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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회전그네 <프롤로그>

소라넷에서 연재했던 글입니다.

제가 재밌게 봤던 몇개의 야설들을 믹스해 리메이크 했기 때문에..

설정이나 플롯이 많이 익숙하실 겁니다.

소라에서 애독자 서비스로 진행했던 글입니다.

즐감하시길 바랍니다.

 

 

 

 

프롤로그-전환점.





딩동댕동.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준후는 늘상 그렇듯,지루한 표정으로 창밖의 운동장을 바라보았다.모두들 분주하게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지
만,그는 늘 상념에 잠겨있는 표정으로 창밖을 보곤 했다.

"열아홉.."

그는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모두들 대학에 갈 준비를 하고,저마다의 꿈을 위해 박차를 가해야하는 시기였지
만,준후는 그런것들에 그닥 관심이 없었다.

"그때 내가 선택되지 않았더라면.....지금의 내 생활은 어땠을까."

그가 요즘들어 매일 하는 생각이었다.나비효과라고 했던가?아마도 그때 그날이 없었더라면,준후는 지금처럼 부잣
집 아들이 되어 있을리가 없었다.하지만 뭔가 이상하다.당연히 생활은 더욱더 나아 졌다 하지만,왠지 모르게 자
유를 구속당한 느낌도 든다.

"쳇...다시 돌아가라고 한다면 거부할 거면서."

맞는 말이었다.다시 고아원의 차가운 마룻바닥에서,담당 보육사에게 벌을 받는것은 죽기보다 싫었다.하지만 왜일
까?이상스럽게 자꾸 그때가 그리워 지는것이 말이다.준후는 피식 웃으며,평생 잊을수 없는 그때 그날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이 아이인가?"

"네.그렇습니다.조금더 어린아이라면 좋겠지만..."

"그런건 상관없어.두뇌가 명석한 아이지 않은가."

중년의 사내는 앞에서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년하나를 바라보았다.연신 차가운 눈을 하고 있던
그는 살짝 웃으며 자신의 앞에 있는 소년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 아이.이름이?"

"아...처음 저희 고아원에 올때에 이불사이에 준이라고 씌여져 있어서...저희는 다들 그렇게 부릅니다."

"준이...준이라..."

중년의 사내.

그의 이름은 강주현. 한국최고 건축회사의 오너였다. 철의 오너답게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였고,그가 이끄는 기
업은 매번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굴지의 회사로 떠올랐다.

허나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바로 아들이 없다는 점이었다.애석하게도 딸만 셋이 있었고, 가부장적인 사고방식
으로 뭉쳐있는 그는 딸에게 가업을 이어준다는 생각은 단 1퍼센트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입양"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이었다.대부분 말을 잘 하지 못할 정도의 어린아이를 입
양하지만,강회장의 생각은 달랐다.자신의 아들은 똑똑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재력을 이용하여 큰 고아원만을
돌면서 8세이상의 남자아이들의 두뇌를 일일이 테스트 했다.머리만 좋다면 중학생이던 고등학생이던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대부분 평범하거나 혹은 그 이하의 아이들 뿐이라 실망하고 있던 차에,그는 남달리 두뇌능력이 월등하게
높은 이 아이를 구할수 있었다.

"이제 내가 너희 아버지다."

준이라는 소년은 약간은 경계하듯,앞에 있는 중년의 사내를 차갑게 바라보았지만,강회장은 개의치 않는다는듯 씨
익 하고 웃어보였다.

"올해 몇살이지?"

"열...다섯."

그는 여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는지, 여전히 그를 경계하는 눈빛이었다."좋은 눈빛이구나..."하며 강회장은 저
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열다섯.중학교를 다닐 나이로구나.그렇지?"

"...."

"어서 가자.여긴 더이상 너희 집이 아니다."

"어디로 간다는 거죠?"

"말했잖아?이제 넌 한경건설 강주현의 외아들이 되는거야.걱정하지 마렴.가면 니 위로 누나가 두명이나 있단다.
그리고 네가 열다섯 이니까...니 밑으로 두살어린 여동생도 있어."

준은 달콤해 보이는 그 유혹에 살짝 흔들렸다.아빠..누나..가족이 생긴다니 꿈만 같은 일이다.게다가 저 아저씨
가 타고온 차만 봐도,엄청 부잣집임에 틀림없어 보인다.그는 조금씩 망설이다가 담당 교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40을 훌쩍 넘긴 아주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교사가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그는 마지못해 강회장의
거친 손을 잡았다.햇살이 유난히 눈을 찌르는 그때,그의 옆에 서있는 강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준이라는 이름은 별로 좋지 못하구나.으음...그래.준후라는 이름이 좋겠다.강준후.이제부터 니 이름
이 될테니 잘 기억해 두거라."







"으응?"

교실에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을때까지 몇년전의 기억에 잠겨있던 준후는 운동장에 낮익은 얼굴이 보이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 녀석이 여긴 어떻게?"

왠만한 일에는 그닥 놀라지 않는 준후는 벌떡하고 일어났다.그는 책이 얼마 들어있지 않아 상당히 가벼운 책가
방을 아무렇게나 둘러메고는 교실을 빠져나갔다.

"쳇...토요일이니 망정이지..."

사실 준후는 야간자율학습을 하지 않았지만,무턱대고 자신을 찾아왔다가 그냥 갔으면 어쩌려고...하는 생각을
하며 조용히 투덜거렸다.그래도 오래된 친구가 자신을 방문해주자 기분이 좋았다.복도를 달려나가자,햇빛이 자신
의 눈을 확 하고 찌른다. 그는 손바닥으로 살짝 미간을 가린다음,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어~"

텅빈 운동장.그리고 텅빈 교정의 구령대의 알미늄기둥에 기대어 서있던 남자 하나가 자신을 부른다.준후는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너무나 낮익은 얼굴.입양되기전,자신과 유년기를 함께 했던 친구.

"박기주..."

"이야~준이 너 이 새끼.완벽한 부잣집 아들내미로 바뀌었네."

"빈정대려고 오랜만에 온거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준후는 피식 웃으며 기주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 하고 쳐보였고,기주는 피식하고 웃었다.그
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정장을 쫙 빼입고 있었고, 신기하다는 듯이 학교의 교정을 쓰윽 둘러보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학교로구만."

"어떻게 알고 찾아온거야?너..."

"에이.내가 너 어디짱박혀 있는지 그런것도 모를꺼같냐?"

준후는 피식 하고 웃었다.큰 키에 호남형 얼굴.입양되고 나서는 어쩌다 한번씩 보았던 고아원시절 친구인 그가
근 1년만에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그것도 몰라볼 정도로 쫙 빼입고서.

기주는 준후보다 더 빨리 고아원에 들어온 아이였다.사실 실제 나이는 준후보다 한살 더 위였지만,둘은 곧 친구
가 되었다. 늘 고아원에서 대장노릇을 서로 하겠다며 티격태격 싸우기도 했지만,그래도 준후에게 있어서 유일하
게 한명 있는 친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하지만 준후가 한경건설 강회장의 외아들로 입양되고 나서도,기주는
계속 고아원에 남아있어야 했고, 열 일곱살이 되던 해에 고아원을 스스로 나와버린 아이였다.

"어때?부잣집 도련님 생활은?"

"글쎄다.지겹다고 하면 화낼거 아니냐?"

"음...그렇겠지?"

준후는 기주의 말에 픽 하고 웃어버린다.짧게 자른 머리의 기주는 휴대폰줄에 손가락을 넣고 빙빙 돌려 보인다.

"너는?고아원 나왔다고 전화하고,나중에 잠깐 만나고 나서는 연락두절 되더니...뭐하고 사는거야?"

"아..뭐...너처럼 머리가 좋지도 않은데 내가 뭘 하겠냐.뻔하지."

"뭔데 그래?"

기주는 대답대신 손가락으로 운동장쪽을 살짝 가리켰다.준후는 검정색 세단 한대가 주차되어 있는것을 보며 살
짝 놀라고 말았다.꽤나 고가의 고급세단이었기 때문이었다.

"너...이자식...무슨 돈으로?"

"뻔하잖아?고아원 출신에.짧은 머리에 정장차림.그리고 저런 차."

바람이 살짝 불어왔고,기주의 짧은 머리도 살짝 흔들린다.그는 준후의 놀란 표정에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다
는 표정으로 운동장 쪽을 쓰윽 바라보았다.

"지역을 지키는...뭐 그런거냐?"

"말하자면 그렇지."

기주는 피식 하고 웃으며 대답했고,준후는 한참이나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기주의 말마따나, 그가 건달이 된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운동을 잘한데다가,고아인 그가 찾을수 있
는 돌파구는 얼마 없었을 테니까.잠시 안색이 어두워졌던 준후는 새삼스레 피식 웃어보였다.

"이 자식! 싸움도 못하는 주제에."

"어쭈?준이 너 많이 컸는데?오랜만에 함 붙을까?"

"나야 좋지."

기주와 준후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한참이나 웃었다.1년만에 만났지만,말이 필요 없었다.기주는 교복을 입고있
는 준후를 자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살짝 손짓했다.

"가자.집까지 바래다 줄게."

준후는 앞서서 차로 향하는 기주의 뒷모습을 보며,새삼스레 반가운 감정과 함께 불안감이 엄습했다.고아원 출신
이라고는 하지만,건달이라니.그것도 자신의 친구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쌍수들고 환영할 일이 전혀 아니었다.

"왜?건달이라니까 좀 그래?"

옆자리에 탄 준후의 표정이 싱숭생숭한걸 느꼈는지,기주가 넌지시 물었다.준후는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그만 피
식하고 웃어 버렸다.

"아니.그것도 니가 선택한 길이잖아."

기주는 곁눈질로 준후를 힐끗 바라보았다.인생역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행운을 검어쥔 준후이지만,왠지
자유를 속박당한 야생동물을 보는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쓸대없는 소리하지 말고 임마."

기주는 괜시리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는 한쪽으로 차를 세웠다.준후가 사는 동네는 학교에서 그닥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10분여의 정적 끝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휘유~엄청 으리으리한 동네로구만."

"실없긴.여튼 태워줘서 고맙다."

"별 소리를.공부 열심히 해라 임마.좋은 머리 똥 만들지 말고."

기주는 장난스럽게 주먹으로 준후의 머리를 툭툭 쳐 보였고 준후는 피식 웃으며 차문을 열고 내렸다.

"야 준아."

"왜."

"너 보러 자주와도 되냐?"

준후는 기주의 표정을 한참이나 뚱하게 바라보았다.평소의 그라면 그런 질문을 할 성격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
이었다.

"좋을대로."

준후의 말에 기주는 살짝 웃더니 여유롭게 차를 돌렸다.멀치감찌 사라져가는 검정 세단을 보며 준후는 복잡한
심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근데 저자식...면허는 있긴한건가."

물론 자신보다 한살 많으니 성인일 것이고,면허를 딸수 있는 나이지만,워낙 기주의 삶이 AM적이라는것을 잘 알
고 있는 그인지라 의구심이 들었다.

"오늘도 집으로 가는구나.아무런 의미가 없이."

준후는 자신의 집으로 가는 언덕길을 터덜터덜 올라갔다.햇빛은 내리쬐었지만,역시나 계절이 계절인지라 쌀쌀했
다.그는 습관적으로 MP3플레이어를 꺼내 들고 이어폰을 귀에 가져다 대었다.

"응?"

순간 준후의 눈에 자신보다 앞서 언덕을 오르는 한 여학생이 들어왔다.약간은 짧은 치마.위로 질끈 묶어 올린
귀여운 헤어스타일.그리고 하얗고 길게 뻗은 다리.

"강은수."

준후의 말에 앞서가던 여학생이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큰 눈에 오목조목한 코와 입술.전형적인 귀염상의 여학생
이었다.그녀는 준후를 바라보자마자 살짝 웃어주었다.

"오빠!"

은수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준후는 피식 웃으며 그녀가 서있는 곳까지 서둘러 걸었다.그녀가 있으니,들으려
했던 MP3는 다시 품안에 갈무리 하면서.

"오빠 오늘은 빨리오네?"

"아..응.주말이니까."

"칫.고3이 주말이 어딨냐?"

"이게 또 까분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는 준후의 손짓에 베시시하고 웃었다.

강은수.

강회장의 막내딸이자,준후의 여동생이기도 한 올해 17세가 되는 소녀였다.언니들과는 달리 키가 약간 작은 편
이지만, 세상을 떠난 자신의 어머니를 닮아 늘씬했고,또 귀여웠다. 준후가 가족중에 유일하게 편하게 대하는
여동생이었다.그도 그럴것이, 그가 처음 이 집에 입양을 오는 그 날부터 은수는 준후를 원래 있던 친오빠처럼
잘 따랐기 때문이었다.

"오빠오빠!그거 알아?내 친구 미희있잖아.걔가 대학생 남자친구가 생겼데."

"참내.그 대학생은 범죄를 저지르는거랑 같은거란걸 모른다냐?"

"그런게 어딨냐?사랑하면 다 그런거지."

"쬐끄만게 사랑은 무슨..."

은수는 준후의 퉁명스런 말에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연신 조잘거리며 준후에게 말을 붙였다.준후역시 관심없
는 뉘앙스이긴 했지만,그녀가 하는말에 일일이 다 대답을 하며 들어주곤 했다.

"아 참!오빠 그거 알아?우리집 아줌마 바뀐데."

"어라?왜?"

"짤린거 같지는 않고..고향으로 가야 한다더라."

"그래?"

그 부분에 있어서는 준후도 약간 관심이 생겼다.늘상 자신의 집에 있는 식모 아줌마가 관둔다는 소리였기 때문이
었다.꼼꼼한 성격탓에 늘 가족들이 칭찬하던 그 아주머니가 바뀐다니까,준후의 입장에서도 약간은 서운했다.

"그리고 오늘 큰언니 집에 오는 날이야."

"아...그러냐.."

은수는 큰 언니라는 말이 나오자,준후의 말투가 급격하게 퉁명스러워 지는것을 느낄수 있었다.하지만 그녀도 그
런 준후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강은하.

올해 스물 일곱이 된,의상 디자이너이자 강회장의 장녀였다.

도시적인 외모와 큰 키.그리고 완벽한 몸매만큼 성격역시 완벽주의자인 그녀는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준후가 처음 그 집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은하는 단 한번도 준후를 친동생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여성이 무시당하는 것을 참을수 없는 그녀이기에, 꼭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줘야만 한다는 아버지
강회장의 뜻이 죽도록 싫었기 때문이었다.때문에 그녀는 디자이너란 직업을 핑계로 독립을 했고,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주말에 집에 들르곤 했다.오늘 역시 그녀가 오는 날인 모양이었다.

"또 귀찮아 지겠군."

준후는 경험상 은하와는 말을 섞지 않는것이 평화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조금 친해져 볼까 해서
말을 붙이면 그녀는 늘상 톡 쏘는 말로 까칠하게 대했고,또 한성깔있는 준후인지라 그것에 반응하면 금방 싸움
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하지만 먼저 건들지 않으면 그녀쪽에서 시비를 거는 일은 없었기에,준후는 불편해도
그냥 "쌩까는"방식을 택한 것이었다.

"저에요!은수! 오빠도 같이 왔어요!"

은서가 초인종을 누르고 외치자,문은 소리없이 열렸다.2층짜리 주택. 바로 강회장의 저택이자 준후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몇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아직도 준후는 불필요할 정도로 큰 집의 규모에 매번 질리곤했다.

현관이 열리고,단아한 롱스커트에 가디건을 걸친 여자한명이 살짝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하얀피부.그리고 너무
나 청순한 얼굴.그와 대조적으로 약간 글래머 스타일이기도 한 여성이었고,그녀를 보자마자 은수는 어린아이처
럼 그녀에게 안겼다.

"언니이이이~"

"잘 갔다왔어?준후도 왔네."

"아...응."

그녀는 이 집안의 둘째인 강은채였다.매번 보는 얼굴이지만,늘상 그녀의 친절하고 착한 성격은 준후를 설레게
만들곤 했다.그는 괜시리 차갑게 대답해 버리며 방으로 향했고,은채는 그런 준후의 뒷모습을 보며 싱긋 하고 웃
었다.

"세 자매인데 어쩜 저렇게 다 다를수 있을까."

아직도 준후가 갖고 있는 의문점이자,적응이 안되는 부분이기도 했다.다들 자매인지라 저마다의 다른 미모를 갖
고 있는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성격들이 모두 판이하게 다르다. 그 중에서도 은채는 곱상하고 청순
한 외모의 소유자 답게,늘 상냥한 모습이었다.전형적으로 남의 부탁을 잘 거절 못하고, 배려심 깊은 그런 여성
스타일이었다.

처음에 준후가 이 집안에 와서 은채를 보았을때,어린마음에도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자신보다 세
살위인 그녀는 당시 고등학생이었지만, 정말 친동생처럼 자신을 아껴주었던 것이다.준후 본인은 정작 느끼지 못
하고 있었지만,그가 이 집안에서 사는 유일무이한 낙이 바로 대학생 누나 은채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들 왔구나.어서들 씻어.오늘 저녁은 다 같이 먹기로 했으니까 군것질들 하지 말고."

막 방문으로 들어가려던 준후는 부재중인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하는 식모아줌마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뒤에서 은수가 큰 소리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후도.들어가서 씻으렴."

"네."

그녀의 상냥한 말투에 대충 대답을 한 준후는 문득 벽에 걸린 한여자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바로 얼마전
에 세상을 떠난 강회장의 와이프이자,이 집안 딸들을 낳은 어머니였다.곱게 늙은것이 저런것일까.비록 자신의 어
머니이지만,그것도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초상화속의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임정은이라는 저 여자를 만난것
이,강회장에게는 행운일 거라고 준후는 생각했다.그녀의 미모가 있었기에, 강회장처럼 험악한 인상의 사람에게도
저런 이쁜 딸들이 태어난 것일테니까.

"휴우..."

준후는 문을 닫고는 교복도 벗지 않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벌써 이 집안의 가족이 된지도 4년째.큰 누
나인 은하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에게 가족처럼 대해 주었지만,준후는 뭔가 답답했다.책장에는 준후가 원하지
도 않는 경영과 경제에 관련된 서적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물론 그것은 강회장이 준후를 위해 사다준 것이
었고,그쪽에는 1퍼센트도 관심이 없는 준후는 단 한페이지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고아원에서 작곡가의 꿈을 키웠던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회상에 잠겼다.고아원에 놓여있던 작은 피아노 한대.그것이 준후의 삶을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준후는 늘 보육교사를 졸라 피아노를 배웠고,남다른 재능으로 귀가 따갑도록 칭찬을 듣기도 했다.하지만 이 집
에 입양을 온 뒤부터는 음악의 음자도 꺼낼수 없었다. 완강한 강회장이 준후가 음악가의 길을 걷겠다고 하는것
을 받아줄리가 없었으니까.

"기주는...행복할까."

부자집으로 입양가는 턱에 수많은 고아원친구들의 부러움을 받은 자신이지만,왠지 준후는 기주쪽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적어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는 제약을 받지 않을테니까.

"에휴우!모르겠다!"

복잡한것이 딱 질색인 준후는 그대로 이불을 뒤집어 써 버렸다.눈을 감으면 조금 속편해 지지 않을까 하는 단순
한 생각이었다.어차피 다같이 먹는것은 저녁이라고 했으니,그때까지 낮잠이나 질펀하게 자자는 생각을 하면서.







준후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바로 고아원에서 있을때에,강회장이 아닌 자신의 친부모가 자신을 찾아오는 꿈이었다.강회장처럼 부자집
은 아니지만,평범해도 화목한 그런 집안.그리고 준후가 아름다운 선율을 뽑아낼수 있도록 충분히 모티브가 되어
주는 그런 행복한 집안 말이다.

"매번 똑같군.레파토리는."

준후는 살짝 눈을 뜨며 꿈인것을 직감하자마자 중얼거려 버렸다.남부럽지 않게 살게 된 그이지만,어쩌면 입양아
라는 것이 은연중에 콤플렉스로 작용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비록 집안에서는 피우지 않지만, 고아원에서 부터
기주와 몰래 담배를 피운적이 있는 준후는 한대 피고 싶다는 생각마져 들었다.

"준후야!아버지랑 큰누나 왔어.얼른 내려와라."

2층에 위치한 자신의 방으로,아줌마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준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이런 집안에서
담배라니.걸리면 더더욱 피곤해질 것이다.왠지 준후는 방에만 쳐박혀 있고 싶었다.까칠한 은하까지 왔다니.
왠지 같이 먹는 저녁이 싫어졌지만,준후는 옷을 벗고 자신의 방에 딸려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쏴아아..

뜨거운 물을 맞으니 정신이 노곤해지는것이 느껴졌다.큰누나인 은하.너무나 도도하고 도시적으로 생겼지만,자신
에게는 그저 까칠하기 그지없는 가족아닌 가족일 뿐이었다.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말해봐야 입아픈 일이었다.그래도 집안에 잘 있지 않는 데다가,다행히도 식탁에서의 준후의 자리는 상냥한 은채
의 옆자리였기에 그는 그것으로 대충 위안을 삼기로 마음먹었다.

"어휴.왜이렇게 늦게 내려왔어?"

"좀 씻느라구요.아 참,곧 그만 두신다면서요?"

"응 오늘까지야.어서 앉아 준후학생."

준후는 물기가 살짝 남아있는 머리를 어루만지며 식모 아주머니에게 아까 하지 못한 아쉽다는 인사를 했다.근사
한 주방으로 다다르자,자신을 빼고 모두들 모여 앉아있는 식구들이 보였다.준후는 언제나처럼 자신을 보며 웃는
강회장에게 꾸벅 인사했다.

"어서 앉아.아버지한테 무슨 그런식의 인사를 하냐."

"아..예."

"준후야 얼른 먹어."

역시나 은채는 싱긋웃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하고 쳤다.자리에 앉자마자 은하의 모습이 보이자 준후는 살짝
고개를 돌려버렸다.그녀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만 곱게 쓰면 이쁠 여잔데...쳇."

이쁘긴 이뻤다.이 집안 여자아니랄까봐, 청순한 은채,그리고 귀여운 은수와는 다른 도도하고 도시적인 매력.하
지만 눈빛은 늘 차갑고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왜 쟤때문에 밥먹는거 기다려야 해요?짜증나게."

준후는 은하의 중얼거림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것이 느껴졌다.아무리 착한것과는 거리가 먼 준후이지만,그래
도 굴러온 돌이 박힌돌 눈치를 안볼수는 없는 것이다.살짝 준후의 눈치를 본 은채가 준후를 거들었다.

"에이.언니 오랜만에 와서 왜그래.어서 밥이나 먹자."

강회장은 아무리 윽박지르고,타일러봐도 전혀 개선되지 않는 은하와 준후의 사이를 보고는 한숨을 푹 하고 쉬어
버렸다.그 역시 언젠가는 나아지겠거니...하는 생각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는 지도 모른다.

"자.어서들 먹자."

강회장의 말에 모두들 수저를 들었다.보통 사람들이면 구경도하기 힘든 산해진미였지만,아까의 꿈을 꾼 데다가
언제나 늘 한결같이 자신에게 대놓고 불편함을 표하는 은하의 태도 역시 준후의 밥맛을 딱 하고 끊어 놓았다.

"응?"

준후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살짝 옆을 바라보았다.은채가 자신의 팔을 툭툭 몰래 건드린 것이다.

-괜찮은거야?-

그녀의 표정은 그렇게 묻고 있는 듯했다.착한 은채는 준후의 마음에 상처를 받을 까봐 겁이 났던 것이었다.준
후는 피식 웃는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수저를 들었다.

"괜찮긴 염병.."

하나도 괜찮을리가 없었다.안그래도 타이트하게 구속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데,거기다 비록 어쩌다 한번이지만
늘 이어지는 은하의 구박이 기분좋을리가 없지 않은가.그래도 은채가 물어본 것이라,준후는 괜찮은 시늉을 했을
뿐이었다.

"아줌마.이거 너무 짜요."

"아...미안해.이리줘요."

준후는 식모 아줌마가 애써 해준 반찬을 이렇다 저렇다 지적을 하는 은하를 보자 이가 갈렸다.

"지는 지손으로 라면 하나 지대로 못끓이는 년이..."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밥을 밀어넣었다.그런 그녀에게 한방을 먹여줄수 있는것이 있다면,비상한 두뇌를 십분
발휘해서 강회장의 후계자로 확실히 자리매김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준후는 전혀 그쪽에는 관심이 없었
다. 머릿속에 있는것이 경영학개론이 아닌 음악뿐이니,그녀에게 한 방 먹여줄 길이 없다는 것이 준후에겐 가장
분한 일이었으리라.

"벌써 일어나니?과일이라도 좀 먹지."

저녁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준후를 보며 식모아줌마가 한마디 했지만,준후는 솔직히 말해서
계속 있고 싶다는 생각을 단 1퍼센트도 하지 않았다.

"아..책좀 봐야해서요."

당연히 거짓말이었지만,고3인 그에게는 효과만점인 핑계거리였다.뒤에서 은수가 "오빠 화이팅"이라며 귀엽게 속
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준후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서는 욕실로 들어갔다.큰 욕실이 1층에 따로 있는데도 욕실이 딸려있는 이 방을 처
음 봤을때는 그저 돈지랄들 하는구나 했는데,가끔은 편할때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찰칵.

답답한 마음에,준후는 그동안 꾹꾹 참고 있던 담배를 꺼내 물었다.이 집에서 담배를 피운것은 오늘이 처음이었
다.생각해보니,욕실안에서 환풍기를 켜고 피우면 별 탈이 없을것만 같았다. 강회장이 무섭거나 해서 몰래 피우
는 것이 아니었다.단지,잔소리나 시끄러운것을 싫어하는 그의 성격탓이었다.

"벌써 밤인가."

오늘은 왠일인지 더욱 더 답답했다.몇년이 지났으면 적응될만도 하거늘,왠지 남의 집에서 살고 있는듯한 느낌이
든다.달라진 환경,그리고 가족이라는 다소 낮선 이름의 존재들.

준후는 열아홉이라는 어린나이 답지 않게 세상을 다 통달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왠지 모르게 자유를 속박당
한채 사는 기분이다.

"속박?속박이라고..?"

준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자신이 너무 가증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뭐가 어찌됐던간에,자신은 강회
장이 주는 돈으로 생활을 했고,그가 자는방,씻는 욕실,그리고 먹는 밥까지 모두 강회장의 재산이 아닌가.그런
재산은 누릴데로 누리면서 속박이라는 느낌이 드는 자신이 속물같아서 싫었다.

치지지지...

그는 피우다 만 담배를 변기에 넣어 버렸다.왠지 모르게 계속 궁상을 떠는것같아 불편해 졌기 때문이었다.

드르륵.

겨울이 다가오는 계절인지라,창문을 열자마자 찬바람이 쌩하고 들어온다.그의 방 창문은 화려한 내부에 비해 약
간은 작았지만,나름대로 밖이 훤히 보이니 답답하진 않았다.

"전환점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애초에 머리는 좋아도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 책상에 앉아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그는 눈을 껌벅 거리
며 멀리 보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았다.


"내일은.....뭔가 재밌는 일이 생겼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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