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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어느 멋진날 18부

18부


어디서 부터 였을까.

나는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여전히 현관문을 열지 못하고, 그 입영통지서 하나만을 든 채로 혼란속에서 기억을 잡아내려 애를 쓰고 있었다. 어째서 갑자기 이딴게 날아왔을까. 눈 앞의 글자들이 까만 점으로만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이리저리 흩어져 괴기스러운 모양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만 같다. 목이 타서, 얼른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냉장고 안에 있는 생수병을 꺼내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맞아..그 때에..’

내 기억속은 재빨리 1년전을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신체검사를 받고, 1학년이 중반쯤 접어 들었을 그때에, 학생회관 앞에서 인재와 만났던 것이 떠올랐다.


-야야. 김예영. 너 어쩔거냐?-

-뭐가?-

의아한 내 표정에 인재는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

-군대 말야. 신검받았잖아.-

-아직 멀었는데 뭘..-

-멀기는 자식아. 미리미리 신청해 두는게 좋을껄?-

-때되면 가는거 아니었어?-

내 말이 그렇게나 황당한 것이었을까. 입을 쩌억 하고 벌리는 녀석의 표정이 생생하게 눈에 들어왔다.

-무슨 소리야. 빨리빨리 안하면 시기 놓친다는 선배들 조언도 못들었냐?-

물론 선배들이 그런 조언을 했을수 있겠지만, 나는 인재처럼 선배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러 다니는 부류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성격은 인재처럼 수다스럽고 싹싹한 편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데?-

-가장 좋은건 1학년 끝나고 가는거지 뭐. 나랑 같이 신청하러 가자.-

-신청?-

-그래 인마. 요새는 인터넷으로 다 신청할 수 있어. 몰라?-


냉수를 마셔서 인지, 그 날의 기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말이 나온김에 하려고 그 날 바로 인재와 함께 피씨방에 가서 입영 신청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동반입대 신청을 하자는 녀석의 말을 한사코 거절해서 입대 신청을 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내가 정신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며, 내가 편하게 쉬던 집이 없어졌다. 원체 친척이 없는 나는 세상에 혼자 내몰렸다. 그 즈음에 예림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왔다. 입대에 관한 것들을 기억 할 리가 없었다.

‘그랬구나.’

머리털이 바짝 서는 느낌이 들었다. 인재녀석 말대로, 군대는 시기가 중요한 것이었다. 미리 내가 군대에 간다는 것을 상기하고 있었다면 이런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준비를 해두지 못했기에 기습펀치가 더욱더 치명적이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4월..20일’

넉넉히 쳐줘야 한 달밖에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자세히 보니 발행일자는 2월. 그동안 계속해서 우편함을 확인하지 않은 탓에 모르고 있던 것이었다. 순식간에 사형선고가 내려진다.

우우웅..우우웅..

다시 한번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받을 만큼 정신이 없는 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 였지만, 왠일인지 나는 손으로 주머니 안을 더듬거려 네모난 그 것의 몸통을 움켜 쥐었다. 내 손이 떨리는 건지, 아니면 휴대폰이 떨리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여보세요.”

-오빠. 전데 혹시 출발 하셨어요?-

수화기 너머로는 오유민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직 출발 안하셨으면..저희 집에서 하자고 하려고요.-

전화를 끊기전 오유민이 했던 소리에도, 나는 조금의 의문도 품지 않고 터덜터덜 학교로 향했다. 머리 속으로 찬물을 뿌린 것처럼 얼얼한 기분이었다. 오유민은 자신의 집 호수를 알려주었고, 나는 당초의 계획대로 피씨방으로 가는 것이 아닌, 강한별도 살고 있는 학교 후문 근처의 그 원룸건물로 향했다.

“아..선배 들어오세요.”

힘없이 벨을 눌렀고, 문이 열리며 오유민의 얼굴이 보였다. 강한별의 말은 역시 거짓말 이었구나..옆방이 아닌 윗층이었다. 하지만 딱히 화가 난다거나 하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유민의 방은 화사했다. 여자의 방이라는 것이 존재 자체만으로도 남자를 설레게하는 힘이 있는 것만 같다. 심플하고 세련된 강한별의 방과는 달리, 오유민의 방은 마치 여고생의 방처럼 귀엽고 깜찍했다. 파스텔 톤의 침대 시트며, 아기자기한 인형들, 가구 하나하나 까지 다 앙증맞게 보였다.

“생각해보니까 저희집에도 프린트가 있는데..굳이 피씨방에서 돈 낭비할 필요가 없을것 같아서요.”

살짝 입을 가리고 웃는 오유민을 바라보았다. 짧은 머리를 묶고,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하얀 다리가 예뻐 보였다. 예림이가 입는 것처럼 몸매를 드러내는 원피스는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팔랑 거리는 치마가 여성스럽게 보였다. 그제서야, 우편함을 열었을때 부터 시작되었던 딜레마에서 조금씩 깨어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왔다.

“선배 무슨일 있어요?”

내 표정이 굳어 있는 것까지는 아직 풀리지 않은 모양인지, 나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달콤한 냄새가 났다. 억지스러운 향수 냄새가 아닌, 무언가 향긋하면서도 달콤한 냄새였다.

“아냐. 아무것도..과제 할까?”

내 말에 그녀는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이윽고 책상 앞으로 의자하나를 끌어다가 놓았다. 자취방이었지만 컴퓨터며 프린터가 모두 갖춰져 있어, 과제를 하기엔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하기야, 나 역시 집에서 컴퓨터로 과제를 한 후 나중에 오유민과 만나서 검토하면 그만이지만, 저번의 일을 생각하면 와야 하는게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입영 통지서때문에 기분이 푹 하고 가라앉아 버렸지만.

나와 오유민은 책상앞에 나란히 앉았다. 강의실에서는 가끔 같이 앉는 편인데, 이렇게 그녀의 집에서 나란히 앉으니 괜스레 기분이 묘했다.

“컴퓨터 하나니까..바로 워드 작업하지 말고..일단 연습장에 써놓고 나중에 입력하는게 낫지 않을까요?”

“응..그게 낫겠다.”

“네.”

“근데 과제가 뭐였지?”

얼빠진 내 질문에, 오유민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입을 가리고 쿡쿡거렸다. 나란히 앉아 있는 탓에 평소보다 훨씬 더 그녀의 얼굴이 가깝다는 생각이 들 때쯤에, 윤기나는 단발머리가 살짝 흔들린다.

“부부가 서로에게 원하는 거랑, 서로가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쓰는 거잖아요.”

“아아.그랬지.”

노트를 꺼내 들고 손가락 사이에 팬을 끼웠지만 선뜻 글씨가 써지지 않았다. 이 상태 그대로 가다간 ‘군대’라는 단어만 연습장에 가득 채울 것만 같았다. 내가 왜이러지?

딱히 군대에 대한 공포증이나 혹은 기피증이 있지는 않았다. 누구나 가는 것이고, 언젠가는 내 차례가 오겠거니 하고 오히려 담담하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달랐다. 예림이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고, 그 다음에는 숙모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잠깐..오유민..?’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해보니 내 옆에 있는 것은 그냥 후배가 아닌 것이었다. 나에게 간접적인 고백을 했고, 묘하게 나와 얽히는, 예림이와 비슷한 향기를 풍기는 아이다. 게다가 나는 그녀의 방에 단 둘이 있었다.

오유민의 볼펜이 종이위를 미끄러져 나가는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곁눈질로 보니 그녀는 종이위로 시선을 고정한채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갸름하고 작은 새하얀 얼굴위로 까만 눈동자가 손을 따라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짧은 머리도 고개를 숙이면 살며시 내려와서 방해가 되는 모양인지, 연신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고 있었다. 그럴때마다 드러나는 하얀 목선이 예뻤다.

그제서야, 나는 다시금 내 앞에 놓인 종이에 이것저것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대학교에서 1년이상을 지낸 남자애들은 누구나 다하는 입대시기와 복학시기, 그리고 휴학시기를 맞추는 것을 등한시해 버렸으니, 나는 아마도 학생센터에 가서 사정을 말하고 급히 휴학을 해야할 것이다. 자연히..이번학기의 학점도 그렇게 중요해지진 않겠지. 한 달 남짓 남겨둔 시간을 학점관리에 쓰고 싶지 않았다. 아마 결혼과 가족이 파트너인 오유민에게도 피해가 가는 과목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레포트 따윈 아마도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었다.

“쿡쿡..”

생각나는 대로 눈앞에 있는 종이에 팬으로 끼적거릴 때 즈음, 옆에서 소리를 죽여 웃는 오유민의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아까는 종이를 향해 있던 그 두 눈이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왜그래?”

“선배가..큭..쓴게 웃겨서요..”

뭐가 그렇게 웃기다는 걸까. 문득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앞에 있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언제 부터인지 모르지만 내가 쓰기 시작할때 그녀가 몰래 훔쳐본 모양이었다.

“상대가 해주지 말았으면 하는 일 세번째 이게 뭐에요? 나 없을때 야한 옷입지 말기? 푸하핫!”

나도 모르게 헉!하고 숨을 삼키고 말았다. 나 답지 않게 정신줄을 놓고 써내려간 모양이었다. 그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망상속에서 레포트를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외에 정신줄을 놓고 쓴 내 글들을 쭈욱 보며 킥킥거린 오유민이 갑자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설마..내가 또 이상한 걸 써버린것은 아닐까? 나는 황급히 오유민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며 내가 쓴 항목들을 읽어나갔다.

-내가 원할때 벗어주기.-

이런 젠장! 밑에서 두번째줄에 쓰인 문구를 읽은 나는 허겁지겁 종이를 팔로 가려버렸다. 오유민은 급격하게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그제서야 완전한 제정신이 돌아온 나는 눈 앞에 있는 노트의 페이지를 황급히 넘겨버렸다.

“아..저..이게 그러니까..”

당황스러웠다. 다행히도 오유민의 눈에서 경멸이나 실망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건 명백히 내가 오유민을 성추행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결혼과 가족은 철저히 파트너와 가상의 부부가 되어 진행되는 수업이었고, 아마도 오유민은 내가 원할때 벗어주기라는 항목의 주체를 자신으로 인식했을지 모를 일이다. 설령, 내가 오유민이 아닌 다른 여자를 떠올리며 쓴 것이라 할지라도.

“아니..뭐..장난으로 쓰신거 맞죠?”

말은 그렇게 해도, 오유민은 꽤나 당황한 듯했다. 예림이나 오유민처럼 하얀 얼굴은 당황했을때 남들보다 더 티가 나는 법이니까. 나는 얼른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아..그냥 장난으로 쓴게 아니라..내가 지금 정신이 없나봐. 진지하게 할게. 미안.”

“그러지 말고 조금 쉬었다가 할까요? 오자마자 바로 과제했으니까.”

“그래. 그러자.”

진정으로 원하는 바였다. 머리속에 가득찬 군대에 관한 것은 어느정도 밀어내는데 성공했지만, 아직까지 데미지는 조금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중요한 일이 산더미 처럼 남아 있는데, 이런 레포트를 하는데에 억지로 힘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이거 드세요.”

내가 크게 심호흡을 하는 동안, 주방으로 간 오유민은 커피와 과일이 담긴 쟁반을 가져와 내게 내밀었다. 하늘색 원피스. 하얀 팔다리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오늘은 왠지 선배답지 않은데요.”

“아아.”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평소에는 즐기지도 않는 커피를 조금씩 들이켰다. 달콤한 냄새가 커피향과 섞여, 편안하게 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왔다. 우리 둘사이로 아주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커피를 마시는 척하면서, 커피잔너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늘 티셔츠를 입은 모습을 보다가 원피스를 입은 걸 보니 왠지 모르게 새로워 보였다. 귀엽고 깨끗한 이미지의 소녀. 강한별과 대조되는 매력을 가진, 그리고 예림이와 비슷한 느낌을 가진..2학년 남자들의 절반 이상이 관심을 갖고 있는 아이.

오유민과의 첫만남, 두번째 만남, 그리고 결혼과 가족 수업시간에서의 만남 등등이 떠올랐다. 그때는 왜 이 아이가 날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때 그것을 알아 차렸다면, 난 유민에게 대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또 대쉬를 했다면, 예림이와 나는 가족의 선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예림이에 대한 사랑을 오유민에게서 찾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오유민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의자사이가 이토록 가까웠던가? 커피잔을 들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강한별의 말이 맞다. 애초에 오유민이 예림이와 닮았다는 것을 미리 알아채고, 미리 도망갈 길을 만들어 두었어야 했다. 조금 비겁하지만, 예림이에 대한 욕심과 욕망을 유민에게서 찾았어야만 했다. 이는, 자신의 어머니와 닮은 여자를 찾는 뭇 사내들의 행동과는 성격이 많이 다른 것이었다.

“사실.말이야..”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것인지, 유민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동안, 나와 그녀의 눈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곧 군대갈 거 같아.”

다른 사람도 아닌, 오유민에게 처음 밝히는 셈이었다. 나를 보던 눈동자가 살짝 커졌고, 조금 떨렸으며, 잠시후에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입술이 달싹 거리며, 무언가 말할 것처럼 망설이고 있었다.

“언제..인데요?”

“다음달 20일.”

방안의 공기는 무거워졌다. 서로가 무슨말을 해야 할지, 머리속에서 끝없이 연구하고 있음이 틀림없는 듯해 보였다. 책상위에 놓인 커피잔을 만지작 거리던 그녀는, 살짝 입을 열었다.

“2년..이죠? 요새는 그거보다 더 줄었다고 들었어요.”

“응. 그런 모양이더라.”

“제가 기다렸던 시간보다 짧네요.”

“응?”

“선배..좋아했던 시간보다 짧다구요.”

어디다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르는 내 눈위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보였다. 어디서 그런 착각이 들어오는 것일까. 엘레베이터에서 키스를 하고 난 후, 나를 바라보던 예림이의 눈빛과 판박이라는 생각이 들어왔다. 늦지 않았을까? 지금..도망쳐도 말이다. 나도 모르게 유민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후 그녀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으며,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어찌보면 우리 둘 사이 거리가 무의식 속에서 너무나 가까워졌기 때문일수도 있고, 또 어찌보면 군대를 앞둔 내 또래 청춘들이 다들 그렇듯, 눈 앞에 있는 쾌락에 정신을 못차리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속눈썹에 덮혀 감겨있는 하얀 볼을 감싸쥔 나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의 입술을 내 입술로 집어삼켜 버렸다.

방안에서 나던 달콤한 냄새는, 아마도 그녀의 몸에서 났던 것인 모양이었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과 향기에 취한 나는 그만 오유민을 끌어안아 버리고 말았다. 후배..라고 정의하기엔 그녀가 차지하고 있는 내 마음속 비중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보였다.

“음..”

유민의 입안으로 뜨거운 숨결을 밀어 넣었다. 그녀의 입술은 너무나 쉽게 열려 나를 받아 들인다. 살며시 눈을 뜨니, 자신의 원피스 치마 자락을 꾹 움켜쥔 유민의 하얀 손가락이 보였다. 참을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이 후배 오유민이 아닌 김예림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무언가 불길같이 뜨거운 것이 내 머리위로 확 하고 올라왔으며, 나는 그대로 그녀를 밀어 붙여 버렸다.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의 뒷편은 침대였고, 우리는 너무나 손쉽게 침대의 푹신한 감촉 속에 몸을 맡겨 버렸다.

“음..읍..”

내 혀는 집요하게 오유민의 입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은 어설프게 내 목을 감싸쥐었고, 나는 마치 스킨쉽에 너무나 익숙한 사람인양 능숙하게 그녀의 다리쪽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위험했다. 오유민에게는 그저 관심있는 선배와 이루어진 우발적인 키스일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저번에 다하지 못한 예림이와의 관계를 이어가는 연장선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알고도 제어하지 못하는 내 상태는,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위험했다.

“서..선배 잠깐만..”

내 손이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할때, 오유민의 양손이 내 가슴을 밀어내어 버렸다. 오유민의 얼굴위로 씌여져 있던 김예림의 가면이 순식간에 산산히 부숴지는 느낌이 들어왔다. 내 호흡은 어느새 헉헉 거리는 급박한 호흡으로 변해 있었다.

“잠깐만요..진정해요..”

그제서야 정신이 들어왔다. 원피스 자락이 무릎위를 훨씬 넘어선 위치까지 말려 올라간 오유민이 내 몸 밑에 깔려 있었다. 가까이 봐도 너무나 깨끗한 그 하얀 피부위로, 떨리는 눈동자를 나를 보고 있었다.

“아..미안해..나는..”

사과를 해서는 안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게 더 오유민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일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애써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했잖아요. 내가 오빠를 좋아했던 시간은 2년이 넘는다고..그러니까..서두르지 말아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그것이 이제부터 오유민과의 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동조임을 잘 알면서, 나는 또 그렇게 무책임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다시한번 우웅 하는 진동소리가 주머니에서 들려왔다. 여전히 그녀의 몸위에 어정쩡하게 올라타 있음을 알아챈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어 액정을 확인했다.

-누나-

이제서야 생각이 났다. 내가 아까 노트에 써두었던 그 황당무개한 항목들은..다름 아닌 예림이를 염두에 두고 써나갔던 것이었다.





*
갑자기 전화한 예림이의 전화를 받고 나갔지만, 사실 그때처럼 또 오유민에게 모든것을 맡기는 무책임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과제를 끝내었고, 내가 가는 것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를 뒤로하고 집을 나서야만 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째서 예림이가 나를 보자고 하는 것일까. 그것도 나와 함께 같이 갈 곳이 있다고 했다. 앞으로 나와의 관계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것일까? 왠지 모르게 두려운 마음도 동반되어 들어왔다. 어쩌면..오유민의 집에 더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나약한 생각이 들었다. 예림이가 나를 피할 것이라고 선언해 버린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는 까닭이었다. 그녀 앞에서 오유민을 방패로 내새울 만큼 나는 너무나 심각하게 비열한 성격이 되어 있었다.

“아..”

나는 깜짝 놀라 예림이를 바라보았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나를 만나자마자, 내 손을 잡아 끌고는 어디론가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에 당황해서 였다. 검정색 자켓과 검정색 치마. 평소보다 훨씬 신경쓴 듯한 그 차림새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녀는 미리 불러둔 택시 안으로 나를 잡아 끌었다. 우리가 타자마자 택시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어디론가 출발하고 있었다.

“어디 가는 거야? 갑자기 왜그래?”

“가보면 알아.”

평소보다 침울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택시에 타고서도 내 손을 꼭 쥐었다는 것에 어느정도는 안심하고 있을 뿐이었다. 반대쪽 차창을 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 표정은, 머리칼에 가려져 볼 수 없었다. 의문을 품고 있는 동안에도 택시는 한참이나 어디론가 달려갔다.

예림이의 손은 차가웠다. 과외를 하고 바로 오는 것이 아닌, 집에 한번 들렸다가 오는 모양인지 늘 어깨에 걸치고 다니는 바이올린 하드케이스가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단정한 스커트에 검정색 톤 스타킹. 왠지 우울해 보이는 목소리 톤을 하고서, 그녀는 내 쪽이 아닌 반대쪽의 창가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답..해주려고 하는 걸까.’

마음속에 들어오는 그 의문을 선뜻 입밖에 낼 수 없었다. 풍기는 분위기는 거절 같기도 한데, 내 손을 꼭 쥐고 있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마음속을 들여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을때, 눈에 들어오는 차창밖의 낯익은 풍경에 나는 그만 아 하는 탄성을 질러버렸다.

“9천 8백원입니다.”

택시는 서서히 멈춰섰다. 사람들의 발길이 현저하게 적은 것이 느껴지는 이 곳에서, 예림이는 지갑을 꺼내 돈을 계산하고는 내 몸을 살짝 옆으로 밀어 어서 내리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내리고 나서야, 예림이는 내 손에 깍지를 껴 쥔 손을 살며시 놓았다.

그녀가 왜 이곳에 오자고 한 것일까. 누나가 한국에 오고 그 다음날 잠시 들렀고, 그 이후로 오지 않은 이 곳을 왜 온 것일까. 엄마와..아빠가 잠들어 있는 이 곳에.

예림이는 천천히 앞장서서 걸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의 그녀를, 나는 아무말도 없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수없이 많은 묘지들을 지나, 잊을래야 절대 잊을수 없는 두 개의 작은 봉묘와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계속 유지하던 침묵을 더욱 국건히 지켜야만 했다. 예림이는 들고있던 가방에서 술 한병을 꺼내었고, 나는 그녀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어째서 갑자기 부모님이 계신 시민묘지를 찾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묘지 앞에서 무릎을 꿇은 예림이의 하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큰 눈에 물방울이 조금씩 모이더니, 이윽고 또르르 볼을 타고 떨어져 나갔다.

“미안해..”

숙모가 무서워하던 그 번개가 이번엔 내 몸에 직격한 듯한 느낌이 들어왔다. 예림이의 고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의 양이 더욱더 많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가슴아픈 장면보다, 연신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는 그녀의 모습에 내 몸은 번개를 맞은 것처럼 굳어버렸다.

"너무..미안해 엄마..흑.."

오랜만에 엄마와 아빠를 보고도, 그리고 같이 사는 예림이와 함께 있음에도 나는 곧 군대를 간다는 말을 해주지 못했다. 바람이 불어오며 빳빳한 옷자락이 살며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위 아래로 계속해서 흔들리며, 눈물을 보이고 있던 예림이의 몸짓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쳐내었을때에, 내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가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나..용서해 줄거지?”




집에 오는 길은 둘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다만 골목길에 들어섰을때 예림이는 내 손을 그 어느때보다 꼭 움켜쥐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는 서서히 익숙해져 가는 이 동네의 조용한 밤길도 쌀쌀하지 않았다.

누나는 웃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드러난 하얀 얼굴위로, 그리고 붉은 입술 사이로 고르게 나있는 하얀 치아가 보였다. 그녀가 무슨 결심을 한 것일까. 분명 나는 그 답을 알 수 있었지만, 머리속에는 이제 시간이 없다 라는 압박감만이 계속해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먼저 씻을게.”

집에 도착하였을때 예림이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고,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는 다른 무거운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등을 돌려주었다. 스윽 스윽 하는, 옷자락이 누나의 몸을 미끌어져 내려가는 소리에 침이 삼켜졌다. 그 이후 욕실에서 샤워기의 물소리가 들려올때까지, 나는 장승마냥 몸을 붙이고 그 자세 그대로 서있을 뿐이었다.

누나가 샤워를 하는 소리를 들으며, 서랍을 열어 아까 나가기 전 넣어두었던 입영 통지서를 꺼내어 들었다. 몇 번이고 확인해도 그 이름은 나였으며, 몇 번이고 확인해도 그 입영 통지서는 누군가의 장난이 아닌 진짜였다.

한 달. 한 달도 남지 않은 것이다. 지금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복잡한 일들을 정리하는 데에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야박했다. 그 한 달의 시간이 지나면 나는 그것들을 모두 정리하지 못한 채로 2년동안이나 세상과 등지고 살아야만 한다. 어디에 잠깐 외출만 해도 불안한 누나를 혼자 자취하는 여자로 만들어야 하며, 강한별에 미쳐있는 삼촌을 등지려 하는 숙모의 곁을 떠나야 했다. 더불어, 조금씩 선후배 사이라는 허울이 벗겨지고 있는 오유민과의 관계도 끊어질 것이었다.

싫었다. 겉으로는 그런것들 훌훌 털어버리면 그만이노라고 짐짓 쿨한척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간절하게 그것들이 내 주위에서 계속 머물기를 바라고 있었다. 누나와 내 침대 사이에 드리워져 있는 저 커튼이 걷혀질때까지, 그리고 누나가 부모님께 했던 사죄가 헛되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내 자신이 나쁜 놈이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들어가..너도.”

한참이나 서성이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을 때 즈음 욕실문이 스르르 열렸다. 바디샴푸의 향기를 머금은 수증기가 방안으로 확 하고 밀려 들어왔다. 내가 눈을 돌렸을때는, 젖은 머리결을 수건으로 말리며 원피스 차림으로 나오고 있는 예림이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었다.

“뭘 그렇게 빤히 보니?”

그녀의 질책에 의식적으로 몸을 돌려 욕실로 들어갔다. 원피스 밑자락으로 하얗게 나온 다리에서 애써 시선을 돌리며, 욕실로 들어간 나는 서둘러 옷을 벗고 뜨거운 물을 맞기 시작했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머리속 가득 등장했던 인물들의 모습이 하나씩 지워져 나갔다. 몇 분이고 물을 맞고 나서는, 예림이의 웃는 얼굴 하나만이 내 머리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짧고도 길었던 시간이었다. 공항에서 예림이를 만나고, 화상채팅에서 우연히 예림이를 만나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미 엄마와 아빠의 앞에서 흘렸던 눈물과 사과의 한 마디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지만, 왠지 그것을 덜컥 믿었을때 상처를 받을 것 같다는 나약한 생각이 들어왔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길다고 느낄 정도로 오래동안 샤워를 하고 나왔을때엔, 방의 조명은 모두 제거된 후였다. 티셔츠와 팬티만 입고 나온 내 모습을 완벽하게 어둠이 가려주고 있는 듯했다. 욕실의 불빛이 어둠을 밀어낸 곳은, 금세 수증기로 인해 뿌얘져 버렸다.

예림이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니, 보이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라고 짐작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여전히 침대와 바닥 사이에는 얇은 커튼이 달린 칸막이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불규칙한 호흡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나는 욕실의 불마저 끄고는, 티비 옆에 있는 작은 스탠드에 불을 밝혔다. 은은하게 방안을 채우는 희미한 조명 사이로 이불 옆으로 조금 빠져나온 그녀의 하얀 다리가 눈에 보였다.

“옛날 일 기억나?”

내가 주춤주춤 바닥에 누웠을때 예림이가 입을 열었다.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아서 적막이 조금 찾아왔고, 나는 한참이나 생각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뭐가?”

“어렸을때 우리동네 사는 만수가 나 매일 괴롭혔잖아.”

“응..”

“그때 너한테 가서 이르면 니가 만수 때려주고 그랬는데...”

보이진 않았지만, 왠지 그녀의 눈이 반짝 거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니가 나한테 그랬잖아. 커서 결혼해서, 니가 맨날 누나 지켜줄거라고.”

예림이는 웃고 있을까? 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까지 아직 가슴에 담아두고 있던 거구나. 나도 모르게 살짝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하면 되잖아. 지금이라도.”

하지만 내 말에 또다시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 앉았다. 진심이었다. 세상의 눈을 매번 피할 자신이 그녀에게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을것 같았다. 한때 우리는 미쳐있었다 라는 말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누나와 같이 있고 싶었다. 보통의, 혹은 일반적인 남매의 모습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때..기분 좋았니?”

이번엔 예림이가 용기를 내어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그때가 언제인지 나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스탠드의 은은한 조명 덕분에, 커튼 위로는 그녀의 모습이 그림자가 되어 투영되고 있었다. 그녀는 천장을 보고 누워 내게 말을 건내고 있었던 것이다. 봉긋 솟아 있는 가슴 부분의 실루엣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응. 좋았어.”

“오늘도 해줄까?”

너무나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갑자기 그녀가 왜 그것을 제안하는 것일까. 오늘 부모님의 산소에 다녀온 것이 그 의문의 열쇠일까? 자세한 내막은 그녀만 알고 있을 테지만, 나는 그녀에게 보일리가 없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오늘은?”

“누나도 했으면 좋겠어. 커튼을 사이에 두고.”

평소같았으면 당황하면서 방방 뛰었을텐데, 그녀는 말이 없었다. 커튼 위 그림자가 그녀의 표정까지 흉내내지 못한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한동안 대답대신 간헐적인 숨소리만 들려주던, 그녀가 누워있던 침대에서는 마침내 나즈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나는 잠시 고민해야 했다. 이대로 이 칸막이를 치워 버리고는 예림이가 있는 침대로 뛰어들고 싶다는 충동이 내 몸을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기어 올라가 누나의 살냄새를 깊이 들이마시고 싶다는 느낌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렇게 해버리면 예림이가 오늘 눈물을 흘리고, 내게 먼저 손을 내민 그 의미가 퇴색해 버린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마음속에서 이야기하는 또 다른 나를 겨우 진정시켰다.

그녀의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튼위로 엉덩이를 살짝 올리며, 자신의 치마를 걷어 올리는 그녀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세워진 무릎사이로 그녀의 속옷이 말려 내려가고 있는 것이 느껴질 때쯤엔, 내 골반 부위도 빳빳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나..어떻게 하는지 잘 몰라.”

예림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녀도 내가 바지를 내리고 빳빳하게 솟아오른 불기둥을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예림이가 알든 모르든 그것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손이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로 향해 있다는 것일 뿐이다.

“으음..”

내 호흡은 거칠어 지기 시작했다. 살과 살이 마찰되는 소리가 예림이의 귀에도 똑똑히 전달될 것이었다. 예림이의 호흡소리는 좀처럼 거칠어 지지 않았지만, 그림자의 형태로 미루어 볼때 그녀는 자신의 허벅지 사이를 손으로 만지고 있는 듯했다.

“이번엔 내가 해줄게.”

“뭐..뭐?”

“저번엔 누나가 해줬으니까..이번엔 내가 할게.”

“그..그건 안돼.”

“누나는 하는 법도 모른다고 했잖아.”

“그래도..”

자제하려고 했는데, 거기까지는 내 자제력이 미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 제안에 망설이는 그녀의 대답을 들으려 하지 않고, 나는 커튼의 천 사이로 내 왼쪽손을 밀어 넣었다. 오른손으로는 단단히 부풀어 오른 자지를 움켜쥔 후였다.

“앗!”

손을 뻗어 가장먼저 만져진 것은 그녀의 보드라운 허벅지였다. 손에 가득 들어올 정도로 도톰하고 부드러웠다. 아련한 흥분이 머리속을 채워오기 시작했다. 손을 더 뻗었을때에 그녀의 원피스 끝자락이 만져졌고, 그녀의 손은 나를 저지하듯 내 손등위에 올려져 있었다. 하지만 내 손은 보이지 않는 부분들을 더듬어 나갔고, 이윽고 까칠까칠한 느낌이 내 손끝으로 전달되었을 때엔 나도 누나도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아..안돼..흑..”

까칠까칠한 털 밑으로, 너무나 부드러운 몇 개의 살덩이가 내 손끝을 자극했다. 한껏 손을 뻗은 탓에 어깨 부분이 저려왔지만, 나는 오른손으로 충실히 발기된 자지를 문지르며 그녀를 더듬어 나갔다. 도톨도톨한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를 손가락으로 비비기 시작했다. 내 손등을 잡은 그녀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흑..흠..흐음..”

조금씩 내 손가락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진득진득하면서도 뜨거운 액체의 느낌이 손가락에 전달되어 왔다. 내 귀두끝에서도 벌써부터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이 오른손을 통해 느껴졌다. 두 개의 살점이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그 경계선 사이로, 나는 조심스레 검지 손가락을 구부려 밀어넣었다.

“흑..흐응! 예영아...”

이윽고 질척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천둥소리마냥 크게 들려왔다. 당장이라도 이 커튼을 젖히고 마지막 벽까지 허물어 버리고 싶었지만 나는 꾹꾹 눌러 참았다. 그녀의 깊은 샘속의 부드러운 느낌이 내 손가락을 힘껏 물고 있다는 느낌마져 들어왔다. 찌걱거리는 액체소리가 들려오며 내 정신도 아득해진다.

“흑...!흐응..아아..아파..흑..”

이제는 커튼에 투영된 그림자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예림이의 다리 사이는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고, 내 손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에는 반대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헉..헉..”

내 숨소리도 거칠어 졌다. 오른손은 더욱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욕실 틈 사이로 그녀의 알몸을 보고 있을때보다 백배는 더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아앗..아..안돼..나 이상해..흑..”

나에게 더이상 선을 넘지 말라고 단언했던 그녀는, 이제 정반대의 결심을 하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그녀도 눈치채고 있었을지 모른다. 우리 둘 사이에 도망칠 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다시 선을 힘주어 긋기에는 너무나 많은 부분이 지워져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할것 같아..헉..”

“아응..흑..흐응..”

이윽고 거세게 움직이던 내 손이 뚝 하고 정지했다. 적잖이 흥분을 한 모양인지, 갑자기 수도꼭지를 세게 튼 것처럼 하얀 정액이 힘차게 치솟아 내 배쪽으로 흩뿌려 지기 까지 했다. 누나의 질 속에서 애액을 뿜어대게 했던 내 손가락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누나의 양 하벅지가 오무려지며, 그 여린 속살안에 파고들어 있는 내 손가락과 손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하아..하아..오..오늘은..여기까지만..이야..”

예림이도 흥분을 했음에 틀림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내 손가락에 느껴지는 그 부분처럼 흠뻑 젖어있었다. 내 손을 다리로 힘껏 조이며 몇 번이고 몸을 부르르 떤 그녀는, 이윽고 내 손을 잡아 바깥쪽으로 이끌었다. 부드러운 살덩이 사이를 빠져나왔을 때엔, 생각보다 훨씬 내 손가락이 많이 젖어 있음이 느껴져왔다.

한참이고 위로 뻗어져 있던 내 손을 끄집어 당겼다. 아직도 껄떡 거리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는 내 붉게 물든 귀두가 눈에 들어왔고, 희미한 스탠드 조명위로, 애액에 번들거리는 내 손가락이 보였다. 한참이고,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채 그렇게 누워 있었다.

내가 잔뜩 흘린 정액들을 뒤처리할 생각도 하지 못한채, 나는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얼굴을 조금 들어올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스탠드의 조명을 누나의 몸이 가려버리고 있었다. 조금씩 비틀거리며 욕실을 향하는 예림이의 뒷모습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쏴아아..

물소리가 빗소리 처럼 촉촉하게 내 귓가를 적시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나는, 욕실 문 틈 사이로 희미하게 삐져 나오는 옅은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이미 사형선고가 내려진 내 누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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