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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더블 데이트 - 6부


나의 더블 데이트 - 6부 

 

난 크게 놀랐다. 그녀는 마치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답했기 때문이다. 내가 주저하고 있는 사이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

 

 

"오늘 서울에 도착하시거든 ROSE에 한번 들러주세요."

또 놀란다. 내가 지금 서울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체 어떻게?

"제...제가 오늘 서울에 간다는 걸 어떻게 아셨죠?"

"그냥요."

유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전처럼 까불거리는 목소리도 아니었고 졸린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냥이라니... 대체 누가 유미 씨에게 제 이야기를 한 거죠?"

"아무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오랜만이니 얼굴이라도 보여주세요. 그리고 선생님이 하시려는 그 어리석은 일에 대한 이야기도 나눠보도록 하죠."

어리석은 일? 

"유미씨! 대체 지금 무슨 소릴....?"

"그럼 지금 하는 일이 잘하는 짓이라고 주장하실 생각인가요?"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너무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두려울 지경이다. 문득 아주 예전에 선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유미가 내 앞날을 보았는데 난 누군가에게 잘 휘둘리는 타입이라고, 그에 따라 앞날이 결정된다고 말이다.

- 언니는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 볼 줄 아는 여자랍니다.. 이 바닥에선 유명하죠.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그 사람의 기운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그런 걸 느낀다나 봐요.

그때 선영은 유미가 사람의 기운을 느낀다..라고 했다. 난 그 말이 그저 유미가 사람보는 눈이 있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건 그런 덕담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간다. 만화같은, 혹은 삼류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지금 현실이라는 건가? 유미에게는...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건가?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 가운데 돈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외전화라서 조금 빨리 떨어진다. 돈을 더 넣어 유미의 이야기를 들을까 싶은데 아쉽게도 남은 동전이 없다. 그때, 유미가 말했다.

"동전도 얼마 안 남았을텐데... 일단 오세요. 오고나서 말씀나누죠. 옆사람이 많이 시끄럽게 굴겠지만... 그래도 좋은 여행되시길."

전화가 끊겼다. 이쯤되면... 천리안도 가지고 있다고 봐야하나. 난 혼란에 빠졌다. 뭐랄까... 귀신에 홀린 기분이다. 그저 안부나 전하려고 전화를 걸었던 건데 어쩌다보니 엄청난 소리를 듣고 말았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버스에 올라탄다. 내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잠시 후 출발시간이 되어 버스가 출발하려는데 어떤 뚱뚱한 남자가 뛰어오더니 버스에 올라탄다. 

"어휴~ 놓칠 뻔 했네."

 

 

땀을 뻘뻘 흘리며 통로를 걸어온 그는 좌석표를 확인하더니 내 옆자리에 앉았다. 가뜩이나 좁은 좌석에 덩치가 큰 사람이 앉으니 자꾸 팔뚝이 닿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는 핸드폰을 꺼내들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나. 그래. 버스 탔어. 인마. 늦지 않게 도착할거야. 어? 그 일 말이지?"

........하며 끝없는 수다를 이어가기 시작한다. 전화 끊기 전, 유미가 무심코 던진 말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하필이면 빈자리가 없어 자리를 옮길 수도 없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ROSE를 찾아갔다. 가게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주변이 조금 변하긴 했지만 한 번 가본 곳이었기에 그다지 어려움을 겪지 않고 찾아갈 수 있었다.

"어떻게 오셨죠?"

"진유미 사장님을 만나러...."

첫번째로 만난 웨이터에게 용건을 말하자 그는 사장실로 날 안내해주었다. 

"어서오세요."

유미의 모습도 예전 그대로였다. 어쩌면 더 과감한 의상이 되었다고 해야하나. 

"좀 야위셨네요. 식사는 제대로 하고 계신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미 씨...."

"함께 식사라도 하고 싶지만 좀 있으면 가게오픈이라서 말이죠. 선영이라도 있으면 모시라고 할텐데...."

그러고보니 선영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난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유미씨 아까 낮에 했던 말은 대체..."

"전 보이는 사람이에요."

그녀는 내 말을 사정없이 끊으며 제 할 말을 먼저 했다.

"........네?"

"사람은 눈이 있으니까 앞이 보이잖아요? 전 다른 사람에게 없는 눈이 있어요. 그 눈은 시간적으로 앞을 보고 있죠. 아직 도달하지 않은."

차분하게 말하는 유미의 말은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그 증거를 내게 한 번 보였다. 걸려오지도 않은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말하지도 않은 사실을 미리 알고 말하기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에게 묻는다.

"그러면 설마... 그 눈으로.... 제가...하려는 일을 이미 보신 건가요?"

유미는 굳은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한참을 있던 그녀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다. 난 아직 그 일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머리 속에는 이미 담아두고 있다. 지금 둘러메고 있는 가방에 들어있는 그것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년을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격하시킬 것이다. 범하고 또 범하여 다시는 재기할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버리고 말테다. 

그런 광경을 그녀는 이미 보았다는 걸까.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에 주저앉았다. 푹신한 감촉이 몸을 감싸오지만 그걸 느낄 엄두가 나질 않는다. 머리 속이 복잡하다. 생각이 난무한다. 그러나 결국 내가 도달한 지점은 단 하나다. 가장 큰 감정,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가장 큰 불길. 거기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마른 침을 삼키고 애써 차분한 목소리를 내어 유미에게 묻는다.

"그래서, 저는 성공합니까?"

"선생님! 지금 무슨...."

"보셨다면서요. 저는 아직 계획 단계이고 지금은 조사부터 시작해야할 판이거든요. 그러니 미래를 보신다는 분께 여쭈어 보죠. 제 계획은 성공하고, 그년은 제대로 침몰하며, 저는 만족할 수 있는 건가요?"

그녀의 낯빛은 창백했다. 전처럼 밝게 웃으며 떠들거나 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낯설었지만 난 전혀 개의치 않았다. 대답을 종용해도 유미는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말할 차례다.

"보셨다면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그년을 잡아다..."

"선생님!"

유미의 비명소리 같은 외침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제겐 강력한 무기가 있어요. 어떤 사람이든 단번에 영혼까지 타락시킬 무서운 무기죠. 그걸 그년에게 써서 제게 저지른 일을 반성하게 만들 생각입니다."

"선생님, 제발요!"

유미는 내 두 팔을 붙잡고 울었다. 우는 유미라니.... 너무도 낯설고 낯설었다. 그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아직 그게 오지 않았으니까 미래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왜 선생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굳이 해가며... 말리는지 모르시겠어요? 정말로요?"

"모릅니다."

 

 

"속세를 떠난 선영이도, 한국을 떠난 유진이도... 마지막까지 선생님에 대해 걱정하고 염려했어요. 그 아이들은 여기 남은 저에게 선생님을 부탁했다고요. 그런데 선생님은 기어코..."

"그만하세요. 듣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아요."

이미 내 마음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꽤 과감하고 섹시하기 이를 데 없이 차려입은 유미의 차림새가 퍽 마음에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랫도리가 동하지는 않았다. 온몸의 불길은 가슴에서 분노라는 형태로 타고 있고, 머리 속은 더할 나위없이 차가운 까닭이다. 내 팔을 붙들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을 떼어낸다. 힘주어 밀어낸다.

"예전에 신세를 졌기에 그저 인사라도 드릴까해서 찾아왔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긴 했습니다만, 말 그대로 흥미로울 따름이군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미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이제 다시는 여기에 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ROSE를 빠져나왔다. 거리는 어두워지고 있었고 술집의 간판은 켜지고 있었다. 그 흔들리는 불야성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다.

───────────────────────────

Double Date

───────────────────────────

"Hi, everyone."

"Hi, Jack."

강사가 들어오며 인사를 건네자 모두 그에게 화답했다. Free Talking Class의 정원은 여덞 명이었다. 강사인 잭은 우리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출석을 점검하곤 오늘의 주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대각선 앞에 앉은 여자의 뒷모습을 훔쳐본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터무니없이 큰 가슴을 가진 그녀는 책상에 가슴을 올려놓다시피 하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 둘.

아직 미혼.

외국계 금융회사 근무.

 

 

서글서글한 외모에 터질듯한 가슴 덕분에 영어학원 내에 뭇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모으고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의 몸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특정 부위는 남자휴게실에서도 종종 화제에 오르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거기에 몹시 흥미가 동한 것처럼 가장하여 그녀에 대한 의견을 수집하곤 한다. 그렇지만 난 내가 아는 사실을 그들에게 털어놓지 않는다.

이진희. 그녀가 이명희의 언니,라는 걸 말이다.

".......Next time, we will discuss about social network service. So I suggest you to ....."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벌써 수업은 끝나가고 있었다. 일주일째 이 수업을 듣고 있지만 영 따라가기가 벅차다. 강사가 하는 말은 대부분 흘려듣고 옆사람과의 프리토킹도 그냥 어버버버하면서 지나고 만다. 내 목적은 영어실력 향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Okay. Time is up. See you!"

경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남기고 나가는 잭을 필두로 대부분의 학생들이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나 역시 가방을 챙겨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책상에 앉아있는 진희에게 다가갔다.

"저. 안녕하세요?"

"네?"

진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쳐다보았다. 미처 강의실에서 나가지 않은 이들이 이쪽을 흥미롭다는듯이 쳐다본다. 휴게실에서 담배를 나뉘피워보았던 형들은 살짝 주먹을 들어올려 보이며 파이팅을 외쳐준다. 난 애써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전부터 그쪽을 계속.... 봤었는데요,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식사라도 ...."

진희는 입을 가리고 살짝 웃었다.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전 남자친구 있어요. 죄송합니다."

"꼭 사귀자는 건 아니에요. 그냥 좀 친하게 지내보자는 거죠."

"그래도요. 죄송합니다."

진희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지만 난 굴하지 않고 계속 따라갔다.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시간을 내달라고 요청하자 결국 진희는 식사 대신 커피라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우리 둘은 종로YBM 뒤에 있는 한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그쪽 성함이...?"

"감우성이라고 합니다."

 

 

본명을 댔다간 정체가 들킬 위험이 있었다. 그녀는 날 단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동생과 그런 일이 있었으니 이름을 기억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난 전과 달리 머리를 짧게 자르고 테가 굵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시구나. 저랑 같은 반이시지죠?"

"네."

진희와 같은 반이 되기 위해서 행했던 물밑 작업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운좋게 그녀와 같은 반이 되었고 계속 그녀가 눈에 들어왔으며, 이렇게 큰 마음 먹고 대쉬하게 되었노라고 이야기했다. 진희는 살짝 즐거워하면서도 곤란해했다.

"이런 건 처음이라..."

"이런 거라뇨?"

"음.. 헌팅...이라고 해야하나요? 누가 이렇게 말 걸어서 자리를 함께 한 거 말이에요."

"우와. 진희 씨 주변 남자들은 정말 다 장님인가 보네요. 저는 지난주부터 계속 언제 말을 걸어야 하나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요. 누가 먼저 말걸면 어떡하나 하고 말이죠."

칭찬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 진희는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너무 띄우지 마세요.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음... 남자친구 있거든요."

"물론 진희 씨 외모 정도면 당연히 남자친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참, 너무 띄우지 마시라니까요. 호호호."

주문한 커피가 나왔고, 진희는 기다란 찻수저로 잔을 휘저었다.

"우성 씨.. 라고 했나요? 보아하니 저보다 나이도 어리신 것 같은데 앞으로 꼭 좋은 분 만나세요."

"진희 씨 같이 좋은 분이 또 있을까요?"

"에이, 너무 비행기 태우시면 곤란해요."

"예쁜 분을 보고 예쁘다고 하는게 그렇게 잘못된 거라면, 전 감방이라도 가야겠네요."

"어머나? 호호호. 그럴 필요까지는..."

사실 감방은 이미 다녀왔지만 말이다.

"남자친구분이 전생에 나라라도 구하신 걸까요? 그게 아니면, 제가 전생에 나라를 못 구했나 봅니다."

"어머나? 호호호호."

적당한 띄워주기와 적당한 밀고 당김. 그런 것들로 점철된 의미없는 대화를 나눈다. 그녀가 말하는 이야기는 그저 한쪽 귀로 들어와서 다른 쪽 귀로 흘러나가고 있다. 어차피 그녀에 대한 제반 사항은 지난 일주일동안 거의 다 파악해두었다. 준비도 끝나있었다.

내가 굳이 이런 자리를 만들어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까닭은 이렇게 약간의 접점을 만들어두는 게 투약의 성공률을 향상시키기 때문이다. 이러니저러긴 해도 이성에게 고백을 받는다는 건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어느 정도의 크기일지는 모르겠지만 아주아주 작은 정도의 틈이 생긴다.

난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내면을 차지할 것이다.

"그럼, 일어날까요? 전 이만 들어가봐야해서요."

 

 

"그럴까요?"

자리에서 일어난 진희와 난 커피숍을 나섰다. 그녀는 어차피 같은 수업 듣는 사람이니 그저 친하게 지내자는 정도로 우리 사이를 정리했다. 난 수긍하는 척하면서 언제고 기회가 닿으면 다시 대쉬하겠노라고 말해 진희를 웃겼다. 지하철역으로 간다는 그녀에게 내 차로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았다. 집에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진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그렇게까지 폐 끼칠 수는 없어요."

"폐라뇨. 이것 참 아쉬운데요?"

난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럼 말이죠. 바로 저기 주차장이거든요? 사실 차 안에 꽃다발을 하나 사둔 게 있답니다. 진희 씨 드릴려고요."

"어머나. 뭐,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그래도 제 성의이니 꼭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그걸 받아주시면 더는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게다가 안 받으면 꽃은 시든다구요."

진희는 몹시 주저하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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