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厚の野望 21
아늑하면서도 정취가 있는 방 안이었다. 누대에 방향초가 전시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부드러운 융단이 깔려 있었다. 그 방의 북쪽의 침상가의 의자에 앉아있는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탁자에 문방사우를 펼쳐놓고 연꽃을 치고 있었다.
방바닥에는 파지된 종이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장지문가에는 여자아이가 부동 자세로 있었다. 단정한 머리에 깨끗한 녹의경장 차림을 한 평범한 얼굴었으나 생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교육을 받아 절제된 것이 아니라 애당초 빠져나간 것처럼 망부석과 같았다.
그림을 치고 있었던 여인은 화선지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녀의 눈은 쳐진 연꽃의 줄기가 아니라 그 너머 생각의 가닥을 다듬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던 여인은 이윽고 붓을 내려놓았다. 연꽃은 미완성 상태였다.
"부용이라 했지?"
여인, 금보옥은 장지문에 시립한 아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입술을 움직이는 것을 보며 금보옥은 내심 감탄했다. 같은 자세로 두 시진가까이 있었다. 여기저기 몸이라도 트는 기색이 있을텐데도 그런 징후조차 감지되지 않았다. 평범한 아이가 아닐거라는 확신이 굳어졌다.
"한 가지 물어볼게 있단다."
덕후가 전해준 정보로 금보옥은 영웅대회의 숨은 진상과 심가장의 변고를 손금보듯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귀에 맞물리지 않는 것이 있어 부용을 호출한 것이었다.
"마라천인혈정이 그토록 대단한 물건이니?"
금보옥이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적들이 고작 마검 하나만 믿고 심가장을 찬탈한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적은 수로 세력을 뒤집어버린 예는 있었다. 멀리는 강무제가 그러했고, 가까이는 덕후의 조력을 받은 염미홍이 그랬다. 그러나 그들은 세력을 역전시킨 후에 고정시킬 추, 반발을 찍어누를 힘-절정고수-이나 무마할 수 있는 호응책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관 신지 일행에게는 그런 것이 전무했다.
욕구불만을 가진 불량배들의 분탕질을 위한 치기어린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그 계획이 자못 치밀하고 독심도 가지고 있었다. 금보옥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심가장을 뒤집는 것은 가능해도 그 이후에 세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영웅대회로 새로운 세력으로 물갈이한다손 쳐도 상관세가와 악연이 있던 대상련 영역권이다. 신지 일당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대부분이 등을 돌릴 것이고, 몰락을 의미했다.
금보옥은 이런 단점을 상쇄할 수 있는 열쇠가 마라천인혈정 밖에 없을 거라고 보았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결론짓고 보니 스스로 모순에 빠졌다. 절세의 마병이라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무인의 입장에서나 그렇지, 집단을 장악하거나 세력을 불리는 것은 별개다. 비록 최절정고수로 만드는 옵션이 붙었다해도 한 손이 열 주먹을 감당하지는 못한다.
십패의 태동기에 유일하게 최절정고수로 일컬어졌던 연독고가 천하를 독패하기는 커녕 고작 사천 지방에 머무른 이유가 무엇인가. 녹수맹을 세웠으되 그 뒤를 뒷받침할 고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독고와 소수의 고수들만으로 사천에 운집한 명문거파, 아미, 청성, 운남, 사천당문을 꺾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사천일통하고 천하로 눈을 돌릴 때는 동에는 영호 세가가 남에는 성교(마교)가 자리잡아 연독고를 견제하였다. 그들 중에는 단기로 연독고의 무위를 능가하는 자는 없었으나, 외부에서 천하제일고수인 모용황을 초빙하여 같이 상쇄시키고, 녹수맹 보다 두터운 절정고수층으로 중원 진출을 막았다. 결국 연독고는 분루를 삼키고 내실을 다지는 정책을 펼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나오지 않자, 금보옥은 부용을 부르는 길을 택했다. 금보옥의 의심을 짐작이라도 하듯이 부용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마라천인혈정에 베이면 인성이 잠식당해요."
금보옥은 눈을 깜빡였다. 덕후가 있었더라면 "뇌송송 구멍탁?" 이라고 추임새를 넣었을 것이지만, 금보옥은 차분히 다음 설명을 기다렸다. 부용의 설명에 의하면 마라천인혈정은 영성을 지닌 존재이고, 축적된 마기가 피해자의 몸에 침투하여 잠복한다는 것이었다. 공력과 치유의 문제가 아니라 영력의 문제이기 때문에 쾌유와는 상관없다고 한다. 그리고 일정 잠복 시기가 지나면 심성에 영향을 미쳐 영력의 근원이 되는 마검령을 따르게 되고, 마검령과 가장 가까운 존재, 소유주의 명에 복종하게 된다. 이것은 이론이나 가설이 아니라 실제 극비리에 몇 번 임상실험을 거쳤다. 초기에는 단순한 활강시에 지나지 않지만, 세대가 쌓이고 영성이 진화함에 따라 보통 인간과 다름없게 변했다.
검의 소유주가 명령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그런 검이 어딜....."
듣고난 금보옥은 반신반의하였다. 부용의 말이 사실이라면 강호가 한바탕 뒤집힐 사태였다. 당장 영웅대회에 출전한 무림군웅들에게 상해를 입혀놓고 인질로 삼아서 인성이 잠식될 때까지 냅뒀다가 부려먹으면 신지 일행이 가진 약점은 자연히 해소된다.
-발 밑에 화산을 두고도 몰랐구나.
금보옥은 차가운 한기가 등골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석대숭의 죽음에도 상관세가가 가만히 있기에 저들도 안주하는가 보다, 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증언한대로라면 그들은 단물을 빠는데 맛들려서 탱자탱자 논 것이 아니라 마라천인혈정의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보는게 옳았다. 마라천인혈정이 완성되고, 위력이 사실대로라면 능히 천하에 도전해 볼만했다.
"약점은 없는 거니?"
부용은 침묵하였다. 평소의 무표정과 달리 어딘가 불만을 품은 듯 하였다. 그것이 이상하여 금보옥은 채근하지 않고 부용의 상태를 주시하며 넌시히 말했다.
"그런 무기는 위험해. 잘못하면 전 무림에 피를 부를 수 있단다. 폐기해야하는 게 마땅하지."
"....아니에요."
"응?"
"물건이 아니에요."
이번에는 명백히 적의를 드러내며 금보옥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부용은 자신이 걸친 옷을 그 자리에서 하나하나 벗었다. 속곳조차 벗기고 밋밋한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나신이 드러났음에도, 부용은 하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보옥을 보았다. 보옥히 외려 민망해서 시선을 약간 피할 정도였다.
"그 동안 씻겨주고 재워주어서 감사했어요. 필요한 걸 전했으니 이만 물러가볼게요."
공손히 절을 하고 나가려는 소녀에게 금보옥은 재빨리 달려가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자신이 의자에 걸친 장포를 집어 부용의 나신을 가렸다.
"잠깐, 내가 너무 성급하게 이야기했구나. 하지만 너를 아직 잘 모르니 너그러히 이해주렴. 서로 어떤 사이인지 들려줄 수 있겠니?"
금보옥의 손길에 이끌려 부용은 침상가로 앉았다. 멍하니 보옥을 보던 부용은 그녀의 온화한 얼굴을 보고 한참 주저하더니 띄엄띄엄 이야기를 하였다.
모든 것은 동영에서 건너온 한 자루의 마도에 비롯되었다. 희대의 도공이 혼을 불어 오직 강자만을 추구하기 위해 만든 무기가 있었다. 전란의 시대에 그 검은 수많은 주인을 거치며 적의 살를 찢고 피를 탐하며 뼈를 부셨다. 그 결과, 수많은 무사들의 혼과 백이 검에 켜켜히 스며들게 되었다. 복주에 일어선 상관세가는 주로 감합무역에 선을 대 이권을 얻고 있었다.
우연히 왜인에게 검을 소유하게 된 상관 세가의 가주는 주변의 십패들을 찍어누를 힘, 절정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영성을 지닌 마병을 얻었으니 심마에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준이리라. 비극의 시초는 상관 전가주가 배교의 비술 중 하나를 우연히 보유하고 있던 것이다.
옛 가주는 여기서 끔찍한 발상의 전환을 하였다. 섭혼술이 사람의 마음을 현혹할 수 있다면, 영성을 지닌 존재도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거기에 영성도 강제적으로 진화시켜 하나의 자아를 지닌 검으로 재탄생시킨다면? 사물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마라천인혈정의 탄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절세의 신병이기를 탄생시킨다해도, 남의 손에게 빼앗기면 무용지물이다. 옛 가주는 마검령을 다룰 수 있는 인물이 오직 상관세가의 피를 이은 자이길 바랬다. 그래서 두 가지 특단의 조치를 더했다. 바로 아이를 품는 존재가 어머니이듯, 소녀의 혼과 정을 지속적으로 마라천일형정에 묶는 것. 그리고 피의 구속력을 더하기 위해 근친 교배를 하는 것.
상관세가에 서녀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재색을 겸비한 여인 하나를 골라 시행하였다. 옛 가주는 가신들의 윤리적 반발을 무마히기 위해 연회석에서 원로들을 초청하여 한창 취한 틈에 미혼약을 먹여 강제로 집단 윤간을 지시하였던 것이다.
금보옥의 입에서 의미모를 신음이 흘러나왔다. 온화한 표정은 사라지고,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하니 부용을 바라볼 뿐이었다. 상식 자체가 괴리되는 얼굴에도 부용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히 이어갔다.
그렇게 해서 공범이 된 원로들은 수치로 침묵하고 서녀는 유폐된 채 미쳐버렸지만, 옛 가주의 뜻대로 계집아이를 낳는데는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 딸은 똑같은 과정을 겪어 다시 자식을 잉태하였다. 남자는 필요없기에 아들이면 산모의 눈 앞에 질식사시켜버리고 특수 처방을 강화하여 딸로 잉태시켰다. 이렇게 태어난 검녀들은 마라천인혈정에게 정혈을 흡수당하고 근친교배로 인한 조기출산으로 무리를 하였기에 대부분 단명하였다.
"그만! 그만해!"
금보옥이 주먹을 꽉 쥐며 소리질렀다. 그저 지나가는 경관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부용은 초연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한참을 흐득흐득 신음을 누르던 금보옥은 부용의 기색을 접하고 저도 모르게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면 더 없애버야 마땅하잖니. 네 가문도 그렇지만, 애당초 그 검이 발단이 된 것 아니야."
"제 아이에요."
부용은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그것이,
"태어날 아이 그 자체에 무슨 죄가 있나요?"
금보옥의 눈에는 소름끼치도록 비정상으로 비쳤다. 굳어있는 금보옥을 보며 부용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위협이 되지 않는 작은 몸집에도 금보옥은 닿으면 위험해지는 것처럼 화들짝 놀라 한발짝 물러섰다.
"저는 그 아이가 다 자라서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 볼지 정말 궁금해요."
"....그래서?"
"그냥 궁금한 것일 뿐이에요. 세상을 피로 물들을 존재로 태어났기에 세상을 증오할지, 아니면 세가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대로 정말 저주받은 존재로서 태어난 것을 환희로 여길지...."
정말 피가 좋아서 상관 세가의 마검으로 천하를 피로 물들여도 상관없고, 스스로 존재를 저주하여 자멸을 선택해도 부용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가 유일하게 미련을 가지는 것이라면, 어미로서 바라는 하나, 자식에게 그 길을 택함에 있어 선택권이 제대로 한 번이라도 주어졌으면 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세가의 제물로 태어나 그 소명을 다할 자신과는 다르게.
부용의 고백에 돌아온 답은 이마에 따끔한 타격이었다. 금보옥이 알밤을 먹인 것이었다. 부용의 어른스런 표정이 무너지고 이마를 감싸쥔 채 끙끙 거렸다.
"얘가 정말 못하는 소리가 없어!"
금보옥은 성난 목소리로 꾸짖더니 짐짓 발을 쾅! 소리 나도록 굴렀다.
"그 전에 상관 세가는 내가 몰락 시킬 것이다. 그런 미친 가문 따위는 잊어버려! 그리고 불길한 검을 자식으로 여길 것이면 진짜 아이부터 낳아보고 그런 소릴 하렴."
부용은 금보옥의 외침에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이 정도까지 이야기하면 자신을 혐오하거나 경멸하는 것이 태반이었다. 가주와 원로가 죄를 지었지만, 그것의 원인은 마라천인혈정과 검녀들이 아니겠는가? 마라천인혈정이 있었고, 마침 서녀가 존재했던 것이 죄악의 근원이었다. 사련으로 태어난 자신 역시 상종 못할 것이었다. 세가 사람들이 은연중에 그렇게 취급하는 것을 부용은 한 치의 의문도 가지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눈 앞의 여인은 마라천인혈정과 상관 세가를 잘못 되었다고 규탄하였다. 조금만 더 일찍 밖으로 나와볼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부용은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네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신지 때문이니?"
금보옥은 살심을 제어하지 않으며 물었다. 부용이 그런 처지에 있을거라면 구중심처에 엄중하게 유폐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이렇게 먼 심가장까지 자의로 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금보옥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상관 신지는 가문을 곁도는 자신의 처지에 깊은 불만을 가졌고, 부용과 근친상간한 것에 강한 반발을 가졌다. 심성이 비뚤어진 지라 근친에 대한 금기를 깨는 호기심은 없지는 않았으나, 그 뒤로 세가의 인물들이 자신을 더욱 벌레 취급하는 것에 상처를 받고 급기야는 증오를 품었다. 그들은 자신을 종마 이상 보지 않은 것이었다.
성질 같아서는 다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일신의 무공과 지모만 가지고는 세가 전체와 도저히 미치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아는 신지는 마라천인혈정의 비밀을 캐내고, 은밀히 지지자를 모으며 기다렸다가 가주가 폐관수련에 들어간 틈을 타 일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번 심가장 침입과 영웅대회 개최를 꾸민 것이었다.
"상공과 주혜의 원수뿐만은 아니구나. 결코 살려둬서는 안되겠어."
어느새 풀려있던 주먹을 꽉 쥐며 한층 결의를 다지는 금보옥을 보며 부용은 문득 파란이 많은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금보옥의 각오가 있은 뒤 이틀 후, 무정한 시간은 각자의 상념을 품은 배우들을 영웅대회의 무대가 8강전으로 끌어모았다.
드넓은 비무대 위로 16인이 올라서고 있었다. 한 명씩 호명 될 때마다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수 백명이 도전한 영웅대회의 진출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어서 비무대 위쪽에 있는 단상에 여러 사람들이 모습을 보였다. 장주 심우진과 공증인들이었다.
"와아아아!"
관중석에서 어? 어? 하는 소리가 나오다가, 금새 힘찬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왜냐하면 기존에 보던 모습과 달리 심우진의 곁에 면사여인이 있었는데, 소주제일미녀라는 심주혜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이목을 가리고 있어도 갸날픈 교구와 작고 하얀 손은 혈기방장한 사내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남았다. 비무대에 오른 16인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모두 기대와 열망에 들뜬 눈으로 심주혜를 보고 있었다. 단 한 사람 금보옥을 제외하고는.
금보옥은 심주혜의 표정을 읽어보려다가 너무 먼데다가 의심받을 우려가 있어 대신 그녀의 품에 들린 한 자루의 검에 주목했다.
-저것이 마라천인혈정...
가슴 한 구석이 아려왔다. 상공의 목숨을 앗아간 저주받은 마병이었다. 그것을 심주혜가 들고 있다는 것은 그녀 역시 제압당하고 있다는 반증이리라. 진짜 부친을 살해한 검을 딸인 그녀가 태연히 쥐고 있을리는 없을테니까. 금보옥이 아는 심주혜는 몸은 약해도 외압에 부러졌으면 부러졌지 꺾일 성격이 아니었다.
조용히 눈을 감다 뜨는 금보옥의 귓가에 하승구의 축사가 시작되었다.
"여기까지 오신 참가자 여러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신 강호 동도들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 덕분에 영웅대회는 대성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의례적인 입발림에 금보옥은 어쩐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죽을 지도 모르고 모여드는 먹잇감을 정중히 조롱하려는 것 같았다. 군중들과 참가자들은 그저 하승구의 말에 환호작약하거나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들은 비무대 밖, 관중석에서 은밀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여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저희 측에서도 특별히 한 가지 보물을 공개할까 합니다. 원래는 결승자에게만 보여줘야 마땅하겠으나 장주님께서 분발하라는 의미에서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하승구의 말이 끝나자 면사여인, 심주혜가 한 발 앞으로 나와 품에 안은 검을 들어보였다. 이 순간을 기다리던 금보옥은 전면으로 나섰다. 사뿐한 걸음걸이였으나 매 걸음마다 진각이라도 실었는지 바닥이 쿵쿵 울리며 청석이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관중의 시선이 금보옥에게 집중되었다.
하승구는 금보옥의 심창치 않은 기세에 움찔하면서도 진행을 방해한 금보옥을 못마땅한 듯 바라보았다.
"소저는 명월나찰이 아니시오?"
"공개하기 전에 한 가지 해명해야할 것이 있다."
다짜고자 반말을 한 금보옥은 심우진을 가리켰다.
"의숙님, 소녀는 명월이 아니라 보옥입니다. 긴한 말이 있으니 잠깐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가, 감히 존장이 계신 자리에서 이 무슨 무례요!"
하승구가 성을 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숨기지 못한 당혹감이 드러나 있었다. 처음부터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금보옥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려오라는 것도 아니고, 직접 찾아뵙게 올라가겠다고 했다. 그것도 안된다니 무언가 캥기는 것이 있는 모양이구나?"
금보옥의 반문에 하승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둘의 대화에 관중들은 일이 묘하게 돌아가는 것을 하나 둘 깨닫고는 웅성거렸다. 금보옥은 음성에 내공을 돋워 주변이 짜랑짜랑하게 울리도록 하였다.
"얼마 전에 대상련의 소련주인 내 앞으로 한 서신을 받았다. 심가장이 적도들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그들이 영웅대회를 통해 모종의 혈사를 꾸민다는 소리였지. 믿기지 않아서 암중으로 탐사해보니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너희들은 상관 세가와 무슨 관계냐?"
금보옥의 말은 비무대의 출전자들 뿐만 아니라 좌중에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대상련의 소련주가 직접 참가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거니와 심가장이 적도에 의해 은밀히 점령되었다니.
"헛소리 마시오!"
하승구가 발악적으로 외쳤다. 그러나 금보옥의 태도는 여전히 침착했다. 단지 추측성 정보 만이라면 이토록 확신에 찬 자세로 나가지 못할 터이지만, 덕후가 전해준 정보들은 스타에 맵핵을 쓴 것만큼 확실했다. 더군다나 이미 부용이 곁에 있다는 시점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한 상태였다.
"아아, 그만 여기까지...."
공증인으로 서 있던 공자 중 하나가 나른한 표정으로 하승구를 재치며 심주혜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손잡이를 잡고 검신을 하늘 높이 들었다. 그 순간, 구름이 태양을 가렸다. 갑작스런 천지조화에 군중들이 웅성거리는 순간, 검신에서 웅웅 거리는 검명이 발작적으로 울렸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
혼백을 찢는 듯한 처절한 피빛 호곡성에 중인들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그 순간 16인의 비무자들 중에서 한명의 신형이 땅에 푹 꺼지듯 사라지더니 옆의 상대를 공격했다.
"크악!"
비무대 가장 구석에 있던 참가자가 가슴에 깊은 자상을 입어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왜...어째서?"
그 옆에 있던 자는 놀라 무기를 찾았으나 역시 옆구리에 칼침을 맞고 똑같이 뒹굴었다. 그리고 나머지 참가자가 즉각 무기를 뽑아 대응할 태세를 갖출 때는, 이미 두 명의 참가자가 유명을 달리한 상태였다. 기습한 자는 만악패도 용악천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심우진 곁에 어두운 안색으로 있던 산윤길이 놀라 외쳤다. 비무대회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눈치챘지만, 이렇게 대놓고 나설 줄은 몰랐던 것이다.
"킥킥킥.....거짓 연극은 여기까지다. 진짜 축제를 시작하자구."
검을 쥐고 있던 공자의 입에서 음산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외문의 담벼락 사이에 일단의 복면인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관중들 사이로 뛰어들어 무차별로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외부로 드러난 그들의 눈에는 초점이 흐려진 채 은은한 혈광을 품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아악!"
사방에 피와 죽음이 비산하기 시작하자 얼이 빠져있던 관중석은 뒤늦게 공황 상태에 빠졌다. 무림인 뿐만 아니라 무림인들의 실력을 보고자 참전한 일반인도 있었기에 그 혼란은 배가 되었다. 뛰어든 복면인들은 몇 번 칼 질로 공포를 극대화 시키더니, 품에서 가루약을 무차별로 투척 하였다. 곧 녹색 연기가 관중을 매웠다.
"독연이다! 다들 호흡을 멈춰라!"
독에 지식이 있는 누군가가 발작적으로 경고했다. 중인들 사이에는 허리를 굽히며 토악질을 하는 사람, 땅에 쓰러저 혀를 빼물고 게거품을 품는 사람이 나타났다. 내공도 없는 일반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일 작정이냐?"
금보옥이 분노를 담아 외쳤다. 복면인들을 조종하며 아비규환의 참상을 바라보던 신지의 얼굴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인간의 얼굴이 아니라, 사람의 죽음과 절망을 보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악마의 표정이었다.
"아아, 그래. 죽이고 또 죽여서 시체의 산을 만들 작정이다."
두 눈 가득 푸른 광망을 쏟아내는 마물을 향해 금보옥의 신형이 움직였다. 극성의 운룡보를 밟아가며 십성의 공력이 담긴 질풍권이 펼쳐졌다. 그러나 단상에 오르기 전 누군가가 대도를 휘두르며 차단했다.
텅!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금보옥의 신형이 뒤로 주르륵 밀려나갔다. 끼어든 장본인, 용악천도 역시 상대의 권경을 해소하지 못해 세 발 짝 물러섰다. 적수공권을 중도로 상대하였음에도, 방어에 약간 손해를 본 것이었다.
"이토록 강한 년이 있을 줄이야, 너의 피라면 분명 마라천인혈정에 좋은 제물이 되어줄테지."
"누구 마음대로?"
"일단 널 우리들의 노예부터 만들어주마."
용악천이 도를 움켜잡는 순간 금보옥은 재빨리 운룡보를 전개하여 신형을 이동시켰다. 용악천의 도는 방금 금보옥이 있던 자리를 베어가고 있었다. 용가의 비전인 단섬쾌류였다. 이형환위에 가까운 회피가 아니었더라면 꼼짝없이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으리라.
-마라천인혈정은 자신에게 베인 자들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이 있어요.
부용의 말이 떠올랐다. 금보옥은 이를 물었다. 복면인들이 저 마검에 의해 조종받고 있다는 것은 불문가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검이 완성되지 않았고, 신지는 검을 완전히 다스리지 못한 듯 한 호흡마다 검을 쥐었다 떼었다 반복했다. 그것이 금보옥에게 희망을 주고 있었다.
"차합!"
금보옥의 손이 섬전 같이 움직이며 아홉 권영을 쏟아냈다. 삼연구절권이었다. 그러나 그 공격은 용악천의 도가 일직전으로 그어지자, 실 끊긴 구슬처럼 맥없이 흩어졌다. 용악천의 입에 비웃음이 떠오르는 찰나, 용악천은 자신의 가슴에 엄습하는 권경을 느끼고 기겁했다.
-쾅!
순간적으로 가슴이 함몰되는 고통을 맛보며 용악천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쳐 3장 뒤로 날라가 지면에 처박혔다. 어떻게든 일어섰으나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대포로 한방 맞는 충격이었다. 삼연구절권 이후에 진공권이 작렬한 것이다. 기의 밀도를 순간적으로 주먹에 응집시켜 주먹을 중심으로 일종의 공진 상태로 만든다. 그리고 타격점에서 터뜨리는 수법으로 열풍권에서 발동 시간이 가장 길지만, 그만큼 파괴력이 강했다.
가슴이 함몰된 채 피를 게워내는 용악천을 일별하더니 금보옥은 단상으로 뛰어들었다.
"크....이 정도까지 하다니 보통 계집이 아니군."
마라천인혈정에 의식을 집중하던 신지는 서둘러 끊고 마라천인혈정을 휘둘렀다. 민활하게 움직이던 복면인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산발적으로 변했다. 그와 더불어 관중석의 세 방향에서 똑같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삼재연환진!"
금보옥의 귀에 낯익은 음성들은 초제근과 강윤식, 그리고 황보웅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자리를 중심으로 미리 고용한 무사들을 지휘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복면인의 조직적인 공격이 느슨해진 틈을 타 사전에 약속한대로 삼재연환진의 진형을 구축했다. 원래 복면인들이 공격했을 때부터 진형을 갖추려했으나 워낙 전격이고 주변의 혼란 때문에 못하다가, 신지가 보옥의 상대를 위해 위임 상태로 둔 틈을 타 재빨리 진형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세 사람이 품자를 기본 형태를 만들면 그 곁에 두 사람을 붙여 품자가 곂치도록 한다. 그리고 다시 두 사람을 이어 무한이 이어지는 것이 가능했다. 관중석에 있던 이들 중 무인들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삼재연환진에 속속히 합류했다. 그리하여 세 축을 중심으로 삼재연환진이 사슬과 같이 형성되며 복면인들에 대항하는 저지선들을 구축하고 있었다.
원래 무림인들은 진법과 거의 상관없는 족속들이었다. 그러나 십패의 시기를 맞이하여 집단전이 빈번해지고, 그러다보니 일자무식의 낭인들 조차 몇 번 칼밥을 먹다보면, 기본적인 몇 가지 진형은 체득하게 된다. 삼재연환진은 피아가 마구 뒤섞인 혼전에 빠졌을 때 특히 유용했는데, 아군을 일자진 형상으로 연결하면서 적들을 채로 거르듯 앞뒤로 나누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뒤에 다른 진형으로 전환하든가 아니면 포위망을 재빨리 탈출하지 않으면 앞뒤로 협공을 받게 된다는 난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복면인들이 전부 밖에서 안으로 공격하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밑으로는 민간인들을 닥치는데로 뒤로 잡아 빼고 전면은 복면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만약 습격이 비무대에 있었더라면 그 위치는 정반대가 되었을 것이다.
혼란은 더 이상 커지지 않고 세 곳의 저항점을 중심으로 교착되었다. 마라천인혈정으로 금보옥의 선공을 차단한 신지는 일이 재미없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눈쌀을 찌푸렸다.
단상에 올라선 금보옥은 상황을 가늠했다. 여기서 신지 일당이 뛰쳐나가 배후를 공격을 한다면 세 사람이 임시방편으로 일군 저지선은 모래성처럼 스러질 것이다. 그 전에 신지 일당을 저지해야 했다.
"장주님 어찌 되었느냐?"
"저기 계시지 않느냐?"
신지가 일말의 존경심도 없는 건방진 태도로 검끝으로 심우진을 가리켰다. 그 장주님은 금보옥의 옆으로 음한장을 날리는 중이었다. 급히 운룡보를 밟으며 팽이처럼 피하자 이번에는 배후에서 금보옥의 등을 노리고 쌍겸이 번뜩였다. 그러나 쌍겸의 궤적은 갑자기 근접한 팽이에서 튀어나온 팔꿈치와 무릎으로 뿌리부분-손목과 다리-을 반격당하자 중도에 거두어졌다. 금보옥은 착지하여 사방을 휙 둘러보았다. 신지와 지목민, 하승구가 품자로 에워싸고 있는 형세였다.
금보옥의 아미가 휘어졌다.
"상관 씨의 종자들은 왜구들과 너무 붙어사는 바람에 한결같이 예의를 모른다던데 그 말이 맞는 모양이구나."
신지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
"나는 상관 씨가 아니다."
"저런, 그 막나가는 세가에서조차 폐적 당했나보군? 얼마나 망나나 짓을 하였으면....하긴 지금 상황을 보면 알만하다만."
"후후, 입심도 만만치 않군. 안그래도 심가장의 일이 마무리되면 네 년을 접수하러 갈 참이었다."
그 무례한 말투에 금보옥의 눈에 새파란 살기가 쏟아졌다.
"넌 오늘 여기서 죽는다."
심우진 숙부를 죽이고 주혜 동생을 욕보이다 못해 대상련을 넘보는 상관 신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상공의 죽음에 직접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간단명쾌해서 좋군. 하지만 그 전에 네 동생년의 목숨이 위험해질 거 같은데?"
신지의 말에 금보옥은 저도 모르게 심주혜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움직였는지 만악패도 용악천이 칼날을 심주혜의 목에 대고 있었다. 입으로 쿨럭 피를 토하고 있었지만, 닭모가지 비틀 힘은 차고 넘치는 모양이다. 거기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심주혜의 목이 잘려나가리라.
"윽!"
꽉 쥔 주먹에 힘이 모이지 않았다. 갈등하는 금보옥을 보며 신지는 저열한 웃음을 머금었다. 비열한 짓거리는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았다. 특히 그 행위로 인해 상대방이 고통을 받거나 갈등을 빗어내는 모습은 신지로 하여금 도착증세를 보이게 만들었다. 신지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이대로 금보옥을 잡아다 사지를 묶고 능욕하고 싶어졌다.
그런 기색을 못 읽을 금보옥이 아니었다.
"조금 있으면 상련의 무사들이 몰려 올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태연한 척 할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
금보옥의 말에 포위한 이들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신지가 의혹의 시선을 보내오자 산윤길은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거짓말이오! 맹세코 대상련 무사들이 소주로 오는 움직임은 없었소!"
산윤길의 외침은 진실이었다. 애당초 이번 일은 금보옥이 사태 이후를 생각하여 일절의 지원요청 없이 벌인 일이었으니까. 단순히 격장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니 동향을 감지당할 일이 없었다.
"기습할 것이면 애당초 간자가 있음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법이지."
그런 상식도 모르냐는 말에 산윤길은 답변할 길이 없었다.
"몰랐든 묵인했든 중요하지 않아. 네가 하등 쓸모가 없다는 게 중요하지."
신지의 손이 품을 뒤졌다 나오는 순간, 산윤길은 이마가 뜨끔한 것을 느꼈다. 그리고 눈동자가 인중을 향해 쏠리더니 실끊어진 인형처럼 땅위에 철푸덕 쓰러졌다. 심가장을 배신하면서 끝가지 자기보전하려는 자의 말로치고는 허무한 최후였다.
"너도 인질로 잡으면 되겠지. 양 손에 꽃은 남자의 낭만이 아닌가."
신지는 활짝 웃었다.
"내 앞에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딱 하나 뿐이었지. 최소한 네 놈은 아니야."
금보옥도 따라 웃었다. 신지 일행은 자신을 사로잡아 전세를 역전시킬 의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금보옥 자신은 신지 일행을 죽여버리면 된다. 그렇게 덕후에 대한 위령제 삼아 그를 사랑했던 과거의 자신도 함께 묻을 작정이었다. 그 뒤는 패도를 추구하는 마녀만 남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