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설 나향여협 (悖說 裸香女俠) 19
** 白雲俠 著/ 패설 나향여협 (悖說 裸香女俠) 19 **
제 19 장. 야릇한 인연(因緣) 2.
장주 모용환(慕容煥)이 뒷짐을 지고 거만한 표정을 하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도검(刀劍)이 부딪히는 소리와 고함소리..! 대문 앞에서 벌어지는 시끄러운 소리가 내당(內堂)
까지 흘러들자 무슨 일인가 살펴보려 마당으로 나온 것이었다.
우루루 넘어져 뒹굴고 있는 모용가(慕容家)의 무인들..! 그들을 일별한 모용장주의 얼굴이 일그
러지며 그의 입에서 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우둔(愚鈍)한 놈들이 모용가의 체면을 구기고 있구나..! 모두 물러 서거라..!」
호통소리를 들은 경위무사 한 놈이, 넘어져 있던 몸을 겨우 일으켜 비틀비틀 기어가듯 장주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장주님.. 저놈들이 장주님을 뵙는다 하며 막무가내로 달려들어 저희들을 이렇게 만들어 버렸
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눈을 들어 흘낏 앞을 바라보던 모용환이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호통을 쳤다.
「허허.. 너희 십 수명이 달려들어 겨우 저 여자아이 하나를 당하지 못했단 말이냐..? 비켜라,
이 쓸모도 없는 놈..!」
발로 걷어차듯 경위무사를 밀어버리고 수린의 앞으로 다가온 모용환이 점잖게 한마디를 던졌다.
「모용가를 훼욕(毁辱;헐뜯어 욕함)하는 자는 비록 여인이라 할지라도 용서치 않는다. 무슨 일
로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수린의 눈꼬리가 날카롭게 치솟으며 눈에서 예리한 안광이 뻗어 나오는 그 순간..!
「으하하.. 하하하하하..!」
저쪽 담장 옆 화단 쪽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며 백룡검이 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하하하.. 모용선배님..! 무슨 그런 억지의 말씀을 하고 계시오..? 저희들은 이곳 수가호위
(守家護衛)들에게 예(禮)를 다해 선배님을 뵙고자 청(請)했건만 오히려 무례를 저지른 사람은
이놈들이외다.」
「어어.. 네놈은 또 누구냐..?」
「장주.. 장주를 뵙고자 찾아온 무림의 소졸이오..!」
힐끗 백룡검을 바라보던 모용환이 가소롭다는 듯 한마디를 했다.
「본 장주는 너같은 무명소졸까지 접견할 만큼 한가롭지가 않다. 더 이상 추궁은 않을 것이니
어서 우리아이들에게 사과를 하고 물러 나거라..!」
백룡검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푸훗..! 일가(一家)의 장주라는 위인이 어찌 이리도 경솔한가..? 비록 걸인이 구걸을 을 하러
찾아 들었다 해도 시원한 물 한 모금 나누는 것이 인정인 것을..! 이 모용가에 찾아온 손님을
문전에서 축객을 하려 하다니..! 모용장주.. 내객(來客)을 피해야할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것이오..?」
백룡검이 놀리듯 하는 말에 모용환의 모습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 이놈이..! 진정 시비를 자초(自招)하려는 놈이로구나..! 어어어.. 호.. 혹시..!」
자신의 앞에서 이리도 건방진 놈이 있는가..! 기가 막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찬찬히 백룡검
을 살펴보던 모용환의 표정이 점점 흙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백설처럼 하얀 포의(布衣)를 입은 인중지봉(人中之鳳)의 자태에 일대기협의 풍모..! 그리고 싸
늘 눈초리를 하며 그의 곁에 서있는 여인의 손에 들려져 있는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빛을 띠고
있는 한지루 한옥검(寒玉劍)..! 점점 불안과 두려움의 심연(深淵)으로 빠져들고 있는 모용환이
었다.
그런 모용환의 표정을 읽고 있던 신웅(愼雄)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소생을 강호인들이 백룡검이라 불러 주더이다. 이만하면 모용장주를 접견할 만한
신분은 될런지..?」
「어엇..! 과연 짐작한 대로..! 대협.. 미처 알아보지를 못해 죄송합니다. 어서 안으로..! 여봐
라.. 빨리 대협을 모시지 않고 무얼 하느냐..!」
당금 무림의 절대고수로 알려진 천하의 백룡검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모용가를 찾아온 것이다.
갑자기 온몸에 사시나무 떨듯 경련을 일으키던 모용환이 애꿎은 경위무사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
고 있었다.
* * * * * * * * * *
빈객(賓客;귀한손님)을 모시듯 내당(內堂)의 접객실로 안내를 한 모용환이 얼른 두 사람에게 자
리를 권하며 그 앞에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허허.. 장주님.. 어서 앉으세요..! 그렇게 서서 계시면 우리가 더 난감합니다.」
모용환은 그러나 아직은 예의를 다하려는 듯 자리에 앉지를 못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 예.. 대협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낭자는 뉘신지..? 혹시 오래전 어깨에 흰 띠를 두르고
이곳을 찾았다던 그 낭자가 아니신지..?」
조심조심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묻는 모용환의 귀에 소름이 끼칠 만큼 비통(悲痛)한 수린의 목소
리가 흘러들었다.
「모용장주..! 천산 설봉의 죄악을 이제 내 앞에서 한줌 남김없이 밝혀야 할 것이오..!」
「헉.. 나.. 낭자 그게 무슨 말입니까..?」
「모두 알고 왔거늘.. 아직도 시치미를 떼는구나..? 나는 강호에서 백운파정(白雲破靜)으로 불
리던 설인군(雪仁君)어른과 은향선녀(隱香仙女) 사혜추(嗣惠秋)의 딸 설수린이다. 그래도 숨길
작정이냐..?」
수린의 말을 들은 모용환은 온몸에서 모든 기력이 빠져나가는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모.. 모르오..! 나는 아무것도 모르오..!」
입조차 제대로 열리지 않는 모용경을 향해 수린은 추상같은 추궁을 이어갔다.
「모용환..! 그대가 얼마 전에도 청성의 환중과 만나 대책을 의논한 것을 본 낭자는 모두 알고
있다. 그리고 네놈이 나의 모친에게 그 추악한 음행을 저지른 것 또한 익히 알고 있느니..!」
「아.. 아니오..! 나는 다만 그놈들의 강요에 못 이겨..!」
「이놈.. 모용환..! 그러기에 그놈들의 정체를 빨리 밝히라는 말이 아니냐..!」
추궁을 당하고 있는 모용환의 표정은 어쩔 줄 몰라 난감해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낭자.. 진정 모르오..! 이놈이 연 왕족의 후예라 자부하며 일가(一家)를 이루어 제법 명성은
얻었으나 아직 세상은 우리 가문을 만이(巒夷)라 부르며 천시를 해, 혹시나 비급이라도 얻어 천
하제일이 되면 모두 이 가문을 존경하지 않을까 그 욕심 때문에 따라나선 것 뿐이었습니다. 그
러나 소득은 아무것도 없고 이렇듯 궁지에만 몰리게 되었습니다.」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잘못을 저지르고도 변명으로 일색을 하는구나..! 내 어머니를 능욕한
그 죄만으로도 쳐 죽여도 마땅할 네놈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오직 너의 목숨을 불쌍히 여겨
그놈들의 정체만 밝히면 살려주려 한 것인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나..!」
수린의 다그침을 냉철한 모습으로 듣고 있던 백룡검 신웅이 조용히 한마디를 거들었다.
「낭자.. 나도 남해의 일들을 들어보아야 할 말이 많이 있습니다. 허나 모용장주에게 잠시만 시
간을 주도록 합시다. 깊히 숙고(熟考)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정황(情況)들이 생각나겠지요..!」
한숨 돌릴 겨를 없이 무섭게 추궁을 하고 있는 수린을 제지하는 말을 들은 모용환의 얼굴에는
조금은 긴장의 기색이 누그러졌다.
「예.. 예.. 대협.. 지금 다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여기까지 찾아 오셨는데 대접이 변변 찮
습니다. 우선 차라도 한잔씩 들도록 하십시오.」
모용환은 이제 마음에 여유가 조금은 생긴 듯 앞에 놓인 찻잔에 손수 차를 따르고 있었다. 수린
과 백룡검이 찻잔을 들어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려던 그 순간..! 접객실의 문 앞에서 화급(火急)
한 여인의 목소리가 실내로 울려왔다.
「낭자..! 그 차를 마시면 안됩니다. 찻잔 속에 독(毒)이 들었습니다.」
순간..! 모용환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며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자리를 벗어나려 몸
을 접객실의 입구를 향해 날렸다.
그러나 그 보다 더욱 빠르게 수린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 휘익.. 퍽..!
찻잔속의 차 한 방울을 손가락에 적셔 튕겨낸 탄지신공(彈指神功)에 무형의 강기가 가득 실려
모용환의 신형을 향해 날아가 수혈(睡穴)중의 하나인 옥침혈(玉枕穴)을 건드린 것이었다.
「어윽..!」
신음 소리와 함께 모용환의 몸뚱이는 일어나려던 그 자리에 도로 주저앉아 눈만 껌벅이고 있었
다.
접객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비굴하다 싶을 정도의 저자세로 일관하며 수린과 백룡검 두 사람을
맞이하는 모용환의 번들거리는 눈을 바라본 수린은 이미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라 예
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와 때를 맞추어 접객실의 문이 열리며 젊은 청년을 대동한 중년의 미부(美婦)가 실내로 들어
서며 수린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그 미부의 뒤를 따르던 청년.. 모용환의 아들 모용경도 지인을 만난 듯 기쁜 표정으로 인사를
하며 수린에게 다가섰다.
「낭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수린의 신형주위에는 붉은 아라랑이가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지
랑이는 오로지 중년미부와 모용경 두 사람의 눈에만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호호호.. 모용공자.. 아화부인(娥花婦人), 어서들 오세요. 마침 제시간에 맞추어 잘 오셨습니
다. 어서들 자리에 앉으세요. 그렇지 않아도 조금 있다가 후원(後園)의 옥로당(鈺露堂)으로 찾
아가려 했습니다..! 」
꼼짝도 못하고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보는 모용환은 찻잔의 독(毒)을 이들에게 고언(苦言)한
사람이 아화부인이란 것을 알고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보다
더욱 혼란스러워 하는 인물은 백룡검이었다.
이들이 어찌하여 이토록 반갑게 서로 인사를 나누며 또한 독이 들었다는 사실은 수린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일까..?
백룡검은 어리둥절 알 수 없다는 듯, 자리에 앉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새로운 사실에 한번 더
놀라고 있었다.
(어허.. 이 젋은이와 중년부인의 안광에는 붉은 빛이 감돌고 있다. 그리고 두사람 모두 음욕이
가득해 눈빛에 색정(色情)이 흐른다. 또한 이들의 시선은 수린낭자의 움직임만 쫒아 따르고 있
구나..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러나 모용경과 아화부인(娥花婦人)의 시선은 수린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린의 신형 주
변에 피어 있는 연분홍 아지랑이를 쫒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백룡검의 눈에는 그 창애(蒼靄)가
보이지 않기에 수린을 따르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런 아화부인(娥花婦人)이 수린을 향해 고혹(蠱惑)스러운 표정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낭자.. 보고 드릴 일이 많습니다. 우선은, 며칠 전 청성의 환중도인에게서 전서구 한마리가
날아 왔습니다.」
「오호.. 그래서요..?」
「그 전서구에는 장주에게 보내는 편지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서한의 내용은, 백룡검이 찾아와
남해의 혈겁에 대해 털어 놓아 자신의 변명만으로 무사히 넘어간 듯 했으나, 갑자기 백룡검이
다시 나타나 빠져 나갈 수 없는 추궁을 당해 자신과 장주가 만난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자백을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내용 뿐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계속된 서신에는, 다시 나타난 인물은 비록 백룡검의 모습은 하고 있었으나 추궁을
끝내고 돌아서는 그에게서는 여인의 향긋한 지분냄새가 풍겨져 와 아마 환형(換形)을 하여 백
룡검의 모습으로 변신한 여인일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마 그들 중 누구라도 모용가를 찾
을 것이 분명하니 단단히 대비를 해두라는 전언이었지요.」
싱긋 웃으며 백룡검을 돌아 본 수린이 다시 아화부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 환중도인도 마음이 급했나 봅니다. 아화부인.. 또 다른 보고는..?」
「예.. 낭자..! 장주는 그 전서구를 받고는 두려움에 한동안 두문불출을 했지요. 그러다가 방법
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모용가에 더 많은 무림인들 끌어들여 방비를 하고 혹시나 낭자께서 찾
아 오면 그들을 내세워 대적하려 했으며 그 조차도 안심이 되지 않아 그때부터 찻잔에 독(毒)을
풀어두고 기다려 온 것입니다. 조금 전의 그 찻잔입니다.」
「호호.. 그래서 부인께서는 차를 마시지 말라 고함을 지른 것이군요..!」
「예.. 낭자..! 소장주와 후원 저의 방에 있다가 대문에서 울려오는 낭자의 그 맑은 소리를 들
었습니다. 그 순간 드디어 낭자께서 이곳을 찾아온 것을 알고는, 장주의 계교(計巧)가 언뜻 생
각이나 미리 접객실의 문 옆에 숨어 있다가 차를 마시려는 순간 놀란 나머지 고함부터 지른 것
입니다.」
「호호호.. 아화부인(娥花婦人).. 그리고 모용공자.. 이렇게 자세히 모든 사실을 알려주어 고맙
습니다.」
수린은 깊이 고개를 숙여 두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나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백룡검의 머리속에 다가드는 혼란은 도저히 감당을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수린이라는 이 낭자가 언제 이들을 이토록 세뇌시켜 두었으며, 저들의 남편과 부친인 장주보다
도 수린을 더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는 저 눈빛은 또 무엇인가..!
수린은 궁금해 하는 백룡검을 안심 시키듯 조그만 목소리로 말을 하며 눈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신웅공자님.. 나중 후원의 옥로당(鈺露堂)으로 자리를 옮긴 후 자세한 말씀을 드릴 테니 지금
은 모른 척 그냥 계셔 주세요..!」
말을 하며 탁자의 찻잔으로 손을 뻗어 잔을 들어 올렸다.
「호호호.. 목이 마르구나..! 이 차로 목이나 축여야 겠다.」
어수선한 와중에 찻잔에 독이 들었다는 사실을 잊은 듯 잔을 입으로 가져가 맛있게 들이키는 수
린을 보며 모두 놀란 음성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악.. 나.. 낭자.. 독.. 독이 든 찻잔입니다..!」
그러나 태연히 차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들이킨 수린이 점혈을 당한 채 꼼짝없이 앉아있는 모
용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모용장주.. 이따위 독으로 본 낭자를 어찌할 수 있다고 여겼느냐..? 호호호.. 어림없는 짓..!
내, 그대의 부인과 아들의 체면을 생각해 목숨은 살려주마..!」
휘익.. 수린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그 순간.. 모용환의 몸에서 툭.. 소리가 울리며 굳어있던 장주의 신형이 천천히 생기를 되찾고 있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