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厚の野望 64
장지 사이로 던져지는 빛이 부드러운 윤곽선을 담아낸다. 그녀의 어깨 밑까지 오는 짧은 머리가 살랑이듯 흔들리고 있었고, 날카로웠을 안광은 반개한 채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살짝 화장과 입에 바른 연지가 묘한 색감을 전달했다. 평소 몸매를 가리기 위해 풍성하게 입었을 옷은 탈의되어 방바닥 여기저기에 뒹굴었다.
“돌아봐.”
침대 모서리에 앉은 덕후의 쉰 듯한 음성에 형욱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현재 그녀가 입은 옷은 청대에 도입되어야할 창파오를 개조한 것이었다. 목 위까지 덮는 카라에 몸매를 과시하듯 바싹 붙어있어 봉긋한 가슴과 그 정점에 돌출한 유두가 보였고, 군살 없는 허리의 잘록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또, 몸을 돌림에 따라 다리 옆 부분, 허리 바로 아래부터 터진 옷 사이로 미끈한 다리가 눈을 현혹시켰다.
덕후는 참지 못하고 형욱의 허리를 끌어 당겼다. 천장을 뚫을 듯이 선 듯한 양물을 감싸기 위해 형욱은 오리처럼 궁둥이를 내민 채 엉거주춤 쪼그린 자세가 되었다. 전희는 없지만 옷을 벗는 동안 일각 동안 시간視姦과 희롱으로 당한 터라, 성감이 고조되고 질 안은 흥건히 젖힌 상태였다. 단단히 조인 틈을 비집고 균열의 폭을 넓혀가는 양물의 존재에 형욱은 아, 하는 달뜬 신음을 토했다.
덕후의 피스톤에 따라 형욱의 느리고 긴 호흡이 점점 짧아져 달뜨고 불규칙적인 신음을 토하고 얼굴은 희열로 젖어들어갔다. 처음부터 형욱이 이랬던 것은 아니다. 덕후와 1년이 넘어가는 정사로 인한 변화였다.
다른 마누라들처럼 애교를 부리거나 리드는 할 줄 모르지만, 한 가지 이색적인 성벽이 있었다. 바로 시키는 대로 하고 복종에 따른 성감이 크다는 것이었다. 남자가 꿈꾸는 육인형의 취향에 가깝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말을 경솔히 입 밖에 냈다가는 당사자로부터 모욕 받았다며 칼을 맞거나, 심마로 보고 석녀石女를 고수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의 모습을 이끌어내기 덕후가 쏟은 감언이설과 정성(?)은 눈물겨운 바가 있었다. 우선 성교 그 자체는 추잡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주기 위해 무산지몽 같은 고사를 비롯, 서정적인 성애 묘사가 담긴 시부를 골라와 틈만 나면 교육적(?)으로 훈수를 했다. 그뿐이랴, “무인”에서 “여자”의 면을 이끌어내기 위해 둘만의 시간을 가질 때, 미리 단장하는 습관을 자발적으로 하게끔 유도했다.
첫 날, 여태까지 화장을 해본 적이 없는 형욱은 직접 분을 바르고 연지를 찍었다. 모르니 남에게 조언을 구할 법하건만 죽어도 알리기 싫었다. 이유모를 짜증과 민망함, 부끄러움으로 기합이 잔뜩 들어가 거울도 안보고 퍽퍽 단장해버린 형욱의 화장은 딱 여자아이가 부모화장품을 훔쳐서 바른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다행히 사태를 예건한 덕후는 형욱이 얼굴을 보고 뿜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처음부터 불을 끄고 정사를 하였다. 주로 화장의 모양새을 지적하기 보다는 분내음과 연지로 평소와 다르게 성욕이 자꾸만 치솟는다며 연신 속삭여주었다. 거북함도 잠시, 상대가 신경 쓰지 않고 배려해주자 형욱은 곧바로 섹스에 몰입하였다.
첫 화장에 자신감(?)을 얻은 형욱은 여인들이 화장하고 몸단장하는 것, 그리고 시녀들이 왕부 내 유통되는 시제품에 대한 평을 훔쳐들으면서 나름대로 기교를 익혀 여기까지 온 것이다.
무도武道를 추구하기 위해 몸을 단련하는 것도 즐거움이지만, 여자로서 한 사람을 위해 단장을 하고 품에 안기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마음에 여유가 찾아왔기 때문에 무공도 소폭 상승했고, 색골녀가 된다거나 나태해진다는 인식은 없었다. 지나치게 경도된 삶이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평소에는 담지 못할 속내도 밀폐된 공간의 침상에서는 마음 것 토로할 수 있다. 언어로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은 육체의 결합으로 전달하고자 애를 썼다. 가식을 벗어던지고 섹스할 때 덕후의 경박함은 상냥함으로, 음흉함은 배려로, 변덕은 활기로 와 닿았다. 권모술수로 섬뜩하게 보이는 일면은 보듬어야 할 고독과 비애로 와 닿았다. 이런 걸 흔히 콩깍지가 씌워진 상태라 말하지만, 형욱은 어째서 여인들이 대외적으로 결점투성이인 덕후에게 벗어나지 못하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동시에 타인에게 기본적으로 무기질한 감수성을 지닌 그가 자신들에게 벗어나지 못하고 갈구하는 모습에 동등한 위치의 반려로서 자부심과 애정을 느꼈다.
이것은 당사자들만의 비밀이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그가 유일하게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같이 남자를 공유하면서도, 친근한 연대의식을 지녔음에도 그녀들 사이에서는 미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앗....으음...”
창파오 안쪽으로 덕후의 양 팔이 뱀처럼 기어들어간다. 하나는 배 위의 배꼽을 긁듯이 문지르고 다른 한 쪽은 유방을 쥔다. 형욱의 탄탄한 몸이 바르르 떨렸다. 아무리 극한 단련을 거쳐 겉보기로는 군살이 1그램도 없는 몸이라지만, 남자보다 체지방이 많은 여자의 부드러움은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다. 찔려가는 엉덩이는 남자의 단단한 사타구니의 충돌을 쿠션처럼 받아들여 주며 찰진 음색을 토하고, 달뜬 호흡은 덕후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음란하게 엮이는 듯 했다.
덕후의 손가락이 배꼽 안쪽을 파고들었다. 찌릿한 감각이 복부 안쪽, 내장을 관통하듯이 후벼진다. 형욱의 몸이 파닥이며 전신 피부에서 끈적끈적한 땀이 베어들어 옷을 찰싹 달라붙게 하였다. 가슴으로 향한 손가락은 집게처럼 한쪽 유두를 뽑아내듯 당겼다. 형욱은 아픔과 쾌감을 동반한 단말마의 신음을 토했다.
팔다리가 학질에 걸린 듯 떨리고, 살짝 벌린 입에서는 혀끝이 튀어나와 허공에 침방울을 명주실마냥 토해낸다. 뜨거운 육기둥은 자궁부를 유린하듯이 파고들어 내부 신경계를 태울 듯한 자극을 전해주었다. 형욱의 발가락이 꼿꼿해지고, 양 손은 덕후의 팔을 애타게 잡으려 버둥거렸다.
“으...으음......아아악!...악...흐읍!”
누가 들을 새라 스스로 입막음을 하여 암컷의 교성을 최대한 억누르려 한다. 그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정액이 사출하기 시작했다. 안을 불끈불끈 매우는 뜨듯한 감각과 목덜미로 느껴지는 사내의 거친 호흡에 형욱은 사지에 힘이 빠지면서 나른한 포만감을 느꼈다.
잠깐 그러고 있을까, 결합부가 살짝 빠지면서 덕후의 탄탄한 팔이 형욱의 몸을 안아 뒤로 쓰러지듯이 침대로 넘어졌다. 남은 한쪽 팔로 이불을 끌어올려 한참 달구어진 나신들이 급격히 식는 것을 막으려는 배려였다.
가만히 성교의 여운을 음미하던 형욱은 어느 순간 눈을 떴다. 혼몽에 젖었던 눈은 어느새 정광을 되찾은 뒤였다. 아쉬움이 담긴 한숨을 쉬고는 상체를 일으켰다.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온 것이라, 오후 훈련 감독을 위해 나갈 시간이 머지 않았기 때문이다.
“좀 더 쉬지 않고?”
덕후가 응석을 부리듯이 형욱의 팔을 잡는다. 형욱은 잠시 망설이다가, 덕후의 이마에 연지를 바른 입술을 살짝 키스하였다. 입에다가 직접 하면 덕후의 혀가 엉켜올 것을 알아서 2차의 유혹으로 넘어갈 수 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주공도 큰 마님한테 갈 시간이 오지 않았습니까.”
큰 마님을 언급하자 덕후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소태를 문 것처럼 쓰디 쓴 표정이다. 형욱은 약간 동정을 느끼면서도 표정은 엄숙하게 하였다.
“큰 마님은 임신을 하셨으니, 심력을 기울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아오, 알았다고. 하지만 체질적으로 두드러기가 난다고!”
1년 전, 신도 세가의 일이 마무리 되고, 심경에 변화가 온 덕후는 우희선과 합방을 가졌다. 그리고 3개월 만에 태기가 있었다. 여염집 여자라면 이 시대의 관례에 맞게 조용한 곳에서 태교를 가질테지만 우희선은 왕비였고, 덕왕 대행으로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조정에 올라가고 강남을 통괄하는 만큼 심력이 보통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파업모드인 덕후가 정상 복귀하면 해결될 문제이나, 이미지 전략적인 측면이 있어서 떡하니 해주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타협을 본 것이 산실로 공수된 서류를 우희선이 지켜보는 앞에서 처리해주는 것이다. 일은 일대로 하면서 밖에서는 일하는 임산부 옆에서 깔짝댄다고 욕은 욕대로 처먹고 있었다.
하기 싫은 것과 별개로, 덕후가 작심하면 이 시대의 10만 관료분의 행정업무량을 단숨에 소화할 수 있다. 삼국지연의의 방통처럼 눈으로는 서류를 보고, 손으로는 결재를 하고, 귀로는 송사를 듣고, 입으로는 판결을 하는 것은 앉았다 일어서는 것처럼 쉬운 일었다. 단지 일하면 지는 것이라는 니트 심리 탓이다.
덕후와 형욱은 옷을 입고 뒷정리를 한 다음에 각자 볼 일을 위해 방을 나섰다. 형욱은 밖에 인기척을 확인한 다음 은신을 활용해 나가고, 일각 뒤에 덕후가 느긋한 걸음으로 나섰다. 덕후가 설계한 원림의 중심지에는 낮은 구릉 위에 우희선의 거처가 있었다.
가을의 미풍으로 차가워진 이마를 문지르며 뒹구는 낙엽에 힐끗 시선을 주고는 우희선의 처소로 들어섰다. 마루에 오르니 뜻밖에 궁장을 한 서향이 시립해 있었다. 덕후를 본 서향은 놀란 눈빛을 하였지만 조용히 인사를 올렸다. 서향을 보는 순간 왕야의 근엄 모드로 들어간 터라, 서향은 묻지도 않는 보고를 올렸다.
“군주와 소 완의께서 안에 계시옵니다.”
덕후는 기타부타 대꾸 없이 고개를 끄떡이고는 내당으로 들어서 우측에 있는 서재로 향했다. 문턱을 넘으니 우희선이 자단목으로 된 의자에 앉아 마라와 소월하를 두고 무언가 이야기를 듣는 듯 했다. 덕후의 등장에 우희선이 몸을 일으키자 덕후는 황급히 다가가 앉혔다.
“일거수일투족에도 조심해야할 시기가 아니오.”
“몸이 그렇게까지 무겁지는 않아요.”
“어허, 무공을 익혔다고 태아까지 무림고수인 줄 아오.”
덕후가 짐짓 나무랐다. 말을 해놓고 문득 뱃속에 있는 얘가 사실은 이계진입 한 환생자라 벌모세수하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이 있지 않나 싶은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투사해본 태아는 정상적인(?)아이였다.
-환생자면 마누라한테는 미안한 짓을 좀 해야겠지만.
덕후는 빙긋 웃었다. 환생자로 태어난 자신이 안은 문제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변수를 더하느니 차라리 유산시켜버릴 것이다. 세휘에게 언질을 받은 게 있어서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이런 일에는 만에 하나도 고려하는 게 덕후의 성격이었다. 덕후가 우희선을 향해 웃는 것이 좀 팔푼이 같아보였는지 마라가 샘통 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빠~ 아빠 눈에는 엄마만 보여?”
“엄마는 영원히 내 여보야 이지만, 넌 조만간 출가외인이잖니.”
덕후는 손바닥으로 쉿쉿 밀치는 손짓을 했다. 덕후의 언사에 우희선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틀렸고, 소월하는 살짝 어이없는 표정을, 마라는 잔뜩 골난 듯 볼을 부풀려 올렸다.
“나 시집 안갈 거다. 뭐.”
“얘들은 다들 그렇게 자라는 거지.”
느긋하게 받아친 덕후는 우희선에게 타이르듯이 일렀다.
“이 요악스러운 아이의 응석을 너무 받아주지는 마시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온 거요?”
알고 찾아온 게 아니란 말인가, 하는 어이없음이 우희선의 뇌리에 스쳤지만 겉으로는 공손히 내막을 알려주었다. 주부용(마라)의 교육은 영호 세휘가 직접 해주고 있지만, 명목상 양육의 권리는 정처인 우희선에게 있었다. 그래서 장기 출타의 용건이 생긴 마라가 점심시간을 빌미로 찾아와 청한 것이다.
“계림에 있는 요산에 가보고 싶다고 하네요.”
“거긴 우문 세가 영역이 아니더냐?”
후대에 와서는 남녕으로 이전되기는 하지만, 계림은 당시 명대 광서의 성도였다. 우희선은 덕후가 놓친 사실을 가만히 지적했다.
“또한 정강왕부 관할이기도 합니다. 혹여 뒷말들이 무성하면 어쩔지....”
“그렇군.”
덕후는 우희선이 왜 머뭇거리는 지 이해했다. 강호 무림적 측면에선 그래도 손 쓸 여지가 있다. 무림에 관여하는 것은 천하문과 대상련이지, 덕왕부는 겉으로는 모르쇠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황실의 측면에서라면 달랐다.
정강왕부는 홍무제의 질손이 번왕으로 임명받은 구역이었다. 마라가 가고자 한 계림 동쪽에 있는 요산은 역대 정강왕과 친척들이 묻히는 곳이다. 민간인이 출입하기는 어렵지만, 덕왕부의 군주 신분인 마라이라면 출입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 뒤에 올 파장 때문이었다.
명초 주원장은 번왕에게 군사적 권한을 일정 부분 위임함으로서 외적에 대한 방비를 다졌지만, 번왕 출신으로 황제로 등극한 영락제 이후로는 대폭 축소되었다. 그런데 덕왕의 등장으로 파란이 일었다. 일개 번왕과 틀린 부황제의 부상은 번왕들 사이에 충격을 주었다. 자기 것과 비교하여 질시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제 2의 정난지변을 꿈꾸고 연대를 위해 접근하는 부류도 있었다. 덕후는 비빈들을 방패막이로 내세워 차단하고 있지만, 마라의 존재와 방문이 황실의 암류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단초를 제공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리라.
“왜 요산으로 가려는 거니?”
“고금제일고수가 은거한 곳이래요. 후학을 위해서 절세무공이랑 비급을 남겨두지 않겠어요?”
마라가 흥분한 듯 발돋움 하며 덕후에게 설명했다. 눈은 고수에 대한 선망으로 반짝이고 잇지만, 덕후는 그 밑에 깔린 “그래, 인생은 로또, 한방이다!” 하는 꿍꿍이를 탐지했다.
-누구 딸이 아니랄까 봐.
사범인 형욱에게 해가 넘기도록 기초 무공을 진득하게 닦자니 신물이 나는 모양이다. 덕후로부터 이능(異能)을 쓰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으니 좀이 쑤셨으리라.
“듣자하니 남경부에 정체를 숨긴 해결사 노릇을 해주고 있다면서....”
“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걸! 에 그러니까...일모도원이에요! 당장 힘이 필요하단 말이야!”
해결사를 하면서 여러모로 한계에 부딪치는 모양이다. 덕후는 헛기침을 하면서 모처럼 어른으로 권위를 내세우기로 했다.
“굳이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할 필요는 없잖니. 사람은 적당히 처세를 하고 만사를 대화로 잘~ 풀어가야 한단다. 저어기~ 서양 말로는 피스, 평화가 최고란다. 알겠니?”
들으면서 마라의 열망하는 듯한 표정이 차차 썩은 미소로 변했다.
“권모술수적으로?”
“그야 물.....커흠! 크흠!”
티 없이 환하게 웃으며 긍정하려다가, 우희선과 소월하의 꿰뚫은 듯한 눈초리에 덕후는 사래 들린 듯 연방 헛기침을 하였다.
“상공, 천비는 자식들만은 바르게 키우고 싶어요.”
“아니, 그럼 내가 삐뚤어졌단 말이오?”
도둑놈이 성을 내는듯한 설레발에 다들 시선을 주변으로 떨어뜨린다. 무안해진 덕후는 화제를 본론으로 되돌려놓았다.
“방법이 없진 않지. 내가 좀 귀찮겠지만.”
“뭔데요?”
“내가 동행하는 거란다.”
“헤에?”
마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희선과 소월하는 반은 놀란 듯, 반은 드디어 하는 반응을 보였다.
“어여 가서 시비더러 행장을 꾸려달라고 해다오. 좀 험난할지도 모르기에 네 시비는 데려가지 않을 게다.”
“응!”
마라는 힘차게 대답하고는 우희선에게 꾸벅 절을 한 다음 후다닥 나갔다. 밖에서 서향을 연신 부르는 소리가 아련하게 메아리 치고 사그라지자 덕후는 마라를 내보낸 목적을 우희선과 소월하에게 꺼냈다.
“슬슬 우문 세가와 협상을 하러 갈 때가 온 것 같소.”
마누라 둘은 덕후가 말하는 협상의 진의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반대파를 축출하고 괴뢰를 내세우러 가시는 군요.”
“새로운 마누라도 얻어 오시겠죠?”
우희선과 소월하의 가차 없는 평에 덕후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이 여편네들...날 너무 잘 알아!
“아, 그러니까 포위망을 구축하려면 우문세가는 꼭 필요하오.”
현재까지 외교전으로 천하문, 혁련세가, 신도세가는 잠정적으로 포위망이 생기면 가담하기로 물밑 작업을 마친 상태였다. 남방에 위치한 우문세가를 더한다면 방위적으로 거의 감싼 것이나 마찬가지다.
“녹수맹과 마교는요?”
“그들까지 끌어들일 여력은 없소. 할거의 수준을 넘어 이상과 야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실은 이번 우문세가를 가면서도 두 세력도 견제할 씨앗을 뿌리러 갈 참이오.”
영호세가, 녹수맹, 마교는 십패 중에 3강에 들만큼 강력한 집단이다. 관과 군의 영향이 다른 십패들에 비해 미미했다. 국호만 안 내걸었지 그만큼 강력한 독립세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래서 덕후가 구상한 것은 영호세가에 난의 불씨를 잡아 당겨 불러일으켜 혼돈의 영역으로 만든다. 그 후 영호세가가 약화되었다고 판단한 녹수맹을 끌어당기게끔 만들고, 마교 역시 비슷한 동기를 줘서 필쟁必爭의 땅으로 끌어들일 셈이었다. 포위망의 참뜻은 영호세가를 직접 공략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세 마리의 범들이 치고 박고하는 동안 변두리에 틀어박혀 구경하고, 약해진 쪽을 지원하는 이이제이를 쓰다가, 상처투성이의 한 마리만 남았을 때 우르르 몰려가 때려잡겠다는 계책이다.
소월하는 씁쓸하니 중얼거렸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참 더럽겠네요.”
“어허, 치졸하다고 하지 마오. 변방의 무리들이 설칠 때 높으신 분들이 주로 쓰는 수법이라오.”
이이제이에 실패하면 칭기즈 칸의 도래나 누르하치의 재림 같은 후폭풍을 맞이하겠지만, 덕후에게는 이 보다 나은 대안을 찾기 힘들었다. 양적으로라면 몰라도 질로는 3강이 압도적인 탓이다.
“이번에 동행할 일행은...무력보다는 실무가 더 필요하니까 소 완의가 좋겠지?”
“저를 말인가요?”
소월하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겉으로는 침착한 척이 있어도 내심은 덕후와 같이 가기를 꺼렸다.
“다른 분들도 계시지 않은가요.”
“큰 마님은 회임 중이니 어렵고, 작은 마님은 큰 마님 대행 업무에다가 상련 회의 때문에 몸이 세 개라도 부족할 입장이지. 세휘는 궁내 일에다가 작은 마님을 보조해야하니 어렵고 염 문주는 남창으로 출장 간 상태고, 형욱은 숭무단 심사 검정이 있어서 어렵소.”
“하지만 다들 바쁜 데....저도 제 일이 있고요.”
끝내 내빼는 소월하를 향해 덕후는 훗, 하고 웃더니 탁자 한 켠에 어린아이 키 만큼 쌓인 두루마리를 뒤적이더니 하나를 빼 소월하에게 넘겼다. 마지못해 펼쳐 본 소월하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소월하가 담당할 직무에서 정상적 절차라면 석 달 치 시간은 소요될 안건이 다 처리되었고, 필요한 예산도 집행만 하면 받을 수 있도록 가결된 상태였다. 소월하는 눈을 부릅뜨고 다시 꼼꼼히 살펴보았다. 다른 부서에 보낼 공문이라든가 왕부의 재가가 필요한 굵직한 것은 이미 다 처결되어 있는 상태였다.
-처음부터 날 데려갈 작정이었구나!
이런 깨달음과 동시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일었다. 파르르 떠는 입술을 보고 내심을 짐작한 덕후는 서둘러 수습하려 했다.
“모처럼 휴가라고 생각하시오. 이번에는 내가 모시려고 하오.”
“왕비 전하 앞만 아니었으면...제가...제가...”
중얼거리듯이 끝말을 맺지 못한 소월하는 휙 하니 나갔다. 둘만 남기자 덕후는 머리를 긁적였다.
“화를 돋웠군. 그냥 데려가면 방방 뛸 것 같아서 모처럼 뒤처리까지 다 해주었는데.”
“...그 점 때문에 오히려 화를 낸다는 것은 고려 못하시는군요.”
우희선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자기 일에 긍지를 가지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는데, 평소 빈둥대던 사람이 대신 일을 채가서 눈 깜작할 사이에 완벽하게 마무리한다면 허탈감을 느낄 것이다. 평소 자신을 천재라고 자부하고 있다면 그 반발의 폭은 더 크리라.
“딱히 도발할 생각은 없었소. 소 완의 식으로 기선 제압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덕후의 마인드는 자신 다음으로 마누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본인의 의무도 넘기는 대신에 권리도 넘겼다. 마누라들에게 구박을 받아도 꿋꿋이 뻔뻔해질 수 있는 내막이다. 권력의 핵심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지 않는 한, 기어오르는 정도는 눈 감거나 맞장구 쳐 줄 아량은 있다.
“가면서 화해를 해보세요.”
덕후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희선의 눈치를 살폈다. 우희선은 가슴 속에서 불쑥 원망이 치솟았지만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손바닥을 통해 안에서 자라는 생명의 온기가 전해지는 듯한 착각이 느껴진다. 입을 열었을 때 우희선의 음성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상공의 비빈들 중에서 사이가 가장 소원한 게 소 완의이니까요. 수신은 바라지 않지만 제가는 확실히 해주세요.”
“알았소.”
덕후는 짧게 말하고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이 있는지 방문을 벗어나지 않았다.
“후후, 저도 석 달은 쉬엄쉬엄 해도 된다는 것은 알아요.”
“급하면 세휘에게 일러 둬. 누나의 몸이 잘못될 바에 네가 콱! 과로사 해버리라고 전했으니 몸조리에 각별히 신경 써주고.”
신경써줘서 고마워요, 몸 상하지 않게 조심해서 다녀와요. 하고 현숙한 표정으로 대꾸하니 덕후는 그제야 한 시름을 놓았다. 방문을 벗어나다가 생각났다는 듯 묻는다.
“뭐 바라는 거 없소?”
우희선은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우아한 태도는 하늘 같은 남편에 대한 존숭이 가득차 있는 듯 했다. 덕후가 나가고 홀로 남겨진 우희선은 등받이에 기댄 채 부풀기 시작한 복부를 향해 고개를 조용히 숙였다. 안에서 형체를 갖춰가는 아이가 움직인 듯 했다.
그것이 어쩐지 탓하는 듯한 느낌에 우희선은 불식간에 본심을 토로하였다.
“......엄만 그럴 수 없단다, 아가야...”
거의 단절될 뻔 한 혈족의 존속과 미래를 위해서는 단순히 남녀의 정에 매달리는 것으로는 안 된다. 균형을 잡아야했다. 자라면서 중흥의 소명을 안고, 엄격한 예절과 교양을 배운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리고.....자신의 “천명”이 파멸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녀는 감정이 이끄는 대로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맡길 수는 없었다. 그것이 지상에서 가장 달콤한 단어인 사랑이라 할지라도...
“....하지만 엄마 생각이 기우로 끝날 수도 있겠지. 대신 다른 엄마들과 네 동생들은 자유롭게 두자꾸나.....우리 아가는 장손이니 지금은 엄마랑 함께 참아주렴.”
우희선은 그렇게 아이를 계속 다독였다. 그러나, 아내로서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함축한 그 한 마디는 끝내 꺼내지 못했다.
지금 내 곁에 있어달라는 그 한 마디를.
생존신고.....2부 전체를 다듬고 하려고 했는데, 이대로 가다간 정말 기약 없을 것 같아서 일단 다듬은 part6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당연히, 월간 연재입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