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룡왕 아르셀라 19
19. 하렘왕의 슬픈 운명
"세이키가 돌아왔다고?!"
전령의 보고를 받고 맨발로 성문에 나간 루스네의 시야에 익숙한 한 소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헥헥. 어 언니?"
"세이키!!"
루스네는 앞뒤 가리지 않고 그녀를 끌어안고 눈물부터 흘렸다. 세이키는 밤새 말을 타고 오느라 무척 초췌한 기색이었다.
"흑 어디갔었던 거야. 걱정했잖니. 흐윽"
"에헤헤 언니도 참. 내가 그렇게 못미더워보여?"
세이키는 자신의 빈약한 가슴을 펴보이며 루스네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루스네는 좀처럼 눈물을 거둘 생각을 하지 못한다. 요즘들어 너무 엄청난 일들을 많이 겪어 감정절제가 제대로 안되는 것이다.
"자.. 언니 괜찮아. 어서 뚝."
"으앙 세이키.. 흐윽. 난 네가 잘못된 줄 알고. 흑."
"헤..헷"
주변을 돌아보니 성문 근처의 근위병들과 루스네를 수행해온 신하들이 어색한 기색으로 딴청일 피우고 있다. 그들로서도 자신이 모시는 왕비전하의 흐트러진 모습을 대하니 영 난처했던 것이다. 물론 그건 루스네가 붙들고 있는 당사자인 세이키도 마찬가지다.
"저 언니.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재회의 기쁨은 나중에 나누기로 하고, 그보다 주인님 지금 어디있어? 빨리 전할 말이 있어!"
"흑.."
루스네는 그제서야 눈물을 거두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건 바로 아르셀라였다.
"서방님? 지금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고 방에 틀어박혀 계시는데.. 급한 일이야?"
"당연하지! 서방님 목숨이 걸린 문제야. 어서 안내해줘."
"모 목숨?"
서방님이 절대 자신을 방해해지 말라고 했지만 세이키가 이렇게 까지 말하니 루스네도 그의 명령을 어길 수 밖에 없었다. 루스네는 세이키를 급히 아르셀라의 방으로 안내했다.
"...."
아르셀라는 방 가운데에 가부좌를 튼 채로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머리속에는 무시무시한 마녀, 아카시아의 모습이 떠올라 있다.
[강하다.]
순수하게 실력으로 따지면 자신은 그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극복하기 힘든 실력차를 좁히기 위해서는 자신의 머리속에 각인된 그녀의 이미지를 먼저 극복할 필요가 있다.
[제대로 싸웠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당했을 리가 없어.]
처음 아카시아를 대했을때 정신줄을 놓은건 아카시아 만이 아니었다. 아카시아가 무언가에 충격을 받아 얼어붙어 있는 사이, 자신은 그녀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얼어있었던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냉정하게 정신을 유지하며 그녀를 밀어붙였다면 이겼을지도..
"..."
어차피 결과론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아르셀라를 원호해준 강력한 조력자 세이키와 모크나가 없다. 이젠 순수하게 자신의 힘만으로 그녀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본래 모습으로 상대해 볼까?]
아르셀라가 생각한 방법은 용의 모습으로 돌아가 순식간에 그녀를 끝장내 버리는 것이다. 문제는 두가지다. 첫째, 자신이 용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화신체인 아카시아가 자신의 현신체보다 강할수가 있다. 둘째, 제빨리 변신을 마치고 바로 기습하더라도 통하지 않을 우려가 있다.. 이 모든걸 결론지어봤을때 아르셀라가 아카시아를 이길 확률은 3%미만이었다. 이것도 많이 쳐준거다.
[마나폭주..]
다음으로 생각한건 퀴러스가 알려준 비술, 마나폭주였다. 자신의 스승 퀴러스는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와 싸울때 스스로를 희생해 적을 날려버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너는 용족이기에 다른 제자녀석들보다 10배가까운 엄청난 마나량을 갖췄지. 너의 마력은 오히려 나보다도 훨씬 많다. 이걸 이용하면 도저히 답이 안보이는 절망적인 상대와도 동수를 이룰 수 있다."
전신의 마나를 연쇄반응시킨 후 적을 향해 강력한 위력의 마나폭풍을 일으켜 모든걸 날려버릴수 있는 비장의 희생마법. 이걸 사용하면 자신은 반드시 죽는다. 아카시아에게 마나폭주를 사용했을때 승률은.. 25%정도.
[그리고 현신과 마나폭주를 같이 사용하면..]
드래곤의 모습으로 화한 자신이 아카시아에게 모든 마력을 다 쏟아부은 자폭마법을 사용했을때 승률은 50%! 이정도면 충분히 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래. 마나폭주를 쓰면 되겠군 큭큭. 내가 죽어서 내 여인들을 살릴 수 있다면.. 마다할 것도 없지."
마음이 편해진다. 이걸로 다 된 것이다. 이걸로..
"정말 그걸로 괜찮으시겠어요?"
"..."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한 적발의 요염한 서큐버스가 슬픈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노.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여긴 어쩐 일이야?"
"글세요, 주인님이 있는 곳이라면 저는 어디든 갈 수 있어요. 서큐버스 고유의 능력이죠."
"..."
아르셀라는 다시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등 뒤에서 리노의 젖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도 300년 넘게 살면서 이것 저것 주워들은게 많아요. 마나폭주란 것은, 스스로를 희생하여 적을 멸하는 희생마법이잖아요."
"잘 알고 있군."
"그럼 제가 주인님을 말리려 하려는 것도 알고 계시겠죠?"
"그리고 너도 나를 말려봐야 소용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겠지."
"...."
리노는 아르셀라가 이미 마음을 굳혔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 어떤 말을 해도 그는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하아.. 정말이지, 이건 제 경력에 크나큰 오점이에요. 주인님이 죽으려 하는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서큐버스라니.."
"미안하군."
"아니 미안할 것 없어요. 것보다 지금 저와의 계약을 해지해 주시면 안될까요?"
아르셀라는 리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주인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꼴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받아들이지."
"아니오, 제가 아니라 주인님 측에서 해지를 요청해 주세요. 곧 죽을 분에게 다른 동료 서큐버스를 추천해 줄 순 없어요."
갱신기간 외에 계약을 해지하게 되면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리노의 해지조건은 주인에게 다른 서큐버스를 추천해 주는 것이었다.-주) 2화 참조- 아르셀라는 그녀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좋아. 리노. 너와의 계약을 해지하고자 한다."
"알겠어요 주인님."
그 말이 끝나자 마자 리노와 아르셀라의 유대가 끊어졌다. 아르셀라는 이제 그녀가 자신과 완전히 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후우 주인.. 아니 아르셀라님. 아르셀라님은 제가 계약을 맺은 주인들 중 가장 바보같고, 가장 멋진 분이셨어요."
"..."
"조금 좋아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걸로 끝이군요. 아마 당신을 잊지 못할거에요."
"나 역시. 너를 가슴에 품도록 하겠다."
리노의 양 눈에 살짝 이슬이 맺혔다. 그녀는 아르셀라의 입술에 살짝 입맞춤 한 후 조용히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다.
[가 버렸군.]
잘 된 거다. 그동안 정도 많이 들었지만, 이런식으로 깔끔하게 정리하는게 좋은 것이다. 어차피 자신은 죽게 될 몸이다..
"후우.."
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무척 허전한 느낌이 든다. 이제 그녀를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슬퍼지는 것이다. 리노 뿐 아니라 이제는 루스네와도, 세이키와도.. 이별이다.
똑똑
아르셀라가 슬픈 상념에 빠져있는 동안 굳게 닫힌 방 문에 인기척이 들려온다.
"저기 서방님."
"들어오거라."
탁
문이 열리고 익숙한 두 여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나는 자신의 아내 루스네 공주고 다른 하나는..
"세이키?"
"우앙 주인님~"
아르셀라의 울적한 얼굴엔 잠시 화색이 돌았다. 그는 품안에 안겨든 은발의 소녀를 양 팔로 꼭 마주안았다.
"어떻게 된거냐? 난 네가 잘못되기라도 했을까봐 걱정했는데.."
"아 그게요. 흑"
세이키는 주인님을 다시 만난 기쁨에서인지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해갔다.
"웬일인지 아카시아가 저를 그냥 놔 주었어요. 아마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제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죠."
아카시아와 같은 마녀가 자신의 등에 칼을 꼽은 소녀를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척 놀랍기는 하지만, 일단 살아돌아왔으니 그걸로 된거다. 아르셀라는 세이키의 무사생환에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하지만 그는 눈물을 보일수는 없다.
"어쨌든 다행이구나. 이제 다시는 너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겠다."
"참~ 그건 제가 할 말이에요. 주인님을 지켜야 할 건 바로 저인걸요?"
"..."
세이키의 말에 아르셀라의 표정이 다시 가라앉아갔다. 이제 곧 그녀가 지켜준다던 주인님은 세상에 없게된다. 그것이 또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슬펐다.
"아 참. 세이키가 급히 서방님께 전할 말이 있대요. 그래서 서방님의 명을 어기고 여기로 데려온거에요."
"뭐 어차피 나갈 생각이었다. 그것보다 전할말이란 무엇이지."
"아 맞다!"
세이키가 손뼉을 짝 치며 다급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주인님! 이러고 있을때가 아니야. 당장 도망쳐야해!"
"무슨 말이냐?"
"아카시아가 오늘 직접, 주인님을 만나러 온다던데? 나한테 이 말을 전하라고 했어."
"...."
아카사이가 오늘 온다고? 잘 된 일이다. 자신의 결심이 흔들리기 전에 직접 행차해 주신다면 그보다 좋을 순 없지.
"내가 국경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거의 반나절도 넘게 걸린 거 같아. 그러니까 이제 몇시간 남지 않았어! 주인님. 빨리 도망쳐! 세이키는 지금 힘을 쓸 수 없어서.. 주인님을 지켜줄수 없다구."
루스네는 잠시 어쩔 줄 모르고 그 자리에 못박혀 있다가 곧 단호한 어조로 세이키의 말에 동조해왔다.
"일단 몸을 피하세요. 지금 아카시아와 대결하게 되면 서방님은 틀림없이 큰 화를 당하게 될 거에요. 아카시아를 물리치겠다는 서방님의 말을 못 믿는건 아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잖아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오늘.. 아카시아와 대결하겠다."
"네엣?"
"서 서방님?"
아르셀라의 말에 두 여자는 깜짝 놀랐다. 그 무서운 마녀와의 대결은 곧 죽음이다. 설마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마 마 마 말도안되! 아카시아가 얼마나 센지는 주인님도 잘 알잖아! 이건 미친 짓이라구!"
"제발 다시생각해 주세요 서방님. 저를 지켜주겠다는 약속 때문인가요? 아무 생각없이 부딪치면 결국 약속을 지킬 수 없잖아요! 좀 더 철저히 계획을 세워서.."
"날 믿어다오."
낮게 깔리는 아르셀라의 음성에 루스네는 순간 말 문이 막혔다. 믿어달라니.. 믿어달라니..
"너희들은 내 여자다. 나는 내 여자들에게 그토록 못미더운 남자였나?"
"주인님. 그래도.."
"부탁이다. 나에게 너희를 지킬 기회를 다오. 내게 다 생각이 있다. 이번만큼은 나에게 맡겨줘."
"흐으.. 흐으윽."
"으아아앙"
두 여자는 잠시 서로를 마주보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울음을 터뜨리며 아르셀라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리고 아르셀라의 가슴은 두 여자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흐윽 믿을게. 주인님을 믿지 않으면 세상 그 누굴 믿을 수 있겠어? 그래.. 흑 주인님은 할 수 있어. 그따위 못생긴 아줌마는 단숨에 날려버리는 거야!"
"저도 서방님을 믿어요. 훌쩍. 믿으니까.. 믿고 있으니까!"
"세이키.. 루스네.. 고맙다."
아르셀라는 품 안의 두 여자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자신에게 과분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여자들.. 이 여자들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그 무슨 미련이 남겠는가?
.
.
.
.
.
얼마 후 아르셀라는 몸가짐을 단정히 한 후 단신으로 성 문을 나섰다. 우연찮게도 그가 성을 나서는 순간 저 멀리 희끄무레한 아카시아의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꼭 이기셔야 해요. 서방님]
[주인님을 믿으니까..]
성벽위에 자리잡은 세이키와 루스네는 서로의 손을 꼭 쥐고 자신들의 남편을 향해 신뢰어린 시선을 보냈다. 저 남자는 자신을 믿어달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들이 할 수 있는건, 다만 남편을 신뢰하는 것 뿐.. 그것이 부인의 역할인 것이다.
"전하.."
"부디 이 나라를 구해주소서."
성벽 위에는 세이키나 루스네만 있는게 아니었다. 플렌 후작을 위시한 수많은 아르셀의 신하들이 성벽위에 진을 치고 한마음으로 아르셀라를 응원하고 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단신으로 마녀 아카시아와 맞선 진정한 왕을 위해 승리의 기원을 올리는 것이다. 만약 믿음만으로 승패가 갈린다면 아르셀라의 승산은 100% 였다.
"후우.."
아카시아의 신형이 점차 가까워 오자 아르셀라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마지막 생각을 정리했다. 세이키 루스네 리노, 다른 사형들. 그리고 르나까지.. 수많은 자신의 친인들이 머리속을 스쳐간다. 이제 다시 볼 수 없겠지.
후회를 남길 생각은 없다. 아카시아의 아름다운 얼굴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아르셀라는 천천히 자신의 마력을 개방시켰다.
[현신..]
순간 아르셀라의 몸이 찬란하게 빛나며 그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아르셀의 인간들은 모두 경이로운 시선으로 왕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색의 빛에 눈을 떼지 못했다.
파아앗
그리고 잠시 후, 눈이 멀 듯한 강렬한 섬광과 함께 아르셀라는 현신을 끝마쳤다. 전신을 덮는 커다란 날개, 날카롭게 돋아난 긴 손톱, 칼조차 박히지 않을 것 같은 칠흑색의 강인한 비늘.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는 여러개의 뿔이 돋아난 용의 머리 그리고 그 크기는..
"에엣? 주인님?"
"저 저게 서방님의 정체였나요?"
술렁 술렁
무언가 잘못되었다. 아르셀라의 본 모습은 확실히 용의 형태를 띄고 있기는 했지만 그 크기가..
"너무 작잖아!"
"완전 아기드래곤이야!"
말 그대로였다. 보통, 사람들의 상상속의 드래곤은 한 성의 크기에 육박하는 거체를 가진 무시무시한 마법 생명체였다. 하지만 아르셀라는 지금 그의 앞에 당도한 흑발의 미녀 아카시아의 크기와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어보이는 새끼용이었다. 아니 오히려 아카시아보다도 작아보인다!
[크윽 이자식들이? 감히 왕을 깔봐]
사실 아르셀라도 용의 모습으로 현신한건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본체가 작아도 이토록 작을줄은 몰랐다. 확실히 100살짜리 드래곤은 어리긴 어리다.
"후후 아렌티아야. 그 모습은 정말 귀엽잖니. 아웃 깨물어 주고 싶어라~"
심지어 적인 아카시아마저 그를 놀리고 있다. 아르셀라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전신에 응축된 에테르를 강제로 순환시켰다.
파파팟
다시금 아르셀라의 몸이 빛나기 시작한다. 아르셀라가 사용하려는 능력의 정체를 알아본건 오직 세이키 뿐이었다.
"앗 저건!"
"뭐니 세이키.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야?"
[강제성장..]
설마 주인님이 자신의 필살기까지 알고 있는줄은 몰랐다. 딱 두번밖에 쓴 적이 없는데 그 사이에 배운건가? 아니 차라리 알려달라고 하지
"크오오오오!"
강제성장이 끝나고 아르셀라의 몸이 거의 네배로 부풀어 올랐다. 아직도 일반적인 용의 모습과는 상대가 안될 정도로 작긴 하지만, 이정도면 나름 드래곤이라고 인정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마나폭주를 사용하기 위해서 몸이 커질 필요는 없지만, 일단 새끼용의 모습으로 희생하면 아무래도 멋이 안나기에..
"우와아아 드래곤이다!"
"우리의 전하께서 드래곤이셨어."
아르셀라의 의도대로 성벽위의 반응이 뜨거워진다. 그들은 아르셀을 세운 왕이 전설에나 나올 법한 위대한 드래곤이었다는 사실에 무척 감동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용이 세운 국가는 수백년간 번성했다고 전해내려온다. 예를들어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현 타르칸 제국도 골드드래곤 테어카나가 세운 국가라고 알려져 있지 않은가? 모르테스도 그 기원을 따지면 용이 세운것이라는 설이 있다.
"서방님.."
이시각 루스네만이 밀려오는 불안감을 억제하지 못하고 아르셀라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의 감이라고 할까나? 웬지 불안하다.
아카시아는 크게 변한 아르셀라의 모습을 보고 잠시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잊었다. 그녀도 아르셀라가 무슨 방법으로 커졌는지는 알고 있다. 강제성장이라..
"아렌티아! 지금 대체 뭐하는 거니? 강제성장이 얼마나 몸에 나쁜지 모르는거니? 당장 본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해?"
"큭 웃기지 마라. 너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라면 나는 목숨마져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
"뭐 뭐? 목숨을 버려?"
아카시아는 자신이 이토록 미움받고 있다는 사실이 눈물이 날 정도로 슬펐다. 아렌티아.. 아렌티아야. 왜 이 어미의 마음을 몰라주는 거니?
"그만 두거라. 나는 너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단지 너를 데리고 레어로 돌아가기 위해.."
"닥쳐!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자 아카시아여. 너는 결코 이 나라를, 나의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 갈 수 없다. 나와 함께 지옥에서 너의 방심이 나은 어리석음을 후회하려무나!!"
아르셀라의 외침이 대기중에 크게 울려퍼진다. 그리고 이 소리는 성 위에 루스네나 세이키에게도 닿기에 충분할 정도로 컸다.
[서 설마?]
루스네는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르셀라는 자신의 몸을 희생해 아카시아를 물리치려는 것이다.
"아 안돼요 서방님!! 이 바보야!!!!"
"꺅 언니 왜그래?"
세이키는 루스네가 갑자기 비통한 절규를 흘리며 성 아래로 뛰어내리려고 하자 급히 그녀를 제지했다. 루스네는 세이키의 품 안에서 마구 몸부림치며 계속 아르셀라에게 다가가려 하고 있었다.
"그만둬 언니! 여기서 떨어지면 위험하단 말야!"
"그런게 대수니? 지금 서방님이.. 서방님이.."
[아..]
그제서야 세이키도 비로소 아르셀라의 의도를 알아챘다.
"말도안돼. 주인님! 꺄아아악!!!"
콰아아아앙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르셀라의 전신이 불길한 적색으로 빛나더니 곧 엄청난 빛의 폭발이 아카시아와 아르셀라를 완전히 감싸버렸다.
휘오오오
잠시 후 빛이 사라지고,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아르셀라는 아카시아를 데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
루스네는, 그리고 세이키는 완전히 넋이 나가 서로를 끌어안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녀들의 귀에는 신하들의 울음소리도, 슬픔에 찬 절규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졸지에 과부가 되어버린 두 여자의 대성통곡과 함께 이 가슴아픈 비극은 막을 내리게 된다. 성룡왕 아르셀라. 그의 숭고한 희생으로 아르셀은 국난을 극복하고 이후 천년이 넘도록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게 된다. 이것이 앞으로 역사책에 쓰여질 내용이다.
그리고 잠깐 그 뒷이야기를 하자면,
"뭐 뭣이?"
마나폭풍을 일으키려는 찰나, 자신의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900vf의 마력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아르셀라는 영문조차 알지 못하고 새끼용의 모습으로,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렷다.
"후우 이제야 좀 얌전해 졌구나. 자 가자꾸나. 그리운 우리 집으로."
"에에에에?!"
아카시아가 아르셀라에게 다가와 그의 몸을 꼭 끌어안는다. 아르셀라는 온 힘을 다해 저항해 봤지만 마력이 전혀 없는데다가 머리까지 어찔어찔 한게 전혀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파아아앗
아르셀라를 끌어안은 아카시아의 몸에서 붉은색 빛이 품어져 나오더니 곧 흔적도 없이 두 남녀를 지워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어어엇?"
아르셀라가 도착한 곳은 은은한 오로라가 천장에 맴도는 넓고 이상한 구조물이었다. 여기는 대체 어디지? 아카시아는 왜 나를 이런 곳에..
"후우.. 이제야 집에 돌아왔구나 흑 아렌티아 내 딸아!"
[따 딸이라구?]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자신이 왜 아카시아의 딸이란 말인가?
"미 미친거 아냐? 이거 놔. 내 몸에서 떨어지라구!"
아르셀라는 아직도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는 아카시아를 떨궈내려 했지만 여전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이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찰나, 낭랑하고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걸로 된건가요?"
"컥.."
도저히 자신의 귀를 믿을수가 없다. 저 목소리는 바로..
"리노 네가 어째서?"
"후후 잘해주었다. 덕분에 이 아이를 수월하게 데려올 수 있었구나. 거기다 마력도 제로에 가깝게 되었으니 더욱 좋은 일이지. 어서 돌아가거라. 한시라도 빨리 아렌티아와 단 둘이 되고 싶다."
"감사합니다 아카시아님. 그럼 언제라도 저희 서큐버스의 서비스를 이용해 주십시오."
리노는 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꾸벅 인사하고 살짝 몸을 돌렸다. 중간에 그녀가 애틋한 눈으로 아르셀라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결국 리노가 한 행동은..
"끄아악 나를 배신하다니!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
틀림없다. 마나폭주를 일으키려던 중간에 자신의 마력이 바닥에 가깝게 사라져 버린것은 서큐버스 리노가 "위약금"을 징수해 갔기 때문이 아닌가? 더군다다 적인 아카시아에게 저런 태도라니!
"죄송해요 아르셀라님. 저는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라도 지키고, 거기다가 잃어버린 엄마도 찾게 됬으니 서로에게 잘 된거 아닌가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잊지 않을게요~"
"안돼 가지마! 가지말란 말야.. 안돼에에에."
하지만 아르셀라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리노는 어둠속으로 스며들어 종적을 감춰버렸다. 그리고 이 넓은 레어에 남겨진건 이제 둘 뿐이다.
"후우 아렌티아야. 정말.. 무슨 말부터 해야 할 지 모르겠구나. 다행히 이제 너랑은 떨어지지 않을테니 차근차근 그동안 맺힌 사연을 주고 받을 수 있겠구나."
"큭 웃기지마! 왜 갑자기 친한 척이야? 넌 나의 적이다! 어서 르나를 돌려줘!"
"그 아이는 어차피 이제 필요도 없어졌다. 이제 인간들을 미워할 필요도 없으니 곧 의식을 중단하고 풀어주도록 하마."
"잘 생각 했어. 그럼 나도 빨리 풀어달라구! 한시라도 이런 이상한 장소에는, 특히 너랑 같이는 있고 싶지 않다."
아카시아는 단호안 모습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돼! 그리고 아까부터 엄마한테 그게 무슨 태도니? 그게 엄마를 대하는 딸아이의 태도니?"
"아나 돌것네."
아카시아는 무서우리만큼 강한 드래곤이기는 했지만 그 못지않게 정신도 이상한 듯 보였다. 대체 그녀가 왜 자신의 어머니란 말인가? 거기다 딸이라니? 아르셀라는 남자다. 그것도 남자중의 남자! 하렘왕인 것이다.
"야 내가 왜 네 딸이야? 나는 하렘왕이라구!"
"후우.. 하렘왕이라니. 못 보던 사이에 잘못된 사고관을 갖췄구나. 거기다 듣자니 나를 하렘에 넣을 계획이였다며? 그건 패륜이 아니니! 하지만 걱정말거라 이 엄마가 잘 해결해 줄 테니.."
"뭐 뭐라고?"
순간 아르셀라의 전신에 오한이 쫙 돋았다. 무언가 불길하다. 이건 미친 짓이다! 어서 여기서 나가야..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마침 네 마력도 다 떨어졌으니 저항력도 거의 없겠구나. 후 잘 되었어. 사실 네가 알이었을때 성별을 몰라서 여자라고 생각하고 이름을 짓기는 했지만, 어차피 별 상관은 없었단다. 설령 네가 남자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말을 하다 말고 아카시아가 갑자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보통 용들은 용언을 통해 바로 마법을 계산해 시전하기에 이렇게 주문을 외우는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용들이 주문을 외워 마법을 사용하는 경우는 딱 두가지다. 하나는 유희중에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인간으로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또 하나는 엄청나게 복잡한 10서클 이상의 최고위 마법을 사용할 때!
"아 아아.."
아르셀라는 아카시아 주위에 떠오르는 복잡한 마법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서 도망쳐야하는데.. 빨리 저 무서운 마녀에게서 벗어나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래서는.. 이래서는! 아 안돼!
"안돼!!!!"
아르셀라의 처절한 절규가 레어 전체에 길게 퍼져나간다. 동시에 아카시아가 완성한 마법이 아르셀라의 몸에..
파아아앗
아르셀라는 마법에 맞는 순간 틀림없이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의 삶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그는 의식을 잃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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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 그래서 말이지. 더러운 모르테스 놈들에게 발목을 잡혀 레어로 돌아갈 수 없었던다. 나를 잡기 위해 국가의 총 전력을 동원한 듯 보였어. 내가 죽인 소드 마스터만 해도 8명이 넘는다."
"...."
"간신히 목숨만 부지해 돌아와 보니, 이게 웬일이니! 레어가 근처 흑마법사가 시전한 메테오 때문에 완전히 박살나 있던게 아니니! 거기다 내 알도 흔적조차 없이 부셔져 있고, 껍질조각만 흑흑.."
"...."
"아렌티아야. 이 엄마가 네가 없어진 동안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단다. 매일밤 꿈에 네가 나왔어 흑. 살아있었다면. 우리 딸에게 해 주었을 그 모든 일들을 꿈에서 밖에 해줄 수 없는 거야. 그게 미치도록 괴로웠어.. 죽고싶을 정도로 흑.."
"...."
"너를 다시 되찾게 되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단다. 너는 아마 모를거야. 흑 그래도 너무 다행이야. 늦게나마.. 흐윽 늦게나마 너를 되찾게 되서..."
"...."
아르셀라는 아카시아가 뭐라고 하던간에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마치 혼이 나간 인형처럼, 멍하니 한곳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렌티아야!!"
말하던 중간에 격정을 이기지 못한 아카시아가 아르셀라의 작은 몸을 품안에 꽉 끌어안았다. 작다.. 예전에는 아카시아보다 머리 하나는 컸었는데 지금의 자신은, 그녀의 반도 안되보인다. 품안에 안기 딱 좋은 사이즈다.
[크윽..]
아니 크기가 작아진건 아무래도 상관 없다. 중요한건 오랜 마법실험으로 거칠어진 자신의 손이 부드러운 귀엽게 생긴 손이 되었다는것, 자신의 탄탄한 근육질 가슴이 슬플정도로 세이키같이 되었다는것, 멋지고 강한 인상을 주던 그의 눈썹이 가늘고 여성스럽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없다.
그것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예전에 자신이 좋아했던 그것이 대신 생겼다. 쉽게말해 자신은..
"으앙ㄻㅍ럶ㅍㅁㄴㅇ"
"그래 그래 흑흑 이제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흐윽 울지마렴. 괜찮으니까.. 괜찮으니까."
흑발의 미소녀, 블랙드래곤 헤츨링 아렌티아는 자신의 잃어버린 어머니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울어댔다. 그것은 간신히 혈육을 만난 기쁨의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이제서야 본 모습을 찾았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의 눈물이었을까?
[아아악 차라리 죽여줘!!!]
한때 하렘왕의 꿈을 꾸었던 위대한 남자 아르셀라, 안타깝게도 가혹한 운명은 그가 자신의 꿈을 온전히 펼치도록 놔두질 않았다. 그, 아니 그녀는 이제 아카시아의 레어에 갖혀 죽느니만 못한 처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사실 1편에서 아르셀라의 두갈래 운명이 제시되었죠. 하렘왕vs고자. 제가 더 길게 썻으면 첫번째 루트를 타게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제 근성이 고작 이정도..라서 결국 두번째 루트를 타게 되었습니다. 여자가 됬으면 고자나 다름없는거죠.ㅠㅠ 그래도 미완으로 언제까지나 남겨두느니 이런식으로라도 결말을 짓는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음화는 안타깝지만 에필로그입니다. 여러분 이 미숙하고 재미없는글을 봐주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리플 달아주신 분들도 모두 복받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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