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그네 <8부>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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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그네 <8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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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 여자,누나.

‘어라?’

준후는 잠시 멍해질수 밖에 없었다.은영이 나갔을법한 곳을 따라나갔는데도,그녀의 모습을 볼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야.뭔일이 있을거 처럼 나가더니만.’

준후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자신이 들어온 뒷문을 열어도 보고,독서실 복도쪽을 서성여도 보았지만,근처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보다 위험해 보였는데 말이야.’

사실 준후가 따라온것은 호기심이 전부가 아니었다.아까 작당을 하던 녀석들의 불량해보이는 표정이 심히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물론 준후본인이 여자를 구해야만 한다는 정의의 사도가 된듯한 사명감이 있는 아이는 아니었지만,마음이 찝찝한 것은 정말 어쩔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까 남학생들이 나눈 단어는,정말 뭔짓이라도 벌일듯한 기세였었다.

‘가만.뭔짓을 벌일거면 이렇게 눈에 띄는곳이 있을리가 없잖아.,’

생각해보니 이 근처에서 찾고있었던 자신이 우스워지는 준후였다.은영이 만약에 그 껄렁거리는 녀석들의 메세지를 받고 나간거라면,그 남학생들이 성은영이란 여학생을 괜히 커피한잔하자고 불러낸 것이 아닐것이다.준후는 얼른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우선 독서실 건물의 주변은 깔끔했다.잘사는 동네이니,시덥잖은 뒷골목따위는 찾을수 없을것만 같았다.근처에는 큰 마트하나,그리고 고급빌라가 몇동있을 뿐이었다.

‘음…저쪽으로 갔으려나?’

아무리 주위를 봐도,준후의 마음이 가는 곳은 빌라의 주차장 뿐이었다.시간도 인적이 그렇게 많지 않을 시간이니 충분히 신빙성이 있는것만 같았다.

‘이거이거..내 공부를 방해한 댓가 치러야 할거야 니들.’





“이..이러지마.”

“뭘 이러지마?내가 뭐 했냐?”

준태의 능글거리는 말에 은영은 살짝 귀여운 미간을 찌푸렸다.도망칠 곳이라고는 없었다.뒤에는 벽이었고,출구로 가려면 자신을 가로막은 준태와 민규를 뿌리치고 도망가야만 했다.게다가,도망가라고 놔줘도 맘편히 도망갈수 없는 상황이었다.

“야..요거요거.한번 인터넷에 올려볼까?되게 인기 많아질껄 너?”

동영상이 나오는 휴대폰을 까딱거려보이는 민규의 말에 은영은 눈물이 솟아나오는것을 참아내었다.실수는 실수.어쩔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매우 단순했고,불가항력적이었다. 테니스부원인 은영은 그저 평상시와 다름없이 학교 락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을 뿐이었다.그리고 혼자 늦게까지 연습한지라,방심했을 뿐이었다.

은영은 성에 굉장히 호기심이 많은 고교생이었다.무엇보다,프리섹스 주의자인 자신의 언니와 같이 살다보니 그것이 더욱더 증폭되었음은 말할것도 없었다.하지만 그것이 화근이었다.언니가 자주쓰는,조그마한 바이브레이터를 몰래 요리조리 보다가,언니가 들어오는 바람에 황급히 책가방에 넣었을 뿐이었다.그리고 당황한 마음에 그대로 학교에 와버린 것이다.

거기까지도 좋았다.테니스 연습이 끝나고, 모두가 다 집에 가있을때에 옷을 갈아입다가 그만 그 바이브레이터라는 녀석을 시험해볼 생각이 든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어설프지만 꼼꼼한 손길로 자신의 꽃잎위로 그 바이브레이터를 갖다 데었을 뿐이었다.

기분이 좋았다.뭔가 야릇했고 등뒤로 뱀이 지나가는것처럼 몸이 간질간질 했다.하지만 그녀의 호기심어린 행위는 계속되지 못했다. 이유는 알수 없지만 당시에 학교에 있던 민규와 준태에게 발각된 것이었다.

그들은 과감하게도 창문이 아닌 탈의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몰래 은영을 찍은것이었다.은영이 창문에 선팅이 되어있는 것만 보고 지나치게 안심한 탓이었다.

“너도 니가 자위하는거 보니까 흥분되냐?”

은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평소에 날라리 같은 행색에.몇번 치근덕대도 상대하지 않았던 부류가 바로 민규와 준태였지만, 자신의 치부를 들켰으니 어쩔수 없는 노릇이었다. 순간 준태의 손이 자신의 교복위 가슴을 더듬는다.

“왜..왜이래!”

“가만히 있어봐.그럼 이 동영상 지워줄테니까.”

은영은 하는 수 없이 준태의 손을 잡은것을 놓아주었다.그의 손이 우악스럽게 자신의 가슴을 주물럭 거린다.은영은 눈물이 울컥 나오는게 느껴졌지만,그럴틈도 없이 민규의 손이 자신의 치마 안 허벅지쪽으로 진입했다.

“흑..”

“와..씨발 내가 이 다리를 얼마나 만지고 싶었는데.진짜 죽인다.”

“야 가슴진자 쩌는데?브라우스좀 벗겨볼까?”

그들의 음담패설에 은영은 귀를 막고싶은 충동이 들었다.두려움이 몸이 부르르 떨린다.자신의 몸을 마구마구 주물러대는것보다 두려운것은, 10대 답지 않게 탐욕으로 가득차 있는 두 녀석의 눈빛이었다. 마치 이보다 더 한것을 해야 할것만 같은 두려움에 은영은 떨려왔다.

찌이익!

은영의 브라우스가 찢겨졌다.단추푸르기도 귀찮은건지,급해서인지,민규가 우악스럽게 손을 놀려버린것이다.

“이러지마..흑…제발 부탁이야..제발..”

“가만히 있어.이거 지워준다고 했잖아?싫은거야?”

그런 음란한 모습을 민규나 준태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개된다고 생각하니,은영은 숨이 막힐듯이 괴로워짐이 느껴졌다. 이윽고 귀여운 땡땡이 모양의 브라위로,고교생 답지 않은 빵빵한 가슴결이 드러났다.

“와 씨발…죽인다.”

준태는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둔것처럼 침을 꼴깍 삼키며,탐욕스럽게 은영에게 손을 가져다 대었다.민규는 죽어라 힘을 주고있는 은영의 다리를 강제로 벌려 팬티가 보이게 했다.

‘미친거 같아…이아이들…누가…누가 제발 도와줬으면..’

은영은 속으로 기도를 하고 또 기도했다.하지만 이런 빌라 주차장의 외진곳으로 누가 올리 만무했다.이들은 집요하게도 CCTV가 설치되지 않은 구석으로 자신을 끌고온 것이다.

“뜨어어억!”

순간 눈을 질끈 감았던 은영은 준태의 외마디 비명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끄어어어…”

준태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고 있었다.그리고 그의 가랑이 사이에는 누군가의 발이 직격해 있었고,그것은 천천히 준태의 가랑이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신음을 흘리며 픽 하고 쓰러지자,뒤에서 그의 사타구니 사이에 응징을 가한 인물의 실루엣이 보였다.

“이거이거.나도 착한짓하고 사는 놈은 아니지만,니들은 진짜 좀 맞아야겠다.”

준후는 혀를 끌끌 하고 찼다.물론 자신도 은하에게 저들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지만,그가 보기엔 준태와 민규가 그저 추악해 보일 따름이었다. 역시,사람이란것은 자기 얼굴에 묻은 흠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너..뭐하는 새끼야!”

신이나서 은영을 주물러 대던 민규가 그제서야 상황파악을 하고는 준후에게 달려들었다. 불행히도 민규는 모르고 있었다.준후가 비록 자신과 비슷한 나이지만,나름 인생에 굴곡이 많은 애늙은이라는 사실을.

고아원에는 왠갖 족속들이 다 모여산다. 부모의 사랑대신 지원이 잘 나오지 않는 궁핍함을 겪으며 자란 녀석들 사이에서는,매일을 쉬지않고 싸움이 일어난다.이유는 다양했다.누가 맘에 안들어서 하는 이유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거기에 대장노릇을 하려고,혹은 먹을거 하나라도 더 먹을려고 하는 이유까지 .

걔중에는 소년원을 들락거렸던 자신의 전적을 마치 훈장마냥 내새우는 녀석들도 있었다. 준후와 기주는, 보육교사의 눈이 미치지 않는 그런 고아원의 어두운 내면을 밥먹듯이 겪었던 부류였다. 자연스레 그저 부자 부모님 밑에서 껄렁댈줄이나 아는 민규가 상대가 될리 무방했다.

“으억!”

민규는 준후에게 알찬 펀치를 두드려 맞고는 대굴대굴 굴렀다.준후가 내지르는것은 보지도 못했고,그저 눈떠보니 바닥과 격하게 상봉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나 참 이해할수 없는 녀석들이네.잘 사는 놈들 같은데 뭐가 아쉬워서 범죄랑 손을 잡으려고 하냐?미친것들아.”

이윽고 달빛아래에 모습을 드러낸 준후를 보며,은영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도..독서실에 있는 사람이잖아.여길 어떻게 알고..’

빠직!

바닥에 구르고 있던 준태의 휴대폰은 준후가 잘근잘근 밟는 바람에 산산히 부숴져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준후는 아직까지 낭심에 강한 충격을 받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준태에게 다가가더니,그의 교복상의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뜨억!”

괜시리 발악을 했다가 주먹으로 미간을 후두려 맞은 준태는 또다시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준후는 벗겨낸 교복자켓을 은영에게 던져주었다.

“빨리 집에가.그꼴로 어떻게 다니려고.”

그제서야 은영은 준후가 찢겨진 자신의 브라우스를 가려주려고 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그녀는 황급히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준후가 준 교복으로 자신의 앞을 가리듯이 덮었다.

“고..고마워요.”

“됐어.그런말 들으려고 한거 아닌데 뭘.”

“왜 도와주신거에요?”

“나랑 비슷하긴 한데,동기가 불순한걸 참을수 없어서.”

“네?”

“아..별거 아냐.”

준후는 뭐라고 중얼중얼 거리더니만,이내 주차장의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은영은 그렇게 한참이나 뚜벅뚜벅 소리를 내며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달그림자가 길게,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준후의 몸위에 걸렸다.

야간자율학습이라는거,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그간 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곧장 집으로 가버렸던 그지만, 이제는 더이상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막상 공부를 시작하니 할만했다.시간도 잘갈 뿐더러,무엇보다 문제가 하나하나 해결될때마다 기분도 좋았다.

어찌보면,자신은 괜히 지루해 했던 것일지도 몰랐다.자신은 구속되어 있던 것이 아니었다.다만,상황에 맞게 돌파구를 찾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요새는 재미가 있었다.애늙은이 같은 성격이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늦게 여자라는 존재를 알아서 일까,그는 요새들어 부쩍 늘어나는 재미있는 일들에 길을 걷다가도 피식 웃었다.

“오빠아!”

집으로 가자마자 은수가 웃으며 자신을 반겼다.준후의 얼굴은 순식간에 찡그려 졌다.

“너 복장이 그게 뭐냐?”

“응?나?”

“그래 너”

“내가 왜?”

은수는 알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집인지라 편하게 나시티와 짧은 반바지만을 입고 있던 것이다.

올해 열일곱살의 은수.키는 크지 않지만,그녀의 몸은 서서히 발달하고 있는 듯했다.나시티위로 봉긋하게 가슴이 솟아 있었고,제법 목밑으로 약간의 볼륨도 보였다.게다가 짧은 바지 밑으로는 너무나 하얀 다리가 길게 뻗어 있다. 통통한 볼살과는 다르게 약간은 언벨런스하기 까지한 발육이었다.

“그게 뭐야.뭐라도 좀 입어.”

“뭐 어떠냐? 집인데…그리고 보일러 틀으면 덥단말이야.”

“누가 보면 어떡하냐?”

“누가봐?식구들만 있는건데.”

준후는 아차 싶어서 입을 닫아 버렸다.하기야,저런 은수가 상큼하고 싱싱한 여자로 보이는것은 준후 본인뿐일 것이다.은수에게는 준후가 이미 가족처럼 느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왠지 모르게 자신이 이상한 놈이 되어 버리는것 같아 준후는 화제를 돌렸다.

“은채누나는?”

“언니 아직 안왔어.”

“아직도?”

준후는 살짝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자신이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왔으니 벌써 10시가 다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응.아까 나한테 문자왔는데,언니 학교에서 동아리 회식인가?뭐 그런거 있다고 늦게 온다는데?열시 좀 넘어서 온다고 했으니까 금방올거야”

‘술도 못마실텐데…’

준후는 은근슬쩍 걱정이 되어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책가방을 벗어 내려놓았다.은수는 뭐가 재밌는지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언니 부럽지 않아?어른이라 술도 마실수 있고..그치?”

“넌 무슨 꼬맹이가 술이냐?고등학생이 발랑 까져가지고.”

준후는 은수에게 핀잔을 주었고,준후의 가방을 받아주며 그런모습을 보던 미진은 소리죽여서 웃었다.준후는 걱정이 되었는지,도로 현관밖으로 나갔고,은수는 괜시리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지도 고등학생이면서!칫!”




초겨울의 바람이 스산하게 불었다.입김이 나올 정도의 추위에 준후는 살짝 몸을 움츠리며,집앞에 있는 언덕길을 내려갔다.은수의 말로는 은채가 금방 온다고 했지만,준후는 거의 제로라고 해도 무방한 그녀의 치명적인 주량을 잘 알고 있었다.한때 은채가 막 성인 되었을때에,은하가 장난삼아 은채에게 술을 먹인적이 있었다.처음엔 은채가 꽤 술을 마신다고 생각했던 준후였다.하지만 정확하게 소주반병정도를 마시자마자 그녀는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기절해 버린 것이다.

‘그냥 적당히 분위기만 맞춰주면 될텐데.’

하기사,그녀가 그저 이야기만 나누면서 적당히 술을 마신다면,소주 두세잔에서 끝날수도 있을 것이다.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은채는 혀가 꼬일게 틀림없었지만.
한참을 서성이던 준후의 눈에,옆에 있는 놀이터가 눈에 들어왔다.아무도 놀지 않는 저 놀이터.가끔 취객이 자는 거빼고는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그리고 그곳은 은채의 아지트 이기도 했다.

조그만 그네가 보이자,준후는 아무렇게나 걸터앉고는 멀리 보이는 가로등을 바라보았다.

‘늘…여기서 나를 기다렸구나.’

문득 흥청망청 놀고온 자신을 위해 기다려주던 은채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그녀는 너무나 청순한 얼굴을 하고서,늘 이 작은 그네를 타고서 자신이 오는것을 저 멀리 가로등을 등대삼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쳇.왜 나같은 놈에게 그런 친절을 베푸는거야.넌 부잣집의 딸이고,나는 그냥 입양아일 뿐인데.엄밀히 따지면 남일 뿐인데.’

준후는 왠지 은채가 자신을 친동생처럼 사랑하는것에 불만이 느껴졌다.어째서일까,그토록 가족이라는 사랑에 목이마른,어찌보면 애정결핍자와도 같은 자신이 은채에게서 받는 가족애는 싫었다.왜일까…몇번이나 곱씹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그 어떤 수학문제보다 어려운 문제인것만 같다.

“은채야,괜찮아?걸을수 있어?”

“네..걸을수 있어요 선배.”

문득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 벌떡 일어난 준후의 표정이 굳었다.은채는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거리고 있었다.늘 청순하고,착한 이미지만 보여줬던 은채가 비틀거리면서,그것도 남자의 부축을 받는 모습을 보자 준후는 왠지 모르게 화가났다.

“집앞까지 바래다 줘서 고마워요.여긴 언덕이니까 저혼자 올라갈게요.”

“아냐.같이 가줄게.구두도 신어서 발 아플텐데.”

“괜찮다니까요.”

은채는 오늘따라 유난히 옷차림에 신경을 쓴 듯했다.하얀색 롱코트밑으로,검정스타킹을 신은 그녀의 다리가 보였다.긴 머리는 가지런히 정리해서 묶은 그녀는 천사처럼 이뻤다.그리고 하얀볼에는 술기운때문에 붉은 홍조가 가득했다.

준후는 점점 다가갈수록,은채가 말한 선배라는 존재를 자세히 볼수 있었다.그냥 봐도 평범한 대학생처럼 보였다.왠지 모르게,은채의 어깨를 감싸쥐고 있는 그의 손이 준후의 눈에는 거슬렸다.

“누나.”

준후가 입을 열자,은채도,그녀의 선배도 준후를 바라보았다.

“준후야.”

“왜이렇게 늦게와?”

“미안해…동아리에서 술자리가 있어서…”

준후의 딱딱한 표정에 은채는 괜시리 베시시 웃어보였다.너무나 귀엽고 이쁜 미소였지만,준후는 괜시리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은채의 옆에 서서 준후의 눈치를 보던 그녀의 선배가 준후를 보며 인사를 했다.

“아 은채 동생이니?나는 은채 선배야.만나서 반가…”

“빨리가자.너무 늦었으니까.”

준후는 딱 잘라 말해 버리고는 은채의 손을 잡아 끌었고,졸지에 어색하게 허공에 악수를 하게 된 은채의 선배는 멋적음에 머리를 긁적거리며 준후와 은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너 화났어?”

“내가 왜 화가나.”

“표정이 어둡잖어.”

“왜 술취해서 남자한테 안겨서 오냐?”

“무슨소리야.동아리 선배일 뿐이야.”

“그건 니생각이지.저 선배도 누나를 그냥 후배로 생각한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관두자.”

말을 멈춘 준후는 더이상 앞으로 걸어나갈수 없었다.은채가 심하게 비틀대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마신거야?”

“으음…네잔 정도.”

“많이도 마셨네.너한텐 무리한거잖아.”

“무리아냐.그리고 누나한테 너가 뭐니.”

“에휴.”

준후는 왠지 화가나서 뒤를 돌아보았다.그녀를 바래다준 대학생은 준후가 뒤돌아 보자 움찔 하더니 이내 허둥지둥 거리며 택시를 잡아탔다.

‘하기야,이쁘고,착하고,집안까지 좋으니.저런 파리가 붙는건 당연하겠지.’

준후는 구두를 신고 비틀거린 탓에,살짝 발목이 접질렸는지 쪼그려 앉아 자신의 발목을 매만지는 은채를 바라보았다.며칠전에 은하를만나고 와서일까,그녀와 심하게 비교가 되는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다.

“응?왜그래?”

“업혀.”

“아냐..나 걸어갈수 있어.”

“뭘 걸어가.서있지도 못하면서.”

은채는 자신의 앞에 쪼그려 앉은 준후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언덕만 올라가면 되었지만,준후는 계속해서 고집을 부렸다.

은채는 한참을 망설이다가,마지못해 준후의 등에 업혔다.자신의 허벅지를 잡아 업는 준후의 손에 은채는 잠시 움찔하기도 했지만,이윽고 동생이지만 너무나 포근한 준후의 등에 살짝 몸을 밀착시켰다.

은채특유의 향기,그리고 술냄새가 어우러져,준후는 왠지 모르게 어지러워 지는것이 느껴졌다.이윽고 은채가 자신의 목에 팔을 감자,준후는 묵묵하게 앞을 보며 걸었다.

“나…무겁지?”

“무겁긴 뭐가 무겁냐.좀 더 먹고 살좀 쪄라.”

“거짓말하지마.”

“진심이니까 살좀쪄.술로 살찌우지 말고.”

“미안해.이제 안마실게.”

자신의 귓볼을 간지럽히는 은채의 목소리.준후는 왠지 모르게 심장이 떨렸다.처음 강회장의 손을 잡고 이 집에 왔을때.밝게 웃어주던 은채를 처음 봤던 것처럼.

“공부는 잘 되가니?”

“아무렴 고3이 공부안할까봐 그래?”

“솔직히 너 안하긴 했잖아.”

“누나가 봤어?그냥 그땐 잠시 쉬었을뿐이야.”

너무나 퉁명스럽지만,일일이 대답을 다 해주는 준후의 모습에 은채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그리고 너무나 편안하게 준후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언제부터 기다린거야?”

“기다리긴 뭘 기다려.그냥 바람쐬러 나왔는데 만난거 뿐이야.”

“이런 추운날에 바람을 쐰다고?”

“뭐가 추워.이제 10월 말일뿐인데.”

준후의 등에 은채의 포근한 가슴감촉이 느껴졌다.그것까지는 괜찮았다.양손에 잡히는 그녀의 허벅지.살짝 힘이 빠지면 어김없이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올릴수 밖에 없었다.이상스럽다.가슴은 계속 요동친다.술을 마신건 은채인데,이상하게 자신이 술을 마신 것처럼 취하는것만 같았다.

“나야.문열어.”

두손을 못쓰는 준후대신 은채가 초인종을 눌렀고,이내 은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준후는 조용히 중얼거렸다.문은 끼익 하고 열렸고,현관쪽에는 은수가 문을 열었는지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이제 다왔으니까 내려줘.”

“안그래도 내려주려고 했어.”

대문앞에서 은채를 내려준 준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은채가 현관쪽으로 발길을 옮기지 않고,살짝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왜그래.”

준후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녀가 자신의 허리를 끌어 안은 것이었다.

“그냥…고마워서.”

순간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향기가 확 하고 준후의 코를 찔러왔다.그녀의 샴푸냄새,그리고 오늘따라 은은하게 풍기는 그녀의 화장품냄새,또 왠지 싫지 않은 은은한 술냄새 까지.

“많이 취했구나 너.”

준후의 말에 은채는 더욱더 힘을 줘서 준후의 허리를 끌어 안더니,이내 살짝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래…술때문인가봐.나 바보 같지?”

준후는 그녀의 눈망울을 바라보았다.달빛을 받아 더욱더 반짝거리는 입술.자기도 모르게 은채의 볼을 잡고 입을 맞추고만 싶었다.

“아얏!”

은채는 살짝 귀여운 비명을 질렀다.준후가 자신의 이마에 가볍게 꿀밤을 먹이고는 걸어갔기 때문이었다.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서 자.술도 약하면서 술좀 먹지 말고.”

투덜대듯 무뚝뚝한 말투로 들어가는 준후.그런 준후를 따라서 걸으며 은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네에…”






“오빠오빠!나좀 도와주라..응?”

“뭘?”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책가방에 있는 책을 챙기려던 준후는 은수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토요일인지라 학교는 빨리 끝났고,어김없이 준후는 독서실로 가려던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큰언니 온데!”

“뭐?”

은수는 잔뜩 울상이 되서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말을 이었다.

“나 방정리 안하면 큰언니한테 혼난단 말야.오빠도 언니 성격알잖아.”

준후의 머리속으로,문득 저번주에 은하에게 주말에 오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급하긴 급한 모양이로군.하기야 자신의 치부가 내 핸드폰과 컴퓨터에 고스란히 있으니.’

이미 이메일의 첨부파일을 자신의 컴퓨터에 다운을 받아논 준후였다.은하로써는,하지 않을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냥 대충니 스스로 치워.누가 그렇게 평소에 더럽혀 놓으래?”

“칫!치사해!옛날엔 자주 도와 줬으면서!”

“내가 너 혼내지말라고 이야기해 볼게.”

“거짓말 하지마!오빤 큰언니랑 사이도 안좋아서 말도 안하잖아.”

“아 글쎄 안혼나게 한다니까.”

“핏!됐네요!”

은수는 잔뜩 토라진 얼굴로 밖으로 나가 버렸고,준후는 편한 복장을 한채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강은하가 온다면…오늘 독서실은 하루 쉬어야겠군.’

재밌는 일이 벌어졌는데,독서실따위에 갈 준후가 아니었다.게다가 요즘들어 부쩍 스피드업을 한 덕분에,그닥 갈 필요성도 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똑똑똑.

은수가 나간지 조금 되었는데도.다시금 들려온 노크소리에 준후는 살짝 방문을 바라보았다.

“뭐..하고 있어?”

방문을 열고 들어온것은 다름아닌 미진이었다.그녀는 깔끔한 앞치마를 두른채로,준후의 방안으로 들어왔다.

“아..그냥..지금 씻었어.”

둘이 있을때는 반말.그것이 둘 사이에 있는 은밀한 비밀이었다.물론 그 내막에는 둘만이 알수잇는 많은 일들이 있기도 했다.

“무슨일이야?왠일로 내방에..”

“그냥..오늘 은하 온다더라.”

“들었어.은수에게.”

“나 그럼 그 아이를 처음 보는거네.”

“그렇겠지.”

무뚝뚝하게 말을 하는 준후지만,그는 미진의 눈에 있는 아쉬움이라는 단어를 읽어내고 있었다.그도 그럴것이,한동안 그녀와의 은밀한 밀회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미진이 직접 찾아온것은 의례적인 일이었다.

“잠깐 시간있어?”

그녀의 말에서 은밀함이 베어 나왔다.준후의 시선은 미진의 다리로 향해 있었지만 그는 머릿속에서 올라오는 생각을 정리해버렸다.

“가족들이 있잖아.은채도,은수도.”

“언젠 없었나뭐?”

“그땐 잠들어 있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준후의 관심사는 오늘 오는 은하에게 쏠려있었다.그때 잠깐 보았던 그녀의 다른 모습.오늘은 그런 그녀의 다른 모습의 정점을 볼수 있게 될 것이다.

띵동.

준후에게로 다가오려던 미진의 발걸음이 뚝 하고 멎었다.1층에서 초인종 소리와 함께,인터폰을 받는 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은하라는 아이가 온건가?”

미진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잔뜩 베어있었다.그녀는 할수 없다는듯 몸을 돌려 준후의 방문을 나서고 있었다.

‘왔구나…강은하.’

묘하게 설렌다.준후는 요 며칠 자신의 머리속에 꽉 차있던 공부에 관한생각을 잠시 접어두었다.달빛은 너무나 청명하게 준후의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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