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애정비사 2-1,6
제33화 희창과 정희의 묘한 만남
"야아… 벌서 다 끝났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희
창이였다. 일요일인데도 양복 차림으로 녀석이 빼꼼히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희창이 너 오랜만이다…!"
"하하, 그렇죠? 명희 선배."
명희 선배가 맞이하자 양 손에 든 꾸러미들을 안기는 그였
다. 척 보니 무슨 선물 세트 하나와 세탁용 가루비누 상자였
다.
"이게 다 뭐야?"
"뭐긴 뭐에요. 집들이 선물이죠. 창희가 앞으로 선배 집에
얹혀 산다니까 구경도 할겸, 잘 봐주십사 하는 선물이에요."
"후후, 우리가 집들이하는 거니? 어쨌든 고맙다. 얼른 들어
와."
너스레를 떠는 희창이는 마치 내 방에라도 놀러온 양 스스
럼이 없었고, 어차피 서로 익숙한 사이인 명희 선배와 나는
나름대로 녀석이 반가웠다. 우리는 일단 널찍한 거실에 둘러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금방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여기 생각보다 집 좋은데요? 어디 보자, 여기 문간방이 창
희 녀석 소굴이 되는 건가요?"
"너무 좁지는 않을까? 그래도 욕실이 두 군데라서 편할 거
야."
"에유, 그야 물론이죠. 그건 명희 선배가 창희네 집 안 가보
셔서 그래요. 이 녀석 원래 살던 방보다 지금 여기가 두 배는
더 클걸요."
"그래? 어쨌든 희창이 너 아주 신세 훤하다…! 듣기로 아버
님 사업 돕느라 바쁘다 그러던데, 우리 얼굴 한 본 지도 한
반 년만 아니니?"
"그런가요? 어쩐지 그래서 밤마다 명희 선배 보고 싶어서
잠이 안 오더라니까요."
키들키들, 특유의 그 농담을 해대는 희창이였다.
"음… 근데 이럴 게 아니지. 아까 창희랑 배 고프다고 했는
데 잘 됐다. 우리 중국집에 뭐라도 시켜 먹을까?"
"그래, 희창아. 내가 시킬 테니 뭐 좀 먹자."
"창희 네가? 아냐. 그럴 게 아니라… 마침 나도 배가 고픈
데 차라리 밖에 나가는 게 어때? 내가 근사한 데에서 저녁
살게."
"뭐? 얌마, 이사 온 건 난데 네가 왜 돈을 써?"
"아이구, 됐네. 학생이 뭔 돈이 있어? 그 돈 있으면 명희 선
배한테 하숙비나 더 내라. 안 그래요, 선배?"
"우와, 희창이 너 아주 손 커졌구나? 창희한테 듣기로 어디
이사님이라더니 어디 한 번 얻어 먹어볼까?"
이것 참, 그 와중에 미안스러운 것은 나인데 명희 선배마저
희창이에게 동조를 해댔다.
"사실은 나 차 타고 왔단 말이야. 그래서 그래."
"차?"
"응. 밖에 상진이 형도 있구."
상진씨라. 그 비서 노릇한다는 형님까지 와 있다는 말에 나
는 결국 뭐라 토를 달 수 없었다. 그렇게 외식을 하기로 결정
을 본 우리였건만 명희 선배는 그제서야 생각난 듯 안쪽을
향해 소리를 쳤다.
"언니…! 이리 좀 나와 봐."
"언니? 아 참, 그러고 보니 원래 이 아파트 안방 마님이 따
로 계신다고 했었죠?"
"맞아, 정희라고 우리 언니야."
"잘 됐네요. 얼른 나오라고 하세요. 모두 같이 가죠 뭐."
"알았어. 언니, 언니 잠이라도 자는 거야?"
그런데 묘하게도 안방 쪽, 즉 언니 정희씨의 방에서는 계속
묵묵부답이었다. 다시 한 번 명희 선배가 소리를 지른 한참
후에야 정말 자고 있기라도 했는지 슬그머니 인기척이 들리
고 있었다.
"어…?"
어 - 이건 누구에게서 나온 소리였을까. 뜻밖에도 느릿느릿
방문을 열며 나타난 정희씨의 모습을 본 희창이에게서 나온
짤막한 탄성이었다.
나는 의아한 시선으로 녀석 쪽을 돌아보았다. 보나마나 상
상 못한 미인인 명희 선배의 언니를 마주쳐서인 것 같았다.
희창이는 고개를 갸우둥거리면서까지 뚫어져라 그녀를 바라
보고 있었는데, 그 눈길을 느꼈는지 정희씨도 마주친 눈빛에
적잖이 놀라는 기색이었다.
"얘들이 저녁 산다는데 같이 나가자, 언니."
"그래요, 같이 나가세요."
하지만 정작 난처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지고 있었다. 나와
명희 선배가 함께 권하기까지 했는데도 언니 정희는 당황하
는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고개를 젓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아냐. 난 됐어."
"왜? 배 안 고파?"
"나… 나는 별로야. 너희들끼리 가."
"뭐야, 오늘 새 식구도 이사 왔는데 기념으로 술이라도 한
잔 안 할 거야?"
"그건… 아니 나, 사실 약속이 있어서 그래."
"약속? 오늘 그런 거 없었잖아?"
"으응, 근데 방금 전에 생겼어."
모를 일이었다. 조금 전 내가 있을 무렵만 해도 시원찮기는
했지만 그다지 거리낌은 없었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갑작스레 낯을 가리는 인상이 역력해져 있었다.
틀림없이 어디 전화 거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정희
씨는 한사코 고사하고 있었다. 급기야 언니 마음을 꺾을 수
없다는 듯 명희 선배도 어깨를 으쓱거려야만 했다.
"그럼 알아서 해. 너무 늦게 들어오지만 말구."
늦게 들어오지 말아라? 희한하게도 그 말은 언니인 정희씨
가 아니라 명희 선배가 하는 말이었다. 어쨌든 우리끼리만 아
파트를 나서야 하는 희창이와 나, 그리고 그녀였다.
"이상하네. 그렇게 술 좋아하는 기집애가…"
"술을 좋아하다뇨? 명희 선배 언니가요?"
"어휴, 말도 마. 일주일에도 한두 번은 술 취해서 꼭두새벽
에 들어온다니까. 아까도 보나마나 자고 있었을 거야, 어제도
술 먹고 들어왔거든. 그래놓고 어떻게 회사 생활을 하는지
원…!"
내 질문에 명희 선배로서도 투덜거리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래봤자 그들 가족끼리의 문제일 테니 나로서는 머쓱한 표
정을 짓는 게 전부였지만, 얼핏 보니 의외로 희창이가 뭔가에
골똘한 표정이었다.
"넌 또 왜 그래?"
"나? 아, 아냐… 아무 것도."
회사 일 때문에 그런가, 내가 어리둥절한 인상을 지어보였
어도 녀석은 고개를 저으며 피식거리고 있었다.
아파트 주차장에는 그의 말대로 정말 예의 고급 승용차와
상진씨가 대기하고 있었다. 간단히 서로 소개와 인사를 건네
고 차에 오르자 알아서 척척 이사님답게 지시를 내리는 희창
이었다.
"오사카로 가요, 형. 근데 아까 그거 어딨죠?"
"네가 사오라던 거? 거기 뒷좌석에 뒀어."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간단히 지명으로 된 상호를 대는 희
창이였다. 나는 그나마 홍콩이라는 룸살롱 이름이 아니길래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는데, 상진씨와 영문 모를 얘기를 나
눈 그는 문득 뒷좌석 발치에 놓인 꾸러미 하나를 내게 가리
켰다.
"이게 뭔데?"
"창희 너한테 주는 선물이다. 이사 기념으로."
얼레, 왠 걸까 - 그 포장을 끌러본 나는 입이 벌어졌다.
"이거 핸드폰이잖아?"
"그래. 요즘 세상에 그런 거 하나 안 가지고 다니는 원시인
은 너밖에 없을 거다. 언제 어디서든 즉각 이 형님 전화 받으
라고 사주는 거야."
뭐라고 해야 하나. 그것은 요즘 선전에 등장하는 최신형의
기종이었다.
이미 문자판에 번호까지 찍혀 있는 걸로 보아 이미 개통절
차까지 다 밟아준 모양인 것 같았다. 내게는 과분한 선물이었
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면서 희창이는 눈만 찡끗거리고 있었
다.
"아무래도 여자 분들 수다가 너보다 더 심하실 거 아냐…
그래서 앞으로 창희 네가 명희 선배네 전화기 빌려 쓰느라고
눈치 보지 말라는 뜻이야. 알겠지?"
"어머머, 야…!"
그 말에 명희 선배가 장난스럽게 희창이에게 손찌검을 가
했다. 덕분에 차 안에는 잠시 웃음소리가 감돌 수 있었다.
제34화 정희의 정체는?
오사카라는 그 곳은, 이름에서 풍기는 분위기처럼 시내 근
처의 고급 일식집이었다. 명희 선배와 나 그리고 상진씨를 앞
장세운 희창이 녀석은 그 안의 한 별실에 선뜻 자리를 잡았
다.
"이야… 희창이가 오늘 돈 좀 쓰려나 보네?"
사뭇 놀란 시선의 명희 선배였지만 실상 그런 심정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수준의 횟집 따위에야 그럭저럭 드나들어
봤어도 이렇게 호화스런 일식집은 처음이었다.
"가끔 회사 일로 사람 만나려고 왔던 것뿐이에요. 제가 사
는 거니까 드시고 싶은 것 드세요."
회사 일이라면 이곳도 필경 희창이의 접대용 장소 중 하나
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명희 선배와 나는 깔끔한 정장 차림의
여종업원들이 내민 메뉴판을 받아들고는 저으기 놀란 시선을
마주보아야 했다.
보통 횟집에서 킬로그램에 얼마 또는 한 접시에 얼마, 라는
식의 생선회 가격들은 모두 싯가라는 단어로 적혀 있었다. 단
하나 광어회만 실제 가격이 나와 있었는데, 그것은 고작 1인
분에도 그런 곳의 특대형 한 접시보다 두 배 가까운 금액이
었다.
명희 선배와 나는 알게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막 이삿짐을 풀다 나온 우리에 비해 이런 고급스런 곳에 어
울리는 양복차림은 맞은 편에 앉은 희창이와 상진씨만이었다.
결국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우리가 묵묵히 있자 희창이 녀
석이 알아서 뭐라뭐라 주문을 해댔다. 잠시 후 코스에 따른
요리와 맥주 몇 병이 날라져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자, 이사 기념으로 건배…!"
이어 채워진 맥주잔을 서로 들며 희창이가 건배를 주창했
다. 어쨌든 홀가분한 명희 선배와 내가 그렇게 시원하게 비운
맥주잔을 내려놓을 무렵이었다. 덩달아 술을 들이키려던 희창
이, 그런데 불쑥 막아서는 손길이 있었다.
"희창아… 그만."
다름 아닌 녀석 곁의 상진씨였다. 아마도 운전 탓인 듯 자
신의 잔에 손도 안 대던 그가 겨우 반 넘어 골깍이려던 희창
이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에이, 왜 그래요? 겨우 한 잔인데…"
당연히 그에게선 푸념이 터져나와야 했다. 말 그대로 이제
겨우 첫 잔이었으므로 명희 선배와 나마저 의아해질 모습이
었다.
아하, 나는 속으로 무릎을 쳤다. 어쩌면 그건 내가 먼저 보
였어야 옳았을 행동인 까닭이었다.
가뜩이나 접대와 술에 찌들린다며 나까지 안쓰럽게 만들던
희창이 아닌가. 아마 상진씨도 녀석에게 그런 걱정을 해주는
모양이었다. 모처럼 일요일은 편하게 술을 쉬라는 뜻인 것 같
았다. 응당 수긍이 갈 일, 하지만 순간 상진씨는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벌써 잊었어? 오늘 아홉 시 반에 컨설팅 팀하고 약속 있잖
아."
"그래도 상진이 형… 아직 시간 있잖아요."
"안돼. 그런 식이면 이따가 어떻게 독한 양주를 더 마시려
고 그래?"
컨설팅 팀과의 약속? 밤 아홉시 반에? 그를 도와 희창이에
게 술을 자제하라 권하려던 참이었던 나는 일순 머쓱해지고
말았다. 그건 술자리 약속이란 게 뻔했다. 그것도 양주라는
말로 보아 흔한 술자리가 아닌, 십중팔구 녀석의 단골인 룸살
롱 홍콩 같은 데서나 벌어질 호화판 술자리.
일요일에도 그런 바쁜 일정이 잡혀 있단 걸까.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상진씨의 권고란 미리 맞춰진 술
자리를 위해 희창이의 자유로운 기분마저 자제해야 한다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휴… 알았어요. 이젠 내 맘대로 맥주 한 잔 못 마시겠
군."
퍽이나 단호한 표정의 상진씨에 종내 희창이도 고개를 흔
들고 있었다. 분명 다음 번 술자리가 원치 않는 억지춘향이라
는 걸 증명해주는 그의 푸념이었다.
덕분에 나머지 사람들인 나와 명희 선배의 분위기만이 급
속도로 썰렁해졌다. 마치 상진씨의 눈치라도 보아야 할 것 같
은 우리였다. 서로 나누는 이야기마저 조심할 지경인데 그나
마 그는 전화를 건다며 잠시 자리까지 뜨고 있었다.
"칫, 저 사람 뭐니? 좋았던 기분 망가지게."
그런 투덜거림이 제일 먼저 나온 것은 명희 선배에게서였
다. 그에 따라 희창이도 씁스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쩔 수 없죠 뭐. 원래 저희 아버지가 붙여준 사람이에요.
그런데 제가 요즘 회사 일에 귀찮은 티를 냈더니… 아버지께
서 저 형을 닥달했었나 봐요."
"어쨌건 희창이 너… 정말 또 술 마시러 가는 거야?"
"응. 일본에서 건너온 경영자문 팀이라는데, 오늘밖에 접대
할 시간이 없어서 상진이 형이 그렇게 스케쥴을 잡았대… 나
도 한심해 죽겠어. 마시기 싫은 술을 남이 시키는 대로 마셔
줘야 하니까."
그가 힘 빠진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바람에 나 역시 말문
을 잃어야 했다. 답답한 내가 대신 술을 마셔 주고픈 기분이
었고, 그럴수록 안되게만 느껴지는 녀석의 얼굴이었다.
"난 그래도 간만에 희창이 너 얼굴보는 줄 알았는데…"
"미안해요, 명희 선배. 저라고 안 그러겠어요? 다음에 꼭 놀
러갈게요."
마침 슬그머니 상진씨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흐트러짐없
이 묵묵히 우리의 얘기에 더 이상 끼여들지 않고 있었다.
반가웠으면서도 마실 수 있는 이들만 마셔야 하는 술자리
가 어색하게 이어졌다. 그러자 흥이 떨어진 듯 이번에는 명희
선배가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희창이가 미안한 표정으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
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녀석은 어떤 생각이 상기됐는지 내게
문득 목소리를 낮춰왔다.
"근데… 창희야. 내가 뭐 하나 물어봐도 되냐?"
"뭘?"
"너… 아까 그 정희씨라던 명희 선배 언니, 전에도 만난 적
있어?"
"아니. 사실 오늘 이사오면서야 처음 봤어. 왜?"
"그래? 그럼 혹시… 두 사람 친자매 맞다니?"
이건 또 무슨 얘긴가. 나는 그의 뜬금 없는 질문에 어리둥
절해졌다.
"그게 무슨 얘기야? 친자매 맞냐니? 아… 무슨 얘긴지 알
겠다. 두 사람이 워낙 스타일이 다르더라 그 얘기구나? 후후,
솔직히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언니 쪽이 조금 예뻐보이기
는 하지."
그 정도는 자연스런 질문이라 여겨졌다. 그래서 헛웃음까지
곁들이는 나였는데, 의외로 희창이는 꽤 심각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아냐. 난 그런 얘기가 아니구, 진짜로 명희 선배랑 그 정희
언니랑 자매 맞느냐는 얘기라구."
"진짜로? 글쎄…? 주민등록증 검사를 안 해봤으니 그런 거
야 알 턱이 없잖아."
"그 분은 뭐하시는 분이래? 그건 알어?"
"정희씨? 명희 선배 말로는 어딘지 몰라도 회사에 다닌다던
걸… 근데 도대체 그런 건 왜 물어? 미인이라서 관심 갖는
거야?"
묘한 일이었다. 집요하게도 꼬치꼬치 캐묻는 녀석인지라 되
려 내게 의구심이 들 지경이었다. 헌데 희창이는 생각지 못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네… 내가 본 적이 있는 것 같거든?"
"네가 명희 선배의 언니를? 어디서?"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 아냐. 그게 어디냐면 말이야, 내가
접대하느라 다녔던…"
접대하느라 다녔던 - 그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찰라
명희 선배가 다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그 바람에 더 이상 물을 수가 없
건만 그새 기분전환이 됐는지 오히려 명희 선배가 호기심을
나타냈다.
"너희들 무슨 얘기하고 있었니?"
"그게요, 희창이가 정희씨를…"
"아, 아니에요. 명희 선배…!"
묘한 일이었다. 멋모를 내가 얘기를 꺼내려하자 허둥대며
말문을 막는 희창이. 돌아보니 녀석은 보이지 않는 눈짓으로
신호마저 보내고 있었다.
제35화 제발 속옷 좀 입어, 언니!
"희창이가 뭘? 여자 얘기라도 했어?"
"어, 어떻게 아셨어요? 맞아요. 여자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그렇지 창희야?"
희창이가 그 순간을 넘기기 위해 일부러 호들갑을 떨어댔
지만, 명희 선배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얼떨떨해진 나
는 멍한 눈만 꿈벅어야 했다.
"어쩐지… 그럴 줄 알았어. 너희 둘이 모였는데 어련하려구.
창희는 그렇다 치고, 희창이 너 요새 사귀는 여자 있나보다?"
"저요? 여자친구야 당연히… 당연히 있죠."
"누구야? 궁금한걸."
그제야 재미난 화제를 발견한 셈, 그녀가 은근한 관심을 보
이는데도 희창이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해댔다. 게다가 옆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그의 말에 저으기 놀라기까지 하
고 있었다.
"미진이라고 해요, 이미진."
"이미진? 이름 예쁘네. 뭐하는 아가씨니?"
"뭐하는 아가씨냐면요, 어… 그게 그러니까… 방송국에서
일해요."
이것 참. 그토록 똑똑한 명희 선배였으나 그 대목에 이르러
서도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방송국이 아니라 CF모
델 이미진, 이렇게 말하면 모를 이가 없을 텐데도 설마 그녀
로서는 그 정도 상상은 못하는 듯했다.
"방송국이라… 희창이가 고른 아가씨라면 물론 예쁠 테고,
어떻게 만난 사이니? 데이트는 자주 해?"
"뻔하죠 뭐. 술 마시다가 알게 된 사이에요."
"그래? 술집에서 부킹이라도 했어?"
전형적인 여성 특유의 질문을 거듭하는 그녀. 반면 머쓱해
지는 건 희창이가 아닌 내 쪽이었다.
당연했다. 뭐랴고 하랴. 지금 말하는 이미진은 그저 그런
이미진이 아니라 TV스타 이미진이요, 홍콩이라는 특급 룸살
롱에만 전속으로 몰래 나오는 유명 연예인 호스테스고, 그와
그녀는 그곳에서 술 마시다가 2차를 함께 나가는 게 데이트
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잖은가.
그런 엄청난 자초지종은 기실 이 자리에서 명희 선배만 모
르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순진하기 짝이 없는 그녀에게 희창
이 녀석은 피식거리는 웃음을 곁들이며 실로 뜨끔거릴 대답
을 하고 있었다.
"그런 셈이죠, 후후. 그냥 술이나 따라주던 계집애에요."
"술이나 따라주는 여자애? 진짜?"
"네. 그저 그런 사이죠."
술이나 따라주는 여자애. 얼마간은 그 표현이 진실에 가까
운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리 진지하게 들릴 말투는 아니었고,
어차피 의도대로 별 의미없이 흘려 듣는 명희 선배인 것 같
았다.
뜻밖의 일이 벌어진 건 그때였다. 그런 시시데데한 잡담 속
에 슬슬 술잔이 오가며 무르익는 좌중 - 그런데 어디선지 갑
자기 뚜둑, 하는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던 것.
의아한 우리들은 서로서로를 쳐다보아야 했다. 그렇지만 아
무도 자기가 아니라는 표정들인데, 그제야 헛기침 소리와 함
께 누군가가 테이블 위로 문제의 그것을 꺼내보이고 있었다.
상진씨였다. 그리고 그 뚝뚝거린 소리의 근원은 부러진 나
무젓가락이었다.
"미안합니다. 무심결에 만지작거리다가 그만…"
재빨리 멎쩍게 사과하는 그였지만, 나로서는 약간은 기이함
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 나무젓가락은 우리가 소독저라
부르는 흔하디 흔한 일회용 물건이 아닌 때문이었다.
이런 고급 일식집에서야 나오는, 화려한 상감조각까지 들어
간 굵고 튼튼한 재질이었다. 어째서 저걸 부러뜨렸을까. 나로
서는 잠시 골똘해졌으나 다른 사람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눈
치였다. 그 통에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상진씨가 대화를 끊
고 있었다.
"그런데 희창아. 이제 슬슬 일어서야 하지 않을까?"
"벌써요? 아직 일곱 시 반인데?"
"일본 사람들이잖아. 그 사람들은 시간 관념이 철저하니까,
이런 사소한 이야기나 하고 있을 여유가 없어."
사소한 이야기라.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라 해도 그는 철
저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 나와 명희 선배야 그의 말에
따를 도리밖에 없었다. 일식집을 나오면서도 희창이는 뭔가
아쉬운 얼굴이었다.
애초에 일요일날 놀러온다던 심정으로 우리를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에 얶매인 셈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도 그
럴만한 일이었다. 다만 문을 나서던 내 팔뚝을 녀석이 슬그머
니 잡아당기고 있었다.
"응… 왜 그래?"
"있잖아, 창희야. 아까 내가 명희 선배 언니 정희씨 얘기한
거 있지? 그거 선배한테는 아는 체하지 말아라."
"어째서?"
"어… 그냥. 확실하지도 않은 얘기라서."
글쎄다. 알았어, 그럼 그럴게…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나였
으나 도통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만
큼 신중을 기할 얘기는 아닌 성싶은데 희창이가 유별나게 군
다는 느낌이었다.
좌우간 우리는 그곳에서 헤어져야 했다. 명희 선배와 나는
아파트 앞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그의 제안을 웃으며 거절해
버렸다. 그래도 우리와 처지가 다른 그였으니, 행여 상진씨의
말처럼 불상사라도 있을까봐였다.
"희창이… 옛날하고는 많이 달라졌네. 정말 바쁜가봐."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한 명희 선배의 혼잣말이었
다. 어쨌든 우리는 그런 녀석에 대해 부러움보다는 적잖은 걱
정이 앞서고 있었다.
* * *
아파트에 돌아와서 명희 선배와 나는 각자 나름의 일에 빠
져야 했다. 집들이 겸 맥주 한 잔 더 마실까 하는 의견이 나
왔지만 그녀의 언니인 정희씨가 참석할 다음으로 미루어졌고,
나로서도 사소한 짐정리 따위가 남아 있었다.
단지 특이한 것은 정희씨가 밤이 으슥하도록 들어오지 않
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막 이부자리를 펴자 명희 선배가
방문을 두드렸다.
"잠자리 괜찮아? 창희 네가 가져온 이불들 너무 얇지 않겠
어?"
"아뇨. 어차피 얼마 후면 여름인데요 뭐."
"그럼 다행이구… 근데 이 기집애는 왜 이렇게 안 들어오
지?"
"정희 누나 말이에요?"
그제야 시계를 쳐다보았다. 이미 자정 가까운 시각이었다.
명희 선배는 신경질이 난다는 양 입술을 깨물었다.
"또 술 마시느라 늦게 들어오는 걸거야. 못 말린다니까. 어
제도 마셨으면서… 어쨌든 잘 자, 창희야.
"
"네, 선배도요."
바야흐로 다가온, 새 집에서의 공식적인 첫날밤이었다. 불
을 끄고 몸을 누인 나는 의외로 쉽게 잠이 들 것 같은 기분
이었다.
모종의 사고가 발생한 것은 아마도 그렇게 꿈나라로 떠난
지 몇 시간이 지난 무렵이었다. 모종의 사고, 달리 표현할 방
도가 없었다.
나는 문밖에서 들려오는 두런대는 목소리에 얼핏 잠이 깨
고 있었다. 내가 왜 그 목소리들을 듣게 된 것인지 이유는 분
명하지 않았다. 아마도 조금만 톤이 낮은 소음이었다면 나는
계속 잠이 들었을 터, 그렇지만 내가 퍼뜩 일어난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제발 속옷이라도 좀 입어, 언니!"
이게 무슨 소릴까. 낮은 목소리지만 그 소리는 틀림없이 그
렇게 들리고 있었다. 이어서 연달아 두런대는 그 대화는 평상
시의 도란거림이 결코 아니었다.
"옷 안 입어? 정말 말 안 들을 거야?"
반쯤 버럭대는 톤, 그건 다름 아니라 싸우는 목소리들이었
다.
제36화 팬티도 안 입은 여자
도대체 뭐지? 당혹스럽게도 그 다투는 목소리들은 다른 곳
에서 들려오는 게 아니었다. 바로 내 방문 바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분명 톤은 높아도 잔뜩 낮춰진 음성들이었므로 그걸 듣고
깨어난 게 신기할 정도였다. 나는 후닥닥 허리를 일으키며 재
빨리 게슴츠레한 눈을 비벼댔다. 쳐다보니 꼬박 새벽 두 시를
넘기고 있는 시계바늘.
"내버려 둬, 기집애야… 내일 학교 가야 한다며. 가서 잠이
나 자."
"언니!"
언니. 그 단어에 마지막 남았던 졸음까지 한 순간에 날아갔
다. 옆집이나 아파트 아래도 아니고 다름 아닌 내 방 바깥,
게다가 언니라고 부르는 사이라면 - 이럴 수가. 그들은 다름
아닌 명희와 정희 자매였다.
"오늘부터 창희도 와 있잖아. 그런데 이러면 어떡해?"
"창희…? 아, 그 덩치 크고 어수룩하던 그 친구? 후훗, 아까
보니까 생각보다 귀엽더라, 야."
필경 뒷부분이 명희 선배의 언니 정희씨인 듯했다. 귀엽다
는 칭찬이었어도 나는 순간적으로 머쓱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목소리는 십중팔구 혀가 꼬인, 즉 취한 목소리였다.
"어디 가는 거야?"
"남이사… 담배 피려고 그런다, 왜?"
담배? 엿듣던 나로서는 어안까지 벙벙해지고 말았다. 그렇
다면 정희씨가 담배를 피운다는 얘길까?
그러다가 갑자기 쿵, 하며 뭔가 둔탁한 소음마저 들려오는
바깥. 불상사라도 있을까 싶은 나는 허겁지겁 문가로 다가가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방문을 열어보았다.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행여 추측대로 술 취한
정희씨가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큰 일일 것 같기 때문이었다.
보나마나 그 소란이 피워지는 장소는 거실일 터였고, 훤하
게 불이 켜진 그곳은 미처 일 센티도 채 열지 않았음에도 한
눈에 내다보이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 쪽에서 내 방문은 정면이 아닌 대각선 방향이
었다. 정확히 말해 이 아파트의 구조는 거실을 기준으로 현관
에서 가장 깊숙한 곳이 안방이자 정희씨의 방, 다음으로 거실
건너 명희 선배의 방, 마지막으로 내 방의 순서였다. 그리고
명희 선배의 방과 내 방 사이에 화장실이 하나, 다른 하나의
화장실은 안방 안에 있었다.
게다가 당연히 불이 꺼진 내 방안이었으니 공교롭게도 내
편에서는 볼 수 있을지라도 그녀들에게 내가 보일 리는 없었
다. 그렇기에 그 곳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등을 돌
린 명희 선배의 뒷모습이었다.
그녀는 맞은편 소파에 앉지 않은 채 서 있었는데 - 필경
소파에 앉았다면 나와 시선이라도 마주쳤으리라 - 아까 저녁
때의 옷차림 그대로였다. 아마도 지금껏 언니의 귀가를 기다
리고 있던 모양인 듯했다.
다른 한 명의 주인공은 금세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직후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언니 정희씨, 내가 놀라는 이유란 그녀를 힐난하던 명희 선
배의 말이 즉각 상기됐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옷 좀 입으라
는 그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정희씨는 달랑 얇디얇은 슈미즈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간신히 엉덩이나 덮었을까, 그 짧디 짧은 원피스 스
타일의 속옷 차림으로 돌아온 그녀가 담뱃갑과 라이터를 들
고 거실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고 있었다. 그것도 소파 위가
아닌 맨바닥에.
이어 서슴없이 담뱃불을 척 붙였다. 기다렸다는 듯 명희 선
배의 잔소리가 다시 이어졌지만 그녀의 언니는 흥흥거리며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옷 좀 입으란 말야, 언니…! 이제 여기는 우리만 사는 게
아니라구!"
"어휴… 됐어. 그러다가 명희 네 목소리에 창희씨 잠 깨겠
다."
후, 담배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지자 정희씨는 자세를 바꿔
한쪽 무릎을 세웠다. 그러자 그 좁은 문틈으로 바깥 동정을
살피던 나는 찰라 벌어지려는 입을 황급히 손으로 막아댔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으윽… 하마터면 나도 모를 기묘
한 신음소리가 나올 뻔했으까.
한쪽 무릎만 세우고 나머지 다른 한쪽 무릎은 책상다리로
쪼그리고 앉은 정희씨. 고로 그 아찔한 길이의 슈미즈 속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건 마치 내 정면으로 가랑이 사이를 벌
려댄 포즈나 진배 없었다.
내 휘둥그래진 시선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결코 돌려질
수가 없었다. 그녀의 날씬한 다리가 예뻐서? 아니다. 하늘대
는 어깨끈 곁으로 드러난 뽀얀 속살에? 그것도 아니었다.
아까도 말했다. 간신히 엉덩이나 가릴락 말락하는 길이의
슈미즈라고. 그러니 내 아찔한 시야에 정통으로 들어온 것은
거뭇한 그 살색 그림자였다.
정희씨의 허벅지 사이 가장 깊은, 그 사타구니의 어둑어둑
한 속안이 몽땅 엿보이고 있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문을
닫고 고개를 돌려야 마땅할, 더없이 민망한 모습이었다.
내 목구멍으로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만이 숨가빴다. 만약
핑계를 댄다면 그건 잠이 덜 깬 탓이었다. 그나마 어슴프레한
거실 불빛이기에망정이지 대낮이었다면 나는 그녀의 속옷조
차 분간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도 약과임을 알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아
서였다. 그건 예의 그 명희 선배의 화난 목소리가 원인이었는
데, 머리통 속이 백짓장 모양 새하얘질 얘기가 그 순간 들려
오고 있었다.
"알았어, 그럼 팬티라도 입으란 말야…!"
팬티 - 나로서는 떡 벌어져 방바닥에 떨어진 턱을 찾아 다
녀야 판국이었다. 설마 그럼? 그 황당한 이야기의 갈피를 잡
기도 전에 아주 극을 달리는 그 두 자매의 대화였다.
"뭐 어때, 기집애야. 그래서 실내복 입었잖아…"
"그게 실내복이야? 슈미즈지!"
"참 나… 왜 그러니? 오빠 앞에서도 난 이렇게 입었는데."
"그거야 가족이니까 그렇지, 그게 말이 돼?"
"얘좀 봐. 나 원래 잠 잘 때 이렇게만 입고 자는 거 몰라?"
"그럼 앞으로는 언니 방에서나 그렇게 입어. 밖에서는 안
된단 말야…!"
맙소사. 그렇다면 내가 본 그 거뭇한 색 심연이 무엇이었을
까. 그건 단순한 단순한 살색이 아니었다는 얘기 아니냐.
당장 머리 속이 어지러워졌다. 본의 아니게 훔쳐 본 정희씨
의 가랑이 사이, 헌데 그것이 아무 것도 가려지지 않은 천연
그대로인 음부의 비경이었다니…! 말도 안 된다. 이건 꿈이라
해도 믿지 못할 현실이었다.
급박하게 울렁이는 가슴 속. 귓가에는 퉁탕대는 심장 고동
마저 들려왔다. 다시 말하지만 대낮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
다. 불과 사오 미터의 거리, 혹시라도 그랬다면 나는 이사온
첫날부터 함께 사는 집주인 여인네의 가장 보아서 안될 부분
을 속속들이 보았으리란 얘기였다.
맹세코 거기까지 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필시 그 난
처한 상황에 명희 선배도 동감하는 모양이었다.
언니 방으로 불쑥 사라지더니 몇 초 후 다시 돌아나온 그
녀. 그녀의 한 손에는 뭔가 조그만 것이 들려 있었다. 휙, 곧
이어 그것이 정희의 발치에 던져졌다.
"빨랑 그거 입어. 아니, 여기서 말고 안에 들어가서 입고 나
와. 최소한 그런 다음에 거실에서 담배 피던지 말던지 해."
"아유, 귀찮아…!"
나는 얼핏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는 기겁을 했다. 그건
까만색의 헝겊조각, 팬티였다. 별 수없이 정희씨는 마지 못해
그 삼각형의 속옷을 주워들며 몸을 일으켰다. 이내 명희 선배
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표정으로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
제37화 그녀의 언니와 화장실에서…
그 황당한 사건의 주인공들이 사라지자, 나는 떨리는 손길
로 후닥닥 방문을 닫았다.
도저히 찔리는 양심상 더 이상 훔쳐볼 수가 없었다. 행여
들킬 걱정도 걱정이었지만 계속 있다가는 내가 일부러 그녀
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엿본 것과 마찬가지라는 자격지심부터
앞서고 있었다.
재빨리 이부자리로 돌아온 나는 숨기라도 하듯 담요를 뒤
집어썼다. 눈을 질끈 감았어도 그저 쓰디쓴 입맛만이 다셔져
갔다. 구십도 각도로 벌려진 다리, 그 바람에 가려진 것 없이
드러난 살 속 - 이사온 첫날부터 나는 우연치고는 기가 막힐
꼴을 목격한 것이었다.
실로 어이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앞으로도 쭉 함께 지낼 사
이인 정회와 명희, 그녀들이 집안에서 어떻게 하고 사는지야
물론 내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방금 전
그 장면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이 세상 어딘가에는 벌거벗고 사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여자들 중에서도 남자 주당들만큼이나 주사를 부릴 사
람도 있을 터였다. 그러니 내가 본 정희씨의 술버릇 정도는
어쩌면 그녀 나름대로 이해되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렇지만 정작 내게 이색적인 것은 다름 아닌 그 외모의 차이
만큼이나 서로 다른 두 자매의 성격 문제였다.
딱 부러지는 성격에 때로는 차갑다는 인상까지 주는 명희
선배, 반면에 언니 정희씨는 얼마간 제멋대로인 게 확연히 드
러난 셈이었다. 마치 동생에게 반항이라도 하는 듯했던 그녀
였다. 뭐랄까, 차라리 헤프게까지 보인다고 해야 옳을까.
지난 저녁 친자매 사이가 맞냐고 묻던 희창이의 질문이 떠
올라졌다. 정말 자매치고는 너무나 요지경 같은 모습이었다.
어쨌든 나로서는 애써 잠을 청해야 했다. 기실 내일부터 당
장 학교 도서관을 다니려던 차였으므로 잠이 부족해서는 안
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멍하니 설쳐대다가 바깥의 그녀들에
게 내가 깨어있었다는 걸 알려서도 아니 되었다.
제길헐. 그런데 그럴수록 자꾸 더 야릇해지는 내 기분이었
다. 그 숨 넘어갈 미끈한 허벅지 사이 경치가 자꾸 눈 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의외로 조용한 바깥동정에 되려
한층 호기심이 일고 있었다.
잠시 귀를 모아보았다. 역시나 묘했다. 담배를 두어 대는
족히 피웠을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
고 있었던 것이다.
잤을거야. 다시 들어가 잤겠지. 그러나 분명 문소리 따위가
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문을 열고 몰래 훔쳐볼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혼자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순식간에 간이 콩알만해진 것은 그 때였다. 무릇 긴장하고
있는 사람이 훨씬 더 놀라는 법, 바로 내가 그런 경우였다.
그게 똑똑이었는지 쿵쿵이었는지도 분간하지 못했다. 하여
간 사위가 고요하도록 불까지 꺼진 내 방안으로 소스라칠 소
리가 우당탕 울려퍼지고 있었다.
방문 쪽이었다. 바로 그 한복판을 두들기는 소리, 이어서
마치 손톱으로 그 합판 문을 긁어대듯이 끼긱거리는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무슨 공포영화 같은 한 장면이었다. 기절하기 일보직전으로
놀랐음에도, 그 다음에 희미하게 엿들린 소리로 인해 내 몸뚱
아리는 즉각 잠자리에서 튀어나와야만 했다.
우우욱 - 적어도 그 소리만은 정확히 구분되는 까닭이었다.
반 신음에 가까운 그 소리는 내게 너무나 익숙했다. 틀림없이
막 구토를 일으키려는 소리, 그것도 여자의 토악질이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행동을 취했다. 그게 누구일지는 안
봐도 뻔할 노릇이었고 아니나 달라 퍼뜩 열려진 내 방문 앞
에서는 예상한 그대로의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방문을 열면 곧바로 마주보이는 곳이 이 아파트의 두 번째
화장실이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미처 문도 닫지 못한 채 허연
그림자가 비틀거리며 뛰어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랬다. 옥색의 짧은 슈미즈와 그 아래로 허벅지부터 몽땅
드러나 보이는 두 다리. 그 야시시한 뒷모습은 정희씨였다.
그녀가 막 변기 위로 허리를 굽히며 웩웩거리고 있었다.
그 난처한 광경에야 나는 비로소 무슨 상황인지 전부 이해
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알딸딸한 목소리더니만 급기야 속
이 부대낀 모양이었다. 해서 급한 통에 자기 방 화장실을 찾
지 못하고 가까운 곳에 뛰어든 그녀인 듯했고, 기겁을 해야
했던 내 방문의 소음은 그러느라 그녀가 비척이는 걸음걸이
로 본의 아니게 부딪쳐댄 소리인 것 같았다.
어째야 할지 모를 나는 멍청히 선 채로 우왕좌왕거렸다. 빤
히 들여다보이는 욕실 안에서는 정희씨가 거푸 토하려들고
있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 것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뿔사. 내 실수는 그것이었다. 왠지 잠깐 조용해졌다 싶던
나는 한 번 더 깜짝 놀라야만 했던 것이다.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결을 흘리는 정희씨, 그녀의 얼굴
이 돌려져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녀와 내 시
선이 정통으로 마주치고 있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토악질을 하는 여자, 그리고 활짝 열려진
화장실 문 밖에서 그걸 뻔히 보고 있던 남자. 참으로 난감한
광경이건만 천만 뜻밖에도 정희씨는 그런 나를 보며 싱긋 웃
어보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이리 와서 내 등 좀 두드려줘."
찰라 내 등줄기로는 한가닥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부탁인지 명령인지, 서슴없이 나를 불러대는 그녀의 말이었
다.
"얼른… 토하면 좀 나을 것 같아서 그래."
어째야 했을까.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나였다. 그 거역할
수 없는 청에 나도 모르는 새 나는 그 화장실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 문 좀 닫고 들어 와."
생각 만큼 많이 취한 것은 아닌지 기이하게도 그 정신 없
는 와중에 또박또박한 말씨로 지시하는 정희씨였다. 나로서야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엉거주춤 그녀의 등뒤에 가서 서자 그녀는 고갯짓으
로 자기 등을 가리켜보이고 있었다. 거길 두드려달라는 듯,
도리 없는 내가 부들대는 손길을 가져가려는데 순간 한층 더
당혹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그녀의 포즈 때문이었다. 아주 나에게 맡긴다는 투
로 좌변기를 붙들고 등을 돌린 정희씨, 고로 그 자세는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되고 있었
다.
뭐라고 해야 하나. 입위? 후배위? 거리낌없이 허리를 숙인
탓에 그녀는 뒤편의 내게 자신의 둔부를 쑥 내밀어대었던 것
이다.
하물며 그녀의 슈미즈 자락 아래로는 아까 본 그 까만색의
팬티마저 언뜻 비치고 있었다. 나는 그 아슬아슬한 정희씨의
자태에 재차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어쩌다가 이런 난감
한 상태에까지 휘말린 것인지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얼른 좀… 재촉해대느라 정희씨의 그 둔부마저 씰룩여댔다.
마침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심정이 되어버린 나는
얇은 천자락으로 가려진 그녀의 등에 마지못해 손을 올려야
했다.
팡팡, 하지만 그렇게 몇 번 두드렸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
다. 그러자 흘끗 뒤를 돌아보며 나에게 더욱 민망스런 주문을
하고 있는 정희씨였다.
"갑자기 담배를 폈더니… 후… 아무래도 안되겠어. 손 좀
줘봐."
내 손? 되물을 틈도 없었다. 등 뒤로 손을 뻗은 그녀가 갑
자기 덥석 내 손목을 쥐고 있었다. 곧이어 그녀는 상상도 못
할 곳으로 내 손을 이끌고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젖가슴 쪽이었다.
제38화 뒤에서 엉덩이를 내려다보며
대체 뭘하려는 건지, 나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너무나 얼
이 빠진 나는 정희씨의 당혹스런 행동을 그저 멍청히 지켜보
아야만 했다. 신기할 정도로 나는 그때껏 찍소리 한 번 못한
채 그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희씨가 이끄는 것은 분명 내 손이었지만 그 순간엔 그게
정말 내 것인지조차 분간이 안 갔다. 나는 급기야 두 눈을 질
끈 감아버렸다. 이윽고 그녀에게 쥐어진 팔목 아래로 어딘가
매끄럽고 푹신한 부분이 닿아왔기 때문이었다.
"뭐야, 왜 이리 손을 떨어…? 그냥 거기 좀 눌러 달란 말이
야."
미칠 노릇이었다. 부들대는 내 손길이 거꾸로 이상하다는
듯 정희씨는 핀잔까지 주고 있었다.
정녕 내가 만지고 있는 부분이 어디쯤일까. 그제야 비로소
나는 그녀의 목적지를 알아차리고서 후유, 원인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젖가슴이라 착각한 그 부드러움은 천만다행히도 그
아찔한 장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곳은 그녀의 아랫배, 정확히 말하면 명치 끝 쯤이었다.
나로서는 정색을 하고 말았다. 고로 정희씨는 지금 억지로라
도 구토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이, 이렇게요…?"
"그래. 얼른 해줘."
흔한 응급처치 방법인 줄도 모르고 그토록 바싹 긴장을 했
으니 도리어 내가 머쓱해져야 할 일이었다. 물론 얄팍한 옷
속으로 여실히 느껴지는 그녀의 맨 살인지라 여전히 후들거
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렇게 된 이상 도리없이 지시를 따라야만 했다. 두
손을 맞잡고 엉거주춤 그녀의 아랫배를 눌러대자 즉시 욱욱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참, 그게 아니잖아…!"
그런데 미처 그 동작을 제대로 취하기도 전에 정희씨는 다
시금 덥석 내 손을 붙들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니 - 허리를
일으킨 정희씨가 나를 돌아보았다. 영문을 모를 짜증이었다.
"누가 날 안아달랬어…? 이렇게 해봐, 거기 서서 그런 식으
로 세게 좀 눌러보라구."
맙소사. 내 입이 떡 벌어졌다. 자기 몸을 안았다 어쨌다 하
는 그 푸념 탓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차라리 낳았을 터, 그녀
는 내게 한층 더 야릇한 주문을 하고 있었다.
아예 등뒤로 손을 뻗어 내게 이래라 저래라 위치까지 잡아
주는 정희씨였다. 그리고 나는 그 지시에 그만 질색을 해버렸
다.
당연했다. 기실 차마 서로 몸에 닿기라도 할까봐 꾸물대던
나였으므로 응당 그녀의 아랫배를 붙든 동작에 힘이 실렸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굳이 두 손으로 앞에 선 사
람의 아랫배를 눌려주려면 어째야 하는가.
그것에는 등을 두드리는 동작과는 전혀 다른 물리적 이치
가 필요했다. 지랫대의 원리, 즉 내 편에서도 힘을 쓰기 위해
서는 어딘가에 버티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앞사람이 내 몸에
기대 단단히 자세를 취하고, 나는 그걸 이용해서…
그러니 맙소사였다. 그건 술 먹고 토하려는 이를 부축한 경
험이 있다면 누구나 알 일이었다.
다시 말해 정희씨는 나를 그런 식으로 세우고 있었다. 즉
내가 선 곳은 정통으로 그녀의 등 뒤, 그것도 아주 바짝 붙여
서였다. 심지어 그녀는 서슴없이 내게 기대기 위해 훌쩍 몸을
숙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그게 더 이상한 꼴을 불러오고 있었다. 내 눈길 아래
로 쑥 들이밀여지는 그 신체부위에 나는 당장 아연해지고 말
았다.
그건 그녀의 그득한 둔부였다. 뒤쪽으로 드러난 그곳이 하
등 거리낌 없이 내 하반신에 밀착되려 하고 있었다.
"어어, 이, 이러면…"
말투마저 더듬거려졌다. 이 황당한 포즈에 내 머리 속으로
는 당장 빨간 불이 번쩍번쩍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그녀의 그 엉덩이를 등뒤에서 안고 - 그것도 있
는 힘을 다해 꽉 껴안고 - 그녀의 허리 밑으로 손을 내려 힘
껏 들어올리듯 힘을 줘야 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참으로 기가
막히는 자세였다.
만약 그녀가 남자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옷이라도 제대로
입은 여자라면, 아마도 나는 그 일을 능숙하게 해내리라. 그
렇지만 이건 경우가 달라도 백 팔십도 달랐다.
아직 남의 집인 양 생소하기만한 이 아파트, 그나마도 단
두 사람만 있는 화장실 안. 그곳에서 반 벌거벗은 것이나 다
를 바 없는 학교 선배의 언니와 살을 비벼대야 한다니.
실로 까무러칠 만한 용기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정희씨
는 한 번 더 등뒤로 나를 끌어당기며 재촉해댔고, 그 바람에
나는 실제 까무러치기 일보직전으로 몰리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동생 명희보다 약간 더 큰 키, 그녀가 두 다
리를 벌리고 서서 허리만 가프게 숙인 탓에 그 둔부는 거의
내 하반신의 높이와 비슷했다. 헌데 그런 판국에 나를 자꾸만
자기 쪽으로 다가세웠으니 어찌 되었으랴.
내 아랫배와 그녀의 엉덩이가 찰싹 맞붙었다. 그 한복판에
실로 아득한 질량감을 느껴야 하는 나. 그건 마치 옷만 벗지
않았을 뿐 완벽한 후배위의 자세와 같았다.
비록 동생이 던져준 그 까만 색 팬티나마 입었다고는 하지
만 정희씨는 거의 맨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풍만한 엉
덩이 사이, 그 쫙 갈라진 골짜기의 굴곡까지 내 하체에 그대
로 전해지고 있었다.
"빨랑 좀…"
거푸 재촉하는 그녀, 벌벌 떠는 나. 가까스로 아래를 내려
다보았다. 잘록한 허리, 흔들리는 등, 게다가 그 두 개의 반원
을 눌러대듯 연신 문질러지는 둔부. 그랬다. 이건 실제의 행
위와 흡사했다.
이를 악 물었다. 단지 힘을 주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
아슬아슬 느껴지는 촉감에 내 몸 어느 한 구석이 반란이라도
일으킨다면 큰 일이었다.
나는 그 본의 아닌 불상사를 이겨내려 안간힘을 다했다. 그
럼에도 정희씨는 꼭 감은 내 눈가, 아니 귓가에 계속 주문을
해댔다. 점점 더 묘한 지경으로 나를 몰아세우는 목소리였다.
"아니… 좀 더 위에."
손을 옮겼다. 다시 힘을 주었다.
"조금만 더 위에 눌러봐…!"
손이 더 올라갔다.
"아아, 금방 나올 것 같아. 더 위…"
미칠 것 같았다. 뭐가 나온단 말인가. 오히려 옷 속에 감춰
진 내 몸 한 구석에서 억눌렀던 액체가 터져나오기 직전이었
다.
제39화 두 사람 화장실에서 뭐했어?
마침내 내 손 끌 언저리에 뭉클하게 흔들리는 부분마저 슬
쩍슬쩍 닿고 있는데도, 그녀의 위쪽을 눌러달라는 요청은 결
코 멈추지 않고 있었다.
힘을 줄 때마다 그곳이 손에 잡힐 듯 출렁거리며 손등을
"야아… 벌서 다 끝났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희
창이였다. 일요일인데도 양복 차림으로 녀석이 빼꼼히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희창이 너 오랜만이다…!"
"하하, 그렇죠? 명희 선배."
명희 선배가 맞이하자 양 손에 든 꾸러미들을 안기는 그였
다. 척 보니 무슨 선물 세트 하나와 세탁용 가루비누 상자였
다.
"이게 다 뭐야?"
"뭐긴 뭐에요. 집들이 선물이죠. 창희가 앞으로 선배 집에
얹혀 산다니까 구경도 할겸, 잘 봐주십사 하는 선물이에요."
"후후, 우리가 집들이하는 거니? 어쨌든 고맙다. 얼른 들어
와."
너스레를 떠는 희창이는 마치 내 방에라도 놀러온 양 스스
럼이 없었고, 어차피 서로 익숙한 사이인 명희 선배와 나는
나름대로 녀석이 반가웠다. 우리는 일단 널찍한 거실에 둘러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금방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여기 생각보다 집 좋은데요? 어디 보자, 여기 문간방이 창
희 녀석 소굴이 되는 건가요?"
"너무 좁지는 않을까? 그래도 욕실이 두 군데라서 편할 거
야."
"에유, 그야 물론이죠. 그건 명희 선배가 창희네 집 안 가보
셔서 그래요. 이 녀석 원래 살던 방보다 지금 여기가 두 배는
더 클걸요."
"그래? 어쨌든 희창이 너 아주 신세 훤하다…! 듣기로 아버
님 사업 돕느라 바쁘다 그러던데, 우리 얼굴 한 본 지도 한
반 년만 아니니?"
"그런가요? 어쩐지 그래서 밤마다 명희 선배 보고 싶어서
잠이 안 오더라니까요."
키들키들, 특유의 그 농담을 해대는 희창이였다.
"음… 근데 이럴 게 아니지. 아까 창희랑 배 고프다고 했는
데 잘 됐다. 우리 중국집에 뭐라도 시켜 먹을까?"
"그래, 희창아. 내가 시킬 테니 뭐 좀 먹자."
"창희 네가? 아냐. 그럴 게 아니라… 마침 나도 배가 고픈
데 차라리 밖에 나가는 게 어때? 내가 근사한 데에서 저녁
살게."
"뭐? 얌마, 이사 온 건 난데 네가 왜 돈을 써?"
"아이구, 됐네. 학생이 뭔 돈이 있어? 그 돈 있으면 명희 선
배한테 하숙비나 더 내라. 안 그래요, 선배?"
"우와, 희창이 너 아주 손 커졌구나? 창희한테 듣기로 어디
이사님이라더니 어디 한 번 얻어 먹어볼까?"
이것 참, 그 와중에 미안스러운 것은 나인데 명희 선배마저
희창이에게 동조를 해댔다.
"사실은 나 차 타고 왔단 말이야. 그래서 그래."
"차?"
"응. 밖에 상진이 형도 있구."
상진씨라. 그 비서 노릇한다는 형님까지 와 있다는 말에 나
는 결국 뭐라 토를 달 수 없었다. 그렇게 외식을 하기로 결정
을 본 우리였건만 명희 선배는 그제서야 생각난 듯 안쪽을
향해 소리를 쳤다.
"언니…! 이리 좀 나와 봐."
"언니? 아 참, 그러고 보니 원래 이 아파트 안방 마님이 따
로 계신다고 했었죠?"
"맞아, 정희라고 우리 언니야."
"잘 됐네요. 얼른 나오라고 하세요. 모두 같이 가죠 뭐."
"알았어. 언니, 언니 잠이라도 자는 거야?"
그런데 묘하게도 안방 쪽, 즉 언니 정희씨의 방에서는 계속
묵묵부답이었다. 다시 한 번 명희 선배가 소리를 지른 한참
후에야 정말 자고 있기라도 했는지 슬그머니 인기척이 들리
고 있었다.
"어…?"
어 - 이건 누구에게서 나온 소리였을까. 뜻밖에도 느릿느릿
방문을 열며 나타난 정희씨의 모습을 본 희창이에게서 나온
짤막한 탄성이었다.
나는 의아한 시선으로 녀석 쪽을 돌아보았다. 보나마나 상
상 못한 미인인 명희 선배의 언니를 마주쳐서인 것 같았다.
희창이는 고개를 갸우둥거리면서까지 뚫어져라 그녀를 바라
보고 있었는데, 그 눈길을 느꼈는지 정희씨도 마주친 눈빛에
적잖이 놀라는 기색이었다.
"얘들이 저녁 산다는데 같이 나가자, 언니."
"그래요, 같이 나가세요."
하지만 정작 난처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지고 있었다. 나와
명희 선배가 함께 권하기까지 했는데도 언니 정희는 당황하
는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고개를 젓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아냐. 난 됐어."
"왜? 배 안 고파?"
"나… 나는 별로야. 너희들끼리 가."
"뭐야, 오늘 새 식구도 이사 왔는데 기념으로 술이라도 한
잔 안 할 거야?"
"그건… 아니 나, 사실 약속이 있어서 그래."
"약속? 오늘 그런 거 없었잖아?"
"으응, 근데 방금 전에 생겼어."
모를 일이었다. 조금 전 내가 있을 무렵만 해도 시원찮기는
했지만 그다지 거리낌은 없었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갑작스레 낯을 가리는 인상이 역력해져 있었다.
틀림없이 어디 전화 거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정희
씨는 한사코 고사하고 있었다. 급기야 언니 마음을 꺾을 수
없다는 듯 명희 선배도 어깨를 으쓱거려야만 했다.
"그럼 알아서 해. 너무 늦게 들어오지만 말구."
늦게 들어오지 말아라? 희한하게도 그 말은 언니인 정희씨
가 아니라 명희 선배가 하는 말이었다. 어쨌든 우리끼리만 아
파트를 나서야 하는 희창이와 나, 그리고 그녀였다.
"이상하네. 그렇게 술 좋아하는 기집애가…"
"술을 좋아하다뇨? 명희 선배 언니가요?"
"어휴, 말도 마. 일주일에도 한두 번은 술 취해서 꼭두새벽
에 들어온다니까. 아까도 보나마나 자고 있었을 거야, 어제도
술 먹고 들어왔거든. 그래놓고 어떻게 회사 생활을 하는지
원…!"
내 질문에 명희 선배로서도 투덜거리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래봤자 그들 가족끼리의 문제일 테니 나로서는 머쓱한 표
정을 짓는 게 전부였지만, 얼핏 보니 의외로 희창이가 뭔가에
골똘한 표정이었다.
"넌 또 왜 그래?"
"나? 아, 아냐… 아무 것도."
회사 일 때문에 그런가, 내가 어리둥절한 인상을 지어보였
어도 녀석은 고개를 저으며 피식거리고 있었다.
아파트 주차장에는 그의 말대로 정말 예의 고급 승용차와
상진씨가 대기하고 있었다. 간단히 서로 소개와 인사를 건네
고 차에 오르자 알아서 척척 이사님답게 지시를 내리는 희창
이었다.
"오사카로 가요, 형. 근데 아까 그거 어딨죠?"
"네가 사오라던 거? 거기 뒷좌석에 뒀어."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간단히 지명으로 된 상호를 대는 희
창이였다. 나는 그나마 홍콩이라는 룸살롱 이름이 아니길래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는데, 상진씨와 영문 모를 얘기를 나
눈 그는 문득 뒷좌석 발치에 놓인 꾸러미 하나를 내게 가리
켰다.
"이게 뭔데?"
"창희 너한테 주는 선물이다. 이사 기념으로."
얼레, 왠 걸까 - 그 포장을 끌러본 나는 입이 벌어졌다.
"이거 핸드폰이잖아?"
"그래. 요즘 세상에 그런 거 하나 안 가지고 다니는 원시인
은 너밖에 없을 거다. 언제 어디서든 즉각 이 형님 전화 받으
라고 사주는 거야."
뭐라고 해야 하나. 그것은 요즘 선전에 등장하는 최신형의
기종이었다.
이미 문자판에 번호까지 찍혀 있는 걸로 보아 이미 개통절
차까지 다 밟아준 모양인 것 같았다. 내게는 과분한 선물이었
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면서 희창이는 눈만 찡끗거리고 있었
다.
"아무래도 여자 분들 수다가 너보다 더 심하실 거 아냐…
그래서 앞으로 창희 네가 명희 선배네 전화기 빌려 쓰느라고
눈치 보지 말라는 뜻이야. 알겠지?"
"어머머, 야…!"
그 말에 명희 선배가 장난스럽게 희창이에게 손찌검을 가
했다. 덕분에 차 안에는 잠시 웃음소리가 감돌 수 있었다.
제34화 정희의 정체는?
오사카라는 그 곳은, 이름에서 풍기는 분위기처럼 시내 근
처의 고급 일식집이었다. 명희 선배와 나 그리고 상진씨를 앞
장세운 희창이 녀석은 그 안의 한 별실에 선뜻 자리를 잡았
다.
"이야… 희창이가 오늘 돈 좀 쓰려나 보네?"
사뭇 놀란 시선의 명희 선배였지만 실상 그런 심정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수준의 횟집 따위에야 그럭저럭 드나들어
봤어도 이렇게 호화스런 일식집은 처음이었다.
"가끔 회사 일로 사람 만나려고 왔던 것뿐이에요. 제가 사
는 거니까 드시고 싶은 것 드세요."
회사 일이라면 이곳도 필경 희창이의 접대용 장소 중 하나
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명희 선배와 나는 깔끔한 정장 차림의
여종업원들이 내민 메뉴판을 받아들고는 저으기 놀란 시선을
마주보아야 했다.
보통 횟집에서 킬로그램에 얼마 또는 한 접시에 얼마, 라는
식의 생선회 가격들은 모두 싯가라는 단어로 적혀 있었다. 단
하나 광어회만 실제 가격이 나와 있었는데, 그것은 고작 1인
분에도 그런 곳의 특대형 한 접시보다 두 배 가까운 금액이
었다.
명희 선배와 나는 알게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막 이삿짐을 풀다 나온 우리에 비해 이런 고급스런 곳에 어
울리는 양복차림은 맞은 편에 앉은 희창이와 상진씨만이었다.
결국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우리가 묵묵히 있자 희창이 녀
석이 알아서 뭐라뭐라 주문을 해댔다. 잠시 후 코스에 따른
요리와 맥주 몇 병이 날라져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자, 이사 기념으로 건배…!"
이어 채워진 맥주잔을 서로 들며 희창이가 건배를 주창했
다. 어쨌든 홀가분한 명희 선배와 내가 그렇게 시원하게 비운
맥주잔을 내려놓을 무렵이었다. 덩달아 술을 들이키려던 희창
이, 그런데 불쑥 막아서는 손길이 있었다.
"희창아… 그만."
다름 아닌 녀석 곁의 상진씨였다. 아마도 운전 탓인 듯 자
신의 잔에 손도 안 대던 그가 겨우 반 넘어 골깍이려던 희창
이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에이, 왜 그래요? 겨우 한 잔인데…"
당연히 그에게선 푸념이 터져나와야 했다. 말 그대로 이제
겨우 첫 잔이었으므로 명희 선배와 나마저 의아해질 모습이
었다.
아하, 나는 속으로 무릎을 쳤다. 어쩌면 그건 내가 먼저 보
였어야 옳았을 행동인 까닭이었다.
가뜩이나 접대와 술에 찌들린다며 나까지 안쓰럽게 만들던
희창이 아닌가. 아마 상진씨도 녀석에게 그런 걱정을 해주는
모양이었다. 모처럼 일요일은 편하게 술을 쉬라는 뜻인 것 같
았다. 응당 수긍이 갈 일, 하지만 순간 상진씨는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벌써 잊었어? 오늘 아홉 시 반에 컨설팅 팀하고 약속 있잖
아."
"그래도 상진이 형… 아직 시간 있잖아요."
"안돼. 그런 식이면 이따가 어떻게 독한 양주를 더 마시려
고 그래?"
컨설팅 팀과의 약속? 밤 아홉시 반에? 그를 도와 희창이에
게 술을 자제하라 권하려던 참이었던 나는 일순 머쓱해지고
말았다. 그건 술자리 약속이란 게 뻔했다. 그것도 양주라는
말로 보아 흔한 술자리가 아닌, 십중팔구 녀석의 단골인 룸살
롱 홍콩 같은 데서나 벌어질 호화판 술자리.
일요일에도 그런 바쁜 일정이 잡혀 있단 걸까.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상진씨의 권고란 미리 맞춰진 술
자리를 위해 희창이의 자유로운 기분마저 자제해야 한다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휴… 알았어요. 이젠 내 맘대로 맥주 한 잔 못 마시겠
군."
퍽이나 단호한 표정의 상진씨에 종내 희창이도 고개를 흔
들고 있었다. 분명 다음 번 술자리가 원치 않는 억지춘향이라
는 걸 증명해주는 그의 푸념이었다.
덕분에 나머지 사람들인 나와 명희 선배의 분위기만이 급
속도로 썰렁해졌다. 마치 상진씨의 눈치라도 보아야 할 것 같
은 우리였다. 서로 나누는 이야기마저 조심할 지경인데 그나
마 그는 전화를 건다며 잠시 자리까지 뜨고 있었다.
"칫, 저 사람 뭐니? 좋았던 기분 망가지게."
그런 투덜거림이 제일 먼저 나온 것은 명희 선배에게서였
다. 그에 따라 희창이도 씁스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쩔 수 없죠 뭐. 원래 저희 아버지가 붙여준 사람이에요.
그런데 제가 요즘 회사 일에 귀찮은 티를 냈더니… 아버지께
서 저 형을 닥달했었나 봐요."
"어쨌건 희창이 너… 정말 또 술 마시러 가는 거야?"
"응. 일본에서 건너온 경영자문 팀이라는데, 오늘밖에 접대
할 시간이 없어서 상진이 형이 그렇게 스케쥴을 잡았대… 나
도 한심해 죽겠어. 마시기 싫은 술을 남이 시키는 대로 마셔
줘야 하니까."
그가 힘 빠진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바람에 나 역시 말문
을 잃어야 했다. 답답한 내가 대신 술을 마셔 주고픈 기분이
었고, 그럴수록 안되게만 느껴지는 녀석의 얼굴이었다.
"난 그래도 간만에 희창이 너 얼굴보는 줄 알았는데…"
"미안해요, 명희 선배. 저라고 안 그러겠어요? 다음에 꼭 놀
러갈게요."
마침 슬그머니 상진씨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흐트러짐없
이 묵묵히 우리의 얘기에 더 이상 끼여들지 않고 있었다.
반가웠으면서도 마실 수 있는 이들만 마셔야 하는 술자리
가 어색하게 이어졌다. 그러자 흥이 떨어진 듯 이번에는 명희
선배가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희창이가 미안한 표정으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
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녀석은 어떤 생각이 상기됐는지 내게
문득 목소리를 낮춰왔다.
"근데… 창희야. 내가 뭐 하나 물어봐도 되냐?"
"뭘?"
"너… 아까 그 정희씨라던 명희 선배 언니, 전에도 만난 적
있어?"
"아니. 사실 오늘 이사오면서야 처음 봤어. 왜?"
"그래? 그럼 혹시… 두 사람 친자매 맞다니?"
이건 또 무슨 얘긴가. 나는 그의 뜬금 없는 질문에 어리둥
절해졌다.
"그게 무슨 얘기야? 친자매 맞냐니? 아… 무슨 얘긴지 알
겠다. 두 사람이 워낙 스타일이 다르더라 그 얘기구나? 후후,
솔직히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언니 쪽이 조금 예뻐보이기
는 하지."
그 정도는 자연스런 질문이라 여겨졌다. 그래서 헛웃음까지
곁들이는 나였는데, 의외로 희창이는 꽤 심각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아냐. 난 그런 얘기가 아니구, 진짜로 명희 선배랑 그 정희
언니랑 자매 맞느냐는 얘기라구."
"진짜로? 글쎄…? 주민등록증 검사를 안 해봤으니 그런 거
야 알 턱이 없잖아."
"그 분은 뭐하시는 분이래? 그건 알어?"
"정희씨? 명희 선배 말로는 어딘지 몰라도 회사에 다닌다던
걸… 근데 도대체 그런 건 왜 물어? 미인이라서 관심 갖는
거야?"
묘한 일이었다. 집요하게도 꼬치꼬치 캐묻는 녀석인지라 되
려 내게 의구심이 들 지경이었다. 헌데 희창이는 생각지 못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네… 내가 본 적이 있는 것 같거든?"
"네가 명희 선배의 언니를? 어디서?"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 아냐. 그게 어디냐면 말이야, 내가
접대하느라 다녔던…"
접대하느라 다녔던 - 그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찰라
명희 선배가 다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그 바람에 더 이상 물을 수가 없
건만 그새 기분전환이 됐는지 오히려 명희 선배가 호기심을
나타냈다.
"너희들 무슨 얘기하고 있었니?"
"그게요, 희창이가 정희씨를…"
"아, 아니에요. 명희 선배…!"
묘한 일이었다. 멋모를 내가 얘기를 꺼내려하자 허둥대며
말문을 막는 희창이. 돌아보니 녀석은 보이지 않는 눈짓으로
신호마저 보내고 있었다.
제35화 제발 속옷 좀 입어, 언니!
"희창이가 뭘? 여자 얘기라도 했어?"
"어, 어떻게 아셨어요? 맞아요. 여자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그렇지 창희야?"
희창이가 그 순간을 넘기기 위해 일부러 호들갑을 떨어댔
지만, 명희 선배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얼떨떨해진 나
는 멍한 눈만 꿈벅어야 했다.
"어쩐지… 그럴 줄 알았어. 너희 둘이 모였는데 어련하려구.
창희는 그렇다 치고, 희창이 너 요새 사귀는 여자 있나보다?"
"저요? 여자친구야 당연히… 당연히 있죠."
"누구야? 궁금한걸."
그제야 재미난 화제를 발견한 셈, 그녀가 은근한 관심을 보
이는데도 희창이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해댔다. 게다가 옆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그의 말에 저으기 놀라기까지 하
고 있었다.
"미진이라고 해요, 이미진."
"이미진? 이름 예쁘네. 뭐하는 아가씨니?"
"뭐하는 아가씨냐면요, 어… 그게 그러니까… 방송국에서
일해요."
이것 참. 그토록 똑똑한 명희 선배였으나 그 대목에 이르러
서도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방송국이 아니라 CF모
델 이미진, 이렇게 말하면 모를 이가 없을 텐데도 설마 그녀
로서는 그 정도 상상은 못하는 듯했다.
"방송국이라… 희창이가 고른 아가씨라면 물론 예쁠 테고,
어떻게 만난 사이니? 데이트는 자주 해?"
"뻔하죠 뭐. 술 마시다가 알게 된 사이에요."
"그래? 술집에서 부킹이라도 했어?"
전형적인 여성 특유의 질문을 거듭하는 그녀. 반면 머쓱해
지는 건 희창이가 아닌 내 쪽이었다.
당연했다. 뭐랴고 하랴. 지금 말하는 이미진은 그저 그런
이미진이 아니라 TV스타 이미진이요, 홍콩이라는 특급 룸살
롱에만 전속으로 몰래 나오는 유명 연예인 호스테스고, 그와
그녀는 그곳에서 술 마시다가 2차를 함께 나가는 게 데이트
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잖은가.
그런 엄청난 자초지종은 기실 이 자리에서 명희 선배만 모
르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순진하기 짝이 없는 그녀에게 희창
이 녀석은 피식거리는 웃음을 곁들이며 실로 뜨끔거릴 대답
을 하고 있었다.
"그런 셈이죠, 후후. 그냥 술이나 따라주던 계집애에요."
"술이나 따라주는 여자애? 진짜?"
"네. 그저 그런 사이죠."
술이나 따라주는 여자애. 얼마간은 그 표현이 진실에 가까
운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리 진지하게 들릴 말투는 아니었고,
어차피 의도대로 별 의미없이 흘려 듣는 명희 선배인 것 같
았다.
뜻밖의 일이 벌어진 건 그때였다. 그런 시시데데한 잡담 속
에 슬슬 술잔이 오가며 무르익는 좌중 - 그런데 어디선지 갑
자기 뚜둑, 하는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던 것.
의아한 우리들은 서로서로를 쳐다보아야 했다. 그렇지만 아
무도 자기가 아니라는 표정들인데, 그제야 헛기침 소리와 함
께 누군가가 테이블 위로 문제의 그것을 꺼내보이고 있었다.
상진씨였다. 그리고 그 뚝뚝거린 소리의 근원은 부러진 나
무젓가락이었다.
"미안합니다. 무심결에 만지작거리다가 그만…"
재빨리 멎쩍게 사과하는 그였지만, 나로서는 약간은 기이함
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 나무젓가락은 우리가 소독저라
부르는 흔하디 흔한 일회용 물건이 아닌 때문이었다.
이런 고급 일식집에서야 나오는, 화려한 상감조각까지 들어
간 굵고 튼튼한 재질이었다. 어째서 저걸 부러뜨렸을까. 나로
서는 잠시 골똘해졌으나 다른 사람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눈
치였다. 그 통에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상진씨가 대화를 끊
고 있었다.
"그런데 희창아. 이제 슬슬 일어서야 하지 않을까?"
"벌써요? 아직 일곱 시 반인데?"
"일본 사람들이잖아. 그 사람들은 시간 관념이 철저하니까,
이런 사소한 이야기나 하고 있을 여유가 없어."
사소한 이야기라.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라 해도 그는 철
저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 나와 명희 선배야 그의 말에
따를 도리밖에 없었다. 일식집을 나오면서도 희창이는 뭔가
아쉬운 얼굴이었다.
애초에 일요일날 놀러온다던 심정으로 우리를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에 얶매인 셈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도 그
럴만한 일이었다. 다만 문을 나서던 내 팔뚝을 녀석이 슬그머
니 잡아당기고 있었다.
"응… 왜 그래?"
"있잖아, 창희야. 아까 내가 명희 선배 언니 정희씨 얘기한
거 있지? 그거 선배한테는 아는 체하지 말아라."
"어째서?"
"어… 그냥. 확실하지도 않은 얘기라서."
글쎄다. 알았어, 그럼 그럴게…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나였
으나 도통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만
큼 신중을 기할 얘기는 아닌 성싶은데 희창이가 유별나게 군
다는 느낌이었다.
좌우간 우리는 그곳에서 헤어져야 했다. 명희 선배와 나는
아파트 앞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그의 제안을 웃으며 거절해
버렸다. 그래도 우리와 처지가 다른 그였으니, 행여 상진씨의
말처럼 불상사라도 있을까봐였다.
"희창이… 옛날하고는 많이 달라졌네. 정말 바쁜가봐."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한 명희 선배의 혼잣말이었
다. 어쨌든 우리는 그런 녀석에 대해 부러움보다는 적잖은 걱
정이 앞서고 있었다.
* * *
아파트에 돌아와서 명희 선배와 나는 각자 나름의 일에 빠
져야 했다. 집들이 겸 맥주 한 잔 더 마실까 하는 의견이 나
왔지만 그녀의 언니인 정희씨가 참석할 다음으로 미루어졌고,
나로서도 사소한 짐정리 따위가 남아 있었다.
단지 특이한 것은 정희씨가 밤이 으슥하도록 들어오지 않
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막 이부자리를 펴자 명희 선배가
방문을 두드렸다.
"잠자리 괜찮아? 창희 네가 가져온 이불들 너무 얇지 않겠
어?"
"아뇨. 어차피 얼마 후면 여름인데요 뭐."
"그럼 다행이구… 근데 이 기집애는 왜 이렇게 안 들어오
지?"
"정희 누나 말이에요?"
그제야 시계를 쳐다보았다. 이미 자정 가까운 시각이었다.
명희 선배는 신경질이 난다는 양 입술을 깨물었다.
"또 술 마시느라 늦게 들어오는 걸거야. 못 말린다니까. 어
제도 마셨으면서… 어쨌든 잘 자, 창희야.
"
"네, 선배도요."
바야흐로 다가온, 새 집에서의 공식적인 첫날밤이었다. 불
을 끄고 몸을 누인 나는 의외로 쉽게 잠이 들 것 같은 기분
이었다.
모종의 사고가 발생한 것은 아마도 그렇게 꿈나라로 떠난
지 몇 시간이 지난 무렵이었다. 모종의 사고, 달리 표현할 방
도가 없었다.
나는 문밖에서 들려오는 두런대는 목소리에 얼핏 잠이 깨
고 있었다. 내가 왜 그 목소리들을 듣게 된 것인지 이유는 분
명하지 않았다. 아마도 조금만 톤이 낮은 소음이었다면 나는
계속 잠이 들었을 터, 그렇지만 내가 퍼뜩 일어난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제발 속옷이라도 좀 입어, 언니!"
이게 무슨 소릴까. 낮은 목소리지만 그 소리는 틀림없이 그
렇게 들리고 있었다. 이어서 연달아 두런대는 그 대화는 평상
시의 도란거림이 결코 아니었다.
"옷 안 입어? 정말 말 안 들을 거야?"
반쯤 버럭대는 톤, 그건 다름 아니라 싸우는 목소리들이었
다.
제36화 팬티도 안 입은 여자
도대체 뭐지? 당혹스럽게도 그 다투는 목소리들은 다른 곳
에서 들려오는 게 아니었다. 바로 내 방문 바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분명 톤은 높아도 잔뜩 낮춰진 음성들이었므로 그걸 듣고
깨어난 게 신기할 정도였다. 나는 후닥닥 허리를 일으키며 재
빨리 게슴츠레한 눈을 비벼댔다. 쳐다보니 꼬박 새벽 두 시를
넘기고 있는 시계바늘.
"내버려 둬, 기집애야… 내일 학교 가야 한다며. 가서 잠이
나 자."
"언니!"
언니. 그 단어에 마지막 남았던 졸음까지 한 순간에 날아갔
다. 옆집이나 아파트 아래도 아니고 다름 아닌 내 방 바깥,
게다가 언니라고 부르는 사이라면 - 이럴 수가. 그들은 다름
아닌 명희와 정희 자매였다.
"오늘부터 창희도 와 있잖아. 그런데 이러면 어떡해?"
"창희…? 아, 그 덩치 크고 어수룩하던 그 친구? 후훗, 아까
보니까 생각보다 귀엽더라, 야."
필경 뒷부분이 명희 선배의 언니 정희씨인 듯했다. 귀엽다
는 칭찬이었어도 나는 순간적으로 머쓱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목소리는 십중팔구 혀가 꼬인, 즉 취한 목소리였다.
"어디 가는 거야?"
"남이사… 담배 피려고 그런다, 왜?"
담배? 엿듣던 나로서는 어안까지 벙벙해지고 말았다. 그렇
다면 정희씨가 담배를 피운다는 얘길까?
그러다가 갑자기 쿵, 하며 뭔가 둔탁한 소음마저 들려오는
바깥. 불상사라도 있을까 싶은 나는 허겁지겁 문가로 다가가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방문을 열어보았다.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행여 추측대로 술 취한
정희씨가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큰 일일 것 같기 때문이었다.
보나마나 그 소란이 피워지는 장소는 거실일 터였고, 훤하
게 불이 켜진 그곳은 미처 일 센티도 채 열지 않았음에도 한
눈에 내다보이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 쪽에서 내 방문은 정면이 아닌 대각선 방향이
었다. 정확히 말해 이 아파트의 구조는 거실을 기준으로 현관
에서 가장 깊숙한 곳이 안방이자 정희씨의 방, 다음으로 거실
건너 명희 선배의 방, 마지막으로 내 방의 순서였다. 그리고
명희 선배의 방과 내 방 사이에 화장실이 하나, 다른 하나의
화장실은 안방 안에 있었다.
게다가 당연히 불이 꺼진 내 방안이었으니 공교롭게도 내
편에서는 볼 수 있을지라도 그녀들에게 내가 보일 리는 없었
다. 그렇기에 그 곳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등을 돌
린 명희 선배의 뒷모습이었다.
그녀는 맞은편 소파에 앉지 않은 채 서 있었는데 - 필경
소파에 앉았다면 나와 시선이라도 마주쳤으리라 - 아까 저녁
때의 옷차림 그대로였다. 아마도 지금껏 언니의 귀가를 기다
리고 있던 모양인 듯했다.
다른 한 명의 주인공은 금세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직후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언니 정희씨, 내가 놀라는 이유란 그녀를 힐난하던 명희 선
배의 말이 즉각 상기됐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옷 좀 입으라
는 그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정희씨는 달랑 얇디얇은 슈미즈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간신히 엉덩이나 덮었을까, 그 짧디 짧은 원피스 스
타일의 속옷 차림으로 돌아온 그녀가 담뱃갑과 라이터를 들
고 거실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고 있었다. 그것도 소파 위가
아닌 맨바닥에.
이어 서슴없이 담뱃불을 척 붙였다. 기다렸다는 듯 명희 선
배의 잔소리가 다시 이어졌지만 그녀의 언니는 흥흥거리며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옷 좀 입으란 말야, 언니…! 이제 여기는 우리만 사는 게
아니라구!"
"어휴… 됐어. 그러다가 명희 네 목소리에 창희씨 잠 깨겠
다."
후, 담배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지자 정희씨는 자세를 바꿔
한쪽 무릎을 세웠다. 그러자 그 좁은 문틈으로 바깥 동정을
살피던 나는 찰라 벌어지려는 입을 황급히 손으로 막아댔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으윽… 하마터면 나도 모를 기묘
한 신음소리가 나올 뻔했으까.
한쪽 무릎만 세우고 나머지 다른 한쪽 무릎은 책상다리로
쪼그리고 앉은 정희씨. 고로 그 아찔한 길이의 슈미즈 속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건 마치 내 정면으로 가랑이 사이를 벌
려댄 포즈나 진배 없었다.
내 휘둥그래진 시선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결코 돌려질
수가 없었다. 그녀의 날씬한 다리가 예뻐서? 아니다. 하늘대
는 어깨끈 곁으로 드러난 뽀얀 속살에? 그것도 아니었다.
아까도 말했다. 간신히 엉덩이나 가릴락 말락하는 길이의
슈미즈라고. 그러니 내 아찔한 시야에 정통으로 들어온 것은
거뭇한 그 살색 그림자였다.
정희씨의 허벅지 사이 가장 깊은, 그 사타구니의 어둑어둑
한 속안이 몽땅 엿보이고 있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문을
닫고 고개를 돌려야 마땅할, 더없이 민망한 모습이었다.
내 목구멍으로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만이 숨가빴다. 만약
핑계를 댄다면 그건 잠이 덜 깬 탓이었다. 그나마 어슴프레한
거실 불빛이기에망정이지 대낮이었다면 나는 그녀의 속옷조
차 분간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도 약과임을 알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아
서였다. 그건 예의 그 명희 선배의 화난 목소리가 원인이었는
데, 머리통 속이 백짓장 모양 새하얘질 얘기가 그 순간 들려
오고 있었다.
"알았어, 그럼 팬티라도 입으란 말야…!"
팬티 - 나로서는 떡 벌어져 방바닥에 떨어진 턱을 찾아 다
녀야 판국이었다. 설마 그럼? 그 황당한 이야기의 갈피를 잡
기도 전에 아주 극을 달리는 그 두 자매의 대화였다.
"뭐 어때, 기집애야. 그래서 실내복 입었잖아…"
"그게 실내복이야? 슈미즈지!"
"참 나… 왜 그러니? 오빠 앞에서도 난 이렇게 입었는데."
"그거야 가족이니까 그렇지, 그게 말이 돼?"
"얘좀 봐. 나 원래 잠 잘 때 이렇게만 입고 자는 거 몰라?"
"그럼 앞으로는 언니 방에서나 그렇게 입어. 밖에서는 안
된단 말야…!"
맙소사. 그렇다면 내가 본 그 거뭇한 색 심연이 무엇이었을
까. 그건 단순한 단순한 살색이 아니었다는 얘기 아니냐.
당장 머리 속이 어지러워졌다. 본의 아니게 훔쳐 본 정희씨
의 가랑이 사이, 헌데 그것이 아무 것도 가려지지 않은 천연
그대로인 음부의 비경이었다니…! 말도 안 된다. 이건 꿈이라
해도 믿지 못할 현실이었다.
급박하게 울렁이는 가슴 속. 귓가에는 퉁탕대는 심장 고동
마저 들려왔다. 다시 말하지만 대낮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
다. 불과 사오 미터의 거리, 혹시라도 그랬다면 나는 이사온
첫날부터 함께 사는 집주인 여인네의 가장 보아서 안될 부분
을 속속들이 보았으리란 얘기였다.
맹세코 거기까지 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필시 그 난
처한 상황에 명희 선배도 동감하는 모양이었다.
언니 방으로 불쑥 사라지더니 몇 초 후 다시 돌아나온 그
녀. 그녀의 한 손에는 뭔가 조그만 것이 들려 있었다. 휙, 곧
이어 그것이 정희의 발치에 던져졌다.
"빨랑 그거 입어. 아니, 여기서 말고 안에 들어가서 입고 나
와. 최소한 그런 다음에 거실에서 담배 피던지 말던지 해."
"아유, 귀찮아…!"
나는 얼핏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는 기겁을 했다. 그건
까만색의 헝겊조각, 팬티였다. 별 수없이 정희씨는 마지 못해
그 삼각형의 속옷을 주워들며 몸을 일으켰다. 이내 명희 선배
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표정으로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
제37화 그녀의 언니와 화장실에서…
그 황당한 사건의 주인공들이 사라지자, 나는 떨리는 손길
로 후닥닥 방문을 닫았다.
도저히 찔리는 양심상 더 이상 훔쳐볼 수가 없었다. 행여
들킬 걱정도 걱정이었지만 계속 있다가는 내가 일부러 그녀
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엿본 것과 마찬가지라는 자격지심부터
앞서고 있었다.
재빨리 이부자리로 돌아온 나는 숨기라도 하듯 담요를 뒤
집어썼다. 눈을 질끈 감았어도 그저 쓰디쓴 입맛만이 다셔져
갔다. 구십도 각도로 벌려진 다리, 그 바람에 가려진 것 없이
드러난 살 속 - 이사온 첫날부터 나는 우연치고는 기가 막힐
꼴을 목격한 것이었다.
실로 어이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앞으로도 쭉 함께 지낼 사
이인 정회와 명희, 그녀들이 집안에서 어떻게 하고 사는지야
물론 내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방금 전
그 장면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이 세상 어딘가에는 벌거벗고 사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여자들 중에서도 남자 주당들만큼이나 주사를 부릴 사
람도 있을 터였다. 그러니 내가 본 정희씨의 술버릇 정도는
어쩌면 그녀 나름대로 이해되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렇지만 정작 내게 이색적인 것은 다름 아닌 그 외모의 차이
만큼이나 서로 다른 두 자매의 성격 문제였다.
딱 부러지는 성격에 때로는 차갑다는 인상까지 주는 명희
선배, 반면에 언니 정희씨는 얼마간 제멋대로인 게 확연히 드
러난 셈이었다. 마치 동생에게 반항이라도 하는 듯했던 그녀
였다. 뭐랄까, 차라리 헤프게까지 보인다고 해야 옳을까.
지난 저녁 친자매 사이가 맞냐고 묻던 희창이의 질문이 떠
올라졌다. 정말 자매치고는 너무나 요지경 같은 모습이었다.
어쨌든 나로서는 애써 잠을 청해야 했다. 기실 내일부터 당
장 학교 도서관을 다니려던 차였으므로 잠이 부족해서는 안
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멍하니 설쳐대다가 바깥의 그녀들에
게 내가 깨어있었다는 걸 알려서도 아니 되었다.
제길헐. 그런데 그럴수록 자꾸 더 야릇해지는 내 기분이었
다. 그 숨 넘어갈 미끈한 허벅지 사이 경치가 자꾸 눈 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의외로 조용한 바깥동정에 되려
한층 호기심이 일고 있었다.
잠시 귀를 모아보았다. 역시나 묘했다. 담배를 두어 대는
족히 피웠을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
고 있었던 것이다.
잤을거야. 다시 들어가 잤겠지. 그러나 분명 문소리 따위가
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문을 열고 몰래 훔쳐볼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혼자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순식간에 간이 콩알만해진 것은 그 때였다. 무릇 긴장하고
있는 사람이 훨씬 더 놀라는 법, 바로 내가 그런 경우였다.
그게 똑똑이었는지 쿵쿵이었는지도 분간하지 못했다. 하여
간 사위가 고요하도록 불까지 꺼진 내 방안으로 소스라칠 소
리가 우당탕 울려퍼지고 있었다.
방문 쪽이었다. 바로 그 한복판을 두들기는 소리, 이어서
마치 손톱으로 그 합판 문을 긁어대듯이 끼긱거리는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무슨 공포영화 같은 한 장면이었다. 기절하기 일보직전으로
놀랐음에도, 그 다음에 희미하게 엿들린 소리로 인해 내 몸뚱
아리는 즉각 잠자리에서 튀어나와야만 했다.
우우욱 - 적어도 그 소리만은 정확히 구분되는 까닭이었다.
반 신음에 가까운 그 소리는 내게 너무나 익숙했다. 틀림없이
막 구토를 일으키려는 소리, 그것도 여자의 토악질이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행동을 취했다. 그게 누구일지는 안
봐도 뻔할 노릇이었고 아니나 달라 퍼뜩 열려진 내 방문 앞
에서는 예상한 그대로의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방문을 열면 곧바로 마주보이는 곳이 이 아파트의 두 번째
화장실이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미처 문도 닫지 못한 채 허연
그림자가 비틀거리며 뛰어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랬다. 옥색의 짧은 슈미즈와 그 아래로 허벅지부터 몽땅
드러나 보이는 두 다리. 그 야시시한 뒷모습은 정희씨였다.
그녀가 막 변기 위로 허리를 굽히며 웩웩거리고 있었다.
그 난처한 광경에야 나는 비로소 무슨 상황인지 전부 이해
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알딸딸한 목소리더니만 급기야 속
이 부대낀 모양이었다. 해서 급한 통에 자기 방 화장실을 찾
지 못하고 가까운 곳에 뛰어든 그녀인 듯했고, 기겁을 해야
했던 내 방문의 소음은 그러느라 그녀가 비척이는 걸음걸이
로 본의 아니게 부딪쳐댄 소리인 것 같았다.
어째야 할지 모를 나는 멍청히 선 채로 우왕좌왕거렸다. 빤
히 들여다보이는 욕실 안에서는 정희씨가 거푸 토하려들고
있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 것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뿔사. 내 실수는 그것이었다. 왠지 잠깐 조용해졌다 싶던
나는 한 번 더 깜짝 놀라야만 했던 것이다.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결을 흘리는 정희씨, 그녀의 얼굴
이 돌려져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녀와 내 시
선이 정통으로 마주치고 있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토악질을 하는 여자, 그리고 활짝 열려진
화장실 문 밖에서 그걸 뻔히 보고 있던 남자. 참으로 난감한
광경이건만 천만 뜻밖에도 정희씨는 그런 나를 보며 싱긋 웃
어보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이리 와서 내 등 좀 두드려줘."
찰라 내 등줄기로는 한가닥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부탁인지 명령인지, 서슴없이 나를 불러대는 그녀의 말이었
다.
"얼른… 토하면 좀 나을 것 같아서 그래."
어째야 했을까.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나였다. 그 거역할
수 없는 청에 나도 모르는 새 나는 그 화장실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 문 좀 닫고 들어 와."
생각 만큼 많이 취한 것은 아닌지 기이하게도 그 정신 없
는 와중에 또박또박한 말씨로 지시하는 정희씨였다. 나로서야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엉거주춤 그녀의 등뒤에 가서 서자 그녀는 고갯짓으
로 자기 등을 가리켜보이고 있었다. 거길 두드려달라는 듯,
도리 없는 내가 부들대는 손길을 가져가려는데 순간 한층 더
당혹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그녀의 포즈 때문이었다. 아주 나에게 맡긴다는 투
로 좌변기를 붙들고 등을 돌린 정희씨, 고로 그 자세는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되고 있었
다.
뭐라고 해야 하나. 입위? 후배위? 거리낌없이 허리를 숙인
탓에 그녀는 뒤편의 내게 자신의 둔부를 쑥 내밀어대었던 것
이다.
하물며 그녀의 슈미즈 자락 아래로는 아까 본 그 까만색의
팬티마저 언뜻 비치고 있었다. 나는 그 아슬아슬한 정희씨의
자태에 재차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어쩌다가 이런 난감
한 상태에까지 휘말린 것인지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얼른 좀… 재촉해대느라 정희씨의 그 둔부마저 씰룩여댔다.
마침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심정이 되어버린 나는
얇은 천자락으로 가려진 그녀의 등에 마지못해 손을 올려야
했다.
팡팡, 하지만 그렇게 몇 번 두드렸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
다. 그러자 흘끗 뒤를 돌아보며 나에게 더욱 민망스런 주문을
하고 있는 정희씨였다.
"갑자기 담배를 폈더니… 후… 아무래도 안되겠어. 손 좀
줘봐."
내 손? 되물을 틈도 없었다. 등 뒤로 손을 뻗은 그녀가 갑
자기 덥석 내 손목을 쥐고 있었다. 곧이어 그녀는 상상도 못
할 곳으로 내 손을 이끌고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젖가슴 쪽이었다.
제38화 뒤에서 엉덩이를 내려다보며
대체 뭘하려는 건지, 나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너무나 얼
이 빠진 나는 정희씨의 당혹스런 행동을 그저 멍청히 지켜보
아야만 했다. 신기할 정도로 나는 그때껏 찍소리 한 번 못한
채 그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희씨가 이끄는 것은 분명 내 손이었지만 그 순간엔 그게
정말 내 것인지조차 분간이 안 갔다. 나는 급기야 두 눈을 질
끈 감아버렸다. 이윽고 그녀에게 쥐어진 팔목 아래로 어딘가
매끄럽고 푹신한 부분이 닿아왔기 때문이었다.
"뭐야, 왜 이리 손을 떨어…? 그냥 거기 좀 눌러 달란 말이
야."
미칠 노릇이었다. 부들대는 내 손길이 거꾸로 이상하다는
듯 정희씨는 핀잔까지 주고 있었다.
정녕 내가 만지고 있는 부분이 어디쯤일까. 그제야 비로소
나는 그녀의 목적지를 알아차리고서 후유, 원인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젖가슴이라 착각한 그 부드러움은 천만다행히도 그
아찔한 장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곳은 그녀의 아랫배, 정확히 말하면 명치 끝 쯤이었다.
나로서는 정색을 하고 말았다. 고로 정희씨는 지금 억지로라
도 구토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이, 이렇게요…?"
"그래. 얼른 해줘."
흔한 응급처치 방법인 줄도 모르고 그토록 바싹 긴장을 했
으니 도리어 내가 머쓱해져야 할 일이었다. 물론 얄팍한 옷
속으로 여실히 느껴지는 그녀의 맨 살인지라 여전히 후들거
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렇게 된 이상 도리없이 지시를 따라야만 했다. 두
손을 맞잡고 엉거주춤 그녀의 아랫배를 눌러대자 즉시 욱욱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참, 그게 아니잖아…!"
그런데 미처 그 동작을 제대로 취하기도 전에 정희씨는 다
시금 덥석 내 손을 붙들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니 - 허리를
일으킨 정희씨가 나를 돌아보았다. 영문을 모를 짜증이었다.
"누가 날 안아달랬어…? 이렇게 해봐, 거기 서서 그런 식으
로 세게 좀 눌러보라구."
맙소사. 내 입이 떡 벌어졌다. 자기 몸을 안았다 어쨌다 하
는 그 푸념 탓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차라리 낳았을 터, 그녀
는 내게 한층 더 야릇한 주문을 하고 있었다.
아예 등뒤로 손을 뻗어 내게 이래라 저래라 위치까지 잡아
주는 정희씨였다. 그리고 나는 그 지시에 그만 질색을 해버렸
다.
당연했다. 기실 차마 서로 몸에 닿기라도 할까봐 꾸물대던
나였으므로 응당 그녀의 아랫배를 붙든 동작에 힘이 실렸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굳이 두 손으로 앞에 선 사
람의 아랫배를 눌려주려면 어째야 하는가.
그것에는 등을 두드리는 동작과는 전혀 다른 물리적 이치
가 필요했다. 지랫대의 원리, 즉 내 편에서도 힘을 쓰기 위해
서는 어딘가에 버티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앞사람이 내 몸에
기대 단단히 자세를 취하고, 나는 그걸 이용해서…
그러니 맙소사였다. 그건 술 먹고 토하려는 이를 부축한 경
험이 있다면 누구나 알 일이었다.
다시 말해 정희씨는 나를 그런 식으로 세우고 있었다. 즉
내가 선 곳은 정통으로 그녀의 등 뒤, 그것도 아주 바짝 붙여
서였다. 심지어 그녀는 서슴없이 내게 기대기 위해 훌쩍 몸을
숙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그게 더 이상한 꼴을 불러오고 있었다. 내 눈길 아래
로 쑥 들이밀여지는 그 신체부위에 나는 당장 아연해지고 말
았다.
그건 그녀의 그득한 둔부였다. 뒤쪽으로 드러난 그곳이 하
등 거리낌 없이 내 하반신에 밀착되려 하고 있었다.
"어어, 이, 이러면…"
말투마저 더듬거려졌다. 이 황당한 포즈에 내 머리 속으로
는 당장 빨간 불이 번쩍번쩍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그녀의 그 엉덩이를 등뒤에서 안고 - 그것도 있
는 힘을 다해 꽉 껴안고 - 그녀의 허리 밑으로 손을 내려 힘
껏 들어올리듯 힘을 줘야 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참으로 기가
막히는 자세였다.
만약 그녀가 남자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옷이라도 제대로
입은 여자라면, 아마도 나는 그 일을 능숙하게 해내리라. 그
렇지만 이건 경우가 달라도 백 팔십도 달랐다.
아직 남의 집인 양 생소하기만한 이 아파트, 그나마도 단
두 사람만 있는 화장실 안. 그곳에서 반 벌거벗은 것이나 다
를 바 없는 학교 선배의 언니와 살을 비벼대야 한다니.
실로 까무러칠 만한 용기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정희씨
는 한 번 더 등뒤로 나를 끌어당기며 재촉해댔고, 그 바람에
나는 실제 까무러치기 일보직전으로 몰리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동생 명희보다 약간 더 큰 키, 그녀가 두 다
리를 벌리고 서서 허리만 가프게 숙인 탓에 그 둔부는 거의
내 하반신의 높이와 비슷했다. 헌데 그런 판국에 나를 자꾸만
자기 쪽으로 다가세웠으니 어찌 되었으랴.
내 아랫배와 그녀의 엉덩이가 찰싹 맞붙었다. 그 한복판에
실로 아득한 질량감을 느껴야 하는 나. 그건 마치 옷만 벗지
않았을 뿐 완벽한 후배위의 자세와 같았다.
비록 동생이 던져준 그 까만 색 팬티나마 입었다고는 하지
만 정희씨는 거의 맨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풍만한 엉
덩이 사이, 그 쫙 갈라진 골짜기의 굴곡까지 내 하체에 그대
로 전해지고 있었다.
"빨랑 좀…"
거푸 재촉하는 그녀, 벌벌 떠는 나. 가까스로 아래를 내려
다보았다. 잘록한 허리, 흔들리는 등, 게다가 그 두 개의 반원
을 눌러대듯 연신 문질러지는 둔부. 그랬다. 이건 실제의 행
위와 흡사했다.
이를 악 물었다. 단지 힘을 주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
아슬아슬 느껴지는 촉감에 내 몸 어느 한 구석이 반란이라도
일으킨다면 큰 일이었다.
나는 그 본의 아닌 불상사를 이겨내려 안간힘을 다했다. 그
럼에도 정희씨는 꼭 감은 내 눈가, 아니 귓가에 계속 주문을
해댔다. 점점 더 묘한 지경으로 나를 몰아세우는 목소리였다.
"아니… 좀 더 위에."
손을 옮겼다. 다시 힘을 주었다.
"조금만 더 위에 눌러봐…!"
손이 더 올라갔다.
"아아, 금방 나올 것 같아. 더 위…"
미칠 것 같았다. 뭐가 나온단 말인가. 오히려 옷 속에 감춰
진 내 몸 한 구석에서 억눌렀던 액체가 터져나오기 직전이었
다.
제39화 두 사람 화장실에서 뭐했어?
마침내 내 손 끌 언저리에 뭉클하게 흔들리는 부분마저 슬
쩍슬쩍 닿고 있는데도, 그녀의 위쪽을 눌러달라는 요청은 결
코 멈추지 않고 있었다.
힘을 줄 때마다 그곳이 손에 잡힐 듯 출렁거리며 손등을
추천78 비추천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