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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붉은 선율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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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mc, 순애, 겁간, 환타지... [한마디로 혼합물;;;;]


+)언제인가 네이버3에 올렸던 글을 새로 개작한 것입니다. [그때 시놉도 없이 너무 날림으로 써서;;;]
인칭 변화는 싫어하는데; 일일이 고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아서 그냥 놔뒀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제 쭉 3인칭으로 진행될 겁니다.

설정과 설정이 들어간 일부 문장은 키쿠치 히데유키 씨의 마계 도시에서 따왔지만 글은 95%창작입니다.

일본야설을 보고; 참 이 사람들 연재주기에 상관없이 정성들여서 쓰는구나...하는 마음에 잡은 글이지만;
시간도 없고, 저작권도 희박한 글이기에 역시 99% 날림;일테니 이것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시길.



***



1장. 프롤로그.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아오모리의 지하철역이었다.
그녀가 나의 시선을 끌게 된 것은 실핏줄이 보일만큼 창백한 피부 때문에도,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흰자위가 고르지 않은 왼쪽 눈 때문도 아니었다. 초록색 원피스를 입은 채 그녀는 선로 앞의 노란 안전경계선을 걷고 있었다. 지나치게 가는 다리로 천천히 한발씩 내딛었다. 꽤나 위태롭게 비치는 그 광경을 보며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경계선을 긋고 있었다. 그것은 생과 사의 경계일수도 있고, 현실과 몽상의 경계일수도 있다. 나는 그녀가 집에서 거울을 보며 열심히 연습했을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생각을 했다. 그것은 노란 경계선과 동화된 듯한 자연스러운 몸동작이었기 때문이다.

정상이 아니다. 나는 바로 결론을 내렸다. 정상인은 안전한 곳을 원하거나 혹은 위험한 곳을 원한다. 저렇게 자연스럽게 선을 타고 걷는 것은 정상인으로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혹여 장난처럼 몇 발 경계선을 따라 걷더라도 금방 싫증을 느껴 그만두고 말 것이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미리 정해놓기라도 한 듯 정장 주머니에 한 손을 집어넣고 나머지 손으로는 마일드세븐을 꺼내 물고 있었다. 빈 담배다. 라이터도 성냥도 없으니 불을 붙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나는 연기를 깊게 흡입하는 듯 숨을 들이켰다. 나도 정상은 아니다.

그녀가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온다. 정확히는 내 앞의 노란 선을 따라 걷고 있는 것뿐이었지만. 나는 담배를 선로를 향해 퉁겼다. 그리고 담배개피 만큼의 무게를 잃어 잠시 어색해진 손으로 목울대를 잡았다. 마치 스스로의 목을 조르듯이. 이 기괴한 행동이 그녀의 시선을 끌 수 있기를 바라며.

“······”

점점 그녀의 윤곽이 뚜렷해진다. 원피스 소매 안으로 드러난 팔뚝이 지나치게 희다. 마치 백혈병환자처럼 그녀는 혈색이 죽어있다. 팔뚝에도 파르스름한 실핏줄이 드러나 보인다. 그리고 눈. 최면에 걸린 것처럼 초점이 죽은 왼쪽 눈은 멍하니 허공에 고정되어있다. 똑 부러지게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오른쪽 눈과의 어색함이 어떤 이질감을 창조했다. 원추각막증이다. 나는 한눈에 그녀의 증상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개의 눈처럼 그녀의 왼쪽 눈은 빛과 어둠만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찰랑. 오른쪽에만 달린 그녀의 붉은 귀걸이가 흔들렸다.

불가사의하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나는 목울대를 잡고 있던 손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10시 57분. 약이 죽은 시계의 바늘은 그곳에 고정되어있다. 영원히.

“몇 시죠?”

순간 그녀가 멈췄다. 원래 거기에 존재했던 것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녀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흰 운동화로 노란 금을 밟고서.

“10시 57분입니다.”

마치 그 시간이 옳은 것처럼 나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의외로 마음은 결연함도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 몸 전체의 혈류에 미진이라도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던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시간이 보여요?”

그녀는 시간이 틀렸어요, 따위의 흔한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의 손목에 걸려있는 은빛 시계를 힐끔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계속 보고 있지요.”

“흑백 필름인가요?”

정상인들의 <상식>이란 울타리는 그녀에게는 아무 상관없는 공간일지도 몰랐다. 나는 팔목을 들어 시계를 한 번 더 보았다. 여전히 시계 바늘은 10시 57분을 가리키고 있다.

“제 눈은 정상입니다만.”

처음으로 그녀가 웃음을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살아있었다. 언제든지 웃거나 눈물을 흘릴 수 있고, 적의를 보내거나 간절하게 원할 수 있는··· 그런 감정이 풍부하게 정물화처럼 그려질 수 있는 얼굴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어떤 단어 하나를 떠올렸다. 미쳤다든지, 미친 남자, 미친 여자, 미치광이라는 단어를 나는 쓰지 않는다. <정상이 아니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어디로 가죠?”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신주쿠요.”

“음······”

찰나 나는 저도 모르게 작은 신음을 흘렸다. <저주 받은 도시 신주쿠>. 10년 전 심야, 새벽 3시에 진도 8.5 이상으로 추정되는 대지진, 이른바 마진이 신주쿠를 덮쳤다. 그것은 신주쿠 전체에 처참한 손톱자국을 남겼다. 그러나 좀더 기분 나쁜 것은 외부와의 경계선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이 균열이었다.
진도 8.5의 마진이 신주쿠를 덮쳤을 때, 구외에서는 미진조차 감지되지 않았었다. 마진은 명확하게 신주쿠만을 노렸던 것이다.

그렇다. 1983년 9월 13일, 금요일. 모든 것은 그때 시작되었던 것이다.

부흥 작업 중이던 자위대원 69명이 사망했던 자동소총 발광 난사 사건 조사를 담당했던 과학자들이 귀환 버스 째 실종된 ‘귀환 버스 소멸 사건’, 그리고 무법도시의 이름을 확고하게 만들었던 ‘위령제∙승정 백골 화사건’ 그 모든 것은 악과 마를 불러들이는 이 도시에 어울리는 장엄한 팡파르였다.
요기에 이끌리듯 전국 각지에서는 사망자 수와 거의 비슷한 4만 8천여 명의 범죄자들이 흘러들어왔다. 그 이후 신주쿠에서는 크고 작은 조직, 개인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와세다, 니시신주쿠, 요츠야에 건설된 세 개의 다리를 통해 구외와 연결되어 있는 이 도시는, 평온한 일상을 꿈꾸며 밤마다 무시무시한 감시탑의 빛에 비춰지는 불야의 마성처럼, 짙고 사악한 광채를 내뿜고 있는 것이다.

“······위험한 곳이군요.”

젊은 여자가 신주쿠로 흘러들어간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야쿠자들의 먹이가 되기 딱 좋은 사냥감이다. 그들에게 납치를 당해 윤간당하고 평생을 노예와 같이 창녀 짓을 하는 것 정도는 이제는 흔한 이야기였다. 기괴한 주민에다 오염된 듯 요기가 흐르는 도시, 신주쿠는 그런 곳이었다. 아마도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 정상이 아닐 것이다.

“이곳이 훨씬 위험해요.”

그녀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소 도발적인 오른쪽 눈빛은 초점이 엇갈린 왼쪽 눈과 어우러져 실패한 흑백사진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내가 말했다.

“진심으로 말리는 겁니다.”

“내가 당신이라면 신주쿠로 가겠어요.”

그녀가 흐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끌리고 있지 않나요? 신주쿠는 당신 같은 사람을 환영하는 곳이니까.”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나는 순간 두려워졌다. 무언가 발걸음을 잘못디딘 듯한 그런 느낌. 어쩐지 조급하고 목이 탔다. 나는 급하게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어진 왼손을 빼서 등 뒤의 잿빛 벽을 손톱으로 긁었다. 먼지가 흩날렸다. 나는 불현듯 그녀의 경계를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삶과 종말이었다.

“애인은 있어요? 섹스는 즐거워요?”

젊은 여자가 담기에는 노골적인 그 말들은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 묘하게 어울렸다. 그녀가 한마디 더 툭 쏘아붙였다.

“당연히 그렇지 못할 테죠. 당신은 여자의 입구멍에 삽입도 못할 테니까. 안 그래요? 레트로 바이러스에 당신의 인자가 전염되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당신은 에이즈니까······”

식은땀이 흘렀다. 다리축이 휘청거렸다. 나는 흔들리는 몸을 간신히 벽에 기대고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쥐었다. 뭐가 어떻게 된거지···? 나는 갑작스레 속이 메스꺼워 토할 것 같았다. 그녀의 가는 흰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누르며 나는 창백한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 살고 싶어요? 섹스를 하고 싶어요?”

핏줄이 비쳐 보이는 그녀의 여윈 두 팔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축축해진 나의 등을 감싸 안았다. 나는 시력이 잘 맞지 않는 사람처럼 눈을 찡그렸다.

“어차피 치료는···”

“가능해요.”

그녀가 내 말을 잘랐다. 술이라도 많이 마신 것처럼 나는 정신이 어지러웠다. 마치 인간은 생명이 있어요, 라고 하듯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다만··· 나를 따라 신주쿠에 가야만해요. 나는 당신의 능력이 필요해요. 당신의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아주··· 아주 많이 있거든요, 나카가미 히데미씨.”

그녀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일말의 광기를 띠고 있었다. 나는 우습게도 그녀와의 만남이 전적으로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름을 아는 것도, 나의 능력을 아는 것도, 나의 병을 아는 것도 다 우연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천천히 나에게 얼굴을 밀착했다. 뜨거운 숨결이 나의 뺨에 와 닿는다.

“전 이레네라고 해요. 짐작하시겠지만 예전에는 수녀였죠. 절 따라오실 건가요?”

나는 구두를 들어 그녀의 흰 운동화를 세게 밟았다. 그녀는 눈썹하나 움찔하지 않았다. 발에서 느껴지는 고통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 그녀는 버려진 아기처럼 나를 간절하게 원하는 시선을 던졌다. 그것은 성욕과는 관계가 없는 다른 욕망이었다.
나는 눈을 무겁게 깜박이며 운을 뗐다.

“······가보죠.”

그것이 악마와의 첫 만남이었다.



***



<병원은 폐업합니다.>

아무렇게나 찢은 종이로 짤막한 문구를 써넣은 나는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빈 듯이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병으로 방황하는 내가 유일하게 안주할 수 있는 곳이 이곳이었으니까. 아니, 안주할 수 있는 척 할 수 있는 곳인가······.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건물을 누군가에게 뺄 새도 없이 나는 2층을 비워버렸다. 그깟 몇 푼돈이야 어찌되든 내가 알바가 아니었다. 나는 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다. 버스를 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학교와 직장에 늦지 않기 위해, 그들은 분주히 뛰어다닌다. 나 하나쯤 이 숨 가쁜 도시에서 사라져도 변하는 것은 없다.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는 허황한 벌판의 작은 모래알처럼 나는 그런 존재다. 그것은 너무나 분명했다.
그렇게 10분쯤 걸었다.

나는 나의 작은 단칸방에 들려 몇 벌 되지 않는 옷 중 하나를 꺼내 입고, 담배 한 보루, 돈 몇 푼을 챙겼다. 짐은 그게 전부였다. 나는 습관처럼 바지주머니에 왼손을 찔러놓고, 맨 담배를 입에 물며 다시 걸었다. 7월의 해는 뜨거웠다. 갈증이 나며 목구멍이 바짝바짝 타올랐다. 겨드랑이는 이미 축축한 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쓸데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취미가 아니었다.

나는 문득 바다를 떠올렸다. 출렁이는 파도와 유리같이 빛나는 흰 모래, 바다 냄새까지 차례차례 재생시켰을 때 생각이 끊겼다. 그녀가 나의 시선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검은색 차를 등지고 열기로 인해 황색먼지를 뿜어 올리는 뜨거운 대지위에 발을 붙이고 서있었다. 프랑스 풍 리본이 달린 조그만 챙이 있는 흰 모자를 더 썼을 뿐, 그녀는 여전히 초록색 원피스와 흰 운동화 차림이었다. 짙은 검은색 머릿결이 모자아래서 바람에 흩날렸다.

“10시 57분입니다.”

나는 담배를 땅에 뱉고 팔을 펴들어 약이 죽은 시계를 보이며 말했다. 그녀가 웃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시간인가 보군요.”

“······”

정답이다. 에이즈 선고를 받은 그 시간부터 나의 시계는 죽어있다. 나는 입끝을 비틀어 가는 웃음을 지었다. 정상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레네라는 숭고한 성인의 세례명을 가진 눈앞의 여자는 정상이 아니다.

“나의 시계를 다시가게 할 수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솔직히 이런 정상이 아닌 여인에게 끌려서 이곳까지 나온 나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다. 병원에 붙인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발목은 자물쇠가 달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나의 앞에 놓여진 강렬하고 선연한 유혹 앞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이죠. 당신이 나를 따라 신주쿠로 향한다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뒤에 자신이 바라는 조건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으며.

“나는 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말을 끊고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였다. 그녀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시력이 죽은 왼쪽 눈은 허공에 버려두고, 오른쪽 눈만으로. 그녀의 눈동자는 저주에 걸린 돌 인형처럼 깜박이지도 않는다. 전혀 병에 걸려 거리 감각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지는 않는 눈이다. 희미한 잔월(殘月)처럼 은은하면서도 투명한 눈동자에 내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왠지 가슴속이 허무해져와 나는 심호흡을 했다.

“나에게 무엇을 원하죠?”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언가를 죽여본적이 있어요?”

그녀가 반문했다.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나는 그녀가 그런 질문을 꺼낸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내가 병원에서도 접하지 못한, 종잡을 수 없는 이성을 소유한 까탈스러운 색깔을 가진 여자였다. 굳이 캔버스에 옮겨낸다면 칙칙한 회색빛에 피처럼 붉은 물감을 잔뜩 뿌린 색깔정도가 나올 것이다.

“이를테면···”

그녀의 붉게 루즈를 바른 입술이 벌어지며 미소가 흘러나왔다. 불이 꺼진 초에서 흘러나오는 한 가닥 연기처럼 허무하면서도 야릇한 미소였다. 불현듯 밀물처럼 초조감이 뇌리에 밀려왔다. 귓속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파리라던가, 모기라던가, 개라던가··· 아니면 좀 더 큰··· 그러니까 인간 같은······ 말이죠.”

“뭐···?”

나는 간신히 평정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의 너무나도 섬뜩한 눈빛에 질려 서였는지도 몰랐다. 현실과 환상이 머릿속에 뒤얽혀 뇌리를 어지럽힌다. 나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말려든 것처럼 몸을 비틀거렸다. 편두통이 도진 것처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지금 나보고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 겁니까?”

의외로 나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말을 내뱉은 내가 놀랄 정도로. 어쩌면 나는 이정도 상황을 마음 한구석에 미리 각오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신주쿠라는 도시를 거론했을 때부터.

“네.”

은밀하면서도 사람을 유혹하는 빛을 띤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대답했다. 이마에 맺힌 땀이 주르르 흐르며 눈을 따갑게 찔렀다. 나는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다시 입을 떼었다.

“나는 평범한 신경정신과 의사일 뿐입니다.”

“아니요, 당신은 평범한 의사가 아니잖아요. 여자에게 스스로 마스터베이션을 시킬 수도 있을 텐데요.”

그녀가 농담처럼 말을 던졌다. 그러나 나는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나는 추처럼 무거운 말투로 말했다.

“······최면으로 사람을 죽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당신이라면 가능할 텐데요.”

그녀가 빙글 웃음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사실 신주쿠에는 별의별 인간이 다 있어요. 비싼 돈을 주고 몸을 개조해 특수한 능력을 손에 넣은 부류도 있지만, 당신이나 나처럼 선천적인 부류도 있지요. 전기뱀장어가 무색할 정도의 발전 능력을 지닌 인간도, 한번 노려보기만 해도 상대의 움직임을 봉인해 버릴 수 있는 순간 염력술사도 저는 본적이 있답니다.”

“소문이 정말 이었나······”

나는 신음을 흘렸다. 소문이란 생체 강화법이 무법도시 신주쿠에서는 공공연하게 행해진다는 것이었다. 생체 강화법이란 저렴한 가격의 마약과 정신요법을 병행하여 단기간이지만 살인 사이보그에 필적하는 능력을 얻게 해주는 방법이었다. 비록 몇 분 혹은 몇 시간 밖에 지속되지 않기는 하지만, 잔챙이 야쿠자의 푼돈으로도 무적의 초인이 될 수 있었다. 금년의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무면허 생체 강화 의사는 전국적으로 300명을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어쩌면 신주쿠에는 그보다 더 많은 무면허 생체 강화 의사가 있을지도 몰랐다.

“신주쿠는 신주쿠니까.”

그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신이 죽은 도시, 신주쿠는 하나다. 나는 속으로 힘없이 되뇌며 표정을 흐렸다. 그리고 다소 격앙된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런 악마 같은 도시에 나보고 들어가라는 겁니까?”

“제가 지켜드리죠.”

나는 그만 픽하고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자라다 만 아이같이 지나치게 가는 다리와 핏줄이 드러나 보이는 희고 얄팍한 팔뚝을 지닌 그녀에게는 대체 무슨 힘이 있을까? 꽃줄기처럼 가냘프고 긴 그녀의 하얀 목은 손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뚜둑 부러질 것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호기심 속에서 내가 물었다.

“그런 힘이 있다면 왜 당신이 직접 죽이지 않죠?”

“물론 저도 죽여요. 하지만 당신의 힘도 필요해요. 말했죠, 신주쿠에는 괴물 같은 인간들이 널려있다고.”

그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갑작스레 그녀가 창백한 팔을 앞으로 뻗었다. 순간, 하얀빛이 허공에서 번쩍였다. 그리고 그대로 나는 멍하니 얼어붙고 말았다. 아니,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온몸이 무언가에 결박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살을 옥죄는 고통이 전신에서 격류처럼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다. 마치 내장이 가닥가닥 찢어지는 듯한 참을 수 없는 격통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어 간신히 신음을 참을 수 있었다. 식은땀이 이마에서 맺혀 줄줄 흘렀다.

“강철의 실.”

그녀가 은빛 실을 다시 거두며 설명했다.

그제야 전신을 휘돌던 엄청난 고통이 썰물처럼 잦아들었다. 나는 격한 한숨을 토해냈다.

“······강철의 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은 결정하셨나요?”

“글쎄요. 당신이라면 내키겠습니까?”

“신주쿠에서는 살기 위해서 남을 짓밟고 죽여야 하죠. 어때요, 지금의 당신에게는 너무나 어울리는 도시가 아닌가요?”

“······”

목이 탔다. 내 몸에 휘몰아치는 두려움··· 그것 때문이었다. 이대로 그녀에게 이끌려 한발을 디디면 아마존의 깊은 늪처럼 영원히 헤어 나올 수없는 나락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땀이 축축이 밴 손을 움켜쥐자 갑자기 피가 모조리 증발한 것 같은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차라리 이대로 쓰러졌으면. 쓰러져서 죽어버렸으면··· 그러면 모든 게 편할 텐데.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그녀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보험을 들어두어야겠군요.”

“어떤?”

“당신과 섹스 하겠습니다.”

그녀가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싱긋 웃었다. 그녀의 손이 차문을 열어젖힌다.

“타요.”

희고 여윈 팔이 천천히 시동을 걸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흘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검게 코팅한 차 유리에 비치는 그녀의 이마는 흑색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창백할 정도로 흰 그녀의 이마가 보인다. 문득 눈처럼 하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기분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축였을 때 차가 출발했다.

내가 물었다.

“카섹스하는 것 아니었나요?”

“히데미씨, 그런 취미셨나요?”

그녀가 웃었다. 난 잠시 멍한 표정으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타라는 의미는 그것이 아니었던가. 무심코 손에 쥔 담배개피를 반으로 꾸기며 내가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신주쿠.”

“신주쿠?”

“네, 신주쿠.”

그녀가 짧게 대답했다. 그녀는 비스듬히 창가에 얇은 목을 기대고 운전을 했다. 둥글게 불거진 목뼈가 꽤나 자극적이었다. 나의 눈에 숫자가 들어왔다. 140km. 출근길이 끝나 한산한 도로를 그녀는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140에 걸려있던 막대는 금방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꼭 속도를 계속해서 밟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그녀는 차를 몰았다. 정지 신호마저 무시하며 교차로를 건너는 그녀를 보고 나는 결국 한 마디 했다.

“······좀 천천히 몰아주시겠습니까?”

그녀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죠. 어떡하든지 신주쿠에 도착만하면 되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열려진 창문의 바람소리에 밀려 금방 흩어졌다.





2장. 강철의 실





살인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물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곳은 마경(魔境)의 도시, 혹은 저주 받은 도시라 불리는 신주쿠였으니까. 국가의 힘이 제대로 닿지 않는 이곳에 하루에 수십 건의 살인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시체의 엽기성이었다. 죽음의 공포가 채 얼굴을 휩쓸고 지나가기도 전에 시체는 끔찍할 정도로 토막이 나있었다. 머리, 팔, 다리, 몸통이 마치 도살자에 의해 조각조각 썰린 돼지고기처럼 동강이 나있었던 것이다. 죽인 후에 일부러 공들여서 몸을 토막 냈다고는 생각이 되지 않았다. 살해자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살아있는 상대를 토막내버린 것이다.

그리고 흉기는······. 검? 총? 이런 것으로는 말도 되지 않는다. 이런 살해가 가능한 흉기는 그가 알기로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굵기 1,000분의 1미크론의 특수 강철 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릴 만한 가느다란 실로, 실뜨기를 해도 가능한 굵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쓰기에 따라 티탄 합금마저 절단하는 예리한 칼날로 변해 적을 절단했으며, 또는 뼛속까지 파고들어가는 투명한 로프로 변해 팔다리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사용할 수 있는 자도 신주쿠에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인형술사> 아키 세츠라.

“작정 했군요, 세츠라씨.”

입을 연 것은 여자답지 않은 큰 키를 가진 검은 머리칼의 여인이었다. 아니, 단지 큰 정도라고 하기도 뭣했다. 180센티미터가 훌쩍 넘어 보이는 키는 그녀의 마른 몸매와 어우러져 왠지 이질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시력이 좋지 않은지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눈매를 습관처럼 찡그렸다.

“세츠라가 아니야.”

병적으로 창백한 피부를 가진 호리호리한 사내가 고개를 저어보였다. 사내가 입고 있는 것은 우중충한 장례식용 검은 정장이었지만 그가 입으니 꽤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네? 하지만······.”

“세츠라가 이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봤나? 설령 마혈(魔血)의 각성을 한 세츠라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아.”

사내가 토막이 난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누구죠?”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나도 모르지. 그런데 이 녀석까지 당할 줄이야. 정말 <일월(一月)>을 상대할 생각인가 보군.”

죽은 남자는 센부 요시토. 신주쿠 최대 조직인 <아키마사>의 간부 중 한사람이었다. 토카레프를 잘 다루는 그는 조금의 과장도 없이 100발을 쏘면 95발은 원하는 곳에 맞출 수 있는 사격술의 달인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자랑하는 탄환도 쓸쓸히 반 토막이 나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는 죽기 전에 단 한 방을 당겼을 뿐이다.

“그래도 설마······.”

여인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확실히 지금까지 이런 방법으로 죽은 모든 이들은 아키마사의 조직원들이었다. 아마도 원한 관계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키마사의 두목인 다카시나 레이미를 목표라고 단정 짓는 것은 성급한 단정이었다.

-일월삼주(一月三舟).

아키마사의 두목 다카시나 레이미, 인형술사 아키 세츠라, 마도의사(魔道醫師) 메피스토. 그리고 바로 눈앞의 남자, 섬백(纖魄)의 고바야시 이하라를 이르는 말이었다.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곳 신주쿠에서 가장 강한 4인을 불교의 구절에 빗댄 별칭이었을 뿐이다.

그 중 일월이 바로 레이미였다. 그녀는 그야말로 어검(御劍)의 요녀(妖女)라는 명성에 걸맞게 신주쿠에서는 절대적인 실력가 중의 하나였다. 구시대의 야쿠자같이 고풍스러운 일본도를 한 자루 차고 다닐 뿐이었지만, 그 일본도는 피할 수 없는 어검이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아키마사 놈들만 사냥하고 다니는데··· 뭐, 뻔한 거지.”

이하라가 손을 뻗어 바람에 흐트러진 앞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치민다. 세츠라와 같이 ‘강철의 실’을 다룰 수 있는 또 다른 인간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설마 세츠라 정도로 강한 인간이 한명 더 있다는 우습지도 않은 일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은 아닐 테지. 이하라는 창백한 뺨을 긁적였다.

“그래서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이하라 선배?”

“흥미가 있어.”

이하라가 무덤덤하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것은 아무런 힘도 없는 허명무실한 신주쿠서(署)의 ‘일개’ 말단 형사이자, 동시에 가장 강한 형사이기도 한 그가 사건을 물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누군지 몰라도 참 재수 없군.’

이하라가 아끼는 후배이자 역시 ‘일개’ 교통과의 순사인 나카무라 스미레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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