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탈-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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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내가 정리되자 곧 흰색 예복을 차려 입은 시종장이 나와 목청을 드높였다.
"성 주다스 피스트의 군주이시며, 모든 왕국 시민들의 마음의 아버지이신 차폰 그레이멀스 주다스 피스트 폐하의 입장이십니다."
금빛 찬란한 예복을 빼 입은 국왕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젊은 사람이었다. 숫기 없어 보이는 차폰에게서는 위엄이 쥐똥만큼도 느껴지질 않았는데, 시종장의 지시에 따라 귀족들의 문안에 화답하며 자리에 앉는 모습이 샤샤의 눈에는 한심하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대한민국이었다면 왕따 당하기 딱 좋은 타입이었다.
"어차피 허수아비야. 차폰 국왕은."
얀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고 그런 차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다시 경쾌한 왈츠가 홀 내부에 울려 퍼지며 짝이 이룬 귀족 커플들이 화려한 의상을 뽐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샤샤는 춤 따위에는 관심도 없던 터라 그냥 홀의 가장 자리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간단한 음식들을 집어 먹고 있었다.
"우물우물... 얀 누님. 언제..."
"기다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조금 있으면 교황도 나타날거야."
얀의 목소리에서 살짝 긴장감이 느껴졌다.
교황과 왕이라.
무식하기로는 만인을 감탄시켰던 샤샤였지만 어느쪽이 더 높은 의미로 쓰이는 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긴 국왕이 저 꼴이니 오죽하겠는가만 샤샤의 머리 속에서는 앞으로의 플랜이 주욱 그려지고 있었다. 그는 이번 기회를 잘 이용할 참이었다.
"어차피 나는 안 죽는다. 아니 못 죽는다. 그러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싸지르고 보자."
뭔 짓을 해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과 여차하면 도망가기에 충분한 실력이 그의 무대뽀 용기의 원천이었다.
"교황 성하 납시오!!"
곧 모든 음악이 멈추고 귀족들이 다시금 좌우로 갈라서는 와중에 실내 조명이 꺼지고 은은한 은빛 안개가 바닥에서 피어 올랐다. 더불어 파이프오르간이 홀로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니 그 뽀대가 국왕쪽보다 단연 위였다.
"성 주다스 피스트의 기둥이시며, 모든 왕국 시민들의 마음의 어머니이신 알레고리 그레고리 곧 뒈질 엑스트라 3세 성하의 입장이십니다."
시종장에 부름에 이어 눈처럼 하얀 망토와 신비로운 분위기의 예복을 잘 차려 입은 좀비가 등장하자 장내는 온통 열기로 가득찼다. 그야말로 실질적인 주다스피스트의 지배자였기 때문에 혹여라도 눈에서 벗어났다가는 앞에서는 뭔 소리를 하던 간에 뒤에서 개 쳐발리는 신세를 면치 못하기 때문이었다.
국왕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교황을 맞이하고나서 조명 스탭들은 다시 장내를 환하게 밝히고 낮은 음의 합주곡을 연주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귀빈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얀 디아볼레로님의 작위 수여식을 잠시 후에 거행하겠으니 귀빈들께오서는 한분도 남김없이 참석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샤샤가 놀란 눈으로 얀을 바라보자, 얀은 입가에 싱긋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제야 샤샤도 눈치챌 수 있었다. 오늘의 거사를 위해 얀이 거짓으로 주다스피스트의 작위를 받기로 했다는 것을. 대가리 수만 좆나게 많았지 쓸만한 인재들이 부족한 성국인지라 소드 마스터의 소유를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자리가 유독 클 수 밖에 없었다.
"얀 디아볼레로님께서는 앞으로 나와 주시길 바랍니다."
"다녀 올게. 얌전히 있어... 금방 끝날 테니까."
얀은 활짝 웃었다. 어쩌다 얀 때문에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지만 그녀가 아름다운 것 만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조국을 구하려는 자기 희생으로 불타오르는 여자라면 더더욱.
얀이 천천히 홀의 한가운데에 드리워진 붉은 카페트 위를 걸어 왕좌의 앞에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자, 자리에 앉아 사이좋게 호박씨를 까던 차폰과 알레고리 3세의 시선도 그녀를 향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샤샤는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좋은 건 알아가지고.]
"그대는 명성 높은 대륙 검사의 신분으로 이제 지고한 주다스피스트의 명예를 수호하고 주신 피스트의 이름을 섬길 것을 약속했기에, 나 차폰 그레이멀스 주다스 피스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바람의 손 얀 디아볼레로에게 백작 위와 함께 새로이 에리얼의 성을 수여한다. 그대는 옛 역사의 시작을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이후로는 주신 피스트의 가호 아래 멸망과 죽음을 왕국과 함께 공유할 것을 그 순수한 영혼에 각인시킬 지어다."
"나, 얀 디아볼레로 에리얼은 나의 검으로 조국을 수호하고 나의 지혜로 조국을 살찌우며 나의 믿음으로 조국을 영예롭게 할 것을 맹세합니다."
얀은 엎드려 국왕의 발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국왕에게의 절대 복종을 의미하는 행사가 끝나자 곧 교황이 자리에서 일어나 근위병들 사이를 지나 차폰에게 다가왔다. 찰나였다. 얀이 차폰의 손에서 예식용 검을 들어 알레고리의 목을 내려친 것은.
"꺄아악!!!"
막 축하의 의미로 행진곡을 연주하던 합주가 중단되며 홀이 원초적인 혐오감을 느낀 여자들의 비명 소리로 가득찼다. 뒤이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귀족들의 고함소리와 근위병들의 철걱거리는 갑주 소리가 홀을 아수라장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꼼짝 마! 경거망동하면 국왕의 목숨은 없다!"
마스터의 손에 들리면 나무 젓가락도 흉기가 된다. 근위병들이 멈칫거리는 사이 테라스가 산산조각나며 검은 옷을 입은 괴한들이 홀의 귀족들을 포위해 들어갔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적도를 물리쳐라!!!"
귀족들은 입만 살았지 파티복 한장만 덜렁 입고 있었기에 무장 괴한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근위병들 조차 인질로 사로 잡힌 국왕 차폰 때문에 주춤거리는 사이 실내는 완전하게 제압되었다. 쿠데타는 성공이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요, 에리얼 경..."
얀은 씁쓸한 미소를 띄며 어린 국왕을 내려다 보았다. 18살에 발육조차 완전하지 않은 왜소한 몸매. 한 국가의 무게를 짊어지기엔 너무나도 연약한 소년이었다.
"국왕 폐하. 그대는 나라를 이끌 자격이 없습니다."
그 때 에셴바흐 가의 후작과 몇몇 반역의 주동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홀 한가운데로 다가와 섰다. 때 마침 바깥 미로의 정원을 뒤져 붕가질을 해대고 있던 귀족 년놈들이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괴한들에게 이끌려 홀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에셴바흐의 눈썹이 노기로 일그러졌다.
"그대들이 정녕 귀족이란 말인가!! 나는 국가의 명운은 뒷전이고 쾌락에만 흠쩍 젖어 추하기 그지 없는 작태만을 보여주는 귀족이고 싶지 않다!! 명예와 책임을 아는 귀족이고 싶다!! 그대들에게 아직 수치심이 남아 있다면 당장 혀를 깨물고 자살해야 할 것이오!!"
에셴바흐 후작의 노호성에 아랫도리를 벗은 채 홀로 끌려온 귀족 남녀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제 폭풍같은 비난의 악플이 차폰이라는 불량 게시물을 향했다.
"차폰, 그대가 절망에 잠긴 왕국 시민들의 원성을 아시오? 그들의 슬픔을 아시오!? 단 한번이라도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본 적이 있소!! 저 썩어빠진 피스트 교단에 이끌려 이리저리 컥스...!!"
에셴바흐의 격분이 차폰의 여린 가슴에 상처를 주기 직전에 그를 비롯한 개혁파 귀족들의 목젖에 구멍이 송송 뚫리기 시작했다. 식도를 타고 올라온 피가 터져 나오며 그들은 순간 모두 목을 부여잡고 고통스럽게 붉은 가래를 끓어 올렸다. 얀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는...!!"
짝짝짝
어느새 홀에는 갈색 제복을 입은 남자가 서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멋진 연설이었습니다, 후작 각하. 이후로는 부디 내세에서 마무리 하시길."
"크르륵...!! 카레라...!!"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하지만 제 이름은 주세페 갈레라입니다. 카레라가 아니죠."
섬뜩한 남자였다. 냉정한 어조에 잔인한 손속. 샤샤 자신과 비교해 본다고 해도 여간 만만치 않은 싸이코의 등장이었다.
"...갈레라. 그대가 어떻게 여기에 있죠? 분명히 지금 수도에 있을 리가 없는데..."
개혁파의 귀족들이 갈레라의 손짓 한번에 모두 죽어 나자빠졌다. 아직 복면의 일행과 얀이 남아 있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개혁을 이끌 머리가 잘려 나간 이상 쿠데타는 실패였다. 당장 이 자리에서 국왕을 죽이고 갈레라를 죽인다고 한다면 나라는 더욱 더 큰 혼란에 빠져 당장 크툴의 짐승들에게 물어 뜯길 것이다. 검을 잡은 얀의 손이 마스터 답지 않게 부들부들 떨렸다.
"글쎄요. 안타깝게도 이미 불순분자들의 움직임은 오래 전에 포착해 둔 상황입니다. 문제는 누구냐 하는 것이죠. 저로서는 당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더 놀랍군요."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상황은 아직 국왕을 인질로 잡고 있는 얀이 유리했다. 하지만 얀의 눈빛은 패배감에, 갈레라의 눈빛은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모두 죽여라."
부서진 테라스로부터 붉은 제복을 입은 갈레라의 사병들이 쏟아져 들어와 검은 복면인들을 무차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만 둬요!! 이 칼이 보이지 않나요!!"
은빛 오라가 흘러나온 검이 차폰의 목에 살짝 상처를 입혔지만 갈레라는 태연했다.
"나라를 위해 개혁을 단행하려 하는 애국심에 불타던 자네가 국왕을 시해하고 주다스피스트를 멸망으로 몰아 넣겠다는 말인가? 정말? 정말?"
갈레라가 천천히 얀을 향해 걸어 왔다. 얀은 자신도 모르게 갈레라에게 압도 당해 한걸음 씩 뒤로 물러났다.
"안타깝게도, 너는 못해. 얀 디아볼레로. 너는 강한 여자지만 항상 마지막에 일을 그르치는 버릇이 있더군. 이래서 여자는 안된다니까."
"...갈레라. 예리하군요."
얀은 검을 내렸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국왕을 죽일 수가 없었다. 이후에 찾아올 혼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애초의 계획으로도 알레고리만 죽일 예정이었다. 하지만 계획이 실패했다고 해서 주눅 들 그녀가 아니었다. 맨 정신으로 하루 반나절만에 3천만원을 써대는 여자가 절대 약한 여자일리가 없는 것이다. 장내가 고함과 비명 소리로 가득 찬 가운데 얀의 검에 서서히 은빛 오라가 맺히기 시작했다.
아직은 혼란한 귀족들 사이에 숨어 상황을 엿보고 있긴 했지만 자신 역시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얀을 에스코트 해 들어온 이상 샤샤는 교황의 목이 떨어짐과 동시에 죽일 놈이 되었던 것이다.
두 마스터의 기가 격렬하게 부딪히며 무형 에너지의 충돌로 실내에 방전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복면들의 실력이 대단하긴 했지만 살해 방법이 특히 잔인한 갈레라 친위대에 비길 바는 아니었고, 친위대와 근위병의 합공으로 이제 남은 개혁파는 그녀가 유일했다. 그녀 자신이 이기지 못한다면, 죽어간 이들은 아무 의미없이 반역의 무리들로 밖에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얀은 이를 악 물었다.
"간다!!"
앙칼진 외침과 동시에 눈의 착각과도 같은 은빛 질주가 홀 중앙에 서 있는 갈레라를 강습했다. 동시에 그림같이 뻗어나온 수십개의 호선이 모두 자신을 향하자, 갈레라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며 황급히 검세를 일으켜 수비에 들어갔다.
[이것이 바람의 손이란 말인가!!]
차차차창!!!!
얀의 손 끝이 만들어내는 살인의 미학은 갈레라로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자신과는 달리 철저하게 실전으로 가다듬어진 그녀의 검은 갈레라의 방어를 뚫고 그 몸에 작은 상처를 하나씩 새겨 넣었던 것이다.
키키키킥!!
손목이 저려오기 시작했건만 끝나지 않는 검의 연무에 이미 수세를 공세로 전환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이 아닌지 손안에 땀이 축축하게 배어들었다.
불안감이 갈레라의 마음속을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도박을 하기엔 오라의 검은 마스터에게도 너무 치명적이었다.
"이 년!!! 야안!!"
분노에 찬 고함 소리에 얀은 차가운 냉소를 머금었다.
"그 더러운 주둥이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갈레라!!!"
피링--
검이 휘며 나는 소리에 놀란 갈레라는 크게 반원을 휘두르며 뒤로 세걸음 물러났다. 어느새 파고 들었는 지 이미 왼쪽 어깨에 난 구멍에서 피가 울컥 솟구치고 있었다.
"이익...!!"
"실력이 형편 없구나, 갈레라!!! 너에게는 마스터의 자격이 없다!!"
부정 당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부정 당했다.
갈레라는 이성을 잃었다.
"네년을 으깨어 갈아 마시겠다!! 크아악!!!"
휘휘휘휭--
갈레라는 눈이 뒤집히며 그를 도살자라 불리게 한 필살기, 붉은 검기의 장막 "기요틴"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평소에는 냉정한 사내였지만 수세에 몰리면 이성을 잃고 한계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갈레라의 검기가 전개되자 홀에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꺄아악!!!"
"각하아아~!!!"
극한의 예리함을 상징하는 붉은 검기가 갑옷을 베고, 벽을 베고, 사람의 몸을 베는 순간 상상처럼 거대한 폭음은 일어나지 않았다. 죽음의 단두대가 뿌리는 살해의 의지 앞에 오로지 귀족들의 비명과 떨어져 내리는 샹들리에의 파열음 뿐.
콰장창!!!
투두둑.
피가 바닥을 적시며 사방으로 비산하는 팔다리와 내장이 하나 떨어져 내렸다. 조각난 두개골 사이로 흘러나온 뇌수와 부서져 내린 샹들리에 파편 속에 그려진 지옥도가 사람들의 마음을 공포로 물들이며, 죽음과 광기가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홀 내부를 충만케 했다. 그들의 싸움은 서서히 현실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소용없다, 갈레라!!"
다시 한번 얀의 오른 손이 춤추었다. 은빛 검기는 갈레라의 푝발적인 검기를 조용히 사방으로 흘려내며 갈레라의 목을 노리고 한걸음 한걸음 전진해 나갔다. 무형으로 뻗어온 섬찟한 살기에 갈레라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
"뭐, 뭐야 이 년은 대체!!!"
갈레라의 놀라움을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같은 대륙 검사의 칭호를 이은 자와는 처음으로 싸우는 갈레라였다. 하지만 그녀와 자신의 실력차는 너무나 뚜렷했다.
"으아아!! 인정할 수 없다!!"
정신을 차린 덕분에 모든 검기의 파도가 얀에게 집중되었지만, 하얀 손이 또다시 허공에 수십개의 손그림자를 그려내자 붉은 검기가 마치 그녀를 피해가는 것만 같았다.
"갈레라, 너의 검은 오직 겉멋으로 가득 찼구나!!! 너에게는 대륙 검사의 자격이 없다!!!"
공수가 완벽한 일체를 이룬 일대 종사의 위엄에 갈레라는 목이 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을 느끼며 발악하듯 계속해서 포토캐논처럼 검기를 토해내었다.
"인정할 수 없다!! 어찌 너 같은 평민이 이토록 높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냐!! 인정할 수 없다!!!"
"나머지는 지옥에 가서 지껄여라, 갈레라!!!"
"으으아악!!"
그 때였다.
"여기 이 자는 저 얀 년이 데려온 놈이다!! 죽여 버려!!!"
한 걸음만 더 뻗으면 얀의 검이 갈레라의 목젖을 절단할 찰나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얀의 시선이 향하가 그 곳에는 자리에서 일어선 샤샤가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얀의 두 눈빛이 크게 요동쳤다.
"빈틈!!!"
갈레라는 검기를 거두고 얀의 검을 쳐내며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발악하듯 친위대에게 명령했다.
"그 놈을 잡앗!! 이 년과 일행이다!!"
"안돼!!!"
얀은 갈레라를 내버려두고 샤샤에게로 달려갔다. 친위대가 막 샤샤의 몸을 잡으려는 순간, 쏟아져 나온 은빛 호선이 붉은 제복의 사내들을 토막내며 붉은 피와 내장이 샤샤에게 튀었지만 그에게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너무 놀라 정신이 나간 것일까?
"괜찮아? 샤샤? 미안해. 미안해..."
자만심에 빠져 쿠데타를 시작하기도 전에 성공이라고 판단해 어린 기사 하나를 끌고 온 것에 대해 그녀는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얀은 샤샤를 와락 껴 안았다.
"미안해, 샤샤... 너만은 반드시 내가 살려줄게..."
"하하하, 이 어리석은 년!!! 고작 그런 놈팽이 하나 보호하기 위해서 승리의 기회를 날려 버린 것이냐? 이제 너에게 기회는 없다!!"
"얀 누님. 그대는 좋은 여자에요."
샤샤는 너무나 태연했다. 그 심유한 눈빛에 의문까지 느낀 얀이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샤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반드시 더럽혀 주고 싶어졌어요. 원래는 능욕한 뒤에 죽일 생각이었지만."
옆구리로 파고 드는 차갑고 익숙한 감촉. 전혀 예상치 못한 일격에 얀이 깜짝 놀라 샤샤를 밀쳐내려 했지만, 그의 두 팔이 이미 단검이 틀어 박힌 자신의 허리를 단단하게 껴안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이제는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징그러운 썩소를 그려 내었다.
"샤샤!!! 너...!!"
"다시 눈을 뜰 때에는, 주인님이라고 불러주세요. 킥킥킥..."
뒷덜미에 강한 충격이 느껴지며 얀의 사고가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국왕폐하 납시오!!"
얀의 등장으로 잠시 혼란스러워졌던 홀의 귀족들은 좌우로 정연히 물러나 군주의 입장을 기다렸다. 파이프 오르간의 간주로 시작된 오케스트라는 주다스피스트가 종교국가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는 점이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특혜 받은 일부의 귀족들을 위한 종교에 불과했지만.
장내가 정리되자 곧 흰색 예복을 차려 입은 시종장이 나와 목청을 드높였다.
"성 주다스 피스트의 군주이시며, 모든 왕국 시민들의 마음의 아버지이신 차폰 그레이멀스 주다스 피스트 폐하의 입장이십니다."
금빛 찬란한 예복을 빼 입은 국왕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젊은 사람이었다. 숫기 없어 보이는 차폰에게서는 위엄이 쥐똥만큼도 느껴지질 않았는데, 시종장의 지시에 따라 귀족들의 문안에 화답하며 자리에 앉는 모습이 샤샤의 눈에는 한심하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대한민국이었다면 왕따 당하기 딱 좋은 타입이었다.
"어차피 허수아비야. 차폰 국왕은."
얀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고 그런 차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다시 경쾌한 왈츠가 홀 내부에 울려 퍼지며 짝이 이룬 귀족 커플들이 화려한 의상을 뽐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샤샤는 춤 따위에는 관심도 없던 터라 그냥 홀의 가장 자리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간단한 음식들을 집어 먹고 있었다.
"우물우물... 얀 누님. 언제..."
"기다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조금 있으면 교황도 나타날거야."
얀의 목소리에서 살짝 긴장감이 느껴졌다.
교황과 왕이라.
무식하기로는 만인을 감탄시켰던 샤샤였지만 어느쪽이 더 높은 의미로 쓰이는 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긴 국왕이 저 꼴이니 오죽하겠는가만 샤샤의 머리 속에서는 앞으로의 플랜이 주욱 그려지고 있었다. 그는 이번 기회를 잘 이용할 참이었다.
"어차피 나는 안 죽는다. 아니 못 죽는다. 그러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싸지르고 보자."
뭔 짓을 해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과 여차하면 도망가기에 충분한 실력이 그의 무대뽀 용기의 원천이었다.
"교황 성하 납시오!!"
곧 모든 음악이 멈추고 귀족들이 다시금 좌우로 갈라서는 와중에 실내 조명이 꺼지고 은은한 은빛 안개가 바닥에서 피어 올랐다. 더불어 파이프오르간이 홀로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니 그 뽀대가 국왕쪽보다 단연 위였다.
"성 주다스 피스트의 기둥이시며, 모든 왕국 시민들의 마음의 어머니이신 알레고리 그레고리 곧 뒈질 엑스트라 3세 성하의 입장이십니다."
시종장에 부름에 이어 눈처럼 하얀 망토와 신비로운 분위기의 예복을 잘 차려 입은 좀비가 등장하자 장내는 온통 열기로 가득찼다. 그야말로 실질적인 주다스피스트의 지배자였기 때문에 혹여라도 눈에서 벗어났다가는 앞에서는 뭔 소리를 하던 간에 뒤에서 개 쳐발리는 신세를 면치 못하기 때문이었다.
국왕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교황을 맞이하고나서 조명 스탭들은 다시 장내를 환하게 밝히고 낮은 음의 합주곡을 연주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귀빈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얀 디아볼레로님의 작위 수여식을 잠시 후에 거행하겠으니 귀빈들께오서는 한분도 남김없이 참석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샤샤가 놀란 눈으로 얀을 바라보자, 얀은 입가에 싱긋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제야 샤샤도 눈치챌 수 있었다. 오늘의 거사를 위해 얀이 거짓으로 주다스피스트의 작위를 받기로 했다는 것을. 대가리 수만 좆나게 많았지 쓸만한 인재들이 부족한 성국인지라 소드 마스터의 소유를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자리가 유독 클 수 밖에 없었다.
"얀 디아볼레로님께서는 앞으로 나와 주시길 바랍니다."
"다녀 올게. 얌전히 있어... 금방 끝날 테니까."
얀은 활짝 웃었다. 어쩌다 얀 때문에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지만 그녀가 아름다운 것 만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조국을 구하려는 자기 희생으로 불타오르는 여자라면 더더욱.
얀이 천천히 홀의 한가운데에 드리워진 붉은 카페트 위를 걸어 왕좌의 앞에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자, 자리에 앉아 사이좋게 호박씨를 까던 차폰과 알레고리 3세의 시선도 그녀를 향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샤샤는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좋은 건 알아가지고.]
알레고리 3세가 귀에 대고 몇마디 숙덕거리자 차폰의 두 뺨을 발그레하게 붉어지더니, 곧 날이 서지 않은 예식용 검을 들고 일어나 그녀의 양 어깨에 검면을 가져다 대며 과거 샤샤 자신이 기사 서임에서 치루었던 장면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그대는 명성 높은 대륙 검사의 신분으로 이제 지고한 주다스피스트의 명예를 수호하고 주신 피스트의 이름을 섬길 것을 약속했기에, 나 차폰 그레이멀스 주다스 피스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바람의 손 얀 디아볼레로에게 백작 위와 함께 새로이 에리얼의 성을 수여한다. 그대는 옛 역사의 시작을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이후로는 주신 피스트의 가호 아래 멸망과 죽음을 왕국과 함께 공유할 것을 그 순수한 영혼에 각인시킬 지어다."
"나, 얀 디아볼레로 에리얼은 나의 검으로 조국을 수호하고 나의 지혜로 조국을 살찌우며 나의 믿음으로 조국을 영예롭게 할 것을 맹세합니다."
얀은 엎드려 국왕의 발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국왕에게의 절대 복종을 의미하는 행사가 끝나자 곧 교황이 자리에서 일어나 근위병들 사이를 지나 차폰에게 다가왔다. 찰나였다. 얀이 차폰의 손에서 예식용 검을 들어 알레고리의 목을 내려친 것은.
"꺄아악!!!"
막 축하의 의미로 행진곡을 연주하던 합주가 중단되며 홀이 원초적인 혐오감을 느낀 여자들의 비명 소리로 가득찼다. 뒤이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귀족들의 고함소리와 근위병들의 철걱거리는 갑주 소리가 홀을 아수라장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꼼짝 마! 경거망동하면 국왕의 목숨은 없다!"
마스터의 손에 들리면 나무 젓가락도 흉기가 된다. 근위병들이 멈칫거리는 사이 테라스가 산산조각나며 검은 옷을 입은 괴한들이 홀의 귀족들을 포위해 들어갔다.
"누구냐, 이 놈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적도를 물리쳐라!!!"
귀족들은 입만 살았지 파티복 한장만 덜렁 입고 있었기에 무장 괴한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근위병들 조차 인질로 사로 잡힌 국왕 차폰 때문에 주춤거리는 사이 실내는 완전하게 제압되었다. 쿠데타는 성공이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요, 에리얼 경..."
얀은 씁쓸한 미소를 띄며 어린 국왕을 내려다 보았다. 18살에 발육조차 완전하지 않은 왜소한 몸매. 한 국가의 무게를 짊어지기엔 너무나도 연약한 소년이었다.
"국왕 폐하. 그대는 나라를 이끌 자격이 없습니다."
그 때 에셴바흐 가의 후작과 몇몇 반역의 주동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홀 한가운데로 다가와 섰다. 때 마침 바깥 미로의 정원을 뒤져 붕가질을 해대고 있던 귀족 년놈들이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괴한들에게 이끌려 홀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에셴바흐의 눈썹이 노기로 일그러졌다.
"그대들이 정녕 귀족이란 말인가!! 나는 국가의 명운은 뒷전이고 쾌락에만 흠쩍 젖어 추하기 그지 없는 작태만을 보여주는 귀족이고 싶지 않다!! 명예와 책임을 아는 귀족이고 싶다!! 그대들에게 아직 수치심이 남아 있다면 당장 혀를 깨물고 자살해야 할 것이오!!"
에셴바흐 후작의 노호성에 아랫도리를 벗은 채 홀로 끌려온 귀족 남녀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제 폭풍같은 비난의 악플이 차폰이라는 불량 게시물을 향했다.
"차폰, 그대가 절망에 잠긴 왕국 시민들의 원성을 아시오? 그들의 슬픔을 아시오!? 단 한번이라도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본 적이 있소!! 저 썩어빠진 피스트 교단에 이끌려 이리저리 컥스...!!"
에셴바흐의 격분이 차폰의 여린 가슴에 상처를 주기 직전에 그를 비롯한 개혁파 귀족들의 목젖에 구멍이 송송 뚫리기 시작했다. 식도를 타고 올라온 피가 터져 나오며 그들은 순간 모두 목을 부여잡고 고통스럽게 붉은 가래를 끓어 올렸다. 얀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는...!!"
짝짝짝
어느새 홀에는 갈색 제복을 입은 남자가 서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멋진 연설이었습니다, 후작 각하. 이후로는 부디 내세에서 마무리 하시길."
"크르륵...!! 카레라...!!"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하지만 제 이름은 주세페 갈레라입니다. 카레라가 아니죠."
섬뜩한 남자였다. 냉정한 어조에 잔인한 손속. 샤샤 자신과 비교해 본다고 해도 여간 만만치 않은 싸이코의 등장이었다.
"...갈레라. 그대가 어떻게 여기에 있죠? 분명히 지금 수도에 있을 리가 없는데..."
개혁파의 귀족들이 갈레라의 손짓 한번에 모두 죽어 나자빠졌다. 아직 복면의 일행과 얀이 남아 있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개혁을 이끌 머리가 잘려 나간 이상 쿠데타는 실패였다. 당장 이 자리에서 국왕을 죽이고 갈레라를 죽인다고 한다면 나라는 더욱 더 큰 혼란에 빠져 당장 크툴의 짐승들에게 물어 뜯길 것이다. 검을 잡은 얀의 손이 마스터 답지 않게 부들부들 떨렸다.
"글쎄요. 안타깝게도 이미 불순분자들의 움직임은 오래 전에 포착해 둔 상황입니다. 문제는 누구냐 하는 것이죠. 저로서는 당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더 놀랍군요."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상황은 아직 국왕을 인질로 잡고 있는 얀이 유리했다. 하지만 얀의 눈빛은 패배감에, 갈레라의 눈빛은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모두 죽여라."
부서진 테라스로부터 붉은 제복을 입은 갈레라의 사병들이 쏟아져 들어와 검은 복면인들을 무차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만 둬요!! 이 칼이 보이지 않나요!!"
은빛 오라가 흘러나온 검이 차폰의 목에 살짝 상처를 입혔지만 갈레라는 태연했다.
"나라를 위해 개혁을 단행하려 하는 애국심에 불타던 자네가 국왕을 시해하고 주다스피스트를 멸망으로 몰아 넣겠다는 말인가? 정말? 정말?"
갈레라가 천천히 얀을 향해 걸어 왔다. 얀은 자신도 모르게 갈레라에게 압도 당해 한걸음 씩 뒤로 물러났다.
"안타깝게도, 너는 못해. 얀 디아볼레로. 너는 강한 여자지만 항상 마지막에 일을 그르치는 버릇이 있더군. 이래서 여자는 안된다니까."
"...갈레라. 예리하군요."
얀은 검을 내렸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국왕을 죽일 수가 없었다. 이후에 찾아올 혼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애초의 계획으로도 알레고리만 죽일 예정이었다. 하지만 계획이 실패했다고 해서 주눅 들 그녀가 아니었다. 맨 정신으로 하루 반나절만에 3천만원을 써대는 여자가 절대 약한 여자일리가 없는 것이다. 장내가 고함과 비명 소리로 가득 찬 가운데 얀의 검에 서서히 은빛 오라가 맺히기 시작했다.
"호사가들은 이야기하죠. 그대와 나, 누가 항상 주다스피스트의 최강자인지. 비록 개혁은 실패했지만 알레고리에 이어 그대의 목을 거둔다면 우리의 뜻이 결코 헛되지는 않을 거에요."
"...가능하다면 말이지."
갈레라의 검이 적색으로 물들었다. "도살자" 갈레라의 별명에 어울리는 그 검은 검신 자체가 붉은 색을 띄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오라가 물든 검은 마치 피와도 같이 진한 빛을 요요히 뿌리고 있었다.
"저 년이... 나는 완전 뒷전이네?"
아직은 혼란한 귀족들 사이에 숨어 상황을 엿보고 있긴 했지만 자신 역시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얀을 에스코트 해 들어온 이상 샤샤는 교황의 목이 떨어짐과 동시에 죽일 놈이 되었던 것이다.
"갈레라아아아!!!!"
"디아볼레로오오!!!!!"
두 마스터의 기가 격렬하게 부딪히며 무형 에너지의 충돌로 실내에 방전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복면들의 실력이 대단하긴 했지만 살해 방법이 특히 잔인한 갈레라 친위대에 비길 바는 아니었고, 친위대와 근위병의 합공으로 이제 남은 개혁파는 그녀가 유일했다. 그녀 자신이 이기지 못한다면, 죽어간 이들은 아무 의미없이 반역의 무리들로 밖에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얀은 이를 악 물었다.
"간다!!"
앙칼진 외침과 동시에 눈의 착각과도 같은 은빛 질주가 홀 중앙에 서 있는 갈레라를 강습했다. 동시에 그림같이 뻗어나온 수십개의 호선이 모두 자신을 향하자, 갈레라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며 황급히 검세를 일으켜 수비에 들어갔다.
[이것이 바람의 손이란 말인가!!]
차차차창!!!!
얀의 손 끝이 만들어내는 살인의 미학은 갈레라로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자신과는 달리 철저하게 실전으로 가다듬어진 그녀의 검은 갈레라의 방어를 뚫고 그 몸에 작은 상처를 하나씩 새겨 넣었던 것이다.
키키키킥!!
손목이 저려오기 시작했건만 끝나지 않는 검의 연무에 이미 수세를 공세로 전환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이 아닌지 손안에 땀이 축축하게 배어들었다.
불안감이 갈레라의 마음속을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도박을 하기엔 오라의 검은 마스터에게도 너무 치명적이었다.
"이 년!!! 야안!!"
분노에 찬 고함 소리에 얀은 차가운 냉소를 머금었다.
"그 더러운 주둥이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갈레라!!!"
피링--
검이 휘며 나는 소리에 놀란 갈레라는 크게 반원을 휘두르며 뒤로 세걸음 물러났다. 어느새 파고 들었는 지 이미 왼쪽 어깨에 난 구멍에서 피가 울컥 솟구치고 있었다.
"이익...!!"
"실력이 형편 없구나, 갈레라!!! 너에게는 마스터의 자격이 없다!!"
부정 당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부정 당했다.
갈레라는 이성을 잃었다.
"네년을 으깨어 갈아 마시겠다!! 크아악!!!"
휘휘휘휭--
갈레라는 눈이 뒤집히며 그를 도살자라 불리게 한 필살기, 붉은 검기의 장막 "기요틴"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평소에는 냉정한 사내였지만 수세에 몰리면 이성을 잃고 한계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갈레라의 검기가 전개되자 홀에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꺄아악!!!"
"각하아아~!!!"
극한의 예리함을 상징하는 붉은 검기가 갑옷을 베고, 벽을 베고, 사람의 몸을 베는 순간 상상처럼 거대한 폭음은 일어나지 않았다. 죽음의 단두대가 뿌리는 살해의 의지 앞에 오로지 귀족들의 비명과 떨어져 내리는 샹들리에의 파열음 뿐.
콰장창!!!
투두둑.
피가 바닥을 적시며 사방으로 비산하는 팔다리와 내장이 하나 떨어져 내렸다. 조각난 두개골 사이로 흘러나온 뇌수와 부서져 내린 샹들리에 파편 속에 그려진 지옥도가 사람들의 마음을 공포로 물들이며, 죽음과 광기가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홀 내부를 충만케 했다. 그들의 싸움은 서서히 현실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소용없다, 갈레라!!"
다시 한번 얀의 오른 손이 춤추었다. 은빛 검기는 갈레라의 푝발적인 검기를 조용히 사방으로 흘려내며 갈레라의 목을 노리고 한걸음 한걸음 전진해 나갔다. 무형으로 뻗어온 섬찟한 살기에 갈레라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
"뭐, 뭐야 이 년은 대체!!!"
갈레라의 놀라움을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같은 대륙 검사의 칭호를 이은 자와는 처음으로 싸우는 갈레라였다. 하지만 그녀와 자신의 실력차는 너무나 뚜렷했다.
"으아아!! 인정할 수 없다!!"
정신을 차린 덕분에 모든 검기의 파도가 얀에게 집중되었지만, 하얀 손이 또다시 허공에 수십개의 손그림자를 그려내자 붉은 검기가 마치 그녀를 피해가는 것만 같았다.
"갈레라, 너의 검은 오직 겉멋으로 가득 찼구나!!! 너에게는 대륙 검사의 자격이 없다!!!"
공수가 완벽한 일체를 이룬 일대 종사의 위엄에 갈레라는 목이 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을 느끼며 발악하듯 계속해서 포토캐논처럼 검기를 토해내었다.
"인정할 수 없다!! 어찌 너 같은 평민이 이토록 높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냐!! 인정할 수 없다!!!"
"나머지는 지옥에 가서 지껄여라, 갈레라!!!"
"으으아악!!"
그 때였다.
"여기 이 자는 저 얀 년이 데려온 놈이다!! 죽여 버려!!!"
한 걸음만 더 뻗으면 얀의 검이 갈레라의 목젖을 절단할 찰나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얀의 시선이 향하가 그 곳에는 자리에서 일어선 샤샤가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얀의 두 눈빛이 크게 요동쳤다.
"빈틈!!!"
갈레라는 검기를 거두고 얀의 검을 쳐내며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발악하듯 친위대에게 명령했다.
"그 놈을 잡앗!! 이 년과 일행이다!!"
"안돼!!!"
얀은 갈레라를 내버려두고 샤샤에게로 달려갔다. 친위대가 막 샤샤의 몸을 잡으려는 순간, 쏟아져 나온 은빛 호선이 붉은 제복의 사내들을 토막내며 붉은 피와 내장이 샤샤에게 튀었지만 그에게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너무 놀라 정신이 나간 것일까?
"괜찮아? 샤샤? 미안해. 미안해..."
자만심에 빠져 쿠데타를 시작하기도 전에 성공이라고 판단해 어린 기사 하나를 끌고 온 것에 대해 그녀는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얀은 샤샤를 와락 껴 안았다.
"미안해, 샤샤... 너만은 반드시 내가 살려줄게..."
"하하하, 이 어리석은 년!!! 고작 그런 놈팽이 하나 보호하기 위해서 승리의 기회를 날려 버린 것이냐? 이제 너에게 기회는 없다!!"
등 뒤에서 승리자가 된 갈레라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땀에 흠뻑 젖은 몰골은 산산조각난 자존심 만큼이나 말이 아니었지만 최후의 승자는 그였다.
철저하게 단련된 갈레라 친위대와 준 마스터급의 근위병 수십명이 포위하고 뒤에는 마스터까지. 절망적인 상황에 얀이 각오로 입술을 질끈 깨물 때 안겨 있던 샤샤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얀 누님. 그대는 좋은 여자에요."
샤샤는 너무나 태연했다. 그 심유한 눈빛에 의문까지 느낀 얀이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샤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반드시 더럽혀 주고 싶어졌어요. 원래는 능욕한 뒤에 죽일 생각이었지만."
옆구리로 파고 드는 차갑고 익숙한 감촉. 전혀 예상치 못한 일격에 얀이 깜짝 놀라 샤샤를 밀쳐내려 했지만, 그의 두 팔이 이미 단검이 틀어 박힌 자신의 허리를 단단하게 껴안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이제는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징그러운 썩소를 그려 내었다.
"샤샤!!! 너...!!"
"다시 눈을 뜰 때에는, 주인님이라고 불러주세요. 킥킥킥..."
뒷덜미에 강한 충격이 느껴지며 얀의 사고가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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