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애정비사 2-2,2
제45화 여전한 삼각관계
좌우간 그게 설명회의 끝이었다. 박 과장과 임 대리는 아르
바이트생들이 일어서기도 전에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 나가버
렸고, 단지 상기된 얼굴을 가린 한윤정씨만이 뒷정리를 하느
라 남아 있었다.
잠시 얼떨떨했던 나는 그 무렵에 이르러서야 뭔가 실수를
알아차리고서 후닥닥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망설이느라 다
른 사람이 사인을 해서 넘길 때까지도 멍청히 계약서를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별 생각없이 후닥닥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서 얼른 아까의
두 남녀를 쫓아 달려나갔다. 그렇지만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듯 아무도 보이지 않는 복도, 난처해진 나는 그 커다란 건물
내에서 잠깐 우왕좌왕거렸다.
어쩐담? 아니지, 안에 있던 한윤정씨리던 여직원한테 주면
되잖아? - 그런 생각에 미친 내 발걸음은 휙 돌려져 다시 회
의실로 향했다. 그 때였다.
"엄마얏…!"
기대치 않은 사고는 거기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그 외마디
비명과 함께 와르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소음이 울려퍼졌다.
"미, 미안합니다…!"
내 입에서는 즉각 사과가 튀어나와야 했다. 접촉사고였다.
그것도 회의실로 막 들어서려던 순간 반대편에서 나오던 한
윤정씨와 정면으로 충돌을 일으켰던 것이다.
와르르 소리는 그녀가 들고 있던 서류뭉치가 바닥에 쏟아
지던 소리였다. 그보다 행여 다치기라도 했을까 싶은 나는 재
빨리 그녀의 몸부터 살폈다. 다행히 비틀거리기는 했어도 넘
어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괘, 괜찮으세요…? 다친 데라도…?"
"아, 아니요. 죄송합니다. 제가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 그
만…"
잘못한 건 내 쪽인데도 거꾸로 먼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해오는 한윤정씨였다. 황급히 자리에 쪼그려 앉은 그
녀는 서류뭉치부터 챙기려 들고 있었다. 머쓱한 나 역시 당장
마주 허리를 굽히고 흩어진 종이쪽들을 챙겨 모으기 시작했
다.
"죄송해요. 제 잘못인데… 정말 다친 데 없으세요?"
미안한 내가 계속 물었지만 한윤정씨는 그저 계속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 있었다. 당황하기는 자기도 마찬가지였던 듯,
그래도 혹시나 싶어 유심히 쳐다보는데도 그녀는 수그린 고
개조차 들지 않았다.
비로소 기겁을 한 것은 그 직후였다. 이럴 수가, 차마 예상
못했던 사실을 나는 발견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당연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짝 -
찰라 나는 분명 목격할 수 있었다. 물기가 맺힌 한윤정씨의
눈가 한 켠이었다.
그 당혹스러운 모습에 순간적으로 말문을 잃는 나였다. 부
딪친 게 아파서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랬다면 아프다는
비명이나 신음소리가 한 번쯤 나왔어야 했는데도 그녀에게선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
머리 속으로 화살처럼 생각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그럼 설
마…? 보나마나 아까 박 과장이란 여자에게 면박을 당한 게
그 원인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내 짐작도 잠시였다. 한윤정씨는 한 번 더 내게 고
개를 꾸벅거리고는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재빨리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나는 결국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만 얼떨결
에 바라보아야 했다.
글쎄다. 무슨 영화에서나 나온 장면 비슷할 지경이었다. 우
연히 부딪친 두 남녀, 그리고 그 중에 여자는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니.
얼마 후 정신을 차린 나는 아직도 손에 쥐어진 계약서를
발견하고는 한 번 더 떨떠름해져버렸다. 당혹스러웠던 통에
그걸 되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숨
이 나왔다. 이렇게 된 바에는 커피숖에 내려가 예지에게 부탁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서둘러 커피숍을 찾기 위해 일 층으로 내려갔다. 그런
데 이번에는 그곳에서 또 하나의 기대하지 않은 인물 하나와
맞닥뜨리게 되었으니…
"얼레… 아, 아직 안 갔어?"
그 뜻밖의 인물은 지현이였다. 어디에 들리기라도 했던지
공교롭게도 그녀가 로비 한 쪽에서 걸어나오는 중에 나와 시
선이 딱 마주치는 중이었다.
"으응… 뭐 좀 잠깐 물어볼 게 있어서. 너는…?"
"나, 나는…"
젠장,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예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
해야 정확한 답변일 테지만 나로서는 왠지 그렇게 말하는 것
이 주저되었다.
안 그래도 여기 지현이와 소원해진 이유가 다름 아닌 그녀
였으니, 되도록이면 그런 얘기는 피해야 할 성싶은 까닭이었
다. 나는 잽싸게 머리를 굴려 화제를 딴 데로 돌렸다.
"그러니까… 아, 아니 그보다… 지현이 넌 뭐 중요한 일 물
어본 거야?"
"아니. 별 것 아니야. 학교 수업이랑 여기 사무시간이랑 겹
치는 문제 때문에…"
"그, 그래? 어떻게 하기로 했니?"
"그냥… 될 수 있는 한 야간으로 수업을 옮기구, 나도 통계
작업 파트에서 일하기로 했어. 그 쪽은 출근시간대가 다르다
니까."
우리는 그렇게 잠시 상투적이면서도 어색한 대화를 나누었
다. 하지만 금세 멎적은 질문으로 되돌아가 다시 나를 뜨끔하
게 만드는 그녀였다.
"근데… 창희 너는 왜 아직 안 가고 있어?"
"그, 그게… 나는 잠깐…"
더듬거리는 내 표정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지현이는 슬
그머니 시선을 피해버렸다. 이내 지나가는 말처럼 그녀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기다리나 보지? 예지랑 만나기로 했어?"
뭐라고 하랴.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대야만 했다.
그러자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겠다는 듯 그녀가 쓴 웃음을 지
어보이고 있었다.
"그래… 그럼 잘 만나. 나는 먼저 갈게… 안녕."
자, 잘 가. 월요일에 보자… 마침내 내 입에서는 그 말밖에
나오지 못했다. 지현이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켕기는 탓이었다.
* * *
커피숖에 앉아 있으려니 예지는 그리 오래지 않아 나타나
고 있었다. 일단 용건이 급한 나는 그녀가 자리에 앉자 계약
서부터 내밀어댔다.
"저기, 예지야. 이것 좀…"
"어머… 이거 계약서잖아? 어떻게 된 거야? 아르바이트 안
하기로 했어?"
"아, 아냐. 그런 게 아니구 아까 내다는 걸 깜박했어. 네가
대신 내줄 수 있니?"
"어유, 대신 내주긴 뭘 대신 내. 이게 내 담당인걸… 바보,
아르바이트생들 중에 예쁜 여학생이라도 있었나 보구나? 한
눈 파느라 못 낸 거지?"
악의 없는, 차라리 귀엽다고 할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어보
일 수밖에 없었다. 예쁜 아가씨라. 그러고 보니 아까 경황 없
는 와중의 사고가 떠올려졌다.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쳤던 그 때의 한윤정씨 뿐 - 그 아
가씨가 미인이던가? 그 우연했던 사고 얘기를 예지에게 들려
줄려까 하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제46화 만약 친구의 아내와 잤다면
"실은 아까… 지현이 만났어."
예지가 저녁을 사준다며 장소를 옮긴 곳은, 그녀의 회사 S
투자신탁 근처의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글쎄다. 유일하게 나와 예지의 기호에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이런 점이었다. 그냥 찌개집이나 고기집을 더 좋아하
는 나였지만 그녀는 회식 자리 때마다 지긋지긋했다며 고개
를 저었고, 그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는 나로서는 익숙치 않
은 칼질을 하며 그 민감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정말? 그럼 셋이 같이 올 걸 그랬네…?"
"으응. 그래서 얘긴데…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지현이 걔가
먼저 자리를 피하더라. 모르겠어. 아직 나랑 너를 한꺼번에
보는 게 어색한가봐."
갸웃거리는 예지의 고개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지현이와
나 두 사람 다 그녀에게는 둘도 없이 친한 친구, 하지만 그
둘 서로는 더없이 서먹한 친구… 고로 이럴 때 가운데 끼인
그녀로서도 난감할 것은 뻔했다.
"솔직히 나도… 지현이가 아직껏 그러는 게 마음에 걸려.
물론 처음엔 나랑 창희 네 사이를 오해하느라고 걔가 상처를
받았다지만… 어차피 오래 전 일이구, 그 동안 해명해줬을 때
도 나한테는 분명 이젠 너를 포기했다고 그랬거든. 그런데 아
직도 너한테 그러다니…"
모를 노릇이었다. 나 또한 고개를 갸우뚱거려야 했다.
자기가 짝사랑했던 남자였으니 내 앞에서 어려워한다는 건
그렇다 쳐도, 예지와 내가 친한 것까지 지현이에게 묘하게 생
각된다는 것은 그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예지와 나 사
이엔 하룻밤을 같이 잤다는 중요한 비밀이 있긴 하지만 - 그
건 그녀로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일일 테니 말이다.
어쨌든 예지는 한숨을 쉬며 묵묵히 나를 쳐다보았다. 하도
심각한 그 인상에 나는 얼굴에 뭐라도 묻은 걸까 의아해졌는
데, 찰라 뜻밖에도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퍽 황당한 이야기를
던지고 있었다.
"혹시 말야, 이건 정말 혹시인데… 지현이가 아직 너를 좋
아하는 것 아닐까?"
"뭐, 뭐? 나를?"
나는 앉은 자리에서 튀어오를 듯 펄쩍거렸다. 말도 안돼,
즉각 그런 대꾸가 나왔다.
"그렇지만 이런 말도 있잖아. 남자는 첫사랑을 가슴에 묻고
살지만, 여자는 단지 잊고 산다구… 그러니 혹시라도 제대한
너를 다시 보고서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 날 수도 있는 거
잖아."
"에이… 노, 농담하지 마. 지현이가 언제 예지 너에게 그런
말이라도 했어?"
"아니. 꼭 그런 건 아니래도… 여자의 직감이라는 게 있으
니깐. 창희 너도 알잖아, 옛날에 지현이가 굉장히 많이 좋아
했었다는 거."
나는 고개 외에 손까지 저어댔다. 하기야 그 신입생 시절
질투에 가까울 정도로 내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가졌었고,
때로는 그 때문에 가슴 아파했던 지현이였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들 아닌가. 그럴 리가
없었다. 아니 그래서도 안될 일이었다.
다급해진 나는 반주로 시켜놓았던 칵테일을 꿀꺼덕 한숨에
들이켰다. 예지는 손을 들어 한 잔을 더 주문해주었다. 자기
도 약간 충격적이라 생각했는지 그녀가 먼저 피식, 웃음소리
를 냈다.
"미안… 너더러 기분 나쁘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야."
"아, 알아."
그래도 왠지 생각하기 싫은 나는 차라리 화제를 돌리고 싶
었다. 다행히 그런 눈치를 채고서 예지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
다.
"희창이는… 잘 있어?"
"희창이? 그, 그야…"
그제야 기억이 난 나는 지갑에서 녀석의 이사 직함이 달린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걸 본 예지의 눈동자가
금방 동그래졌다.
"어머나, 희창이가 여기 이사야?"
"응… 그 녀석 아버님이 투자하신 회사래. 너도 아는 데
야?"
"그럼, 알구 말구. 주가(株價)는 높지 않지만 인터넷 관련
기업 중에선 제일 탄탄한 곳인걸."
전문적인 용어를 섞어가며 잠시 설명을 해주는 그녀였다.
나야 생소한 말이었지도 듣기에는 상당히 전망 좋은 평가인
것만은 분명했다.
어쨌든 그 순간 만큼은 굴지의 금융사 기획실에 추천으로
들어갈 정도라는 예지의 실력이 돋보이고 있었다. 나는 속으
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워낙 차분하고 착실한 아이였으니 회
사에서도 인정받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금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회사 일이 바빠
서 그런지 예전보다 약간 살이 빠져 보였으나 오히려 그게
더 날씬하던 종아리와 더불어 자그마한 얼굴 안의 이목구비
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이런 말이 어울릴지는 몰라도 이전의 귀여움에 섹시함까지
갖춰진 용모라고나 할까. 작은 의문 하나가 떠올라 나는 짐짓
헛기침을 해댔다.
"근데… 예지야."
"응? 왜…? 아, 맞다. 이런 얘기는 재미없지?"
"으응, 그런 건 아니구… 넌 요즘 어때? 남자친구… 아직
없어?"
너무 불쑥 들이민 질문이려나. 들여다 보자니 예지의 큰 눈
동자가 더 커다래지는 것 같았다.
"후훗, 아니. 아직은…"
말꼬리를 얼버무리는 걸로 보아 아마도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러자 나는 방금 나왔던 한 친구의 이름이 상기되었다.
희창이 녀석, 어차피 앞으로도 사업 일선에서 뛰어다닐 내
불알친구. 그 에게 여기 이 김예지처럼 착하고도 재능 있는
아가씨가 함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도 그냥 사업상 사
이가 아닌, 가령 부부 사이 같은 동반자로서.
찰떡궁합은 아니어도 참으로 어울리는 한 쌍은 되리라. 고
삐 풀린 망아지 꼴이기는 해도 화통한 남자와 차분하고도 똑
똑한 살림꾼인 여자, 그보다 나은 결합은 보나마나 찾기 힘들
지 않을까.
"아버지랑 새엄마는 나더러 벌써 선이라도 보라고들 하셔.
후훗, 우습지?"
그러나 귀엽게 미소 짓는 예지 앞에서 나는 쓴 웃음을 짓
고 말았다. 그 이상에 가까운 상상은 말 그대로 상상에 그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나로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
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원죄처럼 오래된 이야기였다. 비록 당
시에는 아무런 육체적 의미가 있지 않았다 할지라도 영원한
비밀을 함께 나눈 우리였다. 내가 그러기를 바래도 예지가 거
부할 테고, 또 예지가 원한다 해도 내가 반대해야 할지도 몰
랐다.
만약 그렇게 두 사람이 맺어지게 된다면 나는 친구의 아내
와 같이 잔 사이가 된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의 친구와 동침
한 셈이 된다.
땅을 칠 정도로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날 예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그 안타까
운 생각이 자꾸만 떠올라 우울해지고 있었다.
제47화 일요일의 유혹, 현옥이
그렇게 우울해진 기분으로, 나는 토요일을 내처 쉬고 일요
일을 맞이했다. 월요일부터 반 직장인의 신분이 되리라 생각
하니 그다지 도서관에 갈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명희 선배의 아파트에서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언
니 정희씨를 보기 어려웠다. 그날 따라 오전 중에 외출 따위
를 않는 그녀였지만 밀린 잠이라도 자는지 자기 방에서만 틀
어박혀 있는 것 같았다.
하여 나는 마찬가지로 조교 근무가 없어 한가한 신세인 명
희 선배와 그 일요일의 한낮을 어울려 보냈다. 간만에 그녀를
도와 집안 청소를 했는데, 역시 그 동안 정희씨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나중엔 둘이 힘을 합쳐 별난 먹거리를 만들어 보겠
다 설치기까지 했다. 우리가 생각해낸 것은 김치 빈대떡, 그
녀가 반죽을 떠주면 내가 후라이팬 위에서 뒤집어대는 자그
마한 소란이었다. 어쨌든 그 일은 나름대로 유쾌해서, 어느덧
그녀와 나는 낄낄거리며 서로 풀어진 웃음을 흘릴 수 있었다.
"앗 뜨거…! 창희 너 살살 뒤집으란 말야."
"죄송, 죄송… 푸하하."
"왜 웃어?"
"선배 얼굴 때문에요. 콧등에 밀가루로 팩이라도 한 것 같
아요."
"어머… 정말이야?"
어쩐지 썰렁한 냉장고를 볼 때부터 짐작이 가더라니, 평소
에는 제법 재간 있다는 명희 선배였어도 부엌 일은 영 솜씨
가 젬병이었다. 그녀가 인상을 찡그리며 우웅, 코끝을 내밀었
다.
나는 반죽 범벅이 된 그녀의 손을 대신해 살포시 그 얼굴
을 매만져주었다. 가만 보면 약간은 귀엽기마저 한 모습이었
다. 그런데 그러는 내 등 너머로 명희 선배가 문득 말을 건네
고 있었다.
"아, 언니. 김치 빈대떡하는데 같이 먹을래?"
그제야 흘끗 돌아 보니 정희씨였다. 어느새 바깥으로 나와
자기 방 방문가에 삐딱한 자세로 기대고 있던 그녀가 입꼬리
에 묘한 웃음기를 띤 채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만에 마주쳤어도 뭔가 색달랐다. 데이트라도 하러 가는
걸까. 정희씨는 깔끔히 화장까지 한 얼굴에 아래위로 야시시
한 정장을 갖춰 입은 차림새였다.
나는 저으기 눈이 동그래졌다. 데이트치고는 요란한, 아니
지나칠 정도로 노출이 심한 그녀의 옷차림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늘씬한 그녀가 입고 있는 치마는 대각선으로 길
게 잘라져 상당히 짧은 길이였다. 그리고 그나마도 옆선이 길
게 파여져 모로 서 있는 그녀의 다리는 거의 스타킹 밴드 부
분까지 언뜻 거릴 지경이었다.
"아니, 너희들이나 먹어. 나는 나가야 돼."
"그래도 맛이나 보고 가지 그래?"
거듭되는 동생의 권유에도 언니 정희씨는 무시하겠다는 듯
피식거리고 있었다. 배웅도 바라지 않겠다는 모양, 우리를 지
나쳐 현관으로 향하던 그녀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한 마디를
던졌다.
"근데… 너희 두 사람 그러고 있는 것 보니까 꼭 신혼 부부
같네? 둘이 사귀기라도 하나 보지?"
"어머, 언니…!"
기겁을 한 명희 선배가 즉각 외쳤다.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부부 사이라니 - 남이 들을까 겁나는 그 이야기에 나와 그녀
는 동시에 얼굴을 붉혀야 했다.
"웃겨. 농담인데 왜들 그래…? 진짜 그런가봐? 둘 다 얼굴
까지 빨개지게."
놀려대는 말만을 남기고 총총히 집을 나서는 정희씨였다.
결국 뒤에 남은 명희 선배와 나만 머쓱해질 일이었다. 뜨악해
진 나로서도 그 때껏 들고 있던 후라이팬을 슬그머니 내려놓
고 말았다.
"어유, 못된 기집애! 이젠 못하는 말이 없어…!"
명희 선배는 이미 언니가 사라진 현관에 대고 애꿎게 푸념
해댔다. 흥이 깨졌는지 그녀는 남은 반죽도 팽개치고서 손을
씻겠다며 화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나도 담배나 한 대 피워야겠다며 잠시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나왔을 때 싹 달라진 분위기
를 발견해야 했다.
얼레, 도리어 내가 미안해질 노릇이었다. 명희 선배는 그저
손만 씻고 온 게 아니었다. 기실 조금 전까지 짧은 반바지에
헐렁한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던 그녀는 그새 멀쑥한 청바
지와 긴 팔 남방으로 갈아입고 나타났던 것이다.
아마도 언니 덕에 자신이 너무 풀어진 게 아닌가 깨달은
듯했다. 설거지를 하는 그녀의 뒷모습에선 유달리 그릇 씻는
소리가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둘이 앉아 텔레비젼을 보며 김치 빈대떡을 먹어치울 무렵
에도 명희 선배의 입은 꼭 다물어져 있었다. 덩달아 어색해지
는 나였다. 마침내 그녀가 말문을 연 것은 그 별식(別食)도
다 비워질 무렵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떤 소리요?"
"우리 집 전화벨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창희 네 핸드폰
소리 아니니?"
나는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아니나
달라 그녀 말대로 내 방 안에서 웬 전화기 소리가 삐리릭대
고 있었다. 희창이에게 그 전화기를 선물 받고도 비로소 처음
걸려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필경 그 녀석이겠거니 생각한 나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
다. 그러나 뜻밖에도 건너편은 내가 전혀 기대하지 않은 목소
리였다.
"여보세요… 창희 오빠…?"
그것은 여자였다. 어리둥절해졌다. 이 핸드폰 번호를 아는
여자란 고작해야 선영이 누나와 명희 선배 두 사람 뿐, 헌데
미국에서야 꼭두 새벽일 테니 상대방이 선영이 누나일 리는
없었다.
"창희 오빠 핸드폰 아닌가요?"
"어… 마, 맞는데요. 제가 창희입니다만…"
"그래요? 오빠, 저예요…!"
오빠, 저에요? 이게 무슨 소리냐. 이렇게 부를 사람이 누가
있으려나, 나는 잠깐 머리를 굴리다 아연 긴장을 했다. 혹시
라도 정란이? 그렇지만 분명히 그녀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후훗, 오빠 벌써 내 목소리 까먹었구나…?"
"누, 누구신지…?"
"저에요. 현옥이요. 이현옥."
어어, 입이 떡 벌어졌다. 이현옥이라면 그 룸살롱 홍콩의
호스테스 아가씨 현옥이가 아닌가.
그녀가 이 핸드폰 번호를 어찌 알고 전화를 한 걸까. 엉겁
결에 넋을 놓았던 나는 허둥대느라고 미처 방문도 열어놓은
채 들어왔다는 걸 깨닫고 퍼뜩 목소리를 낮췄다. 행여라도 밖
에 있는 명희 선배가 들어서는 안될 전화였다.
"잘 지내세요, 오빠…?"
"어… 어, 나는… 그, 근데 어떻게 이 번호를…?"
"으응, 며칠 전에 이사님이 우리 업소에 들리셨거든요. 그
때 왜 창희 오빠랑은 안 오시냐고 했더니 이 번호를 가르쳐
주시던걸요."
어휴, 이사님이라면 종내 그 희창이 놈이 말썽이었다. 입술
을 깨물어야 하는데도 다음 순간 현옥이는 자지러질 이야기
를 하고 있었다.
"오빠, 지금 시간 있으면 나오지 않을래요? 저 오빠가 너무
너무 보고 싶어요…!"
제48화 나레이터 모델과의 소개팅
나는 아찔한 이마를 짚었다. 난데 없이 이 아가씨가 왜 나
를 보고 싶어한다는 말이냐. 희창이처럼 돈 많은 녀석도 아닌
나였으므로 놀러와서 매상 좀 올려달라는 판촉 전화 따위도
아닐 터, 그러니 더더욱 황당한 노릇이었다.
그런 내 어이 없음을 아는지 현옥이는 금세 까르르 웃음소
리를 터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 또한 황당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게 아니구요… 킥킥, 오빠 제 약속 잊어버렸구나?"
"야, 약속이라니…?"
"소개팅 말에요, 제가 해드린다던 소개팅. 창희 오빠 오늘
소개팅하지 않을래요?"
"소, 소개팅?"
"네. 전에 그랬잖아요. 쑥맥 같은 오빠니까, 제가 화끈한 친
구 하나 붙여주겠다구. 사실은 지금 오빠 소개시켜줄 그 친구
랑 같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빨랑 나오세요."
이것 참, 까맣게 잊고 있었다. 희창이의 그 오피스텔에서
바래다 달라던 때에 그녀가 해준 소개팅 약속 - 당혹스러울
따름이건만 지금 친구와 있다는 현옥의 제안은 사실인 것 같
았다. 그러자 건너편 어딘가에서 키들거리는 웃음소리가 희미
하게 마주 들려오는 까닭이었다.
"오빠 오늘 나올 수 있죠? 그쵸?"
"야… 가, 갑자기 무슨…"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대꾸를 더듬거렸다. 그렇지만
현옥이는 내가 끼어들 틈도 없이 연신 조잘대고 있었다.
"안돼요, 시간 없다는 말씀은 마세요. 왜냐면 저한테는 이렇
게 저녁에, 그것도 주말 저녁에 시간 내는 건 정말 하늘에 별
따기란 말에요. 왜 그런지 오빠도 아시잖아요…!"
물론 모를 턱은 없다. 대학생인 동시에 자칭 아르바이트생
인 그녀인지라 낮에는 학교 다니랴, 밤에는 룸살롱에 출근하
랴 바쁠 건 뻔하니까.
"하, 하지만 말도 안돼. 그래서 지금 나더러 나오라는 거
야?"
"네. 왜냐면 이 친구는 직업상 저랑 반대로 평일에 훨씬 더
바빠요. 그래서 우리 만난 것도 거의 두 달만이라구요."
안된다, 하기 싫다, 나로서는 그렇게 말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워낙 그녀들이 엄포를 놓는 통에 안 그래도 잔뜩 기
어들어간 내 목소리에서는 차마 거절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
았다.
"그, 그래도 현옥아. 하필이면 꼭… 꼭 오늘이어야 돼?"
"아유, 오늘 아니면 몇 달을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니까
요. 그러니까 꼭 나오서야 해요…! 금방 나오실 거죠? 지금
저희가 어디 있느냐면요, 강남에서…"
강남 어쩌구 저쩌구, 미칠 노릇이었다. 급기야 나는 현옥이
가 불러대는 약속 장소를 머리에 그리며 응응거리고야 말았
다. 그녀는 혹시나 약속장소라도 헷갈릴까봐 자기 핸드폰 번
호까지 불러주며 전화를 끊고 있었다.
졸지에 얼떨떨한 나였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밖으로 나
오자 이번에는 텔레비젼 화면만 들여다 보고 있던 명희 선배
가 의아한 눈초리로 물어오고 있었다.
"누구니? 현옥이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혀, 현옥이요? 아, 아니에요…! 희창이 전화에요."
나는 화들짝 거짓말을 둘러댔다. 가슴 한켠이 서늘했다. 어
느새 현옥이란 이름까지 들었을까.
그래? 어쨌든 천만다행히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한 듯 명
희 선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녀가 다시 잠자코 텔레비
젼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녀만 남겨두고 나가야 된다는
생각에 괜시리 미안한 기분인 나로서는 마치 지나가는 혼잣
말처럼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저… 서, 선배. 그 녀석이 지금 좀 나오라는데…"
자기 혼자만 남는다는 사실에 힘이 빠졌는지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덕분에 애써 시선을 피하며 나는
후다닥 자리를 물러나왔다. 행동을 서둘러야 했다. 쓸데 없이
꾸물거리다가 현옥의 독촉전화를 받는 게 된다면 더욱 곤란
해질 탓이었다.
비단 소개팅이어서 그런 것도 아니지만 일단 샤워도 해야
했고, 면도도 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현옥의 전화를 끊은 지
채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아 재빨리 아파트를 나서고 있었다.
* * *
그녀들 - 현옥이와 내가 소개 받는다는 그녀의 친구 아가
씨 - 이 있다는 곳은 강남의 한 유명한 카페 골목이었다. 뜬
금없이 팔자에도 없는 소개팅, 솔직히 말해 지하철을 갈아타
며 그곳에 가는 동안에도 나는 골치마저 지끈거릴 정도였다.
돈이야 희창이가 냈어도 호스테스와 손님으로서 만난 사이
인 현옥이와 나 아닌가. 게다가 그것도 2차로 함께 외박까지
나와서 같이 동침하며 내 발기된 물건까지 입에 물었던 그녀
인데, 그런 관계임에도 내게 자기 친구를 소개시켜준다니.
정녕 무슨 한심한 생각인지 모를 일이었다. 혼란스러움은
그녀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화려한 카페 문을 밀고 들어갈 때
까지도 여전해야 했다.
"야아, 왔다! 여기에요, 오빠…!"
두리번거리는 나를 먼저 발견해낸 것은 그녀들 쪽이었다.
어두침침한 그곳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의 소파, 그곳에 나
란히 앉은 두 아가씨가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다가가던 나는 점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래도 제법 점잖
은 모습을 기대했던 내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까닭이었다.
도대체 이런 계통 아가씨는 일할 때나 놀러 나왔을 때나
입는 옷이 다들 똑같은 걸까. 우선 현옥이는 일전과 같은 아
슬아슬한 미니스커트 정장 차림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스타
킹을 신지 않았다는 것과 옷 색깔이 좀 더 화사한 보라색이
라는 것 정도?
그런데 그나마도 약과라는 건 건너편의 아가씨를 보고서
한층 더해졌다. 아마도 그 쪽이 내게 소개시켜 준다는 친구인
모양, 심지어 그녀는 정장도 못되었던 것이다.
아래는 팬티가 차라리 낳다 싶을 꽉 끼는 청 핫팬츠, 위에
는 짤막한 흰색 탱크탑이었다. 어깨는 간신히 한 줄의 가느다
란 끈만이 버티고 있었으니 필명 정말로 노 브래지어, 거의
젖가슴의 라인 직전에야 그 옷자락이 걸려져 있었다.
속칭 배꼽티조차도 아니었다. 그를 가려줄 자켓마저 그녀는
옆에 벗어던져 놓고 있었다.
엉거주춤 그녀들의 맞은 편 소파에 엉덩이를 내려놓을 때
부터 나는 정신이 나가버렸다. 이거야 소개팅을 하러 온 것인
지 패션쇼를 보런 온 것인지 모를 판국, 하여간 그렇게 자리
를 잡자 수다스런 현옥이가 발랄하게 서로를 소개시켰다.
"인사해, 창희 오빠야. 내 말이 맞지? 잘 생겼고 몸매도 좋
다고 했잖아. 그리고… 여기는 내 친구 현선이에요, 오빠. 양
현선."
그 말이 칭찬인지 어쩐지조차 분간이 안 갔다. 멍청히 고개
를 꾸벅인 후에야 나는 현선이라는 아가씨의 용모에 제대로
살피고는 적잖이 눈이 동그래졌다.
우선 키가 상당히 큰 편, 통통하고 뽀얀 현옥과는 반대로
그녀는 꽤 가무잡잡한 살색에 호리호리한 글래머였다. 한 마
디로 말해 전형적으로 쭉쭉빵빵한 몸매의 소유자인 그녀였던
것이다.
"어때, 오빠? 현선이 몸매 끝내주지? 얘 나레이터 모델이
다…!"
나레이터 모델? 내 눈이 더 휘둥그래졌다. 그런 직업이 있
다는 건 알았어도 이렇게 코 앞에서 마주하는 것은 당연히
처음이었다.
제49화 두 여자의 벌어진 허벅지
"오빠 뭐 마실래? 우린 맥주 한 잔하고 있었는데."
그제야 웨이터가 내미는 메뉴판을 받아든 나는 그녀들이
진작부터 술을 마시고 있다는 걸 알았다. 벌써 테이블 위에는
안주와 함께 빈 병이 너댓 개나 모여 있는 중이었다.
그럼 나도 역시 맥주를 마셔야 하는 건가, 어리둥절하게 메
뉴판에서 맥주를 찾던 나는 그만 훅 숨을 들이마셨다. 그곳에
적힌 금액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었다.
눈을 씻고 찾아도 국산 맥주란 그림자도 없었고 대신 수입
상표들만이 주르륵 써 있었는데, 모두들 손에 쥘 작은 사이즈
하나에 거의 만원 돈에 가까웠다. 가뜩이나 용돈도 궁한 판에
차비를 뺀다면 지갑을 통 털어도 간신히 서너 병이나 먹을까
말까, 순간 그런 내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현옥이 피식 웃음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오빠는 술값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나랑 현선이는 오늘
간만에 스트레스 풀러 나온 거니까… 대신 빨랑 현선이 기분
좀 맞춰주세요. 얘가 요즘 기분이 별로 안 좋았대."
기분이 안 좋았다니. 영문 모를 나는 눈만 껌벅였다. 그 말
에 비로소 옆자리의 현선이란 아가씨가 처음 목소리를 들려
주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저 담배 좀 펴도 되지요?"
"어… 네. 그, 그러세요."
그녀가 꺼내드는 담배도 값 비싼 양담배였다. 이내 그녀에
게서 익숙하게 후, 하는 연기가 흩어져 나왔다. 정말 기분이
별로인가 싶건만 현옥이가 맞장구를 치며 푸념해댔다.
"어휴… 남자들은 다들 왜 그런지 몰라. 그 놈의 카메라들."
"카메라…?"
"네. 아항, 오빠는 모르겠구나… 나레이터 모델들한테는 사
진기 든 남자들이 제일 신경 쓰인대요. 현선이도 엊그제 그런
놈 하나하고 싸웠다지 뭐에요?"
사진기라. 무슨 의미인지 몰라 머리만 긁적이는데 그러자
담배를 비벼 끈 현선이가 보충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그게 뭐냐면요. 저희가 업장에 나갈 때 보면, 꼭 고객도 아
니면서 카메라만 들고 와서 설쳐대는 인간들이 있어서 그래
요."
"사진작가… 말인가요?"
"아뇨. 그럴 리가 있어요? 개나 소나 다 사진기 들고 와서
저희를 찍는다는 얘기죠. 그것도 다리나 히프, 아니면 가슴…
뭐 그런 데만 골라서 몰래 카메라처럼 찍는 남자들이 있거든
요."
얼레… 그런가. 처음 듣는 그 이야기에 나는 고개가 갸우뚱
거렸다. 인터넷을 돌아다녀 보면 업스커트(Up-Skirt) 사이트
라는 게 있더니만 지금 그녀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
었다.
"현선이 얘가 왜 싸웠냐면 말에요, 며칠 전에 얘가 맡은 부
스(booth)가 무대 위 가장자리였대요. 그러니까 높은 데에 올
라가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남자들이 전부 다 그 무대
바로 밑에 우르르 몰려와서 얘 치마 속만 계속 찍더래요."
"어휴, 현옥이 네 얘기 정도도 아니야. 아예 카메라를 거꾸
로 들고서 내 다리 사이에 집어넣더라니까… 참 나, 속옷라인
나올까봐 팬티도 안 입구 스타킹만 신었는데 아주 미치겠더
라."
띠잉, 나는 현선이라는 아가씨의 그 황당한 이야기에 머리
속으로 둔중한 충격을 받았다. 스타킹만 신고 있었다는 그 스
커트 속도 즉각 아찔하게 상상되었지만, 그보다는 그런 낯 부
끄러운 얘기를 서슴없이 처음 본 남자 앞에서 지껄인다는 게
더 당황스러운 노릇이었다.
아뿔싸. 그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나도 모르는 새 얼굴이
붉어졌다. 찰라 현옥이가 손벽을 쳐대며 깔깔거렸다.
"어머머, 창희 오빠 좀 봐. 그새 얼굴 빨개졌어…!"
실수였다. 무안해진 나는 허겁지겁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그럼에도 현옥이는 재미나 죽겠다는 양 웃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내가 뭐랬어, 현선아. 이 오빠 정말 순진하다 그랬지?"
"이, 임마. 이현옥…!"
"호호, 화내지 마요. 화내면 오빠 얼굴 더 빨개진단 말에
요…!"
환장할 기분이었다. 급해진 나는 내 몫으로 날라져 온 병맥
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바람에 호기심이 생긴 듯 현선이
가 슬쩍 내 쪽으로 허리를 굽혀왔다.
"에이… 아닐 것 같은데. 이런 오빠가 도리어 여자들한테
인기 많더라 뭐. 그렇죠, 오빠?"
거리낌 없이 오빠라 불러주는 데도 말문이 막힌 나로서는
대꾸를 못했다. 그저 가까스로 시선만 떨굴 수 있었다. 몇 달
만에 만난 현옥이, 그리고 그녀가 소개팅해준다는 이 현선이
- 졸지에 이런 자리에 끌려나와 반 망신을 당하다니, 저으기
한심한 울분만 생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렵이었다. 고개를 수그린 내 시야는 더욱 더
민망한 모습을 마주하고 말았다.
그것은 본의도, 그렇다고 실수도 아니었다. 단지 나로서는
앉아 있는 테이블이 완전한 통유리라는 사실을 깜박하고 있
었다. 45도 방향으로 숙인 내 시선, 그곳에 뭐가 보였겠는가?
두 쌍의 늘씬한 다리였다. 그 다리들은 각기 거의 맨 하체
와 다름 없는 경치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 쪽은 허벅지 중간에서도 훌쩍 위로 당겨 올라간 미니
스커트였으며, 다른 한 쪽은 그보다 더해 엉덩이께까지 끌어
올려진, 차라리 팬티와 흡사하다 싶을 핫팬츠였다. 게다가 가
뜩이나 나즈막한 소파에 파묻혀 실로 아슬아슬한 마지노선
직전까지 드러나 있는 모습이었다.
그도 모자라 그녀들은 순간적으로 꼬고 있는 다리를 동시
에 나란히 바꾸기마저 하고 있었다. 통째로 드러난 두 허벅지
와 언뜻거리는 치마 속, 과연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하는지
내 관자놀이로 힘줄조차 불거질 광경이었다.
"그러니 이 바보야… 너도 나하고 같이 우리 룸살롱에 나가
자니깐. 기왕에 보여주려면 돈 받고 2차 나가서 한 사람한테
만 보여주는 게 낫지, 뭐 하러 똑같은 돈 받고 이 남자 저 남
자한테 보여주냐?"
응당 내 아찔한 심정을 모를 그 두 아가씨들은 그 와중에
도 계속 맥주를 홀짝이며 자기들 이야기에만 열중하고 있었
다. 기가 막혔다. 친구 사이에 함께 술집에 나가며 2차나 나
가자고?
그 역시 마찬가지로 당혹스런 내용이건만 그녀들은 앞에
앉은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눈치였다. 나는 온통 어지러
워지는 머리통을 도저히 감당할 길이 없었다.
"몰라. 나도 정말 그래야 할까봐. 그렇게 있다가 근사한 데
로 시집이나 가게."
근사한 데로 시집을 간다 - 하도 답답하여 맥주만 벌컥거
렸다. 어느덧 그런 식으로 하나 둘씩 늘어나는 빈 맥주병, 좌
우간 그 대목에 이르자 문득 자기 술병을 탁 내려놓으며 이
색적인 제안을 해오는 현옥이였다.
"야, 우리 이러지 말고 양주나 마실까?"
"양주? 그럴까…?"
"그래. 양주 한 병 시키자. 맥주만 마시니까 자꾸 화장실만
가고 싶어지구, 분위기도 재미 없구… 아무래도 안되겠어."
"좋아. 그러자. 근데 그럴려면 이곳 말고 딴 데로 나가는 게
어때? 이제 여기 지겹잖아."
양주라. 나는 그 말에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허나
다음 순간 들려오는 얘기는 지금껏의 황당함 중에서도 가장
까무러칠 말이었다.
"현선아, 우리 지난 번 거기 갈래?"
"어디? 호스트 바?"
호스트 바 - 아주 쉽게 나오는 단어였다.
제50화 핫팬츠에서 삐져나온 히프
내가 제정신인지 아니면 그녀들이 제 신인지, 당장 머리 속
이 핑 돌건만 그나마 현선이가 나를 생각해주고 있었다.
"에이… 안돼, 여기 창희 오빠도 있잖아."
"왜, 오빠도 같이 가면 되지…!"
"현옥이 너 미쳤니? 나 소개팅 시켜주는 거라면서."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후후, 깜빡했네. 오빠 미안미안.
알았어, 그럼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거나 간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나였다. 소
개받은 남자 앞에서 자신들이 호스트 바에나 들락이는 아가
씨들이란 걸 밝혀놓은 주제에 엄연히 자기가 소개팅 중이라?
이게 정녕 소개팅 맞는 걸까?
아니 소개팅이고 뭐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TV뉴스 시간에
도 퇴폐니 타락이니 심심찮게 등장하는 그 호스트 바, 그런
곳을 전에 갔던 곳 운운하며 익숙하게 입에 올리는 이 아가
씨들 - 정녕 이들이 어떤 족속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오랜만에 나이트나 갈래, 현선아?"
"나이트? 그럴까…? 가본 지 꽤 됐네."
"좋아. 나가자, 창희 오빠."
어쨌든 기어이 얘기는 나이트클럽으로 낙찰을 본 모양이었
다. 내 의향은 묻지도 않은 그녀들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
다.
선뜻 이곳 맥주값 계산까지 마치는 두 사람이었다. 나로서
는 반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화를 낼 것도 아니었다. 이건 완
전 알면서도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뭐라 할 말을 잃은 나는 당혹감도 추스리지 못한 채 후닥
닥 그 뒤를 쫓아야 했다. 카페 밖에 나오자 현선이란 아가씨
가 멈춰 서며 나를 돌아봤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그녀는 뭔
가를 묻고 있었다.
"근데 오빠 차(車)는 어떤 거예요?"
"차, 차요?"
"네. 차 파킹(parking)한 데가 어디냐구요."
차라니, 내게 차가 어디 있나. 일순 난처해질 수밖에 없는
나. 그녀는 문득 미심쩍은 얼굴이 되고 있었다.
"차 없으세요?"
"저… 저는 어, 없는데요."
제길. 이렇게 대답하자니 자존심까지 상했다. 현선이는 자
가용이 없다는 내 대답에 무슨 외계인이라도 만난 듯한 표정
이기 때문이었다.
"어머… 그럼 차도 없이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어떻게 왔느냐, 당연히 지하철 타고 걸어서 왔지. 그럼에도
나는 기가 팍 죽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얼굴에는 모종
의 멸시 비슷한 게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야, 차 없으면 어때…? 어차피 술 마셨으니 운전도 못하는
데. 택시 타고 가면 되잖아."
우물쭈물하는 나를 보고서 현옥이가 대신 나서주고 있었다.
현선이는 피식거리며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이내 택시를 잡으려는지 큰길가로 향하는 두 여자였고, 왠
지 모를 창피함에 나는 쫄레쫄레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
다. 다만 그제야 찬찬히 그녀들의 전신을 관찰할 기회가 주어
지고 있었다.
이것 참… 그런데 나는 그녀들의 뒷모습에 다시금 아찔해
져 마른침을 꼴깍여야 했다. 그랬다. 아무래도 전에도 한 번
만나 익숙한 현옥이 쪽보다 자칭타칭 내 파트너라는 현선이
쪽으로 시선을 줘야 하는 나, 하지만 바로 그게 문제였다.
핫팬츠에 탱크 탑, 그리고 달랑 시스루(See-through) 같은
자켓 하나 - 그녀가 입은 그 옷들 중에서도 핫팬츠가 아주
가관이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워낙 짧기에 카페 안에 앉아
있을 때부터 엉덩이께까지 힐끔이던 그 청반바지, 제대로 보
니 그 옷은 팬티에 가까운 게 아니라 아예 팬티와 마찬가지
였다.
어느 정도인지 설명하기조차 민망했다. 아주 쉽게 말해 걸
을 때마다 흔들리는 그녀의 꽉 낀 핫팬츠는 차마 절반 가까
이도 그녀의 히프를 가려주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 여자란 신체 구조상 마땅히 남자보다 둔부 살이 많지
않은가. 따라서 아무 것도 가리지 않은 상태로 뒤나 아래쪽에
서 보게 된다면 당연히 여성의 엉덩이 아래 쪽에는 두툼하게
히프라인이 생기기 마련이다.
헌데 바로 그 히프라인이 여실히 드러날 정도로 짧은 현선
이의 반바지였다. 두 개의 굵은 살선이 그녀의 엉덩이 아래에
가로로 접혀져 씰룩이는 모습이 아래쪽으로 완전히 노출된
지경이었다.
나는 그 엄청난 광경에 허겁지겁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어휴휴, 아니나 다르랴 지나치는 사람들은 남자 뿐 아니라 여
자들까지 모두 휘둥그래진 시선으로 그녀들을 돌아보는 중이
었다.
심지어 그 곁에 가는 나마저도 야릇한 시선을 받고 있었다.
미끈한 두 아가씨, 한 쪽은 엉덩이에 간신히 걸친 미니스커
트, 다른 한 쪽은 엉덩이를 간신히 가린 핫팬츠… 그리고 그
아가씨들과 어울려가는 멀쑥한 덩치, 나 - 이건 어디 업소에
출근하는 일급(一級) 아가씨들에게 기도나 기둥서방이 하나
붙은 판국이었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해도 사람들의 시선은 뻔했다. 그들은 거
의 전부 저 자식은 어찌 저리 재수가 좋아 미인을 둘씩이나
몰고 다니는 걸까, 내게 부러워하는 눈치가 분명했다.
과분한 나는 몸둘 바를 몰라야 했다. 다행히도 그녀들이 마
침 택시를 잡고 있었다. 그것도 비싼 모범택시였다.
내가 앞에 탄다, 그런 말과 함께 폴짝 앞좌석에 오르는 현
옥이였다. 그 바람에 뒷좌석에 현선이와 나란히 앉게 된 나는
졸지에 떨떠름해졌다. 그녀는 영 투덜거리는 듯한 안색을 바
꾸지 않고 있었다. 이게 제대로 된 소개팅이 맞는지 몰라도
차가 없다는 말에 내 점수가 왕창 깎인 것 같았다.
현선이는 택시 안에서도 그 긴 다리를 쌀쌀맞게 꼬고 있었
다. 가무잡잡해도 허옇게 희번득이는 그 각선미에 나는 여전
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택시가 현옥이의 말에 따라 어디론가 방향을 틀어댔다. 행
선지는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위치해 있는 유명한
특 A급 호텔이었다.
호텔 문앞까지 다다르자 근사한 정복을 갖춰 입은 도어맨
이 달려오더니 척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그 으리으리한 호텔
로비에서부터 잔뜩 주눅이 드는 나였지만, 앞장 선 두 아가씨
는 마치 제 집인 양 스스럼이 없었다.
"오빠, 전에 여기 온 적 있어요?"
"이, 이 호텔? 아, 아니…"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현옥이가 순진하게 물어왔다. 나는
대답을 얼버무리며 현선이의 눈치를 한 번 더 살펴야 했다.
이런 곳에 들락인 적이 없다는 말조차 괜시리 스스로 못나
보이고 있었다. 그러자 현옥이는 지나가는 말투로 한 마디를
덧붙이고 있었다.
"그래요? 전 요새 손님이랑 자주 왔는데."
손님이랑 자주 왔다? 얼떨떨해진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그녀가 말하는 손님이란 누군가. 친구도 두 달만에나 만났
다니 그 때마다 이곳에 놀러왔을 리도 만무할 터, 그러니 그
녀의 이야기는 자기가 룸살롱에서 2차를 나와 이곳에 투숙했
던 경우가 많았다는 의미였다.
세상에나. 빤히 친구를 앞에 두고서도 자기가 남자와 이곳
에 같이 자러 왔다는 게 무슨 자랑거리인 듯 말하는 현옥이
- 대체 이 호스테스 아가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나였다.
제51화 두 아가씨와 살을 비벼대며
어쨌거나 우리는 최종 목적지에 닿고 있었다. 열려지는 엘
리베이터 문, 나는 당장 쏟아져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음량의
음악소리에 당장 귀가 멍멍해졌다.
바로 앞이 나이트 클럽의 입구였다. 현란한 조명이 번쩍거
리는 그곳에서 현옥이는 꾸벅 절을 해오는 웨이터와 뭐라 귀
엣말을 주고 받더니 금방 우리더러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얼레,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그 나이트 클럽 한복판을 지나
다다른 곳은 보통의 테이블이 아니었다. 룸살롱과 흡사한 복
도의 끝, 그곳의 한 룸으로 우리는 안내받았다.
별반 그런 곳과 다르지도 않은 그 안이었다. 우리가 그곳에
앉자마자 문이 닫혀졌는데 신기하게도 그 떠나갈 듯한 바깥
소음은 그러자 싹 조용해지고 있었다.
"어이구, 언니들 오셨네요.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요?"
잠시 후 웬 말쑥한 정장을 입은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글
쎄다. 희창이가 룸살롱 홍콩의 단골이라면 현옥이는 이 곳의
단골이란 걸까. 중후한 인상의 그는 서슴없이 척 자리에 앉아
그녀들에게 친숙한 티를 내고 있었다.
"자주들 오라니까. 언니들 정도면 돈 안내도 알아서 푸쉬
(push)로 모실 텐데."
푸쉬, 그 단어는 이런 나이트클럽에서 속칭 물 좋다는 소문
을 내기 위해 일부러 들여보내주는 공짜 손님을 가리키는 표
현이었다. 그 아부를 듣고 있던 현옥은 키득거리며 나를 가리
켜보이고 있었다.
"참, 인사드려요. 지배인님. 우리 가게 오시는 단골 손님인
데 오늘 제가 모시고 왔어요."
아마도 그건 그 남자에게 나를 소개시키는 것인 듯했다. 찰
라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방금 전까지 내 겉모습만 흘끗대던
그 지배인이란 사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구십 도 각도
로 허리를 굽혔던 것이다.
"그러십니까? 이거 몰라 뵈서 죄송합니다. 선생님."
선생님? 그 흔한 호칭 사장님도 아니고 선생님? 화들짝 놀
라는 나이건만 안 주머니에서 정중히 명함까지 내미는 그였
다.
"오늘 모시게 되서 영광입니다. 자주 방문해 주십시오."
조화라도 부렸는지 싹 바뀌어진 태도였다. 어쨌든 키들거리
는 현옥이는 그에게 뭐라 알아듣지
좌우간 그게 설명회의 끝이었다. 박 과장과 임 대리는 아르
바이트생들이 일어서기도 전에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 나가버
렸고, 단지 상기된 얼굴을 가린 한윤정씨만이 뒷정리를 하느
라 남아 있었다.
잠시 얼떨떨했던 나는 그 무렵에 이르러서야 뭔가 실수를
알아차리고서 후닥닥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망설이느라 다
른 사람이 사인을 해서 넘길 때까지도 멍청히 계약서를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별 생각없이 후닥닥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서 얼른 아까의
두 남녀를 쫓아 달려나갔다. 그렇지만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듯 아무도 보이지 않는 복도, 난처해진 나는 그 커다란 건물
내에서 잠깐 우왕좌왕거렸다.
어쩐담? 아니지, 안에 있던 한윤정씨리던 여직원한테 주면
되잖아? - 그런 생각에 미친 내 발걸음은 휙 돌려져 다시 회
의실로 향했다. 그 때였다.
"엄마얏…!"
기대치 않은 사고는 거기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그 외마디
비명과 함께 와르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소음이 울려퍼졌다.
"미, 미안합니다…!"
내 입에서는 즉각 사과가 튀어나와야 했다. 접촉사고였다.
그것도 회의실로 막 들어서려던 순간 반대편에서 나오던 한
윤정씨와 정면으로 충돌을 일으켰던 것이다.
와르르 소리는 그녀가 들고 있던 서류뭉치가 바닥에 쏟아
지던 소리였다. 그보다 행여 다치기라도 했을까 싶은 나는 재
빨리 그녀의 몸부터 살폈다. 다행히 비틀거리기는 했어도 넘
어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괘, 괜찮으세요…? 다친 데라도…?"
"아, 아니요. 죄송합니다. 제가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 그
만…"
잘못한 건 내 쪽인데도 거꾸로 먼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해오는 한윤정씨였다. 황급히 자리에 쪼그려 앉은 그
녀는 서류뭉치부터 챙기려 들고 있었다. 머쓱한 나 역시 당장
마주 허리를 굽히고 흩어진 종이쪽들을 챙겨 모으기 시작했
다.
"죄송해요. 제 잘못인데… 정말 다친 데 없으세요?"
미안한 내가 계속 물었지만 한윤정씨는 그저 계속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 있었다. 당황하기는 자기도 마찬가지였던 듯,
그래도 혹시나 싶어 유심히 쳐다보는데도 그녀는 수그린 고
개조차 들지 않았다.
비로소 기겁을 한 것은 그 직후였다. 이럴 수가, 차마 예상
못했던 사실을 나는 발견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당연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짝 -
찰라 나는 분명 목격할 수 있었다. 물기가 맺힌 한윤정씨의
눈가 한 켠이었다.
그 당혹스러운 모습에 순간적으로 말문을 잃는 나였다. 부
딪친 게 아파서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랬다면 아프다는
비명이나 신음소리가 한 번쯤 나왔어야 했는데도 그녀에게선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
머리 속으로 화살처럼 생각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그럼 설
마…? 보나마나 아까 박 과장이란 여자에게 면박을 당한 게
그 원인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내 짐작도 잠시였다. 한윤정씨는 한 번 더 내게 고
개를 꾸벅거리고는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재빨리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나는 결국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만 얼떨결
에 바라보아야 했다.
글쎄다. 무슨 영화에서나 나온 장면 비슷할 지경이었다. 우
연히 부딪친 두 남녀, 그리고 그 중에 여자는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니.
얼마 후 정신을 차린 나는 아직도 손에 쥐어진 계약서를
발견하고는 한 번 더 떨떠름해져버렸다. 당혹스러웠던 통에
그걸 되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숨
이 나왔다. 이렇게 된 바에는 커피숖에 내려가 예지에게 부탁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서둘러 커피숍을 찾기 위해 일 층으로 내려갔다. 그런
데 이번에는 그곳에서 또 하나의 기대하지 않은 인물 하나와
맞닥뜨리게 되었으니…
"얼레… 아, 아직 안 갔어?"
그 뜻밖의 인물은 지현이였다. 어디에 들리기라도 했던지
공교롭게도 그녀가 로비 한 쪽에서 걸어나오는 중에 나와 시
선이 딱 마주치는 중이었다.
"으응… 뭐 좀 잠깐 물어볼 게 있어서. 너는…?"
"나, 나는…"
젠장,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예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
해야 정확한 답변일 테지만 나로서는 왠지 그렇게 말하는 것
이 주저되었다.
안 그래도 여기 지현이와 소원해진 이유가 다름 아닌 그녀
였으니, 되도록이면 그런 얘기는 피해야 할 성싶은 까닭이었
다. 나는 잽싸게 머리를 굴려 화제를 딴 데로 돌렸다.
"그러니까… 아, 아니 그보다… 지현이 넌 뭐 중요한 일 물
어본 거야?"
"아니. 별 것 아니야. 학교 수업이랑 여기 사무시간이랑 겹
치는 문제 때문에…"
"그, 그래? 어떻게 하기로 했니?"
"그냥… 될 수 있는 한 야간으로 수업을 옮기구, 나도 통계
작업 파트에서 일하기로 했어. 그 쪽은 출근시간대가 다르다
니까."
우리는 그렇게 잠시 상투적이면서도 어색한 대화를 나누었
다. 하지만 금세 멎적은 질문으로 되돌아가 다시 나를 뜨끔하
게 만드는 그녀였다.
"근데… 창희 너는 왜 아직 안 가고 있어?"
"그, 그게… 나는 잠깐…"
더듬거리는 내 표정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지현이는 슬
그머니 시선을 피해버렸다. 이내 지나가는 말처럼 그녀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기다리나 보지? 예지랑 만나기로 했어?"
뭐라고 하랴.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대야만 했다.
그러자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겠다는 듯 그녀가 쓴 웃음을 지
어보이고 있었다.
"그래… 그럼 잘 만나. 나는 먼저 갈게… 안녕."
자, 잘 가. 월요일에 보자… 마침내 내 입에서는 그 말밖에
나오지 못했다. 지현이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켕기는 탓이었다.
* * *
커피숖에 앉아 있으려니 예지는 그리 오래지 않아 나타나
고 있었다. 일단 용건이 급한 나는 그녀가 자리에 앉자 계약
서부터 내밀어댔다.
"저기, 예지야. 이것 좀…"
"어머… 이거 계약서잖아? 어떻게 된 거야? 아르바이트 안
하기로 했어?"
"아, 아냐. 그런 게 아니구 아까 내다는 걸 깜박했어. 네가
대신 내줄 수 있니?"
"어유, 대신 내주긴 뭘 대신 내. 이게 내 담당인걸… 바보,
아르바이트생들 중에 예쁜 여학생이라도 있었나 보구나? 한
눈 파느라 못 낸 거지?"
악의 없는, 차라리 귀엽다고 할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어보
일 수밖에 없었다. 예쁜 아가씨라. 그러고 보니 아까 경황 없
는 와중의 사고가 떠올려졌다.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쳤던 그 때의 한윤정씨 뿐 - 그 아
가씨가 미인이던가? 그 우연했던 사고 얘기를 예지에게 들려
줄려까 하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제46화 만약 친구의 아내와 잤다면
"실은 아까… 지현이 만났어."
예지가 저녁을 사준다며 장소를 옮긴 곳은, 그녀의 회사 S
투자신탁 근처의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글쎄다. 유일하게 나와 예지의 기호에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이런 점이었다. 그냥 찌개집이나 고기집을 더 좋아하
는 나였지만 그녀는 회식 자리 때마다 지긋지긋했다며 고개
를 저었고, 그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는 나로서는 익숙치 않
은 칼질을 하며 그 민감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정말? 그럼 셋이 같이 올 걸 그랬네…?"
"으응. 그래서 얘긴데…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지현이 걔가
먼저 자리를 피하더라. 모르겠어. 아직 나랑 너를 한꺼번에
보는 게 어색한가봐."
갸웃거리는 예지의 고개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지현이와
나 두 사람 다 그녀에게는 둘도 없이 친한 친구, 하지만 그
둘 서로는 더없이 서먹한 친구… 고로 이럴 때 가운데 끼인
그녀로서도 난감할 것은 뻔했다.
"솔직히 나도… 지현이가 아직껏 그러는 게 마음에 걸려.
물론 처음엔 나랑 창희 네 사이를 오해하느라고 걔가 상처를
받았다지만… 어차피 오래 전 일이구, 그 동안 해명해줬을 때
도 나한테는 분명 이젠 너를 포기했다고 그랬거든. 그런데 아
직도 너한테 그러다니…"
모를 노릇이었다. 나 또한 고개를 갸우뚱거려야 했다.
자기가 짝사랑했던 남자였으니 내 앞에서 어려워한다는 건
그렇다 쳐도, 예지와 내가 친한 것까지 지현이에게 묘하게 생
각된다는 것은 그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예지와 나 사
이엔 하룻밤을 같이 잤다는 중요한 비밀이 있긴 하지만 - 그
건 그녀로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일일 테니 말이다.
어쨌든 예지는 한숨을 쉬며 묵묵히 나를 쳐다보았다. 하도
심각한 그 인상에 나는 얼굴에 뭐라도 묻은 걸까 의아해졌는
데, 찰라 뜻밖에도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퍽 황당한 이야기를
던지고 있었다.
"혹시 말야, 이건 정말 혹시인데… 지현이가 아직 너를 좋
아하는 것 아닐까?"
"뭐, 뭐? 나를?"
나는 앉은 자리에서 튀어오를 듯 펄쩍거렸다. 말도 안돼,
즉각 그런 대꾸가 나왔다.
"그렇지만 이런 말도 있잖아. 남자는 첫사랑을 가슴에 묻고
살지만, 여자는 단지 잊고 산다구… 그러니 혹시라도 제대한
너를 다시 보고서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 날 수도 있는 거
잖아."
"에이… 노, 농담하지 마. 지현이가 언제 예지 너에게 그런
말이라도 했어?"
"아니. 꼭 그런 건 아니래도… 여자의 직감이라는 게 있으
니깐. 창희 너도 알잖아, 옛날에 지현이가 굉장히 많이 좋아
했었다는 거."
나는 고개 외에 손까지 저어댔다. 하기야 그 신입생 시절
질투에 가까울 정도로 내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가졌었고,
때로는 그 때문에 가슴 아파했던 지현이였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들 아닌가. 그럴 리가
없었다. 아니 그래서도 안될 일이었다.
다급해진 나는 반주로 시켜놓았던 칵테일을 꿀꺼덕 한숨에
들이켰다. 예지는 손을 들어 한 잔을 더 주문해주었다. 자기
도 약간 충격적이라 생각했는지 그녀가 먼저 피식, 웃음소리
를 냈다.
"미안… 너더러 기분 나쁘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야."
"아, 알아."
그래도 왠지 생각하기 싫은 나는 차라리 화제를 돌리고 싶
었다. 다행히 그런 눈치를 채고서 예지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
다.
"희창이는… 잘 있어?"
"희창이? 그, 그야…"
그제야 기억이 난 나는 지갑에서 녀석의 이사 직함이 달린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걸 본 예지의 눈동자가
금방 동그래졌다.
"어머나, 희창이가 여기 이사야?"
"응… 그 녀석 아버님이 투자하신 회사래. 너도 아는 데
야?"
"그럼, 알구 말구. 주가(株價)는 높지 않지만 인터넷 관련
기업 중에선 제일 탄탄한 곳인걸."
전문적인 용어를 섞어가며 잠시 설명을 해주는 그녀였다.
나야 생소한 말이었지도 듣기에는 상당히 전망 좋은 평가인
것만은 분명했다.
어쨌든 그 순간 만큼은 굴지의 금융사 기획실에 추천으로
들어갈 정도라는 예지의 실력이 돋보이고 있었다. 나는 속으
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워낙 차분하고 착실한 아이였으니 회
사에서도 인정받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금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회사 일이 바빠
서 그런지 예전보다 약간 살이 빠져 보였으나 오히려 그게
더 날씬하던 종아리와 더불어 자그마한 얼굴 안의 이목구비
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이런 말이 어울릴지는 몰라도 이전의 귀여움에 섹시함까지
갖춰진 용모라고나 할까. 작은 의문 하나가 떠올라 나는 짐짓
헛기침을 해댔다.
"근데… 예지야."
"응? 왜…? 아, 맞다. 이런 얘기는 재미없지?"
"으응, 그런 건 아니구… 넌 요즘 어때? 남자친구… 아직
없어?"
너무 불쑥 들이민 질문이려나. 들여다 보자니 예지의 큰 눈
동자가 더 커다래지는 것 같았다.
"후훗, 아니. 아직은…"
말꼬리를 얼버무리는 걸로 보아 아마도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러자 나는 방금 나왔던 한 친구의 이름이 상기되었다.
희창이 녀석, 어차피 앞으로도 사업 일선에서 뛰어다닐 내
불알친구. 그 에게 여기 이 김예지처럼 착하고도 재능 있는
아가씨가 함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도 그냥 사업상 사
이가 아닌, 가령 부부 사이 같은 동반자로서.
찰떡궁합은 아니어도 참으로 어울리는 한 쌍은 되리라. 고
삐 풀린 망아지 꼴이기는 해도 화통한 남자와 차분하고도 똑
똑한 살림꾼인 여자, 그보다 나은 결합은 보나마나 찾기 힘들
지 않을까.
"아버지랑 새엄마는 나더러 벌써 선이라도 보라고들 하셔.
후훗, 우습지?"
그러나 귀엽게 미소 짓는 예지 앞에서 나는 쓴 웃음을 짓
고 말았다. 그 이상에 가까운 상상은 말 그대로 상상에 그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나로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
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원죄처럼 오래된 이야기였다. 비록 당
시에는 아무런 육체적 의미가 있지 않았다 할지라도 영원한
비밀을 함께 나눈 우리였다. 내가 그러기를 바래도 예지가 거
부할 테고, 또 예지가 원한다 해도 내가 반대해야 할지도 몰
랐다.
만약 그렇게 두 사람이 맺어지게 된다면 나는 친구의 아내
와 같이 잔 사이가 된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의 친구와 동침
한 셈이 된다.
땅을 칠 정도로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날 예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그 안타까
운 생각이 자꾸만 떠올라 우울해지고 있었다.
제47화 일요일의 유혹, 현옥이
그렇게 우울해진 기분으로, 나는 토요일을 내처 쉬고 일요
일을 맞이했다. 월요일부터 반 직장인의 신분이 되리라 생각
하니 그다지 도서관에 갈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명희 선배의 아파트에서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언
니 정희씨를 보기 어려웠다. 그날 따라 오전 중에 외출 따위
를 않는 그녀였지만 밀린 잠이라도 자는지 자기 방에서만 틀
어박혀 있는 것 같았다.
하여 나는 마찬가지로 조교 근무가 없어 한가한 신세인 명
희 선배와 그 일요일의 한낮을 어울려 보냈다. 간만에 그녀를
도와 집안 청소를 했는데, 역시 그 동안 정희씨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나중엔 둘이 힘을 합쳐 별난 먹거리를 만들어 보겠
다 설치기까지 했다. 우리가 생각해낸 것은 김치 빈대떡, 그
녀가 반죽을 떠주면 내가 후라이팬 위에서 뒤집어대는 자그
마한 소란이었다. 어쨌든 그 일은 나름대로 유쾌해서, 어느덧
그녀와 나는 낄낄거리며 서로 풀어진 웃음을 흘릴 수 있었다.
"앗 뜨거…! 창희 너 살살 뒤집으란 말야."
"죄송, 죄송… 푸하하."
"왜 웃어?"
"선배 얼굴 때문에요. 콧등에 밀가루로 팩이라도 한 것 같
아요."
"어머… 정말이야?"
어쩐지 썰렁한 냉장고를 볼 때부터 짐작이 가더라니, 평소
에는 제법 재간 있다는 명희 선배였어도 부엌 일은 영 솜씨
가 젬병이었다. 그녀가 인상을 찡그리며 우웅, 코끝을 내밀었
다.
나는 반죽 범벅이 된 그녀의 손을 대신해 살포시 그 얼굴
을 매만져주었다. 가만 보면 약간은 귀엽기마저 한 모습이었
다. 그런데 그러는 내 등 너머로 명희 선배가 문득 말을 건네
고 있었다.
"아, 언니. 김치 빈대떡하는데 같이 먹을래?"
그제야 흘끗 돌아 보니 정희씨였다. 어느새 바깥으로 나와
자기 방 방문가에 삐딱한 자세로 기대고 있던 그녀가 입꼬리
에 묘한 웃음기를 띤 채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만에 마주쳤어도 뭔가 색달랐다. 데이트라도 하러 가는
걸까. 정희씨는 깔끔히 화장까지 한 얼굴에 아래위로 야시시
한 정장을 갖춰 입은 차림새였다.
나는 저으기 눈이 동그래졌다. 데이트치고는 요란한, 아니
지나칠 정도로 노출이 심한 그녀의 옷차림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늘씬한 그녀가 입고 있는 치마는 대각선으로 길
게 잘라져 상당히 짧은 길이였다. 그리고 그나마도 옆선이 길
게 파여져 모로 서 있는 그녀의 다리는 거의 스타킹 밴드 부
분까지 언뜻 거릴 지경이었다.
"아니, 너희들이나 먹어. 나는 나가야 돼."
"그래도 맛이나 보고 가지 그래?"
거듭되는 동생의 권유에도 언니 정희씨는 무시하겠다는 듯
피식거리고 있었다. 배웅도 바라지 않겠다는 모양, 우리를 지
나쳐 현관으로 향하던 그녀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한 마디를
던졌다.
"근데… 너희 두 사람 그러고 있는 것 보니까 꼭 신혼 부부
같네? 둘이 사귀기라도 하나 보지?"
"어머, 언니…!"
기겁을 한 명희 선배가 즉각 외쳤다.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부부 사이라니 - 남이 들을까 겁나는 그 이야기에 나와 그녀
는 동시에 얼굴을 붉혀야 했다.
"웃겨. 농담인데 왜들 그래…? 진짜 그런가봐? 둘 다 얼굴
까지 빨개지게."
놀려대는 말만을 남기고 총총히 집을 나서는 정희씨였다.
결국 뒤에 남은 명희 선배와 나만 머쓱해질 일이었다. 뜨악해
진 나로서도 그 때껏 들고 있던 후라이팬을 슬그머니 내려놓
고 말았다.
"어유, 못된 기집애! 이젠 못하는 말이 없어…!"
명희 선배는 이미 언니가 사라진 현관에 대고 애꿎게 푸념
해댔다. 흥이 깨졌는지 그녀는 남은 반죽도 팽개치고서 손을
씻겠다며 화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나도 담배나 한 대 피워야겠다며 잠시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나왔을 때 싹 달라진 분위기
를 발견해야 했다.
얼레, 도리어 내가 미안해질 노릇이었다. 명희 선배는 그저
손만 씻고 온 게 아니었다. 기실 조금 전까지 짧은 반바지에
헐렁한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던 그녀는 그새 멀쑥한 청바
지와 긴 팔 남방으로 갈아입고 나타났던 것이다.
아마도 언니 덕에 자신이 너무 풀어진 게 아닌가 깨달은
듯했다. 설거지를 하는 그녀의 뒷모습에선 유달리 그릇 씻는
소리가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둘이 앉아 텔레비젼을 보며 김치 빈대떡을 먹어치울 무렵
에도 명희 선배의 입은 꼭 다물어져 있었다. 덩달아 어색해지
는 나였다. 마침내 그녀가 말문을 연 것은 그 별식(別食)도
다 비워질 무렵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떤 소리요?"
"우리 집 전화벨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창희 네 핸드폰
소리 아니니?"
나는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아니나
달라 그녀 말대로 내 방 안에서 웬 전화기 소리가 삐리릭대
고 있었다. 희창이에게 그 전화기를 선물 받고도 비로소 처음
걸려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필경 그 녀석이겠거니 생각한 나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
다. 그러나 뜻밖에도 건너편은 내가 전혀 기대하지 않은 목소
리였다.
"여보세요… 창희 오빠…?"
그것은 여자였다. 어리둥절해졌다. 이 핸드폰 번호를 아는
여자란 고작해야 선영이 누나와 명희 선배 두 사람 뿐, 헌데
미국에서야 꼭두 새벽일 테니 상대방이 선영이 누나일 리는
없었다.
"창희 오빠 핸드폰 아닌가요?"
"어… 마, 맞는데요. 제가 창희입니다만…"
"그래요? 오빠, 저예요…!"
오빠, 저에요? 이게 무슨 소리냐. 이렇게 부를 사람이 누가
있으려나, 나는 잠깐 머리를 굴리다 아연 긴장을 했다. 혹시
라도 정란이? 그렇지만 분명히 그녀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후훗, 오빠 벌써 내 목소리 까먹었구나…?"
"누, 누구신지…?"
"저에요. 현옥이요. 이현옥."
어어, 입이 떡 벌어졌다. 이현옥이라면 그 룸살롱 홍콩의
호스테스 아가씨 현옥이가 아닌가.
그녀가 이 핸드폰 번호를 어찌 알고 전화를 한 걸까. 엉겁
결에 넋을 놓았던 나는 허둥대느라고 미처 방문도 열어놓은
채 들어왔다는 걸 깨닫고 퍼뜩 목소리를 낮췄다. 행여라도 밖
에 있는 명희 선배가 들어서는 안될 전화였다.
"잘 지내세요, 오빠…?"
"어… 어, 나는… 그, 근데 어떻게 이 번호를…?"
"으응, 며칠 전에 이사님이 우리 업소에 들리셨거든요. 그
때 왜 창희 오빠랑은 안 오시냐고 했더니 이 번호를 가르쳐
주시던걸요."
어휴, 이사님이라면 종내 그 희창이 놈이 말썽이었다. 입술
을 깨물어야 하는데도 다음 순간 현옥이는 자지러질 이야기
를 하고 있었다.
"오빠, 지금 시간 있으면 나오지 않을래요? 저 오빠가 너무
너무 보고 싶어요…!"
제48화 나레이터 모델과의 소개팅
나는 아찔한 이마를 짚었다. 난데 없이 이 아가씨가 왜 나
를 보고 싶어한다는 말이냐. 희창이처럼 돈 많은 녀석도 아닌
나였으므로 놀러와서 매상 좀 올려달라는 판촉 전화 따위도
아닐 터, 그러니 더더욱 황당한 노릇이었다.
그런 내 어이 없음을 아는지 현옥이는 금세 까르르 웃음소
리를 터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 또한 황당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게 아니구요… 킥킥, 오빠 제 약속 잊어버렸구나?"
"야, 약속이라니…?"
"소개팅 말에요, 제가 해드린다던 소개팅. 창희 오빠 오늘
소개팅하지 않을래요?"
"소, 소개팅?"
"네. 전에 그랬잖아요. 쑥맥 같은 오빠니까, 제가 화끈한 친
구 하나 붙여주겠다구. 사실은 지금 오빠 소개시켜줄 그 친구
랑 같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빨랑 나오세요."
이것 참, 까맣게 잊고 있었다. 희창이의 그 오피스텔에서
바래다 달라던 때에 그녀가 해준 소개팅 약속 - 당혹스러울
따름이건만 지금 친구와 있다는 현옥의 제안은 사실인 것 같
았다. 그러자 건너편 어딘가에서 키들거리는 웃음소리가 희미
하게 마주 들려오는 까닭이었다.
"오빠 오늘 나올 수 있죠? 그쵸?"
"야… 가, 갑자기 무슨…"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대꾸를 더듬거렸다. 그렇지만
현옥이는 내가 끼어들 틈도 없이 연신 조잘대고 있었다.
"안돼요, 시간 없다는 말씀은 마세요. 왜냐면 저한테는 이렇
게 저녁에, 그것도 주말 저녁에 시간 내는 건 정말 하늘에 별
따기란 말에요. 왜 그런지 오빠도 아시잖아요…!"
물론 모를 턱은 없다. 대학생인 동시에 자칭 아르바이트생
인 그녀인지라 낮에는 학교 다니랴, 밤에는 룸살롱에 출근하
랴 바쁠 건 뻔하니까.
"하, 하지만 말도 안돼. 그래서 지금 나더러 나오라는 거
야?"
"네. 왜냐면 이 친구는 직업상 저랑 반대로 평일에 훨씬 더
바빠요. 그래서 우리 만난 것도 거의 두 달만이라구요."
안된다, 하기 싫다, 나로서는 그렇게 말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워낙 그녀들이 엄포를 놓는 통에 안 그래도 잔뜩 기
어들어간 내 목소리에서는 차마 거절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
았다.
"그, 그래도 현옥아. 하필이면 꼭… 꼭 오늘이어야 돼?"
"아유, 오늘 아니면 몇 달을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니까
요. 그러니까 꼭 나오서야 해요…! 금방 나오실 거죠? 지금
저희가 어디 있느냐면요, 강남에서…"
강남 어쩌구 저쩌구, 미칠 노릇이었다. 급기야 나는 현옥이
가 불러대는 약속 장소를 머리에 그리며 응응거리고야 말았
다. 그녀는 혹시나 약속장소라도 헷갈릴까봐 자기 핸드폰 번
호까지 불러주며 전화를 끊고 있었다.
졸지에 얼떨떨한 나였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밖으로 나
오자 이번에는 텔레비젼 화면만 들여다 보고 있던 명희 선배
가 의아한 눈초리로 물어오고 있었다.
"누구니? 현옥이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혀, 현옥이요? 아, 아니에요…! 희창이 전화에요."
나는 화들짝 거짓말을 둘러댔다. 가슴 한켠이 서늘했다. 어
느새 현옥이란 이름까지 들었을까.
그래? 어쨌든 천만다행히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한 듯 명
희 선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녀가 다시 잠자코 텔레비
젼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녀만 남겨두고 나가야 된다는
생각에 괜시리 미안한 기분인 나로서는 마치 지나가는 혼잣
말처럼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저… 서, 선배. 그 녀석이 지금 좀 나오라는데…"
자기 혼자만 남는다는 사실에 힘이 빠졌는지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덕분에 애써 시선을 피하며 나는
후다닥 자리를 물러나왔다. 행동을 서둘러야 했다. 쓸데 없이
꾸물거리다가 현옥의 독촉전화를 받는 게 된다면 더욱 곤란
해질 탓이었다.
비단 소개팅이어서 그런 것도 아니지만 일단 샤워도 해야
했고, 면도도 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현옥의 전화를 끊은 지
채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아 재빨리 아파트를 나서고 있었다.
* * *
그녀들 - 현옥이와 내가 소개 받는다는 그녀의 친구 아가
씨 - 이 있다는 곳은 강남의 한 유명한 카페 골목이었다. 뜬
금없이 팔자에도 없는 소개팅, 솔직히 말해 지하철을 갈아타
며 그곳에 가는 동안에도 나는 골치마저 지끈거릴 정도였다.
돈이야 희창이가 냈어도 호스테스와 손님으로서 만난 사이
인 현옥이와 나 아닌가. 게다가 그것도 2차로 함께 외박까지
나와서 같이 동침하며 내 발기된 물건까지 입에 물었던 그녀
인데, 그런 관계임에도 내게 자기 친구를 소개시켜준다니.
정녕 무슨 한심한 생각인지 모를 일이었다. 혼란스러움은
그녀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화려한 카페 문을 밀고 들어갈 때
까지도 여전해야 했다.
"야아, 왔다! 여기에요, 오빠…!"
두리번거리는 나를 먼저 발견해낸 것은 그녀들 쪽이었다.
어두침침한 그곳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의 소파, 그곳에 나
란히 앉은 두 아가씨가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다가가던 나는 점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래도 제법 점잖
은 모습을 기대했던 내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까닭이었다.
도대체 이런 계통 아가씨는 일할 때나 놀러 나왔을 때나
입는 옷이 다들 똑같은 걸까. 우선 현옥이는 일전과 같은 아
슬아슬한 미니스커트 정장 차림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스타
킹을 신지 않았다는 것과 옷 색깔이 좀 더 화사한 보라색이
라는 것 정도?
그런데 그나마도 약과라는 건 건너편의 아가씨를 보고서
한층 더해졌다. 아마도 그 쪽이 내게 소개시켜 준다는 친구인
모양, 심지어 그녀는 정장도 못되었던 것이다.
아래는 팬티가 차라리 낳다 싶을 꽉 끼는 청 핫팬츠, 위에
는 짤막한 흰색 탱크탑이었다. 어깨는 간신히 한 줄의 가느다
란 끈만이 버티고 있었으니 필명 정말로 노 브래지어, 거의
젖가슴의 라인 직전에야 그 옷자락이 걸려져 있었다.
속칭 배꼽티조차도 아니었다. 그를 가려줄 자켓마저 그녀는
옆에 벗어던져 놓고 있었다.
엉거주춤 그녀들의 맞은 편 소파에 엉덩이를 내려놓을 때
부터 나는 정신이 나가버렸다. 이거야 소개팅을 하러 온 것인
지 패션쇼를 보런 온 것인지 모를 판국, 하여간 그렇게 자리
를 잡자 수다스런 현옥이가 발랄하게 서로를 소개시켰다.
"인사해, 창희 오빠야. 내 말이 맞지? 잘 생겼고 몸매도 좋
다고 했잖아. 그리고… 여기는 내 친구 현선이에요, 오빠. 양
현선."
그 말이 칭찬인지 어쩐지조차 분간이 안 갔다. 멍청히 고개
를 꾸벅인 후에야 나는 현선이라는 아가씨의 용모에 제대로
살피고는 적잖이 눈이 동그래졌다.
우선 키가 상당히 큰 편, 통통하고 뽀얀 현옥과는 반대로
그녀는 꽤 가무잡잡한 살색에 호리호리한 글래머였다. 한 마
디로 말해 전형적으로 쭉쭉빵빵한 몸매의 소유자인 그녀였던
것이다.
"어때, 오빠? 현선이 몸매 끝내주지? 얘 나레이터 모델이
다…!"
나레이터 모델? 내 눈이 더 휘둥그래졌다. 그런 직업이 있
다는 건 알았어도 이렇게 코 앞에서 마주하는 것은 당연히
처음이었다.
제49화 두 여자의 벌어진 허벅지
"오빠 뭐 마실래? 우린 맥주 한 잔하고 있었는데."
그제야 웨이터가 내미는 메뉴판을 받아든 나는 그녀들이
진작부터 술을 마시고 있다는 걸 알았다. 벌써 테이블 위에는
안주와 함께 빈 병이 너댓 개나 모여 있는 중이었다.
그럼 나도 역시 맥주를 마셔야 하는 건가, 어리둥절하게 메
뉴판에서 맥주를 찾던 나는 그만 훅 숨을 들이마셨다. 그곳에
적힌 금액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었다.
눈을 씻고 찾아도 국산 맥주란 그림자도 없었고 대신 수입
상표들만이 주르륵 써 있었는데, 모두들 손에 쥘 작은 사이즈
하나에 거의 만원 돈에 가까웠다. 가뜩이나 용돈도 궁한 판에
차비를 뺀다면 지갑을 통 털어도 간신히 서너 병이나 먹을까
말까, 순간 그런 내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현옥이 피식 웃음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오빠는 술값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나랑 현선이는 오늘
간만에 스트레스 풀러 나온 거니까… 대신 빨랑 현선이 기분
좀 맞춰주세요. 얘가 요즘 기분이 별로 안 좋았대."
기분이 안 좋았다니. 영문 모를 나는 눈만 껌벅였다. 그 말
에 비로소 옆자리의 현선이란 아가씨가 처음 목소리를 들려
주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저 담배 좀 펴도 되지요?"
"어… 네. 그, 그러세요."
그녀가 꺼내드는 담배도 값 비싼 양담배였다. 이내 그녀에
게서 익숙하게 후, 하는 연기가 흩어져 나왔다. 정말 기분이
별로인가 싶건만 현옥이가 맞장구를 치며 푸념해댔다.
"어휴… 남자들은 다들 왜 그런지 몰라. 그 놈의 카메라들."
"카메라…?"
"네. 아항, 오빠는 모르겠구나… 나레이터 모델들한테는 사
진기 든 남자들이 제일 신경 쓰인대요. 현선이도 엊그제 그런
놈 하나하고 싸웠다지 뭐에요?"
사진기라. 무슨 의미인지 몰라 머리만 긁적이는데 그러자
담배를 비벼 끈 현선이가 보충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그게 뭐냐면요. 저희가 업장에 나갈 때 보면, 꼭 고객도 아
니면서 카메라만 들고 와서 설쳐대는 인간들이 있어서 그래
요."
"사진작가… 말인가요?"
"아뇨. 그럴 리가 있어요? 개나 소나 다 사진기 들고 와서
저희를 찍는다는 얘기죠. 그것도 다리나 히프, 아니면 가슴…
뭐 그런 데만 골라서 몰래 카메라처럼 찍는 남자들이 있거든
요."
얼레… 그런가. 처음 듣는 그 이야기에 나는 고개가 갸우뚱
거렸다. 인터넷을 돌아다녀 보면 업스커트(Up-Skirt) 사이트
라는 게 있더니만 지금 그녀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
었다.
"현선이 얘가 왜 싸웠냐면 말에요, 며칠 전에 얘가 맡은 부
스(booth)가 무대 위 가장자리였대요. 그러니까 높은 데에 올
라가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남자들이 전부 다 그 무대
바로 밑에 우르르 몰려와서 얘 치마 속만 계속 찍더래요."
"어휴, 현옥이 네 얘기 정도도 아니야. 아예 카메라를 거꾸
로 들고서 내 다리 사이에 집어넣더라니까… 참 나, 속옷라인
나올까봐 팬티도 안 입구 스타킹만 신었는데 아주 미치겠더
라."
띠잉, 나는 현선이라는 아가씨의 그 황당한 이야기에 머리
속으로 둔중한 충격을 받았다. 스타킹만 신고 있었다는 그 스
커트 속도 즉각 아찔하게 상상되었지만, 그보다는 그런 낯 부
끄러운 얘기를 서슴없이 처음 본 남자 앞에서 지껄인다는 게
더 당황스러운 노릇이었다.
아뿔싸. 그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나도 모르는 새 얼굴이
붉어졌다. 찰라 현옥이가 손벽을 쳐대며 깔깔거렸다.
"어머머, 창희 오빠 좀 봐. 그새 얼굴 빨개졌어…!"
실수였다. 무안해진 나는 허겁지겁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그럼에도 현옥이는 재미나 죽겠다는 양 웃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내가 뭐랬어, 현선아. 이 오빠 정말 순진하다 그랬지?"
"이, 임마. 이현옥…!"
"호호, 화내지 마요. 화내면 오빠 얼굴 더 빨개진단 말에
요…!"
환장할 기분이었다. 급해진 나는 내 몫으로 날라져 온 병맥
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바람에 호기심이 생긴 듯 현선이
가 슬쩍 내 쪽으로 허리를 굽혀왔다.
"에이… 아닐 것 같은데. 이런 오빠가 도리어 여자들한테
인기 많더라 뭐. 그렇죠, 오빠?"
거리낌 없이 오빠라 불러주는 데도 말문이 막힌 나로서는
대꾸를 못했다. 그저 가까스로 시선만 떨굴 수 있었다. 몇 달
만에 만난 현옥이, 그리고 그녀가 소개팅해준다는 이 현선이
- 졸지에 이런 자리에 끌려나와 반 망신을 당하다니, 저으기
한심한 울분만 생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렵이었다. 고개를 수그린 내 시야는 더욱 더
민망한 모습을 마주하고 말았다.
그것은 본의도, 그렇다고 실수도 아니었다. 단지 나로서는
앉아 있는 테이블이 완전한 통유리라는 사실을 깜박하고 있
었다. 45도 방향으로 숙인 내 시선, 그곳에 뭐가 보였겠는가?
두 쌍의 늘씬한 다리였다. 그 다리들은 각기 거의 맨 하체
와 다름 없는 경치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 쪽은 허벅지 중간에서도 훌쩍 위로 당겨 올라간 미니
스커트였으며, 다른 한 쪽은 그보다 더해 엉덩이께까지 끌어
올려진, 차라리 팬티와 흡사하다 싶을 핫팬츠였다. 게다가 가
뜩이나 나즈막한 소파에 파묻혀 실로 아슬아슬한 마지노선
직전까지 드러나 있는 모습이었다.
그도 모자라 그녀들은 순간적으로 꼬고 있는 다리를 동시
에 나란히 바꾸기마저 하고 있었다. 통째로 드러난 두 허벅지
와 언뜻거리는 치마 속, 과연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하는지
내 관자놀이로 힘줄조차 불거질 광경이었다.
"그러니 이 바보야… 너도 나하고 같이 우리 룸살롱에 나가
자니깐. 기왕에 보여주려면 돈 받고 2차 나가서 한 사람한테
만 보여주는 게 낫지, 뭐 하러 똑같은 돈 받고 이 남자 저 남
자한테 보여주냐?"
응당 내 아찔한 심정을 모를 그 두 아가씨들은 그 와중에
도 계속 맥주를 홀짝이며 자기들 이야기에만 열중하고 있었
다. 기가 막혔다. 친구 사이에 함께 술집에 나가며 2차나 나
가자고?
그 역시 마찬가지로 당혹스런 내용이건만 그녀들은 앞에
앉은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눈치였다. 나는 온통 어지러
워지는 머리통을 도저히 감당할 길이 없었다.
"몰라. 나도 정말 그래야 할까봐. 그렇게 있다가 근사한 데
로 시집이나 가게."
근사한 데로 시집을 간다 - 하도 답답하여 맥주만 벌컥거
렸다. 어느덧 그런 식으로 하나 둘씩 늘어나는 빈 맥주병, 좌
우간 그 대목에 이르자 문득 자기 술병을 탁 내려놓으며 이
색적인 제안을 해오는 현옥이였다.
"야, 우리 이러지 말고 양주나 마실까?"
"양주? 그럴까…?"
"그래. 양주 한 병 시키자. 맥주만 마시니까 자꾸 화장실만
가고 싶어지구, 분위기도 재미 없구… 아무래도 안되겠어."
"좋아. 그러자. 근데 그럴려면 이곳 말고 딴 데로 나가는 게
어때? 이제 여기 지겹잖아."
양주라. 나는 그 말에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허나
다음 순간 들려오는 얘기는 지금껏의 황당함 중에서도 가장
까무러칠 말이었다.
"현선아, 우리 지난 번 거기 갈래?"
"어디? 호스트 바?"
호스트 바 - 아주 쉽게 나오는 단어였다.
제50화 핫팬츠에서 삐져나온 히프
내가 제정신인지 아니면 그녀들이 제 신인지, 당장 머리 속
이 핑 돌건만 그나마 현선이가 나를 생각해주고 있었다.
"에이… 안돼, 여기 창희 오빠도 있잖아."
"왜, 오빠도 같이 가면 되지…!"
"현옥이 너 미쳤니? 나 소개팅 시켜주는 거라면서."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후후, 깜빡했네. 오빠 미안미안.
알았어, 그럼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거나 간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나였다. 소
개받은 남자 앞에서 자신들이 호스트 바에나 들락이는 아가
씨들이란 걸 밝혀놓은 주제에 엄연히 자기가 소개팅 중이라?
이게 정녕 소개팅 맞는 걸까?
아니 소개팅이고 뭐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TV뉴스 시간에
도 퇴폐니 타락이니 심심찮게 등장하는 그 호스트 바, 그런
곳을 전에 갔던 곳 운운하며 익숙하게 입에 올리는 이 아가
씨들 - 정녕 이들이 어떤 족속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오랜만에 나이트나 갈래, 현선아?"
"나이트? 그럴까…? 가본 지 꽤 됐네."
"좋아. 나가자, 창희 오빠."
어쨌든 기어이 얘기는 나이트클럽으로 낙찰을 본 모양이었
다. 내 의향은 묻지도 않은 그녀들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
다.
선뜻 이곳 맥주값 계산까지 마치는 두 사람이었다. 나로서
는 반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화를 낼 것도 아니었다. 이건 완
전 알면서도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뭐라 할 말을 잃은 나는 당혹감도 추스리지 못한 채 후닥
닥 그 뒤를 쫓아야 했다. 카페 밖에 나오자 현선이란 아가씨
가 멈춰 서며 나를 돌아봤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그녀는 뭔
가를 묻고 있었다.
"근데 오빠 차(車)는 어떤 거예요?"
"차, 차요?"
"네. 차 파킹(parking)한 데가 어디냐구요."
차라니, 내게 차가 어디 있나. 일순 난처해질 수밖에 없는
나. 그녀는 문득 미심쩍은 얼굴이 되고 있었다.
"차 없으세요?"
"저… 저는 어, 없는데요."
제길. 이렇게 대답하자니 자존심까지 상했다. 현선이는 자
가용이 없다는 내 대답에 무슨 외계인이라도 만난 듯한 표정
이기 때문이었다.
"어머… 그럼 차도 없이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어떻게 왔느냐, 당연히 지하철 타고 걸어서 왔지. 그럼에도
나는 기가 팍 죽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얼굴에는 모종
의 멸시 비슷한 게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야, 차 없으면 어때…? 어차피 술 마셨으니 운전도 못하는
데. 택시 타고 가면 되잖아."
우물쭈물하는 나를 보고서 현옥이가 대신 나서주고 있었다.
현선이는 피식거리며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이내 택시를 잡으려는지 큰길가로 향하는 두 여자였고, 왠
지 모를 창피함에 나는 쫄레쫄레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
다. 다만 그제야 찬찬히 그녀들의 전신을 관찰할 기회가 주어
지고 있었다.
이것 참… 그런데 나는 그녀들의 뒷모습에 다시금 아찔해
져 마른침을 꼴깍여야 했다. 그랬다. 아무래도 전에도 한 번
만나 익숙한 현옥이 쪽보다 자칭타칭 내 파트너라는 현선이
쪽으로 시선을 줘야 하는 나, 하지만 바로 그게 문제였다.
핫팬츠에 탱크 탑, 그리고 달랑 시스루(See-through) 같은
자켓 하나 - 그녀가 입은 그 옷들 중에서도 핫팬츠가 아주
가관이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워낙 짧기에 카페 안에 앉아
있을 때부터 엉덩이께까지 힐끔이던 그 청반바지, 제대로 보
니 그 옷은 팬티에 가까운 게 아니라 아예 팬티와 마찬가지
였다.
어느 정도인지 설명하기조차 민망했다. 아주 쉽게 말해 걸
을 때마다 흔들리는 그녀의 꽉 낀 핫팬츠는 차마 절반 가까
이도 그녀의 히프를 가려주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 여자란 신체 구조상 마땅히 남자보다 둔부 살이 많지
않은가. 따라서 아무 것도 가리지 않은 상태로 뒤나 아래쪽에
서 보게 된다면 당연히 여성의 엉덩이 아래 쪽에는 두툼하게
히프라인이 생기기 마련이다.
헌데 바로 그 히프라인이 여실히 드러날 정도로 짧은 현선
이의 반바지였다. 두 개의 굵은 살선이 그녀의 엉덩이 아래에
가로로 접혀져 씰룩이는 모습이 아래쪽으로 완전히 노출된
지경이었다.
나는 그 엄청난 광경에 허겁지겁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어휴휴, 아니나 다르랴 지나치는 사람들은 남자 뿐 아니라 여
자들까지 모두 휘둥그래진 시선으로 그녀들을 돌아보는 중이
었다.
심지어 그 곁에 가는 나마저도 야릇한 시선을 받고 있었다.
미끈한 두 아가씨, 한 쪽은 엉덩이에 간신히 걸친 미니스커
트, 다른 한 쪽은 엉덩이를 간신히 가린 핫팬츠… 그리고 그
아가씨들과 어울려가는 멀쑥한 덩치, 나 - 이건 어디 업소에
출근하는 일급(一級) 아가씨들에게 기도나 기둥서방이 하나
붙은 판국이었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해도 사람들의 시선은 뻔했다. 그들은 거
의 전부 저 자식은 어찌 저리 재수가 좋아 미인을 둘씩이나
몰고 다니는 걸까, 내게 부러워하는 눈치가 분명했다.
과분한 나는 몸둘 바를 몰라야 했다. 다행히도 그녀들이 마
침 택시를 잡고 있었다. 그것도 비싼 모범택시였다.
내가 앞에 탄다, 그런 말과 함께 폴짝 앞좌석에 오르는 현
옥이였다. 그 바람에 뒷좌석에 현선이와 나란히 앉게 된 나는
졸지에 떨떠름해졌다. 그녀는 영 투덜거리는 듯한 안색을 바
꾸지 않고 있었다. 이게 제대로 된 소개팅이 맞는지 몰라도
차가 없다는 말에 내 점수가 왕창 깎인 것 같았다.
현선이는 택시 안에서도 그 긴 다리를 쌀쌀맞게 꼬고 있었
다. 가무잡잡해도 허옇게 희번득이는 그 각선미에 나는 여전
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택시가 현옥이의 말에 따라 어디론가 방향을 틀어댔다. 행
선지는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위치해 있는 유명한
특 A급 호텔이었다.
호텔 문앞까지 다다르자 근사한 정복을 갖춰 입은 도어맨
이 달려오더니 척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그 으리으리한 호텔
로비에서부터 잔뜩 주눅이 드는 나였지만, 앞장 선 두 아가씨
는 마치 제 집인 양 스스럼이 없었다.
"오빠, 전에 여기 온 적 있어요?"
"이, 이 호텔? 아, 아니…"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현옥이가 순진하게 물어왔다. 나는
대답을 얼버무리며 현선이의 눈치를 한 번 더 살펴야 했다.
이런 곳에 들락인 적이 없다는 말조차 괜시리 스스로 못나
보이고 있었다. 그러자 현옥이는 지나가는 말투로 한 마디를
덧붙이고 있었다.
"그래요? 전 요새 손님이랑 자주 왔는데."
손님이랑 자주 왔다? 얼떨떨해진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그녀가 말하는 손님이란 누군가. 친구도 두 달만에나 만났
다니 그 때마다 이곳에 놀러왔을 리도 만무할 터, 그러니 그
녀의 이야기는 자기가 룸살롱에서 2차를 나와 이곳에 투숙했
던 경우가 많았다는 의미였다.
세상에나. 빤히 친구를 앞에 두고서도 자기가 남자와 이곳
에 같이 자러 왔다는 게 무슨 자랑거리인 듯 말하는 현옥이
- 대체 이 호스테스 아가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나였다.
제51화 두 아가씨와 살을 비벼대며
어쨌거나 우리는 최종 목적지에 닿고 있었다. 열려지는 엘
리베이터 문, 나는 당장 쏟아져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음량의
음악소리에 당장 귀가 멍멍해졌다.
바로 앞이 나이트 클럽의 입구였다. 현란한 조명이 번쩍거
리는 그곳에서 현옥이는 꾸벅 절을 해오는 웨이터와 뭐라 귀
엣말을 주고 받더니 금방 우리더러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얼레,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그 나이트 클럽 한복판을 지나
다다른 곳은 보통의 테이블이 아니었다. 룸살롱과 흡사한 복
도의 끝, 그곳의 한 룸으로 우리는 안내받았다.
별반 그런 곳과 다르지도 않은 그 안이었다. 우리가 그곳에
앉자마자 문이 닫혀졌는데 신기하게도 그 떠나갈 듯한 바깥
소음은 그러자 싹 조용해지고 있었다.
"어이구, 언니들 오셨네요.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요?"
잠시 후 웬 말쑥한 정장을 입은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글
쎄다. 희창이가 룸살롱 홍콩의 단골이라면 현옥이는 이 곳의
단골이란 걸까. 중후한 인상의 그는 서슴없이 척 자리에 앉아
그녀들에게 친숙한 티를 내고 있었다.
"자주들 오라니까. 언니들 정도면 돈 안내도 알아서 푸쉬
(push)로 모실 텐데."
푸쉬, 그 단어는 이런 나이트클럽에서 속칭 물 좋다는 소문
을 내기 위해 일부러 들여보내주는 공짜 손님을 가리키는 표
현이었다. 그 아부를 듣고 있던 현옥은 키득거리며 나를 가리
켜보이고 있었다.
"참, 인사드려요. 지배인님. 우리 가게 오시는 단골 손님인
데 오늘 제가 모시고 왔어요."
아마도 그건 그 남자에게 나를 소개시키는 것인 듯했다. 찰
라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방금 전까지 내 겉모습만 흘끗대던
그 지배인이란 사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구십 도 각도
로 허리를 굽혔던 것이다.
"그러십니까? 이거 몰라 뵈서 죄송합니다. 선생님."
선생님? 그 흔한 호칭 사장님도 아니고 선생님? 화들짝 놀
라는 나이건만 안 주머니에서 정중히 명함까지 내미는 그였
다.
"오늘 모시게 되서 영광입니다. 자주 방문해 주십시오."
조화라도 부렸는지 싹 바뀌어진 태도였다. 어쨌든 키들거리
는 현옥이는 그에게 뭐라 알아듣지
추천45 비추천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