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교사를 노려라 제1장 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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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綺羅光 (Kira Hikaru), ねらゎれた 女敎師 (여교사를 노려라), フラン
ス書院]
제 1 장 미술교사 민아영, 26세
(1)
커튼 사이로 부드러운 가을 햇살이 비쳐들고 있다.
일요일 아침, 여덞시를 약간 넘길 무렵. 한주 동안 쌓인 피곤을 풀기
위해서 민아영은 평소보다 늦잠을 자면서 침대에 몸을 묻고 있었다.
이때 사이드 테이블의 전화가 울렸다.
( 누굴까? 이렇게 이른 시간에… )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아영은 침대에 누운 채로 수화기를
들었다.
[ … 전화받았습니다. 민아영입니다. ]
전화를 받는 아영의 목소리는 평소의 발랄한 목소리와는 달리, 가냘
프게 메말라 있었다. 이제 막 깊은 잠에서 깨어난 참이기 때문일 것이
다.
[ 아, 너무 이른 시각인가요, 선생님. 저, 김선생입니다. ]
수화기에서 체육교사인 김남길의 귀에 거슬리는 거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러자 갑자기 아영은 짜증이 이는 것이었다.
[ 어? 혹시 아직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
[ … 예, 예에. ]
[ 이런 너무 죄송하게 되었네요. 하하하. 날씨가 너무 좋아서 말이죠,
오늘은 진짜 운동하기 딱 좋겠다 싶어서, 사모하는 민아영 선생님하
고 테니스라도 함께 치면 어떨까, 이렇게 전화를 드린 참입니다. ]
[ …. ]
[ 가끔씩은 마음껏 땀을 흘리는 것도 좋아요, 민선생님. 그런 후에 맥
주 한잘 들이키면 죽인다니까요, 하하하.. 저한테 맡겨만 주세요. 수입
맥주를 다양하게 들여 놓는 호프집을 제가 압니다. ]
품위없는 김남길의 실실 웃는 말투에 아영은 진절머리가 났다. 그렇
지 않아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아침이었다.
( 끈질겨, 징그럽고, 센스없는 남자같으니라구! )
아영은 자기가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심한 말을 속으로 퍼부어 대었
다.
[ 어때요? 한시간 뒤에 제가 댁으로 찾아가도록 할까요? ]
[ 아뇨, 별로 내키지 않네요. ]
[ 흐음. 운동이 별로라면, 그럼 드라이브는 어때요? 미사리 쪽이 근사
할텐데… ]
[ 저, 지금 몸이 별로에요! ]
아영은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 엥? 그럼 큰 일이지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병문안이라도… ]
[ 이제, 그만 좀 해주세요. 다신 전화하지 말아 주세욧. ]
꽝하고 난폭하게 전화를 끊은 아영은, 기세 좋게 이불을 얼굴 위로 뒤
집어 썼다.
등이 땀으로 촉촉한게 느껴졌다.
( 다른 때보다 더 안좋은 것 같아.)
이불 속에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민아영은 올해로 스물 여섯살. 계성 재단 부설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단정한 미모에 날씬하면서 섹시한 몸매를 하고 있어서 학생들과 선생
님들, 심지어 학부모회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화려
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행동거지는 이외일 정도로 조신했다.
아영은 예전에 임화식이라고 하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 화단에서
는 젊은 귀재로 주목을 받고 있던 전위 화가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화식은 이년전, 개인전 준비를 위해 방문했던 프랑스에서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다.
이후 아영은 남자와 어울리는 것을 굳게 피하고 있었다. 새로운 행복
을 슬슬 찾아야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마음 속에선 아직
도 화식이 생생하게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도무지 다른 남
자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한편으론, 화식에 의해 문이 열린 아영의 육체는 한층더 요염함을 더
해가고 있었다. 매끈하게 윤기나는 새하얀 피부는 성숙한 여인의 향
을 발산하면서 남자의 손길이 닿기만을 기다리는 것같았다. 그리고
아영의 이성과는 달리, 뜨겁고 정열적인 화식의 포옹을 아영의 몸이
저절로 기억해내곤, 비밀스런 부분이 애액으로 촉촉해지는 일도 있었
다.
이런 이성과 육체의 불균형이 아영의 몸 메커니즘에도 미묘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매달, 생리가 시작되면 정서불안이 심해지는 것이었다.
묘하게 짜증이 난다든지, 악몽에 가위 눌린다든지, 그리고 특히 심할
때는 자기가 뭘하는지 모르게 될 정도였다. 요 몇 개월간, 생리 때마다
그런 경향이 심해졌다. 이를테면 오늘처럼…
의사는 [ 애인을 사귀는게 제일입니다]라고 무책임한 말을 했다. 그러
더니, 아영 같은 미인이 왜 애인이 없을까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아
영을 대하기까지 했다.
( 아아, 화식씨… )
이불을 몸에 돌돌 감으면서, 아영은 중얼거렸다. 눈물이 한방울 눈가
를 타고 흘러 내려서 시트로 떨어졌다.
(2)
[ 흐음. 잡히면 생리라고 핑계대는 여자가 너무 많아서. ]
남자는 화가 난듯 말을 내뱉었다.
[ 저,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기분전환을 할려고 산책을 하고 있었습
니다. 어느새 머리속이 멍해져서, 뭐가 어떻게 된건지 기억도 안나요
… 아아, 정말 죄송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 ]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당신, 학교 선생님이라며? 더욱이 계성이라
면 명문곤데. 이런 파렴치한 일을 저지르고선, 학생들을 가르칠수나
있겠어? ]
남자의 말을 듣고 아영은 어깨가 축 처졌다. 무릎 위에 놓인 양손을 꾹
쥐었다.
이곳은 시내 번화가에 있는 쇼핑 센터의 수위실. 판자로 벽을 쳐놓은
안쪽의 취조실에 아영은 끌려와 있었다. 책상 위에는 신분증을 포함
해서 소지품 일체가 올려져 있었다. 절도 현행범으로 취조를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 그래서 생리 때마다 이런 짓거리를 벌이나 보지? ]
[ 아, 아니에요. 이런 일은, 정말 처음이에요. ]
[ 다들 말은 그렇게 하지. 뭐, 아무튼, 옷을 벗어줘야 되겠어. 신체검사
를 해야 되니까. 정확한 피해액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
[ 그, 그런… ]
남자의 말에 아영은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사정하는 눈초
리로 남자를 쳐다보았지만, 사내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이야길 이어갔
다.
[ 절도의 경우는, 엄중하게 몸조사를 하도록 정해져 있어. 상습범의 경
우는 속옷 안에 비싼 액세서리들을 숨기는 경우가 많아서 말야. ]
[ 너, 너무하세요. 정말 저,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
목이 바싹 말라 왔다. 이게 현실인지 믿겨지지가 않았다. 아직 아침의
악몽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어쩔 수 없지 뭐. 정 그렇다면. ]
[ ….. ]
[ 그렇게 싫다면, 경찰에 넘길 수밖에. 이쪽은 되도록이면 요란하지 않
게 끝내고 싶지만 말야. ]
만약 경찰에 넘겨진다면 교사로서 자기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 그런 생각이 들자, 아영은 또한번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체념했다.
[ … 저, 여기서… 벗습니까? ]
[ 응, 그래. ]
[ 그러면… 아, 아무분이나 여자분에게.. 안될까요? ]
이런 환한 장소에서, 게다가 알지도 못하는 남자 앞에서 알몸을 드러
낸다는건 얌전한 아영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죽고 싶을
정도의 굴욕이었다.
[ 오늘은 공교롭게도 여자 담당자가 쉬는 날이어서. 뭐야, 당신, 내가
이상한 일이라도 벌인다는거야? ]
[ 아, 아니요. 그렇진 않지만…. ]
[ 그럼 빨리 시키는대로 해. 이쪽은 당신만 처리해야 되는게 아니니까.
어서 용무를 마치는게 서로에게 좋은거 아냐? ]
경비원은 약간 거친 말투로 말하더니, 신체검사를 받을지 경찰서로
갈지 택일하라고 한번더 재촉했다.
아영은 완전히 기가 죽어서, 오들오들 의자에서 일어섰다.
( 아아.. 어쩌다 이런 지경이 되었담… )
그렇지만 어떻게든 견뎌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직장을 잃지 않기 위
해서도. 그렇게 속으로 마음을 굳게 먹고서, 사내에게 등을 돌리곤 천
천히 스웨터 자락을 머리쪽으로 들어 올렸다.
[ 이쪽을 향해 벗었으면 하는데. 음부에다 숨겼거나 하면 곤란하니까.
]
[ 아앗… ]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아영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김남길의 전화로 잠이 깬 후, 안좋은 기분을 풀기 위해서, 아영은 시내
로 산책을 나갔던 것이다. 단골인 화구점에서 물감을 책방에선 고호
평전을 산 것까지는 확실히 기억이 났다. 그러나 나들이 나온 가족들
이랑 젊은이들로 북적거리던 길을 걷고 있던 사이에, 머리가 멍해져
서, 자기가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었
다.
얼마나 그렇게 걸었을까. 갑자기 뒤에서 어깨를 탁탁 두드리는 바람
에, 아영은 정신이 들었다.
[ 손님,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
[ … 네에? ]
뒤돌아 보자, 폴로 셔츠에 블레이져 차림의 삼십대 후반의 운동선수
타입의 남자가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서있었다.
[ 그 주머니에 들어 있는 물건들, 계산은 하셨습니까? ]
정중했지만, 그 남자의 말투에는 한치의 빈틈도 없었다. 아마 사복 차
림의 경비원인가 보다고 아영은 생각했다. 가늘고 작은 눈이었지만,
눈빛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영은 손에 쥐고 있던 화구점의 종이 봉투를 들여다 보았다. 거기엔
전혀 본 기억이 없는, 핑크색의 블라우스가 어느샌가 들어 있었다.
[ 어머? 어떻게 된거지? ]
[ 곤란하네요. 잠시 사무실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
[ 그렇지만, 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건지. ]
말문이 막혔다. 심장이 종치는 것처럼 급하게 뛰면서, 얼굴에서 핏기
가 사라졌다.
( 절도? 내가? )
아영은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방금, 자신이 빠져 나온걸로 생각되어
지는 건물을 바라 보았다. 거기는 대기업체가 개발해서, 최근에 문을
연 쇼핑 센터였다. 정신을 놓고 쇼핑센터 안을 걷고 있었던듯 했다.
[ 자, 갑시다. ]
[ 기, 기다려 주세요. 뭔가 실수일거에요, 분명히. ]
[ 그러니까 이야기는 사무실에서 듣는다고 하지 않았어. 이런 곳에서
사람들 구경거리가 되고 싶은가, 자네? ]
남자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었다.
무서움에 아영은 몸이 쪼그러드는 것 같았다. 남자가 몇마디 더 위협
을 하자, 아영은 고개를 숙이고 남자의 뒤를 쫓아 갔던 것이다.
( 이런 일이 학교에 알려지면… )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전부 자기를 꾸짖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 같
은 착각에 사로잡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쇼핑 센터 안을 가로질러, [ 종업원 전용] 이라고 씌어진 철제문을 남
자가 열었다. 문 안쪽은 쇼핑 센터 안의 밝음과는 대조적으로 어둡고
서늘해서 아영은 겁이 든 참에 이제 몸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이윽고 수위실 앞에 이르자, 남자는 아영 쪽을 돌아 보았다. 입가를 조
금 일그러뜨리고, 찡그리는듯한 웃음을 짓는게, 어딘가 불길했다. 그
러더니 친한 사이인 것처럼 아영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수위실 안
으로 아영을 가볍게 밀어 넣었다.
- 계속 -
( 오랫동안 연재를 쉬었습니다. 워밍업 겸해서 역시 키라씨의 <ねらゎ
れた 女敎師 (여교사를 노려라: 가제)> 를 약간 번역해 보았습니다. 전
11장으로, 미인세자매 절반 정도 분량의 장편입니다. 그리고 감각을
되찾는데로, 미인세자매의 마지막 15장을 번역해서 올리도록 하겠습
니다.
요즘 내놓는 키라씨의 신작들도 괜찮긴 하지만, 역시 진짜배기 키라
히카루를 느끼려면 과거에 그가 내놓았던, 묵직묵직한 문제작들을 읽
어 보아야 합니다. 미인세자매를 마치면, 그중에서 <雌獵 (암컷사냥:
가제)>을 번역하면 어떨까 생각 중입니다. 정말 마음에 드는 명장면들
이 많아서 개인적으로 아끼는 작품입니다. 단지 미인세자매보다 훨씬
길어서 번역을 시작하면 언제 끝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정리하자면, 여교사를 노려라를 일단 연재하면서 미인세자매를 완결
을 짓고, 암컷사냥을 새로 시작할 예정. 한 작품을 계속 하다보면 물릴
수 있으니, 기분전환으로 두 작품을 번갈아 연재할 가능성이 있습니
다. 워낙 암컷 사냥이 무거운 작품이라, 진도가 빨리 나가는 여교사를
노려라를 일단 끝낼지도 모르겠습니다.)
[ 綺羅光 (Kira Hikaru), ねらゎれた 女敎師 (여교사를 노려라), フラン
ス書院]
제 1 장 미술교사 민아영, 26세
(1)
커튼 사이로 부드러운 가을 햇살이 비쳐들고 있다.
일요일 아침, 여덞시를 약간 넘길 무렵. 한주 동안 쌓인 피곤을 풀기
위해서 민아영은 평소보다 늦잠을 자면서 침대에 몸을 묻고 있었다.
이때 사이드 테이블의 전화가 울렸다.
( 누굴까? 이렇게 이른 시간에… )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아영은 침대에 누운 채로 수화기를
들었다.
[ … 전화받았습니다. 민아영입니다. ]
전화를 받는 아영의 목소리는 평소의 발랄한 목소리와는 달리, 가냘
프게 메말라 있었다. 이제 막 깊은 잠에서 깨어난 참이기 때문일 것이
다.
[ 아, 너무 이른 시각인가요, 선생님. 저, 김선생입니다. ]
수화기에서 체육교사인 김남길의 귀에 거슬리는 거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러자 갑자기 아영은 짜증이 이는 것이었다.
[ 어? 혹시 아직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
[ … 예, 예에. ]
[ 이런 너무 죄송하게 되었네요. 하하하. 날씨가 너무 좋아서 말이죠,
오늘은 진짜 운동하기 딱 좋겠다 싶어서, 사모하는 민아영 선생님하
고 테니스라도 함께 치면 어떨까, 이렇게 전화를 드린 참입니다. ]
[ …. ]
[ 가끔씩은 마음껏 땀을 흘리는 것도 좋아요, 민선생님. 그런 후에 맥
주 한잘 들이키면 죽인다니까요, 하하하.. 저한테 맡겨만 주세요. 수입
맥주를 다양하게 들여 놓는 호프집을 제가 압니다. ]
품위없는 김남길의 실실 웃는 말투에 아영은 진절머리가 났다. 그렇
지 않아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아침이었다.
( 끈질겨, 징그럽고, 센스없는 남자같으니라구! )
아영은 자기가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심한 말을 속으로 퍼부어 대었
다.
[ 어때요? 한시간 뒤에 제가 댁으로 찾아가도록 할까요? ]
[ 아뇨, 별로 내키지 않네요. ]
[ 흐음. 운동이 별로라면, 그럼 드라이브는 어때요? 미사리 쪽이 근사
할텐데… ]
[ 저, 지금 몸이 별로에요! ]
아영은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 엥? 그럼 큰 일이지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병문안이라도… ]
[ 이제, 그만 좀 해주세요. 다신 전화하지 말아 주세욧. ]
꽝하고 난폭하게 전화를 끊은 아영은, 기세 좋게 이불을 얼굴 위로 뒤
집어 썼다.
등이 땀으로 촉촉한게 느껴졌다.
( 다른 때보다 더 안좋은 것 같아.)
이불 속에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민아영은 올해로 스물 여섯살. 계성 재단 부설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단정한 미모에 날씬하면서 섹시한 몸매를 하고 있어서 학생들과 선생
님들, 심지어 학부모회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화려
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행동거지는 이외일 정도로 조신했다.
아영은 예전에 임화식이라고 하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 화단에서
는 젊은 귀재로 주목을 받고 있던 전위 화가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화식은 이년전, 개인전 준비를 위해 방문했던 프랑스에서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다.
이후 아영은 남자와 어울리는 것을 굳게 피하고 있었다. 새로운 행복
을 슬슬 찾아야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마음 속에선 아직
도 화식이 생생하게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도무지 다른 남
자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한편으론, 화식에 의해 문이 열린 아영의 육체는 한층더 요염함을 더
해가고 있었다. 매끈하게 윤기나는 새하얀 피부는 성숙한 여인의 향
을 발산하면서 남자의 손길이 닿기만을 기다리는 것같았다. 그리고
아영의 이성과는 달리, 뜨겁고 정열적인 화식의 포옹을 아영의 몸이
저절로 기억해내곤, 비밀스런 부분이 애액으로 촉촉해지는 일도 있었
다.
이런 이성과 육체의 불균형이 아영의 몸 메커니즘에도 미묘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매달, 생리가 시작되면 정서불안이 심해지는 것이었다.
묘하게 짜증이 난다든지, 악몽에 가위 눌린다든지, 그리고 특히 심할
때는 자기가 뭘하는지 모르게 될 정도였다. 요 몇 개월간, 생리 때마다
그런 경향이 심해졌다. 이를테면 오늘처럼…
의사는 [ 애인을 사귀는게 제일입니다]라고 무책임한 말을 했다. 그러
더니, 아영 같은 미인이 왜 애인이 없을까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아
영을 대하기까지 했다.
( 아아, 화식씨… )
이불을 몸에 돌돌 감으면서, 아영은 중얼거렸다. 눈물이 한방울 눈가
를 타고 흘러 내려서 시트로 떨어졌다.
(2)
[ 흐음. 잡히면 생리라고 핑계대는 여자가 너무 많아서. ]
남자는 화가 난듯 말을 내뱉었다.
[ 저,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기분전환을 할려고 산책을 하고 있었습
니다. 어느새 머리속이 멍해져서, 뭐가 어떻게 된건지 기억도 안나요
… 아아, 정말 죄송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 ]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당신, 학교 선생님이라며? 더욱이 계성이라
면 명문곤데. 이런 파렴치한 일을 저지르고선, 학생들을 가르칠수나
있겠어? ]
남자의 말을 듣고 아영은 어깨가 축 처졌다. 무릎 위에 놓인 양손을 꾹
쥐었다.
이곳은 시내 번화가에 있는 쇼핑 센터의 수위실. 판자로 벽을 쳐놓은
안쪽의 취조실에 아영은 끌려와 있었다. 책상 위에는 신분증을 포함
해서 소지품 일체가 올려져 있었다. 절도 현행범으로 취조를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 그래서 생리 때마다 이런 짓거리를 벌이나 보지? ]
[ 아, 아니에요. 이런 일은, 정말 처음이에요. ]
[ 다들 말은 그렇게 하지. 뭐, 아무튼, 옷을 벗어줘야 되겠어. 신체검사
를 해야 되니까. 정확한 피해액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
[ 그, 그런… ]
남자의 말에 아영은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사정하는 눈초
리로 남자를 쳐다보았지만, 사내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이야길 이어갔
다.
[ 절도의 경우는, 엄중하게 몸조사를 하도록 정해져 있어. 상습범의 경
우는 속옷 안에 비싼 액세서리들을 숨기는 경우가 많아서 말야. ]
[ 너, 너무하세요. 정말 저,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
목이 바싹 말라 왔다. 이게 현실인지 믿겨지지가 않았다. 아직 아침의
악몽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어쩔 수 없지 뭐. 정 그렇다면. ]
[ ….. ]
[ 그렇게 싫다면, 경찰에 넘길 수밖에. 이쪽은 되도록이면 요란하지 않
게 끝내고 싶지만 말야. ]
만약 경찰에 넘겨진다면 교사로서 자기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 그런 생각이 들자, 아영은 또한번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체념했다.
[ … 저, 여기서… 벗습니까? ]
[ 응, 그래. ]
[ 그러면… 아, 아무분이나 여자분에게.. 안될까요? ]
이런 환한 장소에서, 게다가 알지도 못하는 남자 앞에서 알몸을 드러
낸다는건 얌전한 아영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죽고 싶을
정도의 굴욕이었다.
[ 오늘은 공교롭게도 여자 담당자가 쉬는 날이어서. 뭐야, 당신, 내가
이상한 일이라도 벌인다는거야? ]
[ 아, 아니요. 그렇진 않지만…. ]
[ 그럼 빨리 시키는대로 해. 이쪽은 당신만 처리해야 되는게 아니니까.
어서 용무를 마치는게 서로에게 좋은거 아냐? ]
경비원은 약간 거친 말투로 말하더니, 신체검사를 받을지 경찰서로
갈지 택일하라고 한번더 재촉했다.
아영은 완전히 기가 죽어서, 오들오들 의자에서 일어섰다.
( 아아.. 어쩌다 이런 지경이 되었담… )
그렇지만 어떻게든 견뎌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직장을 잃지 않기 위
해서도. 그렇게 속으로 마음을 굳게 먹고서, 사내에게 등을 돌리곤 천
천히 스웨터 자락을 머리쪽으로 들어 올렸다.
[ 이쪽을 향해 벗었으면 하는데. 음부에다 숨겼거나 하면 곤란하니까.
]
[ 아앗… ]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아영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김남길의 전화로 잠이 깬 후, 안좋은 기분을 풀기 위해서, 아영은 시내
로 산책을 나갔던 것이다. 단골인 화구점에서 물감을 책방에선 고호
평전을 산 것까지는 확실히 기억이 났다. 그러나 나들이 나온 가족들
이랑 젊은이들로 북적거리던 길을 걷고 있던 사이에, 머리가 멍해져
서, 자기가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었
다.
얼마나 그렇게 걸었을까. 갑자기 뒤에서 어깨를 탁탁 두드리는 바람
에, 아영은 정신이 들었다.
[ 손님,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
[ … 네에? ]
뒤돌아 보자, 폴로 셔츠에 블레이져 차림의 삼십대 후반의 운동선수
타입의 남자가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서있었다.
[ 그 주머니에 들어 있는 물건들, 계산은 하셨습니까? ]
정중했지만, 그 남자의 말투에는 한치의 빈틈도 없었다. 아마 사복 차
림의 경비원인가 보다고 아영은 생각했다. 가늘고 작은 눈이었지만,
눈빛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영은 손에 쥐고 있던 화구점의 종이 봉투를 들여다 보았다. 거기엔
전혀 본 기억이 없는, 핑크색의 블라우스가 어느샌가 들어 있었다.
[ 어머? 어떻게 된거지? ]
[ 곤란하네요. 잠시 사무실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
[ 그렇지만, 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건지. ]
말문이 막혔다. 심장이 종치는 것처럼 급하게 뛰면서, 얼굴에서 핏기
가 사라졌다.
( 절도? 내가? )
아영은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방금, 자신이 빠져 나온걸로 생각되어
지는 건물을 바라 보았다. 거기는 대기업체가 개발해서, 최근에 문을
연 쇼핑 센터였다. 정신을 놓고 쇼핑센터 안을 걷고 있었던듯 했다.
[ 자, 갑시다. ]
[ 기, 기다려 주세요. 뭔가 실수일거에요, 분명히. ]
[ 그러니까 이야기는 사무실에서 듣는다고 하지 않았어. 이런 곳에서
사람들 구경거리가 되고 싶은가, 자네? ]
남자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었다.
무서움에 아영은 몸이 쪼그러드는 것 같았다. 남자가 몇마디 더 위협
을 하자, 아영은 고개를 숙이고 남자의 뒤를 쫓아 갔던 것이다.
( 이런 일이 학교에 알려지면… )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전부 자기를 꾸짖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 같
은 착각에 사로잡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쇼핑 센터 안을 가로질러, [ 종업원 전용] 이라고 씌어진 철제문을 남
자가 열었다. 문 안쪽은 쇼핑 센터 안의 밝음과는 대조적으로 어둡고
서늘해서 아영은 겁이 든 참에 이제 몸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이윽고 수위실 앞에 이르자, 남자는 아영 쪽을 돌아 보았다. 입가를 조
금 일그러뜨리고, 찡그리는듯한 웃음을 짓는게, 어딘가 불길했다. 그
러더니 친한 사이인 것처럼 아영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수위실 안
으로 아영을 가볍게 밀어 넣었다.
- 계속 -
( 오랫동안 연재를 쉬었습니다. 워밍업 겸해서 역시 키라씨의 <ねらゎ
れた 女敎師 (여교사를 노려라: 가제)> 를 약간 번역해 보았습니다. 전
11장으로, 미인세자매 절반 정도 분량의 장편입니다. 그리고 감각을
되찾는데로, 미인세자매의 마지막 15장을 번역해서 올리도록 하겠습
니다.
요즘 내놓는 키라씨의 신작들도 괜찮긴 하지만, 역시 진짜배기 키라
히카루를 느끼려면 과거에 그가 내놓았던, 묵직묵직한 문제작들을 읽
어 보아야 합니다. 미인세자매를 마치면, 그중에서 <雌獵 (암컷사냥:
가제)>을 번역하면 어떨까 생각 중입니다. 정말 마음에 드는 명장면들
이 많아서 개인적으로 아끼는 작품입니다. 단지 미인세자매보다 훨씬
길어서 번역을 시작하면 언제 끝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정리하자면, 여교사를 노려라를 일단 연재하면서 미인세자매를 완결
을 짓고, 암컷사냥을 새로 시작할 예정. 한 작품을 계속 하다보면 물릴
수 있으니, 기분전환으로 두 작품을 번갈아 연재할 가능성이 있습니
다. 워낙 암컷 사냥이 무거운 작품이라, 진도가 빨리 나가는 여교사를
노려라를 일단 끝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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