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야설) 붉은 달(月)을 베다. 8 회
** 白雲俠(낭만백작)著/ 붉은 달(月)을 베다. **
제 8 회 호방(豪放)한 대좌(對坐) 2
고니시(小西)는 답답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너희들은 모두 물러 나거라. 명(明)이라 했느냐? 가까이 오라!!」
세 명의 호위 닌자(忍者)들에게 명령을 하여 뒤로 물러서게 한 고니시의 입에서는 속사포처럼
말이 쏟아져 나왔다.
「방금 무어라 했느냐? 자진(自盡)이라 말했느냐? 그 애가 왜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 했단 말이
냐?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그 아이의 어릴 때 아명(兒名)인 하루(春)를 알고 있느냐?」
「후후후.. 따님께서 직접 저에게 하루(春)라 불러 달라 했습니다.」
「어허..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자기가 마음을 준 상대가 아니면 하루(春)라 부르지를 못하게
한 아이데.. 무슨 마음으로 너에게 그 이름을 알려 주었을까?」
「하하하.. 아마 마지막 길을 가려 작정한 후 내세에서는 봄날처럼 평온한 나날들을 보내고 싶
은 염원이었을 것입니다. 하여 봄 춘(春)자가 든 그 이름을 마음속에서 뱉어낸 것이겠지요.」
「헉.. 마지막 길이라! 너는 어찌하여 그 아이의 마음을 그리도 소상히 알고 있느냐? 저놈들이
딸 아이에게 근접(近接)한 것을 적기(適期)로 삼아 자진을 하려 했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명(明)에게 딸아이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았던 것인가? 고니시는 우선 딸의 그 마음이 궁금
해 초조한 마음을 드러내 묻고 있는 것이다.
「예.. 장군(將軍)..! 하루(春)님께서는 난세를 살아가는 여인의 마음가짐이라 하셨지요.」
명(明)이 고니시를 마주해 정색을 하며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하루(春)님도 장군의 의도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저들이 아씨를 모시러 곁에
접근을 하였을 때 결심을 굳힌 것이지요. 저들의 의해 설령 목숨을 잃었다고 해도, 아무도 저들
의 정체는 모를 것이기에, 이 혼란의 시기 어떤 목적을 가진 사람에 의해 암살을 당한 것이라
소문을 내면 장군과 장군의 사위인 요시도시님과의 불화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긴
사려 깊은 생각이었습니다.」
「과연..! 그래, 그 순간에 네가 그 아이의 목숨을 구한 것이로구나.」
「예.. 장군 다행히 제가 그곳을 산책하고 있었기에..! 아마 지금쯤 하루(春)님은 장군의 마음
을 헤아리고 있을 것입니다.」
* * * * * * * * * *
이미 세 명의 닌자(忍者)들은 그 모습을 천정위로 감추어 사라져 버리고 방안에는 고니시 유키
나가(小西行長)와 명(明) 단둘만 마주하고 있었다.
「명(明)이라 했는가? 그래.. 이 고니시의 이름을 구실(口實) 삼아 철군선(撤軍船)에 오른 이유
가 무엇이더냐?」
진중히 추궁하는 고니시의 음성이었으나 딸아이를 돌보았다는 그 사실에 목소리가 조금 전 보다
는 많이 부드러워졌다.
「후후후.. 강제로 귀국(貴國)으로 끌려가는 조선의 도공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지요!」
「아닐세..! 그대의 눈이 거짓말이라 말하고 있구먼. 단순히 그일 때문이라면, 나중에 알려지면
더 큰화를 당할 내 이름을 굳이 들먹일 필요가 없었던 일이야. 이 고니시를 믿고 바른대로 말해
보게나!」
고니시 또한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전국의 무장(武將)이었다. 감히 자신의 명패까지 도용을 해
배에 오를 만큼 절박한 사정이 분명 명(明)에게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은근히 묻는 말이었다.
이왕 명패까지 도용해 배를 타야만 했던 행동에는 깊은 의도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 눈치 챈 고
니시와의 대좌(對坐)..!
명(明)에게는 이제 고니시를 설득해 더 이상 자신의 처지가 난감해지는 것을 막아야 할 절체절
명(絶體絶命)의 담판만 남아있는 것이다.
「좋습니다. 말씀드리지요! 일본 땅으로 건너간 후 저를 보호해 줄 후견인이 필요했습니다. 때
문에 장군과 가까운 시미쓰장군에게 목패를 보여드려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도록 만든 후 장군
의 곁을 지키며, 시마쓰님이 진정 고마워 할 은혜를 베풀 기회를 기다렸던 겁니다.」
「오호.. 목숨을 구해 줄 순간을 엿보고 있었다..?」
「예.. 덕분에 시마쓰님에게는 생명의 은인이 되었고 그 일로 인해 목숨을 걸고 신변을 경호하
는 측근이 된 저 올시다.」
「흠.. 그대의 신분을 확고히 할 후견인까지 만들어 해 꼭 우리와 본국(本國)으로 함께 가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장군..! 전란 중 일본군들에게 겁간을 당하고, 더렵혀진 몸을 원망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
선 여인들의 한(恨)을 알고 계십니까? 그 여인들 중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못하고 납치되어
이 일본 땅에서 연옥(煉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저의 누님도
있지요. 저는 그들의 원한(怨恨)을 갚아 주어야만 합니다. 또한 저에게 어떤 고난이 따르더라도
누님을 구해 조선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때문에 조선인인 제가 일본땅에서 편히 활보를 할 수
있는 배경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명(明)의 말을 듣고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던 고니시가 입을 열었다.
「원한(怨恨)을 갚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복수를 하기위해 이 일본을 찾았다는 말이
아닌가? 그대의 말은, 이 고니시가 그대를 포박해 죄를 물을 수 밖에 없는 위험한 발언이다. 지
금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으로 여겨 불문에 부칠 테니 당장 조선으로 돌아가겠느냐?」
명(明)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지며 오른손으로 죽장(竹杖)의 끝을 살짝 밀어 올렸다.
딸깍..! 소리를 낸 지팡이의 속에서 시퍼런 칼날이 한 치쯤 드러나 보이며 검날의 푸른 섬광이
방안을 시퍼렇게 스쳐 지나간다.
「장군.. 그 대답은 이 지팡이가 알고 있겠지요!!」
명(明)의 단호한 말이 천정을 울리자 천정의 한 귀퉁이에서 예민(銳敏)하게 움직이는 사람의 기
척이 느껴져 왔다. 그 순간 고니시는 천정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명령을 했다.
「괜찮다. 너희들은 그대로 있거라. 허허허.. 대담한 배포로구나!! 하루(春)도 네가 한 그 말을
알고 있으렸다? 해서 너의 마음이 하루 자신의 처지와 닮아 연민(憐憫)을 느낀 것이리라. 또한
너의 그 배짱이 마음에 들었던 게지.」
「장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장군의 그 깊은 신앙심을 믿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야소교의 가르침이 아니던가요?」
슬며시 칼날을 지팡이 속에 밀어 넣는 명(明)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고니시였다. 과연 뛰
어난 혜안(慧眼)을 가진 청년이었다. 자신이 믿는 야소교(耶蘇敎)를 들먹이고 고니시 자신이 합
리적인 사람이라는 점을 은근히 강조하며 감성에 호소를 해 마음을 움직이려 하는 이 청년의 기
개(氣槪)에 점점 끌려드는 마음을 느끼며 고니시는 또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는 듯 물었다.
「나의 함선에는 더 많은 조선의 도공들이 끌려와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서의 영향력이라면 시
마쓰님 보다는 내가 윗길이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나에게 접근하지 않고 나의 가짜 목패까지
만들어 시마쓰님의 배를 선택했느냐?」
목패(木牌)까지 만들어 움직일 치밀한 계획이라면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접근을 하는 것이 더욱
유리한 처세가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굳이 시마쓰에게 접근한 의도가 궁금해 졌던 것이었다.
「그것은..! 으음.. 시마쓰님의 부하장수 중에 저의 부모님을 겁간(劫姦)하고 목숨을 앗아간 인
물이 있습니다. 홀연 모습을 감추어 버린 그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부모의 원수라.. 그랬구나. 그러나 그 단지 이유 뿐 만은 아닐 것이다 또 다른 그 이유는?」
「맞습니다. 다른 이유는 지금의 일본 정세를 살핀 때문이었습니다. 장군께서 하루(春)님의 신
변을 염려할 만큼 다이코오((太閤;히데요시)의 죽음은 일본정국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조선의
철군도 그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지금 일본의 힘은 대부분 도쿠가와에게 집중이 되어 모든 다이
묘(大名;일만석 이상의 독립된 영지를 소유한 대영주)들이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라 알
고 있습니다. 하여 큐슈(九州)지방을 통일로 이끈 시마쓰가((島津家)가 내홍(內訌;내부의 분쟁)
에 시달리는 오사카나 에도보다 은신하기가 편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오호.. 너는 지금 일본의 정세까지도 훤히 꿰뚫고 있구나! 오냐 알았다. 너에 관한 모든 것은
불문에 부치마. 그러나 지금의 형편으로는 다이코오((太閤)님의 유훈 때문에 도공들은 이 대마
도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렇다면 너의 본토행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어떠냐? 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느냐?」
「아닙니다 장군. 당분간 이곳에 머물며 정황을 살펴보려 합니다. 제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하
루(春)님의 안전은 기필고 지킬 것이니 장군께서는 안심하고 나고야로 귀항하셔도 될 것입니다.
혹여 제가 본토로 건너가게 된다면 하루(春)님은 필히 장군이 계신 우토성(宇土城)으로 보내 드
리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그래주겠는가? 하루(春)가 고마워하겠구나. 그때는 나의 성(城)에서 너의 신분을 확연
히 보장받도록 배려를 주마.」
「저의 신변은 이미 시마쓰님과 약조가 되어 있기에 장군의 성에 머무는 일은 불가합니다.
대신 하루(春)님은 제가 꼭 모시고 본토로 갈 것이며 기회가 된다면 우토성(宇土城)을 방문하겠
습니다.」
「쯧쯧.. 어쩔 수가 없구나. 천정위의 고로(吾郞)는 들으라. 너희들은 이 청년이 본토로 무사히
들어온다면 반목(反目)하지 말고 필히 이 청년을 도와야 할 것이다.」
* * * * * * * * * *
목례를 하며 작별을 고한 명(明)은 또다시 천정위로 몸을 날려 고나시의 방을 벗어나 성(城)의
이층 지붕을 타고 스르르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 한곳에 도착해 아래를 내려다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으음.. 이제 한번 찾아 들어가 볼까?」
그의 눈 아래에는 길게 뻗은 복도 안쪽의 마루 옆에 겹겹이 닫혀 있는 문들이 보였다.
「저곳이구나!!」
훌쩍 내려앉아 연기가 쓰며들 듯 방문 안으로 들어선 명(明)의 앞에 나타난 두 명의 여인..!
하루(春)가 명(明)에게 일러 준 그 시녀들이었다.
「누구냐..?」
소매를 걷어 질끈 묶고 긴 언월도(偃月刀)를 손에 쥔 시녀들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명(明)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여인들이 뱉어낸 말이 소리가 되어 울리기도 전에 명(明)의 지팡이가 타닥.. 시녀들
의 명치를 스치며 지나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넘어지는 여인들을 뒤로하고 방문 안으로 들어선
명(明)의 입에서 짧은 감탄의 소리가 터졌다.
그곳 방의 한가운데 하얀 보료위에 순백의 속옷만 걸친 채 반듯이 누워 두눈을 꼭 감고 있는
하루(春)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명(明)님..! 오실 것이라 믿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순백의 미인(美人) 입에서 조용하고 다감한 목소리가 옥을 굴리듯 흘러나왔다.
「어.. 어.. 죄송하오 하루(春)님..! 불현듯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무심코 허락없이 찾아온
불청객입니다.」
「아닙니다. 쓸데없이 명(明)님께 말을 흘린 저의 탓이지요.」
후원에서 돌아 갈 그때 자신이 거처하는 방의 위치를 알려준 그 말을 상기시키고 있는 하루(春)
의 속삭임이었다.
「예..? 아 예..! 저는 오직 하루(春)님의 존체(尊體)가 걱정이 되어서... 막혔던 혈은 겨우 풀
어 드렸으나 호흡은 괜찮으신지 궁금하기도 하고..」
반듯이 누워 얼굴만 살짝 붉히며 말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내려다 보기가 어쩐지 겸연쩍기
만 한 명(明)이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그 표정을 바라본 하루(春)가 살며시 보료위에
서 몸을 일으키며 섬섬옥수(纖纖玉手) 가녀린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흘린다.
「호호호.. 귀여우셔라. 명(明)님.. 제가 명(明)님을 기다린 이유를 아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