鬼椿 오니츠바키 1-2
제2화
멍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틈인가 자연스레 쳐다보게 되었다.
여자 부원이 연습하는 코트의 근처, 학교건물에 붙어있는 코트에서 3학년 남자 부원이 서브 연습을 반복하고 있다.
대회가 가까워지고 있어서인지 평상시의 반쯤은 놀이에 가깝던 연습도 시기가 시기인 만큼 꽤나 열심이었다.
서브 반대쪽으로 날아가는 노란색 테니스 공을 류지가 묵묵히 줍고 있었다.
바로 그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실력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동아리 내에서 단연 에이스. 체육특기생의 정식 테니스부 내에서도 마땅한 상대가 없을 정도. 당연히 류지는 1학년이면서도 대회 정식 출전멤버로 뽑혔다.
사실 볼보이 노릇같은거 하지 않아도 뭐랄 사람이 없을텐데 "신입부원이니까요"라면서 자청한 일이었다.
코트의 정비며 연습후 뒷정리, 이동시 무거운 테니스 용품까지도 늘 자신이 도맡아 든다.
하지만 이런 행동이 모두, 류지에겐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건 아무도 모른다. 유카는 더더욱 몰랐다.
"사카키사와, 네 차례다"
"이번 대회, 너만 믿고 있어"
"우리들도 열심히 노력할테니까 이번엔 꼭 우승하자구"
남자부원들이 크게 떠든다.
한결같은 성실한 연습태도로 인해, 왠지 입부초기엔 남자들의 경계를 샀던 바람둥이 애송이의 이미지는 완전히 벗은 것 같다.
신인 에이스의 등장으로 6년만의 동아리 대항전 우승이 현실성을 띠자 동아리내 분위기가 한껏 끓고 있다.
겸손하게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작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류지의 강력한 서브가 잇따라 반대편 코트의 바닥에 꽂힌다.
누가 봐도 좀전의 서브와는 소리부터가 다르다. 실력차이가 바로 느껴졌다.
"대단해"
여자 부원들의 함성소리.
모두들 잠시 연습을 멈추고 작년 전국고교 인터하이 베스트 4의 서브를 주목하고 있다.
"아무튼..다들.."
유카는 무심코 중얼거리며 맑은 가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때 갑자기 "사카키사와! 괜찮아?"하는 커다란 소리가 코트쪽에서 터져나왔다.
류지가 오른쪽 무릎을 움켜쥐고 웅크리고 있다.
부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유카도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저 여자, 정말이지 속이 빤히 들여다보인다니까. 바보같아"
사츠키가 모멸이 가득 담긴 시선을 달려나가는 유카의 등에 보내고 있었다.
노크를 한다.
"저, 들어가도 될까?"
곧바로 "예, 들어오세요"라는 대답이 들린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류지가 침대 위에 앉아 오른쪽 무릎에 아이싱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좀 어때? 사카키사와군"
운동장에서 좀 떨어진 학생회관 내 양호실. 부원들 몰래 유카는 연습을 빠져 나와 이 곳에 온 것이다.
"모리사키 선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영광이에요"
스타벅스 때와 같은 환한 미소였다.
"응, 일단은 기대의 신인이니까"
유카는 그렇게 얼버무리며 구석의 동그란 의자를 가져다 짧은 테니스 스커트밑으로 날씬하게 뻗은 다리를 살짝 모아 붙이고 앉는다.
"오른쪽 무릎, 이거 고질적인 부상이에요. 가끔 이래요"
머리를 긁적이며 류지는 쓴웃음을 짓는다. 유카 앞에서만 표정이 풍부해진다.
"별거 아니에요. 원래부터 알고있던 부상이고, 조금 차게하고 쉬면 금방 통증은 가라앉거든요"
"많이 아파보이던데"
양쪽 어깨를 부축받고 양호실로 향하던 조금전 류지의 고통으로 가득 찬 표정이 떠오른다. 오른 다리를 내딛을 때마다 온몸에 힘이 가득 들어가는 게 훤히 보였었다. "조금"정도가 분명 아니었다.
"정말 괜찮아요. 게다가 선배도 이렇게 와주셨고"
"항상 그런식으로 여자들한테 얘기하지?"
유카가 의자를 살짝 당겨앉으며 웃었다.
"정말이지, 선배, 말했잖아요. 제가 여자한테 먼저 어떻게 해본적은 없다고요"
"거짓말"
"너무해요"
류지도 웃으면서 상체를 침대로 뉘인다.
그 때 무릎이 조금 안좋게 움직였는지 얼굴에 미소가 싹 가시고 미간이 찌푸려진다.
왼손이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정말로 괜찮은거야? 무리하지마, 대회도 얼마 안 남았는데"
"말했잖아요, 괜찮다니까요"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어쩜 좋아, 무리해서 시합 나가면 안되는 거 아냐?"
"선배!"
아무도 없는 양호실에 커다랗게 목소리가 울린다.
"저, 인정받고 싶어요. 모두에게...겨우 1학년생을 모처럼 레귤러에 넣어주셨는데. 고교때 좀 잘나갔다고 대학 들어와 으시대더니 입학하고 첫 대회에 나가지도 못했다는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류지.
"테니스밖에...나한테는 겨우 테니스밖에 내세울게 없으니까..."
아마 무슨 말을 해도 류지는 듣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알았어, 하지만 무리하지는 않기로. 약속해"
"선배, 약속할테니까,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아이싱을 누르고 있던 손을 유카의 앞에 내민다.
"손, 잡아 주지 않을래요? 선배 남자친구한테는 미안하지만, 부탁할께요"
애처롭게 바라는 류지의 말에, 잠깐 아마노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유카는 살짝 류지의 손을 마주잡아주었다.
"따뜻하네요, 선배 손. 기분이 참 좋아져요..."
눈 감은 채로 그대로, 가만히 그대로, 조금씩 류지의 호흡소리가 차분해지기 시작한다.
어느새 작게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잠에 빠져든것 같다.
유카는 류지의 잠든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풀어 침대에 두고 양호실을 떠났다.
유카가 살그머니 문을 닫는 모습을 실눈으로 확인한 류지가 벌떡 몸을 일으킨다.
"...."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에서 내려선다.
"배우라도 해볼까, 아카데미상도 받겠는걸, 나"
류지는 오른쪽 다리를 흔들흔들 앞뒤로 움직였다.
"모리사키 선배, 어땠어요?"
코트로 돌아와 연습도중 잠시 벤치에 앉아 쉬고있던 유카의 눈 앞에 타올이 내밀어진다.
"어? 뭐?"
"사카키사와한테 갔다 왔잖아요, 모리사키 선배"
후배 사츠키였다. 요사이 자주 이야기를 걸어온다.
당황해하는 유카를 아랑곳하지 않고 "땀 안 닦으면 감기걸려요"라며 타올을 억지로 쥐어준다.
"아, 고마워, 사츠키"
멋쩍게 땀을 닦는 유카 옆에 사츠키가 앉는다.
"옆에 앉아도 되죠"
대답도 듣기 전에 이미 앉아있다.
"사카키사와, 걱정이네요. 선배, 사카키사와한테 관심있죠?"
마치 어린아이같은 말투다.
"응? 갑자기, 무슨, 관심?..."
"괜찮아요 선배, 그렇게 정색하지 않아도. 저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거든요.
선배, 요새 항상 사카키사와만 쳐다보고 있잖아요"
날카롭게 들이대는 말에 유카는 말문이 막혔다.
"그런일...그저 우승했으면 하니까...선배의 한사람으로서...."
"멋지지요? 사카키사와. 테니스도 잘치고 얼굴도 잘생겼고.
모리사키 선배하고 잘 어울리지 않아요?
촌스럽게 생긴 선배 애인 따위보다 훨씬 잘 어울려요 확실히"
아마노를 따위라니...유카의 가슴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슨 말을 하는거야? 사츠키!"
사츠키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리고 있다.
어린아이 특유의 맹랑함 때문인지 상대하기가 힘들었다.
"아, 사카키사와 왔네"
다리를 절뚝이며 코트로 돌아온 류지는 다른 부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른쪽 무릎이 불편한지 손바닥으로 문지르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걱정끼쳐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있을것이다.
"이봐요, 또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어"
당황해서 고개를 돌리자 사츠키가 킥킥거리며 웃는다.
"그러니까 사카키사와로 갈아타는게 어때요? 모리사키 선배.
사카키사와도 모리사키 선배 좋아하는거 같고"
"적당히 좀 해!"
유카의 커다란 소리에 연습중이던 여자 부원들이 깜짝 놀라 쳐다본다.
당황한 유카는 황급히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저, 아마노 선배 좋아해요"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런 말에 놀라 얼굴을 들어올리자 사츠키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유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리사키 선배, 아마노 선배하고 헤어져 주세요.
그리고 선배는 사카키사와하고, 저는 아마노 선배하고..."
사츠키가 아마노의 연구실에 빈번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몇번이나 아마노가 "유카네 동아리 여자아이 하나가 연구실에 종종 찾아와"라고 했으니까.
아무리 어린아이라곤 해도 이건 정도가 지나치다.
화가 나고 질리다 못해 이제 헛웃음까지 복받쳐 올라온다.
"카즈야가 너같은 아이하고?"
유카의 무시하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츠키.
"아마노 선배하고 키스했어요"
분명한 어조였다.
"지난 주, 아마노 선배와 연구실에서 키스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리사키 선배만 없으면 저, 확실히 아마노 선배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마, 그런..."
예상외의, 상상하기도 힘든 믿기지 않는 "고백"이었다.
"거짓말같다고 생각되면 직접 물어보세요"
마지막 숨통을 끊기라도 한 것처럼 승리감에 우쭐해하는 사츠키.
"이제 그만 랠리연습이나 할까나"
종종걸음으로 라켓을 손에 쥐고 코트로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