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닐라 클럽 4부
바닐라 클럽 4부
4장
[이번만 용서하겠어요, 멜라니. 내가 당신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난 이미 당신에 대해 다
알고 있어요. 또 다시 약속을 어기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당신에게 타격을 주겠어요. 내
말 명심해요. 카마.]
내가 벨 소리에 잠을 깬 시간이 12시 경이었다. 진한 노란색 조끼를 입은 청년이 현관에 서 있다가 내
이름을 확인하고는 조그 만 상자를 건넸다. 상자를 풀자마자 메모지가 나풀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는데,
거기에 카마의 협박에 가까운 말이 적혀 있었다.
[이런 처 죽일...]
점심을 동네 중국집에서 배달시킨 울면으로 떼우면서까지 하이텔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낚시광이어서
가 아니었다. 내 생체 리듬을 회복하기 위해서 내 몸과 정신에 세뇌된 시간 개념을 흐리게 만드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시계들은 다 쓸어 침대 아래에 던져 버리고 멍하게 컴퓨터 화면에
나온 낚시터 풍경과 낚시대를 바라보고 있는 참이었다. 가끔씩 창 너머로 멀리 보이는 관악산을 바라보
면서 눈의 피로를 푸는 게 고작이었다. 정작 내가 선택한 자리는 잔챙이들밖에 잡히지 않는다는 갈대 숲
사이였고, 한 시간이 넘게 한 마리도 낚아올리지 못한 상태였 다. 내가 원했습니다면야 벌써 수십 마리를 낚
았을 것이다. 미끼도 끼우지 않은 채 낚시대를 던져 두었으니 물고기가 낚일 리가 없었 다. 강 태공 흉
내를 내는 동안에도 내 머리는 맑아지지 않았다. 뭔가가 내 머리를 꾹 누르고 있는 듯 불편하고 답답했
고 누가 내 뒤 통수에 딱 붙어 있는 것 같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회사 일 때문도 아니었다. 곽 재원도
문제가 아니었다. 카마? 부인하고 싶지만 사실은 그 여자가 문제였다.
감시 당하고 있다는 느낌, 바로 그게 내 두통의 원인이었다. 카마의 하수인들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은 인정하기 싫지만 이미 두려움으로 변해버린 터였다. 감 시를 피하는 한 방
법으로 내가 택한 것이 낚시터에 할 일 없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극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아
까 말 했듯 회사의 구성원이 아닌 주체적인 존재로 변신하기 위해 사회적 시간 감각을 흐트리고 재정돈
합니다는 뜻도 들어 있었으니까.
곧장 가입/탈퇴 신청하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멜라니의 탈퇴신청서를 냈다. 멜라니가 그동안 만들
어 놓은 여자 관계도 모두 반납하였다. 적장 앞에 꿇어앉아 항복하는 왕의 심정과 다를바 없이 참담했
다. 최단 시간에 탈퇴를 원합니다는 주를 달아 탈퇴신청서를 쓰는 동안, 나는 한가지 유혹에 빠져 들었다.
카마를 통합니다면 나 역시 카마처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힘을 가질 수 있지 않겠나 싶었다. 누군가의
신상 정보를 쉽게 빼내고 그걸 이용해서 위협할 수 있다는 건 분명 불법이다. 하지만 그런 능력을 가진
다는 건 불법이 아닐 것이다. 불법이라고 해도 좋았다. 카마가 나를 조사했듯 카마의 능력을 역이용해서
카마를 조사하게 된다면 피장파장이 될 테니까.
나는 천리안으로 들어가서 카마, 아니 아나이스에게 멜라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편지를
보내 카마의 화를 풀어주 려고 했습니다. 막상 편지 쓰기로 들어가 수신자를 쓰는 란에 아나이스라고 적었는
데 그런 아이디를 가진 회원이 없다는 메시지만 반 복되었다. 다른 통신회사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인
터넷 메일 주소라는 게 피씨통신회사에 가입해야만 생기는 것이니 인터넷으로도 메일을 보낼 수가 없었
다.
[이런...]
카마와의 모든 끈이 두절되어 버렸다. 나는 한밤중에 사막 한가운데 버려졌다. 흙으로 된 관 속에 갇힌
꼴이었다. 나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그 공상에서 빠져 나왔다. 무슨 수든 써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질식해 버릴 것만 같았다.
[당신을 시험해 보려고 해요. 당신에게는 힘든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내게 믿음을 증명해 보여야
해요. 당신이 벌써 약 속을 어긴 거 잊지 않았겠죠?]
팽개쳐 두었던 상자의 포장을 뜯으니 녹음 테이프가 들어 있어 틀었다. 카마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차
분해서 원숙한 느낌을 주 었다. 누구의 곡인지 모르겠지만 교향악단이 연주하는 장중한 클래식 곡이 카
마의 목소리 아래 깔려 있었다. 짐작가는대로 말해보라면 바하나 그 시대의 작곡가들이 만든 바로크 음
악이 아닌가 싶다.
[오 진택이란 사람에 대해 알려고 들지 마세요. 당신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신을 위해 만
든 거에요. 당신이 시험 해 보면 알겠지만 그 카드는 아무 이상이 없어요. 뒷 일은 내가 처리할테니 당
신 쓰고 싶은대로 쓰세요. 카드 뒷면에 사인 쓰는 란이 있죠? 오 진택의 사인은 당신 마음대로 만들어
요. 비밀번호는 육이삼사, 다시 말할게요. 육이삼사, 알겠죠?]
나는 카마의 말을 들으면서 테이프와 함께 들어있던 신용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리모콘으로 정지
버튼을 누른 후 신용 카드를 눈 앞에 대고 자세히 살펴 보았다. 유효 기간이 2002년까지로 되어 있는 골
드 카드였다. 카드 모서리에서 까칠까칠한 느낌이 느껴질 정도로 사용한 흔적이 없는 새 카드였다. 도대
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재생 버튼을 눌렀다.
[대신 당신이 가지고 있는 신용 카드는 다 내버리세요. 그게 싫다면 내가 당신 앞에 나타날 때까지만 쓰
지 마세요. 난 당신이 뭘 좋아하고 어딜 잘 가는지 알아야겠거든요. 카드는 내 손에 없지만 카드 번호와
비밀 번호를 알고 있으니까 조회를 해 보면 당 신이 카드를 쓸 때마다 당신이 어디에 있었고, 뭘 했는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거에요. 좀 기분이야 나쁘겠 지만, 어때요? 내 제안에 동의하
세요? 동의합니다면 내게로 편지를 보내요. 새 주소 [email protected]이에요.]
[점점... 경찰에 고소해 버려...]
그러나 내 손가락은 리모콘의 되감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다시 재생을 시켜놓은 후 카마의 새 인터넷
메일 주소를 메모했습니다. 정보는 어차피 누출된 것, 따져도 카마를 만나서 따지는 게 순서일 듯도 싶기도
했고 카마의 유혹을 뿌리치기도 힘들었다. 나는 서둘러 인터넷으로 들어갔다. 카마의 제의에 대해 구체
적으로 생각해 보지도 않은 상태였다. 일단은 만나야합니다는 생각 뿐 이었다. 내가 쓰는 인터넷 프로그램
은 네스케이프사의 네비게이터였다. 네비게이터에서 카마에게 편지를 썼다.
[황당하네요. 도대체 얼마나 돈이 많길래 신용 카드를 막 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남편 몰래 남편
이름으로 만든 거 아닙 니까? 저는 감시당하는 게 싫습니다. 카드도 필요없습니다. 사람 잘못 봤어요.]
여기까지 써 놓고서야 나는 카마와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어느날 불쑥 나타나서 나를 자기
손 안에 쥐고 뒤흔들려 는 여자.
[나에게 명령하고, 하지만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하지, 나를 농락하고, 그렇게까지 심하게 얘기할 건 없
을 거 같은데, 나를 얕 잡아 보고, 얕잡아 본다고 하기는 좀 곤란한데, 나를 시험하고, 아직 시험한 건
아니지.]
내 속에 다른 내가 있어서 자꾸 카마 쪽으로 나를 유인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보려고 머리
를 싸매면 편두통이 나 를 가로 막았다.
[어차리 이렇게 된 거 한 번 부딪쳐 보는 거야.]
나는 편지를 이어갔다.
[하지만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편지 잘 받았어요.]
인터넷 메일을 보내고 채 30분도 안 되어 카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카마가 내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
는 사실에도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사실 그건 카마가 이미 알아낸 내 신상 정보에 비하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테이프에서 목소리를 들어서인지 카마의 목소리도 낯설지 않았다.
[너무 일방적이란 생각 안 드십니까?]
내 퉁명스런 말투에도 카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예상보다 목소리가 마음에 드는군요. 좀 더 딱딱하고
건방지게 얘기해 줄 수 있어요?]
그렇잖아도 그렇게 얘기할 참이었다. 그러나 처음 통화하는 사람한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누구 놀리는 겁니까? 사람 가지고 장난...]
[그게 아니죠. 아예 반말을 하세요.]
카마의 목소리는 나를 놀리는 듯 생기가 넘쳐 흘렀다.
[왜 말이 없어요? 말 좀 해 봐요.]
나는 머쓱해져서 겨우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반말을 하는 게 좀...]
[호호호. 괜찮다니까요. 내가 괜찮다는데 누가 뭐래요?]
[이거 쑥스러워서, 원...]
[호호. 좋아요. 그럼 존댓말로 하세요. 됐죠?]
나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카마의 가라앉은 듯 하면서도 발랄한 목소리가 내 고막
을 간지럽혔다.
[내가 시험을 하겠다고 했죠? 이제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으세요. 하지만 메모는 하지 마세요. 이틀
후, 오월 팔일이 되겠네 요. 롯데 호텔과 롯데 백화점을 잇는 통로로 가세요. 거기에는 보석 상점이 많
은데 그 중에 마라라는 상호를 가진 상점이 있어요 . 정확하게 세 시에 그 상점 앞에 가서 상점 안을 들
여다 보세요. 연한 코발트블루 원피스를 입고 같은 색 모자를 쓴 여자가 있 을 거에요. 모자 챙이 넓으
니 금방 알아볼 거에요.] 그러나 나는 메모를 하고 있었다. 짐짓 딴청을 부리며 말했습니다.
[그래서요?]
[그 여자를 다섯 시까지만 쫓아다니세요.]
[네? 미행을 하라는 겁니까?]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그렇게만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아요. 누군가를 관찰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도 좋잖아요? 살기 바빠 그럴 기회도 별로 없으니까 그렇게 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에요. 다
음에 다시 연락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