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들의 오너 - 1 -
<1부>
#1.개화(開化)
삐비비빅..삐비빅...삐비비...콰직!
언제나 있는 일이다.
알람이 울리다가 내 손에 의해 콰직!소리가 나는 이 현상.
혹자들은 프리랜서 주제에 왜 기상시간을 정해두냐?라고 물을수도 있겠지만..난 이래뵈도 계획에 의해 움직이
는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끄으으으응.."
나는 전형적인 궁상자세....그러니까 상반신은 침대에 대고 하반신은 잔뜩 위로 올려 엎드린 자세로 눈을 비벼대
었다.
"으윽..뭐야 이거.."
온몸이 땀범벅이다.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당장 이대로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껴입고 있었다.게다가 목이
까칠까칠 한것이 목도리까지 둘러져 있는것 같다.
"내가 왜이런 상태로 잠든거지..."
나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걸친옷을 벗어대었다.으으...땀이 잔뜩 묻었으니 옷이 잘 벗겨지지도 않는다.팬티를 제
외하고 무장해제(?)하는데는 평소보다 더더욱 오래 걸렸다.가만....근데 나 왜 이러고 잔거지?
속이 울렁거리지 않는것으로 보아 쐬주를 한잔 걸치고 잔것같지도 않다.근데 뭐지?이 이상한 이질감은....
"아 맞다..이상한 꿈을꿨었지..."
나는 일부러 혼잣말로 크게 중얼 거렸다.맞아..그건 꿈일거야..라는듯이 큰소리로.그리고 천천히 책상위로 고개
를 돌렸다.없어야 해...그 카드들이 없어야 진정 그것이 꿈이되는 거란 말이다!
내 고개가 흡사 스포츠 하이라이트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돌아간다.그리고 내 고개가 향한 마지막 종착점은 바
로 어제 내가 카드를 올려두었던 책상위였음은 말할것도 없다.
"이...있다..."
나는 그저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리고 말았다.있었다.카드는 어제 내가 놓은 그대로 세장이 나란히...가..가만!
"끄...끄아아아..."
나는 곧 뒤로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가 되어 버렸다.어제 난 분명 카드를 포개서 놓았단 말이다...그런데
카드 세장이 옆으로 나란히 펼쳐져서 놓여 있다.나머지 카드는 고대로 옆에 쌓여 있었다.어제밤 나의 행동을 무
시하기라도 하듯,그림이 그려진 세개의 카드가 왜 1렬 횡대로 좌라락 놓여 있는거야!
"오마이갓...이건 진짜 꿈...."
꿈이야!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난 그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옆으로 늘어져 있는 카드중 첫번째 카드 하나가
빛을 뿜어대고 있는것 아닌가.그것도 검은색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나는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바로잡으려
무던히 애를 써야했다.
"진정하자...진정하자...이런걸로 놀라선 명탐정이 될수 없어...진정해야해 진정..."
하하하.우습게도 난 더이상 진정할수가 없었다.카드에서 빛무리가 넘실거리다 못해 이제 대놓고 검은색 기운이
폭사되기 시작한 것이다.아침 여덟시부터 난 왜 이런....이런걸 봐야 하는거지?
문득 어제만난 알....뭐시기 하는 선생이 원망스럽다.이봐..난 장사가 좀 안되서 그렇지 나름 내 생활에 만족하
며 살던 사람이라고...왜이러는거야 나한테!
스스스스스스..
카드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검은색 기운이 폭사되는 첫번째 카드는 큰 칼을 들고 있던 다크레이디
의 카드였다.그리고 그 카드에서의 그림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어...어...어.."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중얼거렸다.연기는 점점더 심해진다.옆집에서 봤다면 화재신고를 할지도 모를 정도로..
그리고 곧이어 그 연기가 사라져 가고......
"허..허허...허허허허허..."
나는 미친놈마냥 ,바람빠진 풍선마냥 웃어제꼈다.연기가 가시니까 한 소녀가 서있었다.카드의 그림에서와 똑같
은 모습을 한....다른점이 있다면 8세 정도로 보이는 그 소녀는 카드와는 달리 전라의 모습이라는것 뿐.
허허허허허.어제 알선생은 나한테 커피가 아니라 마약을 줬나보다.맞아!그게 가장 과학적이고 신빙성이 있는 말
이지.요즘 세상에...달로 우주선을 가는 세상에...아..아니..우주선으로 달을 가는 세상에....으헉!
나는 그대로 뒤로 파드득 물러나고 말았다.전라의 소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하얀 알몸에 검정색 머리.흡
사 에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듯한 그 외모의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나는 팬티만 입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로 덜덜 떨면서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반짝거린다.그리고 신비로운 그녀의 입술이 천
천히 열리며,이세상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수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페어리의 오너로써 선택받으신 당신.블랙나이트가 주인을 알현합니다"
#2.페어리란?
"진정해..진정하자..진정하자 준아..진정.."
나는 몇번이고 큰 소리로 외치고는 내 앞에 서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하얀색 와이셔츠로 둘러져 있다.
물론 소녀지만 알몸으로 서있는게 민망해 내가 서둘러 입혀준 것이다.하지만 이..이건..뭐냐.마치 전날 남친집에
서 잔 여자아이가 그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듯한 포스는....내 와이셔츠 하나로 무릎까지 가려지는 그....으악!
난..난 로리콘이 아냐!
"흠흠!저기..그러니까..이게 어떻게 된 건지...설명해 줄래?....요?"
난 애써 진정하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똘망똘망한 눈망울에 나는 빠져 들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긴 했지만,그녀
는 다시 또박또박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페어리의 선택받은 오너.그리고 난 당신께 종속된 제1페어리 블랙나이트 입니다."
"..."
미치고 팔짝뛸 노릇이다.이제는 이건 꿈이라는 허황된 망상은 안하기로 했다.눈앞의 이것이 현실이라면,난 받아
들이기로 결정했다.하지만...받아 들이는 것도 뭐라도 좀 알고 받아들이자는 취지에서 물어봤건만...돌아오는건
이 왠 중세시대의 대사냔 말이다.
"그..그래..그건 잘 알겠는데..흐음..그러니까..일단 너 한국말 잘한다."
내 어이없는 말에 그녀는 고개를 잠시 갸우뚱했다.인형같은 그 모습이 너무 귀엽긴했지만,그것을 느낄만큼의 여
유는 없다.
"오너의 국적에 따라 페어리의 정보가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아..으..응.그렇구나.."
한동안 어색한 정적이 흐른다.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한다.그것은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닐수
없었다.그래...가장 궁금한걸 물어보자.원초적이지만 가장 궁금한거!
"넌...왜 내 앞에 있는거야?그리고 페어리니 오너니 하는건 뭔데?"
그 소녀는 자신이 알몸상태에 와이셔츠만 입고,건장한 청년의 빤쑤바람과 대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저희가 살던 세계,프로센은 전쟁으로 종식되었고,차원이 뒤틀릴정도의 타격을 입었습니다.따라서 저희 대마법사
분들과 장로분들이 연합, 마법력을 모아 이계로 귀환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나도모르게 경청하기 시작했다.소녀는 목이 메는듯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고,나역시
황당무개한 마음을 털어버리고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프로센이라 불린 세계,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와 전혀 다른 차원의 그 세계가 존재하는것이었다.놀랍게도 신
화나 판타지에서나 볼수 있던 그 세계들이 실존한다는 의미였다.마법과 신력이 난무하며,온갖 종족들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그 세계.하지만 그 세계에서는 어느순간 균열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계의 세력-그들은 이들을
"크룬"이라고 불렀다-들이 그들의 세계로 넘어왔고,심각한 전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크룬이라 불리는 세력들은 페어리의 세계를 난도질했다.크룬들은 갈곳을 잃은 늑대들이나 다름없었고,역시나 막
강한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계자체가 멸종할 위기에 놓여 버리자,프로센의 능력자들은 자신들의 힘을
페어리라는 존재로 봉인,그리고 그 존재를 다시 카드에 봉인하였다.그리고 몇몇의 대마법사들이 마력을 끌어모아
차원을 넘어가 버렸고, 그들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들어온것이다.무분별한 힘의 증폭을 컨트롤 하기
위해서,그들은 인간이라는 매개체를 주인으로 택하게 했다.그리고...그 중에 내가 선택된 것이다.
"허...뭐...이런일이..."
더 듣고 싶었지만,그녀는 눈물이 나는듯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담배를 피워물고 생각에 잠겼다.그래...
분명 그녀역시 새롭게 탄생된 피조물이다.하지만 선대의 상념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것일까.그녀는 감정이 이입된
듯 눈물을 또르르 흘려보냈다.
"잠깐..그럼...내가 뭘 해야 하는거지?"
내 질문에 그녀는 눈물을 닦고 나를 바라본후, 아까와 마찬가지로 어린소녀의 목소리로 차분히 말을 이었다.
"크룬들이....저희가 여기 있는 것을 알면 역시나 이쪽 세계로 넘어오게 될 것입니다.그들은...그런 종족이기 때
문입니다.주인님은 저희 페어리들을 컨트롤 하고, 어긋난 균형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내..내가 왜!"
나는 나도 모르게 억울해서 소리를 질러 버렸다.이봐..난 이래뵈도 꽤나 행복하게 살던 사람이라고...왜 나한테
그런 일을 맡겨야 하는건데?전세계에 60억이나 되는 인구가 있단 말이다!
"그것이.....운명이니까요."
허...그래...그런 허무한 대답을 준다 이거냐...다크나이트!아...다크나이트는 베트맨이지....
"너..넌 이름이 뭔데?"
내 질문에 미지에서 온 신비한 소녀는 아름다움과 귀여움을 내뿜으며 고개를 갸웃한다.흡사 인형의 현신인것만
같은 신비로운 대 장관.
"저는 블랙나이트일 뿐입니다.제 이름은 주인님께 작명의 권한이 있습니다."
이..이봐.그런 귀여운 얼굴을 하고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줘.누가 보면 나를 로리SM변태로 오인한단 말이다!
"그...그럼...넌 나와 같이 살아야 한다는거야?"
"페어리는 오너와 계속 함께합니다.죽음으로써 소멸될 날까지."
"뭣이?"
오마이갓...면제로 군대라는 큰 산을 넘었나싶더니 이런시련이...난이제 딸내미 같은 저 아이를 데리고 결혼도 못한채 노총각 으로 늙어죽을 처지인가보다.진정하자.진정해! 일단 현실이 이렇다고해서 저아이를 고아원에 버릴수도 없는거 아니겠는가.
"그..그럼...일단 이름부터 짓자."
그녀는 내 말에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으으...자꾸 그러니까 진짜 로리SM틱하다.이러지 말아줘요.
"흠....그럼...세라라는 이름은 어떠니?"
난 한참동안의 상념끝에 세라 라는 이름을 내놓았다.그녀의 외모에서 중세서양의 미소녀 분위기와 동양적인 분위
기가 함께 묻어나기 때문에,나름 동서양 둘다 먹히는 이름을 생각해 낸 것이다.그녀는 내 말을 듣더니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세라....저의 이름은 세라입니다.주인님."
"그...그래."
미치고 팔짝 뛰겠다.이미 씻고 나가서 나는 탐정 사무실을 개장해야 하거늘,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이 시점에 그럴
여유가 없다.으으..죽겠네.가만...우선 8세 여아용 속옷부터 사줘야 하는거 아냐?언제까지 저런 팔랑거리는 와
이셔츠를 입힐수는 없는거 아니냐고!
"가..가만."
뭔가 이상하다.그녀의 말대로라면...세 장에서 다 페어리들이 나온다는 소리 아닌가?그럼...난 세명과 함께 살아
야 하는거야?
나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끼며 황급히 그녀..아니,세라의 뒤에 있는 나머지 두장의 카드를 바라보았다.
"저..저것들도...너처럼 형태가 나타나는 거야?"
세라는 나의 말에 살짝 고개를 틀어 뒤에 있는 카드를 바라보았다.그녀의 표정은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세장...이나...배정 받으셨단 말인가요?"
"으..응?"
잠깐...알선생도 어제 나한테 세장이나...라면서 놀라지 않았던가?뭐야..나 이거 내가 굉장하다는 거야?
스스스스스...
잘난척해야하나..아님 머리싸매고 좌절해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그대로 동작이 굳어버렸다.두번째 카드에서 지금
막 백색의 빛무리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프로즌 레이디.
스스스스스스.
아...이 소리...방금전에 들었던 이 소리.이제는 놀랍지도 않아 젠장.왜?뭐 신화속에서나 등장하는 켄타우루스라
도 나오지 않는 이상은 안놀랄것만 같다.
세라도 한쪽에서 물러나 잠자코 또 한장의 개화를 바라본다.그녀는 다른 페어리들이 있다는 사실이 의외였다는
듯,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하얀 빛무리가 점점 폭사되자,방안의 기온은 순식간에 내려간 것처럼 쌀쌀해 진다.으헉...난 속옷만 입고 있단
말이다!나는 황급히 이불을 내 몸으로 둘렀고 동시에 어린소녀인 세라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알몸에 와이셔츠일
뿐인데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두번째 카드의 백색 연기만을 묵묵히 응시할 뿐이었다.
첫번째 카드...아니,세라가 나올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아까와는 전연 대조되는 백색의 빛무리와 연기들.
그것들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쯤 서서히 가신다.그래...하하하하.이젠 놀랍지도 않아 젠장. 내 앞에는 또 한명의
소녀가 서있다.
"어...어.."
이..이게 뭐야.세라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은발이 찰랑거리고,푸른눈을 가진 소녀.역시나 에니메이션의 현신을
보게해주고 있고,또한 역시나 알몸으로 서있다.8살 정도의 꼬마애의 알몸이라 감흥이 없는건 그렇다 쳐도 저 요
염한 눈빛과 분위기는 뭐냐..야..이봐...너 꼬맹이주제에 그런 섹시한 표정을 짓지마!
"페어리의 오너로써 선택받은 당신.프로즌 레이디가 주인을 알현합니다."
뜨으어어어.나는 입을 쩍 벌렸다.세라도 약간 그렇긴 하지만,이 녀석은 완전히 8살이라고는 믿기 힘든 교태가득
한 목소리다.이건 진짜 말도 안돼...어..어서 옷을!
나는 후다닥 뛰어가 티셔츠 한장을 얼른 새로나온 그 소녀에게 입혀 주었다.그녀는 세라와는 달리 방실방실 눈웃
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에취!"
나는 나도 모르게 추워진 방의 온도탓에 재채기를 하며 코를 움켜쥐었다.
"왜..왜이렇게 추운거지?"
"제가...백법사 프로즌 레이디니까요 주인님."
"뭐..뭐?"
무릎까지 오는 흰색 티셔츠를 입고,치렁치렁한 은발을 반짝이며 그녀는 눈웃음을 친다.하...점잖고 단아한 세라
와는 이거 완전 쌩판 다른 분위기잖아...안돼...소녀의 저런 모습을 보고 신체에 변화가 와선 안된다..참자 준
이야.
"가만...그러고 보니...."
생각해보니 그랬다.저 페어리들은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을뿐,사실상은 능력자(?)들이 아니던가.이상하게도 나는
어렴풋이 알수있었다.내가 알버트의 뜬금없는 질문에 대답을 했듯이.어렴풋이 알것만같은...흡사 데자뷰와 같은
이 느낌은....
그랬다.이 페어리들은 흡사 마블사의 X맨들처럼 각각 능력을 갖고 있는것이다.분명 새로나온 이아이는,프로즌 레
이디라고 칭한것으로 보아 빙계의 마법력을 가진아이가 틀림없다.그래서 백법사라고 하는 건가?보통 환타지에서
백법사의 뜻은 좀 다르던데...흠흠!아무튼!
"나..혼자가 아니었네."
그 아이는 역시나 세라를 보며 중얼거렸고,세라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했다.확실한 것은 그 둘의 성격은 참으로
다르다는 점이었다.일단 만난지 얼마 안되었지만,세라는 차분하고 조용한 편인거 같았다.그에 반해 호기심이 많
고 활달해 보이는 이 아이는,꼬마주제에 약간의 색기마저 풍기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너..너도 이름이 있어야겠지."
"네 주인님."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을 한다.아...이러다가 로리 SMer가 되는것은 시간문제로고....
"유나...유나로 하자."
역시나 동서양에서 둘다 먹힐만한 이름으로 골랐다.흠...나 의외로 작명센스가 좀 있는데?
"유나...맘에 들어요.제 이름은 유나입니다!"
으으...그..그래.일단 그건 알았는데 그렇게 만세를 하지마.티셔츠가 올라가면서 다 보인단 말이다...아무리 8세
여아의 모습이라지만 지금 니 표정과 목소리는 그게 아니라고!
"하아...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나는 한숨을 푹쉬고 내앞에 있는 세라와 유나를 바라보았다.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는 세라.그리고 뭐가 좋은
지 계속 싱글거리는 유나.나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담배만 뻑뻑 피울 뿐이었다.
"근데..총각.이건 어따 쓰려고 그랴?"
"아..네..저기..시골에서 조카들이 왔는데...인석들이 물장난을 하다가 옷을 다 버렸지뭡니까 하하하하!"
나는 윗집아줌마에게 나름 그럴싸한 변명을 둘러대었다.다행히 윗집아줌마의 딸들이 셋이나 되었는데,그중에
막내인 아이가 다 큰 덕분에,나는 그 아이가 8살때 입던 옷들을 잔뜩 얻을수 있었다.그 집에서도 그 옷들은 버리
기도 뭐하고 갖고 있기도 뭐한 처치 곤란한 것들이었는지,아주머니는 선뜻 나에게 그것들을 넘겨주었다.윗집아줌
마는 이참에 쓰레기를 확 다 처리하려는 속셈인지 원치도 않았던 양말과 신발까지 한보따리 안겨주었다.나에겐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그럼 감사합니다!"
"그려...젊은 총각이 고생하네잉~"
나는 한보따리나 되는 옷가지들을 들고 낑낑거리며 다시 계단을 내려왔고,여전히 유나와 세라는 침대위에 앉아
내가 내려놓는 옷가지들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헉..헉...얘들아.우선 이거...입어."
"네."
다행히 아줌마가 준 옷들중에는 아이 속옷도 포함되어 있었고,세라는 내 말에 대답하고는 옷가지들을 뒤적거렸다
"주인님.꼭 입어야 돼요?난 안입는게 좋은데.."
"크헉!"
갈증이나서 물을 원샷하던 나는 유나의 뾰루퉁한 말에 그만 물을 허공으로 분사해버렸다.
"그..그래도 안돼.입어야 한다고."
"알았어요."
그녀는 여전히 맘에 안든다는 표정으로 옷가지 사이를 뒤적거린다.가만..근데 얘들 밥은 먹여야 하는거 아닌가.
나는 세라와 유나가 옷을 고를동안 먹을것을 찾으려고 찬장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얘들아 니들 라면도 먹...컥!"
라면을 권유하려던 나는 뒤를 돌아보고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들이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세라까지는 괜찮았다.그녀는 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서있었다.뭐랄까 평범하지도 애기같지도 않은 옷이라 귀엽기
만 했지만,문제는 유나였다.그 아이는 검정색 여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젠장....애들옷이 저렇게 섹시할수 있
는거냐?아..이건 아니잖아!
"그..그런데.궁금한게 있어."
내가 입을 열자 유나와 세라가 동시에 나를 바라본다.
"나머지 한장은 어째서 저대로 있는거야?"
"에에?또 있어요?"
내 말에 이상스럽게도 유나의 표정이 불만스럽게 변한다.반대로 세라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개화시기는 저희도 알수 없습니다.다만...주인님이 계실때에 상호작용에 의해 개화하는거 빼고는.."
"상호작용?"
"네."
뭔지는 알수 없는 말이지만,왠지 무식해 보이기싫어서 난 그냥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나머지 한장은 책상위에
놓인 그대로였고 세라와 유나의 카드는 그림이 없어진 그 상태 그대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럼...난 왜 주인으로 선택된 거야?"
아까부터 묻고 싶은 말이었다.뭐..그것이 랜덤으로 선택되는거라면 걍 운명이거니 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이번에는 세라가 아닌 유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마치 왕실의 어린 공주님같은 모습이었다.귀여운 복장의 세라
도 깜찍했지만,은발과 대조되는 검정색 드레스라니....이건 아이에게서 느끼는 미(美)의 모습이 아니잖니..
"페어리의 오너는 마나와의 반응력으로 형성됩니다."
"마나?"
"네.주인들은 마나를 느끼고 다룰수 있는자에게만 자격이 주어져요"
마나라....대강 환타지 소설이나 영화에서 자주 접하는 단어이다.말하자면 생명력,자연력 같은거 아닌가?뭐..
동양에서 말하는 기(氣)랑 비슷한 그런 개념...
"근데..난 그러 느끼고 다룰줄 모르는데?"
내 말에 유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세라는 묵묵히 그녀의 옆에서 옷가지들을 정리할뿐이었다.
"그건 주인님도 은연중에 느끼고 계신거니까요.마나를 접하줄 모르는 사람은 애초에 페어리를 개화시키지 못하거
든요."
그..그렇구나..요컨데 난 좀 굉장한 놈이란 거야?하하하..그럴리가.이건 그냥 운이 없는거라고...지금 난 꼬맹이
둘을 맡아서 키우고 있는거란 말야.그리고 이제 곧 셋이 되겠지.....흑...
"가만..근데...니들은 페어리라고 했고..각각의 힘이 있잖아..그치만 지금 상태는..."
맞다.얘들은 뭔가 능력이 있겠지만...지금은 그저 꼬맹이들이 아닌가.나라도 니들은 이기겠다 욘석들아.
"저흰 이상태로만 계속 되는거 아니에요!"
갑자기 유나가 토라진듯 소리쳤고,세라는 그저 말없이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에이..그래도...아무리 요새애들이 빨리 큰다지만...그런 꼬마상태에서...헉!"
나는 들고있던 라면봉지를 떨어뜨릴 뻔했다.유나의 짧은 은빛 머리칼이 허공으로 흩날리는가 싶더니 그녀의 손
주위로 흰색기운이 응집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그것들은 공기의 파성음을 내며 작은 냉기로 화했다.무엇이든
저것에 맞으면 얼어붙을 것만 같은 엄청난 한기마져 내뿜고 있었다.
"이래도..꼬마같아요?"
그녀는 요염하게(꼬마주제에!)말하며 나를 살짝 흘겨보았고,나는 행여나 그것을 나에게 날릴까봐 주춤주춤 물러
서고 말았다.바로 그때였다.
파아아앗!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세라가 오른손으로 허공에 응집된 유나의 기운을 쳐내어 버린것이다.그런 세나의 우수에
도 약간의 신비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마...맙소사..."
세라가 쳐내어 버린 그 백색의 기운은 벽에 부딪혔고,정말 거짓말 처럼 벽 한가운데에는 얼음덩어리가 종유석마
냥 박혀 버렸다.
"칫.왜그래?"
"주인님앞에서...그런일은 그만둬."
그냥 장난일 뿐이었다는듯 피식웃는 유나에게 세라는 진지하게 경고했다.하지만 나는 그 대단한 아이들 앞에서
아무런 말을 할수가 없었다.
엄마...나 무서워!
#4.그들과의 첫출근.
끼이이익.
"들어와...이쪽으로..."
에휴.한숨만 나온다.이거 무슨 마누라가 집나가서 딸내미 둘을 사무실에 데려온 아빠도 아니고....세라와 유나는
귀엽게 털모자까지 써서는 엄청 깜찍한 모습이었고,사이좋게 내 옆에 붙어서 들어온것이다.유나가 내 손을 잡은
순간 세라도 내 옆에서 덥석 손을 잡아서는 나는 양옆에 아이들 손을 잡고 사무실까지 와버린 것이다.
사실은 어쩔수 없었다.그 아이들만 집에 놨뒀다가는 무슨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알겠는가.게다가 평범한 아이들도
아니니,울며 겨자먹기로 데리고 올수밖에 없었다.
"와...이상한 냄새."
"..."
유나는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신이나서는 여기저기를 구경했다.에휴..저게 세상에 나온지 몇시간도 안된 생명체
가 맞긴 한거냐?너무 활달한거 아냐?보통 얼음을 다루는 사람이라 하면 좀 쌀쌀맞고 말없고 하지 않느냔 말이다.
세라는 그와 전혀 대조되는 모습으로 차분히 쇼파에 앉는다.
"주인님 근데 여기는 뭐하는 곳이에요?"
역시나 호기심 많은 유나는 신비로운 푸른눈을 동글동글 굴리며 내게 물어왔다.두꺼운 점퍼를 입긴 했지만,이
아이는 꼬마 주제에 뭔지 모르게 섹시한 이미지다..으윽...나 위험수치로 온것만 같아.
"탐정...사무실이야."
"타암저엉?"
유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바싹 얼굴을 들이밀었다.으윽..이봐.무릎에는 올라타지 말란말이야...
"아..응.사람들이 의뢰한걸 내가 해주는 거야.돈을 받고."
"아하!용병?"
"음...그게 아니라 용병과는 다른게...에휴..그래 용병맞아."
유나는 꺄르르 웃으며 내 품에 안겨온다.아...진짜 친밀감 하나는 끝내주는 아이로구나.이봐...너랑 나랑 본지
얼마나 됐다고...으..응?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잠자코 그것을 바라보는 세라의 눈에서 냉기가 풀풀 풍겨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언
뜻보면 프로즌 레이디는 유나가 아닌 세라인것처럼...
"주인님.이건 뭐에요오?이거는요?이거는?이거는?"
유나는 쉴새없이 내 무릎에 꼭 올라타서는 컴퓨터를 비롯해서 이것저것을 찝어보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푸른빛
눈이 쉴새없이 반짝반짝 반짝인다.나는 허둥지둥 그것들을 답해주기 바빴다.아아..아빠란건 참으로 힘든 것이로
구나.난 결혼하면 딸은 낳지 않겠어! 근데...결혼은 할수 있을까?
끼이이이...
순간 문에서 들린 소리에 나를 비롯해서,내 무릎위에서 꺄르를 거리던 유나와 그것을 묵묵히 보고 있던 세라의
시선이 문쪽으로 옮겨졌다.
"저기...여기가..탐정 사무소 인가요?"
헛!손님이다!이게 왠일이야...내 생애 이틀연속 손님이라니!나는 무릎에 앉아있는 유나를 번쩍들어 옆에다가 내
려놓고는 부리나케 일어났다.
"어서오십쇼!지대로 찾아오셨슴다.하하!"
날 찾아온 자는 주근깨가 가득한, 30대가 약간 안되어 보이는 남자였다.연신 쭈뼛거리는 것이 약간은 내성적인 사
람 같았다.
"여기 앉으시죠.하하."
나는 호기있게 의자를 빼주었고,유나는 입을 삐죽 내밀더니 계속 손님을 맞는 내 뒤를 졸졸 쫒아다녔다.
"따...따님인가 봐요."
"아..예...그..그렇죠."
그 남자는 막 만화에서 뛰쳐나온듯한 두명의 아이들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이봐...어떻게 니 얼굴
에서 얘들이 나왔냐?라는 듯한 표정은 짓지마...얘들은 내 딸이 아니라고..
"아닌데..우리 주인님인...."
"아하하하!일단 의뢰내용을 들어볼까요?"
나는 황급히 유나의 입을 막고는 호탕하게 웃어보였다.주인님이란 단어는 절대 발설하면...앗차거워!
난 깜짝 놀라서 유나의 입을 가린 손을 떼어버렸고,유나는 베시시 웃더니 또 내 바지 주머니 쪽을 살짝 움켜쥐었
다. 으으...입으로 냉기를 발설한거냐...동상 걸리는줄 알았잖아!
"저기...괜찮으세요?"
"아..아하하!넵.괜찮습니다.의뢰 내용이?"
나는 유나의 숨결(?)에 당한 내 손을 슥슥 비벼가며 의뢰인의 맞은 편에 앉았다.그는 몇번이고 망설이더니만,힘
겹게 입을 열었다.
"사실...제가...여동생이 있습니다."
"흠흠..그러시군요..여동생이라.."
나는 열심히 그의 말을 받아적었다.
"요새..남자친구가 생겼는데..그게...."
"음..네네.그래서요?"
"그 남자친구가....조폭....인거 같아서요."
"아하..그렇군요..조폭....네에?"
나는 깜짝놀라 고개를 들었다.그는 또 연신 몇번이고 망설이기 시작했다.
"놀라실건 압니다...근데...제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인지라...경찰에 말해도 들어주지 않아서요...."
그는 지금이라도 엉엉 울것같은 모습이었다.유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고,무심해 보이던 세라역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처음엔...착한 사람인줄 알고 사귀었더랍니다....알고보니 그동네에서 깡패짓을 일삼는 조폭이라고 하더라구요.
그걸 알고 헤어지자고 했는데...놓아주질 않는거 같습니다."
"그게 무슨소리죠?놓아주지 않는다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뭐 요즘 세상에 감금이라도 한다는거야 뭐야?
"그게..사실은...제 여동생이....술집에서 일을 합니다...그 깡패녀석이...제 여동생옆에 붙어서 감시하는 모양
입니다...어려운 부탁인거 압니다...경찰에 사정해도 전혀 들어주지도 않아요...부탁드립니다...말씀드릴 곳은
여기밖에 없어요...부탁드립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빌어먹을....술집에서 여동생을 일하게 냅뒀단 말이야?
"집안이...어려워서...동생이 그런 선택을 한것도 어쩔수 없었습니다...저도 못말렸으니..오라비로써 자격도 없
는 놈이지요...부탁합니다..."
그는 회한에 찬듯 훌쩍 거리기 시작했다.나는 묵묵히 그를 내려다 보았다.
"그래서...정확한 의뢰내용이 뭡니까?"
"그놈들이 제 여동생의 가게를 관리한다는 명목하에 놔주질 않으니...제 여동생만 찾아주시면...뒷일은 제가 어
떻게든 하겠습니다.야반도주를 하던,그놈들에게 사정을 하던...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그러니 제발..."
아아.죽겠다.힘이 빠진다.젠장...이런 의뢰는 딱 잘라 거절하는게 사리분별에 맞는 것이거늘...예전부터 난 가족
에 관한 일이라면 차갑게 무시를 할수가 없다.젠장...탐정은 원래 이렇게 정에 약하면 안되는것인데.
이번에는 유나와 세라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내가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으니 궁금한 모양이다.두 명의 미소녀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계속 맞고 있는것도 고역이다.
"여동생분....성함하고 인상착의...그리고 가게 주소를 적어주세요."
"저...정말입니까!해주시는 겁니까!"
"보수...톡톡히 준비하시는게 좋을거라구요...쳇."
그의 표정이 환하게 바뀐다.더불어 유나도 싱긋 웃으며 내 팔에 매달리기 시작한다.다행히도 주인님 주인님!하면
서 떠들어대지 않는 바람에 나는 로리콘 SMER의 누명을 쓸 일은 사전 예방할수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이건 제 연락처구요...부탁드립니다...감사합니다.."
그는 언뜻봐도 동생뻘인 나에게 몇번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나가버렸다.에휴...이럴줄 알았다.나는 또
담배를 피워물고 후회를 하고 있었다.
"주인님!이거 언제 할거에요?의뢰?"
나는 문득 유나가 묻는 소리가 들려 옆을 바라보았다.털모자 사이로 삐져나온 은빛 머리칼.치마를 입은 그녀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해야겠지."
일단 허락은 했지만 착잡한 마음이 들어 한숨을 내쉬는 내 옆으로,언제 왔는지 세라마져 멀뚱히 서서 나를 바라
보았다.큭...귀엽다. 이런아이가 둘이나 나를 멀뚱멀뚱히 보고 있으니 귀엽다.너희들 같은 녀석들 때문에 오탁쿠
를 자극하는 로리콘 야겜들이 나오는 거란 말이야!
"같이 가요 주인님."
"뭐?"
세라는 묵묵히 나를 바라보며 말을 했다.역시나 흰색 털모자를 귀까지 덮어쓴 귀여운 모습이었다.정말이지 페어
리라는 단어의 본래의 뜻인 요정이라는 말을 써도 이상스럽지 않은 모습이다.근데 뭐?같이 가자니?
나의 의아한 시선을 받아내며,세라는 천천히 작고 귀여운 입술을 열었다.
"주인님과 저희는 함께니까요."
#1.개화(開化)
삐비비빅..삐비빅...삐비비...콰직!
언제나 있는 일이다.
알람이 울리다가 내 손에 의해 콰직!소리가 나는 이 현상.
혹자들은 프리랜서 주제에 왜 기상시간을 정해두냐?라고 물을수도 있겠지만..난 이래뵈도 계획에 의해 움직이
는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끄으으으응.."
나는 전형적인 궁상자세....그러니까 상반신은 침대에 대고 하반신은 잔뜩 위로 올려 엎드린 자세로 눈을 비벼대
었다.
"으윽..뭐야 이거.."
온몸이 땀범벅이다.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당장 이대로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껴입고 있었다.게다가 목이
까칠까칠 한것이 목도리까지 둘러져 있는것 같다.
"내가 왜이런 상태로 잠든거지..."
나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걸친옷을 벗어대었다.으으...땀이 잔뜩 묻었으니 옷이 잘 벗겨지지도 않는다.팬티를 제
외하고 무장해제(?)하는데는 평소보다 더더욱 오래 걸렸다.가만....근데 나 왜 이러고 잔거지?
속이 울렁거리지 않는것으로 보아 쐬주를 한잔 걸치고 잔것같지도 않다.근데 뭐지?이 이상한 이질감은....
"아 맞다..이상한 꿈을꿨었지..."
나는 일부러 혼잣말로 크게 중얼 거렸다.맞아..그건 꿈일거야..라는듯이 큰소리로.그리고 천천히 책상위로 고개
를 돌렸다.없어야 해...그 카드들이 없어야 진정 그것이 꿈이되는 거란 말이다!
내 고개가 흡사 스포츠 하이라이트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돌아간다.그리고 내 고개가 향한 마지막 종착점은 바
로 어제 내가 카드를 올려두었던 책상위였음은 말할것도 없다.
"이...있다..."
나는 그저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리고 말았다.있었다.카드는 어제 내가 놓은 그대로 세장이 나란히...가..가만!
"끄...끄아아아..."
나는 곧 뒤로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가 되어 버렸다.어제 난 분명 카드를 포개서 놓았단 말이다...그런데
카드 세장이 옆으로 나란히 펼쳐져서 놓여 있다.나머지 카드는 고대로 옆에 쌓여 있었다.어제밤 나의 행동을 무
시하기라도 하듯,그림이 그려진 세개의 카드가 왜 1렬 횡대로 좌라락 놓여 있는거야!
"오마이갓...이건 진짜 꿈...."
꿈이야!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난 그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옆으로 늘어져 있는 카드중 첫번째 카드 하나가
빛을 뿜어대고 있는것 아닌가.그것도 검은색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나는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바로잡으려
무던히 애를 써야했다.
"진정하자...진정하자...이런걸로 놀라선 명탐정이 될수 없어...진정해야해 진정..."
하하하.우습게도 난 더이상 진정할수가 없었다.카드에서 빛무리가 넘실거리다 못해 이제 대놓고 검은색 기운이
폭사되기 시작한 것이다.아침 여덟시부터 난 왜 이런....이런걸 봐야 하는거지?
문득 어제만난 알....뭐시기 하는 선생이 원망스럽다.이봐..난 장사가 좀 안되서 그렇지 나름 내 생활에 만족하
며 살던 사람이라고...왜이러는거야 나한테!
스스스스스스..
카드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검은색 기운이 폭사되는 첫번째 카드는 큰 칼을 들고 있던 다크레이디
의 카드였다.그리고 그 카드에서의 그림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어...어...어.."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중얼거렸다.연기는 점점더 심해진다.옆집에서 봤다면 화재신고를 할지도 모를 정도로..
그리고 곧이어 그 연기가 사라져 가고......
"허..허허...허허허허허..."
나는 미친놈마냥 ,바람빠진 풍선마냥 웃어제꼈다.연기가 가시니까 한 소녀가 서있었다.카드의 그림에서와 똑같
은 모습을 한....다른점이 있다면 8세 정도로 보이는 그 소녀는 카드와는 달리 전라의 모습이라는것 뿐.
허허허허허.어제 알선생은 나한테 커피가 아니라 마약을 줬나보다.맞아!그게 가장 과학적이고 신빙성이 있는 말
이지.요즘 세상에...달로 우주선을 가는 세상에...아..아니..우주선으로 달을 가는 세상에....으헉!
나는 그대로 뒤로 파드득 물러나고 말았다.전라의 소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하얀 알몸에 검정색 머리.흡
사 에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듯한 그 외모의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나는 팬티만 입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로 덜덜 떨면서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반짝거린다.그리고 신비로운 그녀의 입술이 천
천히 열리며,이세상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수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페어리의 오너로써 선택받으신 당신.블랙나이트가 주인을 알현합니다"
#2.페어리란?
"진정해..진정하자..진정하자 준아..진정.."
나는 몇번이고 큰 소리로 외치고는 내 앞에 서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하얀색 와이셔츠로 둘러져 있다.
물론 소녀지만 알몸으로 서있는게 민망해 내가 서둘러 입혀준 것이다.하지만 이..이건..뭐냐.마치 전날 남친집에
서 잔 여자아이가 그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듯한 포스는....내 와이셔츠 하나로 무릎까지 가려지는 그....으악!
난..난 로리콘이 아냐!
"흠흠!저기..그러니까..이게 어떻게 된 건지...설명해 줄래?....요?"
난 애써 진정하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똘망똘망한 눈망울에 나는 빠져 들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긴 했지만,그녀
는 다시 또박또박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페어리의 선택받은 오너.그리고 난 당신께 종속된 제1페어리 블랙나이트 입니다."
"..."
미치고 팔짝뛸 노릇이다.이제는 이건 꿈이라는 허황된 망상은 안하기로 했다.눈앞의 이것이 현실이라면,난 받아
들이기로 결정했다.하지만...받아 들이는 것도 뭐라도 좀 알고 받아들이자는 취지에서 물어봤건만...돌아오는건
이 왠 중세시대의 대사냔 말이다.
"그..그래..그건 잘 알겠는데..흐음..그러니까..일단 너 한국말 잘한다."
내 어이없는 말에 그녀는 고개를 잠시 갸우뚱했다.인형같은 그 모습이 너무 귀엽긴했지만,그것을 느낄만큼의 여
유는 없다.
"오너의 국적에 따라 페어리의 정보가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아..으..응.그렇구나.."
한동안 어색한 정적이 흐른다.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한다.그것은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닐수
없었다.그래...가장 궁금한걸 물어보자.원초적이지만 가장 궁금한거!
"넌...왜 내 앞에 있는거야?그리고 페어리니 오너니 하는건 뭔데?"
그 소녀는 자신이 알몸상태에 와이셔츠만 입고,건장한 청년의 빤쑤바람과 대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저희가 살던 세계,프로센은 전쟁으로 종식되었고,차원이 뒤틀릴정도의 타격을 입었습니다.따라서 저희 대마법사
분들과 장로분들이 연합, 마법력을 모아 이계로 귀환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나도모르게 경청하기 시작했다.소녀는 목이 메는듯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고,나역시
황당무개한 마음을 털어버리고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프로센이라 불린 세계,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와 전혀 다른 차원의 그 세계가 존재하는것이었다.놀랍게도 신
화나 판타지에서나 볼수 있던 그 세계들이 실존한다는 의미였다.마법과 신력이 난무하며,온갖 종족들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그 세계.하지만 그 세계에서는 어느순간 균열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계의 세력-그들은 이들을
"크룬"이라고 불렀다-들이 그들의 세계로 넘어왔고,심각한 전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크룬이라 불리는 세력들은 페어리의 세계를 난도질했다.크룬들은 갈곳을 잃은 늑대들이나 다름없었고,역시나 막
강한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계자체가 멸종할 위기에 놓여 버리자,프로센의 능력자들은 자신들의 힘을
페어리라는 존재로 봉인,그리고 그 존재를 다시 카드에 봉인하였다.그리고 몇몇의 대마법사들이 마력을 끌어모아
차원을 넘어가 버렸고, 그들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들어온것이다.무분별한 힘의 증폭을 컨트롤 하기
위해서,그들은 인간이라는 매개체를 주인으로 택하게 했다.그리고...그 중에 내가 선택된 것이다.
"허...뭐...이런일이..."
더 듣고 싶었지만,그녀는 눈물이 나는듯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담배를 피워물고 생각에 잠겼다.그래...
분명 그녀역시 새롭게 탄생된 피조물이다.하지만 선대의 상념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것일까.그녀는 감정이 이입된
듯 눈물을 또르르 흘려보냈다.
"잠깐..그럼...내가 뭘 해야 하는거지?"
내 질문에 그녀는 눈물을 닦고 나를 바라본후, 아까와 마찬가지로 어린소녀의 목소리로 차분히 말을 이었다.
"크룬들이....저희가 여기 있는 것을 알면 역시나 이쪽 세계로 넘어오게 될 것입니다.그들은...그런 종족이기 때
문입니다.주인님은 저희 페어리들을 컨트롤 하고, 어긋난 균형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내..내가 왜!"
나는 나도 모르게 억울해서 소리를 질러 버렸다.이봐..난 이래뵈도 꽤나 행복하게 살던 사람이라고...왜 나한테
그런 일을 맡겨야 하는건데?전세계에 60억이나 되는 인구가 있단 말이다!
"그것이.....운명이니까요."
허...그래...그런 허무한 대답을 준다 이거냐...다크나이트!아...다크나이트는 베트맨이지....
"너..넌 이름이 뭔데?"
내 질문에 미지에서 온 신비한 소녀는 아름다움과 귀여움을 내뿜으며 고개를 갸웃한다.흡사 인형의 현신인것만
같은 신비로운 대 장관.
"저는 블랙나이트일 뿐입니다.제 이름은 주인님께 작명의 권한이 있습니다."
이..이봐.그런 귀여운 얼굴을 하고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줘.누가 보면 나를 로리SM변태로 오인한단 말이다!
"그...그럼...넌 나와 같이 살아야 한다는거야?"
"페어리는 오너와 계속 함께합니다.죽음으로써 소멸될 날까지."
"뭣이?"
오마이갓...면제로 군대라는 큰 산을 넘었나싶더니 이런시련이...난이제 딸내미 같은 저 아이를 데리고 결혼도 못한채 노총각 으로 늙어죽을 처지인가보다.진정하자.진정해! 일단 현실이 이렇다고해서 저아이를 고아원에 버릴수도 없는거 아니겠는가.
"그..그럼...일단 이름부터 짓자."
그녀는 내 말에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으으...자꾸 그러니까 진짜 로리SM틱하다.이러지 말아줘요.
"흠....그럼...세라라는 이름은 어떠니?"
난 한참동안의 상념끝에 세라 라는 이름을 내놓았다.그녀의 외모에서 중세서양의 미소녀 분위기와 동양적인 분위
기가 함께 묻어나기 때문에,나름 동서양 둘다 먹히는 이름을 생각해 낸 것이다.그녀는 내 말을 듣더니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세라....저의 이름은 세라입니다.주인님."
"그...그래."
미치고 팔짝 뛰겠다.이미 씻고 나가서 나는 탐정 사무실을 개장해야 하거늘,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이 시점에 그럴
여유가 없다.으으..죽겠네.가만...우선 8세 여아용 속옷부터 사줘야 하는거 아냐?언제까지 저런 팔랑거리는 와
이셔츠를 입힐수는 없는거 아니냐고!
"가..가만."
뭔가 이상하다.그녀의 말대로라면...세 장에서 다 페어리들이 나온다는 소리 아닌가?그럼...난 세명과 함께 살아
야 하는거야?
나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끼며 황급히 그녀..아니,세라의 뒤에 있는 나머지 두장의 카드를 바라보았다.
"저..저것들도...너처럼 형태가 나타나는 거야?"
세라는 나의 말에 살짝 고개를 틀어 뒤에 있는 카드를 바라보았다.그녀의 표정은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세장...이나...배정 받으셨단 말인가요?"
"으..응?"
잠깐...알선생도 어제 나한테 세장이나...라면서 놀라지 않았던가?뭐야..나 이거 내가 굉장하다는 거야?
스스스스스...
잘난척해야하나..아님 머리싸매고 좌절해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그대로 동작이 굳어버렸다.두번째 카드에서 지금
막 백색의 빛무리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프로즌 레이디.
스스스스스스.
아...이 소리...방금전에 들었던 이 소리.이제는 놀랍지도 않아 젠장.왜?뭐 신화속에서나 등장하는 켄타우루스라
도 나오지 않는 이상은 안놀랄것만 같다.
세라도 한쪽에서 물러나 잠자코 또 한장의 개화를 바라본다.그녀는 다른 페어리들이 있다는 사실이 의외였다는
듯,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하얀 빛무리가 점점 폭사되자,방안의 기온은 순식간에 내려간 것처럼 쌀쌀해 진다.으헉...난 속옷만 입고 있단
말이다!나는 황급히 이불을 내 몸으로 둘렀고 동시에 어린소녀인 세라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알몸에 와이셔츠일
뿐인데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두번째 카드의 백색 연기만을 묵묵히 응시할 뿐이었다.
첫번째 카드...아니,세라가 나올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아까와는 전연 대조되는 백색의 빛무리와 연기들.
그것들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쯤 서서히 가신다.그래...하하하하.이젠 놀랍지도 않아 젠장. 내 앞에는 또 한명의
소녀가 서있다.
"어...어.."
이..이게 뭐야.세라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은발이 찰랑거리고,푸른눈을 가진 소녀.역시나 에니메이션의 현신을
보게해주고 있고,또한 역시나 알몸으로 서있다.8살 정도의 꼬마애의 알몸이라 감흥이 없는건 그렇다 쳐도 저 요
염한 눈빛과 분위기는 뭐냐..야..이봐...너 꼬맹이주제에 그런 섹시한 표정을 짓지마!
"페어리의 오너로써 선택받은 당신.프로즌 레이디가 주인을 알현합니다."
뜨으어어어.나는 입을 쩍 벌렸다.세라도 약간 그렇긴 하지만,이 녀석은 완전히 8살이라고는 믿기 힘든 교태가득
한 목소리다.이건 진짜 말도 안돼...어..어서 옷을!
나는 후다닥 뛰어가 티셔츠 한장을 얼른 새로나온 그 소녀에게 입혀 주었다.그녀는 세라와는 달리 방실방실 눈웃
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에취!"
나는 나도 모르게 추워진 방의 온도탓에 재채기를 하며 코를 움켜쥐었다.
"왜..왜이렇게 추운거지?"
"제가...백법사 프로즌 레이디니까요 주인님."
"뭐..뭐?"
무릎까지 오는 흰색 티셔츠를 입고,치렁치렁한 은발을 반짝이며 그녀는 눈웃음을 친다.하...점잖고 단아한 세라
와는 이거 완전 쌩판 다른 분위기잖아...안돼...소녀의 저런 모습을 보고 신체에 변화가 와선 안된다..참자 준
이야.
"가만...그러고 보니...."
생각해보니 그랬다.저 페어리들은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을뿐,사실상은 능력자(?)들이 아니던가.이상하게도 나는
어렴풋이 알수있었다.내가 알버트의 뜬금없는 질문에 대답을 했듯이.어렴풋이 알것만같은...흡사 데자뷰와 같은
이 느낌은....
그랬다.이 페어리들은 흡사 마블사의 X맨들처럼 각각 능력을 갖고 있는것이다.분명 새로나온 이아이는,프로즌 레
이디라고 칭한것으로 보아 빙계의 마법력을 가진아이가 틀림없다.그래서 백법사라고 하는 건가?보통 환타지에서
백법사의 뜻은 좀 다르던데...흠흠!아무튼!
"나..혼자가 아니었네."
그 아이는 역시나 세라를 보며 중얼거렸고,세라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했다.확실한 것은 그 둘의 성격은 참으로
다르다는 점이었다.일단 만난지 얼마 안되었지만,세라는 차분하고 조용한 편인거 같았다.그에 반해 호기심이 많
고 활달해 보이는 이 아이는,꼬마주제에 약간의 색기마저 풍기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너..너도 이름이 있어야겠지."
"네 주인님."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을 한다.아...이러다가 로리 SMer가 되는것은 시간문제로고....
"유나...유나로 하자."
역시나 동서양에서 둘다 먹힐만한 이름으로 골랐다.흠...나 의외로 작명센스가 좀 있는데?
"유나...맘에 들어요.제 이름은 유나입니다!"
으으...그..그래.일단 그건 알았는데 그렇게 만세를 하지마.티셔츠가 올라가면서 다 보인단 말이다...아무리 8세
여아의 모습이라지만 지금 니 표정과 목소리는 그게 아니라고!
"하아...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나는 한숨을 푹쉬고 내앞에 있는 세라와 유나를 바라보았다.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는 세라.그리고 뭐가 좋은
지 계속 싱글거리는 유나.나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담배만 뻑뻑 피울 뿐이었다.
"근데..총각.이건 어따 쓰려고 그랴?"
"아..네..저기..시골에서 조카들이 왔는데...인석들이 물장난을 하다가 옷을 다 버렸지뭡니까 하하하하!"
나는 윗집아줌마에게 나름 그럴싸한 변명을 둘러대었다.다행히 윗집아줌마의 딸들이 셋이나 되었는데,그중에
막내인 아이가 다 큰 덕분에,나는 그 아이가 8살때 입던 옷들을 잔뜩 얻을수 있었다.그 집에서도 그 옷들은 버리
기도 뭐하고 갖고 있기도 뭐한 처치 곤란한 것들이었는지,아주머니는 선뜻 나에게 그것들을 넘겨주었다.윗집아줌
마는 이참에 쓰레기를 확 다 처리하려는 속셈인지 원치도 않았던 양말과 신발까지 한보따리 안겨주었다.나에겐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그럼 감사합니다!"
"그려...젊은 총각이 고생하네잉~"
나는 한보따리나 되는 옷가지들을 들고 낑낑거리며 다시 계단을 내려왔고,여전히 유나와 세라는 침대위에 앉아
내가 내려놓는 옷가지들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헉..헉...얘들아.우선 이거...입어."
"네."
다행히 아줌마가 준 옷들중에는 아이 속옷도 포함되어 있었고,세라는 내 말에 대답하고는 옷가지들을 뒤적거렸다
"주인님.꼭 입어야 돼요?난 안입는게 좋은데.."
"크헉!"
갈증이나서 물을 원샷하던 나는 유나의 뾰루퉁한 말에 그만 물을 허공으로 분사해버렸다.
"그..그래도 안돼.입어야 한다고."
"알았어요."
그녀는 여전히 맘에 안든다는 표정으로 옷가지 사이를 뒤적거린다.가만..근데 얘들 밥은 먹여야 하는거 아닌가.
나는 세라와 유나가 옷을 고를동안 먹을것을 찾으려고 찬장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얘들아 니들 라면도 먹...컥!"
라면을 권유하려던 나는 뒤를 돌아보고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들이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세라까지는 괜찮았다.그녀는 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서있었다.뭐랄까 평범하지도 애기같지도 않은 옷이라 귀엽기
만 했지만,문제는 유나였다.그 아이는 검정색 여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젠장....애들옷이 저렇게 섹시할수 있
는거냐?아..이건 아니잖아!
"그..그런데.궁금한게 있어."
내가 입을 열자 유나와 세라가 동시에 나를 바라본다.
"나머지 한장은 어째서 저대로 있는거야?"
"에에?또 있어요?"
내 말에 이상스럽게도 유나의 표정이 불만스럽게 변한다.반대로 세라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개화시기는 저희도 알수 없습니다.다만...주인님이 계실때에 상호작용에 의해 개화하는거 빼고는.."
"상호작용?"
"네."
뭔지는 알수 없는 말이지만,왠지 무식해 보이기싫어서 난 그냥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나머지 한장은 책상위에
놓인 그대로였고 세라와 유나의 카드는 그림이 없어진 그 상태 그대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럼...난 왜 주인으로 선택된 거야?"
아까부터 묻고 싶은 말이었다.뭐..그것이 랜덤으로 선택되는거라면 걍 운명이거니 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이번에는 세라가 아닌 유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마치 왕실의 어린 공주님같은 모습이었다.귀여운 복장의 세라
도 깜찍했지만,은발과 대조되는 검정색 드레스라니....이건 아이에게서 느끼는 미(美)의 모습이 아니잖니..
"페어리의 오너는 마나와의 반응력으로 형성됩니다."
"마나?"
"네.주인들은 마나를 느끼고 다룰수 있는자에게만 자격이 주어져요"
마나라....대강 환타지 소설이나 영화에서 자주 접하는 단어이다.말하자면 생명력,자연력 같은거 아닌가?뭐..
동양에서 말하는 기(氣)랑 비슷한 그런 개념...
"근데..난 그러 느끼고 다룰줄 모르는데?"
내 말에 유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세라는 묵묵히 그녀의 옆에서 옷가지들을 정리할뿐이었다.
"그건 주인님도 은연중에 느끼고 계신거니까요.마나를 접하줄 모르는 사람은 애초에 페어리를 개화시키지 못하거
든요."
그..그렇구나..요컨데 난 좀 굉장한 놈이란 거야?하하하..그럴리가.이건 그냥 운이 없는거라고...지금 난 꼬맹이
둘을 맡아서 키우고 있는거란 말야.그리고 이제 곧 셋이 되겠지.....흑...
"가만..근데...니들은 페어리라고 했고..각각의 힘이 있잖아..그치만 지금 상태는..."
맞다.얘들은 뭔가 능력이 있겠지만...지금은 그저 꼬맹이들이 아닌가.나라도 니들은 이기겠다 욘석들아.
"저흰 이상태로만 계속 되는거 아니에요!"
갑자기 유나가 토라진듯 소리쳤고,세라는 그저 말없이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에이..그래도...아무리 요새애들이 빨리 큰다지만...그런 꼬마상태에서...헉!"
나는 들고있던 라면봉지를 떨어뜨릴 뻔했다.유나의 짧은 은빛 머리칼이 허공으로 흩날리는가 싶더니 그녀의 손
주위로 흰색기운이 응집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그것들은 공기의 파성음을 내며 작은 냉기로 화했다.무엇이든
저것에 맞으면 얼어붙을 것만 같은 엄청난 한기마져 내뿜고 있었다.
"이래도..꼬마같아요?"
그녀는 요염하게(꼬마주제에!)말하며 나를 살짝 흘겨보았고,나는 행여나 그것을 나에게 날릴까봐 주춤주춤 물러
서고 말았다.바로 그때였다.
파아아앗!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세라가 오른손으로 허공에 응집된 유나의 기운을 쳐내어 버린것이다.그런 세나의 우수에
도 약간의 신비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마...맙소사..."
세라가 쳐내어 버린 그 백색의 기운은 벽에 부딪혔고,정말 거짓말 처럼 벽 한가운데에는 얼음덩어리가 종유석마
냥 박혀 버렸다.
"칫.왜그래?"
"주인님앞에서...그런일은 그만둬."
그냥 장난일 뿐이었다는듯 피식웃는 유나에게 세라는 진지하게 경고했다.하지만 나는 그 대단한 아이들 앞에서
아무런 말을 할수가 없었다.
엄마...나 무서워!
#4.그들과의 첫출근.
끼이이익.
"들어와...이쪽으로..."
에휴.한숨만 나온다.이거 무슨 마누라가 집나가서 딸내미 둘을 사무실에 데려온 아빠도 아니고....세라와 유나는
귀엽게 털모자까지 써서는 엄청 깜찍한 모습이었고,사이좋게 내 옆에 붙어서 들어온것이다.유나가 내 손을 잡은
순간 세라도 내 옆에서 덥석 손을 잡아서는 나는 양옆에 아이들 손을 잡고 사무실까지 와버린 것이다.
사실은 어쩔수 없었다.그 아이들만 집에 놨뒀다가는 무슨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알겠는가.게다가 평범한 아이들도
아니니,울며 겨자먹기로 데리고 올수밖에 없었다.
"와...이상한 냄새."
"..."
유나는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신이나서는 여기저기를 구경했다.에휴..저게 세상에 나온지 몇시간도 안된 생명체
가 맞긴 한거냐?너무 활달한거 아냐?보통 얼음을 다루는 사람이라 하면 좀 쌀쌀맞고 말없고 하지 않느냔 말이다.
세라는 그와 전혀 대조되는 모습으로 차분히 쇼파에 앉는다.
"주인님 근데 여기는 뭐하는 곳이에요?"
역시나 호기심 많은 유나는 신비로운 푸른눈을 동글동글 굴리며 내게 물어왔다.두꺼운 점퍼를 입긴 했지만,이
아이는 꼬마 주제에 뭔지 모르게 섹시한 이미지다..으윽...나 위험수치로 온것만 같아.
"탐정...사무실이야."
"타암저엉?"
유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바싹 얼굴을 들이밀었다.으윽..이봐.무릎에는 올라타지 말란말이야...
"아..응.사람들이 의뢰한걸 내가 해주는 거야.돈을 받고."
"아하!용병?"
"음...그게 아니라 용병과는 다른게...에휴..그래 용병맞아."
유나는 꺄르르 웃으며 내 품에 안겨온다.아...진짜 친밀감 하나는 끝내주는 아이로구나.이봐...너랑 나랑 본지
얼마나 됐다고...으..응?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잠자코 그것을 바라보는 세라의 눈에서 냉기가 풀풀 풍겨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언
뜻보면 프로즌 레이디는 유나가 아닌 세라인것처럼...
"주인님.이건 뭐에요오?이거는요?이거는?이거는?"
유나는 쉴새없이 내 무릎에 꼭 올라타서는 컴퓨터를 비롯해서 이것저것을 찝어보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푸른빛
눈이 쉴새없이 반짝반짝 반짝인다.나는 허둥지둥 그것들을 답해주기 바빴다.아아..아빠란건 참으로 힘든 것이로
구나.난 결혼하면 딸은 낳지 않겠어! 근데...결혼은 할수 있을까?
끼이이이...
순간 문에서 들린 소리에 나를 비롯해서,내 무릎위에서 꺄르를 거리던 유나와 그것을 묵묵히 보고 있던 세라의
시선이 문쪽으로 옮겨졌다.
"저기...여기가..탐정 사무소 인가요?"
헛!손님이다!이게 왠일이야...내 생애 이틀연속 손님이라니!나는 무릎에 앉아있는 유나를 번쩍들어 옆에다가 내
려놓고는 부리나케 일어났다.
"어서오십쇼!지대로 찾아오셨슴다.하하!"
날 찾아온 자는 주근깨가 가득한, 30대가 약간 안되어 보이는 남자였다.연신 쭈뼛거리는 것이 약간은 내성적인 사
람 같았다.
"여기 앉으시죠.하하."
나는 호기있게 의자를 빼주었고,유나는 입을 삐죽 내밀더니 계속 손님을 맞는 내 뒤를 졸졸 쫒아다녔다.
"따...따님인가 봐요."
"아..예...그..그렇죠."
그 남자는 막 만화에서 뛰쳐나온듯한 두명의 아이들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이봐...어떻게 니 얼굴
에서 얘들이 나왔냐?라는 듯한 표정은 짓지마...얘들은 내 딸이 아니라고..
"아닌데..우리 주인님인...."
"아하하하!일단 의뢰내용을 들어볼까요?"
나는 황급히 유나의 입을 막고는 호탕하게 웃어보였다.주인님이란 단어는 절대 발설하면...앗차거워!
난 깜짝 놀라서 유나의 입을 가린 손을 떼어버렸고,유나는 베시시 웃더니 또 내 바지 주머니 쪽을 살짝 움켜쥐었
다. 으으...입으로 냉기를 발설한거냐...동상 걸리는줄 알았잖아!
"저기...괜찮으세요?"
"아..아하하!넵.괜찮습니다.의뢰 내용이?"
나는 유나의 숨결(?)에 당한 내 손을 슥슥 비벼가며 의뢰인의 맞은 편에 앉았다.그는 몇번이고 망설이더니만,힘
겹게 입을 열었다.
"사실...제가...여동생이 있습니다."
"흠흠..그러시군요..여동생이라.."
나는 열심히 그의 말을 받아적었다.
"요새..남자친구가 생겼는데..그게...."
"음..네네.그래서요?"
"그 남자친구가....조폭....인거 같아서요."
"아하..그렇군요..조폭....네에?"
나는 깜짝놀라 고개를 들었다.그는 또 연신 몇번이고 망설이기 시작했다.
"놀라실건 압니다...근데...제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인지라...경찰에 말해도 들어주지 않아서요...."
그는 지금이라도 엉엉 울것같은 모습이었다.유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고,무심해 보이던 세라역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처음엔...착한 사람인줄 알고 사귀었더랍니다....알고보니 그동네에서 깡패짓을 일삼는 조폭이라고 하더라구요.
그걸 알고 헤어지자고 했는데...놓아주질 않는거 같습니다."
"그게 무슨소리죠?놓아주지 않는다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뭐 요즘 세상에 감금이라도 한다는거야 뭐야?
"그게..사실은...제 여동생이....술집에서 일을 합니다...그 깡패녀석이...제 여동생옆에 붙어서 감시하는 모양
입니다...어려운 부탁인거 압니다...경찰에 사정해도 전혀 들어주지도 않아요...부탁드립니다...말씀드릴 곳은
여기밖에 없어요...부탁드립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빌어먹을....술집에서 여동생을 일하게 냅뒀단 말이야?
"집안이...어려워서...동생이 그런 선택을 한것도 어쩔수 없었습니다...저도 못말렸으니..오라비로써 자격도 없
는 놈이지요...부탁합니다..."
그는 회한에 찬듯 훌쩍 거리기 시작했다.나는 묵묵히 그를 내려다 보았다.
"그래서...정확한 의뢰내용이 뭡니까?"
"그놈들이 제 여동생의 가게를 관리한다는 명목하에 놔주질 않으니...제 여동생만 찾아주시면...뒷일은 제가 어
떻게든 하겠습니다.야반도주를 하던,그놈들에게 사정을 하던...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그러니 제발..."
아아.죽겠다.힘이 빠진다.젠장...이런 의뢰는 딱 잘라 거절하는게 사리분별에 맞는 것이거늘...예전부터 난 가족
에 관한 일이라면 차갑게 무시를 할수가 없다.젠장...탐정은 원래 이렇게 정에 약하면 안되는것인데.
이번에는 유나와 세라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내가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으니 궁금한 모양이다.두 명의 미소녀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계속 맞고 있는것도 고역이다.
"여동생분....성함하고 인상착의...그리고 가게 주소를 적어주세요."
"저...정말입니까!해주시는 겁니까!"
"보수...톡톡히 준비하시는게 좋을거라구요...쳇."
그의 표정이 환하게 바뀐다.더불어 유나도 싱긋 웃으며 내 팔에 매달리기 시작한다.다행히도 주인님 주인님!하면
서 떠들어대지 않는 바람에 나는 로리콘 SMER의 누명을 쓸 일은 사전 예방할수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이건 제 연락처구요...부탁드립니다...감사합니다.."
그는 언뜻봐도 동생뻘인 나에게 몇번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나가버렸다.에휴...이럴줄 알았다.나는 또
담배를 피워물고 후회를 하고 있었다.
"주인님!이거 언제 할거에요?의뢰?"
나는 문득 유나가 묻는 소리가 들려 옆을 바라보았다.털모자 사이로 삐져나온 은빛 머리칼.치마를 입은 그녀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해야겠지."
일단 허락은 했지만 착잡한 마음이 들어 한숨을 내쉬는 내 옆으로,언제 왔는지 세라마져 멀뚱히 서서 나를 바라
보았다.큭...귀엽다. 이런아이가 둘이나 나를 멀뚱멀뚱히 보고 있으니 귀엽다.너희들 같은 녀석들 때문에 오탁쿠
를 자극하는 로리콘 야겜들이 나오는 거란 말이야!
"같이 가요 주인님."
"뭐?"
세라는 묵묵히 나를 바라보며 말을 했다.역시나 흰색 털모자를 귀까지 덮어쓴 귀여운 모습이었다.정말이지 페어
리라는 단어의 본래의 뜻인 요정이라는 말을 써도 이상스럽지 않은 모습이다.근데 뭐?같이 가자니?
나의 의아한 시선을 받아내며,세라는 천천히 작고 귀여운 입술을 열었다.
"주인님과 저희는 함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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