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은막의 마왕 (0, opening)
당신은 주인공이다!
이 말에 얼마나 많은 바보들이 속아 넘어 갔던가.
모두가 주인공인 세상?
있을 리가 없잖아. 영화나 소설, 하다못해 만화라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텐데. 모두가 주인공인 이야기만큼 쓰레기인 이야기도 없다는 걸. 너도 나도 잘난놈만 가득한 세상 이야기. 그런게 보고 싶어?
주인공은 주인공이지.
인생을 영화라 친다면.
당신은 어디까지나 ‘당신’이란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걸로 끝. 영화의 재미 따윈 보장 하지 않는다. 평생을 방 안에서 날건달로 지내다 끝나는 쓰레기조차 못되는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고. 주인공이 죽어라 고생만 하다 길바닥에서 죽는 이야기의 주인공일 수도 있지. 진짜 영화마냥 언제나 악은 패배하고 주인공은 미녀와 사랑을 나누고, 마지막에 웃는 다는 그런 보장따위 없다.
아니라고?
세계 인구의 절반은 그 얼굴을 아는 유명한 여배우. 당신은 결코 그 아름다운 유방을 손아귀에서 맘껏 주무를 수 없다.
집 한 채 가격의 드레스를 휘감고 걷는 톱 모델. 그녀의 매끈한 다리가 당신의 허리를 단단히 조여 오며 가랑이를 밀어 붙여 올 리도 없고.
유럽 왕가나 재벌가의 아가씨들. 도도하게 턱을 세운 그녀들의 달콤한 입술이 정성스럽게 당신의 성기를 빨아 줄 일도 있을 리 없다.
그렇잖아?
저런 여자들. 소위 ‘세계’란 영화에서도 주연 여배우라 할 만한 여자들과 맺어지는 건 그에 어울리는 비중이 있는 남자다. 그게 이야기가 돌아가는 법칙이다. 그래야 이야기가 성립된다.
그런데 매우 빌어먹게도, 아무리 거대한 이야기라 해도 주역의 수는 언제나 한줌도 되지 못한다.
주역은 그 발밑에 새카맣게 깔린 조역들이 있어야만 탄생하기 때문이다. 주역의 밑에서 일하는, 주역의 총질에 쓰러지는, 주역을 위해 돈을 벌어오는 수많은 조역들. 너와 나 같은 슬픈 군상들. 영웅이 폼 잡기 위한 이유만으로 죽어야 하는 잡놈들.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법은 없나?
많은 이들이 그렇게 슬퍼했다. 하지만 결론은 스스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는 매우 철학적이고 개똥적인 결론 하나 뿐이었다.
--- 적어도 2021년 8월 까지는 그랬다.
그날 세계가 변했다. 모두는 주인공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아니, ‘모두’라면 조금 틀린가? 적어도 ‘우리 세계의 모두’는,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형씨는 어디로 가나?”
갑자기 들려 온 말에 고개를 들어보니 근육질의 다부진 몸매를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어느새 온 건지. 고개를 돌려보자 내 옆에는 갈색머리의 여자도 한명 앉아 있다.
이 두 사람이 이번에 나와 같이 문을 통과하게 된 사람들인가 보다. 고작 몇 분 후면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시간이나 때울 겸 대꾸했다.
“2008년을 생각 중입니다. 그러는 당신은요?”
“나? 난 중세 유럽으로 갈 꺼야. 왜 그리 가는지 알아?”
역시나 자기 자랑을 하려고 말을 건 거였냐. 지겨웠지만 맞장구를 쳐주었다.
“마녀사냥을 하러 갈 거라고. 그 시대는 말이야, 마녀란 게 있다고 믿어서 사람들이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서는 마구 고문을 해댔어. 미친 세상이지! 거기서 나도-.”
그리고 그는 어떻게 여자들을 고문할 것인지 노골적으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유방을 쥐어 뜯을 거야,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를 잔뜩 녹음해서 자장가 대신 들으며 자야지 등등.
네 망상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말하면서 성기를 부풀리고 있지는 마라. 보기 괴로우니까.
“거기 아가씨는 어디로 가나?”
“고대 그리스.”
여자는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남자는 신경 쓰지 않는지 계속 물어본다.
“헤? 검투사라도 되게?”
“그건 로마시대에요. 나는 신화시대의 영웅들하고 같이 어울려 다녀 보고 싶은 거고. 헤라클레스의 모험이나 오디세우스의 항해를 같이 하는 여자 영웅이라니 멋진잖아요?
그나저나. 당신은 2008년이라고요? 상당히 근대로 가시네요. 21세기면 총도 폭탄도 꽤 발달해 있잖아요. 위험하지 않아요? 그 해에 무슨 재밌는 일이 일이라도 있었나.”
여자는 남자의 고문 계획을 듣는건 영 아닌지 나와 쉴 새 없이 말하기로 작전을 세운 듯 했다. 저 남자의 입 냄새는 괴로워지던 참이라, 순순히 어울려 준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서요.”
“누구-.”
그때 문이 열리고, 제복을 입은 사람이 우리 차례가 되었음을 알렸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즉시 서로 간에 나누던 대화를 집어 치웠다. 시간이나 때우려 한 대화보다 몇 억 배나 흥분되는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우리를 기다리는 건 거대한 문이었다. 진짜 문은 아니다. 거대한 링과 깔대기를 합쳐 놓은 듯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이용해 기동하는 대포에 가깝다.
단방향 평생세계진입 문.
2021년 관측된 평행 세계, 모든 가능성과 모든 시간대가 공존하는 무한의 세계 중 한 곳으로 통하는, 사람을 다른 세계로 쏘는 대포- 라고 할까.
한번 지나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문이지만, 저 문을 지나려 하는 자는 언제나 넘치도록 있었다. 그 사람들이 한꺼번에 빠져 나가면 사회가 붕괴되어 버릴 지경이기에, 사회 공헌도와 순번에 따라 길고 긴 시간을 기다려야만 저 문을 통과할 자격이 주어질 정도로 인기가 많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내 차례가 된 것이다.
나의 세계로 가는 문을 열 순간이 왔다.
제복을 입은 사람이 이미 달달 외우다시피 한 주의 사항을 다시 읽는다. 한번 가면, 저쪽 세계에는 ‘문’이 없기 때문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포기하시려면 마지막 기회입니다. 저쪽 과학 기술을 문의 제작이 가능할 정도로 지나치게 발달한 기기는 가져가실 수 없습니다. 이것들만 지키신다면 저쪽 세상을 정복해도 멸망시켜도 저희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운운.
나는 귓가로 설명을 흘리며 품 속에서 사진을 한 장 꺼냈다. 어느 영화제의 시상식이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주변으로 눈부신 미모의 여자들이 트로피와 꽃다발을 가득 들고 서 있었다.
그 뒤로, 접혀 있는 또 한 장의 사진.
시상식의 사진과는 명백히 다른 초라하기 짝이 없는 한 여성의 사진.
나는 이들을 만나러 간다. 지금까지 내게는 언제나 스크린 속에서만 웃고 춤추며 말하던 그녀들.
하지만 저쪽 세상에서 그녀들은 아직 살아 있는 존재다. 이제 나는 그녀들을 만지고, 느껴서---
내 것으로.
나만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나는 시상식 사진의 한가운데에서 환히 웃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웃음과 함께.
그 자리가, 나의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