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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어느 멋진날 22부

22부


“치사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하는 예림이의 모습에 나는 입가에 걸리려는 웃음을 겨우 참아내었다.

“뭐가? 먼저 잠들어서 깨우지 않은건데.”

“그래도 깨우지. 나 심심해서 너 계속 기다리다가 잠든건데.”

“나도 피곤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어제밤에는 예림이의 잠든 모습만 한참 바라보다가 겨우 조금 눈만 붙이고 일어났을 뿐이었다. 나를 계속 기다렸다는 마음에 측은함이 밀려왔다.

“재미있었어? 엠티?”

“별로야. 이야기 했잖아. 술만 먹고..”

“음..설마 여자후배를 풀 숲으로 끌고간건 아니지?”

“뭐야..”

그녀의 말에 재미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예림이의 장난스러운 눈빛에 내 눈을 맞출수가 없었다. 장소가 풀 숲이 아니다 뿐이지, 후배와 함께 음침한 곳에 가서 범상치 않은 행위를 한것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한별이와 비상구에서 있었던 일을 그녀가 알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예림이는 단정한 치마를 꺼내 입었다. 검정색의 보드라운 제질을 가진 치마였다. 미국에서도 저런 단정한 옷을 팔긴하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보리색의 브라우스와 어울리는 너무나 단정한 치마였다. 게다가 뒤로 살짝 묶어 늘어뜨린 머리는, 바이올린을 켜는 예림이가 아닌 오피스 걸 예림이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다.

“오늘은 어디 안나가?”

“응? 음..나갈 것 같아.”

“늦어?”

예림이의 눈이 동그랗게 변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에 가서 휴학을 해야 하는데, 그 말이 또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저었고, 예림이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입술에 반짝이는 립클로즈를 바르기 시작했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윤기나는 그 입술의 표면을, 나는 한참이나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오늘은 늦지마. 나 과외 끝나고 집에 오면 심심하단 말이야.”

“알겠어.”

엠티는 어쩔수 없는 것이었지만, 남은 시간만큼은 최대한 예림이와 있고 싶었다. 이제 내가 없는 동안 혼자가 될 거란 말을 오늘밤에는 꼭 해야겠지? 선생님의 매를 맞는것을 교무실 밖에서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누나는 언제 집에 와?”

“음..레슨 다 끝나면 한 다섯시? 여섯시 쯤 되겠다.”

“나도 그때쯤 들어올게.”

예림이는 대답대신 싱긋 웃으며 바이올린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화장을 해서 더욱 더 뽀얘진 볼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예림이는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와 섰다. 검정색 스타킹을 신은 그녀의 발이 살짝 들어 올려지며 까치발이 되는가 싶더니, 이윽고 부드러운 입술이 내 볼위로 쪽 하고 점을 찍었다.

“다녀올게.”

“응.”

바래다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계속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못할 것만 같았다. 옆에 놓인 내 운동화와 확연히 비교가 되는 작고 앙증맞은 구두 속으로 자신의 발을 집어넣은 예림이는 내게 살짝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이윽고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내 곁을 스쳐갈 적에 풍기던 샴푸냄새가 아직도 손에 잡힐 듯이 공기중에 남아있었다.

“휴우...”

인재에게 담배라도 배울걸 그랬다. 이렇게 답답하거나, 마음속이 복잡 미묘할 적에 태우면 조금 도움이 된다던데...흡연을 하지 않는 사람은 담배연기를 내뿜는 대신에 그냥 한숨을 쉬는 수밖에 없었다.

예림이가 나간 방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듯한 침대위는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샤워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욕실에서부터 바디샴푸의 향기가 방안으로 밀려드는 중이었다. 이제는 의미가 퇴색해 버린 내 자리와 침대 사이에 놓인 커튼식 칸막이도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제 곧..’

남은시간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다. 뭐 대단한 곳에 가는 것도 아니고, 죽으러 가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 혼자 남아 있을 예림이가 걸려서 너무나 괴로웠다. 내색하고 생색내는 것을 싫어하는 내가 만약 평범한 가정의 남자 아이였다면 덤덤하게 남은 시간을 즐기려 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한별이도, 숙모도, 유민이도 알고 있는데 예림이만 모른다. 차라리 그 반대되는 상황이라면 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큰 눈망울에 눈물이 고일 것을 상상하니 발목에 밧줄을 묶어 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겨우 죄책감 없이 입을 맞추고, 세상의 눈을 무시하고 사랑을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덜컥 또다른 시련이 찾아오는 것만 같았다.

‘나같은 악당도 이런 느낌을 받는구나.’

새로운 발견이었다. 마치 영화 속에서 나오는 절대 악인이 꽃이 시드는 것을 보면서 눈물을 짓는 장면이 나오는 느낌이었다. 예림이에 대한 마음을 뻔히 간직하고 있으면서 숙모와 유민이, 한별이 사이를 산책을 하듯이 노니는 내가 괴로워 하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정상이라면, 가기전에 실컷 즐기자 라는 생각만 했을 텐데.

어찌보면 삼촌보다 더한 악당은 나 김예영이었다. 지금이야 한별이에 대한 배신감으로 숙모에게 대리만족을 하고 있지만, 적어도 삼촌은 한별이에게만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나처럼 이 핑계 저 핑계, 이런 저런 합리화를 대며 주절거리진 않았다.

하지만 늘 선택이란 어려운 것이었다. 4지선다형의 답안지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가장 마음이 가는 문항이 하나 있을 뿐이지, 내 앞에 제시되어 있는 다른 세 개의 답들도 버릴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인 것들이었다. 그 답을 모두 마킹하면 답안지가 새카맣게 변하여 막막해 지겠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되돌릴 수 없었다.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담배 연기 대신 무거운 한숨만 내쉬던 나는 몸을 일으켜 자켓을 집어 들었다. 이제는 꽤 따뜻해져 버려서 필요 없을지는 모르지만 긴 겨울동안 무언가를 걸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영장을 꺼내기 위해 조그마한 장의 서랍을 열었다. 휴학에 필요한 서류들과 함께 필수적으로 챙겨가야 할 것이 입영통지서였기 때문이었다.

“어..?”

착잡했던 마음이 확 하고 달아나 버렸다. 서랍안에 넣어두었던 그것이 어디갔는지 보이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서랍에 가득 들어있는 각종 요금 청구서들을 뒤적이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 요금 청구서 사이에 끼어 있는 입영 통지서를 찾아 내었다.

‘이게 왜..’

기억을 더듬어서 엠티를 가기 전으로 되돌아 갔다. 유민이를 만나러 가기 전에 분명 서랍에 넣은 것은 맞는데, 이게 어째서 다른 우편물들과 섞여 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미 예림이가 나간지 한참 지나버린 현관쪽으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분명...그냥 서랍안에 넣어 두었었는데...”





“처리 됐어요. 다음부터는 착오 없이 날짜 확인해 주세요. 뭐 다음에 또 군휴학 할 일은 없겠지만.”

“네.”

40여분의 실랑이 끝에, 학생센타의 직원의 퉁명스러운 말을 뒤로하며 나는 휴학의 모든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평소라면 학생회관 직원의 불친절함에 한번쯤은 투덜댔을 터인데, 오늘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입영날짜를 학교와 잘 맞춰 정하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내 탓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주로 수업을 받는 사회과학대 건물을 지나, 자연대학, 인문대학의 건물들이 차례차례 스쳐 지나갔다. 평소라면 한번쯤 멈춰섰을 카페테리아도 스쳐 지나갔다. 아직 나를 만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망설이는 숙모의 앞에 덜컥 나타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내가 가는 목적지는 따로 정해져 있었다.

-도망칠 곳이 두 개가 필요하겠네요.-

엠티에서 말했던 강한별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하나는 유민이를 말하는 것이고 하나는 무엇일까? 강한별이 본인을 지칭하는 것일까? 시간이 지날 수록 오히려 더 속을 내비추지 않는 아이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과는 달리,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망칠 수가 없어서 오유민의 집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분명 내가 무관심하게 두었던 후배임에는 틀림없지만, 어느 순간 부터 그 아이는 내 안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예림이 만큼의 공간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분명 내 마음속에 유민이의 자리는 있었다.

오늘만큼은 유민이도, 나도 아닌 한별이에 의해서 약속이 잡혀졌다. 학교에 휴학을 하러 가는 그때에 유민이에게 전화가 왔었고, 그녀는 한별이가 다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는 말을 내게 전했다. 다만, 아직까지 왕게임때의 기억이 있는 모양인지 오유민은 조금 부끄러워 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것이, 아무리 술이 들어간 상태라지면 난 유민이의 팬티 안부분에 까지 손을 넣어 그곳을 더듬었고, 유민이 역시 잔뜩 단단해져 있는 내 중심부를 조금이나마 손으로 느꼈으니 민망할 수 밖에 없을 것이었다.

강한별의 심중이 궁금했다. 뜬금없이 셋이 밥을 먹자니? 그것도 평상시와는 달리 유민이까지 끌어들여 먹자고 하는 것이 이상했다. 그것도 본인의 방이 아닌 유민이의 방에서 말이다.

후문을 지나 원룸 건물 안으로 진입해서, 오유민의 방 현관 앞에 다다랐을 때에는 조금씩 망설여지고 있었다. 철문 안으로는 무언가가 지글지글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게임에서 나와 한별이가 붙박이 장에 있다가 나왔을때, 유민이의 눈가에 스쳐가던 질투의 눈빛을 떠올리며, 나는 조용히 초인종을 눌렀다.

“들어오세요!”

유민이가 아닌 한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은 잠겨져 있지 않았고,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여니 고소한 냄새가 확 하고 풍겼다.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을 한 한별이가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어서오세요.”

“유민이는?”

아무 생각없이 유민이를 물었더니, 한별이는 이윽고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는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해 보였다. 어리둥절한 내게 다가온 그녀가 조용히 내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 옷 갈아입는 중이거든요.”

“근데 왜 조용히 해야해?”

“그 편이 나을 걸요? 선배 맘에 들기 위한 최고의 복장을 제가 골라줬으니까. 조용히 있다가 감상하시는게 나을 거에요.”

“뭐?”

뜬금없는 그녀의 소리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유민이의 원룸 안에는 조그마한 상이 놓여졌고, 그 위로 몇 가지의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주방에서 강한별이 바삐 움직이는 것으로 봐서는, 대부분 그녀가 만든 음식들인 모양이었다.

“의외네.”

“뭐가요?”

“니가 음식을 할 줄 안다니.”

“흐음..어째서 그런 선입관이 있는거죠?”

“글쎄.”

말끝을 흐리며 딴 청을 피웠지만, 내 생각만큼 한별이는 약올라 하거나 하지 않았다. 이윽고 욕실문이 빼꼼히 열리며 평소와는 달라 보이는 유민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오셨어요.”

“응. 안에서 옷 갈아입었나 보네.”

“네.”

아직 부끄러워하는 기운이 좀 남아 있긴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나를 어색해 하거나 하지 않았다. 한별이가 골라줬다는 그 옷은 검정색의 원피스였고, 평소 유민이의 이미지와는 달리 기장이 조금 짧아 다리 부분을 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가슴부분이 푹 파여 있어 야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늘 단정하고 귀엽게 옷을 입던 유민이와는 사뭇 다른 이미지를 풍기는 듯했다.

“거의 다 됐어요. 저기 앉으세요.”

“대낮부터 술이야?”

“와인인데 어때요.”

상위로는 소고기를 볶은 것에서 부터, 드레싱을 곁들인 셀러드 까지 조촐하게 차려져 있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와인병을 살짝 흔들며 웃는 강한별의 모습에 못말린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휴학은 하고 오셨어요?”

“응. 지금 막 했어.”

와인이 담긴 세 개의 잔이 우리의 앞에 놓여졌다. 유민이는 원피스 자락이 신경이 쓰이는지 자꾸 치마를 무릎으로 끌어 내렸다. 인재만 없다 뿐이지, 왕게임 당시의 멤버와 큰 차이가 없는 지금의 자리에는 약간의 어색함이 자리했다. 게다가 곁눈질로 나와 유민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와인을 홀짝거리는 한별이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의미심장해 보여서 거슬렸다.

“정확히 언제쯤이세요?”

침묵속에서 음식들을 깨작거리고 있을때에 유민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잔에 있는 와인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역시 나는 고상하게 술을 먹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제..다음주네.”

“그렇군요.”

분위기가 무거워지는게 싫어서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이 아이들은 선배, 혹은 동기가 군대로 가는 것을 이제 이력이 나도록 보아올 것이지만, 지금은 내가 처음이니까 무슨말을 해줘야 할지 어색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가기전에 신나게 놀고 가셔야죠.”

내 잔에 술을 따른 강한별의 말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건배를 해주었고, 유민이의 얼굴에서도 조금씩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저 축하해 주세요.”

한별이의 말에 유민이와 내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화장기 없는 뽀얀 얼굴위로 도드라진 눈매가 나를 보며 웃음을 짓는다.

“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거든요.”

“정말? 누군데?”

유민이의 눈이 커져서 반짝 거렸다. 저게 또 무슨일을 꾸미려고 하지..하는 불안한 내 시선을 무시하고는 한별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건 비밀이지.”

“내가 아는 사람이야?”

“음..알 수도 있고..어쩌면 모를수도..”

“에이..누군데?”

한별이는 이야기 해주는 대신 빙긋 웃는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관심없는 척 했지만, 그녀가 무슨 의도로 그런말을 꺼냈는지 궁금증이 밀려왔다. 사촌 오빠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있는 건가?

남자들의 관심에도 늘 시크한 태도를 보이는 한별이가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는 말은 유민에게 너무나 알고 싶은 일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어느새 어색함을 잊고는 한별이에게 대답을 재촉하였지만, 그녀가 쉽게 이야기 해 줄리가 없었다.

“에..그럼 난 이만 일어날게.”

“뭐? 어딜가? 지금 막 먹기 시작했는데.”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키는 강한별의 모습에 유민이도 나도 황당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물론 내 시선에는 ‘수상함’이 잔뜩 내포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내 눈빛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현관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중요한 약속이 있는걸 까먹었어.”

“야..그래도..”

“예영선배가 다음주에 가니까..이번 주말에 송별회 하는거 어때? 선배 괜찮죠?”

앞에 놓인 튀김을 베어 물으며,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오유민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한별이는 현관에 놓인 구두를 신으며 말했다.

“걱정마. 인재선배는 안부를 거니까.”

“야..너..”

“유민이 너도 이번주 주말에 나오는거다? 뭐..그때 내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나올수도 있거든.”

“알았어. 들어가.”

평상시의 강한별표정이 아니었다. 갑자기 생글생글 웃는 것이 어딘가 모르게 수상했다. 하지만 이미 현관 밖으로 나가버린 아이에게 무슨 꿍꿍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민이의 치마자락이 다시한번 손으로 당겨졌다.

“쟤 오늘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와인 가져와서는 요리까지 하고..”

“뭐..늘 정체를 알 수 없는 녀석이잖아.”

우리사이에 고요함이 흘렀다. 나와 유민이가 와인을 홀짝거리는 소리만이 어색하게 방안에 울려퍼졌다. 바지 춤에서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와 폴더를 열었더니, 한별이가 보낸 메세지가 있었다.

-유민이와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이 자식.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 거지? 셋이 먹자고 하더니만 저렇게 빠른 속도로 빠져나간 의도를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내가 유민이를 덮치는 자리라도 만들어 주려는 건가? 그 순간 유민이의 휴대폰에서도 문자 메세지 수신음이 들렸고, 그 메세지를 확인한 유민이의 얼굴이 살짝 경직되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한별이의 메세지일 것이다.

“한별이 맞지?”

“선배도 왔나요?”

“너랑 즐거운 시간 보내라는군.”

내 말에 유민이는 괜히 젓가락을 들어 샐러드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넌 뭐라고 왔어?”

그녀는 내 물음에 조금 망설이더니, 내 쪽으로 액정이 향하게 하여 내밀었다. 발신자 이름이 ‘한별이’로 되어 있는 문자메세지를 읽은 내 얼굴위로 실소가 번졌다.

-단둘이 있을 기회 별로 없으니까..잘해봐.-

강한별..아마도 이 자리를 만들려고 셋이 만나자고 한 모양이었다. 유민이의 집에서 보자고 한 것도 자신이 쉽게 빠져나가기 위함이었겠지? 도무지 심중을 읽을 수 없는 한별이의 태도에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냅둬. 그녀석이 뭐라고 하든지.”

내 말에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그 큰 눈망울이 천천히 내 쪽을 향해 왔다. 예림이를 닮았다 라고 몇번이고 생각나게 만들었던 그 눈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궁금한게 있는데요.”

“응?”

“한별이랑 정말 아무사이도 아닌가요?”

“무슨 말이야?”

아차, 아무렇지 않는 뉘앙스를 풍기려 노력은 했는데 말 끝이 조금 떨리고 말았다. 유민이가 그것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지만, 뜨끔한 것은 어쩔수 없었다.

“엠티 갔을때나..아니면 평소에 둘이 대화하는 거나..그냥 선후배 사이같지가 않아서요. 사귄다는 소문이 잠깐 돌았던 적도 있었고.”

“아무 사이 아냐.”

“정말인가요?”

“어.”

단호하게 말하는 내 모습에 유민이의 표정에 조금씩 안도감이 돌기 시작했다. 물론 나와 강한별은 아무 사이가 아니다. 선배와 후배의 탈을 쓰고, 또 둘 다 잠시 미쳐있을때에 한 침대를 쓰는 것 빼고는.

“한별이는 다 아는 것 같았어요. 제가 선배 좋아하는 거..말 한적 한번도 없는데 다 알고 있는 눈빛이었거든요.”

하기사, 무서울 정도로 눈치가 빠른 아이니까 그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유민이의 말에 동조를 해주고 싶었지만 누군가에게 좋아한다 라는 말을 듣는게 익숙치 않아 쉽사리 대응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

“뭔데?”

와인도 술이다. 소주만큼은 아니지만, 조금씩 홀짝 대다 보니 유민이의 얼굴도 붉게 물든 듯한 느낌이 들어왔다.

“저...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유민이가 왜 나같은 놈을 좋아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섣불리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물론 키스를 했고, 손을 잡았으며, 미묘한 감정의 교류를 주고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입을 뗄 자신이 없다. 악당에게 남은 마지막 양심이었다.

“좋은데...지금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겠어.”

“왜요? 군대가는 거 때문에요?”

“그래. 한 두 달 가는것도 아니잖아.”

내 말에 이번엔 유민이의 말문이 막혔다. 예림이와 닮았다는 생각만 들었던 유민이가 다르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지금 보니, 분명 둘은 미묘하게 달랐다.

불현듯 그때 키스를 했던 그 장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말이 없어지면 없어 질수록 그 기억은 더욱더 형상화 되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유민이도 그것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가쁘게 숨만 내쉴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저는 정말 상관없어요. 2년후에 라도...”

두번째로 이어진 유민이의 고백이었다. 고등학교 후배, 대학교 후배에서 그 이상의 사이가 되는 것은 너무나 쉬워 보였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그 이상의 사이라 할 수 있을 것이지만, 무언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지금의 짜릿한 긴장감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아마도, 예림이가 없었더라면 나는 진작에 유민이와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우웅..

또 한별이인가? 하는 생각에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무거웠던 분위기가 일순간 풀어지는 느낌이 들어왔다. 유민이는 그 틈을 타 앞에 있는 와인으로 자신의 목을 축였다. 액정을 확인하니 익숙한 번호가 찍혀져 있었다. 선뜻 받기도, 그렇다고 무시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유민이의 눈동자가 의아함을 담아 나와 전화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미안. 한별이 말대로 이번주 주말에 보자.”





기회비용.

두가지 이상의 선택안이 존재할 경우, 하나를 선택함으로서 잃게되는 다른 선택안의 가치를 의미한다. 사람에게 쓰기엔 애매모호한 표현일지 모르나, 지금은 숙모 쪽을 택하는 편이 옳아 보였다.

분명, 유민이와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아까와 같은 일촉즉발의 두근거리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을수도 있지만, 유민이는 그나마 마음먹을때 볼 수라도 있었다. 언제나 수동적으로 연락을 기다려야 하는 숙모의 전화가 유민이의 방에서 울렸을때, 나는 조금의 망설임 끝에 그녀를 보러 달려나가야만 했다.

나는 악당답게, 착한 유민이의 성격을 이용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날 좋아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엄청난 메리트인 것 처럼, 그녀의 성격을 이용해서 숙모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서운한 표정이긴 했지만, 가족과 관련된 일이라고 하자 유민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강한별이 신경써준 유민이의 코디와, 적절할 때에 너무나 수상스럽게 자리를 피해준 그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어?”

“어서타요.”

약속장소로 나갔을 때에, 조그마한 소형차가 와서 내 앞에 섰다. 빼꼼히 창문이 열리고 숙모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놀라고 있을때 그녀가 조용히 손짓했다.

“왠 차에요?”

빨간색의 귀여운 소형차였다. 자동차의 컨셉과 맞춘 것인지 화사한 봄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더 젊어보였다. 예림이와 다녀도 자매라고 불릴 지경이었다.

“운전이 서툴러서 잘 안끌고 다니지만..이거 내 차에요.”

“와..몰랐네요. 어디 가려구요?”

“예영이가 곧 군대가는데 맨날 오는 이런데서 있는 거보다...교외로 나가는게 좋을 것 같아서요.”

정말 초보운전이 맞는지, 내 쪽은 바라볼 엄두도 못내고 띄엄띄엄 말하는 숙모의 모습이 귀여웠다. 핸들 밑으로 보이는 하얀 다리를 바라보아도, 그녀는 아마 내 시선의 위치조차 모를 테지.

“갑자기 전화해서 놀랐어요.”

“왜요? 또 또래 여학생 꼬시고 있었군요?”

“...그게 뭐에요.”

귀엽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 원망섞인 시선을 던질수가 없었다. 내 주변사람들이 단체로 강한별을 닮아가나? 왠지 모르게 그냥 농담으로 던지는 말들이 하나같이 내 실제 상황과 같아서 뜨끔했다.

“삼촌 오늘 가게에 나갔어요. 오늘은 직원들하고 일 끝나고 가게에서 포커도 치고 술도 한잔 마시고 온다고 해서 빠져나왔죠.”

“와..소심쟁이 숙모 맞아요? 그렇게 간 큰 행동을..”

“괜찮아요. 친구만나러 갈 지도 모른다고 운을 띄워 놨어요.”

왠지 모르게 신나 보이는 숙모의 표정에 웃음이 나왔다. 학교 식당에서 처음 봤을때는 어둡기만 하던 그녀가, 이제는 너무나 귀엽고 밝아진 느낌이었다. 뿐만 아니라 원래 아름다웠던 얼굴에 시름이 사라지니 더욱더 앳되고 예쁜 얼굴로 바뀌어가는 듯했다. 그리고 그 변화들은, 나와 숙모의 관계가 짙어지면서 부터 생겨난 변화들이었다.

내 상념속에서 우리가 탄 자동차가 조금은 어설프게, 교외로 향하는 국도위를 미끌어져 가고 있었고, 나는 어색함을 깨기 위해 입을 열었다.

“삼촌은 요새 어때요?”

“그냥...적응 안되요.”

“적응 안된다니요?”

“이런것도 예영이에게 말해도 될까요?”

“뭔데요. 궁금하게 해놓고 말 안하는 건 나쁜건데.”

장난섞인 내 말에도 숙모는 웃지 않았다. 여전히 고운 손으로 핸들을 꼭 움켜쥔 채, 그녀는 사이드 미러를 한번 응시하고는 말을 이었다.

“삼촌이 술먹고 내게 그런말을 했어요. 울면서...사실 자기는 거의 딸 뻘 여자애랑 바람 피웠다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숙모에게 내 이야기를 한걸까? 머리에 있는 땀구멍에서 무언가가 솟아 내려온다.

“그..래서요?”

“예상한 일이라 오히려 덤덤했어요. 용돈을 주면서 만났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어느날 그 여자애가 또래의 남자애와 같이 다정하게 걷는 걸 봤데요.”

심장의 박동이 벨트마저 떨리게 하는 듯했다. 그 또래의 남자애가 나라는 것을 숙모가 알면 어찌 되는거지? 숙모가 받은 상처에 대한 복수의 의미로 한 짓이,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주는 계기가 될 지 모른다.

“그때 느꼈데요. 자기는 이미 늙은 아저씨고, 그동안 어울리지 않은 위치에서 헛짓거리를 한것 같았데요. 솔직히 화가 나더라구요. 그걸 보고나서야 와이프의 소중함을 알았다는게 말이에요.”

“다른..말은 없었나요?”

“다른 무슨 말요?”

강한별을 상대하다 보니 내 의심병은 더 심해진 모양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삼촌처럼 자존심 강한 사람이 조카에게 받은 패배감을 와이프에게 말할리 없었다. 숙모가 만약 조금이라도 운전에 능숙해서 내 식은땀 가득한 얼굴을 본다면, 모든 진상을 알아차릴 것만 같았다.

“아니 그냥 뭐..그게 다래요? 갑작스런 이상반응을 보인 이유가?”

“네. 그때부터 조금씩 달라지더라구요. 난 정이 떨어졌는데..이제는 반대의 상황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연애 할때 처럼 나한테 벌벌 떠는 그런 느낌...한때는 그리웠는데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는 달갑지 않네요.”

“잊어버려요 숙모.”

“그럴거에요. 난 삼촌에게 정이 떠났지만 가정을 파괴하기 싫을 뿐인 거고..또..”

그녀의 말끝이 흐려질 때쯤, 신호에 걸린 우리차가 천천히 정지선에 멈춰섰다. 그제서야 날 바라볼 여유가 생긴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서서히 말라 가는 식은땀을 닦으며 나도 어색하게 웃을 그때에, 여신과도 같은 달콤한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지금은...나한테 우리 소중한 조카님이 있잖아요.”





예림이와 약속했던 시간이 가까워져 왔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교외의 탁트인 야외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간만에 바람을 쐰 숙모와 내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었다.

“읍..음..쫍..”

처음에 부끄러워하던 숙모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씻고 나오자 마자 침대에서 엉겨붙은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몸을 구석구석 탐하기 시작했다. 처음와서 불켜는 법조차 몰랐던 그때와는 다른, 너무나 익숙한 움직임 들이었다.

내가 그녀의 입술 쪽에 하반신을 들이대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입술 가득히 내 것을 물고 빨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리면 몰릴수록 더욱더 비열한 짓을 서슴치 않는 악당처럼, 나는 입대가 가까워져 올수록 양심이나 혹은 개념 등등의 바람직한 단어들을 부담없이 벗어 던지고 있었다. 조금은 어설프지만 열정이 담긴 그녀의 애무에 자연스레 내 손이 하얀 허벅지 사이에 감춰진 꽃잎위로 향했다. 벌써부터 촉촉한 것이,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넣어줘요..빨리..”

타액에 젖어 거대하게 솟아오른 내 자지를 손으로 주무르며 그녀가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녀도 나도, 오늘이 입대전 마지막 일탈이며 유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내게 남아 있는 시간안에 또 한번 삼촌의 눈을 피해 나오는 것은 아마도 힘들 것이다. 유민이라는 기회비용은 크지만, 나는 나름대로의 합리적 선택을 한 것이었다.

“아흑! 좋아..좋아..!”

숙모의 손이 내 등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평소보다 애액이 많은 그녀의 보지는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조이고 물고를 반복했다. 나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평균적으로 여자나이 30대는 어린 편이었다. 아이를 한번도 가져 본적 없는 몸이라서 그 탄력 역시 20대 못지 않았다.

“흑..좋아..”

“그렇게 좋아요? 헉..”

“응..아흑! 너무..흑..흐응!”

“삼촌 보다 더?”

내가 이렇게 유치했던가? 이딴 것을 묻고 있는 것이 쪽팔렸지만 꼭 듣고 싶은 대답이었다. 그녀의 탄력있는 가슴이 내 몸이 움직이는 것과 맞물려 위아래로 흔들렸다.

“흐응! 아아앙..훨씬 좋아..흑! 하응..”

고등학교 다닐때는 자위환상에서나 겨우 만질수 있는 그녀의 몸이 내 앞에서 활짝 열려 있는 것은 너무나 큰 자극이었다. 비록 그때보다 몇년이나 흘렀지만, 그녀는 그때의 아름다움과 비교해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적당히 필요한 부분에 살이 올라 탄력있는 허벅지와 내 배 부분이 부딪혀 나오는 탄력있는 소리들이 귓가에 맴맴 돌았다.

“으응! 아윽! 안돼..더이상..흑!”

“안에다 할래요..헉..허억.”

“마음껏 해도 좋아..안에..흑!흐응!”

마지막에, 내 귓가로 예영아! 라고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숙모의 몸을 강하게 끌어 안았을때에, 그녀의 보지 안에 박혀있던 그 단단한 불기둥은 몇번이고 꿈틀거리며 뜨거운 무언가를 토해내고 있었다. 온 몸의 신경이 예민해지는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을 강하게 쪽 하고 빨아 들였다.


아찔했다. 벌써 숙모와는 세번째 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무섭게도 일말의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동경했던 대상을 내것으로 취했다는, 그 허공을 뜨는 듯한 느낌만이 나를 사로잡을 뿐이었다. 한참이고 나른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있잖아요...”

몸을 깨끗이 씻고 나서, 옷을 입으려 할 그때에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하늘하늘한 원피스가 란제리차림의 숙모를 덮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예영이 군대갈 때 같이 못가도...용서해 줄거죠?”

“당연한 거잖아요. 상관없어요. 삼촌에게 걸리면 어쩌려고.”

“휴가 나와있을 때 쯤엔, 예영이 사촌동생이 태어났음 좋을텐데..”

모텔의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리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사촌동생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발음하는 듯한 그녀의 뉘앙스 때문이었다.

“사촌동생이 아닐수도 있겠죠.”

내 공격이 의외였는지, 거울을 보는 숙모의 몸이 일순간 움찔했다. 가지런히 정리된 머리결 밑으로, 그녀의 손에 잡혀진 귀걸이가 매달렸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어차피 내 아이라는 건 변함이 없지 않겠어요?”

몸을 일으키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묘한 기분에 휩쌓였다. 어느새 조카가 아닌 연인을 보는 눈빛으로 변한 숙모의 표정에, 악당의 본성이 드러나는 잔인한 표정을 지어 줄 수가 없었다.

“나가요. 너무 늦은것 같아요.”

서로의 표정에서 묻어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교외에 있는 모텔을 빠져나왔다. 아무도 우릴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그곳에서, 게다가 차안에 모습을 감추고 있으니 훨씬 마음이 편했다. 삼촌이나 한별이도 교외에서 만남을 가졌다면 나에게 발각되지 않았을 텐데...

“집까지 바래다 줄게요.”

“괜찮아요. 그냥 지하철 역에서 내려주세요.”

“어머? 내 운전실력을 못믿는 건가요?”

“솔직히 말해도 되는 거죠?”

“으이그..이 여우.”

숙모는 살짝 핸들에서 손을 떼어 나를 때리려는 시늉을 해 보였지만, 여전히 전방만 응시하고 있으니 별 도리가 없었다. 내가 큭큭 거리며 웃기 시작하자 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두고봐. 예영이 100일휴가 나올때쯤엔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어 있을 거에요.”

“그럼 그때는 까불면 안되겠네요.”

“지금 실컷 까불려고?”

“그래야죠. 어차피 지금은 핸들에서 손도 못 떼시잖아요.”

“치. 할수 있어요.”

그녀는 귀엽게도 조심스레 한 쪽 손만 떼어 내 쪽으로 뻗어 보였고, 나는 피식 웃으며 그 하얀 손을 잡아쥐었다. 식당일을 해서 조금은 거칠어진 그녀의 고운 손이, 내 손에 깍지를 끼며 스르르 덮였다.

“와..저 때문에 한손으로 운전할 수 있게 되었네요?”

“피..이상한 생색은..예영이 집 어디에요?”

“저 쪽으로 가시면 돼요. 사거리에서 좌회전 하구요.”

“앗! 나 좌회전은 약한데...”

얼른 내 손을 놓고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핸들을 쥐는 모습이 귀엽다. 곱슬한 머리가 반쯤 가린 갸름한 얼굴과 턱선, 그리고 서구적인 미인형을 보는 듯한 오똑한 콧날이 다른차의 헤드라이트에 비춰질 때마다 그 고운 곡선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예림이와 약속했던 그 시간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누나랑 둘이 산다고 했죠?”

“네.”

“좋겠다..그 누나는..”

“뭐가요?”

“예영이랑 살잖아요.”

“그럼 숙모도 삼촌이랑 이혼하고 저랑 사실래요? 생각할 시간은 2년 드릴게요.”

“호호호! 또 까분다..좋아요. 2년후에 제대해서 나몰라라 하기 없기에요.”

“글쎄요. 그건 그때 봐서 결정을..”

“못됐어 진짜.”

한결 여유로워진 대화가 계속될 즈음에, 우리집이 보이는 골목길까지 차가 들어와 있었다. 좁은 골목이지만 경차인 탓에 무리없이 들어온 것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쉬이 내리기가 힘이 들었다.

“고마워요 숙모. 오늘 재밌었어요.”

“예영이 때문에 내가 재밌었죠. 입대하는 곳에 같이 못가도..꼭 면회 갈테니까 편지해요. 알았죠?”

“그럼요. 휴가때마다 꼬박꼬박 들릴게요. 숙모나 그때 나몰라라 하지 마세요.”

살짝 웃는 그녀의 눈이 조금씩 촉촉해진다는 느낌이 들어왔다. 이제는 당분간 마지막이겠지..하는 기분이 들자 나 역시 울적해져 그녀를 끌어안았다. 모텔에서 나눴던 것만큼 정열적이진 않지만, 훨씬 부드러운 키스가 한동안 소형차의 좁은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부드럽게 혀를 감싸는 느낌과 함께 자연스레 내 손이 그녀의 다리를 더듬었다가 떨어졌다.

“이제 그만 들어가요. 누나 기다리잖아요.”

“다녀올게요. 저.”

“편지하는 거 잊지 말구요. 우리집 주소 알죠?”

“네. 삼촌 보다 먼저 우체통 확인할 자신이 있으시다면야..”

“윽..안되겠네요. 학교 식당으로 보내주세요.”

“하하. 저 진짜 들어갈게요. 운전 조심해요.”

눈가에 고인 눈물을 살짝 닦는 그녀의 모습때문에, 일부러 씩씩하게 말을 하고는 차문을 열고 나왔다.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던 차는, 어서 가라는 내 손짓이 있고나서야 비로소 천천히 미등을 뿌리며 골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우우웅..

허탈한 기분 때문인지 쉬이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있을때에, 조용히 휴대폰이 울렸다. 내 입대 소식을 들은 남자녀석들의 연락이라면 어떻게 거절하지? 라는 생각으로 폴더를 열었을 때, 발신자 란에 ‘누나’라는 두 글자가 보였다.

-미안해 예영아. 인터넷으로 오랜만에 연락된 친구가 있어서..맥주 한잔 하고 올게. 늦지 않을거니까 걱정마^^-

답장 버튼을 눌렀다가,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않고 폴더를 닫아버렸다. 지금 하고 싶은 말을 해버리면 간만에 친구를 만난 예림이에게 방해가 될 테니까. 오랜 유학생활 끝에 만난 친구라면 너무나 반가울 자리일 테지.

어차피...예림이는 내 입대 사실을 알고 있다. 내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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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오늘은 글이 산만하고 정신도 없고 그러네요.
마무리로 갈수록 매끈하게 전개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합니다.
몰입도가 반감되신 분들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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