁금한 것은 이것 저것 물어보는 그였다.
수라는 쿡쿡거렸다.
"난 연하는 관심 없어. 정확히 말하면 남성에게 관심이 없는 거지. 그녀석은 그걸 통과한 유일한 녀석이었어. 뭐...그래도 나이 핑계 대면서 내가 거절했지만."
"너보다 어려?"
"연하래두."
"얼마나 어린데?"
"엄청 많이."
"참 나. 황당하군. 너보다 훨씬 어린데 비슷하게 싸웠다니...초딩이나 중딩이겠네?"
수라는 대답 안하곤 미소만 지었다.
"거절 했다는 거 보면 그쪽에서 매달렸나 보네?"
"응. 어느 날 갑자기 자기랑 사귀자고 하더군. 난 나이를 핑계로 거절 했지. 그런데 그녀석이 마구 떼를 쓰는 거야. 정말 애먹었었지..."
"큭큭...그렇군."
"처음에 그녀석과 만났을 땐 박터지게 싸웠어. 내가 최선을 다한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것도 그녀석뿐이었고, 그건 그쪽 역시 마찬가지였지. 그래서 가까워진 거야. 아아...그녀석이랑 싸울 때가 참 재미 있었지...그놈 빼곤 상대가 없으니 답답해서 원...하긴 내가 자초한 일이니까....아아~~ 그래도 아깝다. 그녀석 봉 쓰는 솜씨가 정말 일품이었는데."
수라가 하는 말을 주욱 듣고 있다가 준영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봉? 무슨 봉? 막대기 말이야?"
수라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석이 최고로 아끼는 물건이 막대기로 전락하는 순간이군. 하기사...넌 그래도 낫다. 면봉이라고만 하지마. 어떤 놈이 그 소리 했다가 그녀석한테 뒤지게 맞았거든. "
준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검도도 아니고....봉으로 싸운다는 사람은 또 처음 듣네."
수라는 킥킥 거렸다.
"킥킥.....이런 말 하긴 좀 뭐하지만, 넌 그 <막대기>의 한방도 못 받아 낼꺼야."
"뭐?"
준영은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상대가 무기를 쓴다고 하지만 자신이 한방 감이라니...말이 되는가? 하긴...수라를 한대도 못 때려보고 진 걸 생각하면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발끈 하는건 사실이었다.
"좀 심한 거 아냐? 내가 한 방에 간다니, 과장을 너무 하는 것 같다."
"아냐. 절대."
속으로 씨근거리면서 준영은 또 물었다.
"그래...니가 유일하게 넘어갈 뻔했다는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냐?"
"귀엽게 생겼어"
"......그게 다야?"
"음....고집쟁이에....자기 뜻대로 안 되면 마구 떼쓰는 녀석. 정말 그래서 내가 애를 죽도록 먹었다니까. 오죽하면 도망 쳤겠냐?"
"으음....."
거기까지 말하더니 수라는 나직하게 말했다.
"날 어찌나 얻고 싶어 했는지....아 정말. 그녀석이 부린 수작을 생각하면 지금도 열받네. 그녀석 덕분에 난 지금도 힘들다구...."
준영은 귀가 솔깃했다.
"무슨 짓을 했나 보지?"
"말도 마......힘으로는 만만치 않으니까, 꼼수를 부렸는데....하아....아직도 그것때문에 고생이야. 휴~ 지독한 녀석. 아무리 내가 좋아도 그렇지...하여튼 귀여우니까 봐준거지. 철없는 녀석 같으니...."
수라는 자세히는 이야기해주질 않았다. 거기까지만 신경질적으로 이야기 하더니 맥주잔을 들어올려 벌컥벌컥 들이키곤 재빨리 빈잔에 맥주를 또 따르기 시작했다. 어찌나 재빠른 기세였는지 준영이 따라주지도 못했다.
수라는 과거의 "그 녀석"이 잠시 그렇게 이야기의 도마에 오르자 입을 뾰로통하게 부풀리고는 잔을 빨리빨리 비워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을 보면 그를 무척이나 그리워하는 듯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준영은 약간 씁쓸한 기분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솔로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그를 기쁘게 했다. 그렇게 생각의 방향을 돌리니 그도 기분이 좋아져서 오히려 수라보다도 더욱 잔을 빨리 비워 가기 시작했다.
"흐흐~ 어쨌거나 이젠 내거래두"
상당히 발그레해진 수라의 얼굴을 보면서 준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키득거렸다. 물론 수라에게 내색하지 않았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한명은 과거의 회상에, 한명은 미래의 행복에 대해 마냥 잠겨 있는 채 시간은 흘러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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