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룡왕 아르셀라 20
에필로그
세월의 흐름은 마치 바람과도 같다.
아르셀라가 아카시아에게 납치당해 그녀의 레어로 끌려간지도 약 3년이 지났다. 아카시아의 사악한 마법에 당해 여자가 되어버린 그, 아니 그녀는 실의에 빠져 매일매일을 한숨으로 지새우고 있었다.
"흐윽 흑..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해야 이 저주를 풀 수 있는거지?"
아르셀라는 지난 3년동안 자신에게 걸린 끔찍한 저주를 풀기위해 별 짓을 다해봤지만 어떠한 방법도 효과가 없었다. 그건 그녀에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나큰 절망을 가져다 주었다.
"하고싶어.. 하지만 물건이 없으면 할 수가 없잖아. 흑 이게 무슨꼴이야. 나는 하렘왕이라구!"
"또 그타령이니!"
"꺅!"
갑자기 들려온 무시무시한 여성의 음성에 아르셀라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꿈에 나올까 두려운 자신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아카시아가 아니던가?
"정말 너란 아이는 구제 불능이구나. 머리에 피도 안마른 녀석이 왜 이렇게 성에 관심이 많니?! 첫 경험은 500살 이후라고 내가 누누히 말하지 않았더냐!"
"뭐 500살? 장난하냐! 그동안 어떻게 기다리란 말야?! 그리고 첫 경험이라니! 감히 지금 위대한 하렘왕을 모욕하는 것이냐?"
"후우.. 너는 아직 성에 대해 알기에는 너무 어려. 400년은 금방이잖니. 잠이라도 자면서 기다리려무나. 곧 여자의 기쁨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될 날이 오게 될 것이란다."
[커 커헉. 여자의 기쁨?!!]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아르셀라의 전신에 끔찍한 오한이 들었다. 설마 그때까지 자신의 몸에 걸린 마법을 풀어주지 않을 셈인가?
"야! 너 무슨속셈이야? 설마 나한테 걸린 저주 안풀어줄 생각은 아니겠지? 여 여자의 기쁨이라니.. 나보고 지저분한 남자놈들이랑 몸을 섞으라는 거냐?"
"지저분하다니.. 잘생기고 멋진 남자들이지~ 이제 너는 여자란다. 아니, 원래부터 너는 여자였어. 포기하고 너의 운명을 받아 들이무나."
"꺄아아아악!! 죽여버릴거야!!"
아르셀라는 아카시아의 말에 미친듯이 분노하여 그녀에게 맹렬히 돌진해 갔다. 하지만 그녀와 자신의 힘의 차이는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로, 아카시아의 손짓 한방에 아르셀라는 힘없이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휴우. 이 에미의 마음을 이토록 몰라주니 슬플 따름이구나."
"크 크윽.. 흑"
아카시아는 바닥에 엎어져 신음하는 흑발의 미소녀에게 연민과 애정이 담뿍 담긴 시선을 보냈다.
"너도 나중에 나의 깊은 뜻을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 우리 예쁜 딸 사랑하는 건 이 엄마 뿐이라는 것을.. 좀 쉬려무나."
이 말을 끝으로 아카시아는 아르셀라의 방에서 나갔다. 소녀취향으로 장식된 이 방은 아카시아가 꾸며준 것이다. 과거 하렘왕의 꿈을 품었던 사내에게는 농담으로라도 절대 어울리지 않는 장소지만, 아르셀라는 그나마 아카시아의 방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인 공간을 얻기위해 아카시아에게 무려 다섯번이나 "엄마"라는 말을 해야 했다.
"흑.. 리노.. 루스네.. 르나누님.."
"세이키! 흐아아앙!"
소녀는 방 한구석에 쳐박혀 무릎을 끌어안고 서럽게 눈물을 떨구었다. 나를 사랑했던 자신의 여자들.. 그녀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까?
"기다려줘. 언젠가.. 반드시 저 미친 마녀를 물리치고 이 저주를 풀고야 말테니까.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줘!"
아르셀라는 반드시 남자로 돌아가고 말겠노라고, 그 찬란했던 시절의 하렘왕을 되찾고야 말겠다고 마음속 깊이 맹세했다..
하지만 그의 다짐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차 옅어져, 종내에는 아련한 흔적만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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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왕 아르셀라가 숭고한 희생으로 나라를 구한지, 벌써 7년. 그동안 아르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후우.."
아르셀의 여왕 루스네는 이제는 자신의 방이 된 선왕의 방 한 구석에 앉아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아르셀라를 잊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그의 잘생긴 얼굴이, 입술이.. 자신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길이.. 손에 잡힐정도로 가깝게 떠오르는 것이다. 그녀는 밤마다 창가에 앉아 슬픔으로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
달칵
문이 열리고 루스네와 같은 아픔을 가진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이키.. 그녀는 7년전과 비교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제 완전히 앳된 모습을 벗어버리고 20대 후반의 성숙한 미녀가 된 루스네는 세월의 흐름이 그녀만 비켜가는 것 같아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뭐해 언니?"
"아니 그냥.."
세이키는 침대쪽으로 다가가 곤히 자고있는 한 아이를 쓰다듬어 보았다.
"헤헤 이 애는 갈수록 주인님을 닮아가네."
"그럼. 그분의 피를 이었으니 당연하지. 그 아이는 앞으로 아버지의 나라를 이어가게 될거야."
"후후.. 그렇구나. 훌륭한 왕이 되렴 아르야."
"..."
이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세이키는 조용히 루스네의 아이를 바라보고 있고, 루스네는 다시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 상태로 언제까지나 시간이 흘러간다.
"정말 갈꺼니?"
먼저 침묵을 깬건 루스네였다. 그녀는 창가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지나가듯 물어온다.
"..가야지. 그러기로 했잖아."
"그래 가는구나."
세이키의 담담한 대답에 루스네는 슬펐다. 그녀가 가버리면 이제 자신은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슬픈 이상으로, 그녀를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사실이 더욱 슬펐다.
"언제 돌아올 거야?"
"하아 글세.."
세이키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가 될지는 나도 모르겠어. 빠르면 1년 안에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길면 10년, 30년.. 어쩌면 영원히 이곳에 오지 못하게 될 수도.."
"...."
루스네는 세이키가 어리석다고 생각되었다. 이미 아르셀라는 죽었다. 죽은 사람을 살아있다고 우기며 찾으러 가겠다는 세이키나, 그런 세이키를 부러워하는 자신이나 참으로 어리석은 여자들이다. 자신은 여왕이기에, 그녀처럼 자유롭게 할 수 없다..
"그거 알고 있니?"
"무슨 말이야?"
"나 너 좋아해."
"....."
"알고 있었지?"
세이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언니를 좋아해. 주인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 감정이 언니와 같은 감정으로 변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후후 됐어. 그쯤 해둬."
"미안.."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이런말 꺼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말해두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그렇구나."
루스네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감돈다.
"사실 좋아하긴 하는데, 미안하지만 너도 이젠 두번째야. 쉽게말해 널 차버린 거지."
"헤헤 나도 언니를 찬 셈이니, 우리는 그럼 서로를 찬 건가?"
"그렇구나. 하하핫"
방 안에 두 여자의 기분좋은 웃음소리가 퍼져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의 웃음소리는 곧 쓸쓸한 정적으로 잦아들었다.
"갈께.."
"건강해야되."
세이키는 루스네의 얼굴을 끝까지 마주보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을 대하게 되면 결심이 흔들릴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리없는 눈물 한방울 만을 루스네의 방에 남긴 채 말없이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하아 별이 참 밝네~"
성을 나서니 밤하늘에 별빛이 찬란히 빛나고 있다. 세이키는 아름다운 별들의 자태에 슬픈 마음이 조금은 달래지는 걸 느꼈다.
"틀림없이 주인님도 이 별을 보고 있을거야. 후후 힘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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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부탁드려요. 얼굴만.. 얼굴만 보게 해주세요."
엘퍼스 산맥 가장자리에 위치한 아카시아의 레어. 그 곳에는 오늘도 귀찮은 손님이 방문해서 아카시아를 짜증나게 하고 있었다.
"아 안된다고 했잖느냐! 어서 내 눈 앞에서 사라지지 못해?"
"제발이요. 흑 그냥 건강한지만 확인하면 되요. 네?"
"죽고 싶냐?"
아카시아는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애걸복걸하는 다크엘프에게 무시무시한 살기를 퍼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조금도 물러섬이 없었다.
"죽어도 좋아요. 제발 아르를 만나게 해주세요. 어머님 제발.."
"내가 왜 네 어머님이냐! 다섯을 센다. 그동안 꺼지지 않으면 너를 통구이로 만들어 버릴테니 알아서 해라."
"흑 제발.."
"다섯 넷 셋."
"..."
다크엘프 르나는 오늘도 허탕만 치고 쓸쓸히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아카시아는 차가운 눈초리로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볼 뿐이었다.
"흥 다크엘프 주제에 감히!"
정신지배의 저주를 풀기위해 레어로 잠깐 데려왔던게 실수였다. 그날 풀려난 르나는 아예 아카시아의 레어 근처에 집을 짓
고 매일같이 그녀를 찾아오는게 아닌가? 벌써 10년도 더된 일이다.
고 매일같이 그녀를 찾아오는게 아닌가? 벌써 10년도 더된 일이다.
뭐라고 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놔두면 르나는 언제까지나 레어 근처에서 서성이다가 밤이 어둑어둑해져서야 힘없이 돌아가곤 했다. 저딴 년에게 우리 티아를 보일 순 없지. 교육에 안좋다.
"후우 그럼. 오늘 티아랑 뭐하고 놀까나~"
아카시아의 딸 아렌티아는 요즘 점점 예뻐져 갔다. 처음 아렌티아를 되찾아왔을때만 해도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척 불안해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카시아가 상상해온 귀여운 딸아이의 모습을 되찾아 가는 것이다. 정신은 육체를 따라가는 법이다. 지난 100년간 남자로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영겁에 가까운 드래곤의 수명에 비하면 그건 한순간과도 같은 일,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변한 아렌티아가 본 모습을 되찾는 것도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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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뭐하고 있었니? 호호"
아렌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동안 무엇을 생각하는 듯 보였다. 아카시아에게는 아렌티아가 무엇을 하던 귀엽게만 보였다.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
"뭐가 말이니?"
"내 이름이.. 진짜 이름이 생각이 안나."
아카시아는 고민에 빠져 오도카니 앉아있는 흑발의 어린 소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네 이름은 아렌티아잖니. 다른 이름같은건 없단다. 우리딸 티아가 이상한 고민을 하고 있구나."
"잘 모르겠어.. 꿈속에서 나는 엄마처럼 예쁜 은색 머리 언니랑 같이 있는데, 그 언니가 나를 다르게 부르는거야. 그게 내 진짜 이름인거 같은 생각이 들었어."
"음.."
아렌티아는 잠시 무엇을 더 생각해 보다가 이내 포기하고 아카시아의 품에 파고들었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무언가에 깊이 파고들지 못하고 금새 싫증을 내는 것이다.
"엄마. 그것보다 오늘은 딸기케익 만드는 법 알려줘야되. 엄마가 만들어주는것도 맛있지만, 내가 만들어 보고 싶어."
"그러려무나. 후후 티아는 똑똑한 아이니까 뭘 해도 잘 할수 있을거야."
"응 엄마!"
아렌티아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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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 아르셀의 여왕 루스네가 자신의 아들 아르에게 왕위를 물려준지도 벌써30년이 지났다. 용의 피를 이었다고 전해지는 현명한 왕 아르의 통치아래 나라는 갈수록 번성해갔고, 그제서야 루스네는 일선에서 물러나 편히 남은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호호 이게 얼마만이니?"
루스네는 오늘 50년만의 반가운 손님의 방문을 받고 대단히 즐거웠다. 건강히 그리 좋지 못한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들뜬 기분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언니.. 참 하나도 안변했네."
은발의 미녀, 세이키는 슬픔에 젖어 루스네의 얼굴을 쓸어 보였다. 과거 대륙 최고라 칭송받던 그녀의 미모도 세월의 흐름에는 당할 수 없는지, 이미 그곳에는 인자한 인상의 한 노인이 있을 뿐이었다.
"요즘 그런 소리 많이 듣는단다. 음 못보던 사이 많이 컷구나~ 예전에는 귀여운 꼬마였는데 이제는 숙녀가 다 됬네."
"고마워 흑.. 언니."
중간에 세이키가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루스네의 품에 안겨들었다. 루스네는 세이키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너를 만나서 무척 기쁘단다. 이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자칫 50년전 그 날이 너와의 마지막이 될까봐, 무척 두려웠어. 하지만 이렇게 와줬으니 된거야.
"미안.. 미안해 언니. 흑"
"그걸로 된거야. 네가 와준것 만으로도 기쁘단다."
둘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한동안 가만히 있을 따름이었다.
다음날 세이키가 성을 떠나고, 그로부터 한달 후 아르셀의 2대 왕 루스네 아르세나는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 마지막 순간, 루스네는 그와 꼭 닮은 자신의 손자를 바라보며 평생을 기다려온 한 남자를 떠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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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키가 아르셀라를 찾아 세상을 떠돈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아르셀의 왕이 일곱번 더 바뀌고, 그럴때마다 세이키는 잠시동안 시간을 내어 대관식을 구경하곤 했다. 아르셀라의 자손에게선 대를 이을 수록 그의 모습이 옅어졌기 때문에 그것은 세이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시간이 많이도 지났네."
그동안 전 대륙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르셀라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쯤 되면 포기하는게 정상이었지만, 세이키는 주인님이 즐겨입던 회색 로브를 걸치고 언제까지나 대륙을 방황하는 것이었다.
오늘 그녀가 도달한 곳은 아르셀 왕국 남부에 위치한 작은 시골마을 파비안이었다. 오래전 루스네가 알려준 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리를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젊은이. 이리 와서 점이라도 한번 보지 않겠나?"
"?"
시선을 돌려보니 한 늙은 엘프가 행상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할머니의 앞에는 여러종류의 카드라던지, 수정구 따위가 널려있어 그녀의 신분을 짐작케 했다.
"얼마든지요."
세이키는 로브 밑으로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할머니의 앞에 다가갔다. 마음이 착한 그녀는 주인님을 찾아 떠돌면서도 틈틈히 선행을 베풀곤 했다. 자신이 점을 치면 저 할머니는 오늘 따뜻한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에구.. 나이가 드니 이거 영 힘들구만. 그래도 먹고죽을 돈이라도 벌기 위해 이렇게 나와야 하는거지. 나도 왕년에는 알아주는 마법사였는데, 이제 늙으니 아무 소용도 없게 됬어."
"호호 그런말 마세요. 아직도 정정하신걸요."
엘프 할머니는 세이키의 말에 허허 웃으며 카드를 이리 저리 뒤섞었다.
"흠 관상을 보아하니 인간이 아닌 듯 하구먼. 마계에서 온 숙녀셨네 호호."
세이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겉 보기에 세이키는 인간과 전혀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마족이란걸 간파했다는 건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역마살이 꽤 짙은데, 대체 무슨 사연으로 이렇게 싸돌아 다니는 건가?"
"제가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나요?"
"그럼~ 척 보면 딱이지."
할머니는 확신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키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자신의 사연을 간단히 털어놨다.
"잃어버린 옛 연인을 찾고 있어요.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전 아직도 그를 사랑하는 걸요. 그도 아직 저를 사랑하고 있을까요?"
"허허 사랑 좋지~ 좋을 때구만. 내도 젊을때는 그놈의 사랑때문에 많이 해멨지."
"할머니도요?"
"고럼! 앞길 창창한 대마법사 르나님께서 애먼 남자새끼한테 빠져서 일년 내내 그넘만 쫓아다녔다니깐~ 고녀석만 아니었어도 내가 지금 이러고 있진 않았을 텐디 말여."
"잘 안되셨나봐요."
늙은 엘프 르나는 먼 곳을 바라보며 회상하듯 말을 꺼냈다.
"에휴 다 내잘못이지 뭐. 집안의 반대가 너무 심해서, 내 얼굴만 봐도 그집 어머님이 역성을 냈다니까? 난 그래도 열번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생각으로 백년 잡고 한 만번은 찍어봤는데 그래도 안되더라구."
"...."
"덕분에 얼굴에 주름살은 늘어가고, 완전히 아줌마가 되고 나니 더 찾아갈 엄두를 못내겠더마. 자신이 없어진 게지. 그놈이 세월 때문에 에휴."
세이키는 연민어린 눈으로 르나를 바라봤다. 자신도 그녀와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에 웬지 남일같지 않게 느껴져 가슴이 저렸다.
"할머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한번 만나보시는게 어때요?"
"마 내가 무신"
"외모는 중요한게 아니에요. 마음이 중요한거죠. 어차피 그 남자도 할아버지일텐데요 뭐."
"허허 그럴리가 있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난 안될거여."
"...."
"운명이라는게 있어. 난 그 남자랑은 안될 팔자였던 거지. 고걸 일찍 알았어야 했는데, 그놈의 사랑이란게 뭔지.. 할머니가 다된 지금도 아직도 그녀석을 잊을수가 없어. 에구 노망이 난거지 뭐. 휴우.."
르나는 쓸쓸한 표정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도 일찍 마음 접는게 좋아. 젊은 처자가 이게 뭐하는 짓이라녀?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은게 아니것나? 괜히 나처럼 꼬부랑 할머니되서 후회하지말구."
"말씀은 고맙지만 할머니.. 하지만 전..."
"평생 찾지 못할 수도 있여."
세이키는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그래도 괜찮아요. 죽더라도 저에겐 그이 밖에 없는걸요."
그 말에는 흔들리지 않는 강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자 르나는 이가 다 빠진 입으로 씨익 웃어보였다.
"허허 고럼 된거여. 운명이 닿아 있다면 언젠가 다시 볼 수 있것지."
"정말요?"
"그렇게 지극정성인데 안될일이 뭐가 있것나? 잘 해보드라구."
"고마워요 할머니~"
세이키는 르나에게 금화를 지불하고 전에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르나는 멀어저가는 세이키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이내 쓸쓸히 미소지었다.
"그래서 안됬던 것이구만. 저렇게 예쁜 처자가 이미 인연을 다 가져가 버렸는디 나거치 박복한 년한테 기회가 있을 턱이 없지. 에구 잘 된거여. 그렇고 말구."
르나는 조용히 자신의 행상을 정리했다. 저물어가는 노을결에, 르나의 빛바랜 회색 머리가 쓸쓸히 물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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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티아는 이제 500살이 되었다. 딸이 어느정도 성장하여 이제 해츨링의 티를 벗자, 아카시아는 슬슬 그녀에게 바깥세상을 경험하게 해 주는것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넓다.."
엘퍼스 산맥을 벗어나 드넓은 평원에 도착하자 아렌티아는 처음보는 바깥 풍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자 아카시아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엄마 옆에 붙어다녀야지. 그러다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헤헤 내가 애인줄 알아? 참 엄마 걱정도 많으셔."
그녀 말대로 아렌티아는 이제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의 외모는 십대 후반의 청순한 흑발 미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카시아와 같이 세워놓으면 딱 자매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다.
"그럼 네가 애지. 어른이니?"
"후후 참 엄마도."
아렌티아는 마치 요정처럼 꽃이 핀 들판을 이리저리 쏘다녔다. 누군가 그녀의 모습을 본다면 틀림없이 마음을 빼앗기고 말 것이었다. 그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다.
"잠시 여기서 놀고 있으렴. 엄마 잠깐 반찬거리좀 마련해 올 테니까, 어디 가버리면 안돼."
"같이가면 안돼?."
아카시아는 아렌티아의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호호 처음으로 나왔는데 실컷 놀아야지 않겠니~ 걱정말고 잠시만 기다려. 엄마가 금방 갔다올게."
사실 아카시아는 오늘의 반찬을 "육류"로 할 생각이었다. 아렌티아처럼 순수한 아이가 식탁에 올라오는 "육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게되면 자칫 충격을 받을수도 있으니 그녀를 데려갈 수는 없는 것이다.
"칫 흥이다!
아렌티아는 짐짓 토라진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훽 돌렸다. 물론 그녀가 진짜로 삐진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아카시아는 잠시 자신의 딸의 귀여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재빨리 숲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냥 심심해라~"
홀로 남겨진 아렌티아는 잠시 그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하늘은 맑고 들판에 꽃들은 화사하게 그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은은한 꽃향기가 취할듯 감도는 가운데 알록달록한 나비들이 팔랑팔랑 춤추고, 또 바람은 부드럽고 서늘하게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고. 또..
"...."
가끔씩 이렇게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질 때가 있다. 무언가 중요한,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잃어버린 무언가가 생각나지 않는다.
[에휴.. 나도 참 바보같아.]
수백년 전, 아기였을 때 일을 기억할 수 있을리 없지 않은가? 보나마나 아기침대에 누워 모빌이나 보고 있었을 텐데, 뭐 잃어버린게 있다고 그토록.. 그토록..
그래도 한참동안 생각에 골몰하다보면 흐릿하게 무언가가 떠오를 때도 있다. 속삭이던 그 입술, 아름다운 은색 머리카락이라던지, 자신을 쓰다듬어 주던 상냥한 손길.. 그녀는 누구였을까?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었을까?
[나의 주인님.]
"응?"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올려보던 아렌티아에게, 기억속 어딘가에 묻혀진 그리운 무언가가 의식을 일깨웠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 곳에는..
"...."
"...."
그순간 아렌티아는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400년이 아니라 4000년이 지나도 그녀를 절대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잊을 수 없는 그녀. 나의 사랑..
"..키"
아렌티아에게서 그토록 그려왔던 한 소녀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서 의식조차 못한 눈물이 한줄기 떨어지고,
"하아 정말이지~ 길었다구요."
은발의 그녀는 정말로 행복한 표정으로 환하게 미소짓는 것이었다.
Legend of holy dragon lord Aercella - ending no.3
*세이키 루트 끝. 루스네 루트, 르나 루트, 아카시아 루트, 하렘루트 등 처음에 기획한 루트들은 필자가 게을러서 없습니다. 원래는 능욕+하렘이 주 컨셉이었는데 글을 빨리 끝맺으려다 보니 이런 어색한 순애루트로 가게 되었네요..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리고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능욕으로 시작된 사랑? 이런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 범죄를 저지르면 단지 감옥에 가게 될 뿐이죠. 이 점에서 능욕한 히로인과 몇백년에 걸친 순애보.. 이건 말도 안되는 판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히로인이 일부러 능욕당해준거다, 이렇게 끼워맞추긴 했는데, 저도 결말은 영 마음에 안드네요 ㅠㅠ
2부는 위 시점에서 500년정도 후를 컨셉으로 써놓은 글이 있습니다. 예전에 여기서 연재하다 형한테 들킨 이후 쪽팔려서 지웠는데, 기억하시는 분이 있으려나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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