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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협야화(情俠冶話) 14 회


▣ ▣  정협야화(情俠冶話)  ▣ ▣



▣ 제 14 회  암계음사(暗計淫事)


지엄한 기세에 어쩔 도리 없이 자리에 앉기는 했으니 효정의 표정은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 어허, 버릇없이! 어서 스님께 예(禮)를 올리지 못하오? ”


그래도 은혜하는 마음을 담아 첫정을 준 상대가 아닌가? 그런 몽아가 떠도는 소문처럼 여승과 광란의 음사(淫事)을 치루는 광경을 보고 질투가 치미는 마음을 겨우 억제하며, 한편으로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지 짐작하여 용심을 꾸욱 참고 자리를 잡던 효정은 몽아의 그 한마디에 울화가 폭발했다.


“ 이놈, 몽아! 파계를 일삼는 중년에게 예를 올리라니, 무슨 가당찮은 말이냐! ”


효원은 몽아에게 이제는 삿대질까지 해대며 한발 다가들었다.


“ 이런, 이런! 고정하시오. 어서 마음을 갈아 앉히고 인사부터 올리시오! ”


그래도 몽아는 효정을 달래려 부드러운 언성으로 조용조용 배례를 종용했다.


허나 노여움이 치밀어 벌겋게 달아오른 효정은 몽아의 말이 귀에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어쩌면 믿었던 사내에게 배신을 당한 건 아닌가 의구심이 든 그 마음속의 분노가 냉철히 사태를 파악하는 판단력을 잃게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그 같은 상황에서도 만아선니는 효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 푸훗! 사부님의 시신까지 곁에 두고 중년과 뒹구는 네놈의 음행, 무슨 말 못할 곡절이 있는가 하여 변명이나 해보라 말미를 주었건만, 네놈을 단단히 훈계해야겠구나! ”


아직 승복을 제대로 걸치지도 않고, 화가나 길길이 날뛰는 효정을 일별하면서도 무심(無心)의 자태를 보이는 만아선니의 자세가 더욱 가증스러워 그 격분을 몽아에게 투정하듯 부려보는 효정이었다.


“ 사저! 사부의 목숨을 살리려 한 행동이었소? 스님의 그 고귀한 희생이 없었다면 사부님은 이미 구천을 헤매고 있었을 거요. 어서 스님께 구명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시오. ”


“ 뭐... 뭣? 사부님께서 돌아가신 게 아니었나? ”


뜻밖의 말이 효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부의 시신을 조용한 곳에 옮겼다는 몽아의 은밀한 전언에 따라 이곳을 찾은 효정이다.
그가 남겨둔 비표를 쫓아 겨우 이곳에 당보해 보니 눈앞에 벌어진 광경은 기막힌 음사였다. 그런데 그 행위가 사부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렇소, 사저. 또한 이 스님은 사부님의 친동생이오. 그러니 어서 예를 올리시오. ”


사부의 동생이라면 자신에게는 사숙이 아닌가? 한 번도 들은 바 없는 사숙, 그 여승이 눈앞에 좌정하고 있다. 점점 놀라운 말들뿐이었다.
한걸음에 만아선니의 앞으로 달려간 효정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 제자, 미처 알아 뵙지 못하고 망동(妄動)을 부렸습니다. 용서하소서! ”


화기를 누르고 점차 안정을 되찾는 효정을 바라보며 몽아가 점잖게 한마디를 던졌다.


“ 이보시오, 사저! 소제가 언제 색정에 날뛰는 모습을 본적이 있소? 어찌 연유를 물어보지도 않고 이 순진한 놈을 다그치기만 하셨소? ”


효정이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얼굴은 숨기려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 나... 나는, 눈앞에 드러난 모습만 보고서... ”


“ 그래도 그렇지. 사저가 이놈을 그토록 나쁜 놈으로 여겼다니... 소제, 사저에게도 믿음도 주지 못한 한심한 놈이었구려! ”


“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사제가... ”


두 사람이 실랑이하는 모습을 미소 띤 얼굴로 지켜보던 만아선니가 손을 흔들었다.


“ 됐다. 그만들 하거라. 궁주의 제자라 했느냐? 눈앞에 보였던 광경에 너무 연연하지 말거라. 다행히 궁주의 목숨은 구했다. ”


“ 사숙, 고맙습니다. 헌데 소녀는 어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


언사분원에서 녹의서생으로 분하여 몽아사제의 정체를 숨겨주기도 했고, 분원의 책임자가 된 대사형 무정랑을 도와 사부의 야망을 무산시키는데 일조를 하리라 결심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대사형이 군협들을 이끌고 달려들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가 사부를 살해했고 그 흉수로 몽아를 지목하며 강호에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다. 도대체 짐작도 못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던 것이다.


“ 이해고 오해고 할 일이 아니오. 그 모두가 이놈의 머릿속에 든 천년무학의 구결과 강호쟁패의 욕심 때문이지요. ”


몽아가 가벼이 툭 던지는 말에 만아선니가 얼굴을 찌푸리며 나무라듯 입을 열었다.


“ 현(賢)아! 그 중한 일을 별일도 아닌 것처럼 말하는구나. 네 가문이 멸(滅)한 이유도 그 때문이건만! ”


현이라?
몽아를 향해 현이라 말한다. 저 여승은 오래전부터 몽아와 알고 있다는 투다. 그 말에 효원이 잔뜩 의아한 표정이다.


“ 현이라니요? 대사님, 현아가 누구오이까? ”


“ 저 아이 말이다. 네가 몽아라 부르는 저 아이가 현(賢)이니라. 지난날 그 치밀한 음모에 희생당한 가문의 아이니라! ”


“ 희생이라 하셨습니까? 그럼 작금의 일이 모두 사부의 음모란 말입니까? ”


“ 물론 너의 사부도 어리석은 야망을 품었다. 헌데 그 야망조차 보이지 않는 손에 조종을 당한 듯하여 네 사부가 가여울 뿐이다. ”


“ 사부께서도 누군가에? 그렇다면 사부를 살해하려던 그 행위도 그 계획의 일환이었습니까? ” 


“ 오냐, 그렇다. 때문에 내가 이 처참한 꼴을 하고 있지 않느냐? 허나 어쩌랴, 네 사부는 나의 혈육인 것을, 휴우...”


만아선니가 옛일을 생각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효정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사부가 누군가?
무공뿐만이 아니라 그 위엄조차도 강호의 그 어느 누구도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인물이 없었던 만여궁주였다. 그런 사부를 뒤에서 이용한 배후가 있다니 도저히 수긍이 되지 않는 말들이었다.


“ 거칠 것 없는 사부를 움직일 만한 인물이 과연 누굽니까? ”


“ 허... 그게, 그 아이가 분명하기는 한데, 도무지... ”


짐작은 하면서도 확신을 하지 못하겠다는 만아선니의 표정이었다. 효정은 혹시나 하여 몽아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몽아도 입만 꾸욱 다물고 있을 뿐이다.


“ 사제, 어찌 입을 닫고 있는 게야? 사제도 짐작을 한다면 속 시원히 설명을 해 보아라. ”


선방에 들어서자마자 못 볼꼴을 본 효정이었다. 그 모든 행위가 사부와 연관된 일이라 여겨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점점 초조해 지기만 하는 그녀였다. 헌데 말해주기를 다그치는 효정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던 몽아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 이상하다. 효정사저의 안색이 전과는 다르다. 혹시?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


아무래도 효정의 행동이 전과는 다르다는 점을 언뜻 느낀 몽아였다.


“ 사저, 이곳에 오기 전에 누구를 만났소? ”


자신에게는 대답도 않고 뜬금없이 묻는 몽아의 물음에 잠시 당황한 효정이 생각을 더듬어 대답했다.


“ 언사분원에서 대사형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잠시 현기증이 일어 잠이 들었을 뿐 만난 사람은 없었다. 왜 그러느냐? ”


그 순간,


“ 어어어... 내, 내가... 내 몸이...  ”


효정이 비틀거리며 흐늘흐늘 바닥에 넘어져 내렸다. 그 광경에 만아선니가 놀란 눈을 뜨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 현아, 혹시? ”


“ 예, 스님. 이놈의 짐작이 맞는 듯합니다. ”


“ 으음, 진정 악랄한 아이구나. 그 아이가 이토록 잔인할 줄은 미처 몰랐구나! ”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효정의 눈망울 속에 사악한 흉광이 번득이는 것을 발견한 몽아가 그 붉은 빛의 정체를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 과연 무섭도록 치밀한 두뇌를 가진 저들입니다. 그들은 효정사저가 이곳에 오기 전 이미 사부의 상태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


“ 네 말이 맞다. 네 궁주의 시신이 사라졌다면 그 일을 저지를 사람은 너뿐이라 짐작했을 테고, 또한 다음에 벌어질 상황도 불 보듯 뻔히 알고 있었을 게다. ”


만여궁주를 살리기 위해서는 육신의 교합(交合)을 서로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당연히 효정의 몸속에도 음화(淫火)를 심어두었을 거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몽아가 비록 은밀히 움직였다고는 하나 상대는 이곳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몽아의 마음이 다급해 졌다.


“ 스님, 저들이 닥치기 전에 우선 장소를 옮겨야겠습니다. ”


만아선니가 바쁘게 서두르려는 몽아를 향해 손을 저었다.


“ 아니다. 이곳을 급습하려 했으면 저 아이에게 음독을 주입해 보내지는 않았을 게다. 아마 너의 무공을 두려워 한 탓이겠지. 그보다 저 아이를 보아라. 음화가 솟아 온 몸이 붉게 변하고 있다. 어서 해혈(解穴)을 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겠구나. ”


몽아는 만아선니의 판단에 공감을 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 단순히 색정으로 날 어떻게 하지 못하리라는 나의 능력을 저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효정사저에게 움약을 먹여 내게 보냈다. 분명 사저의 몸에 또 다른 암계(暗計)가 숨겨져 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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