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의 시간(2)
일탈의 시간 (2)
그것이 시작이었다.
첫외박에서 받아낸 그 전화번호 하나.
나는 그 전화번호를 관물대안에 고이 넣어두었다.
아직 내 짬밥이 공중전화를 기다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부대에서 갓 일병을 달게 된 병사가 전화하는 것은 오로지 고참들이 시키는 것을 다 했을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 일은 결코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두번째 외박 날짜가 잡혔다.
한달도 더 지났을까.
한동안 고참들에게 치이면서 스트레스를 받던 나의 이번 외박은, 고참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도피성 외박이었다.
그래서 나는 외박을 혼자나가는 것을 계획으로 잡게 되었다.
그렇게 외박 일주일 전 주말이 되었다.
나는 그동안 고이 모셔둔 알바생의 연락처를 꺼냈다.
그리고 고참들 눈치를 보며 비어있는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여보세요?
앳된 목소리가 전화를 받는다.
나는 갑자기 급격히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끼며, 대답을 했다.
"아..안녕하세요? 저 지난달에 같이 사진찍은.... 군인인데요.. 기억...하시나요?"
-어? 아 네. 그럼요~ 당연히 기억하죠!
"어? 진짜요?"
-하하. 네. 어떻게 까먹어요? 사진도 같이 찍었는데.
"아...아하하. 반갑습니다."
-네. 반가워요. 잘지내셨었어요?
"그럼요!"
뜻밖에 그 알바생은 나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지금부터는 A양이라고 부르겠다.)
수많은 군인들이 돌아다니는 지역에서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걱정했지만, A양의 머릿속엔 사진을 같이 찍었던 것이 기억에 남았던 것이다.
나는 저번에 찍은 사진을 인화했다며 그거 주고 싶다는 핑계를 대며, 다음주에 외박을 나가게 되었다는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 "어차피 저번부터 용기를 냈는데,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아무말이나 막 질러버렸다.
"다음주에 저 외박나가면 데이트할래요?"
-네?
A양의 살짝 당황하는 목소리에 나는 급격히 자신이 없어지는 것을 느끼곤 얼른 말을 돌렸다.
"아 그보다. 알바 매일해요?"
-아.. 아뇨. 일요일만 해요.
"그럼 토요일은 일 안하네요?"
-네...
"그럼 토요일날 만나서 놀래요? 사진도 줄겸."
-음...그럴까요?
옳지! 됐다!
나는 어쩌면 말빨이 좋은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급히 결론을 내렸다.
"그럼 다음주 토요일 하루종일 우리 데이트 하는겁니다? 다른 약속 잡지마요?"
데이트.라는 것을 계속 강조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초면에 만나서 얘기하고 뭐좀 먹는건 다 똑같기 마련이지만.
이렇게 "데이트"라는 타이틀을 걸고 똑같은 행동을 하면, 그건 데이트가 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친해지려는 생각에 나는 수많은 잔머리를 회전시키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아마 여자에게 이런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한건 이때가 처음이였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주가 되었다.
나는 혼자 외박을 나가서 먼저 모텔에 체크인을 하고, 부대에 보고전화를 하자마자, A양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신호가 좀 오랫동안 울렸다.
나는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이거 혹시 순진한 군인 놀려먹으려고 만나자고 한거 아냐?
정작 내가 나오면 연락 안하고 바람맞추려고?"
수많은 감정이 오고갔다.
순진하게 생겨서 날 속인건가.
하긴.. 군인들이 지금까지 대시 많이 했을텐데, 이미 어린나이에 영악해진거 아냐?
그런 수많은 걱정들 끝에서 수화기 저 너머에서 통화음이 뚝 끊어졌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수많은 걱정은 통화가 성공한 순간 삽시간에 날라갔다. 그리고 동시에 한번에 듣고 내 목소리를 알고 인사를 하는 저 영특한 친구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냐고 묻는 내 물음에 A양은 비극적인 결말을 들려줬다.
-죄송한데요... 오늘 못나갈거같아요... 어떡하죠?
"네?"
-갑자기 사장님이... 전화가 와서 알바날짜 바꿔달라고해서요.. 오늘 일하게 됐어요.
"어... 그럼 오늘 못나와요?"
-네.. 죄송해요. 내일이랑 날짜가 바껴서요.
망했다. 어쩐지 일이 잘풀린다 싶더라니....
나는 가벼운 절망을 느끼면서 최선의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 내일은 일 없는거네요?"
-네. 내일은 없어요.
"그럼, 이따라도 책방 놀러갈께요. 책방에서 보죠 뭐."
-그러실래요? 아, 너무 죄송해서 어쩌죠...
"그럼 만화책이라도 공짜로 보여줘요. 하하."
-그럴께요. 정말 죄송해요..
나는 정말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A양의 목소리에 마음에 위안을 갖으며, 동시에 잔머리를 열심히 굴려서 이 미안해하는 마음을 어떻게 활용해야할까 하는 고민을 했다.
일단 빚 하나를 카운트하는 기분으로 우려먹어야지.. 라는 생각을 하며 일단.
모텔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잠을 잤다.
고참이 없는, 오랜만에 개운한 잠이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4시쯤.
배고파서 뭘좀 챙겨먹은 나는 군복을 다시 주섬주섬 주워입고 책방을 향해 나섰다.
"어서오세요~ 어? 안녕하세요!"
책을 정리하던 A양은 나를 보더니 반갑게 맞아주었다.
사근사근하고 친절한 성격은 알바생의 좋은 기본자세다. 좋은 알바생이었다.
나는 편의점에서 사온 사이다를 알바생에게 주면서 최대한 친절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일 열심히 하네요? 목 안말라요?"
"어? 나 주는거에요? 감사합니다! 근데.. 저 사이다 못마시는데..."
사이다를 받아들고 난감한 표정을 짓는 A양에게 내가 되물었다.
"사이다 못마시는 사람이 어딨어요?"
"진짜에요. 저 콜라나 사이다 마시면 꼭 술취한것처럼 정신이 알딸딸해져서..."
솔깃. 하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나도 들어본적 있었다. 탄산음료에 취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고.
사이다든 술이든 취하기만 하면 좀 친해지기 쉽지 않나. 하는 생각에 나는 조금 억지를 부렸다.
"그런게 어딨어요. 뻥이죠?"
"진짜에요~ 진짠데...."
"그럼 진짠가 보게 조금만 마셔봐요."
"내가 왜 거짓말을 해요. 진짜에요."
"그럼 좀만 마셔봐요."
한참 장난처럼 억지를 부리면서 사이다 뚜껑을 따며 들이대자, 결국 조금 사이다에 입을 대는 A양을 보며 나는 정말 많은 기대를 했다.
하지만 기대완 달리 얼굴이 빨개지지도 않았고, 아무런(?) 증상도 나타나지 않자 곧 실망했다.
"에... 아무렇지도 않네요. 뻥이었구만?"
"진짜에요. 조금 마셨으니까 그렇죠!"
"그럼 조금씩 마셔요. 뚜껑도 이미 땄는데. 그보다 손님 많아요?"
나는 사이다캔을 A양의 손에 쥐어주고는 적당한 타이밍에 화제를 돌렸다.
A양도 결국 사이다를 손에 든채로 내 말에 적당히 받아주며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대화는 잘 통했다.
평소에 만화책을 즐겨보던 나와 책방 알바생과의 대화는 생각보다 잘통하는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가는줄 모르고 오랜만에 여자와 수다를 떨던 나는 문득 날이 어둑해져가자 음흉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는 훗날 이 감각을 "일탈"이라는 단어로 통일했다.)
수다를 떨다가 자연스럽게 나는 화제를 오늘 약속을 안지킨 못된 여자에 대한 이야기로 돌렸다.
"근데 진짜 아깐 실망했어."
"네? 머가요?"
대화를 하다가 A양이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것을 알고나서 나는 말을 편하게 놓고 있었다.
내 뜬금없는 화두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A양의 모습이 몹시 귀여웠다.
특히나 자연스럽게 고개를 움직이며 내려다본 그녀의 가슴은 정말 다시봐도 감탄이 나올정도로 무지막지했다.
여자의 가슴을 재는 방법따윈 잘 모르겠지만, 어림잡아도 C컵이상 D컵도 나가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크기였던 것이다.
문득 나도모르게 군복바지 속에서 꿈틀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그 감각을 즐기면서 설레는 기분으로 대화를 몰아갔다.
"너가 약속도 안지키는 애였을 줄이야."
"앗! 그건 진짜 죄송해요. 정말 어쩔수 없었어요.."
"아냐. 별수없는 일이긴 하니까. 하지만 정말 실망했었어..."
"아. 정말 미안해요 정말... 내일 많이 놀면 되죠~"
"내일은 내가 저녁에 금방 부대 들어가야 되는데? 놀 시간도 별로 없어."
"아앙. 진짜 미안해서 어째요... 진짜... 음 오빠. 뭐 맛있는거 사줄까요?"
"아냐. 맛있는건 나도 잘 사먹어."
"아아....아아...! 그럼 뭐해줄까요? 필요한거 없어요?"
"음.... 필요한거... 없는데?"
"아앗! 잘좀 생각해봐요! 있을거야 분명!"
내가 살살 약을 올리자, 순진한 A양은 조바심을 내며 나를 재촉했고, 나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오늘밤부터 놀자! 곧있으면 책방 문닫을 시간이라며?"
"네? 밤인데 어디서 놀아요?"
"나 잠자야되서 방 잡아놨거든. 거기서 좀만 놀다가 가~ 아니 그냥 자고가도 되고. 집 좀 많이 걸어가야된다며?"
"앗. 안되요! 집에서 자야죠!"
"집에서 걱정해? 좀 엄격한 집안?"
"아뇨. 그렇게 엄격한건 아닌데... 잠은 집에서 자야죠! 대신 내일 일찍 나올께요. 8시?"
"아냐. 너가 일찍 오면 뭐해? 내가 늦잠잘건데."
"일찍 일어나면 되자나요!"
"난 늦잠잘거야. 그럴려고 외박나온건데."
"으음... 그럼... 좀만 놀다가 갈께요."
만. 세.
만. 세.
만. 세.
나는 만세 삼창을 외쳤다. 조금만 놀다간다는 그 한마디가 어찌그리 크게 들리던지...
결국 우리는 책방 문을 잠그고 나와서, 곧장 내가 체크인한 모텔방으로 들어가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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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게 별로 없죠?
이제 곧 나올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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