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厚の野望 17
17
"첫 시합은 명월 소저와 천풍검협 강윤식의 비무가 있겠습니다."
하승구의 호명에 대기석에서 비무장으로 올라오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준수한 공자였고, 다른 하나는 키가 작은 인형같은 미소녀였다. 관중의 환호를 받으면서 올라서는 두 사람은 대의 중앙에 올라서 서로 마주보았다.
"아니, 그대는...."
천풍검 강윤식은 눈 앞의 소녀를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일전에 주루에서 미모에 혹해 수작을 걸다가 정체(?)을 알고 부리나케 도망친 원인이었다. 강윤식이 떨떠름한 안색으로 반 보 물러나자 금보옥은 저도 모르게 아미를 찌푸렸다.
"시작하시오!"
하승구의 말이 떨어지자 강윤식은 안색을 단단히 굳히더니 신형을 일직선으로 뽑아갔다. 그 끝에는 검극이 있었다. 의례적인 말과 선수를 양보한다는 말도 없는 무정하고 쾌속한 일식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검식은 음험하지 않고 부드러웠다. 잔잔한 바람이 천 갈래로 불어오는 것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금보옥은 깜짝 놀랐으나 우선 한 보 물러나면서 양 권을 내질렀다. 시간차를 주도 방위를 죄어드는 상대의 예기를 막고 전권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나찰열풍권의 이식, 쌍환육비가 전개되었다. 내력을 실은 권이 유형화되어 상대의 검격을 마주 쳐나갔다.
-제법이다만.....
신속한 대응에 강윤식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권사라고 하면 어깨가 넓고 다부진 주먹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는 그런 선입관은 버리라는 듯이 좁은 어깨, 내민 주먹도 앙증맞은 크기였다. 강윤식은 손목을 틀어 뻗어나가던 기수식을 천풍검벽의 수로 전개하였다. 상대의 정체(?)를 생각하면 허투로 볼 수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촘촘한 검막을 형성한 바람과 권격이 충돌했다.
-터엉! 텅! 캉!
얇은 철판을 망치로 연달아 치는 것처럼 격한 폭발음이 터져나왔다. 둘은 충돌한 여세를 감당하지 못하여 뒷걸음질 쳤다.
"크윽!"
검을 쥔 손이 찌르르 울리면서 강윤식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상대의 권경을 해소하지 못해 기혈에 약간 손상을 입은 것이다. 강윤식은 경악했다. 처음대로 경시하고 적당히 응했더라면 낭패를 볼만한 경력이었다. 금보옥도 창백한 안색으로 기식을 골랐다. 그러나 한 호흡을 다 삼키기전 금보옥은 운룡보를 밟으며 주먹을 내밀었다.
용이 구름을 밟는 것처럼 금보옥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강윤식의 측면에 나타나 권을 내질렀다. 삼식 삼연구절로 세 차례 권격으로 아홉 마디를 꺾어버리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아홉 갈래의 권격이 측방으로 쏟아지자 강윤식은 정신없이 몸을 옆으로 틀면서 천풍승룡의 수법으로 들고 잇던 검으로 전신을 감아 올렸다.
다시 한번 경력이 충돌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다시 벌어졌다. 천풍승룡을 펼친 강윤식은 이번에는 적지 않는 타격을 받았는지 비틀거렸다. 이번 접전으로 약간 우위를 차지했음에도 금보옥의 안색은 밝아지지 않았다.
-결정타가 없어.
자신이 배운 무공은 분명 최상승이지만, 호신용의 성격이 강했다. 애당초 은사인 모용황이 그녀에게 무공을 가르친 것은 의발전인으로서가 아니라, 연을 맺고 있는 금대숭의 손녀라는 점이 작용했다. 대상련의 금지옥엽인 그녀에게 살상력이 강한 무공보다는 제 한 몸 보호할 수 있는 수준만 가르친 것이다.
천하제일권공인 열풍권의 초식은 총 아홉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 무공의 구분이 전 몇식 후 몇식 이런 식보다는 좌우로 나누어서 구분하였다. 일격필살의 수라, 연격봉쇄의 나찰이라 하여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 수라와 나찰의 묘리에 통달하면 진3식을 활용할 수 있으며 권강을 다루는 경지에 이른다. 당년의 모용황은 열풍권 하나만으로 천하를 오시하였으며 십패의 시기만 아니었더라면 천하제일인의 명예를 거머쥐었을 것이라 회자되곤 하였다. 천하에 십대무학이 있다면 열풍권은 반쪽이라 할지라도 능히 순위권 안에 든다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지금까지는 실력에 큰 차이가 있어 나찰식으로 어렵지 않게 올랐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를 이를 상대하니 금새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십초 안에 정리할 수 있는 상대로 백초를 허비한다면 일대 일 비무라면 모를까 실전에서는 죽은 목숨이다.
금보옥이 속에서 치솟는 울분을 가라앉히는 동안 강윤식은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잡았다. 금보옥 내면의 고민을 모른 채 그녀가 시간을 뒀다고 생각하여 두 손을 맞잡아 사례했다.
"공자의 배려에 감사드리오."
"...공자라니요?"
뜬금 없는 소리에 금보옥은 의아한 듯 물었다. 강윤식은 되려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금보옥의 위 아래를 보다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떡였다. 호색의 시선은 없었지만 다른 의미로 굉장히 불쾌해지는 느낌이 엄습하였다.
"후, 그렇다고 해둡시다."
"속개하죠."
금보옥은 짧게 말하고는 권을 질러갔다. 둘의 접전은 팽팽히 이어졌다. 전반적으로 강윤식이 밀리는 형국이었지만, 금보옥도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관중들은 화려한 볼거리에 현혹되어 환성을 지르기 바빴다. 안목이 예리한 고수들은 금보옥이 손속이 야무지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오직 진상을 아는 덕후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저런저런...."
덕후는 지금 금보옥의 심사가 어떨지 짐작이 갔다. 백그라운드(모용황)의 반쪽 짜리 절기를 배운 그녀는 주인공(덕후 아님1)이라기 보다는, 주인공(덕후 아님2)이 무공에 있어 고비에 만났을 때 도우미 해주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덕후의 농간으로 비무대회에 출전하여 주인공(덕후 아님3)이 겪어야할 난제에 처해있으니 정반대 의미로 고비에 부닥친 것이리라.
"슬슬 알려줘야겠군."
나머지 반쪽인 수라식은 덕후가 알고 있었다. 따로 모용황을 만난 적도 배운 적도 없지만, 덕후의 입장에서는 진3식까지 모두 숙지하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저 친구 고전하고 있군."
"그러게 뺀질이라 제법 예의를 고수하는 놈이 기타부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아서 뭔 일인가 싶었더니."
"...그것과는 좀 다른 의미가 아닐까."
"크흠! 큼! 재수 없는 소리 말게!"
앞 자리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리자 덕후는 잠시 생각하다가 썩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앞에 사람의 등을 툭툭 쳐 자리를 바꿀 궛을 권했다. 한참 관전하고 있다가 인상을 쓰던 그는 덕후가 말없이 내미는 은 부스러기에 쾌히 자리를 내주었다. 자리를 바꾼 덕후는 두 사람의 양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반사적으로 놀란 둘은 고개를 돌렸고, 뺨을 손가락에 찔렸다.
"후훗, 이 자리에서 만나다니 정말 반갑구려."
뺨을 찔리는 장난을 당한 둘은 덕후의 느끼한 음성과 게슴츠레한 눈빛에 화를 내지도 못하고 굳어버렸다. 적의보다 생리적인 혐오감이 앞선 탓이었다.
"다, 당신은 여기에 왜 있는 거요?"
선이 굵은 쪽이 말했다.
"말동무나 할까해서 말이오. 보아하니 지금 비무대에 올라간 출전자들이 서로간에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댁의 동료에는 관심없수다."
말조차 섞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 하는 말에도 덕후는 씩 웃었다.
"두 번 만나는 것도 가벼이 흘려보낼 인연은 아니지 않소? 내 비록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형이상학적인 취미가 있기는 하나 이해하지 못할 자들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소."
"참 이상한 취미도 다 있구려."
서생같은 용모의 젊은이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하하하, 자고로 내가 하면 취미가 니가 하면 오덕질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이왕 이렇게 된 거 통성명이나 해봅시다. 소생은 주치라고 하며 남경에 살고 있소."
주점에서 비굴하고 약삽한 인상이 아니라 준수한 용모가 받쳐주는 범위에서 예의를 차리니 두 남자는 떨떠름하면서도 매정하게 뿌리치지 못했다. 덕후는 이들이 좀 노는 티는 내도 명가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는 젊은이들이라는 것이 파악했다.
추측을 확신시키듯이 먹물 좀 먹은 듯한 유약한 인상의 젊은이가 답례하였다.
"소생은 초제학이라고 하고 옆의 친구는 황철웅이라고 하외다."
"초 형이였구료. 이것 좀 드시지 않겠소?"
덕후는 품안에서 낙화생(땅콩)을 꺼내어 안주발 분위기를 만들었다. 현대야 슈퍼가서 율곡선생을 모셔다가 사면 그만 이지만, 이 시대에는 제철이나 현지가 아닌 이상 과일이나 견과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낙화생 정도면 볶은 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두 청년은 처음에는 덕후가 말을 걸라치면 틱틱 거렸으나, 비싼 낙화생을 까먹으면서 관전하다보니 어느새인가 묘한 공감대를 형성해갔다.
이야기를 하면서 덕후는 강윤식이 셋 중에서 가장 뛰어난 무공을 지녔으며, 그가 쓰는 천풍검법이 남궁세가에서 유출된 절기라는 것을 알았다.
십패 이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몰락할 때 그들의 진신절기가 담긴 비급이 강호로 대량으로 풀려나왔고 대부분은 십패로 귀속되었다. 생계가 어려워서 비급을 팔았다는 둥 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명문거파이니 무공에 대한 자존심으로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들은 재정 충당 차원에서 속가제자를 받아들인다 해도, 반드시 변형을 가하거나 정수가 되는 요체 한 두개는 누락시키는 수단을 써왔다. 강호로 유출된 구파일방의 절정비급들은 십패가 거의 독식하다시피한 과정을 보고 혹자는 비급을 빌미삼아 십패의 영역을 다졌다고 평하였다. 이를 두고 십패가 구파를 몰락시키고 대신 패권을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닌가 비난 하는 소수가 있지만, 정작 진상은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었다.
-그 점이 내가 관조를 택한 이유 중 하나지....
안드로메다로 개념 찾으러가는 세계라면 우왕 굳을 외쳐주고 깽판치면 그만이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 숨쉬고 있는 세계는 또 하나의 현실에 가까웠다. 자신이 공략본(?)을 들고 있지만, 게임의 법칙이 그렇듯 어떤 단서가 복선이 되어 진엔딩(?)으로 가는 루트가 따로 숨어 있을 수 있는 법이다. 그 점이 이 세계에 데미 갓 수준인 덕후의 행동에 고삐가 되어주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그때 비무대에 함성이 터졌다. 드디어 승패가 갈라진 것이다. 덕후의 예상대로 금보옥의 승리였다. 더 이상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강윤식은 패배를 선언하였다. 상대가 여자라면 남자의 자존심상 기권하는 일은 없겠지만 불행중 다행으로 반대로 인식했기에 깨끗하게 물러날 수 있던 것이었다.
금보옥과 강윤식이 비무대에 내려오는 순간, 둘은 짧게 대화를 주고 받는 듯 하였다. 내려오는 금보옥의 안색은 무섭도록 굳어있었다.
-이크! 들켰군.
금보옥의 차가운 시선이 덕후에게 향했을 때, 뜨끔한 덕후는 초제학과 황철웅을 붙잡고 열심히 말을 걸었다. 하하호호하는 생각없어 보이는 장면에 금보옥의 냉기가 다소 가시고 자포자기와 같은 어이없음이 대신 자리잡았다.
"이따가 술 한잔 하지 않겠소?"
덕후의 제안에 두 사내의 얼굴에는 느슨했던 경계심이 꽉 조여졌다. 여인들에게서나 나올 반응이 남자 놈에게 보이자 덕후는 속으로 개탄했다. 이들의 반응은 비록 자신이 자초한 바이나 코 앞에서 겪어 보자니 정말 꼴도 보기 싫다.
"승자와 패자에 연연하지 않고 뒷풀이하자는 것이오. 오늘 밤은 달구경하기 좋은 곳에서 옆구리에 가인들을 끼고 한바탕 놀아봅시다."
오해가 없도록 노골적으로 까놓는 말에 두 사내도 슬몃 동하는 눈치였다.
"흠, 친구의 의향도 알아야할 것 같소만."
"한 번 알아보고 오시구려. 나도 동행께 양해를 받아 와야할 것 같소. 좋다고 하면 인근에 청야루가 유명하다니 그 곳에 별채 째 빌려 놓으리다."
황철웅의 반승락에 덕후는 이만 가보겠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덕후의 발이 멈춘 곳은 출전을 마친 대기자들이 객소로 향하는 통로였다. 정면에서 금보옥이 걸어오고 있었다. 덕후의 존재를 인지했건만 금보옥은 마치 없는 사람처럼 지나쳤다.
"본선 첫승을 축하하오."
"감사합니다."
금보옥은 의례적으로 대꾸했을 뿐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으흠, 감격적인 첫승이니 술자리가 빠질 수야 없지. 물 좋은 자리를 봐두었소."
"당분간은 소녀 혼자 있고 싶네요. 방금 비무로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
"재고해보시구려. 혼자 장고를 거듭하는 것보다는 논검으로 단점을 논하면서 잔을 부딪치면 참고할 거리가 많지 않겠소?"
"강 공자를 초청했단 말인가요?"
금보옥이 약간 놀란 듯 침제된 분위기가 약간 가셨다.
"마침 그의 친구들도 내 곁에 앉아서 말이오. 술 한잔 같이 하자고 했더니 좋다는군."
"어떻게 그러실 수 있나요?"
금보옥의 질문은 복합적이었다. 초면에 악연에 가까운 상대를 술자리를 권하는 배짱도 그렇거니와, 비무대에 내려오기 전에 강윤식이 자신의 거리를 둔 연유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전까지 비무를 하면서 남자들의 태도에는 계집에게 질 수 없다는 오기를 지니고 있기 마련인데, 강윤식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강윤식이 속세의 예법에 구애되지 않는 불문이나 도가의 수양이 있어보이진 않았다. 의혹을 품은 금보옥은 비무식이 끝나는 순간 강윤식에게 질문을 하였고 뜻밖의 답을 듣고 말았다. 강윤식 일행은 자신의 미모에 혹해 수작을 부리려다가 덕후의 농간으로 여장남자(후타나리...ㄱ-)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내막을 듣는 순간 얼이 빠진 금보옥은 강윤식을 오해를 제 때 잡아주지 못하고 퇴장하고 말았다. 속으로 곱씹고 있다가 덕후를 만나니 이런 순간 불거져 나오게 된 것이다.
"선연은 오래두면 희미해지지만, 악연은 내버려두면 강해지는 법이라오. 마가 끼기 전에 제때 푸닥거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그 치들도 들을 귀가 완전히 막힌 부류는 아닌 것 같다오."
"어차피 스쳐갈 인연. 그 사람들과 소녀는 다시 만날 일도 없는걸요."
십패의 가주 대리와 지방의 고만고만한 중견무가의 자식이 만날 일은 명의 백성이 황제를 직접 알현하는 것만큼이나 낮았다. 그러나 덕후는 섭선을 펴 흔들었다.
"세상 만사 돌고도는 법이니 언젠가는 닿게 될 지 모르잖소?"
"여기,천리에 통달하신 분 나셨군요."
금보옥이 비꼬듯 톡 쏘아붙이자 덕후는 씩 웃었다. 금보옥은 그 웃는 모습을 지워버리고 싶어 발언 수위를 높였다.
"상공은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와 내외를 가리지 않아도 상관 없나요?"
이 시대는 내외규범이라하여 남녀의 구분이 엄격했다. 강호와 무가 출신은 그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지만, 유서깊은 명가일수록 규범은 귀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덕후는 가만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는데,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하는 티가 역력했다.
"나와 그대가 상상하는 동기가 맞다면....그 자는 몸소 크고 아름다운 세계를 겪게 될 것이오."
금보옥의 신형이 부르르 떨렸다. 여자의 감으로 살의나 정조의 위기는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금보옥은 덕후의 모호한 웃음을 보는 순간, 위가 미슥거릴만큼 구토감과 혐오감이 미친듯이 치솟아 오르는 감정을 맛보았다.
"그러니 소생을 불쌍히 여기걸랑 부디 상냥하게 대해주시구려. 남편이 변태라면 아내도 번거롭지 않겠소?"
덕후는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에둘러 말했다. 이미 당신은 충분히 변태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입을 꿀꺽 삼키며 금보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객소로 들어가 간단히 수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금보옥은 날이 어둑해지자 덕후를 따라 청야루로 향했다. 덕후는 청야루에서 별채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 정원을 끼고 인공 호수가 있는 별채의 내원에는 술 자리가 분주히 마련되어 가고 있었다.
자리 셋팅이 끝날 무렵 눈에 띌만한 세 명의 아리따운 여인이 들어섰다. 그녀들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입 안에 감미로운 향기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대들을 먼저 부른 것은 몇 마디 당부할 것이 있어서요. 조금 있으면 세 공자분들이 오실터인데 지극정성으로 모셔야할 것이오. 그리고 유희를 하는 동안 이 분에 대해서 농으로라도 언급하는 일이 없도록 달래주시오. 내 말을 지켜준다면 따로 사의금을 챙겨 드리리다."
덕후의 말에 세 여인은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곧 직업적인 미소를 지었다. 말투가 정중한 데다가 돈도 준다니 거절할 까닭이 없었다. 덕후의 귓가로 금보옥의 전음이 전해졌다.
-오해를 풀지 않을 생각인가요?
-여자가 이런 자리에 있어서는 어색하지 않겠소? 그대 말마따나 스쳐갈 인연이면 오해한 채 내버려둬도 상관없고, 아니라면 훗날 밝혀도 그만이오.
금보옥은 여전히 불만이 가시지 않는 얼굴이었다. 덕후는 살짝 웃음을 흘렸다.
-이 기회에 남자의 진목면을 알려주리다. 봐두면 손해보지 않을 것이오.
-꼭 재주껏 바람 피우라는 소리로 들리네요.
-설마, 남자란 양면적이면서도 얼마나 단순한 생물인지 알려주려는 것 뿐이라오. 중간에 불쾌하게 여기지 말고 잠시만 참아주시구려.
세 명의 공자들이 찾아왔다. 덕후는 친근한 웃음을 띠며 자리를 권했다. 강윤식을 비롯한 세명은 어쩡쩡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여인들이 제각기 임자를 찾아 소매를 잡아끌자 못이긴 척 앉았다. 덕후는 세 남자에게 손수 술을 따라주었다.
"자, 먼저 한잔 쭉~ 들이키고! 일단 목청에 붙은 허식을 씻어버리고 시작합니다."
세 공자는 잔을 권하는 덕후에게 술잔을 들어보이거니 원샷을 하였다. 목청을 훑는 화끈한 술기운을 맛보며 정식으로 통성명을 하였다. 몇 마디 하는 사이에 술을 권커니 잣거니 하여 빠른 속도로 취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모두가 취한 분위기에 녹아들어 흥청망청 거릴 때 금보옥만은 유리 된 채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전에 흑심을 품었던 얼굴, 낮의 비무에 겪었던 비장미를 품었던 얼굴들은 사라지고 불콰해진 얼굴로 미래에 대한 막막한 신세를 하소연하거나 허풍스레 포부를 밝히는 얼굴이 자리잡혔다. 그것은 같은 시간대를 공유하는 젊음의 초상이었다.
금보옥은 세삼스럽다는 듯 덕후를 보았다. 종횡가처럼 변설에 능하거나 공맹 같은 원칙론이 아니었다. 적당히 추임새도 넣고, 때론 상대의 말꼬리를 잡고 엉뚱한 화제로 이끌고가 실소를 자아내게 만드는 평범한 화법이었다. 그러나 덕후의 말에 상대는 진심으로 웃거나 성을 내고 혹은 반박하며 역성을 내기도 하였다. 나름 많은 사람을 겪었다고 자부한 금보옥은 이들이 평소에는 체신을 따져 절대로 저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거란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문득 금보옥은 남자만 아니라 사람을 겪게 하려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음담패설은 적당히 해두었으면 하지만...
어떤 여자를 꼬셨는데 죽여줬다느니, 알고보니 그년 취향이 나보다 변태적이라 이러저러한 곤혹을 겪었다느니. 그녀가 보기에 남자들은 그 이야기를 질리지도 않고 되풀이하였다. 더 이상한 것은 여자들도 능동적으로 말을 받거나 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에 보복이라도 하듯이 공자들의 물건 크기를 재어보는 시늉을 하며 희롱한다는 것이었다.
평소는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풍경인데도, 괜시리 어울리지 못한다는 소외감이 들자 금보옥은 깜짝 놀랐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연거푸 술잔을 들이마셨다. 금보옥이 알딸딸한 기분에 젓어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뜻밖에 강윤식이었다. 풀린 눈을 하고 있었지만 어조는 다소 침착했다.
"혹시...공자는 모용황 어르신을 알고 계십니까?"
"제 은사님 되십니다."
"역시 그렇군요. 은사님께서는 별래무양하십니까?"
"몇 년 전에 나가신 후에는 감감무소식입니다. 원체 바람 같은 분이라서...."
강윤식은 고개를 끄떡이다가 멋쩍게 웃었다.
"일전에는 실례가 참 많았습니다. 오해로 벌어진 일이라고 하나...."
그 오해 자체가 오해입니다, 라고 말하려던 금보옥은 다른 말을 꺼냈다.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다른 소저들 앞에서는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강윤식은 반성보다는 아니 그게 어때서? 하는 듯 눈을 크게 치떴다.
"나비가 향기로운 꽃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리요. 우물에게 끌리는 것은 남아라면 마땅한 일이 아니겠소?"
"뭔 말을 그렇게 고상하게 하시나. 여자는 그냥 요물이라니까."
황철웅이 덧붙이자 남자들 사이에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금보옥은 침착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웃음이 수그러질 무렵에 툭 한 마디를 하였다.
"남자는 괴물이지요."
자리에 웃음기가 완전히 가셨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꽃을 보면 두고 감상하기보다 꺾어 취한다. 꽃의 입장에서는 결코 원치 않을텐데도 말이다. 남자들은 침묵하였고, 비위를 맞추던 여자들도 순간적으로 직업적 미소를 흐트러진 채 당황할 정도였다.
".....여인의 입장에서는 그럴지도 모르겠구려."
초제학이 운을 떼었다. 황철웅과 강윤식은 놀라 그를 보았다. 초제학은 고소를 머금었다.
"자네들도 알지 않는가.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어머님은 아직도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계신다네."
"자네 출생을 욕보일 의도는 아니었네. 그리고 공자께는 내가 경망되게 굴었으니 결례를 용서바라오."
강윤식이 순순히 사과하자 금보옥도 자신도 말이 심했다며 듣기 좋은 말을 하였다. 아슬아슬하게 대치했던 국면이 풀리자 덕후는 박수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양쪽 다 옳은 소리요. 여자는 홀리고, 남자는 잡아먹으니까. 서로 거시기 단속을 잘합니다. 임자 없는 물건이라해도 함부로 휘둘렀다가는 썽둥~ 썰릴테니."
"하하하핫~! 그래도 난 여자가 참 좋소. 봉지에 하루라도 들어가지 않을 거시기라면 달아봐야 무슨 소용이요. 중놈 거시기는 다 짤라야한다니까!"
가위질을 하는 덕후의 익살맞은 모습에 맞장구 치듯이 황철웅이 탁자를 쳤다. 눈칫밥으로 먹고 사는 여자들도 재빨리 비위를 맞추며 방금 전의 어색함을 물에 탄 듯 희석시켜갔다. 밤은 점점 깊어지고 하늘의 별이 총총해지는 가운데 만취한 공자들은 여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하나 둘 별실로 퇴장하였다.
엉망이 된 탁자에는 덕후와 금보옥만이 남았다.
"진목면을 보여준다는 게 이런 것인가요?"
냉수로 입을 헹궈 술김을 씻어내던 덕후는 뱉어내려다가 금보옥의 눈을 의식해서 꿀떡 삼켰다.
"참 단순하지 않소? 아까는 자기 주관을 굽히지 않다가 막상 주변에 친인의 사연이 있으니 순순히 사과하지 않소. 참 이기적이라 보시오?"
"글쎄요..."
"남자는 말이오. 다는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족이나 아는 여자가 아니라면 신경도 안 쓴다오. 조물주가 준 본능인지 몰라도, 그럴 듯한 여자만 보면 당장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지."
"그래서요? 청루 아가씨처럼 아양이라도 떨란 말인가요?"
"내 말은, 친구로 만들라는 뜻이오. 모르는 여자, 어찌되어도 상관없는 여자, 언젠가는 먹어버릴 여자가 아니라 좋은 누나나 동생 관계만 되어도 기꺼이 예의를 지키고 협력해 줄 것이오. 기호라면 모를까 같이 숨쉬며 살아있는 인간으로 접하면 함부로 하기 어려운 법이니."
당금 현실에 맞지 않았지만 한 번 음미하게 만드는 여운을 담고 있었다. 실제 덕후는 전생에서 그런 관계를 적지 않게 유지하고 있으니까. 규중에서 정해진 안에서만 살았던 금보옥에게 덕후의 관점은 실현가능성을 떠나 발상 그 자체만으로도 껍질을 깨는 듯한 울림을 전하고 있었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할까요?"
"나는 진정한 친구에는 남녀노소가 없다고 믿고 있소. 참, 처음부터 끝까지 흑심을 품은 사람은 배제하시오. 물론 나는 빼고."
의뭉을 떤 덕후는 금보옥에게 제의하였다.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겠소?"
금보옥은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녀의 상태는 낮의 대결과 몇 잔의 자작으로 몸에 힘이 없는 듯한 기분이었다. 둘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유등의 빛을 품고 있는 별채로 부터 멀어지자 조용한 어둠이 둘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둘은 무공을 익힌 몸이라 별빛 만으로 해뜨기 전의 새벽처럼 주위를 인지할 수 있기는 했다.
문득 금보옥은 덕후가 자신을 덮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함 보다는 강윤식에게 한 발언을 의식한 탓이었다.
-나, 취했나 봐.
"본전은 찾지 못한 것 같네요."
분명 덕후가 금보옥을 꾄 구실은 강윤식과 논검이었다. 그러나 강윤식은 술에 떡이 된 채 여자를 안고 사라졌다. 금보옥은 생색낼 시늉조차 하지 않은 것인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것은 나와 해도 충분하지 않겠소. 지금 여기서."
"상공?"
금보옥의 물음에 덕후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금보옥의 눈에 익숙한 기수식을 잡아가더니 측면으로 권을 떨쳤다. 한 줄기 질풍이 섬전처럼 허공으로 쏘아져 나갔다.
-쏴아아아
권경이 지나간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방원 삼장 이내의 초목이 휘말려갔다. 금보옥은 처음에 두 눈을 깜빡거리고 있다가 서서히 경악하였다.
"방금 것은..."
"열풍권 수라식이오. 1식 질풍권."
그 뒤로 덕후는 차례로 이식 사영권과 삼식 진공권을 펼쳤다. 단지 위력만 선보이는 게 아니라 금보옥이 초식의 전후를 파악할 수 있도록 무척 공을 들여 시전해 보였다.
"이걸 제게 왜....?"
처음에는 자신이 열풍권 수라식의 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줄 알았지만, 그럴 목적이었다면 처음의 일식만으로 충분했다. 이렇게 자세히 보란 듯이 시연해보이는 까닭이 없다.
"낮의 비무로 단점을 알았을 것 아니오. 이것으로 보완이 될 것이오. 열풍권이 개세무학이라 하나, 그대는 나찰식을 익혔으니 나머지 수라식도 금방 익힐 수 있을 것이오."
"은사님을 뵈셨나요?"
"음...."
덕후는 코를 매만졌다.
"뭐 그렇소. 진짜 전인인 당신을 보면 나머지를 알려달라는 군."
"거짓말."
금보옥은 밝게 웃었다. 밑도 끝도 없는 반응이었으나 덕후는 그 웃음 속에 포장된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것만 같은 격정을 읽을 수 있었다.
"은사님이 제 곁을 떠난 이유는 진짜 전인을 찾기 위해서였어요. 말로는 제 짝을 찾아주겠다고 하면서요. 은사님의 천수가 얼마 남지 않은데 전인이 나타자지 않아 초조한 상태였어요.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절반인 수라식만 전수하여 적합한 이를 대상련의 저를 찾아오도록 안배 하신거지요. 할아버님은 본련의 입장에서 절정고수를 거저 얻을 수 있으니 승락하셨고요."
금보옥은 덕후가 모용황을 만난 적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그가 어떻게 수라식을 알고 있느냐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중요시하지 않았다. 차라리 숨기고 전인임을 내세워 자신을 취하는 거이 이득일 터인데 어째서 뻔한 거짓말을 해가면서 수라식을 자신에게 전수하려고 하는 것인가.
금보옥은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았다. 스무 해 넘지 않는 여정이었다. 말 그대로 장중보옥으로 태어나 온갓 호사를 누려왔다. 그러나 금보옥이 원한 것은 단순히 먹고 입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키운 할아버지의 꿈을, 그리고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대상련의 포부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금보옥의 바램은 금방 난관에 부딪쳤다. 이 시대에 여자로 태어난 그녀는 어디까지나 대리적인 존재에 불과하였다. 그녀가 타고난 총명과 재지로 이름을 떨친다한들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고 할아버지에게 돌아갔다. 할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남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등바등 구혼하였다. 그것에 진절머리난 금보옥은 전인이 나타난다면, 약속대로 나찰식만 전수하고 모든 것을 금천효에게 넘긴 채 은거할 결심을 하였다. 그것이 세상의 인식과 모용황의 구상에 대한 최소한의 반발이었다.
"한때 강호를 동경한 적이 있어요. 은사님이 말씀하신 강호는 모두가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주연들이며, 선악 시비가 분명하고 협이 살아 숨쉬는 세계였으니까요. 내가 수많은 무공 중에 굳이 권을 택한 것도 은사님의 기질을, 얽히는 것 없는 바람과도 같은 자유로움을 닮고 싶어서였으니까요."
어둠 속에서 금보옥의 얼굴이 처연하게 빛나보였다.
"알아요. 철모르는 소녀의 꿈을 깨기 싫어하는 배려였다는 걸. 당신도 그렇게 할 참인가요?"
"나는...."
덕후는 목이 메여 잠시 침을 삼켰다.
"당신이 결코 누구 대신이라고 생각하진 않소. 내 눈 앞에 서 있는 당신은 이 밤 속에도 있는 그대로 빛나니까."
덕후는 한 발 다가갔다. 금보옥의 앞에 서서 그녀의 한 손을 잡아 가만히 쥐었다.
"나는 그 빛을 더할 뿐이오."
금보옥은 자신의 작은 손을 덕후의 손에 맡기면서 가만히 있었다. 조용히 덕후를 보던 금보옥은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한 소녀는 한 남자를 알고 있었어요. 그들 사이에는 먼 거리가 있기에 오직 소식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지요. 남자는 소녀의 존재조차 몰랐을 거예요."
하늘의 별빛을 두 눈에 담아가던 금보옥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 남자는 소녀가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보장받은 몸이었어요. 그에 대해서는 소녀는 시기조차 하지 못했답니다. 소녀가 상상하는 그는 너무나 완벽한 존재였으니까요. 그런데....어느날 소녀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답니다."
일황자가 황태자의 자리를 거지 황자나 다름 없던 이복동생에게 미련없이 넘겨주었다는 것을. 그리고 몇 년 후 홀연히 강호로 나왔다는 것을. 그것은 금보옥에게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대리적으로 태어난 자신이 아닌, 선택받은 자로서 태어난 그가 모든 것을 미련없이 버리는 모습에서 은사와 첫만남 이후로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개성과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직접 만나보고 싶어 북경에 있는 언니에게 한 번 운을 띄워보았다.
"직접 만나보니 어떻소?"
평소 여상한 태도로 돌아온 덕후의 모습에 금보옥은 쓰게 웃었다. 자신이 품은 환상을 여봐라는 듯 박살내는 행보에는...
"비호감."
"...매우 짜군."
"요즘은 처음처럼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긴 해요."
"아직 희망은 있구려."
"포기하면 편해진다는 소리는 못 들었나요?"
금보옥의 반격에 덕후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 모습에 금보옥은 낮게 소리 죽여 웃더니 이내 맑고 청량한 웃음으로 변했다. 덕후도 고개를 흔들다가 마주 웃었다. 두 남녀의 웃음이 잦아드는 가운데 덕후는 입고 있던 장옷을 벗어 금보옥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금보옥은 사양하지 않고 장옷의 옥깃을 잡아당기며 꼭 껴안아 입었다.
뱃전에 받았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고, 아련한 눈빛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덕후는 잠시간 넋을 잃었다. 술김 덕분이었을까, 입을 반쯤 벌리고 멍청히 있는 모습은 바보 같은데도 책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마음이 한 없이 가벼워져 속에 맴돌던 던 무언가가 언어가 되어 흘러나왔다.
"당신이라면 제 모든 것을 걸어도 좋을 것 같아요."
대상인의 손녀가 할 말은 아니지만요...그렇게 말을 흐린 금보옥은 덕후의 반응을 보기 부끄러워져 등을 돌렸다. 휘청거리며 위태롭게 걷는 그녀의 등을 덕후는 조용히 응시하였다. 시야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입가에 저도 모르게 호를 그었다.
사랑스러웠다. 과거와 미래의 기로에서 선택으로 번민하는 현재진행형은, 돌이킬 수 없는 시절을 보낸 자신과 달리 순수가 있었다. 음습한 감정에 사로잡히면서 덕후는 가슴만으로 담아두기에는 벅차 독백의 형태로 나타났다.
"전부를 걸지는 마시오. 훗날, 앞으로 내가 행할 일들을 알게 된다면.....나를 증오하게 될 테니까."
증오만으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덕후는 가급적 그 날이 오지 않기를 새벽이 올 때까지 그 자리에서 되뇌었다.
낙화생(땅콩)에 대한 딴지. 원산지가 브라질로 표기되어있고,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와있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만.....중국에 언제 도입됬는지는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군요. 아마 추측건데 청대에 감자와 고구마가 도입될 때 외래종으로서 같이 들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감자와 고구마의 위력은 대단해서 청대에 인구도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3억 넘었다던가? 뭐 그것도 레전드 마오의 무제한출산작전으로 인한 십억돌파 듕꿔라간의 위업에 비하면 약과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