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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서리 - (3/6)



3. 마음 서리


도치가 겨우내 장작으로 쓸 나무를 해서 지게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령은 마당의 평상에 풀을 말리고 있었다.


도치가 가르쳐 준 곳에서 잔뜩 꺾어 온 풀을 평상에 잘 펴서 말리던 이령이 지게를 메고 들어오는 도치에게 다가가 그가 등에서 지게를 벗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령은 아무래도 도치의 상처가 계속 신경이 쓰여 그가 하는 모든 일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대체 이 손으로 어떻게 도끼를 휘두른 거예요? 상처가 터진 게 아닌가 몰라요.”


산에 장작을 하러 도끼를 지게에 얹고 나갈 때부터 이령은 계속 걱정했다.

엄청나게 깊게 상처를 입어서 명주실로 꿰매기까지 한 손이다.

그 손으로 도끼를 잡다니. 정말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말렸지만, 사내는 못 들은 척 기어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왔다.


사내에게 사내의 고집이 있다면, 이령에게는 이령의 고집이 있다.


“이리 와 봐요. 상처를 봐야겠어요.”


사내는 어제 도성에 들어가는 길에 고약을 사 왔다. 이령이 귀에 딱지가 앉게 약을 사 오라고 잔소리를 한 까닭이었다.

사내를 기어이 평상에 앉힌 이령이 그의 손을 붙잡고 그 손에 감긴 천을 풀었다.


천을 다 푼 이령의 미간이 퍽 구겨졌다.

사내의 상처는 벌겋게 일어나 있었다.

아직 꿰맨 명주실이 그대로 보였고, 상처는 아물 기미도 없었다.


“이러다가 손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이령이 화를 냈다.


이 사내는 왜 제 몸을 아끼는 법을 모르는 걸까.

날도 추운데 얇게 입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화로를 자신에게 밀어 주고 멀찍하게 떨어져서 자는 것도 그렇고, 이 손도 그렇고, 사내는 왜 제 몸을 아끼지 않는 것일까.


이 몸이 어찌 이 사내만의 것인가.

자신은 이 사내의 아내다. 그러니까 이 사내의 몸은 곧 이령 자신의 몸이기도 했다.

충분히 이 사내에게 잔소리를 할 자격이 있다고 이령은 생각했다.


부친의 뜻에 의해 집에서 쫓겨나 어쩔 수 없이 이 사내의 아내가 되긴 했지만, 아내는 아내다.

싫든 좋든 이 사내와 계속 살아가야 하는데, 이 사내의 몸이 상하면 자신은 어찌 되겠는가.


“당신 혼자 몸이 아니잖아요. 당신이 잘못되면 나 혼자 어떻게 살겠어요.”


이령이 얼굴을 푹 숙이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겨우 이 말을 하는데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이 사내와 살게 된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언제 시간이 그렇게 지났나 싶을 정도로 보름이나 지나 버렸다.

이제 마당의 감나무 가지에는 나뭇잎이 몇 개 달려 있지도 않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제법 달려 있던 나뭇잎들이 이제는 전부 떨어지고 고작 몇 개만 남았다.


얼마 후면 눈도 내릴지도 모른다. 진짜 겨울이 시작되는 것이다.

보름은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긴 시간이다.


이 사내와 벌써 보름이나 이 집에서 함께 살았다.

벙어리라 말을 못하는 사내와 거의 온종일 같이 있었으니 이제는 더는 사내가 어색하지도, 무섭지도 않다.

아니, 이 사내는 처음부터 무서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없었다면 거짓말이고, 이곳에 온 첫날부터 이 사내는 이령의 마음을 안심시켜 줬다.

그것이 그렇게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령은 안다.

이 사내가 말은 못하지만 이 사내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이령은 이 사내의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부친의 집을 나오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부친이 저를 죽으라고 내보낸 것이 아닐까, 하필이면 왜 이런 사내에게 보낸 것일까, 이해할 수 없어서 원망도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부친이 제게 가장 좋은 도피처를 마련해 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친과 이 사내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친은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사내에게 저를 보내면 적어도 이자가 저를 박대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적어도 저를 울리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이 사내에게 보낸 것이리라.


물론 이 삶이 최선의 삶은 아니라는 건 안다.

최선의 삶은 정해진 대로 태자와 혼인해서 태자비가 되는 것이지만, 겁탈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사고를 만난 직후 차선의 삶으로는 이것이 그나마 나은 길이다.


이제는 돌아가지 못하는 곳은 잊어버릴 생각이다.

그것을 내려놓기까지는 이령도 꽤 힘들었다.


하루를 보내며 문득문득 이언궁에서의 생활이 생각이 났고, 은아와 자인이 생각났다.

부친이 생각났고, 몇 년 전에 만났던 태자가 생각이 났다.

이제는 돌아가지 못하는 그때를 그리워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더는 그리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워한다고 해서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돌아가지 못하는 곳을 계속 그리워하면 결국 마음만 아플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받아 준 이 사내에게 그것은 예의가 아니다.

어떤 이유가 됐건 간에 이 사내는 자신을 받아 줬다. 그것도 아내로 받아 줬다.


이 사내의 아내가 되었는데 계속 돌아가지 못하는 곳을, 이제는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이 사내에게 못 할 짓이다.

그래서 이령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제는 다 잊고, 그리움은 접고 이 사내만 바라보기로 했다.

이 사내가 좋은 사람이라서, 이 사내가 다정한 사람이라서 오히려 다행이다. 마음을 주기에 딱 좋은 사람이라서 다행이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긴 했다.

이곳에서 사는 보름 동안 이 사내는 제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고자가 아닌 이상 그럴 수 있는 것일까.

고자거나 참을성이 많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이 사내가 고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참고 있다는 것인데 참을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참는 것이 아니라 싫은 것이 아닐까? 그것이 이령은 무섭다.


자신에게는 겁탈당했다는 아픈 과거가 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내에게 이미 손을 탔다. 어쩌면 이 사내도 그것이 싫은 것일까.


처녀가 아니면 싫어서 제게 손을 대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아니면 기다리는 것일까.


지금 이령이 무서운 것은 어쩌면 그 하룻밤의 겁탈로 자신의 안에 애가 들어설 수 있다는 사실이다.

괴한의 아이를 가진다면, 그 아이를 어찌해야 좋을까.


이건 자신만의 걱정은 아닐 것이다. 

이 사내도 어쩌면 그것을 걱정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두 달만 지나면 아이가 들어서는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까 그때까지 기다리려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사내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리가 없다.


“앞으로 계속 함께 살아야 하는데,  조금은 같이 사는 사람 생각도 해 주고, 제가 걱정하는 걸 봐서 몸도 좀 아끼고 그러면 얼마나 좋아요.”


지금 제가 하는 말을 사내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령은 그게 궁금했다.

사내의 표정을 보고 싶지만 그럴 용기가 없어 이령이 사내의 손바닥 상처에 고약만 꾹꾹 펴 발랐다.


손이 참 크기도 했다. 제 얼굴보다 더 큰 손의 상처에 약을 발라 주며 이령이 애써 아무렇지 않게 보이려 숨을 골랐다.


약을 다 발랐는데도 이령은 그 위에 약을 덧바르고 또 덧발랐다.

고약 통의 절반이 비어 가도록 약을 바르고 난 후에야 이령이 사내의 손에 다시 깨끗한 천을 감아 줬다.


손을 놓는 것이 아쉬웠다.

약을 발라 주고 천을 감아 준다는 핑계로 사내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기분 좋다.

이 손을 잡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

이 사내의 등을 보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


한밤중에 바람이 문을 흔드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겁이 와락 났다가도 화로 너머에서 잠들어 있는 이 사내의 윤곽을 보고 있으면 안심이 되었다.

자신이 이 사내를 보면 안심이 되듯이, 이 사내도 저를 보면 좋은 마음이 들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이 사내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떠맡은 짐짝? 

아니면 평생 같이 살 아내? 말을 못하니 대답을 들을 수 없고, 대답을 들을 수 없으니 이 사내의 생각을 알 수 없어 이령은 그것이 답답했다.


“저기, 억지로 이렇게 되긴 했지만.”


이령이 용기를 냈다.


이령은 지금까지 용기를 낼 일이 없었다. 금지옥엽으로 이언궁 안에서 살아왔으니 굳이 용기를 낼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백부인 황제에게서 사랑받고 다른 왕실의 어른들에게서도 그저 귀여움만 받았다.

부친이 저를 아껴 주고 이언궁의 모든 이가 저를 떠받들어 주니 용기를 낼 일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령의 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엄청난 용기를 내야 할 때다.


“우리는 부부잖아요. 부부니까, 그러니까.”


당연한 말을 했는데 왜 이렇게 부끄러운 것일까.


“그러니까, 이제 한 이불을 덮고 자도.”


숨이 막혔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고 자꾸만 귀가 가려웠다.

저도 모르게 지금 사내의 손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사내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 것처럼 이령이 그 손을 꽉 잡았다.


그때 사내가 이령에게서 손을 빼냈다.

그 큰 손이 제 손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이령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이것이 꼭 사내가 저를 거절하는 것처럼 느껴져 이령의 눈가에 순간 눈물이 차올랐다.


뚝.


차오른 눈물이 바닥에 한 방울 떨어졌다.


울려고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눈물이 떨어졌다.

그때 사내의 손이 이령의 젖은 눈가에 닿았다.


투박한 손끝이 이령의 눈가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닦아냈다.

그 손끝에 이령이 얼굴을 들어 올렸다.

사내의 눈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수염이 얼굴을 덮고 있어서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지만, 눈은 그녀를 똑바로 향해 있었다.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이령도 알 수 있었다.

저를 보는 사내의 눈동자가 이렇게 흔들리는 것은 처음이다.

무슨 뜻일까.


“제가 처녀가 아니라서 싫은 것이라면.”


스스로 꺼내기 싫었던 말을 이령이 겨우 입 밖에 끄집어냈다.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 자신을 향한 사내의 마음, 자신을 대하는 사내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


“겨울이 지나면 여기서 나갈게요. 더부살이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겨울 동안 보살펴 주신 은혜는 패물로 대신 갚고.”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떠나지 말라는 뜻이다.


“제가 당신의 아내가 맞나요?”


사내가 잠시 망설였다.

그 망설임이 이령은 가슴 아팠다. 왜 곧장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것일까.

그래 주면 좋으련만 왜 사내는 곧장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주지 않는 것일까.

마음이 없다면 자상하게 대해 주지나 말지.

그럴 생각이 없다면 왜 지금껏 자신에게 이렇게 잘해 준 거란 말인가.


나쁘다.

나쁜 사내다.

그때 사내의 손이 이령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바닥이 거칠었다.

그러나 그 거친 손바닥이 주는 포근함은 다른 무엇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비단도 이렇게 포근하지 않을 것이다.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아내가 아니라는 뜻인지, 아니면 떠나지 말라는 뜻인지 알 길이 없다.


“저는.”


이령이 다시 물어보려고 할 때였다.


그보다 더 빨리 사내의 손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뺨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사내가 그 품으로 이령을 끌어당겼다.

사내의 품에 폭 감싸이듯 안긴 이령의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사내의 손이 그녀의 머리와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 손길에 용기를 얻은 이령이 사내의 가슴 자락을 두 손으로 가만히 움켰다.

그리고 그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사내 특유의 체취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쇠 냄새였다.

온종일 칼과 도끼를 만지는 탓에 사내의 몸에는 쇠 냄새가 배었다.

그런데 그 냄새가 싫지 않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어.’


지금 제 뺨으로 느끼는 이 두근거림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사내의 것이다.


제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리는 것처럼 사내의 가슴도 그렇게 뛰고 있다는 것을 이령이 깨달았다.

지금 가슴이 이렇게나 뛰는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이 사내가 저 때문에 가슴이 뛰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금은 충분히 족했다.


더한 것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어차피 이곳 아니면 갈 곳도 없다.

겨울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 좋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대답은 늦어도 된다.

그저 이 사내의 마음과 제 마음이 같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 * *


“제가 당신의 아내가 맞나요?”


이령이 제게 한 말을 떠올리며 사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사내는 지금 무기를 실은 수레를 끌고 도성 안에 들어와 있었다.

사내가 향하는 곳은 이언궁이다.

오늘 고기는 이언궁에서 부탁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내는 벌써 보름째 이언궁에 고기를 들여가고 있다.

다른 때 같았더라면 매일같이 도축한 고기를 수레에 싣고 들어가는 것을 의심받았겠지만, 지금은 이언궁에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이언궁의 주인인 칠 왕야 사독의 딸이 보름 전에 죽었다.

왜 죽었는지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성 안에는 그녀가 괴한에게 겁탈당하고 그 수치를 이기지 못하고 목을 매달아 자진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공주의 장례이기 때문에 국법으로 한 달 동안 치러지게 되어 있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그 한 달 동안에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서 고기가 매일 필요했고, 그 고기를 들여간다는 명목으로 사내는 매일 도성 안으로 들어와 이언궁에 무기를 숨긴 수레를 가지고 들어간다.


사내의 발이 이언궁의 대문 앞에서 멈췄다.

대문에는 흰 종이 등이 걸려 있었다.

사람이 죽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령은 멀쩡히 살아서 자신의 집에 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사독과 이령 그리고 그녀의 호위 무사와 몸종밖에 없다.


이언궁 안으로 들어선 사내가 수레를 끌고 뒤뜰로 갔다.

이언궁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침울했다.

죽은 소녀에 대한 추모로 궁 전체가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그 침묵 속을 걸어 뒤뜰로 간 사내가 수레를 멈췄다.

그러고는 도축된 고기를 두 손으로 들어 창고 안으로 옮겼다.


창고 안에는 고기가 아니라 병장기들이 가득했다.

지금까지 사내가 실어 온 무기들이었다.

그것들을 전부 쌓아 놓은 다음 바깥 부근에 고기를 쌓고 밖으로 나왔다.


빈 수레를 끌고 다시 밖으로 나오려는 사내의 눈에 황궁에서 나온 이들이 들어왔다.

입고 있는 복색이 황궁의 내관들이 분명했다.


죽은 공주를 위한 문상을 온 것일까. 아니면 황제의 하사품을 가지고 온 것일까.


황제가 죽은 공주를 무척이나 아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황제는 폭군에 무자비한 인물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령 공주를 친딸처럼 아껴서 그녀가 살아 있을 때 온갖 선물을 안겨 줬다는 것을 사내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다.

그런 이유로 이령 공주와 태자가 정혼한 것이다.


남들은 칠 왕야 사독을 황제의 총애를 받는 막냇동생 정도로 알고 있다.

그 실상과 감춰진 진실을 아는 자는 거의 없다.

진실을 알게 되면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진실을 아는 자도 없고, 설령 안다고 해도 말하는 자도, 알은체하는 자도 없다.

당사자인 칠 왕야 사독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이유로 아마 이령 공주는 죽을 때까지 그녀 자신이 황제의 조카로 사랑받았다고 믿을 것이다.

절대로 부친이 백부인 황제를 향해 반역을 일으킬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를 것이 분명하다.


“제가 당신의 아내가 맞나요?”


그녀가 그렇게 물었을 때 맞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 정말 그녀가 자신의 아내였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다.


더 바라는 것이 없다.

욕심도 없고, 더 과한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녀 한 명만 자신에게 허락된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원래의 이름을 버리고 백정으로 살아가라고 해도 상관없다.


도치라는 이름은 이 사내의 이름이 아니다.

이 사내에게는 다른 이름이 있다.

이 사내도 그 이름을 사용해 본 적 없고, 다른 누구도 이 사내에게 그 이름을 불러 준 적이 없지만 이 사내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다른 이름이 있다.


희원.


그것이 이 사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이름이다.


그러나 부모조차 그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 그 이름은 그저 사서에 한 번 쓰였을 뿐이다.


희원.


기쁨이 되라는 뜻의 이름이다.


살아오면서 기뻤던 일은 거의 없었지만, 이령을 만나면서부터는 모든 날이 기뻤다.


사내가 황궁의 내관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말고 얼른 그 자리에 엎드렸다.

그들이 사내의 앞을 지나갔기 때문이다.


사내는 백정이고, 백정이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지금처럼 고기를 가져올 때뿐이다.

다른 때는 함부로 도성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다.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신분이 높은 이들을 만나면 그 자리에 엎드려서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지금처럼 말이다.


땅에 엎드린 사내의 앞을 황궁의 내관들이 지나갔다.


“이제 어떻게 될지 모르겠구만.”


“이령 공주가 그리 죽었으니, 태자 전하는 또 어떻게 되실지.”


내관들이 주고받는 말이 사내의 귀에 들어왔다.


“태자 전하는 얼마나 버티실 것 같은가?”


“태자궁의 궁녀들 말로는 고작해야 한 달이라고 하더군.”


그런데 그들이 주고받는 말이 심상치 않다.


내관들은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그들이 지나가자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저만치 멀어져 가는 내관들을 쳐다보는 사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 말은 무슨 뜻일까.

태자가 한 달을 버티지 못한다는 것은 누가 그를 죽이려 든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일까.


아마 후자일 것이다.

병이 들었거나 큰 부상을 입었거나.


태자는 이령의 정혼자다.

사독의 거사가 성공하면 이령은 다시 태자와 혼인해서 태자비가, 아니 황후가 될 것이다.

그런데 태자가 위독하다면 이령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독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만약 태자가 위독하다면, 거사와는 상관없이 살아날 수 없는 지경이라면 그래도 이 거사가 끝난 후 이령이 돌아와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태자가 없다면 이령도 돌아와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그냥 그대로 자신과 함께 그곳에서 살아도, 이대로 이령은 죽은 자로 남고 자신과 그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사내의 가슴에 욕심이 차올랐다.

태자가 죽는다면.

태자가 죽어 버린다면.


지금까지 한 번도 태자가 죽기를 바란 적이 없지만, 지금은 간사하게도 태자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속에서 밀고 올라왔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령을 가지고 싶다. 태자를 미워해서라도.


마음은 이미 이령에게 전부 빼앗겼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을 빼앗겼다. 남김없이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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