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야설) 붉은 달(月)을 베다. 1 회
** 白雲俠(낭만백작)著/ 붉은 달(月)을 베다 **
[ 이글은 조선중기 왜란이 끝난 후 일본에 도쿠가와 막부(幕府)가 들어서기 직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인물, 상황 등은 모두 작가에 의해 꾸며진 것이므로 사실과 다름을
밝혀둡니다. 글 제목의 * 붉은 달(月) * 은 일본인들이 태양이라 칭하는 일본국기 히노
마루속의 붉은 원 을 상징해 보았습니다. ]
제 1 회 유린(蹂躪) 당하는 아낙들
서생포(西生浦)!!
바닷가의 넓은 백사장은 고운 모래밭을 이루어 반짝이고, 뒷마을 산아래로는 푸른 들이 연이어
펼쳐져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 포근하고 한가롭던 마을 서생포가 어느 순간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을 맞이한 듯 우왕좌왕 정신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악.. 아악.. 사람살려!」
「아악.. 제.. 제발.. 으악.. 끄으으으윽!」
이곳 서생포에 시커먼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뿔이 달린 듯한 투구를 쓴 왜군의 병사들이 불현듯
침범을 해 평화로운 이 마을의 순박한 양민들은 능욕하고 살해하며 처절한 참상(慘狀)의 장(場)
을 만들고 있었다.
* * * * * * * * * *
그 시기의 조선은 당파 싸움만을 일삼아 국방을 소홀히 하고 있었고 이이(李珥;율곡)가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국방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왜군이 침공할 가능성을 역설하고 있었으나
오히려 정적들의 견제를 받아 힘을 잃어가는 실정이었다.
그처럼 조선의 왕실이 안이한 생각에 젖어 있을 때 일본은 도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국
내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을 통일하여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고 있던 시기였다.
또한 히데요시는 국내 통일에 이용한 영주들의 힘을 일본의 밖으로 돌려 자체의 불안을 없애려
대륙의 침략을 꿈꾸게 되었다.
그의 처음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침공하자는 데에 있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에
서신을 보내어 통신사를 보낼 것을 요구해 왔다.
조선의 국왕 선조는 황윤길과 김성일을 왜국에 사신으로 보내어 그들의 속셈을 면밀히 살폈다.
그러나 일본을 살피고 온 두 사신의 보고는 상반되어 조정의 대신들도 의견이 엇갈렸다.
아니.. 엇갈린 것이 아니라 모두들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나 어느편이 자신의 당파에
득이 될까 저울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황윤길은 서인(西人)이고 김성일은 동인(東人)이라
자당의 득실을 면밀히 계산하는 싸움이 된 것이다.
그 당파의 대립속에 결국 조선의 조정은 무사안일을 원(願)한 동인(東人)의 손아귀에 놀아나
처절한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이었다.
* * * * * * * * * *
선조(宣祖) 25년 왜란(倭亂)의 초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왜군 전함이 바다를 건너 가장 먼저 상륙한 해안 서생포..! 그 평
화로운 마을에 상륙한 왜장(倭將) 가토(加藤)가 가장 먼저 한 일이 축성(築城;성을 쌓음)이었
다. 이곳에 왜군의 요새를 만들어 북상(北上) 하려는 왜군의 전초기지로 삼으려는 심산이었다.
아비규환의 지옥이 따로 없었다.
가토(加藤) 휘하의 왜군들은 서생포의 장정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축성의 노역을 시켰고
순박한 아낙네들은 그들의 욕정(欲情)을 해소하기 위한 음행(淫行)의 대상이 되어, 죽고 싶어도
목숨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치욕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나, 그 불쌍한 조선의 백성을 돌보
아야 할 서생포첨사(僉使)를 비롯한 모든 관원(官員)들은 백성을 팽개치고 이미 줄행랑을 놓은
지 오래고, 오직 이곳에 남아 야차(夜叉)와 같은 왜병들에게 목숨을 걸고 대항하며 주민들을 보
살피고 있는 인물은 역관(譯官;통역을 하는 관리) 김생원 한 사람 뿐이었다.
그 서생포(西生浦)의 축성(築城)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열세 살 소년..!
관아(官衙)와 일본의 섬 대마도(對馬島;쓰시마)사이에 일어나는 무역을 위해 양국의 통역을 담
당 하던 역관(譯官) 김생원의 아들인 명(明)이다.
그 아이.. 명(明)은 서생포의 앞 바다위에 솟아있는 조그만 섬 명선도의 바위에 앉아 산위에 점
점 완성되어 가는 성(城)을 바라보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 * * * * * * * * *
「아악.. 아아악!」
수십 명의 왜군(倭軍)병사들이 히히덕거리고 있는 가운데 머리채를 휘어 잡힌 채 산중턱 한구석
으로 질질 끌려간 명(明)의 어머니 산원댁(珊媛宅)!
옷은 발기발기 찢기고 남색 치마는 가슴위로 말려 올라가 얼굴에 덮혀져 있으며, 다리아래 하얀
속곳은 이미 벗겨져 허옇게 드러난 허벅지 속살은 치욕스러운 듯 바들바들 떨고, 작열하는 태양
을 그 속에 받으며 널브러져 있었다.
그 발가벗겨져 처연한 몸뚱이를 히죽거리는 웃음으로 바라보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왜군(倭
軍) 병사들..!
그들 중 수장(首長)인 듯한 무사 한명이 잡초바닥에 팽개치듯 뉘여져 있는 산원댁(珊媛宅)의 허
리아래 벌겋게 드러난 허벅지를 양손으로 벌렸다.
「크흐흐.. 제법 잘 익었구나.」
「흐흐흑..! 제.. 제발.. 그만.. 그.. 그만..!」
여인은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보다 두려움이 더욱 앞서 두눈을 꼭 감고, 드러난 음부를 두손으로
가리며 겨우 나오는 목소리로 빌고 또 빌었다.
「후후.. 조금만 기다리거라. 네년이 스스로 내게 매달리도록 즐겁게 해주마. 이보게들.. 이년
팔다리를 좀 붙들어 주게..!」
그 무사가 음흉한 웃음을 머금고 여인의 다리사이에 엎드려 허리춤을 내리고 시커먼 육봉을 끄
집어 내며 가녀린 여인의 음문을 무자비하게 열어 젖힌다.
옷은 갈기갈기 찢겨 발가벗겨진 몸으로 팔과 다리가 네 명의 병사들에게 붙들려, 꼼짝 못하고
큰 대(大)자로 뉘여져 희롱당하는 산원댁(珊媛宅)의 눈은 분노에 일그러졌다.
「이 더러운 짐승같은 놈.. 퉤..!」
- 딱.. 철썩.. 철썩..!
산원댁(珊媛宅)의 얼굴이 옆으로 휙.. 돌아간다.
얼굴을 향해 뱉은 가래침을 쓰윽.. 닦아낸 그 무사의 솥뚜껑같은 손바닥이 산원댁(珊媛宅)의 뺨
을 후려갈긴 것이다.
「크흐흐.. 앙탈을 하지 않는 다면 무슨 재미가 있으랴. 죽어 늘어진 고기는 아무런 맛도 없지
않은가. 크하하하..!」
얼굴에 손자국이 선명한 여인의 모습은 아랑곳 하지않고 그 거대한 육봉이 음문을 파고 들려는
그 순간..!
「이.. 이놈.. 에잇.. 컥.. 으윽..!!」
- 푹.. 찌이익..
억지로 여인의 고간(股間)을 벌려 겁탈을 하려던 그 무사의 얼굴에 여인의 손톱이 파고 들어 붉
은 선혈이 튀었다.
「이.. 이년이..!」
벌떡 일어나 허리의 긴 칼을 빼어 들고 여인을 내려치려던 무사의 얼굴에는 순간 당황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빼어든 칼로 내려치기도 전에 이미 산원댁(珊媛宅)의 얼굴은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있고 그녀의
고개는 옆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혀를 깨물고 자결을 한 것이다.
- 다다다닷..
「이.. 이.. 이놈 야스다..!」
그 광경을 목격한 동네 주민들이 급히 전한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역관 김씨는 손에 쇠스랑을 단
단히 쥐고 육탄으로 왜장 야스다에게 달려 들었다.
「이 놈이.. 감히..!」
- 쉬이익.. 번쩍..
그 순간 야스다의 칼이 바람을 갈랐다.
「아악.. 악.. 크윽.. 부.. 분하다. 명(明)아..!」
위에서 아래로 번쩍 빛을 발한 야스다의 대도(大刀)가 역관 김씨의 머리를 수박 쪼개듯 수직으
로 그어버린 것이다.
* * * * * * * * * *
야스다 가츠히로..!
노역에 끌려가 죽음을 당하고 왜병들의 음욕에 노리개가 되어 겁탈 당해 죽어가던 남녀노소 서
생의 주민들은, 이제는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한양을 향해 북상을 준비하고 있는 왜군(倭軍)을
향해 빈주먹 육탄으로 막아섰다.
그러한 주민들에게 마상(馬上)의 왜군 장수(將帥)들은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럿고 그 칼아래 수
많은 서생포 양민들의 목숨이 사라졌다.
그 수많은 억울한 희생자들 중의 한 사람..!
무자비한 야스다 가츠히로에게 강제로 겁탈 당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머니, 그리고 육탄으
로 달려들다 생명을 잃은 아버지..!
이제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신세가 된 명(明)은 틈만 나면 명선도의 바위위에 올라 이를 악물
고 왜성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졌다.
그 어린 고아 명(明)을, 육년 전 어느 날 마침 이곳을 지나다 인연을 맺은 봉래산 복천암의
주지승 혜암이 발견하여, 서생포의 왜성을 먼 눈길로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야스다를 머릿속에
깊이 새기고 있는 그 조그만 손을 이끌고 부산포(釜山浦)의 앞 섬 절영도(切影島)로 데려간 것
이었다.
여섯 살 때 서생포(西生浦)의 역관에서 맺은 혜암스님과의 인연..! 그때 혜암스님은 역관의 뒷
마당에 키가 높게 자라는 옥수수의 씨앗을 심고는 명(明)에게 지극한 당부의 말을 남겼었다.
「명(明)아.. 이 옥수수가 싹이 트는 그 순간부터 하루도 거르지 말고 뛰어 넘도록 해라. 단 한
번, 단 하루라도 게을리 하면 안되느니라!」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어린 명(明)에게는 너무나 장난 같은 스님의 말이었다. 그러나 한
번 싹이 튼 그 옥수수의 씨앗은 내리는 비를 맞아 무럭무럭 자라 어느 듯 여섯 살 명(明)의 키
보다 더 높이 자란 것이다. 그러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옥수수를 뛰어 넘던 명(明)에게는 비록
자신의 키보다 훨씬 커버린 옥수수였지만 그 정도의 높이는 손바닥 뒤집는 일보다 더 쉽게 날아
오를 수 있었다.
* * * * * * * * * *
부산포에서 뱃길로 이십 여리를 들어가 자리잡고 있는 섬 절영도(切影島)의 중앙에 우뚝 솟은
봉래산..!
그 봉래산의 중턱에 복천암(福泉庵)의 암자(庵子)가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아담하게 모습을 드
러내고 있다.
「연(蓮) 누나.. 뒷산에 칡 캐러 가.」
「에계계.. 명(明)아. 또 게으름을 피우고 싶구나?」
높은 나무를 뛰어 넘는 수련의 연속은 열네 살이 되어 이곳 복천암에 와서도 한결같이 계속 이
어지는 명(明)의 일과였다. 한결같이 반복되는 수련.. 명(明)이 그 훈련을 지겨워 하면서도, 그
런 수련에라도 몰두하여 머리 속의 생각을 털쳐버리지 않으면 눈앞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부모
님의 환영 때문에 못 견뎌 하는 아픔을 잘 알고 있는 연(蓮)은 한없이 따뜻한 눈길로 명(明)을
보살핀 하루하루였다.
「그래 가자. 그러나 스님 돌아오시기 전에 얼른 내려와야 한다.」
「알았어 누나.」
복천암의 뒷산 바위틈에 길게 뻗은 칡 줄기를 뒤져 뿌리를 캐내다 지친 명(明)이 연(蓮)의 품속
에 안겨 있었다.
마치 엄마의 품처럼 포근한 가슴.. 명(明)은 점점 그 가슴속 깊이 얼굴을 묻었다.
「누나.. 누나는 언제나 내 곁에 있어야 해. 나 혼자 내버려 두고 사라지면 절대로 안돼.」
점점 더 연(蓮)의 가슴속을 파고들며 어리광 부리듯 말하는 명(明)의 등을 토닥거리며 해맑은
웃음을 보여주는 연(蓮)의 미소가 명(明)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다.
* * * * * * * * * *
열 여섯 살 소녀(少女) 연(蓮)은 오늘도 절의 뒷쪽을 돌아 우거진 소나무 아래에서 산나물을
캐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무리 암자에서 부처님을 보며 수행에 매진을 한들 무엇하랴. 이렇게 몸을 움직여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지 않으면 그녀 눈(眼)속에, 목이 잘려 피를 토하는 부모님의 환영이 나타나 견딜
수가 없는 것을..!
그녀 역시 왜군의 손에 희생된 부모의 한(恨)을 품은 채 혜암스님의 손에 의해 이 복천암에 오
게 된 가여운 처지였다. 때문에 명(明)의 마음속 깊이 숨어있는 한(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명(明)을 마치 자신의 분신인 양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서로 오누이처럼 다정히 흘러간 칠년의 세월, 명(明)은 무예(武藝)의 수련에 여념이 없
었고 그러한 명(明)을 엄마처럼 늘 곁에서 지켜오던 연(蓮)에게도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젠 칠년의 왜란(倭亂)이 그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던 어느 날,
그날은 전란의 상황을 살피려 혜암스님과 명(明)이 부산포의 왜관으로 출타를 한 날이었다. 그
잠시 자리를 비운 순간에 암자에 홀로 남아있던 연(蓮)이 납치를 당한 것이다.
철수를 할 뱃길을 탐사하려 봉래산 산정에 올라 해로(海路)를 살피던 왜(倭)군 병사(兵士)들이
임무를 끝내고 하산을 하던 중 암자의 마당에 어른거리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는 갑자기 복천암
에 들이닥쳐 그 곳에 혼자 남아 빨래를 하고있던 연(蓮)을 끌고 사라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