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시리즈 #1 후배의 아내 (상)
새 글을 연재합니다. 이번 글은 근친은 아닙니다만 다음 시리즈를 근친으로 할 예정이기 때문에 이 게시판에 올립니다.
그리고 이번 편에는 H한 글도 없네요.. ^^
[ 아내 Series #1 후배의 아내 (상편) ]
이진욱 36세.
벌써 인생의 절반을 살아왔지만 그는 지금 사회적으로 바닥인생을 보내고 있다. 벌써 무직으로 보낸 시간이 3년, 그나마 그 이전에도 변변한 직장 한곳을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직 결혼도 하지 못한채 궁상맞은 독신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진욱의 가족은 아버지와 위로 형만 세명이 있다. 유일하게 진욱을 아끼고 보살펴주던 어머니는 진욱이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다. 아마도 진욱이 인생의 끈을 놓고 허망한 시간을 보내게 된건 그 때부터 인 것 같았다.
진욱의 가족들은 진욱을 무시하고 차갑게 대한다. 자신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오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욱의 아버지 이만호(72세)는 국회의원이었다. 제1야당의 원내대표로써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될만큼 정계에서는 큰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 큰 형인 이진구(44세)와 셋째 형 이진수(39세)는 행정관료로 지식경제부 기조실장과 중소기업청 기업금융지원과장으로 근무중이다. 현재 야당당수를 아버지로 두어 숨을 죽이고 있지만 정권이 바뀌면 차기 장관감으로 유력한 인사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둘째 형, 이진표(42세)는 국내최대의 전자회사인 상상전자의 법무실 Risk대응팀장으로 근무중이었다. 사시를 패스하고 검찰에 근무시 스타검사로 이름을 날렸고, 검사복을 벗을때 여러 로펌에서 구애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상상전자에서 파격적인 대우로 스카우트 되었다. 둘째형 또한 후일 법무장관 자리가 유력한 사람이었다.
이런 명문가에 진욱같이 한심한 인간이 태어났으니 내놓은 자식 취급할 만도 했다. 진욱도 처음부터 이렇게 한심한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 중학교를 올라가기 전까지는 천재소리를 들었다. 하나를 알면 열을 깨우치는 남다른 비범함이 있어, 후일 큰일을 할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진욱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열정과 끈기..가 전혀 뒷받침이 되지 않았다. 매사에 의욕이 없고, 무엇을 해도 몇 번을 하고나면 더 이상 하고싶지 않아했다.
오죽이면 아버지 이만호가 자신의 자식이 아닌 것 같다며, 누구의 자식이냐고 어머니와 싸우고, 친자검사까지 했을 정도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지병으로 세상을 뜰 때 마지막으로 했던 유언이 ‘우리 진욱이.. 불쌍해서.. 어떻게…해.. ‘ 였었다.
그런 이진욱이 오늘 둘째형 이진표를 찾아가고 있었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초고층 빌딩으로 거대하게 들어서있는 상상전자 건물을 보자 진욱은 자신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형에게 전화는 하고 찾아가는 길이지만, 형을 만나는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1층 로비에 들어서 안내데스크에서 형을 찾아왔다고 이야기하자 안내직원이 전화로 방문자 정보를 확인을 하고 방문증을 주며 20층으로 가라고 안내를 했다.
20층은 모두 법무실 직원이 사용하는 층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형이 있는 방을 확인하고 노크를 했다.
“ 들어오세요~ “
문을 열고 형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섰다. 개인방을 사용중이었고,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던 형이 진욱을 보고는 응접테이블쪽으로 안내하고 서로 자리에 앉았다.
“ 그래.. 무슨일로 여기까지 온거냐? “
“ 형… 오랜만에.. 보네.. 잘 지내지… “
“ 니가 지금 누구 걱정할 놈이냐.. 너 자신이나 좀 어떻게 해봐라. “
“ 그래… 맞아.. 내가 문제지… 그래서… 형한테 좀 미안하지만.. 부탁 좀 해보려고.. “
“ 무슨 부탁? 돈이 필요해? “
“ 아니.. 돈 말고…… 직업이….. “
“ 내가 무슨 직업소개소 사장이냐… 내가 너 직업을 어떻게 소개해주냐. “
“ 나.. 여기.. 형네.. 회사 좀 어떻게 안될까…? 정말!!! 정말 열심히 할께!! 형… “
이진표는 진욱의 말을 듣고는 탁자위에 올려져 있던 장식물의 뚜껑을 열고 들어있는 담배를 들어 물고는 불을 붙였다…
“ 후우~~~ 진욱아… “
“ 응…. 형… “
“ 안됐지만… 니가 여기 취직한다는 건 내가 아니라 사장이나 부회장이 되어도 해줄수 없는 일 인 것 같다. “
“ 형… 형 정도면… 충분히.. 가능하잖아.. “
“ 임마!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낙하산이야!!! 우리 회사도 정도경영이다 인재경영이다 해서 회장님 아드님들 빼고는 모두 자기 능력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뿐이야.. 게다가 대한민국 최고 인재들만 선발하는 회사라구.. 게다가 형은 법조인이다. 나보고 불법을 하라고? 이자식이.. 정신 못 차리고.. 형이 돈 줄 테니까.. 그거나 가지구 가 임마! “
“ 형…………. “
진욱은 그렇게 아무성과도 없이 형에게 차가운 거절을 당하고는 손에 쥐어준 10만원권 수표 2장과 함께 회사 건물을 나왔다.
진욱에게도 괜찮았던 시절이 있었다. 3년전 진욱은 아버지의 보좌관으로 국회에 특별채용되어 약 1년간 남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살았다. 아버지를 등에 업고 아무것도 없는 망나니 한명이 하는일 하나없이 풍족하게 돈을 벌고 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저녁 9시뉴스에서 국회의원 친인척들의 보좌관 특별채용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보도가 나고 나서 국회의원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하여 친인척들을 보좌관에서 모두 경질시켰다. 그리고 진욱도 덩달아 직업을 잃게 되었다.
진욱은 형에게 마저 따뜻한 말한마디 듣지 못하고 매몰차게 쫓겨나자 더 이상 세상살이에 미련이 없어졌다. 그리고 영동대교로 향했다.
없어져도 아무도 찾을 일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 진욱은 강물에 흘러 흘러 바다로 향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동대교 한가운데 수없이 많은 차들이 대교 위를 쌩쌩 달리며 지나가고 있지만 진욱을 신경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많은 군중들속에 진욱은 혼자일 뿐이었다. 차가운 대교 위의 난간을 손으로 잡았다. 이제 진욱은 세상과 작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 소녀는 나를~~~ 알기에~~~ 더~더욱~~ 슬퍼지네~~~ 노래는~~~ 점점~~ )
진욱의 바지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리고 있다. 삶의 마지막을 앞에두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이승철의 노래를 핸드폰 벨소리로 나마 듣고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귀에 대고 마지막 노래를 즐기리라…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귀에 가까이 댔다. 그런데… 벨소리가 멈췄다. 자신도 모르게 핸드폰의 통화버튼을 눌러버렸던 것이었다.
핸드폰 수화기 넘어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군지 모르겠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
기왕 이렇게 받은것인데 마지막으로 사람과 대화를 해보는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 예… 누구세요…”
( 아~~ 혹시… 이진욱씨 핸드폰 아닌가요? )
“ 예.. 맞는데요… 누구신지….? “
( 맞구나!!! 형~~ 진욱이형!!! 나야~~~ 유정훈!! )
“ 유정훈? “
( 그래!! 형… 정말 오랜만이다. 혹시나 해서 전화해봤는데 진짜구나!! )
“ 그..그래.. 반갑다… 오랜만이구나.. “
유정훈, 35세.
이진욱의 대학교 1년 후배였다. 같은 과는 아니었지만 지방에서 학교를 다니느라 하숙을 했는데 그 때 한 하숙집에서 같이 묵으며 대학시절 내내 가장 친한 관계를 맺었던 동생이었다. 아마 정훈의 결혼식때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 같았다.
이진욱은 마포로 가고 있었다. 정훈이 지금 당장이라도 보고 싶다는 말에 죽기로 결심한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정훈을 만나기 위해 가고 있는 길이었다. 정훈은 결혼 전부터 사업을 하고 있었다. 온라인 쇼핑몰을 조그맣게 하나 하고 있다고 들은적이 있었다. 아마도 마포가 사무실인 것 같았다.
정훈이 알려준 마포의 한 빌딩 5층에서 정훈을 만날수 있었다. 생각보다 큰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고, 안에 들어가보니 어림잡아도 30여명의 직원 정도가 근무하는 회사였다. 안쪽 사장실에서 나오는 정훈을 보니 어엿한 기업가의 풍모가 풍겨져 나왔다.
“ 어!! 형!! 왔어~ 조금만 기다려… 박부장님~~ “
정훈은 한쪽 파티션이 쳐진 공간으로 가서 누군가와 열심히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는 금새 다시 돌아와 진욱의 팔을 붙잡고 밖으로 나간다.
“ 형! 가자~ 지금부터 우리 못본동안 회포 좀 풀자구~ “
한껏 들뜬 모양새를 하고는 정훈은 쉴새없이 수다를 떨면서 진욱을 한 생고기집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 형.. 여기가 우리 대학 다닐 때 자주가던 그 고기집이랑 맛이 비슷해!! 어때? “
“ 그래.. 난.. 뭐. 상관없어.. 아무데나.. 들어가도.. “
진욱은 자신이 방금 전까지 세상과 이별을 하려 했다는 것을 정훈이 알아도 저런 표정을 지을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느덧 고기가 불판위에 올려지고 갖가지 안주와 반찬들.. 그리고 소주가 테이블 위에 놓인다. 정훈은 소주병을 따고 진욱의 잔에 따르면서 이야기를 끊임없이 내 뱉는다.
“ 그래.. 형은.. 요즘은 어떻게 지내? “
“ 나야.. 뭐.. 그냥… 사는거지.. “
“ 왜.. 그때.. 나 결혼식때인가 형 무슨 광고회사 다닌다고 하지않았었나? “
“ 그만둔지.. 오래됐다… 내 얘기는 말고.. 넌 어때? 와이프는 잘있고? “
“ 뭐.. 내 마누라야.. 나보다 더 바쁘지.. 게다가 요샌 정신없어.. “
“ 왜? 무슨일있어? “
“ 어… 장인어른이.. 2년전에 돌아가셨는데… 왜 내가 말안했었나? 장인어른 회사 운영한다고.. 그거 와이프가 물려받았거든… 그런데 요새 경기도 별로 안 좋고, 원청에서도 하도 조이는게 많은지 스트레스 엄청 받나봐.. “
“ 그렇구나… 애는? “
“ 아들놈이 하나 있지… 벌써 4살이네.. 맞다.. 사진 보여줄까.. 내 아들..? “
정훈이 아들 자랑을 하고 싶은지 자기 핸드폰을 꺼내 아들을 찍은 사진들을 보여준다. 별로 이쁜 얼굴은 아닌 것 같다. 사진을 여러장 넘기던 중.. 정훈의 아내와 아들이 같이 찍힌 사진이 보였다.
그래 생각났다. 정훈의 와이프..
이름이 정유나 였던가… 아무튼 정훈과는 동갑내기 커플인데 결혼식장에서 보고 심장이 멎는줄 알았었다. 얼굴은 청초하고 잡티하나 없는 맑은 피부를 가졌고, 동그란 계란형의 주먹만한 얼굴에 이쁘기까지 했다. 게다가 몸매에 얼마나 자신이 있었는지 웨딩드레스를 짧은 미니스커트 차람의 원피스형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결혼식 내내 남자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여러군데서 들렸었다. 사진을 보니 아직도 그 때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 훗… 부러운 자식… )
“ 형.. 뭐해? 멍하니 정신놓고..? “
“ 어..어..? 아니..아니야. 아무것도.. “
“ 가만보니까 형 좀 이상하다… 무슨 고민이라도 크게 있는 것 같은데..? “
“ 아니다.. 아무것도.. “
“ 말해봐… 뭔데? 내가 누구야!!! 유정훈이야!! 우리 진욱형이 고민이 있다는데 내가 모른채 할순 없잖아!! “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정훈한테 부탁해 볼만도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정훈아… “
“ 그래! 말해봐.. 뭔데!! “
“ 사실… 나.. 백수다… “
“ 그래? 어쩌다가.. 형은 뭘 해도 정말 잘할텐데!! “
“ 그렇지? 난 뭘해도 다 잘할수 있겠지? “
“ 그럼!! 당연하지!! “
“ 그래서.. 말인데.. 나 취직 좀 시켜주면 안될까? “
“ 취직? … 어디.. 생각해 놓은데라도 있어? “
“ 마음 같아선 너하고 같이 일하고 싶지만… 아는 사람하고 일하는 건 서로 좀 그럴꺼같고, 너희 와이프 회사에 어떻게 좀 안되겠냐? “
“ 뭐… 우리.. 마누라.. 회사..? “
정훈이 갑작스러운 진욱의 부탁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히 들어나기 시작했다.
“ 형… 그게… 나도 형 부탁 충분히 이해하고 들어주고 싶지만.. 요새 우리 와이프 회사도 많이 힘들어서.. 사람 충원하기가… 게다가 우리 회사도 지금 인원이 많아서 몇 명 짜르려고 생각중인데.. 어떻게 하지.. 형 부탁인데… “
“ 아니다.. 됐다… “
진욱은 혹시나 했던 마음으로 정훈에게 부탁을 해봤지만, 역시나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 그럼.. 그렇지.. 나 같은 놈이 무슨…. )
진욱은 자신의 한심한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라 테이블 위에 있던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술을 시켜 병 채로 다시 몇 병을 마셔버렸다.
정신은 오락가락하고,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모를 신세한탄을 앞사람에게 열심히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진욱의 눈에 정훈의 모습이 한순간 뚜렷이 보여왔다.
“ 야!! 유정훈!! 됐다!! 치사하구나!!! 너한테 취칙 부탁같은거 안해도 돼!! 내 팔자가 누구한테 도움받고 살 팔자가 아닌건 예전부터 알았다!! 야!! 나간다!! 앞으로 보지말자!! 잘있어라!! 유정훈!! “
취기에 진욱은 생각없는 말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내뱉고는 뒤뚱거리는 발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곧 실신하듯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진욱이 눈을 떴다. 창문을 통해서 따가운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눈을 부시게 한다.
진욱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펴고 둘러본 곳은 한번도 본 기억이 없는 낯선 방이었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리는 심하게 아프고, 오직 기억이 나는건 정훈과의 술자리에서 취직부탁을 하고 거절당해 술을 좀 많이 마셨다는 것 뿐이었다. 그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형.. 일어났구나! “
“ 어…. 정훈아… 여기가… 그럼.. 혹시.. “
“ 그래.. 우리집이야.. 어젯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몸도 못 가누길래.. 내가 데려왔어.. “
“ 힘들었겠구나.. 미안하다.. “
“ 미안하긴.. 뭘…. 아~ 여보!! 우리 선배님 일어나셨어~~ 해장국 좀 차려줘!! “
“ 네~ 알았어요~ “
진욱이 고개를 돌려 주방을 보니 그 곳에 정훈의 와이프.. 유나가 있었다. 진욱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듣자 유정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인사를 하러 주방 바깥으로 나온다.
“ 안녕하세요~~ 잘 주무셨어요~~? 불편하진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
“ 아…..아뇨… 별말씀을… 전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잘 잔게 아닌지 오히려 죄송하네요.. 밤늦게 쳐들어왔을텐데… “
“ 후훗… 아니예요.. 괜찮아요.. 식사 금방 준비해 드릴께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
유나는 인사를 하고는 다시 주방 안쪽으로 사라졌다. 진욱은 정훈이 앉아있는 쇼파 쪽으로 가서 정훈 옆에 앉는다.
“ 어제.. 나 별일없었지? “
“ 아무일 없었어.. 형… , 형.. 술 좀 줄여야겠다. 무슨 술을 그렇게 한번에 먹어.. “
“ 미안하다… 내가.. “
“ 미안하긴.. 내가 오히려 미안해.. 형 어렵게 얘기했을텐데~ “
“ …… “
주방에서 정훈의 아내가 식사를 하라고 손짓을 해온다.
“ 형.. 우선. .밥 먹자! “
주방 식탁에 3명이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어젯밤 무리하게 술을 먹었다고, 식사는 고추가루가 듬뿍 들은 콩나물국에 각 종 신선한 채소들로 상이 차려졌다. 오랜만에 맛있는 밥을 먹는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고 커피를 내와 세 명은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 형… 집에 와서 우리 와이프랑 이야기 해봤어.. 형.. 다음주 월요일부터 와이프 회사로 출근해! “
“ 무…..뭐…? “
“ 형이 와이프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 우선은 영업파트로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하는데.. 괜찮겠어? “
“ 저….정말이냐? 그.. 그럼.. 괜찮구말구!!! 정말.. 정말 고맙다.. 정훈아!! 제수씨.. 감사합니다.. “
“ 흐흐.. 형.. 다음주부터 출근하면 제수씨가 아니라.. 사장님이야… 정유나사장님!! 어떡한데.. 하하 “
“ 지금 당장이라도 불러드려야지.. 정유나 사장님!! “
“ 호호호~ 그러지 마세요… 아직 출근 하신것도 아니고 출근하면 우선 좀 고생하실 것 같아서 걱정되요.. “
“ 열심히 하겠습니다. “
진욱은 그렇게 유정훈의 도움으로 3년만에 재취업을 하게 되었다. 어제만해도 한강에서 뛰어내릴 생각으로 삶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하루만에 희망의 빛이 보이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진욱은 정훈의 아내가 운영하는 회사로 출근을 했다.
안양시의 한 공단단지내에 위치한 회사는 [ 국제산업 ] 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었고 정문에서 안쪽으로 제조시설 건물을 지나 사무용 건물인 4층짜리 오피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에게 사장실의 위치를 물어 오피스 2층에 위치한 사장실로 들어갔다.
사장실 안에는 30대 남성과 젊은 여직원 한명이 따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비서인듯한 남자가 진욱에게로 다가왔다.
“ 혹시 이진욱씨 되십니까? “
“ 예.. 그런데요.. “
“ 사장님께 말씀들었습니다. 오늘 새로 출근하신다고요.. “
“ 네… “
“ 우선 지금 사장님이 출타중이셔서 제가 근무할 부서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죠.. “
그 남성을 따라서 4층으로 올라간다. 4층에는 두 개의 문이 있었고, 한쪽 문에 [영업본부]라는 푯말이 붙어있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 한 남성에게 진욱을 인계하고는 비서가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인수를 받은 남자가 진욱에게 다가왔다.
“ 반가워요.. 난 양승호 부장이라고 합니다. 같이 열심히 일해봅시다. “
“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
진욱은 자신의 자리를 안내 받고 책상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갈때까지 사무실안에서 진욱이 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진욱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은 쉴새없이 바쁜듯 아무도 진욱에 대해 신경을 써주는 사람이 없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그리고 아까 그 양부장이 진욱에게 다가와 같이 점심을 하러 가자고 이야기하고는 사무실 밖으로 나간다. 진욱은 뻘줌한 모양새로 부장의 뒤를 따라 나갔다.
회사 근처에 있는 순대국집에 들어간 부장은 음식을 시키고는 진욱을 멀끄러미 쳐다본다.
“ 그래.. 여기 오기전에는 무슨일을 했어요? “
“ 예? … 아.. 네.. 이것저것… 광고업체에서도 일해보고, 국회의원 보좌관도.. 해보고.. “
“ 국회의원 보좌관? 어~ 대단한데… 그래.. 어느 국회의원 밑에서? “
“ 아… 네… 이만호의원님… “
“ 민주한국당 원내의원이신 그 분..? “
“ 예… “
“ 그렇군… 경력이 좋으니 기대가 되네.. 하하하.. 열심히 해보자구.. “
“ …… “
“ 뭐 회사에 대해 궁금한 것 있나? “
“ 아니.. 뭐.. 별로…. 아니.. 그게… 그.. 중간에 있는 본부장님 자리가 비어있던데..? “
“ 아.. 본부장님! 오늘은 회사 안나오시는 날이야.. 고객사에 가 있지.. “
“ 아.. 그렇군요.. “
“ 김본부장님이 그래도 이바닥에서는 꽤 입지전적인 인물이야.. 대단하신분이지… “
그냥.. 물어볼말이 없어서.. 대충 물어본 말인데.. 부장은 꽤나 열심히 그 본부장에 대해 설명을 한다. 거기다 추가적인 다른 이야기까지..
김남진 영업본부장, 직급은 상무 , 올해 나이가 50이 되었다고 한다. 전 사장인 유나씨의 아버지가 창업을 하실때부터 같이 근무한 창업멤버이며, 국내 굴지의 자동차 회사인 H모터스와 K모터스의 자동차 내장 부품들을 독점 공급하는 영업력을 발휘하여 전임사장님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다가 5년전 전임사장과의 마찰로 회사를 나가 따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을 하던 중 전임사장이 죽고 고객사인 H모터스의 공급물량이 50%까지 감소하면서 회사운영이 어려워지자 긴급하게 다시 회사로 모셔왔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일주일에 3일은 H모터스와 K모터스로 아얘 출근을 하여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다고 하였다.
불과 5년전만해도 독점 공급하며 잘나가던 국제산업은 신생업체 2곳의 미려한 디자인의 내장제 생산과 파격적인 파격할인으로 조금씩 시장이 잠식당하기 시작했고, 자동차 3,4위 업체인 D모터스와 S모터스에 물품을 공급하던 회사까지 H모터스에 물품을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전쟁구도로 바뀌어져 있었다. 게다가 철옹성이라고 생각했던 K모터스까지도 단일기업에 물품구매하는것에 대한 반대여론이 많아 조만간 경쟁을 시작해야 할 판이라고 했다.
부장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지만 진욱은 자신에게는 웬지 상관없는 동떨어진 이야기로 들렸다. 그냥 남의 이야기를 듣는듯 편안한 마음으로 부장의 이야기를 듣다가 식사를 마쳤다.
오후에 대표이사 면담이 있다고 준비하라는 말로 부장과의 식사가 마무리되었고, 오후 3시쯤되어서 사장실로 다시 올라가 정유나를 볼수 있었다.
“ 진욱씨… 아니.. 이젠 이진욱과장님이라고 해야겠죠.. 정말 잘 부탁드려요… “
“ 아닙니다. 이 은혜 잊지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장님.. “
“ 훗.. 뭐.. 반나절정도 계셨는데 불편하신건 없으셨구요? “
“ 예.. 괜찮습니다. “
“ 알겠어요.. 잘부탁드리고, 우리 자주 뵙고 좋은 얘기 나눠요.. 나가보셔도 되요.. “
“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장님.. 그럼 이만.. “
정유나와의 짧은 만남의 자리.. 진욱에게 정말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라고는 있지 않았다. 오직 말로만 그 순간을 모면하면 그만일뿐.. 사장실 탁자에 앉아 이야기를 하는 동안 진욱의 시선은 간간히 정유나의 무릎을 향해 있었다.
짧은 미니스커트를 즐기는 지 오늘도 여전히 허벅지를 반 정도 내놓을 정도로 짧은 치마의 투피스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앉아있어 ‘ㄱ’자로 꺾어져 있는 다리의 곡선이 정말 매끄럽고 아름다웠다.
진욱이 아닌 다른 누가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렇게 진욱의 회사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역시나 입으로만 표현했던 의지의 말이었는지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은 온데간데 없고, 3개월이라는 시간동안 진욱은 그냥 대충 하루하루를 때우고 있었다. 고객사에서 전화가 오기전까진 먼저 전화를 하지도 않았고, 오라는 말이 없으면 가지도 않았다. 사무실에 앉아 눈치가 보일땐 밖에 나가 게임방에서 하루를 보내거나 가끔 아는 사람과 당구장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행동이 그렇게 되자 회사내 누구와도 친해지기도 어려웠다. 회사사람들이 진욱을 보는 눈초리도 곱지 않아 보였고, 진욱도 그런 눈길을 받고 있는걸 알기에 더욱 더 혼자가 되었다.
외부에 나갔다가 사무실로 복귀하여 계단을 오르는데 앞에 정훈의 모습이 보였다.
부르려는데 이미 사장실로 들어가 버려 어쩔수 없이 사장실 앞으로 다가갔다. 2층에 가보니 사장실이 아닌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 직원 휴게실에 정훈과 유나 둘이 앉아 있었다.
개방된 통로에 위치한 휴게실은 코너 바깥쪽에서 들어도 대화소리가 다 들리고 있어, 혹시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생각한 진욱은 통로 주변에 몸을 숨기고 대화소리를 엿들었다.
혹시나 했던 것이 역시나 진욱의 이야기중이었다.
“ 왜.. 오라구 한거야.. 나도 바쁜데… “
“ 자기야… 나 정말 미치겠어.. 당신 선배 좀 어떻게 해줘.. “
“ 왜? 무슨일인데? “
“ 영업부 직원들이 당신 선배 도데체 왜 채용한거냐고.. 말이 너무 많아… 일도 할줄 모르고, 하지도 않고…. “
“ 그래…. 아직 얼마 안되서 그렇겠지.. 뭐.. “
“ 그것뿐이면 말도 안해… 벌써 고객 미팅을 세번이나 펑크내고.. 그 중에 한번은 고객이 요구한 자료가 있었는데 그것도 안가져다 줬나봐.. 영업본부장이 고객들 달래느라고 힘들었다고 나한테 쪼아대는데 나 미칠 것 같아.. 정말… “
“ 미안하다… 내가 괜한 부탁을 해서.. 니가 많이 힘든가보네… 내가 선배 만나서 잘 이야기 해볼께.. 조금만 이해해줘.. 유나야.. “
“ 몰라~~ 정말… “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진욱은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정훈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자신을 믿고 채용하여 준 정훈에게 보답은 못할 망정 피해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아니다. 열이 받았다. 그래도 남편의 선배인 자신에게 난장이똥자루 취급하듯 말하는 정유나에 대해 화가났다.
진욱은 두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채.. 아픈 머리를 감싸고 집으로 항했다. 앞날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스스로 사표를 내고 싶지도 않았다.
( 어떻게 되도 되겠지.. 뭐… )
다음날, 회사에 출근한 진욱은 양부장의 지시로 K모터스로 향했다. 구매사업부장의 호출이라고 했고, 잘 듣고와서 전달만 해달라는 지시였다.
K모터스 구매부장을 만난 진욱은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대기업의 임원급 인사라는 사람의 행색이며 얼굴형태가 꼭 조폭두목 같은 모양새였다.
“ 아~ 국제산업에서 왔는가? 어쩐일로 생전 처음보는 사람을 혼자 보낸거야.. 이젠 아주 막가자는 모양이네.. “
처음부터 반말로 인상을 쓰며 말을 하는 부장이란 놈이 더 역겹게 느껴졌다.
“ 처음.. 뵙겠습니다. 이진욱과장이라고 합니다. “
“ 아~ 이과장!! 그래.. 소문은 들었네.. 정사장 빽으로 들어왔다면서? “
“ 네? … 아니.. 그게.. “
“ 하하하.. 정사장 사람이라 그런지 생긴게 시원시원 하구만.. 난 김강한일세… 거기도 아주 강하지.. 하하하 “
( 미친놈… 똘아이새끼… )
“ 그래.. 정사장이랑은 무슨 관계인가? “
김강한 부장이 어느새 반색을 하며 진욱에게 너스레를 떨며 물어오고 있었다.
“ 그게.. 별로..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
후배의 아내라고 굳이 말할 필요성을 못 느껴 그냥 별관계 없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부장의 표정이 다시 굳어진다.
“ 에..에헴.. 그래… 뭐… 그렇군… 아~ 그건 그거고… 자 이거 받아! “
“ 이게.. 뭡니까..? “
부장이 탁자옆에 놓여있던 묵직한 서류봉투를 건낸다.
“ 이번에.. 우리 오피우스랑 돌체랑 내년도 생산분부터 내장인테리어를 완전히 변경해서 출시할꺼야.. 그거 우리 디자인연구소에서 만든 설계도하고 디자인 시안이니까.. 그거 가지고 가서 똑 같은 시제품으로 만들어와.. 기간은 딱 3개월 못가져오면 내년도 생산분부터는 국제산업에서 납품 못하니까 그런줄 알라고… “
진욱은 구매사업부장의 말과 서류를 그대로 회사로 돌아와 전달을 하였고, 그 날 국제산업은 초비상사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 다음편으로.. ]
이진욱 36세.
벌써 인생의 절반을 살아왔지만 그는 지금 사회적으로 바닥인생을 보내고 있다. 벌써 무직으로 보낸 시간이 3년, 그나마 그 이전에도 변변한 직장 한곳을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직 결혼도 하지 못한채 궁상맞은 독신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진욱의 가족은 아버지와 위로 형만 세명이 있다. 유일하게 진욱을 아끼고 보살펴주던 어머니는 진욱이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다. 아마도 진욱이 인생의 끈을 놓고 허망한 시간을 보내게 된건 그 때부터 인 것 같았다.
진욱의 가족들은 진욱을 무시하고 차갑게 대한다. 자신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오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욱의 아버지 이만호(72세)는 국회의원이었다. 제1야당의 원내대표로써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될만큼 정계에서는 큰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 큰 형인 이진구(44세)와 셋째 형 이진수(39세)는 행정관료로 지식경제부 기조실장과 중소기업청 기업금융지원과장으로 근무중이다. 현재 야당당수를 아버지로 두어 숨을 죽이고 있지만 정권이 바뀌면 차기 장관감으로 유력한 인사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둘째 형, 이진표(42세)는 국내최대의 전자회사인 상상전자의 법무실 Risk대응팀장으로 근무중이었다. 사시를 패스하고 검찰에 근무시 스타검사로 이름을 날렸고, 검사복을 벗을때 여러 로펌에서 구애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상상전자에서 파격적인 대우로 스카우트 되었다. 둘째형 또한 후일 법무장관 자리가 유력한 사람이었다.
이런 명문가에 진욱같이 한심한 인간이 태어났으니 내놓은 자식 취급할 만도 했다. 진욱도 처음부터 이렇게 한심한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 중학교를 올라가기 전까지는 천재소리를 들었다. 하나를 알면 열을 깨우치는 남다른 비범함이 있어, 후일 큰일을 할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진욱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열정과 끈기..가 전혀 뒷받침이 되지 않았다. 매사에 의욕이 없고, 무엇을 해도 몇 번을 하고나면 더 이상 하고싶지 않아했다.
오죽이면 아버지 이만호가 자신의 자식이 아닌 것 같다며, 누구의 자식이냐고 어머니와 싸우고, 친자검사까지 했을 정도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지병으로 세상을 뜰 때 마지막으로 했던 유언이 ‘우리 진욱이.. 불쌍해서.. 어떻게…해.. ‘ 였었다.
그런 이진욱이 오늘 둘째형 이진표를 찾아가고 있었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초고층 빌딩으로 거대하게 들어서있는 상상전자 건물을 보자 진욱은 자신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형에게 전화는 하고 찾아가는 길이지만, 형을 만나는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1층 로비에 들어서 안내데스크에서 형을 찾아왔다고 이야기하자 안내직원이 전화로 방문자 정보를 확인을 하고 방문증을 주며 20층으로 가라고 안내를 했다.
20층은 모두 법무실 직원이 사용하는 층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형이 있는 방을 확인하고 노크를 했다.
“ 들어오세요~ “
문을 열고 형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섰다. 개인방을 사용중이었고,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던 형이 진욱을 보고는 응접테이블쪽으로 안내하고 서로 자리에 앉았다.
“ 그래.. 무슨일로 여기까지 온거냐? “
“ 형… 오랜만에.. 보네.. 잘 지내지… “
“ 니가 지금 누구 걱정할 놈이냐.. 너 자신이나 좀 어떻게 해봐라. “
“ 그래… 맞아.. 내가 문제지… 그래서… 형한테 좀 미안하지만.. 부탁 좀 해보려고.. “
“ 무슨 부탁? 돈이 필요해? “
“ 아니.. 돈 말고…… 직업이….. “
“ 내가 무슨 직업소개소 사장이냐… 내가 너 직업을 어떻게 소개해주냐. “
“ 나.. 여기.. 형네.. 회사 좀 어떻게 안될까…? 정말!!! 정말 열심히 할께!! 형… “
이진표는 진욱의 말을 듣고는 탁자위에 올려져 있던 장식물의 뚜껑을 열고 들어있는 담배를 들어 물고는 불을 붙였다…
“ 후우~~~ 진욱아… “
“ 응…. 형… “
“ 안됐지만… 니가 여기 취직한다는 건 내가 아니라 사장이나 부회장이 되어도 해줄수 없는 일 인 것 같다. “
“ 형… 형 정도면… 충분히.. 가능하잖아.. “
“ 임마!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낙하산이야!!! 우리 회사도 정도경영이다 인재경영이다 해서 회장님 아드님들 빼고는 모두 자기 능력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뿐이야.. 게다가 대한민국 최고 인재들만 선발하는 회사라구.. 게다가 형은 법조인이다. 나보고 불법을 하라고? 이자식이.. 정신 못 차리고.. 형이 돈 줄 테니까.. 그거나 가지구 가 임마! “
“ 형…………. “
진욱은 그렇게 아무성과도 없이 형에게 차가운 거절을 당하고는 손에 쥐어준 10만원권 수표 2장과 함께 회사 건물을 나왔다.
진욱에게도 괜찮았던 시절이 있었다. 3년전 진욱은 아버지의 보좌관으로 국회에 특별채용되어 약 1년간 남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살았다. 아버지를 등에 업고 아무것도 없는 망나니 한명이 하는일 하나없이 풍족하게 돈을 벌고 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저녁 9시뉴스에서 국회의원 친인척들의 보좌관 특별채용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보도가 나고 나서 국회의원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하여 친인척들을 보좌관에서 모두 경질시켰다. 그리고 진욱도 덩달아 직업을 잃게 되었다.
진욱은 형에게 마저 따뜻한 말한마디 듣지 못하고 매몰차게 쫓겨나자 더 이상 세상살이에 미련이 없어졌다. 그리고 영동대교로 향했다.
없어져도 아무도 찾을 일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 진욱은 강물에 흘러 흘러 바다로 향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동대교 한가운데 수없이 많은 차들이 대교 위를 쌩쌩 달리며 지나가고 있지만 진욱을 신경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많은 군중들속에 진욱은 혼자일 뿐이었다. 차가운 대교 위의 난간을 손으로 잡았다. 이제 진욱은 세상과 작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 소녀는 나를~~~ 알기에~~~ 더~더욱~~ 슬퍼지네~~~ 노래는~~~ 점점~~ )
진욱의 바지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리고 있다. 삶의 마지막을 앞에두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이승철의 노래를 핸드폰 벨소리로 나마 듣고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귀에 대고 마지막 노래를 즐기리라…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귀에 가까이 댔다. 그런데… 벨소리가 멈췄다. 자신도 모르게 핸드폰의 통화버튼을 눌러버렸던 것이었다.
핸드폰 수화기 넘어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군지 모르겠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
기왕 이렇게 받은것인데 마지막으로 사람과 대화를 해보는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 예… 누구세요…”
( 아~~ 혹시… 이진욱씨 핸드폰 아닌가요? )
“ 예.. 맞는데요… 누구신지….? “
( 맞구나!!! 형~~ 진욱이형!!! 나야~~~ 유정훈!! )
“ 유정훈? “
( 그래!! 형… 정말 오랜만이다. 혹시나 해서 전화해봤는데 진짜구나!! )
“ 그..그래.. 반갑다… 오랜만이구나.. “
유정훈, 35세.
이진욱의 대학교 1년 후배였다. 같은 과는 아니었지만 지방에서 학교를 다니느라 하숙을 했는데 그 때 한 하숙집에서 같이 묵으며 대학시절 내내 가장 친한 관계를 맺었던 동생이었다. 아마 정훈의 결혼식때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 같았다.
이진욱은 마포로 가고 있었다. 정훈이 지금 당장이라도 보고 싶다는 말에 죽기로 결심한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정훈을 만나기 위해 가고 있는 길이었다. 정훈은 결혼 전부터 사업을 하고 있었다. 온라인 쇼핑몰을 조그맣게 하나 하고 있다고 들은적이 있었다. 아마도 마포가 사무실인 것 같았다.
정훈이 알려준 마포의 한 빌딩 5층에서 정훈을 만날수 있었다. 생각보다 큰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고, 안에 들어가보니 어림잡아도 30여명의 직원 정도가 근무하는 회사였다. 안쪽 사장실에서 나오는 정훈을 보니 어엿한 기업가의 풍모가 풍겨져 나왔다.
“ 어!! 형!! 왔어~ 조금만 기다려… 박부장님~~ “
정훈은 한쪽 파티션이 쳐진 공간으로 가서 누군가와 열심히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는 금새 다시 돌아와 진욱의 팔을 붙잡고 밖으로 나간다.
“ 형! 가자~ 지금부터 우리 못본동안 회포 좀 풀자구~ “
한껏 들뜬 모양새를 하고는 정훈은 쉴새없이 수다를 떨면서 진욱을 한 생고기집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 형.. 여기가 우리 대학 다닐 때 자주가던 그 고기집이랑 맛이 비슷해!! 어때? “
“ 그래.. 난.. 뭐. 상관없어.. 아무데나.. 들어가도.. “
진욱은 자신이 방금 전까지 세상과 이별을 하려 했다는 것을 정훈이 알아도 저런 표정을 지을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느덧 고기가 불판위에 올려지고 갖가지 안주와 반찬들.. 그리고 소주가 테이블 위에 놓인다. 정훈은 소주병을 따고 진욱의 잔에 따르면서 이야기를 끊임없이 내 뱉는다.
“ 그래.. 형은.. 요즘은 어떻게 지내? “
“ 나야.. 뭐.. 그냥… 사는거지.. “
“ 왜.. 그때.. 나 결혼식때인가 형 무슨 광고회사 다닌다고 하지않았었나? “
“ 그만둔지.. 오래됐다… 내 얘기는 말고.. 넌 어때? 와이프는 잘있고? “
“ 뭐.. 내 마누라야.. 나보다 더 바쁘지.. 게다가 요샌 정신없어.. “
“ 왜? 무슨일있어? “
“ 어… 장인어른이.. 2년전에 돌아가셨는데… 왜 내가 말안했었나? 장인어른 회사 운영한다고.. 그거 와이프가 물려받았거든… 그런데 요새 경기도 별로 안 좋고, 원청에서도 하도 조이는게 많은지 스트레스 엄청 받나봐.. “
“ 그렇구나… 애는? “
“ 아들놈이 하나 있지… 벌써 4살이네.. 맞다.. 사진 보여줄까.. 내 아들..? “
정훈이 아들 자랑을 하고 싶은지 자기 핸드폰을 꺼내 아들을 찍은 사진들을 보여준다. 별로 이쁜 얼굴은 아닌 것 같다. 사진을 여러장 넘기던 중.. 정훈의 아내와 아들이 같이 찍힌 사진이 보였다.
그래 생각났다. 정훈의 와이프..
이름이 정유나 였던가… 아무튼 정훈과는 동갑내기 커플인데 결혼식장에서 보고 심장이 멎는줄 알았었다. 얼굴은 청초하고 잡티하나 없는 맑은 피부를 가졌고, 동그란 계란형의 주먹만한 얼굴에 이쁘기까지 했다. 게다가 몸매에 얼마나 자신이 있었는지 웨딩드레스를 짧은 미니스커트 차람의 원피스형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결혼식 내내 남자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여러군데서 들렸었다. 사진을 보니 아직도 그 때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 훗… 부러운 자식… )
“ 형.. 뭐해? 멍하니 정신놓고..? “
“ 어..어..? 아니..아니야. 아무것도.. “
“ 가만보니까 형 좀 이상하다… 무슨 고민이라도 크게 있는 것 같은데..? “
“ 아니다.. 아무것도.. “
“ 말해봐… 뭔데? 내가 누구야!!! 유정훈이야!! 우리 진욱형이 고민이 있다는데 내가 모른채 할순 없잖아!! “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정훈한테 부탁해 볼만도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정훈아… “
“ 그래! 말해봐.. 뭔데!! “
“ 사실… 나.. 백수다… “
“ 그래? 어쩌다가.. 형은 뭘 해도 정말 잘할텐데!! “
“ 그렇지? 난 뭘해도 다 잘할수 있겠지? “
“ 그럼!! 당연하지!! “
“ 그래서.. 말인데.. 나 취직 좀 시켜주면 안될까? “
“ 취직? … 어디.. 생각해 놓은데라도 있어? “
“ 마음 같아선 너하고 같이 일하고 싶지만… 아는 사람하고 일하는 건 서로 좀 그럴꺼같고, 너희 와이프 회사에 어떻게 좀 안되겠냐? “
“ 뭐… 우리.. 마누라.. 회사..? “
정훈이 갑작스러운 진욱의 부탁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히 들어나기 시작했다.
“ 형… 그게… 나도 형 부탁 충분히 이해하고 들어주고 싶지만.. 요새 우리 와이프 회사도 많이 힘들어서.. 사람 충원하기가… 게다가 우리 회사도 지금 인원이 많아서 몇 명 짜르려고 생각중인데.. 어떻게 하지.. 형 부탁인데… “
“ 아니다.. 됐다… “
진욱은 혹시나 했던 마음으로 정훈에게 부탁을 해봤지만, 역시나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 그럼.. 그렇지.. 나 같은 놈이 무슨…. )
진욱은 자신의 한심한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라 테이블 위에 있던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술을 시켜 병 채로 다시 몇 병을 마셔버렸다.
정신은 오락가락하고,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모를 신세한탄을 앞사람에게 열심히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진욱의 눈에 정훈의 모습이 한순간 뚜렷이 보여왔다.
“ 야!! 유정훈!! 됐다!! 치사하구나!!! 너한테 취칙 부탁같은거 안해도 돼!! 내 팔자가 누구한테 도움받고 살 팔자가 아닌건 예전부터 알았다!! 야!! 나간다!! 앞으로 보지말자!! 잘있어라!! 유정훈!! “
취기에 진욱은 생각없는 말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내뱉고는 뒤뚱거리는 발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곧 실신하듯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진욱이 눈을 떴다. 창문을 통해서 따가운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눈을 부시게 한다.
진욱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펴고 둘러본 곳은 한번도 본 기억이 없는 낯선 방이었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리는 심하게 아프고, 오직 기억이 나는건 정훈과의 술자리에서 취직부탁을 하고 거절당해 술을 좀 많이 마셨다는 것 뿐이었다. 그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형.. 일어났구나! “
“ 어…. 정훈아… 여기가… 그럼.. 혹시.. “
“ 그래.. 우리집이야.. 어젯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몸도 못 가누길래.. 내가 데려왔어.. “
“ 힘들었겠구나.. 미안하다.. “
“ 미안하긴.. 뭘…. 아~ 여보!! 우리 선배님 일어나셨어~~ 해장국 좀 차려줘!! “
“ 네~ 알았어요~ “
진욱이 고개를 돌려 주방을 보니 그 곳에 정훈의 와이프.. 유나가 있었다. 진욱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듣자 유정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인사를 하러 주방 바깥으로 나온다.
“ 안녕하세요~~ 잘 주무셨어요~~? 불편하진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
“ 아…..아뇨… 별말씀을… 전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잘 잔게 아닌지 오히려 죄송하네요.. 밤늦게 쳐들어왔을텐데… “
“ 후훗… 아니예요.. 괜찮아요.. 식사 금방 준비해 드릴께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
유나는 인사를 하고는 다시 주방 안쪽으로 사라졌다. 진욱은 정훈이 앉아있는 쇼파 쪽으로 가서 정훈 옆에 앉는다.
“ 어제.. 나 별일없었지? “
“ 아무일 없었어.. 형… , 형.. 술 좀 줄여야겠다. 무슨 술을 그렇게 한번에 먹어.. “
“ 미안하다… 내가.. “
“ 미안하긴.. 내가 오히려 미안해.. 형 어렵게 얘기했을텐데~ “
“ …… “
주방에서 정훈의 아내가 식사를 하라고 손짓을 해온다.
“ 형.. 우선. .밥 먹자! “
주방 식탁에 3명이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어젯밤 무리하게 술을 먹었다고, 식사는 고추가루가 듬뿍 들은 콩나물국에 각 종 신선한 채소들로 상이 차려졌다. 오랜만에 맛있는 밥을 먹는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고 커피를 내와 세 명은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 형… 집에 와서 우리 와이프랑 이야기 해봤어.. 형.. 다음주 월요일부터 와이프 회사로 출근해! “
“ 무…..뭐…? “
“ 형이 와이프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 우선은 영업파트로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하는데.. 괜찮겠어? “
“ 저….정말이냐? 그.. 그럼.. 괜찮구말구!!! 정말.. 정말 고맙다.. 정훈아!! 제수씨.. 감사합니다.. “
“ 흐흐.. 형.. 다음주부터 출근하면 제수씨가 아니라.. 사장님이야… 정유나사장님!! 어떡한데.. 하하 “
“ 지금 당장이라도 불러드려야지.. 정유나 사장님!! “
“ 호호호~ 그러지 마세요… 아직 출근 하신것도 아니고 출근하면 우선 좀 고생하실 것 같아서 걱정되요.. “
“ 열심히 하겠습니다. “
진욱은 그렇게 유정훈의 도움으로 3년만에 재취업을 하게 되었다. 어제만해도 한강에서 뛰어내릴 생각으로 삶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하루만에 희망의 빛이 보이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진욱은 정훈의 아내가 운영하는 회사로 출근을 했다.
안양시의 한 공단단지내에 위치한 회사는 [ 국제산업 ] 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었고 정문에서 안쪽으로 제조시설 건물을 지나 사무용 건물인 4층짜리 오피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에게 사장실의 위치를 물어 오피스 2층에 위치한 사장실로 들어갔다.
사장실 안에는 30대 남성과 젊은 여직원 한명이 따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비서인듯한 남자가 진욱에게로 다가왔다.
“ 혹시 이진욱씨 되십니까? “
“ 예.. 그런데요.. “
“ 사장님께 말씀들었습니다. 오늘 새로 출근하신다고요.. “
“ 네… “
“ 우선 지금 사장님이 출타중이셔서 제가 근무할 부서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죠.. “
그 남성을 따라서 4층으로 올라간다. 4층에는 두 개의 문이 있었고, 한쪽 문에 [영업본부]라는 푯말이 붙어있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 한 남성에게 진욱을 인계하고는 비서가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인수를 받은 남자가 진욱에게 다가왔다.
“ 반가워요.. 난 양승호 부장이라고 합니다. 같이 열심히 일해봅시다. “
“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
진욱은 자신의 자리를 안내 받고 책상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갈때까지 사무실안에서 진욱이 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진욱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은 쉴새없이 바쁜듯 아무도 진욱에 대해 신경을 써주는 사람이 없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그리고 아까 그 양부장이 진욱에게 다가와 같이 점심을 하러 가자고 이야기하고는 사무실 밖으로 나간다. 진욱은 뻘줌한 모양새로 부장의 뒤를 따라 나갔다.
회사 근처에 있는 순대국집에 들어간 부장은 음식을 시키고는 진욱을 멀끄러미 쳐다본다.
“ 그래.. 여기 오기전에는 무슨일을 했어요? “
“ 예? … 아.. 네.. 이것저것… 광고업체에서도 일해보고, 국회의원 보좌관도.. 해보고.. “
“ 국회의원 보좌관? 어~ 대단한데… 그래.. 어느 국회의원 밑에서? “
“ 아… 네… 이만호의원님… “
“ 민주한국당 원내의원이신 그 분..? “
“ 예… “
“ 그렇군… 경력이 좋으니 기대가 되네.. 하하하.. 열심히 해보자구.. “
“ …… “
“ 뭐 회사에 대해 궁금한 것 있나? “
“ 아니.. 뭐.. 별로…. 아니.. 그게… 그.. 중간에 있는 본부장님 자리가 비어있던데..? “
“ 아.. 본부장님! 오늘은 회사 안나오시는 날이야.. 고객사에 가 있지.. “
“ 아.. 그렇군요.. “
“ 김본부장님이 그래도 이바닥에서는 꽤 입지전적인 인물이야.. 대단하신분이지… “
그냥.. 물어볼말이 없어서.. 대충 물어본 말인데.. 부장은 꽤나 열심히 그 본부장에 대해 설명을 한다. 거기다 추가적인 다른 이야기까지..
김남진 영업본부장, 직급은 상무 , 올해 나이가 50이 되었다고 한다. 전 사장인 유나씨의 아버지가 창업을 하실때부터 같이 근무한 창업멤버이며, 국내 굴지의 자동차 회사인 H모터스와 K모터스의 자동차 내장 부품들을 독점 공급하는 영업력을 발휘하여 전임사장님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다가 5년전 전임사장과의 마찰로 회사를 나가 따로 사업체를 차려 운영을 하던 중 전임사장이 죽고 고객사인 H모터스의 공급물량이 50%까지 감소하면서 회사운영이 어려워지자 긴급하게 다시 회사로 모셔왔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일주일에 3일은 H모터스와 K모터스로 아얘 출근을 하여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다고 하였다.
불과 5년전만해도 독점 공급하며 잘나가던 국제산업은 신생업체 2곳의 미려한 디자인의 내장제 생산과 파격적인 파격할인으로 조금씩 시장이 잠식당하기 시작했고, 자동차 3,4위 업체인 D모터스와 S모터스에 물품을 공급하던 회사까지 H모터스에 물품을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전쟁구도로 바뀌어져 있었다. 게다가 철옹성이라고 생각했던 K모터스까지도 단일기업에 물품구매하는것에 대한 반대여론이 많아 조만간 경쟁을 시작해야 할 판이라고 했다.
부장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지만 진욱은 자신에게는 웬지 상관없는 동떨어진 이야기로 들렸다. 그냥 남의 이야기를 듣는듯 편안한 마음으로 부장의 이야기를 듣다가 식사를 마쳤다.
오후에 대표이사 면담이 있다고 준비하라는 말로 부장과의 식사가 마무리되었고, 오후 3시쯤되어서 사장실로 다시 올라가 정유나를 볼수 있었다.
“ 진욱씨… 아니.. 이젠 이진욱과장님이라고 해야겠죠.. 정말 잘 부탁드려요… “
“ 아닙니다. 이 은혜 잊지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장님.. “
“ 훗.. 뭐.. 반나절정도 계셨는데 불편하신건 없으셨구요? “
“ 예.. 괜찮습니다. “
“ 알겠어요.. 잘부탁드리고, 우리 자주 뵙고 좋은 얘기 나눠요.. 나가보셔도 되요.. “
“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장님.. 그럼 이만.. “
정유나와의 짧은 만남의 자리.. 진욱에게 정말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라고는 있지 않았다. 오직 말로만 그 순간을 모면하면 그만일뿐.. 사장실 탁자에 앉아 이야기를 하는 동안 진욱의 시선은 간간히 정유나의 무릎을 향해 있었다.
짧은 미니스커트를 즐기는 지 오늘도 여전히 허벅지를 반 정도 내놓을 정도로 짧은 치마의 투피스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앉아있어 ‘ㄱ’자로 꺾어져 있는 다리의 곡선이 정말 매끄럽고 아름다웠다.
진욱이 아닌 다른 누가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렇게 진욱의 회사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역시나 입으로만 표현했던 의지의 말이었는지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은 온데간데 없고, 3개월이라는 시간동안 진욱은 그냥 대충 하루하루를 때우고 있었다. 고객사에서 전화가 오기전까진 먼저 전화를 하지도 않았고, 오라는 말이 없으면 가지도 않았다. 사무실에 앉아 눈치가 보일땐 밖에 나가 게임방에서 하루를 보내거나 가끔 아는 사람과 당구장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행동이 그렇게 되자 회사내 누구와도 친해지기도 어려웠다. 회사사람들이 진욱을 보는 눈초리도 곱지 않아 보였고, 진욱도 그런 눈길을 받고 있는걸 알기에 더욱 더 혼자가 되었다.
외부에 나갔다가 사무실로 복귀하여 계단을 오르는데 앞에 정훈의 모습이 보였다.
부르려는데 이미 사장실로 들어가 버려 어쩔수 없이 사장실 앞으로 다가갔다. 2층에 가보니 사장실이 아닌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 직원 휴게실에 정훈과 유나 둘이 앉아 있었다.
개방된 통로에 위치한 휴게실은 코너 바깥쪽에서 들어도 대화소리가 다 들리고 있어, 혹시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생각한 진욱은 통로 주변에 몸을 숨기고 대화소리를 엿들었다.
혹시나 했던 것이 역시나 진욱의 이야기중이었다.
“ 왜.. 오라구 한거야.. 나도 바쁜데… “
“ 자기야… 나 정말 미치겠어.. 당신 선배 좀 어떻게 해줘.. “
“ 왜? 무슨일인데? “
“ 영업부 직원들이 당신 선배 도데체 왜 채용한거냐고.. 말이 너무 많아… 일도 할줄 모르고, 하지도 않고…. “
“ 그래…. 아직 얼마 안되서 그렇겠지.. 뭐.. “
“ 그것뿐이면 말도 안해… 벌써 고객 미팅을 세번이나 펑크내고.. 그 중에 한번은 고객이 요구한 자료가 있었는데 그것도 안가져다 줬나봐.. 영업본부장이 고객들 달래느라고 힘들었다고 나한테 쪼아대는데 나 미칠 것 같아.. 정말… “
“ 미안하다… 내가 괜한 부탁을 해서.. 니가 많이 힘든가보네… 내가 선배 만나서 잘 이야기 해볼께.. 조금만 이해해줘.. 유나야.. “
“ 몰라~~ 정말… “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진욱은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정훈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자신을 믿고 채용하여 준 정훈에게 보답은 못할 망정 피해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아니다. 열이 받았다. 그래도 남편의 선배인 자신에게 난장이똥자루 취급하듯 말하는 정유나에 대해 화가났다.
진욱은 두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채.. 아픈 머리를 감싸고 집으로 항했다. 앞날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스스로 사표를 내고 싶지도 않았다.
( 어떻게 되도 되겠지.. 뭐… )
다음날, 회사에 출근한 진욱은 양부장의 지시로 K모터스로 향했다. 구매사업부장의 호출이라고 했고, 잘 듣고와서 전달만 해달라는 지시였다.
K모터스 구매부장을 만난 진욱은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대기업의 임원급 인사라는 사람의 행색이며 얼굴형태가 꼭 조폭두목 같은 모양새였다.
“ 아~ 국제산업에서 왔는가? 어쩐일로 생전 처음보는 사람을 혼자 보낸거야.. 이젠 아주 막가자는 모양이네.. “
처음부터 반말로 인상을 쓰며 말을 하는 부장이란 놈이 더 역겹게 느껴졌다.
“ 처음.. 뵙겠습니다. 이진욱과장이라고 합니다. “
“ 아~ 이과장!! 그래.. 소문은 들었네.. 정사장 빽으로 들어왔다면서? “
“ 네? … 아니.. 그게.. “
“ 하하하.. 정사장 사람이라 그런지 생긴게 시원시원 하구만.. 난 김강한일세… 거기도 아주 강하지.. 하하하 “
( 미친놈… 똘아이새끼… )
“ 그래.. 정사장이랑은 무슨 관계인가? “
김강한 부장이 어느새 반색을 하며 진욱에게 너스레를 떨며 물어오고 있었다.
“ 그게.. 별로..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
후배의 아내라고 굳이 말할 필요성을 못 느껴 그냥 별관계 없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부장의 표정이 다시 굳어진다.
“ 에..에헴.. 그래… 뭐… 그렇군… 아~ 그건 그거고… 자 이거 받아! “
“ 이게.. 뭡니까..? “
부장이 탁자옆에 놓여있던 묵직한 서류봉투를 건낸다.
“ 이번에.. 우리 오피우스랑 돌체랑 내년도 생산분부터 내장인테리어를 완전히 변경해서 출시할꺼야.. 그거 우리 디자인연구소에서 만든 설계도하고 디자인 시안이니까.. 그거 가지고 가서 똑 같은 시제품으로 만들어와.. 기간은 딱 3개월 못가져오면 내년도 생산분부터는 국제산업에서 납품 못하니까 그런줄 알라고… “
진욱은 구매사업부장의 말과 서류를 그대로 회사로 돌아와 전달을 하였고, 그 날 국제산업은 초비상사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 다음편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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