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닐라 클럽 3부
바닐라 클럽 3부
3장
다음날 새벽, 나는 주무대인 천리안을 떠나 카마 몰래 하이텔로 잠입했습니다. 내 천리안과 하이텔의 아이디
는 틀리니 카마가 알아 차릴 턱이 없을텐데도 조심해서 움직였다. 나는 하이텔 성인 클럽에 있는 대화방
으로 무대를 옮겨 놓고 거미처럼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렸다. 하이텔에서 내 아이디는 멜 라니였다. 내
가 유일하게 남겨둔 여자 아이디였다. 시덥지 않은 남자들의 추파가 곧 줄을 이었다.
[아이, 튕기지 말고... 화끈하게 해 줄게.]
[다 알아. 너 굶주렸지?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갈테니까 어딘지만 말해.]
[잉, 누나. 나 좀 어떻게 해 줘요. 미치겠어요.]
[지금 쌀 거 같으니까 어서 와. 응?]
아무리 굶주렸기로서니 해도 너무 합니다 싶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는지, 어떤 여자가 컴섹을
하러 다니는 여잔지 알 길이 막막했습니다.
내게 첫 번째 전환이 찾아온 것은 아이디를 여자가 쓸만한 아이디로 바꾸면서였다. 그때 아이디가 외국
여자 이름같은 프랑스 시인 이름 발레리였다. 내가 발레리로 아이디를 바꾼 건 도무지 여자들은 물론 남
자들에게서조차 메모가 오지 않아서였다. 가끔 내가 여자들에게 얘기 좀 하지 않겠다며 메모를 보내면
여자들이 메모가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다는 식의 얘기들을 했습니다. 대화방 대기실에 들어오는 여 자보다
남자 숫자가 몇 배나 많으니 당연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남자란 사실이 밝혀진다해도 일단 말의 통로를 터
는 게 중요했습니다. 발레리로 바꾼 그날부터 메모와 편지가 봇물처럼 쏟아 져 들어왔다. 그렇게 내게 날아
든 메모나 편지들이 내 선생이었다. 저, 시간 있으면 저랑 얘기 좀 하실래요부터 거 참 너무 빼지 마,
죽여줄 테니까 어서 내 방으로 와까지 별별 메모와 편지들이 날아들었다. 게중에는 여자 맞아요하며 조
심스럽게 말을 거는 여자들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여자 행세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한참 얘기를 재밌게 하다가도 갑자기 브래지어 사이즈가 어떻게
되느냐? 거들 사이즈가 어떻게 되느냐? 아스트리젠트가 뭐냐? 지금 바르고 있는 파운데이션 이름이 뭐
냐? 등 여자가 아니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불쑥 던지는 거였다. 그럴 땐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느
낌이었다. 이렇게 몇 번 당하면서 예상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미리 준비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여자 노릇
에도 이력이 붙어 왠만한 질문에는 거침없이 대답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 쪽에서 도리어 선수를 쳤
다. 그새 나는 아이디를 발레리에서 애너벨리로 바꾸고 새롭게 변신했습니다.
나는 눈이 벌게 가지고 여자를 사냥하러 다니는 남자들보다 여자들과 얘기하는 게 취미가 맞았다. 비록
여자 행세를 하기는 했 지만 그걸 핑계로 여자들의 섹스 경험같은 걸 얘기하도록 유도하지 않았다. 제
감정을 못 이겨 늘어놓는 사랑 타령 같은 거야 들어주긴 했지만 말이다. 컴섹이란 걸 하게 된 결정적인
전환점은 내가 만난 여자들 중 하나, 블루리본이 만난 지 한달 쯤 지났을 때쯤 조심스럽게 레즈 비언이
란 걸 밝히면서부터였다. 나는 놀란 빛을 숨기며 말했습니다.
[그게 뭐 어때서 그래?]
[이해해 주니 고마워요. 언니.]
블루리본은 22살의 대학생으로 정보학과에 다닌다고 했습니다. 그외에는 별로 자기 얘기를 한 게 없는, 그러
니까 내 기억 속에서도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여자애였다. 특기할 사항이 있다면 내가 대화방에 들어갈
때마다 대화방 대기실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는 점 정도였다.
[저, 언니...]
나는 블루리본이 보내온 글자 속에서 많은 감정의 굴곡이 느껴져 긴장했습니다.
[왜?]
[언니만 괜찮다면요, 만나고 싶어서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인터넷에서 레즈비언들이 섹스하고 있는 사진을 많이 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금발이나 흑 인들 혹은 일본 여자들 사진이었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늘 사진 속의 여자들이
진짜 레즈비언일까 아니면 연출에 의해 찍은 걸 까 궁금했습니다. 그런 사진들에서 레즈비언의 섹스를 적나
라하게 보아와서 블루리본의 성생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것 보다는 어쩌다 레즈비 언이 되었나가
궁금했습니다.
[언제? 혹시... 지금은 아니지?]
블루리본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아뇨. 지금이요.]
나는 얼른 시계를 봤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너무 늦은 거 아니니? 나 내일 일 때문에 일찍 나가봐야거든. 나가기 좀 그런데...]
[아직 열두 시도 안됐는 걸요. 제가 언니 집 근처로 갈게요. 잠깐이면 되요.]
[꼭 얼굴을 봐야 되니?]
블루리본은 삐쳤는지 대답이 없었다. 나는 걱정이 됫다. 블루리본이 이방저방 돌아다니면서 애너벨리가
남자라고 소문을 낼경우에는 애너벨리로 쌓아온 인연들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처지였다.
[우리 집이 어딘지나 아니? 서울대학 근처야. 넌 어딘데?]
[휴---. 여긴 수유리에요.]
작전 성공이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판을 두드렸다.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겠지.]
[그렇기야 하지만요, 섭섭해요.]
나는 블루리본을 위로해주는 척하면서 본심을 드러냈다.
[다음에 만나게 되면 맛있는 거 사줄게. 됐지?]
[내가 뭐 앤 줄 알아요!]
블루리본의 퉁퉁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습니다. 그렇다고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미안. 그러면 어른으로 대할게. 이런 말 들어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마. 너, 있지? 어쩌다가 레즈비언
이 되었니? 사실은 나도 레즈거든.]
잠시 아무 말이 없던 블루리본이 입을 열었다.
[언니, 레즈 아니죠? 그런 질문이 어딨어요?]
블루리본은 팔랑팔랑 휘날리며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게 블루리본과의 마지막이었고, 애너벨리도 끝
장났다. 그날로 블루리본 이 애너벨리는 레즈비언을 가장한 남자라고 블랙리스트에 올려 버렸다. 그 일
이후에 내가 알아본 바로는 레즈비언이나 게이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게 아니라 어떤 계기로 인해 되어
가는 거라고 했습니다 . 그러므로 어쩌다 레즈비언이 되었니 어쩌고하는 질문은 틀리지 않았다. 블루리본이
야 말로 레즈비언 흉내나 내고 다니는 여자 아니면 남자였다. 블루리본 때문에 동성연애자들, 특히 레즈
비언에 대해 정보를 꽤 습득한 나는 아이디를 페미니로 바꿔 본격적으로 레즈비언 노 릇을 하기 시작했
다. 레즈비언들의 생각을 알아보고 싶다는 호기심에서 시작된 일이었는데, 나보다 엉성한 레즈비언 아류
들이 그 렇게 많은지는 몰랐다. 오빠 아이디를 빌려 쓴다는 녀석부터 아예 나처럼 여자 아이디를 쓰고
다니는 녀석까지 레즈비언에 관심이 있다며 접근하지를 않나 여자하고 하는 게 뭐가 좋아? 진정한 남자
맛을 보여줄테니까 만나자는 노골적인 녀석들까지 떼거지로 몰려 들었다.
녀석들은 내가 조금만 반응을 보이기만 해도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혼자 화장실 벽에 적혀 있음직
한 얘기를 하면서 아아 아아아, 음음음음음... 구역질 나는 신음 소리까지 곁들였다. 정말이지 진짜 레
즈비언을 찾기란 하늘에서 별따기였다.
[진짜 레즈라면 지금 전화로 얘기해요.]
밀키웨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여자였다. 나는 그때 동성여(구)라는 별명을 쓰고 있었다. 올 게 왔구나 싶
어 숨이 턱 막혔다. 그 때까지 밀키웨이처럼 당당하게 전화로 얘기하자는 여자는 없었다. 나는 더듬더듬
탈출구를 마련했습니다.
[전화하기가 좀 그러네요. 어머니가 잠 귀가 밝아서요. 옆에서 주무시거든요.]
밀키웨이는 서두르지 않았다.
[제 삐삐 번호를 알려드릴게요. 음성 메모를 남겨두세요. 그럼 믿을게요.]
그렇게까지 나오는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럴게요.]
[내가 여기 적어놓은대로만 녹음해 줘.]
책상을 나란히 하고 있는 4년 후배 박 정연은 내가 내민 메모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뭔데요?]
[친구를 골탕먹이려고 그러는 거야.]
나는 이미 밀키웨이의 삐삐를 확인해 둔 상태였다. 밀키웨이는 삐삐에 자기 목소리 대신 보헤미안 랩소
디의 첫 부분을 녹음해 두고 있었다. 누굴 골탕 먹인다니까 마냥 좋은지 박 정연은 손을 바삐 움직였다.
[저, 페미니거든요. 메모 남기라고 해서 이렇게 연락드려요. 오늘 아홉시에 어제 만났던 거기서 기다릴
게요. 혹 못 오게 되면 제 삐삐로 연락주세요.]
박 정연이 내 삐삐 번호를 또박또박 읽는 걸 보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출근하기 전에 벌써 내
삐삐의 음성 메시지를 지우고 솔베이지의 노래 를 녹음해 두었다. 밀키웨이는 정확하게 밤 9시에 대화방
에 나타났다. 내가 믿음을 줘서인지 생각보다 말이 많아졌다.
[제가 페미니님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요, 요즘 레즈 흉내를 내는 남자들이 많아서 확인을 하지 않을 수
없었걸랑요. 이해해 주 세요.]
[예.]
나는 다소곳이 대답했습니다.
[페미니님은 파트너 있어요?]
나는 파트너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침묵으로 대답했습니다.
[없나 봐요. 전 언니가 있어요. 가끔 언니 친구들이랑 같이 모이거든요.]
그제야 파트너가 섹스 파트너 혹은 애인이라는 걸 눈치챘다.
[전 얼마 전에 헤어졌어요. 대학 후배였어요.]
[저런... 제가 소개시켜 드릴까요?]
[그게 부담스러우면 저랑 언니들 만나러 갈 때 같이 가든지요.]
[만나서 뭐하는데요? 전 여럿이 어울려 본 적이 없거든요.]
[남들 시선도 있고 하니까 대개들 그렇지요. 우린 서로 집을 돌아가면서 만나요. 보통 대여섯 명이 모이
는데요. 거기서 마음에 맞는 짝을 찾아요. 다음엔 각자 알아서 하구요.]
[밀키웨이님은 파트너가 있다면서요? 처음 만나서 아무나 하고...]
밀키웨이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자판을 두드렸는지 내 말이 중간에서 잘려 버렸다. [오해마세요. 짝이
없는 사람들이 그런다는 거니까요. 어때요? 다음 모임 때 나올래요?]
[호출하세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상상만 해도 역겨운 짓을 하라고 나오라니..., 구역질이 나려고 했습니다. 그날로 나
는 레즈비언 노릇을 끝내 버렸다.
며칠 후, 밀키웨이라며 낭랑한 여자 목소리가 내 삐삐를 울렸다. 그날 저녁 7시에 신촌 홍익문고 앞에서
보자고 했습니다. 나는 그 곳으로 나가는 대신 삐삐 번호를 바꿔 버렸다. 나는 다시 남자 아이디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여자 사냥에 나섰다. 발레리와 애너벨리에게 접근하던 남자들의 수법을 그동안 충 분히 익혀
놓았기 때문에 컴섹할 여자를 찾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여자를 구슬러 첫 경험이나 섹스에 대한 환
상 같은 걸 듣는 거나 흥분을 시켜주기 위해 인터넷에서 포르노 소설을 읽고 마치 내 가 겪은 것처럼 얘
기해주는 일도 석 달이 넘자 지겨워졌다. 그 석달 동안 내가 얼마나 포르노 스토리텔러로서 명성을 날렸
는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겠다.
나는 컴섹계를 나와 진정으로 마음에 맞는 여자를 찾으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도 끈기와 절제가
필요했으며 덧붙여 매 너와 순발력과 유머가 겸비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귄 여자가 수 십명은 족히
되었다. 그 중 몇몇을 호기심으로 현실 공간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불행하게
도 만나는 족족 기대 이하였거나 거짓말장이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내가 깨달은 건 가상 세계에서의 만
남은 가상 세계 속에서 끝내야 합니다는 거였다. 가상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현실 로 걸어나올 때는 정말
로 초라하고 볼품없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게중에는 근사한 여자도 있겠지만 그런 여자를 찾으려면
엄청난 투자가 뒤따라야만 할 것 같았다. 운이 좋으면야...
하지만 운 이란 게 어디 믿을만 한 것인가? 그렇지만 얘기나 하는 건 괜찮았다. 하이텔 아이디를 멜라니
라고 해 놓은 것도 단지 그 이유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