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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꿀물 - 19


소파에 마주앉은 세 사람 성민과 연희, 수희는 모두 입을 굳게 다문 채 말 없이 한동안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답답함이 코를 막을 즈음 그래도 제일 연장자인 연희가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잘못 생각 한 것 같아. 너무 내 기분에만 취했던 것 같애. 수희야 미안해.”



“아니야 언니. 미안 하긴. 언니 기분도 이해 해. 하지만....”



“그래 이제 나도 알겠어. 성민이 기분은 생각지도 않고 너무 내 생각만 한 것 같아. 성민이 장래도 생각 했어야 하는데."



“언니.”



그렇게 두 자매는 손을 꼭 잡고 서로를 보듬어 안으며 위로를 하였고 성민은 맞은편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는 분위기를 살피며 조용히 관망 하고 있었는데, 학교를 마치고 들뜬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두 여자들의 대화를 듣고는 그만 불같이 일었던 성욕에 찬물을 쏟아 부어 꺼 버리는 기분이 되어 버렸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아직 학원에 가도 늦은 시간이 아니었고 어차피 연희와 수희는 다시 성민을 찾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난 이만 학원에 가 볼게. 두 사람 얘기 계속해.”



“어?...어..그래 조심해서 같다와.”



“자기야 공부 잘하고 와.”



성민은 그렇게 두 여인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빠져나와 학원으로 향했는데, 막 아파트의 입구를 빠져 나올 때 민정이 마트에서 물건을 잔뜩 사들고 나오는 모습이 눈에 띄였다.



“어! 아줌마 뭘 그리 잔득 샀어요?”



양손에 한가득 짐을 들고 땅만 보고 걷던 민정은 성민의 말소리에 고개를 들어 성민을 확인 하고는 안면 가득 기쁨의 빛을 띄우며 반겼다.



“아! 난 또 누구라고 성민이 구나. 그냥 이것저것 조금 샀어. 저녁 꺼리도 다 떨어지고 해서.”



“네..그러세요.”



“성민인 어디가? 학원?”



“네...좀 늦긴 했지만 학원가는 길이에요.”



“응...그렇구나. 그...근데 있지”



“네?”



“요즘 많이 바쁘니? 문자해도 통 답을 안 해 주니.”



민정은 그 동안 성민에게 수차례 문자로 연락을 취했지만 성민이 한 번도 답장을 해 주지 않아서 못내 섭섭하게 생각 하고 있었는데 마침 성민을 만나게 되어 그 이유라도 알고 싶어 조심스럽게 운을 띠웠다.



“네...요즘 신학기라 좀 바쁘네요. 참 저 동수랑 짝이에요. 요즘은 소희랑 학원도 같이 다니구요.”



성민은 더 이상 민정이 자신에게 음욕을 품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동수와 소희를 거론하며 민정과의 거리를 두려 하였고 이에 민정은 조금 쑥스러웠던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는



“그...그렇구나....공부는 잘 되니?”



“네..그럭저럭요. 동수도 열심이고 소희도 학원까지 등록하고 열심히 공부 하는데요 뭘.”



“으...응.”



민정의 속은 답답하였다. 자신의 활화산 같은 성욕은 남편이 감당하기 힘들었고, 어쩌다 친구들과 놀러간 나이트에서 만난 섹파와 뜨거운 정사를 벌이다 성민에게 들켜 스스로 몸을 열었지만 성민의 놀라운 정력과 대물을 느끼고 체험한 후로는 다른 어떤 남자도 눈에 차지 않아 늘 성민의 우람한 자지를 생각하며 뜨거운 몸을 달래고 있었는데, 성민은 그런 자신과 자꾸만 거리를 두려하니 안달이나 죽을 것만 같았다.



“저기...근데 성민아.”



“네. 말씀 하세요.”



“내가 있지......”



“네?”



“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몸을 식혀 줄 남자는 너 밖에 없는 것 같아.”



“아주머니!”



“알아. 너 소희랑 사귄다는 것도. 동수랑 짝이라는 것도...하지만...하지만 내가...내가 안되겠어...나......너 아니면..안돼는 것 같아...”



“후.....”



성민은 기가 막혔다. 동수와 소희까지 거론하며 민정의 음욕을 말리려고 하였지만 민정은 그런 성민의 말에도 불구하고 더욱 성민에게 매달리며 갈망을 하였고 성민이 아니면 자신의 성욕을 만족시켜 줄 남자가 없다는 말에는 이 여자를 이대로 두었다가는 소희의 집에 큰 화가 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달 하게 되었다.



“성민아.”



민정은 애절한 눈빛으로 성민을 부르며 바라보았고, 성민은 그런 민정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다가 결심을 굳힌 듯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아주머니.”



“응?”



“도저히 안돼 겠어요? 아저씨도 계시고 동수란 소희도 있는데 두요.”



“그...그래..너 아니면.....”



“그럼 하는 수 없죠. 대신 소희를 아껴 주세요. 친달 같이 그렇게요. 그럼 제가 아무머니 계속 만나 드릴게요.”



“응...시키는 일은 뭐 던지 할 테니까..그러니까..”



“됐어요. 소희나 잘 챙겨 주세요.”



“알았어....그럼 나 계속 만나 주는 거지?”



“네...아주머니 하는 거 봐서요.”



“잘할게. 소희한테도 그리고 너 한테도.”



“네..알겠어요. 저 먼저 갈게요 학원 많이 늦었거든요.”



“응..그래 조심해서 가.”



민정을 뒤로 하고 학원으로 향하는 성민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이유야 소희를 위하는 것이지만 어찌 되었거나 민정과의 관계를 지속 하다가는 분명 소희가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소희의 충격은 성민이 상상하기 힘들 것이 분명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으로 한참 길을 걷던 성민이 대로변을 지나 학원이 위치한 골목길에 접어들었을 때 두 남녀가 심각하게 언쟁을 하는 목소리가 들렸고 여자의 목소리가 귀에 익은 듯하여 저절로 발길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는데 성민이 서 있는 골목과 접하여 안쪽으로 또 다른 골목길이 있었고 목소리는 그 골목의 안에 있는 원룸 건물의 주차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골목의 귀퉁이에 몸을 숨기고 귀를 쫑긋하여 남녀의 대화에 집중을 하는 성민에게 너무나 귀에 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돼. 그만 가봐. 너 왜 자꾸 이러니? 안된다고 했잖아.”



“야! 최 순정 너 진짜 너무 하는 것 아냐?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데, 이러지 말고 그만 내 마음 좀 받아 주라. 응?”



바로 여자의 목소리는 최 순정선생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성민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지만 지금 들리는 내용만으로는 순정이 상대 남자의 요구나 부탁을 거절 하는 것 같았고 남자는


그런 순정에게 애원을 하는지 아니면 부탁을 하는지 옥신각신 중이었다.



“기범아. 니 마음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난 아니야. 너 이러지 말고 다른 여자 찾아 봐. 응


난 아니야. 그럴 마음도 없고 여유도 없어. 제발 그만 좀 해줘 부탁 할게. 응“



순정의 그 말에 기범이라는 남자는 우왁스럽게 순정의 팔을 잡더니 주차장의 기둥에 밀어 붙이고는 숨을 씩씩거리더니



“너 이 씨팔. 오늘은 그냥 못가. 말로 안돼면 힘으로라도 널 가질거야. 그래서 널 내 여자로 말들겠어.”



“안돼. 하지마. 그런다고 내 마음이 변하는 것도 아니고. 니가 만약 그러면 서로에게 상처만 돼. 제발 정신 좀 차려 기범아.”



“난..지금 정신 말짱해. 순정아. 이제 더 이상 너 쫒아 다니기도 힘들어 그러니 오늘 결판을 내자.”



“기범아. 너 지금 술 때문에 이러는 거야. 넌 착한 애잖니. 제발 이러지 마.”



“씨팔..입 다물고 가만있어. 내게 설교 하지 말란 말이야.”



기범이라는 남자의 언성이 높아졌고 순간 ‘짝’하는 소리와 함께 기범이라는 남자의 얼굴이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어라...이년이...너 지금 날 때렸어...그래 어디 함 해보자...나도 이제 이판사판이다.”



순정의 팔을 다시잡고 주차장 안으로 끌고 가는 기범이라는 남자의 모습에 성민이 불안감을 느꼈고 어떻게 해야 순정이 이 위기를 넘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별 뾰족한 수는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자기보다 덩치가 더 커 보이는 남자에게 무작정 달려들 수도 없는 노릇 이었는데 마침 성민의 눈에 순정이 끌려간 원물 건물의 맞은편 가정집에서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는 아주머니를 발견 하였는데, 그 아주머니도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지 그 원룸 건물을 기웃거리는 것을 보고는 성민이 달려가 자초지종을 설명 하였다.



“그러니까 아주머니께서는 여기서 제가 도와 달라고 외치면 그냥 누구야 라고만 좀 해주세요. 네?”



“응..학생 그거야 뭐 어렵겠어. 그나저나 학생은 괜찮겠어?”



“네...”


성민은 짤막한 대답을 남기고 주차장 안으로 뛰어 들어 갔고, 저만치 순정의 몸위에 올라타순정과 옥신각신 중인 기범이라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주차장 밖을 향해 소리를 쳤다.



“그기 누구 없어요. 여기 여자 두들겨 패는 놈이 있어요. 누구 좀 도와주세요.”



성민의 고함 소리는 반 지하로 이루어진 주차장 안을 쩌렁쩌렁 울리며 메아리 쳤고 그 소리에 놀란 기범이라는 남자는 순정의 몸에서 부리나케 떨어지더니 소리가 난 쪽, 성민을 보더니 놀란 토끼마냥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마침 주차장 밖에서 성민과 약속을 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기 누구야...누가 여잘 패고 있어?”



그리고는 주차장 안으로 뛰어 들어오고 있었는데 어디서 구했는지 손에는 조그만 몽둥이가 하나 들려 있었고 그것이 위안이 되었는지 그길로 바로 기범이라는 남자에게로 달려가더니



“너 이놈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여잘 두들겨 패고 있어. 너 나한테 죽어 봐라 이놈아.”



아주머니의 기세에 놀란 기범은 그 아주머니를 피해 성민이 있는 쪽으로 달려오더니 성민을 확 밀쳐 버리고 그대로 밖으로 도주를 해 버렸다.



“헉..헉...아이고 그 놈 빠르기도 하네. 학생 나 잘했지?”



“네...고맙습니다. 아주머니.”



“고맙긴. 이 정도야 뭘. 아참! 이럴 때가 아니지.”



아주머니는 성미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우쭐거리다 순정이 생각났는지 저 만치 바닥에 스러져 있는 순정을 향해 뛰어 갔고 성민도 그 아주머니를 따라 순정에게로 뛰어 갔다.


순정의 얼굴은 주먹에 맞았는지 한쪽 눈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셔츠의 앞섬이 찢겨져 우유 빛 살결의 유방 골과 브래지어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아가씨 괜찮아요. 어때?”



그제야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성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정은 쓰러져 있던 바닥에서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더니 성민을 향해 달려와 와락 껴안더니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흐흐흑...성민아 고마워!”



“아니에요 선생님. 고맙긴요. 여기 아주머니께서 안계셨으면 큰일 날 뻔 하셨어요.”



성민의 말에 순정은 성민의 가슴팍에서 얼굴을 때고는 아주머니를 향해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고마움을 표시 했고 아주머니는 큰일은 안 당해서 다행이라고 하면서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


아주머니가 주차장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순정은 다시금 성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한동안 서글프게 울먹이다가 겨우 진정이 되었는지 울먹임을 멈추고는 고개를 들어 성민을 보았고



“고마워. 성민아. 너 아녔으며.”



“아니에요. 선생님이 위험에 처 했는데 제자로서 당연한 일이죠 뭐. 히히”



“호호호. 내가 제자 하나는 잘 뒀네.”



“네...당근이죠.”



“고마워.”



“근데 선생님 아까 그 사람 아는 사람이었어요?”



“응. 대학 친구야. 애는 착한데 좀 많이 집착하는 성격이 있어. 그만 가자 또 올까 겁나.”



“아참. 내 정신 좀 봐.”



성민은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순정의 상체를 가려줬고 그런 성민의 배려에 순정은 고운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계단을 타고 올라간 이층 203호, 순정은 바로 그 건물의 이층 원룸에 혼자서 생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들어와.”



현관문 밖에서 우물쭈물 거리는 성민에게 순정이 들어오라는 말을 하였고 성민이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향긋한 화장품 향기가 코를 자극해 들었고 깨끗하게 정돈된 침대가 우선 눈에 들어 왔는데 하얀 솜이불 매우 정갈하게 보였다.


침대와 현관문 사이의 조그만 씽크대를 지나 방으로 들어선 성민은 조그만 화장대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는 화장품들을 발견 하였고 그 화장품들의 한쪽엔 조그만 액자들도 보였다.


그리곤 그 액자들의 사진에서 눈을 때지 못하고 말뚝을 박은 듯 그 자리에서 굳어져 사진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는데, 여러 개의 액자들 속에 유독 성민의 눈을 사로잡은 액자는 순정이 앳된 모습으로 꽃다발을 안은 채 한 남자와 찍은 사진이었는데 배경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고등학교 졸업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성민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순정의 앳되고 귀여운 모습이 아니라 그 사진 속의 남자, 바로 그 남자였다.

순정의 집을 나와 학원으로 향하던 성민은 가슴 한구석이 꽉 막히는 듯 답답하여 숨이 턱 턱 막혀 왔다.


조그만 액자의 사진 속 남자는 분면 지난겨울에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틀림없었다. 아버지는 엄마와 결혼하여 한 번도 외도나 그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이 없다고 여겼고 성민이 자라면서 항상 가정에 충실한 모범적인 분이었는데 어떻게 순정과 같이 사진을 찍었는지 도무지 그 연유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성민의 답답함은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순정에게 액자 속의 남자가 누구냐고 물어 볼 수도 있었지만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는 도무지 입 밖으로 뱉어 낼 수가 없었다. 그만큼 성민은 아버지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이 컸던 것이다. 엄마인 연희와 살을 섞어 모자상간을 저질렀기 때문에 집안에 있던 아버지의 사진도 모두 치워 버렸는데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아버지의 사진을 보게 되니 사진 속의 아버지가 성민을 보고 꾸지람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 것이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였다.


‘후....답답하네. 아버지가 어떻게 최 순정샘이랑 같이 사진을 찍었을까? 혹시 나나 엄마 모르게 바람이라도 피우신 걸까? 아! 미치겠네.’


성민의 마음은 마치 잘 풀리던 비단실 꾸러미가 마구 뒤섞여 엉켜 버린 것 같이 모든 것이 일순간에 뒤엉켜 버렸다.


학원도 마다하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인양 잘 떼어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귀에는 웅웅거리는 울림이 들려오는 듯하였다.



순옥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무언가 열심히 타이핑을 하는 중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작업을 하던 순옥이 책상 서랍에서 도장을 하나 꺼내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방금 작성한 문서에 힘껏 눌러 찍었다.



“됐어. 완벽해. 이제 날짜만 기다리면 되는 거야...호호호 그리곤 이 지긋지긋한 한국 땅을 떠는 거야.”



순옥의 말로 미루어 보아 모종의 계획을 마무리하고 이제 디데이만 기다리는 듯 했는데, 그 계획 이란 것이 분명히 연희에 대한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것이었다.



“대철씬 대체 뭐 하는 거야. 여태 전화 한 통도 없고.”



순옥은 답답한 마음에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누르고 신호가 가기를 기다렸다.



“대철씨! 어떻게 됐어? 잘 돼가?”



“응. 알았어. 조금 있다 봐. 내가 좋은 거 선물 해 줄게. 호호호호.”



통화를 마친 순옥은 대철이란 사내를 만나려는 듯 화장을 고치고 책상을 정리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소등을 하고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누른 후 엘리베이터실 위쪽에 위치한 안내 시그널을 보니 일층에서 출발 했는지 천천히 불빛들이 한 칸씩 올라가는 게 보였다.


‘띵똥’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막 오르려는데 안에서 허겁지겁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내렸고 그 때문에 순옥과 약간의 부딪힘이 있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엘리베이터에 올라 일층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길 기다렸다.



그런데 순옥과 부딪힌 여자아이, 그 아이는 바로 소희의 친구인 돌대가리 년 명희였다.



“가만있어 봐라. 소희가 분명 이층이라고 했는데 809호라..어디 보자.”



명희는 소희의 지시를 받고 순옥의 사무실을 찾아 왔던 것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809호를 찾던 명희의 눈에 [809]란 팻말이 붙은 문을 발견하였고 문손잡이를 잡고 좌우로 돌려 보았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킥킥...이런 문이야 누워서 떡 먹기지.”




명희가 가방을 벗어 가느다란 쇠꼬챙이 비슷한 것을 꺼내더니 문의 열쇠 구멍에 넣고 몇 번 이리저리 돌리자 문이 스르륵하고 마치 열쇠로 연 듯 자연스럽게 열렸다.



“오케이...그럼 이제 슬슬 작업을 해 보실까. 키키킥 이거 내가 마치 첩보영화 주인공 같은 기분이네.”



순옥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명희는 재빨리 문을 다시 잠그고는 곧바로 책상의 컴퓨터를 부팅 시켰고 능숙한 솜씨로 자판을 두드리면서 무언가를 찾는 듯 보였다.



자신의 사무실에 도둑고양이가 숨어든 지도 모른 순옥은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출발하여 쭉 뻗은 도로를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질주를 하였다.


그렇게 한 십 여분을 달린 순옥은 한적한 교외, 아담한 모텔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주차장에 딸린 조그만 출입문을 통하여 모텔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됐다...증거 확보. 소희 년 맨 날 날보고 돌대가리라고 놀리기나 했지..키키킥 나한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을 꺼다. 근데 이년도 참 대단한 년이네, 인감이랑 모든 문서를 위조 할 생각을 다 하다니. 하여튼 이년도 오늘로서 인생 종 치는구나 나쁜 년.”



명희는 득의에 가득 찬 표정으로 순옥의 사무실을 나서고 있었다. 등에 맨 가방에는 손옥의 컴퓨터를 해킹해 얻은 증거 자료와 파일들을 넣은 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소희와의 약속 장소로 이동을 하였다.



“아..씨발 존나 머네. 씨발 년 지가 택시비라도 좀 주지. 나 같은 거지한테. 아우 시파 다리 아프네.”



땀을 비오 듯 흘리며 뛰어가는 명희의 모습은 마치 마라토너가 결승점을 향하는 듯 있는 힘을 다하고 있었고 마침내 소희와 성민이 사는 아파트의 지하 보일러 입구에 도달하여 턱 까지 차오른 숨을 갈무리하며 어깨를 들석 거렸다.



“헉...헉...씨발 내가 미쳤지 그 놈의 동수가 뭔지, 좆 맛이 뭔지...아우....하여튼 오늘 동수가 없기만 해봐 이년.”



가진 재주에 비해 단순하기 짝이 없는 명희였다. 소희는 그런 명희를 아주 시의적절하게 이용해 먹은 것이었고 그 미끼가 다름 아닌 동생인 동수였다.


동수도 소희의 제안에 그다지 반대 하지도 않았고 걸레긴 하였지만 서서히 손 연주선생의 보지에도 질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쯤 더 명희의 보지 맛을 보다고 하여 나쁠 건 없었기 때문에 누나인 소희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 들여 명희로 하여금 순옥의 사무실을 털게 하였던 것이다.



“야. 이년아 왔으면 들어오지 거기서 뭐해?”



“알았어. 씨발년아 숨 좀 돌리고. 깝치긴.”



명희가 보일러실 안으로 들어서자 소희가 보일러실의 파이프에 걸터앉아 팔짱을 낀 채 명희를 쳐다보고 있었고 소희의 옆에는 동수가 잔뜩 기대에 부푼 모습으로 소희와 명희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야. 어떻게 됐어? 잘 했어?”



“그래 이년아 내가 누구니? 왕년에 대도로 이름 날리던 조세영의 딸 아니냐.”



“흐이그, 씨발년 그것도 자랑이라고.”



“그럼 자랑이지.”



명희가 어깨에서 가방을 내려 소희에게 내밀며 자랑스러운 듯이 어깨를 한번 으쓱하며 순옥의 사무실에서 얻은 자료들에 대하여 얘길 하기 시작했다.



“요건 꽤 중요한 파일인데 그 년이 파일을 지워서 복구 하는데 애 좀 먹었어. 아마 이게 그년 엮는데 결정적 역할을 할 거야. 그리고 나머지 것들도 좀 있는데 그 년 일벌인 게 한 두건이 아닌 것 같아. 자세 한건 파일을 열어 봐야 알겠지만 얼핏 보기에도 액수가 제법 되는 것 같던데. 그 년 한탕 제대로 하려고 한 것 같아.”



“오...명희 너 대단 한데 너 같은 돌대가리가 어떻게 그런 걸 자세히 알 수가 있니?”



“씨발년, 내가 공부를 못해서 그렇지 이런 건 아버지한테 배워서 너 보다 나아. 알간.”



“알았다 이년아. 니 말대로 이것만 있으면 그 년 콩밥 먹이는 건 일도 아니라 이거지?”



“응. 확실해.”



“좋아. 자 이거 받어.”



“이게 뭐니?”



“이년아 너 여기서 떡 칠거냐? 떡 값이다 떡 값. 텔이나 가서 떡쳐.”



“햐...니가 왠일이냐? 이런 걸 다주게.”



명희는 소희가 내민 떡값을 얼른 받아들고 동수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고


동수도 명희의 눈웃음을 보고는 씨익 웃으며 명희에게로 다가가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야아..좀 참아...밤은 길고 시간은 많거든.”



명희가 동수의 손을 엉덩이에서 때내며 팔짱을 끼며 말을 하였고 동수도 명희의 말을 맞받았다.



“명희누나. 오늘 그 밤과 시간이 엄청 짧다는 걸 실감하게 될 거야.”



“호호호..기대할게 동수야.”



소희는 명희에게서 받은 가방의 내용물들을 확인 하고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보일러실을 나섰다.



“나 먼저 갈게. 시간 더 가기 전에 얼른 가봐.”



“응..소희야 내일 봐.”



“누나. 집에 가는 거야?”



“아니. 마이 딸링 만나러.”



보일러실을 나서며 휴대폰으로 성미에게 전화를 한 소희는 마침 성민이 학원에서 집으로 오는 중이라는 말을 듣고는 아파트 입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하고는 입구에서 성민이 도착하기를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뒤이어 나온 동수와 명희가 그런 소희를 발견 하고는 의아 하다는 듯이 물었다.



“누나 성민이 만나러 안가?”



“응...이리로 오는 중이래. 그래서 기다리는 거야.”



“아! 그렇구나. 우린 간다.”



“응.”



동수와 명희가 저만치 사라져 갈 때 까지도 성민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렇게 한참을 더 기다려서야 성민이 아파트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야! 너 뭐하느라 이제 오는 거야. 얼마나 기다렸는데.”



“아..미안 미안 그냥 좀 생각 할 게 있어서 천천히 걷느라고.”



“치잇. 내가 전화 했는데도 늦게 오고.”



“미안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


“쳇. 난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인 대두. 너 아마 놀라 자빠질 꺼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야?”



“그럼. 여기선 설명하긴 뭣 하니까 니네 집으로 가자. 엄청 중요한 일이야 니네 엄마가 알아야 할 일이거든.”



“그래. 그럼 어서가자”



성민이 소희의 어깨에 팔을 걸자 소희가 어깨에 걸쳐진 성민의 손을 두 손으로 꼬옥 잡은 채 성민의 집으로 향하였다. 두에서 본 그들의 모습은 다정한 연인이 데이트를 즐기는 것처럼 보기 좋았지만 실상 성민의 마음속은 수많은 실매듭이 얼기설기 꼬여 쉽사리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성민과 소희가 나란히 집안으로 들어오며 인사를 하자 연희와 수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듯이 소희를 쳐다보았고 소희는 그런 연희와 수희를 바라보며 어깨에 가방을 풀어 보이며 연희에게 말을 하였다.



“어머니. 저 오늘은 놀러 온 게 아니구요. 어머니께 중요한 일이 있어서 왔어.”



“어?..어..그래. 그냥 놀러 와도 돼. 소희야. 근데 중요한 일이라니?”



“저기 어머니, 이모님 성민아 잠시 컴퓨터 좀.”



소희가 성민을 향해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안내 하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였고



“어. 컴퓨터 내 방에 있어.”



성민이 앞장서 안내를 하였고 그 뒤로 성민의 여인들이 졸졸 성민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갔다.


소희가 의자에 앉아 컴퓨터에 명희가 복사한 USB를 꽂고 그 안에든 파일들을 일일이 열어 보여주자 연희와 수희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며 놀라움 금치 못하고 있었다. 지금 오픈 준비 중인 커피 전문점의 양도 계약서와 계약 대리인 지정서, 그리고 인테리어 공사 계약서등이 포함되어 있는 파일들 이었다. 특히 인테리어 계약서는 연희가 보았던 금액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 계약서로 약 오천만원 가량이나 금액 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이..이럴 수가.”



수희가 놀람과 동시에 심한 배신감을 동시에 느끼며 격한 반응을 보였지만 연희는 그 와중에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고 소희에게 이 서류들의 출처를 물었다.



“소희야. 너 이거 어떻게 구한 거니?”



“말씀 드리자면 좀 긴데요. 며칠 전에 제가 볼일이 있어 어머님가게 근처엘 갔었는데요. 어머니가게 일이 잘 되는지 궁금해서 살짝 구경하려고 들어갔는데 어떤 여자의 전화 통화 내용을 엿듣게 됐어요. 근데 그 통화 내용이 일이 잘됐고, 한몫 톡톡히 건질 수 있다. 서류는 완벽하게 위조 했다. 뭐 그런 내용들 이었어요. 그래서 몰래 그 여자를 미행해서 사무실을 알아 뒀다가 오늘 친구에게 부탁해서 사무실을 털었는데 이런 서류 파일들이 들어 있었어요.”



“후우....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 다더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정도 일 줄이야.”



“어머니도 짐작하고 있으셨어요?”



“나도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로 용의주도할 줄은 미처 몰랐어 언니. 하마터면 큰 일 날뻔했다. 소희 니가 큰일을 해냈구나.”



“이모님도 별말씀을...쑥스럽네요..호호”



세 여인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순옥의 치밀함에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 성민은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다가 머리에 떠오르는 계획이 있었다.



“음...소희야 이 파일들 유출 된걸 그 여자가 알아챌까?”



“아마 모를 걸. 내 친구가 공부는 좀 뒤처져도 컴퓨터 해킹은 일가견이 있거든.”



“그럼 됐어. 모두 오늘 본 파일들에 대해서는 당분간 함구하기로 하고 일단 가게 오픈이 중요하니까 오프 하루 이틀 전에 신고하기로 해요. 지금 신고 해 버리면 잘못 하다간 오픈에 큰 지장을 초래 할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성민의 제안에 연희와 수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하였고 소희는 성민의 영특함에 함박 웃음을 머금은 채 배시시 웃으며 쳐다보았다.



“엄마는 이 파일들 잘 간추려서 고소장 미리 작성 해 두시구요. 소희는 좀 힘들겠지만 그 여자 감시 좀 해 줄 수 있겠니?”



“어..알았어 성민아.”



“응...그런거 하나도 안 힘들어 애들 두어명 풀면 뭐..그가이꺼...헤헤헤헤”



“이모는 이사도 해야 되고 몸조리도 해야 되니까 구경만 하세요...히히히”



“쳇..나만 왕따네 뭐..하는 수 없지 뭐 성민이가 시키는 건데 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란다.”



이렇게 성민과 여인들이 순옥에 대한 대책을 마련했을 때 순옥은 한 남자의 품에 안겨 흥분에 겨운 교성을 헐떡이며 쾌락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하앙...하아.....흐으응”



침대위에 남자를 깔고 앉은 순옥은 가랑이를 벌려 시커먼 힘줄이 툭 툭 튀어나온 자지를 뿌리까지 보지로 집어 삼킨 채 열심히 허리를 앞뒤로 놀려가며 희열에 들떠 머리카락을 감싸쥐고 고개를 마구 흔들어 대고 있었다.



“하앙..하아앙....대철씨..나 좋아 응?”



수농ㄱ에게 대철이라고 불린 사내는 연신 순옥의 유방을 두 손으로 쥐어짜듯 주물럭 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다 순옥의 말을 듣자 가쁜 숨을 참으며 흥분된 어조로 대답을 하였다.



“그럼...순옥씨. 요번 계약만 잘 성사 시켜주면 내 한 몫 톡톡히 챙겨 줄테니. 잘 좀 부탁해.”



“아잉...하앙..대철씨 지금 한 말 진짜지 나 믿어도 되는거지?”



“그럼...그 커피 전문점 자리가 워낙 몫이 좋아서 내가 계약 하려고 했는데 한발 늦어 버리는 바람에 포기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이런 횡재수가 생길 줄이야.”



“호호호..그게 다 이 강 순옥의 능력 아니겠어.”



“그래. 그래. 어유...요 이쁜 것.”



순옥은 대철이라는 사내를 자신의 육체로 유혹하여 사기의 또 다른 제물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성민과 그의 여인들이 순옥의 처리 방안에 대한 논의를 마친지도 어느듯 오일이 흘렀다.


날씨는 완연하게 봄이 무르익어 가로수의 새순들이 연녹색의 옷을 서서히 진하게 물들여 가고 있었고, 연희의 가게도 막바지 작업으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며 테이블과 커피 머신들이 재 자리에 틀어 앉아 구색을 맞춰 나갔다.


성민은 학교에서 순정에게 몇 번이나 아버지에 대한 질문을 하려다 행여나 순정이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을까 염려되어 목구멍까지 올라 왔던 궁금증을 최 순정선생 몰래 되삼켜 억누르며 며칠을 보내었다.


꼬여버린 실타래의 마지막 마디를 쥐고 있는 순정이었지만 성민은 좀처럼 실마리를 풀지 못하며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고 교내 식당에서 순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식을 받아 마지막 수저를 뜰 때까지도 순정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수저를 내 던지듯 식판에 던져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빠져 나가 버렸다.


운동장엔 아이들이 점심시간 휴식을 틈타 축구와 농구를 즐기고 있었고, 그 가장자리 양지 바른 벤치에 삼단 같은 긴 머리를 바람결에 날리며 앉아 있는 순정의 모습이 성민의 눈에 비춰오자 굳게 다물어 졌던 입술이 벌어지며 새하얀 치아가 살짝 드러나 보였다.


걸음걸이가 빨라지며 점점 더 순정의 하얀색 블라우스에 새겨진 꽃무늬가 눈앞에 아른 거렷다.



“이제 오니?”



“네. 식사는요?“



“별로. 생각이 없어서.”



“어디 아프세요?”



“아니. 왜? 아파 보이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그래 보여요.”



“음료수 마실래?”



“아뇨. 괜찮아요.”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순정은 눈길은 운동장에서 떠날 줄 몰랐다.


공허함이 묻어나는 순정의 눈동자에 성민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깊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성민의 단상을 깨우는 순정의 목소리.



“성민아.”



“네? 선생님.”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네. 있긴 있는데 어떻게 여쭤봐야 될지.”



“그래. 대충 짐작은 가는데 나중에, 나중에 물어 봐 줄래. 나 지금 너무 힘들거든. 몸도 지쳤고 마음도 지쳤어.”



“네. 그럴께요.”



“고마워. 우리 착한 성민이. 니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야. 그 눈 때문에.”



“선생님 저 먼저 들어가 볼께요.”



“그래. 공부 열심히 해.”



“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무겁게 옮기는 성민의 뒤로 순정은 여전히 공허한 시선을 운동장에 둔 채 머릿결을 나풀거리고 있었다.


‘왜지? 왜 이리 마음이 무거운 거지. 아버지 때문일까? 아니면 선생님 때문일까?’



“후우..”



무거운 한숨이 상념을 떨쳐 버리려는 듯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기다리자. 시간이 지나면 다 밝혀지겠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교실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성민의 뒤로 수정의 애처로운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심연을 닮은 눈동자는 촉촉한 습기를 머금은 채 회상에 잠겨 들어가고 있었다.




“순정아.”



“어! 삼촌.”



“오냐! 그래. 이제 졸업이구나. 장하다. 우리 순정이. 고생 많이 했어.”



“고생은요 뭐. 다 삼촌이 도와 주셔서 가능 했던 걸요.”



“짜식. 그건 말이다 순정이 니가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었기 때문이야. 이 삼촌도 니가 성실하고 착하니까 도와 준거고.”



“네. 고마워요 삼촌.”



“짜식. 코흘리개 어린애가 이전 어엿한 숙녀가 다 됐네. 참 세월 빠르다.”



“삼촌. 이제 졸업하고 학교 배정 받으면 첫 월급으로 삼촌 맛난 거 사드리께요. 여지껏 제가 받기만 했으니 이제부터는 삼촌 은혜를 보답 해야죠.”



“하하하. 그래 그래 말만 들어도 삼촌은 배가 부른 것 같다.”



고래대학교 교정에서 순정과 성민의 아버지인 동건이 졸업을 앞둔 순정을 축하하기 위해


만난 기억이 순정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것이 순정이 기억하는 동건의 마지막 모습 이었다.


갓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등록금이 없어 쩔쩔매던 순정에게 백마 탄 왕자같이 나타난 동건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 마지막 학기까지 남모르게 순정의 후견인이 되어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순정은 그런 동건을 삼촌이라 부르며 마치 친삼촌인 것처럼 따르고 의지 하며 꿋꿋하게 버텨 교사 임용고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 하였고 성민이 다니는 학교로 자원을 하였던 것이다.


‘삼촌 왜 그렇게 먼저 가셨어요? 미워요. 성민이가 보고 싶지도 않으세요? 보세요. 삼촌 아들이 얼마나 늠름 한지를요.’


백옥 같은 순정의 볼에 이슬방울이 흘러내리다가 점점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최 선생. 수업 안 들어가고 뭐 해요?”



“어머! 죄송해요 교감 선생님. 잠깐 뭘 좀 생각하다가.”



“허허. 젊은 아가씨가 뭘 그렇고 넋 놓고 생각을 하신 겐지. 얼른 들어가 보세요.”



순정은 교감 선생의 옆을 지나 황망히 학교로 뛰어 들어 갔고 그 뒤로 교감 선생의 낮은 혀 차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서방님. 이제 일어나야지. 소희가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는데 뭐해?”



“알았어. 일어났다고.”



아침부터 연희의 목소리가 집안을 우렁차게 울리고 있었고, 성민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욕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식탁에는 여러 가지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고 연희는 한껏 멋을 부려 옷을 차려 입고 성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와! 이게 누구야? 진짜 연희 맞아?”



“그럼. 내가 이래 뵈도 한 미모 한다는 것 몰랐어?”



성민이 욕실에서 나와 수건으로 얼굴을 닦다 말고 넋 빠진 사람처럼 연희를 쳐다보며 감탄사를 늘어놓자 연희도 기분이 들떴는지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예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정도 일 줄은 몰랐지. 완전 미스코리아 뺨을 열대는 치고도 남겠다. 히히히”



“어머! 비행기 그만 태우고 어서 밥이나 먹어셔.”



연희의 자태는 정말 고왔다.


늘씬한 키에 걸맞은 투피스 정장은 여느 모델이 와도 울고 갈 만큼 매력적이었고, 옷 속으로 감춰진 몸매의 실루엣은 보일 듯 말듯 고혹적인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참 오늘 개업인데 서방님은 못 오지?”



“그럼 학교 수업 중에 어떻게 가.”



“에고 우리 서방님 아까워서 어떡하나. 순옥이 고년 잡혀 가는 걸 봐야 될 텐데. 호호호”



“아! 맞아. 어떻게 됐어? 그 일은.”



“응. 형사 말로는 증거도 확실하고 피해자도 여럿 있으니까 구속 하는 덴 아무런 하자가 없데.”



“다행이네. 그럼 오늘 잡으러 오는 거야?”



“응. 오늘 개업식 끝나고 바로 연행해 간데.”



“아! 진짜 아갑네 그 여자가 잡혀 가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봐야 되는데.”



“그럼 이따가 수희 잘 꼬셔서 같이 와”



“아! 맞다 그 수가 있었네..히히히히.”



성민과 연희 단 둘만 남은 아파트에서 이른 아침을 끝낸 성민이 이미 아파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희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등교하는 모습을 연희가 베란다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어이. 신랑.”



“어! 왜?”



“너 요즘 처남한테 별 무신경이더라.”



소희의 성민에 대한 호칭이 신랑으로 바뀌어 있었고, 성민은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드리고 있었다.



“아냐. 처남 요즘 혼자서도 공부 잘 해. 그래서 지켜보기만 하는 거라구.”



“지켜보지만 말고 딱 다잡아서 갈 켜야지. 알았어?”



“네..네..마나님 잘 알겠습니다요.”



“좋아..헤헤....마나님! 그 듣기 좋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부르도록.”



“머. 어쭈! 이게 어디서 하늘같은 서방한테 기어오르려고.”



“뭐어! 너 오늘 나한테 한번 죽어 볼래?”



소희가 주먹을 불끈 쥐고 성민의 얼굴 앞으로 불쑥 내밀자 성민은 기겁을 하고 소희에게서 떨어져 냅다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하하하. 어디 죽일 수 있으려나.”



“야! 너 거기 서. 안 서. 우이씨! 저게.”



소희가 소매를 걷어 붙이더니 치맛자락을 옆구리에 끼워 넣고는 성민을 향해 성남 황소처럼 달려들기 시작 하였고, 그것을 본 성민은 놀란 토끼처럼 뛰는 속도를 더 하여 전력으로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하이고. 걸음아 나 살려라. 잡히면 죽는다.”



“야! 이 나쁜 놈아. 거기 서. 너 잡히면 뼈도 못 추릴 줄 알아.”



소희와 성민의 모습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원앙새 같았고, 경비실의 늙은 경비 아저씨는 어린 연인들의 사랑놀이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쳐다보고 있었다.



‘Le Chat Botté’


연희가 개업한 커피 전문점의 상호이다.


유럽풍의 벽돌로 외장을 장식하고 창문은 모두 홀딩도어로 되어 있어 외부와 연결된 느낌을 잘 살린 이국적인 분위기로 주변의 상점들과는 대조가 되어 눈에 쉽게 띄도록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입구에는 흰 천으로 덮여진 출입문이 보였고 그 아래에 성민과 그의 연인들 그리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양쪽에서 출입문을 가리고 있던 천에 연결된 줄을 잡고 당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과 한 4미터 정도의 거리에서 순옥이 카메라를 들고 왼손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당기세요.”



순옥의 신호에 맞춰 출입문의 양쪽에 늘어서 있던 사람들이 줄을 당겼고, 흰 천은 펄럭 거리며 출입문에서 벗겨져 개업을 알렸다.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던 순옥이 연희에게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며 입 꼬리 약간 위로 말아 올리며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은 채 축하 인사를 건냈다.



“언니 축하 드려요. 사업 번창 하세요.”



“고마워 순옥아. 우리도 이제 마무리 지어야지.”



순옥은 연희가 마무리를 짓자는 말에 싱긋 웃으며 대답 하였다.



“언니 뭘 그리 급하게. 잔금은 며칠 있다 주셔도 돼요.”



순옥의 대답에 연희는 오른쪽 입 꼬리가 한 번 실룩 거리더니 순옥의 어깨를 두 손으로 돌려 뒤를 보게 만들었다.



“그 마무리 말고 저기 보이는 형사분들 한테 맡길 마무리 말이야.”



연희의 신호였는지 멀찍이 떨어져 있던 건장한 중년 남자 둘이 저벅 저벅 연희와 순옥에게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강 순옥씨. 당신을 사문서 위조와 사기죄로 체포 합니다. 묵비권을 행사 할 권리가 있으며 분리한 진술은 거부 할 수가 있습니다.”



‘짤그락’


수갑이 손목에 채워지는 소리가 났고 순옥이 당황 한 듯 고개를 돌려 연희를 쳐다보았다.



“가증스러운 것. 이젠 니 죄의 대가만 남았을 뿐이야.”



“어...언니...난...그게 아니고.”



순옥이 무언가 변명을 하려고 하였지만 연희는 매몰차게 뒤 돌아 가게 안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수갑이 채워 진 채 형사들에게 이끌려 차에 태워진 순옥는 그렇게 자신이 저지른 죄와 함께 경찰차에 실려 사라져 가고 있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홀은 빈자리를 찾기가 힘들어 졌고, 덩달아 연희도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바빠졌다.


개업 첫날이고 일도 손에 익지 않았기 때문에 이래저래 작은 실수를 하면서도 행복한 미소가 입가를 떠나지 않는 모습의 연희는 세상을 다 얻은 그런 기분 이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어머 얘 소희야 너 마침 잘 왔다. 이거 6번 테이블에 좀 가져다 줘.”



“네에. 어머니.”



살랑 거리는 바람이 일듯 가뿐한 걸음의 뒷모습의 소희를 환한 웃음을 머금고 연희가 흡족 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Le Chat Botté’는 여학생들의 입 소문을 타고 나날이 손님이 늘어 개업 후, 일주일 만에 아르바이트생을 두 명이나 더 늘려야 했고 그 만큼 연희는 집으로 돌아가면 파김치가 되어 성민의 품을 찾을 생각을 하지 못 하였다.


성민도 다가오는 시험 때문이지 공부에 열중 하느라 연희를 찾을 생각도 하지 안항T고 오랜만에 모자 사이에는 상당기간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 하였다.




‘이러다 미쳐 내가


여리여리 착하던 그런 내가


너 때문에 돌아 내가 독한 나로 변해 내가


널 닮은 인형에다 주문을 또 걸어 내가


그녀와 찢어져 달라고 고‘


경쾌한 가사의 휴대폰 착신음이 울리자 성민이 상대를 확인하고 슬라이드를 밀어 휴대폰을 받았다.



“선생님 저 성민이에요”



(응. 성민아 지금 나 잠깐 볼 수 있겠니?)



“지금요? 시간이 꽤 늦었는데요.”



(잠깐이면 돼. 나 지금 너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럼 선생님 지금 어디세요?”



(나. 니네 아파트 놀이터.)



“네에?”



(잠깐만 나 좀 봐.)



“네. 선생님 저 지금 바로 내려갈게요.”



전화를 끓은 성민은 간단한 트레이닝복만 걸치고 황급하게 집을 나와 놀이터로 향하였다.


놀이터의 그네에 걸터앉은 순정이 성민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손을 들어 위치를 알려 주었다.



“여기야. 성민아.”



“선생님 이 늦은 시간에...아유..술 냄새 선생님 술 드셨어요?”



성민은 코를 엄지와 중지로 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응..조금 마셨어. 아니 많이 마셨다. 기분이 너무 울적해서.”



“선생님 그렇다고 술을 ...”



“왜? 난 술 마시면 안돼는 거니?”



“아니 그건 아니지만.”



“성민아.”



“네?”



“너네 아빠 참 멋있는 분이셨다. 너 그거 아니?”



“서...선생님.”



“너 요즘 내방에서 본 사진 때문에 많이 혼란스럽지?”



“너어. 니네 아빠 존경해야 돼. 니네 아빠 때문에 내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어. 딸국..”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나 말야.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외동딸이었어. 아버진 맨 날 술어 절어서 툭 하면 엄말 못살게 두드려 패셨지. 덕분에 우리 엄만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돌아 가셨어. 그 후로 내가 믿고 의지 할 수 있는 사람은 니네 아빠 밖에 없었어. 어린 내겐 세상이 너무나 무서웠거든. 근데 니네 아빠 때문에 별 걱정 없이 무사히 학교를 마칠 수가 있었어. 나한텐 부모님이나 마찬가지셨지.”



술에 취한 순정은 그동안 가슴에 담아 두었던 비밀스런 지난 일들을 모두 성민에게 털어 놓았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었지만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그냥 지나쳐 보지 않는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이 바로 성민의 아버지였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그렇게 식구들마저 속여 가며 따뜻한 사랑의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


순정의 말이 끝나자 성민의 가슴 한구석에 풀리지 않은 채 묶여있던 마지막 매듭이 눈 녹듯 풀어져 버렸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아!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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