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백작著/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수정편 제 28 부
** 낭만백작著/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수정편 제 28 부 ** [수정일. 2006 년 3 월.]
제 10 장. 취산이합(聚散離合)의 암투(暗鬪) 1.
연환서숙(捐幻書塾)의 내실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서문인걸(西門仁杰)이 내뱉듯
혼잣소리를 중얼거렸다.
「잔악(殘惡)하게 힘으로 파괴를 해버렸구나. 쯧쯧.. 어리석은 놈들..! 동지로 만들어야
할 인물들을 적으로 돌리고 말다니..! 사리사욕(私利私慾)에만 눈이 멀어 분별력을 잃어
가는 놈..! 도저히 그 자리에 있을 그릇이 되지 못하는 인간이로구나..!」
허망(虛妄)하게 궤멸된 백련채(白蓮菜)를 아쉬워 하며 후회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허허.. 조금만 더 일찍 찾을 것을..! 전력(戰力)의 한축을 날려 버렸다..!」
역시 서문인걸(西門仁杰)도 남보다 빨리 강호의 정보를 취합(聚合)해야 앞선 전략을 수립할
수 있는 그 중요성(重要性)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 똑 똑..!
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혼자 방안에서 시름깊은 얼굴로 앉아있는 서문인걸(西門仁杰)의 행동이 궁금해 화령(華怜)
이 방문을 두드린 것이다.
방을 들어서는 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서문인걸(西門仁杰)을 향해 화령(華怜)이
물었다.
「아버님..! 무슨 생각을 그리도 깊이 하고 계십니까..?」
한동안 화령(華怜)을 바라보고 있던 서문인걸(西門仁杰)이 느닷없이 묻는다.
「화령(華怜)아.. 요즈음 황보(皇甫)공자의 근황(近況)은 어떠하냐..?」
갑자기 황보정(皇甫程)의 소식을 궁금해 하는 아버지의 말에 어물거리며 대답을 했다.
「한동안은 처지를 비관하여 소심해 있더니 요즈음은 열심히 문무(文武)의 공부에 전념을
하며, 기회가 되면 부친인 평장사(平章事)어른을 도울 것이라 열심입니다.」
「허허허.. 그래, 황보(皇甫)공자의 아비인 황보승(皇甫承)은 지금은 비록 힘은 잃었다 하나
아직은 조정(朝廷) 제일의 관직(官職)인 문하평장사(書門下平章事)의 자리에 있는 대신이다.
분명 권력을 되찾을 기회를 노리고자 하겠지..!」
화령(華怜)은 갑자기 황보정(皇甫程)의 근황을 묻는 말이나 독백처럼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버님.. 갑자기 황보(皇甫)공자에 관한 일을 왜 물어시는지..? 그리고 지금 혼자 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이신지..?」
궁금해 하며 묻고 있는 화령(華怜)을 찬찬히 쳐다보던 서문인걸(西門仁杰)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화령(華怜)아.. 네가 보기에 황보(皇甫)공자의 사람됨은 어떠하더냐..?」
「예..? 예, 아버님. 조정(朝廷) 제일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 있는
부친의 처지를 비관해 마음속으로 울분을 터뜨리던 그가 지금은 훨씬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
습니다.」
「허허.. 그렇더냐..!」
「어쩌면 자신의 부친보다 뛰어난 인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이 달라졌습니
다. 분명 기재(奇材)입니다.」
서문인걸(西門仁杰)이 빙긋 웃으며 다시 물었다.
「어찌하여 그리 생각 하느냐..?」
「예, 황보(皇甫)공자의 지난 행적 때문입니다. 술에 취해 거리의 파락호처럼 지내던
지난 세월은 정적(政敵)들에게 자신의 심전(心田;본심)을 들키지 않으려 철저히 숨기고
있던 시절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 이곳에서의 그의 일상을 보면 언제나 조정의 개혁을
머리속에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마음은 쉬 나타내 보이지 않습니다.」
요즈음 들어 서로 가까이 지내며 나눈 대화와 가끔 가슴에 맺힌 울분을 내뱉듯 한마디씩
던지는 황보정(皇甫程)의 말을 귀담아 들은 화령(華怜)의 느낌이었다.
「그러하더냐..? 그래, 황보(皇甫)공자가 속마음을 네게 그리 쉽게 보이겠느냐..? 더욱
가까이 하여 친히 지내도록 하거라..!」
「예, 아버님..!」
대답을 하는 화령(華怜)의 얼굴에 살짝 부끄러운 홍조가 떠 올랐다.
「나가서 황보(皇甫)공자를 찾아, 내가 의논할 일이 있다고 급히 보잔다고 전해라.」
* * * * * * * * * *
연환서숙(捐幻書塾)의 뒤 나지막한 언덕에는 맑은 햇살이 따듯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언덕을 화령(華怜)이 황보정(皇甫程)을 찾아 오르고 있었다.
「어멋..! 저들은 누군가..?」
향기 가득한 관목(灌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싱그러움을 뽐내고 있는 동산의 언덕에 황보
정(皇甫程)과 낯선 젊은 여인이 두손을 꼭 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화령(華怜)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뒤에는 여인의 시종무사(侍從武士)인 듯한 사람이 시립(侍立;웃어른을 모시고 섬)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알아 볼만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女人)..!
머리에는 화옥잠(花玉簪;옥으로 만든 꽃모양의 비녀)을 꽂아 화려함을 보이고 펄럭이는
연록의(軟綠衣)는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예쁘다.. 누굴까..?」
다가가려던 화령(華怜)은 멈칫 멈추어 서고 말았다.
너무나 다정한 그들의 모습에 얼굴이 붉어지며 가슴속에서 슬며시 울화(鬱火)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저들의 다정한 모습에 내가 왜 질투(嫉妬)를 하는거지..!)
두근거리는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지켜만 보고있는 화령(華怜)
이었다.
* * * * * * * * * *
「여경(如璟)아.. 아버님은 편히 계시느냐..?」
속태(俗態)를 벗고 세속을 초월한 듯 천진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이 젊은 여인(女人)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황보승(皇甫承)의 딸이며 황보정(皇甫程)의 동생인 황보여경(皇甫
如璟)이었다.
「예, 오라버니. 아버님께서도 오라버니의 근항(近況)을 궁금해 하고 계십니다.」
「그래.. 여기까지 어쩐일로 왔느냐..?」
「다음달 초순에 아버님께서 산동성(山東省) 제남(齊南)에 있는 천불산(天佛山)으로 나들이
를 하신다고 합니다. 오라버니도 함께 가시지 않겠는가 전하라 하셨습니다.」
황보승(皇甫承)의 본가(本家)인 황보세가(皇甫世家)가 있는 천불산(天佛山)..!
산동(山東)의 제남(齊南)에서 동남쪽으로 다섯 마장(馬丈)쯤의 거리에 있는 천불산(天佛山)
의 중턱에 있는 천불사(天佛寺)는 사방의 돌벽에 많은 불상이 새겨져 있고, 울창한 숲과
화초가 일구어낸 자연미(自然美)와 정자, 누각(樓閣)등의 아름다운 건물이 어우러져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아버님께서 또 현실(現實)을 피하고 싶으신 모양이구먼..!」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는 황보정(皇甫程)을 바라보며 여경(如璟)은 자신의
오래비를 달래 듯 말을 이어갔다.
「점점 더 심하게 조여드는 저들의 핍박에 심신이 피로해 잠시 쉬시고 싶은 것이겠지요.
오리버니..! 이번에는 아버님도 오라버니와 꼭 함께 가시고 싶어 하십니다.」
「에이..! 전에는 그렇게도 강직(剛直)하시던 아버님께서 어찌 이리도 변하셨단 말인가..!
조정의 수장이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백성을 위해 나서야 할 것을..! 쯧쯧.. 난 그런 아버님
과 대면하기가 싫다. 여경(如璟)아, 네가 모시고 다녀 오너라.」
「그래도 아버님께서는 오라버니와 함께 가고 싶어 하시는데..!」
「싫다..! 더 말하지 말거라. 자리를 지킬 자신이 없으면 아예 은퇴를 하고 낙향(落鄕)을
하시던지. 그것 참..!」
황보여경(皇甫如璟)의 얼굴에 언뜻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님에게도 생각이 계시겠지요. 그럼 저는 물러갑니다.」
「그래.. 여경(如璟)아, 아버님께 안부나 잘 전하거라..!」
「하(何) 아저씨.. 우린 이제 돌아가도록 합시다.」
여경(如璟)은 곁에 시립(侍立)해 있는 황보가(皇甫家)의 총관 하일패(何一覇)에게 말하며
안타까운 듯 발길을 돌렸다.
* * * * * * * * * *
「숨어서 엿보고 있는 놈이 누구냐..!」
- 슈욱.. 퍽..!
황보정(皇甫程)의 오른손이 휙.. 움직이며 화령(華怜)이 몸을 숨기고 있는 바위에 날카로운
빛이 날아와 꽂혔다.
「흡.. 어쩌나..!」
바위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화령(華怜)은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섰다.
「황보(皇甫)공자님.. 접니다.」
화령(華怜)의 얼굴은 부끄러움에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오오.. 화령(華怜)낭자 셨구려..!」
황보정(皇甫程)은 언덕아래 큰바위 뒤를 내려다 보며 미소를 짖고 있었다.
여경(如璟)을 보내고 난후 이미 화령(華怜)이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는 그녀를
놀래주려 한 것이었다.
한걸음 앞으로 내딛으며 바위에 번쩍하며 꽂힌 흔적을 살펴보던 화령(華怜)은 그 바위위에
손가락만한 나무가지가 두자 깊이로 박혀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언덕 위에서 화령(華怜)이 숨어있던 바위까지는 오 장(丈;약 15m)정도의 제법 먼 거리,
평범한 공력(功力)으로는 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나뭇가지로는 바위에 조그만 흠집 조차도
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호.. 높은 내공(內功)을 지니고 있었구나.」
생각보다도 더 뛰어난 인물(人物) 일지도 모른다. 화령(華怜)의 마음속에는 문득 그런 느낌
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도 깊이 하십니까..?」
「엇..!」
어느듯 황보정(皇甫程)이 화령(華怜)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그냥 오시면 될 것을 왜 숨어서 살피셨습니까..?」
「살.. 살피다니요..? 그냥 공자님의 좋은 시간을 방해하기 싫어서 피해준 것일 뿐인데..!」
황보정(皇甫程)의 말에 화령의 마음속에는 또다시 질투심이 솟아 얼굴이 발갛게 달아 오른다.
「허..! 좋은 시간이라..?」
「그래요..! 아름다운 낭자와 즐겁게 나누는 대화를 방해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말을 하며 고개를 숙이는 화령(華怜)은 목덜미까지 빨개져 있었다.
「오호.. 그랬었구나..! 화령(華怜)낭자, 그 아이는 아버님의 전갈을 가져온 저의 동생이었습
니다. 황보여경(皇甫如璟)이라 하지요.」
「예.. 예..?」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갑자기 묵은 체증(滯症)이 시원히 내려가는 듯 가벼워 지는
화령(華怜)의 마음이었다.
「낭자.. 무슨일로 여기를 찾으셨는지..?」
황보정(皇甫程)의 물음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황보(皇甫)공자님.. 아버님께서 긴히 의논할 일이 있다고 찾으십니다.」
「서문(西門)대인께서..? 그래 어디에 계십니까..?」
「예, 내실(內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실(內室)이라면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자는 뜻이 아닌가..! 황보정(皇甫程)은 급히 서두
르기 시작했다.
「화령(華怜)낭자.. 어서 가 봅시다.」
황보정(皇甫程)은 화령(華怜)의 손을 잡고는 끌다시피 연환서숙(捐幻書塾)의 내실(內室)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