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야설) 붉은 달(月)을 베다. 6 회
** 白雲俠(낭만백작)著/ 붉은 달(月)을 베다. **
제 6 회 후츄성(府中城)의 인연(因緣) 2
가토와는 상대적으로 합리적이고 온건한 인물로 알려진 고니시(小西)는 조선 출병시 사사건건
가토와 대립을 한 인물이다.
히데요시의 가장 총애를 받고 있는 가신중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전란이 발발하기전, 같은 히데
요시의 시동출신 측근인 행정관 이시다 미쓰나리를 움직여 조선출병의 전쟁을 막고자 최선을 다
하던 인물이었다. 요시도시 역시 장인과 뜻을 함께 하여 극구 전쟁의 발발을 막아보려 했었다.
그러나 요시도시의 꿍심은 고니시와는 달랐다. 당시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하며 조선의 벼슬까지
얻고 있던 대마도주 요시도시(宗義智)의 목적은 단지 자신의 무역 독점권이 무산될까 염려하여
조선에서 전해 올리라는 전언까지도 왜곡을 하여 장인인 고니시를 감언으로 속이고 있었다.
그런데, 도요토미가 병사한 후 지금의 정세는 모든 힘이 이에야스에게로 쏠리고 있지 않은가!!
때문에 히데요시의 사후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것을 염려한 그가 히데요시의 시동출신으로 히데
요시에게 지극의 충성을 다하고 있던 고니시와의 인연을 멀리하고 도쿠가와의 비위를 맞추려 부
인인 고니시의 딸과의 인연을 정리하려 기회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그 낌새를 눈치 챈 고니시였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어떠한 행위도 거침없이 저지르는 이 난국(亂局), 어쩌면 쥐도 새도 모
르게 딸의 목숨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이 나고야로 철수를 하기
전 이곳에 머무는 동안, 딸아이를 미리 자신의 성으로 보내 놓으려 생각했다.
그러나 전국(戰國) 무장의 아내가 된 여인의 마음은 달랐다.
「아버님께 가서 전해라. 나는 이미 요시도시의 아내라고!!」
자신도 요시도시의 간계(奸計)를 이미 예감을 한 바다. 이 전란의 수습이 끝나면 요시도시는 당
연히 이에야스의 눈밖에 나있는, 도요토미의 총신 고니시(小西)의 딸인 자신에게 이혼을 요구하
리라는 사실을 아버님의 밑에서 자라면서 수없이 보아온 그녀였다. 자신의 문중이 멸망 당할 지
경에 놓이면 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전국의 무장들끼리 서로 인척을 맺으며 이혼과 재혼을 밥
먹듯이 해 왔던 혼세(混世)가 아니었던가!!
그 전국의 결혼이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혼사가 아니라, 단지 인질을 교환하고 스스로의 가
문을 지키려는 하나의 예식일 뿐이다. 허나 그녀의 결심은 확고했다.
「아버님께 전해라. 나는 결코 너희들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아씨 마님.. 안됩니다. 시간을 지체하면 마님의 목숨조차도 보존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모든
방법을 다해 우도성으로 모셔야만 한다는 성주님의 추상같은 명이었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저희
들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서로 눈짓을 한 그들은 스르르 여인이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물러나라!!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한다 해도 나의 결심은 변함이 없다.」
여인의 추상같은 호통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세 명의 닌자(忍者)들은 입을 꾹 다문 채 그림자처
럼 움직였다.
(으음.. 아무리 난세에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라고는 하나 처절한 모습이구나. 그렇지.. 기회다.
어쩌면 나에게 바다를 건널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올 것 같다.)
그들의 행동을 멀리서 엿보고 있던 명(明)이 긴장을 하며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 스윽.. 스으윽..
세 명의 닌자(忍者)들은 품(品)자형을 이루고 아지랑이처럼 형체도 없이 움직여 여인의 앞으로
슬그머니 다가가, 그들 중 하나가 번개처럼 여인의 옆을 스치며 주먹으로 명치를 정확히 가격하
고 여인의 등 뒤로 돌어섰다.
「헉..!」
그 짧은 순간 여인의 입에서는 호흡이 멋는 듯한 숨결이 터져 나오며 그 자리에 푹 꺼꾸러져 털
썩 주저앉고 말았다.
뒤로 돌아선 그 닌자(忍者)는 쓰러진 여인을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일으켜 세우며 나즈막한 음
성으로 말한다.
「자.. 어서 모시고 성을 빠져 나가자.」
동료들과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기절한 여인을 옮기려는 바로 그때, 호방한 웃음소리와 함께
흰 그림자가 휘이익.. 그들의 앞에 날아 내렸다. 멀리서 보고 있던 명(明)이 날아든 것이다.
「하하하.. 멈추시오. 부인이 싫다 하지 않소이까!」
뜻밖에 나타난 불청객에 깜짝 놀란 그들은 상대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손이 바쁘게 좌우로 움직
이며 날카로운 파공음이 공기를 갈랐다.
- 휙.. 휙.. 휙.. 휘익..!!
순간.. 명(明)의 몸은 순식간에 허공으로 치솟아 공중제비를 돌듯 한 바퀴 맴돌고 손에 쥔 지팡
이로 날아드는 물체를 향해 흔들며 땅으로 내려앉았다.
- 탁.. 탁.. 타닥.. 탁..!
- 팍.. 파 팍.. 팍.. 팍.. 팍..!
그 들이 섬광처럼 뿌려낸 별 모양의 표창이 명(明)이 휘두른 지팡이에 모두 튕겨져 연못 옆에
높이 솟아 있는 굵은 소나무의 가지에 하나씩 박혀 버렸다.
「후후후.. 그대들은 저 부인과 가까운 지인들 인듯 하나, 굳이 싫다는 연약한 부인을 공격하여
실신까지 시켰소이다. 이쯤해서 그냥 물러들 나시오.」
「..............!」
그러나 닌자(忍者)들의 입에서는 한마디의 말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오직 그림자처럼 슬금슬금
움직이는 그들의 몸에서는 차가운 살기만 풍겼다.
- 휘익.. 차르릉.. 스르르르릉..!
두개의 쇠사슬이 그 끝에는 날카로운 낫을 매달고 허공을 날아 명(明)의 얼굴을 향해 양옆에서
파고 들었다. 그리고 명(明)의 앞에 마주선 검은 복면인은 두자길이의 예도(銳刀)를 두 손에 꼭
쥐고 온몸을 날려 명(明)의 정면을 찔러왔다.
「어허.. 삼면협공(三面協攻)이라. 으하.. 하하하하하..!」
웃음소리가 허공을 가르는 순간 휘익.. 공중으로 치솟아 오른 명(明)은 그들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리고,
- 퍽.. 퍽.. 퍼벅..!
명(明)을 향해 전신을 던져 달려들던 세 명의 닌자(忍者)들은 동시에 정수리를 손으로 움켜쥐며
주르르 몇걸음 뒤로 밀려났다.
「..................!!」
말없이 고개를 돌려 서로 눈길을 교환하던 그들은 휙.. 몸을 날려 후원(後園)의 우거진 수풀 속
으로 연기가 쓰며들듯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단 몇합을 겨루어 본 그들은, 이미 명(明)은 자신들이 상대해 이길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
을 파악하고는 은형술(隱形術)을 펼쳐 순식간이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다.
「흠..!」
슬쩍 몸을 공중으로 솟구쳐 높은 나무가지에 올라선 명(明)은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한동안 주
시를 하다가 여인이 넘어져 있는 그 장소로 뛰어내렸다.
「다행히 상처는 없고 숨결은 고르구나.」
혼절해 누워있는 여인의 가까이에 다가가 상태를 살펴보던 명(明)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여인
의 양 어깨를 잡아 일으켜 좌정을 시킨 후, 등의 한 가운데에 두손을 밀착시켜 정신이 깨어나도
록 활기(活氣)를 불어 넣었다.
깊게 파인 기모노의 옷섶이 살며시 열려져 뽀오얀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여인의 입에서 그 순
간 이해할 수 없는 한마디 말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공자님.. 간여(干與)를 하지 말고 저를 그냥 두셨어야 했습니다.」
기절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여인은 양쪽의 어려운 입장을 감안해 스스로 기절한 척 숨을 죽이
고 넘어져 있었던 것이다.
* * * * * * * * * *
「어.. 어.. 정신이 드셨습니까? 무척 괴로움을 당하는 듯 하여...」
살아나도록 도와준 사람을 향해 원망의 눈길을 보내는 여인의 표정에 당황한 명(明)은 더듬더듬
제대로 말을 이어가지도 못하고 먼한 시전으로 바라보고 있다.
살며시 고개를 돌려 `그냥 두어야 했다고 말하던 그 여인의 입에서 또다시 처연(悽然)한 한마
디가 흘러나왔다.
「난세(亂世)를 살아가는 전국(戰局) 여인들의 운명입니다.」
여인의 말에 듣고 있던 명(明)의 얼굴에 금새 핏발이 선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격한 한마디
가 튀어나왔다.
「푸훗.. 그 고운 옷을 걸치고 호식(好食)하며 여인의 운명이라 했소이까? 후후후.. 지금 조선
은 왜군 장졸(將卒)들의 만행에 모든 여인이...」
격해진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가 앗차.. 이게 아니다 싶어 잠시 진정을 한 명(明)은
슬며시 말문을 닫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초점없이 멍한 눈빛으로 마주보던 여인이 미안한듯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요. 조선에는 전란의 폐해(弊害)가 극심하다 들었습니다. 제가 먼 길을 오신 손님의 마
음을 아프게 만들었군요. 저를 도우려 하신 공자님께 결례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제서야 고마움을 나타내는 인사말을 하는 여인의 눈망울에는 한없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여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명(明)이 가슴속에 맺힌 것을 풀어내려는 듯 하늘을 올
려다 보며 독백처럼 침통한 목소리를 뱉어낸다.
「폐해(弊害)라..? 후후.. 그냥 전란의 와중에 일어난 폐해라..! 지금 부인이 말씀하신 그 운명
이란 부인 자신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지요. 그러나 조선의 여인들은 왜군의 무자비한
음행 앞에 한(恨)을 품고 죽어갔습니다.」
비탄(悲嘆)에 젖어있는 여인의 심성(心性)을 자극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애절(哀切)한 마음을
이끌어 내려는 명(明)의 한마디였다.
명(明)을 말을 유심히 듣고있던 부인의 표정이 날카롭게 변했다.
「공자께서는 조선 도공들을 보호하기 위해 배를 탄 후 시마쓰님의 목숨을 구해주신 조선의 장
부라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그일 만으로 이 거친 바다를 건너지는 않았겠지요. 분명 공
자님의 그 마음 깊은 곳에는 말 못할 속내가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과연 고니시(小西)의 딸다운 뛰어난 혜안(慧眼)을 지닌 여인이었다.
명(明)이 툭 던진 한마디를 듣고는 그 말속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 그 목적을 읽으려 하고 있는
그녀였다.
자칫 잘못하면 이 여인의 마음을 얻기도 전에 자신의 의도(意圖)가 드러날 순간이 아닌가? 그러
나 명(明)은 더욱 대담하게 다음의 말을 이어나갔다.
「맞습니다 부인..! 시마쓰님의 목숨을 구한 것은 이 원수의 땅에서 나의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
서 였습니다. 그리고 이 일본 땅으로 끌려온 나의 누님을 구하기 위해서..!! 후후.. 만신창이가
된 누님이 아직 살아있기나 할런지..?」
「아아.. 그랬습니까? 그 일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이 먼 바다를 건넌 것입니까?」
점점 애련(哀憐;가엾고 애처롭게 여김)한 감정이 치솟는 부인의 조그맣게 열린 입에서는 탄식
(歎息)의 소리가 흘렀다.
「허허허.. 부인.. 됐습니다. 부인의 신상에 별일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이제 몸을 추스르고 안
으로 드십시오. 허허허허허...」
그래도 자신 보다는 부인의 안위가 중하다는 표현을 하는 명(明)을 향해 그 여인은 한(恨)이 가
득 담긴 한마디를 뱉었다.
「공자님..! 저에게는.. 아니 전국을 살아가는 우리 일본의 여인들에게는 별일이 없다 말씀하셨
습니까??」
자조(自嘲)에 찬 듯 허허로운 웃음을 웃는 명(明)을, 젖어있는 슬픈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녀가
그동안 마음속에 억눌러 담아 왔던 울화(鬱火)의 불길을 명(明)의 앞에서 터뜨려 버린 것이다.
여인은 벌떡 일어서며 기모노의 허리에 두른 오비(帶)를 손으로 잡아 순식간에 풀어 던졌다.
그 순간 여인의 온몸을 두르고 있던 기모노의 앞자락이 양옆으로 벌어지며 그 속에 숨어있던
여인의 나신이 눈부시게 드러났다.
「공자님.. 보이십니까? 저와 같은 무가(武家)의 여인들은 이렇듯 겉옷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를
않는 알몸입니다. 언제 어느 곳에 뉘여져야 할지 모를 몸이니까요. 난세(亂世)의 여인들..!! 우
리 여자들은 힘을 가진 자에게 주어지는 인질이고 전리품일 뿐입니다. 이런 형세가 우리들이 난
세를 살아가는 운명이지요!!」
명(明)의 눈 앞에 드러나 있는 맑고 투명한 나신(裸身), 그러나 그 발가벗은 몸은 색정(色情)을
불러오는 추함이 아니라 오히려 처절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