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귀천사] 제Ⅱ장 청순한 그녀 (1)
∮색귀천사(色鬼天使)∮
제Ⅱ장 청순한 그녀 (1) - 김 현
**(원편집자 주) 본 글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이책>에 있으며, 관련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입니다.
**(재편집자 주) 2001년 02월에 하이텔 XDOOR에 올라왔던 소설입니다.
어느 일요일 오후, 지니와 나는 방구석에서 엑스레이를 찍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남들은 한 달에 두세 명씩도 갈아치운다는, 그 흔하디 흔한 애인 하나 만들지 못한 신세인 고로 달리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황금 같은 일요일 오후에 장판에다 손톱이나 갈고 있을 수밖에.
TV에선 요즘 한창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는 한 미니시리즈 드라마가 재방영되고 있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그 드라마를 꼭 본다. 왜냐하면 거기엔 내가 좋아하는 신인 탤런트 주나미가 나오기 때문이다.
개성없는 여배우들이 득세하고 있는 이즈음 연예계에 그녀의 존재는 가히 혜성과 같다고 할 만하다.
그녀는 정말 매력적이다. 특별히 빼어난 외모를 지닌 건 아니지만 오렌지처럼 상큼한 느낌을 주는 여자다.
또 배역이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하는 짓도 귀엽다. 약간 비음이 섞인 목소리도 너무 마음에 든다.
그래서 나는 그 드라마를 그녀 때문에 본다.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건 아직까지 그녀의 존재가 사람들에겐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배우는 좋아할 만한 가치가 없다. 나는 이른바 흙 속에 숨은 진주를 발견해내는 재미를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찍은 여자 연예인 중 뜨지 않은 사람은 없다. 어라, 쟤 괜찮은데? 그런 생각이 들면 무조건 뜬다.
그런 쪽으로 나갔으면 돈방석에 앉았을 텐데….
"너 쟤가 마음에 드냐?"
넋을 놓은 채 주나미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지니가 물었다. 나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TV만 봤다.
"말해 봐. 마음에 들어?"
"아, 씨이! 말시키지 마. 대사 안 들리잖아!"
"그 시키, 성질머리하고는. 마음에 들면 내가 한번 엮어주려고 했더니…. 싫음 말구."
그 순간 나는 귀가 확 트였다.
"저, 정말이야? 정말 쟤랑 날 엮어줄 수 있어? 그게 가능해?"
"자식이, 내가 흰소리하는 거 봤냐? 보자, 으음…"
지니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TV화면을 주시했다. 그녀에 대해 뭔가를 읽어내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가 그런 식으로 사람의 내력을 파악해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슴이 두 근 반 세 근 반 뛰었다.
"가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가다니? 어딜 말야?"
"어디긴 어디냐? 방송국이지. 호랑일 잡으려면 호랑이 굴 속으로 들어가야 할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작정 방송국으로 가면 뭔 일이 되냐? 지금 쟤가 방송국에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너 성질이 왜 그렇게 급해?"
그제야 그는 그런가,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천사라는 게 칠칠맞지 못하게시리.
"근데… 아까 뭘 그렇게 유심히 본 거야? 설마 또 처년지 아닌지 그런 거 확인한 건 아니겠지?"
"너 저런 애들이 아직 처녀일 거라고 기대했냐? 꿈도 야무지네, 짜식!"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지니의 태도에 나는 적잖이 실망했다.
뭐, 크게 기대를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처지에 찬 밥 더운 밥 가릴 계제는 아니지만.
"어떤 기질을 가지고 있는 한번 파악해본 것뿐이야. 상대를 알아야 쉽게 공격을 하지. 안 그러냐?"
"기질이 어떤데?"
"죽여."
"죽이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손만 벌리면 막 주는 스타일이라는 얘기야. 만 명에 한 명 정도 있을까 말까한 색녀라고나 할까….
한 마디로 끝내주는 애야. 대단해."
전혀 의외의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드라마에서는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깜찍하게만 보이는 여잔데.
나는 기분이 좀 묘했다. 좋다고도 할 수 없고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어정쩡한 상태였다. 웃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얌마, 너 같이 현실과 드라마를 구분 못하는 중생들 때문에 악역 맞은 탤런트들이 죄도 없이 욕을 먹는 거라구.
저게 어떻게 쟤의 본 모습일 수가 있겠냐?"
지니가 나의 현실감각을 일깨워주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TV를 바보상자라고 하는 거겠지.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 날 나는 동원 가능한 레이다망을 총동원해서 주나미에 대한 신상 정보를 파악했다.
신문도 뒤지고, 인터넷도 들여다 보고 방송국에 전화까지 해보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녀가 J대학 문헌정보학과에 재학중인 여대생이라는 걸 알아냈다.
탤런트 시험을 보러간 친구를 따라갔다가 PD눈에 들어서 캐스팅된 특이한 케이스였다. 학생이라.
"학교 앞에서 기다리다가 낚아채면 되겠네."
지니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휴학했을지도 모르잖아."
"가보면 알겠지. 방구석에 앉아서 짱구만 굴린다고 일이 되냐, 임마?"
그렇게 해서 나는 다음 날 수업도 빼먹고 J대학으로 등교했다.
지니가 내 대신 학적과에서 그녀가 아직 재학 중인 사실을 알아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수업시간표까지 입수를 했다.
무슨 술수를 부렸겠지. 달리 천사겠어? 악마에 가까운 천사이긴 하지만.
하지만 불행히도 그 날 나는 주나미를 만날 수 없었다. 그녀가 등교를 하지 않은 것이다.
지니와 나는 그녀의 친구들을 통해 그녀가 거의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거 봐, 이런 식으로 해선 그 앨 만날 수가 없다니까. 방송국으로 가야 된다니까."
"방송국까지 갈 거 뭐 있어? 집 앞에서 기다리면 되지. 잠은 집에서 잘 거 아니냐?"
"집이 어딘지 알아야 기다리든지 말든지 하지."
"알고 있으니까 가자고 하는 거지, 임마."
미심쩍었지만 나는 일단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겠지.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근데 네 능력이면 그 애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정도는 단박에 파악할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
거기까지는 무리인 거야?"
택시 안에서 내가 물었다. 지니가 입맛을 쩝 다셨다.
"원래 그래야 되는데, 이상하게 잘 안 되네. 너한테 쏟는 에너지가 너무 강해서 그런가?"
"쓰파! 누가 들으면 동성연애라도 하는 줄 알겠네. 하긴, 그게 네 전공이라 그랬지?"
"지랄! 너 같은 건 트럭으로 갖다줘도 안 먹어, 임마!"
택시 기사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백미러로 우리를 힐끔거렸다. 지니와 나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부렸다.
대화가 좀 그랬나 보다.
택시가 멎은 곳은 어느 주택가 골목이었다. 지니는 그녀의 집을 가리켰다. 2층 벽돌집이었는데 규모가 꽤 컸다.
지니와 나는 염탐하듯 집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지금 집에 없겠지?"
내가 말했다. 지니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대문 앞으로 다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야, 너 미쳤어? 갑자기 왜 그래?"
"기다려 봐."
잠시 후 인터폰으로 누구세요,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니가 말소리가 들린 곳에 얼굴을 들이밀며 큰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나미 씨 집에 있습니까?"
"촬영이 있어서 아침 일찍 나갔는데… 누구세요?"
"아무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수고하세요."
지니가 돌아서며 지금 집에 없대.하고 말했다. 나는 부르르 치를 떨었다.
이럴 때 보면 그가 천사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순 또라이 같잖아, 이거.
"오다 보니까 요 앞에 슈퍼 있더라. 거기 가서 아이스크림이나 하나씩 빨면서 기다리자. 기다리다 보면 오겠지."
지니와 나는 슈퍼마켓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으며 그녀를 기다렸다.
좀 지루하긴 했지만 그녀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 정도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황당한 건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지니 혼자 아이스크림을 열 개나 먹었다는 사실이었다. 각다귀 같은 놈.
"하여간 내가 너 먹는 거 뒷바라지하느라 등골이 휠 지경이다!"
"억울하면 나 그만 가버릴까? 너 그 돈으로 여자 살 수 있어? 못 하지? 안 되지?
사람이 먹는 걸 가지고 그러는 게 아냐, 임마.
내가 먹어봐야 얼마나 먹는다고… 백 개를 먹었냐? 아님 천 개를 먹었냐? 고작 열 개다, 열 개. 쪼잔한 놈!"
나는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말을 말아야지.
아무려나 그와 나는 골목 어귀를 어슬렁거리며 족히 3시간은 넘게 그녀를 기다렸다.
더 이상 못 견디겠다 싶어 지니에게 그만 돌아가자고 하려는 찰나 중형차 한 대가 골목 안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 안에 주나미가 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저기에 타고 있어. 젠장, 드디어 왔구나."
지니와 나는 차를 따라 골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차가 집 앞에 멎고 누군가가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주나미, 바로 그녀였다. 나는 가슴이 콩콩 뛰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가로등이 훤히 켜져 있었고 또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기 때문에
나는 비교적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TV에서 볼 때보다 실물이 훨씬 더 예쁜 얼굴이었다. 이거야 원, 정말이지 얼굴이 주먹만했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운전석 쪽으로 돌아가 운전을 해온 남자와 몇 마디 얘기를 주고받았다.
매니저쯤 되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차가 떠나고 그녀는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제 지니가 능력을 발휘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정말이지 골 때리는 일이 벌어졌다.
내가 지니에게 어떻게 하면 되겠냐고 이야기를 하려는 찰나
골목 저쪽에서 누가 튀어나오더니 불쑥 그녀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내 나이쯤 돼 보이는 젊은 남자였는데 여간 긴장해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금방이라도 사고를 칠 것 같은 그런 모습.
"어라, 저 자식은 또 뭐야?"
황당한 표정으로 나는 지니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끔벅거리고 있었다.
"난들 알겠냐? 전혀 각본에 없던 배역인데… 뭐지?"
그러는 동안 사내는 그녀 앞으로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엔 두려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
그때 지니가 섬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 저 자식 손에 들고 있는 저게 뭐지? 칼 아냐?"
순간 나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야, 어떻게 좀 해봐!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
나는 지니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지니는 고개를 저었다.
"난 안 돼. 난 다른 사람들 일엔 관여를 할 수가 없어. 네가 해."
"그런 게 어딨어? 지금 사람이 다칠지도 모르는 판국에…"
하지만 지니는 안 된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 때 그녀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사내는 입을 틀어막으며 그녀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나는 앞 뒤 가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그들을 향해 냅다 뛰었다. 젠장, 일이 왜 이렇게 꼬이는 거야?
추천78 비추천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