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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厚の野望 18

18


강남의 초여름이 불러오는 나른함과 비무대회의 관심으로 소주 일대는 호황이었다. 시간은 흘러 8강전으로 좁혀지고 대부분의 진출자 면면은 무림에 관심있는 호사가라면 저마다 고개를 끄떡일만한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개 중에는 신진고수도 있어 만악참도 용악천과 명월나찰로 일컬어지는 금보옥도 그 안에 끼어있었다.


수라열풍권을 전수 받은 뒤, 무공의 완성과 비무에 신경쓰느라 금보옥은 출전 목적인 심가장의 의중을 떠볼 새가 없었다. 거기에 덕후의 중재로 천풍검협 일행과 교분도 더하고 있어 짬조차 생기지 않았다. 자연히 그 역할은 덕후가 맡게 되었고 암암리에 의도했던 바였다.


첫 술자리가 파한 다음 날, 덕후는 셋을 한적한 정자에 초빙하여 금보옥의 정체를 까발렸던 것이다. 숙취에 시달리는 썩은 동태눈들은 금보옥이 대상련의 가주대리임을 안 순간 돌변했다. 덕후의 계획을 들었을 때, 금보옥이 가장 걱정했던, 여장남자가 아니라는 진상은 사소한 것으로 얼렁뚱땅 마무리 되었다. 머리 아프고 메슥거리는 위장을 달래면서 어떻게든 자기 PR하려는 모습은 정말 처절하다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였다.


예절과 사람을 가리는 편인 금보옥도 그 광경에는 쿡쿡 웃어버렸고, 덕후의 중재로 일단은 빈객 대우로 받아들였다. 금보옥의 사연을 추려서 전한 뒤로 일행의 역할은 정해졌다. 가장 무공이 뛰어난 강윤식은 금보옥의 비무자가 되어주었고, 초제근은 덕후를 따라 심가장의 정보수집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소식이 있소."


후원의 뜰에서 금보옥과 강윤식이 일과처럼 대련을 마치고 쉬고 있을 때, 덕후와 초제근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가왔다. 물수건으로 저마다 피부의 열기를 식히던 금보옥과 강윤식이 고개를 들었다.


"황철웅 이 친구는 어딜 간게야?"


초제근이 보이지 않는 한 명을 찾자 강윤식이 웃었다.


"주지육림을 즐기러 갔다네. 밤에만 하는 것은 질려서 대낮부터 주왕의 기분을 느껴보겠다는 군."
"쯧쯧, 그러다 정혈이 고갈되면 어쩌려고...."
"평소에 양기가 넘친다고 떵떵 거린 놈 아닌가. 지치면 알아서 기어나오겠지. 헌데 자네는 그게 영 못마땅한 것 같네만?"
"남들은 일하는데 저 혼자 놀고 있음 누구나 그렇지."
"사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놀아볼까 하고 온거지, 일 거리가 있어서 온건 아니잖는가."


강윤식의 지적에 초제근은 그도 맞는 말이라는 듯 인상을 조금 폈다. 가문이나 일족 내에서는 아무런 전진도 없어 기분전환 겸으로 뛰쳐나온 것이 동기였다. 덕후와 보옥과 만난 후 이들에게서 입신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였기에 따라다니는 것일 뿐, 본래 목적대로 노세 타령에 빠진 황철웅의 입장에서 보자면 둘이야 말로 배신자(?)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타박을 주는 데는 다 내막이 있다.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 덕후도 질세라 호응하였다.


"놀 땐 노는 게 좋지 않겠소?"


세 남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보옥에게 향해 있었는데, 보옥은 셋의 눈치를 파악하고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미소지었다. 사람의 행동이 천편일률적일 수 없다는 것은 숙지하고 있었고, 덕후의 기행으로 적지 않은 심적 변화를 겪었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무언의 배려를 받은 것을 확인한 강윤식은 한숨 놓으며 물었다.


"그보다 희소식은 뭔가?"
재미가 꼭 즐거운 소식은 아니지. 이번 8강전에는 격려 차원에서 심가장에서 보유한 신병이기를 대중 앞에 공개한다는군."


금보옥은 덤덤한 반면, 강윤식의 눈이 반짝였다. 검을 쓰는 그로서는 신병이란 바라마지 않는 아이템인 것이다.


"심가장이라면 명검들을 적지 않게 소장하겠군."


와신상담으로 유명한 오월 지방에는 전란으로 유명한 명검들을 탄생하였으니 간장, 막야, 어장, 담로 등등 이었다. 이들은 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희대의 명검으로 화자되곤 하였다. 덕후 본인은 청동기-철기 시대의 흐름에 대한 내력을 아는데다가 전생에 여행 차 중국에 갔을 때 박물관에 전시된 검총의 유물들을 본 적이 있어 실세를 어느정도 간파하고 있었다. 시대를 초월하는 야장과 공예 기술에 감탄을 하기는 했지만 그 뿐이었다. 


-모르지, 여기서는 정말로 강철도 누르는 명검이 있을지도.


전생의 경험에 의한 판단을 잠깐 보류해두면서 덕후는 오면서 취합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금보옥에게 운을 띄웠다.


"신병이기는 강호인들의 표적이 되기 쉽다오."


화포의 등장 이전에는 냉병기가 전장의 우세를 가늠하는 요인 중에 하나였다. 물론 명나라 시기에 오면 화포의 존재가 전사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나, 변방이나 전장에서 쓰일 뿐이다.(영락제의 막북침공에 거둔 성과에는 화포가 절대적 역할을 하였다.) 민간에는 엄격히 통제되어 있는데다가 무공을 배운 강호인의 관심사는 화포보다는 절세의 신병에 더 쏠려 있었다.


"심가장에 도둑이 들었다 해도 무슨 병장기를 노렸다는 소식은 없어요."


심우진의 취미는 다기류이지 도검류는 아니다. 금보옥의 부정에 덕후는 확신을 얻었다.


"그러면 이번에 보검을 내보이는데는 내막이 있겠군."
"명검을 접하면 의욕이 불타오르겠지요. 사기를 고무시키는 데 최적 아니겠습니까."


초제근은 평범하게 견해를 밝혔다. 덕후는 잠시간 생각하는 듯 하다가 금보옥에게 부탁을 했다.


"심주혜 소저에게 줄 서신 한통을 주시오. 직접 내막을 알아보고 오리다."
"쓰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덕후가 직접 침투하겠다는 뜻을 간파한 금보옥은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괜찮겠느냐는 의미였다. 여태 정보를 캐온다고 하였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소주에 있는 하오문과 접선하여  심가장의 규모와 내부 구조 등 소소한 것들만 파악해둔 것이 전부였다. 내부에게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여전히 파악할 길이 없었다. 미리 심어둔 연고자를 통해 알아 볼 수 있지만, 하오문이 상층부 인사와 내밀한 관계를 맺을 일도 없고, 금보옥은 상층부 인사들과 접선하는 즉시 발각될 가능성이 높다. 심가장에서 자신이 환영받는 것은 심주혜의 친구이기 때문이지 금보옥 본인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도 고려해야한다. 사태가 명료해질 때까지 꼬리 보일라 꼭꼭 숨어라~ 모드인 둘에게는 처음부터 운신의 폭이 좁았다.


무협지에서는 의혹이 났다하면 휙휙 담넘어 침투를 하는데 현실적으로 디메리트가 크다. 만에 하나 발각되면 엄한 불신만 초래하고, 요행히 빠져나갔다해도 경비가 한층 강화되어 이후에 장애를 안게 된다. 물론 덕후의 능력으로는 쥐도 모르게 잠입하여 심주혜의 속곳을 스틸해올 수 있지만 주변에 인식시킨 자신의 능력치에 오버된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찔끔찔끔 실력을 선보이다가 나중에는 마각을 다 드러내보인 주인공(덕후 아님)들이 어디 한 둘이던가.


"더는 기다릴 수 없소. 본색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면 너무 늦고, 단순히 의혹이라면 이쯤에서 확실히 정리해둘 필요가 있소. 어느 경우든 일이 잘못되더라도 내 선에서 마무리 짓겠소."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에 금보옥도 물릴 수 없었다. 무엇보다 얼마 전 자신에 그의 본심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상공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저도 같이 지겠습니다."
".....그러면 내 어깨도 다소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군."


덕후는 싱긋 웃으며 금보옥의 결단을 반겼다. 그 뒤로 넷은 반나절 동안 세부적인 계획을 가다듬었다. 계획을 짜는 동안 덕후는 자신이 잡힐 경우도 상정하였다. 이 때문에 금보옥은 우려하며 말렸지만, 본인의 의지가 워낙 단호하여 끝까지 만류하지 못했다. 금보옥의 서신을 받아든 덕후는 조용히 밤이 올때까지 기다렸다.


긴 황혼이 지고 어둠의 장막이 드리워질 무렵 덕후는 행동을 개시하였다. 불야성을 이루는 소주의 지상 위로 박쥐와 같은 경신술로 담장을 타고 전각 사이로 이동하였다. 심가장으로 향하는 방향에 위치한 골목의 담장을 넘을 무렵 지상에 희끄무레한 것이 비쳤다.


어둠속에서 무언가 동체 같은 것이 보인 것이다.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일말의 호기심을 느낀 덕후는 희끄무레한 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리고 복면 속에 가려진 인상을 찌푸렸다. 유령 같이 하얀 것의 정체는 한 소녀의 발가벗겨진 몸이었다. 소녀의 몸은 잡동사니 위에서 한 사내의 유린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평소라면 "거기까지." 라는 전용 멘트를 날리며 다된 밥을 강탈(?)하겠지만, 덕후는 골목안에 벌어진 풍경에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유린당하는 소녀의 모습에서 문득 자신이 행할 일의 결과를 보는 것 같았다.


금보옥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덕후가 심가장으로 잠입하려는 목적이 따로 있었다. 공개한다는 신병이기의 정체에 심증이 가는 것이 있어 두 눈으로 확인할 요량이고, 심주혜의 죽음을 유도하는 것이다. 직접 살해하는 것은 아니고, 의문의 세력이 인질로 잡고 있다면 심우진과 묶어서 차도살인을 시킬 작정이었다.


-한 산에 두 호랑이는 있을 필요가 없지....


천하문의 경우에는 염미홍이라는 명분과 소월하라는 패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공생할 필요성이 있었지만 대상련은 아니었다. 금보옥에게 누락시킨 정보가 있었다. 금대숭과 금보옥이 없더라면, 당장 심우진이 차기 대상련주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명분과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금가장이 군벌과 황실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면 석가장은 강남의 신사층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신사란 관료 경력자를 일컫는 말로 명청 시대에 지방행정의 공백을 매워주는 계층이었다. 이들은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고 지방의 여론을 조정하는 순기능이 없지 않으나, 밀무역과 담합으로 막대한 이득을 취하는 등 사익을 추구하는 역기능도 만만치 않았다.


만약 자신이 심주혜를 내자로 맞이한다면 신사들과 유력자들은 그녀를 통해 뺀질나게 자신에게 어떻게든 영향력을 끼치려 들것이다. 심주혜가 조강지처로 남편을 하늘같이 본다해도 후사를 본 뒤에 일문을 형성할 자격을 지니게 된다면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말년의 자신 또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젊었을 때 잘 나가다가 말년에 패가망신 당한 이들이 한 둘이던가.


-그럴 바에는 제거해버리고, 금보옥에게 여과 흡수시키는 게 좋겠지.


강호출두한 이래로 즉홍적이고 나태하게 굴고 있으나 황궁에서 20년 가까이 살아온 덕후의 머리는 냉혹할 정도로 수를 짜내고 있었다.


단순한 장식물이라면 여자는 많을수록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에게 있어 강남의 절세가인 만 명을 모은 것보다는 대상련과 강남의 기반을 확실히 쥔 금보옥 하나가 더 소중했다. 그래서 심주혜를 소개받았을 때 관심없는 시늉을 하였고, 그녀와 상면할 의욕을 내비치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제거해버릴 존재라면, 안면 튼 사람을 처리해버리는 것보다 생판 남남인 제 3자일 때 처리하는 것이 만에 하나 발각되더라도 후유증이 덜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눈 앞의 소녀가 유린당하는 광경을 목도하자 연민과 함께 계획에 대한 회의가 드는 것은 어찌된 연유일까. 덕후는 문득 소녀와 눈길을 마주쳤다. 큰 눈망울은 혼이 빠진 듯 멍하니 달빛을 등진 덕후를 보고 있었다. 소녀의 입장에서는 유령과 같이 나타났음에도 놀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은 아닌 것 같고.


강간 당하는 것 치고는 소녀의 분위기가 묘하게 침착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첫 강간이라면 수치와 분노 다음에 자포자기성 비애를 드러낼 터인데 어린 소녀에게는 그런 기색조차 없었다. 너무나 힘든 삶에 이어갈 의지조차 보이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덕후는 구원을 바라는 징조조차 없는 소녀를 내다보다가 그냥 갈까 했다.


관심을 끊고 제 갈 길 가려던 덕후는 마지막으로 소녀의 눈망울과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덕후는 주박에 걸린 것처럼 움찔하였다. 소녀의 눈동자는 한없이 맑았다. 한을 간직한 채 눈동자에 비친 덕후를 있는 그대로 투영하였다. 소녀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덕후는 순간적으로 자기혐오를 느끼고 그와 동시에 피해자인 소녀에 대한 살의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어이."
"헉헉헉....어느 개잡종이야? 어르신이 일 치르는거 안보여!"


소녀의 자궁에 정액을 토해내던 사내는 허공에서 들린 방해꾼의 목소리에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목덜미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사색이 되었다.


"고개 돌리면 모가지 뎅강이라능."
"뉘, 뉘신지 모르지만 우, 우리 이거 치우고 이야기하면 안될까?"
"지랄이 염통 옆에서 퍼덕거리는 소리 말라능. 얘 얼마?"
"이, 이 년은 파는게 아닌데."
"쌍, 횽은 당장 붕가붕가 고프다능. 백 냥 줄테니 팔든가 말든가 정하라능."


짤랑거리는 은원보를 코 앞에 내밀자 사내의 몸이 두려움에 떨리면서도 돈에 대한 욕망으로 흔들렸다. 그때 차가운 감촉이 파고들었다.


"당장 그어버리고 데려갈 수 있다능. 횽이 양심은 초큼 남은 놈이라서 이렇게 신사적으로 교섭 하는 거라능."


해괴한 말투며 모가지에 칼을 대는 행동 어디가 신사적이냐? 라고 묻고 싶었으나, 사내는 등 뒤의 존재가 수틀리면 자신을 죽여버릴 수 있음을 인지했다. 파락호로 악과 깡이라면 지지 않을 사내였지만 등 뒤에서 으르렁 거리는 살기는 경험상 진짜였다.


-젠장, 똥 밟았다. 어린 년 속살 맛 좀 보려다가 이런 고수한테 걸리다니...


사내는 멀리서나마 진짜 고수라고 불리는 이들의 실력을 목도한 적이 있었다. 자신과 같은 싸움꾼 백 명을 모아도 상대도 안되는 존재였다.


"헤헤, 나리께서 필요하다면야....헌데 어디다 쓰시려고?"
"채음보양."


순순히 대답해주는 데 의심을 품을 법하건만 사내는 채음보양이라는 말에 순순히 믿어버렸다. 간혹 색마나 음녀 같은 존재들이 상대의 정기를 채음보양/채양보음의 수법으로 갈취하여 사공을 닦는 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헤헤, 그러면 돈이 더 들어갈 것 같은뎁쇼...."
"웃돈을 원한다면 서비스로 채양보양도 대 줄 수 있냐능. 당장 이 자리에다 후장터널 개통식 시작할까봐능?"
"하하하! 아무래도 그 정도까진 필요없을 거 같습니다요!"


중간에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가 들어가 있지만 괴한이 자기 바지춤에 손을 대자 사내는 기겁하였다. 전신이 찌릿해지는 감각과 함께 옷 안쪽이 묵직해지는 것 같은 감각을 맛보았다. 덕후가 수혈을 짚음과 함께 사내의 품에다 백냥을 넣어버린 것이다. 사내는 반 시진 뒤에서야 깨어날 것이었다.


사내를 구석에다 던져버린 덕후는 소녀에게 시선을 향했다. 잡동사니와 쓰레기 위해 드러누운 소녀의 모습이 자세히 보였다. 이제 열 서너살은 되었을까, 약간 밋밋한 가슴에 터럭도 없는 가랑이가 일차 성정도 시작되지 않거나 막 할 무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어나렴."


덕후는 친절함을 가장하며 명령하였다. 소녀의 몸이 움찔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골목의 틈새로 보인 달빛에 보인 소녀의 윤곽에 덕후의 눈빛에 이채가 발했다.


평범한 외모였으나, 허리 언저리까지 내려온 흑발에 가는 팔 다리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아래로 깔린 시선에 희미한 색조가 더해진 입술은 달빛에 바스라질 것 같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허름한 홑옷에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파정의 흔적은 지상으로 추락한 어린 천사을 연상케 하였다.


그러나 소녀를 향한 덕후의 안색은 동정보다는 심술에 가깝게 변했다. 소녀는 옷도 추스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덕후를 보았다.


"사는 게 지겹지? 죽고 싶은 생각이 없나?"


덕후는 사내의 뒷목에 겨누었던 예리한 비수를 소녀의 손에 친절하게 쥐어주었다.


"그걸로 목 옆을 쓱하면 너를 괴롭힌 나쁜 세상이랑 바이바이란다."


덕후는 소녀를 산송장 취급하였다. 무심하였던 소녀도 그것에는 동요를 느꼈는지 반사적으로 등을 돌리뎌던 덕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어....째서.....?"


띄엄띄엄 갈라진 목소리가 소녀로부터 흘러나왔다. 덕후는 소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라, 합리적인 사고라면 이렇게 행동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소녀를 보는 순간, 감정이 먼저 움직였고 시키는대로 따라하다보니 돈을 주고 소녀를 사면서 죽으라고 권유를 하고 있었다.


-부담을 느낀 건가.


덕후의 현생은 일황자로 자라났다.  음모와 중상이 일상처럼 난무하는 복마전에서 가장 큰 표적은 황자였다. 황제는 아무리 병신이라해도 하늘을 대신하는 천자이므로 함부로 음해할 수 없지만 황태자는 다르다.


황태자도 고개들고 볼 수 없는 존재이나 단 하나, 황제의 마음에 안들면 갈아치우면 그만인 존재이다. 유가의 장유유서에 따라 장남이 태자에 오르지만 역사에서 장자가 순탄하게 황제가 된 사례는 의외로 드물었다. 정적들이 황태자를 실각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썼기 때문이다. 의문의 병사나 폐적을 당한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덕후는 단순히 일황자의 자리만 보존한 것이 아니라, 자금성의 사람들에게 일황자란 존재를 살아있는 금기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자신에게 은밀히 접근하거나 탐지하는 이들을 포착, 호오를 가늠한 뒤에 권모술수로 아킬레스 건을 쥐거나 다단계 올가미를 씌워버려 처리해버리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보통 황족의 소문은 관심사라 저자거리에 어느정도 퍼지기 마련인데 일황자에 대해서는 없는 존재마냥 깨끗했다.


뒤틀린 환경에 지낸 만큼 미녀/미소녀에는 하악하악 좋아하지만, 생존과 권력이 걸린 문제라면 상충하지 않고 잘라내버리는 면모도 있었다.


-정 염려가 된다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황궁에서 무수한 암계로 처지해버린 부류들과 달리 심주혜는 덕후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거기에 금보옥이 아끼는 동생이다. 그녀를 제거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몸에 베인 황궁의 생리에 따라서였다. 잠재적인 위협 요소가 있다는 점으로 삭초제근해버릴 이유가 차고 넘친다. 그 결과, 금보옥의 마음을 보다 확실히 얻고, 대상련을 둘로 분산시키는 것보다 하나로 집중시키는 수가 덕후를 움직이도 있었다.


자신이 행하는 암계에 후일 금보옥이 알게 된다면 실망과 증오를 품게 되리라는 것은 감수할 수 있었다. 마음은 아프겠지만 시간이라는 약에 맡겨 희석시키면 그만이다. 그러나 희생당한 심주혜가 방금 소녀와 같은 피해자의 눈을 덕후에게 향한다면 마음이 편지 않을 것 같았다. 역설적이지만 심주혜가 차도살인으로 죽더라도 비교적 양호하게 최후를 맞이하길 바라는 마음은 있었다. 황궁에 자라면서 권모술수로 사람을 조종하고 숙청작업으로 제거하는 과정에는 면역이 되었지만, 쳐죽일 원수가 아닌 이상 상대의 파멸을 보면서 무덤덤하거나 쾌감을 느끼는 도착증세에 이르는 것까진 내키지 않았다.


양자의 모순이 소녀를 목도한 내면 밖으로 돌출되어 구했고, 동시에 죽어주길 바란 것 같았다. 소녀의 질문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분석을 하느라 대답이 한 박자 늦어짐을 안 덕후는 소녀를 보았다.


"너에게 한가지 선택을 줄까."


덕후는 소녀의 뺨에 손을 대었다. 젓살도 다 빠지지 않는 감촉이 느껴졌다. 염미홍처럼 빈민에서 난 것 같지 않은 단아함이 있었다. 사연이 있는 듯했지만 소녀의 과거와 이름에는 흥미가 있어 구한 것이 아니기에 덕후는 관심을 끊었다.


"죽기 싫다면, 네게 불행을 걷어가주고 행복을 선물해주지. 대신 한 사람이 너를 대신하여 엄청난 불행에 빠질 것이야."


자신을 내려보는 덕후를 올려보는 소녀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상제님인가요?"
"그 비슷한 존재려나. 어쩌면 사신에 가까울지도."
"행복이라는 게 뭐에요?"


그건 먹는건가요? 와 동일한 어감으로 소녀는 물었다. 그 물음에는 덕후도 일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건....직접 겪어보면 알게다."


덕후는 행복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떠올리다가 바로 접고 품에서 패찰 하나와 몇 개의 은원보를 꺼내 소녀에게 주었다. 덕왕부로 출입할 수 있는 표식이었다.


"이 길로 남경으로 가서 가장 큰 집으로 찾아가라. 그곳에서 표식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걸랑 남부럽지 않은 대우를 해줄 것이야."


소녀는 한참동안 손에 든 표찰을 보더니 덕후에게 도로 내밀었다.


"필요없어요."
"흠, 여기서 곧장 남경으로 가려면 시간이랑 안전이 문제겠지. 약속된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시련으로 받아들여."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듯 소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덕후의 얼굴에 의아함은 잠깐, 이내 비웃음이 떠올랐다.


"호오, 눈물겨운 희생정신이군. 더 잘 살기 위해서 남의 등처먹는 게 당연한 세상인데."
"저는 불행하지 않는걸요."
"뭐?"
"불행하지 않다구요."


소녀는 또박또박 말했다. 이 소녀는 정말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불행이 일상사였기에 애당초 감이 잡히지 않는다거나. 덕후의 어조가 거칠어졌다.


"이런 골목에서 강간당하는 게 불행한게 아니라고? 오호라, 육보시를 하는 중이었나?"


화를 내거나 울먹일 줄 알았던 소녀는 가만히 덕후를 보기만 하였다. 기묘한 평온을 간직한 듯한 눈동자에 덕후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순간적으로 소녀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품던 덕후는 잠시 후 제풀에 웃었다. 엄한 사람을 붙잡고 대체 뭐하는 짓거리인가.


"넌 아마도 행복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한 조각이라도 맛보면 이 따위 상황은 싫다고 엉엉 울것이야."


말을 하고 나서야 덕후는 자신이 한 사람을 불행으로 빠뜨리려는 반대급부로 한 소녀를 구원하는 기만을 부리려듬을 알았다. 변덕 부리는 것도 한순간이지 계속 구애되면 찌질이가 된다. 심란한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후 덕후는 여상스러운 태도로 소녀의 옷깃을 여며주었다.


"그 표찰은 버리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하렴. 그래도 옷 좀 제대로 여미고 다녀라. 여름 밤이라해도 감기걸린다."


그 것을 끝으로 덕후는 허공으로 신형을 뽑아 석가장 쪽으로 사라졌다. 어둠에 삼켜진 방향을 멍하니 보던 소녀는 손에 쥔 표찰을 물끄러미 보았다.


덕후는 엄한 사람 붙잡고 뻘짓 했다는 마음에 급히 가던 길로 사라졌지만, 남겨진 소녀는 달랐다. 생애 가장 큰 동요를 겪는 중이었다. 탄생조차 하나의 절대적 업을 이룩하기 위해 태어난 운명이었다. 그것에 한 점의 의혹은 없었다. 세상에는 변수라는 것이 있어 이 자리로 끌려나왔지만, 결국은 원했던 결말로 생의 종지부를 찍을 터였다. 전대가 그러했고 전전대가 그러했듯이.


그러나 방금 신기루와 같이 나타났다 사라진 이는 어쩐지 달랐다. 운명은 인도하고 싶지 않은데, 그가 멋대로 끼어든 것만 같았다. 그 짧은 순간에 다채로운 변화를 보이며 제멋대로 떠나버린 그에게 여태 잔잔했던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잘라야지."


파문이 격랑으로 변하기 전에 혼란의 정체를 확인하고 적출해야한다.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나 항상 바른 지표를 향할 수 있도록 계속 자신을 뜯어고치며 자아나 감수성을 축소시킨다. 소녀에겐 그것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원치 않아요."


멍하니 중얼거린 소녀는 버려진 사내와 덕후가 사라진 방향을 보다가 표찰을 움켜쥐었다. 약간 비틀 거리며 골목을 벗어나는 소녀는 일단 물건의 주인에게 돌려주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운명이 소녀에게 지어준 이름은 상관 부용이었다.


 


 


 


 


상관 부용의 외모는....뭐, 무협지에 소개되는 소위 평범하다는(?) 주인공의 외양 정도는 됩니다. 이 경우는 히로인이니 TS 광선을 쐬어야겠지만. 참고로 화장발은 등장 히로인들 중에서 무척 잘 먹힙니다.(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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