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X - 25부
아침을 먹기 위해 호텔 2층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회장의 결혼식을 위해 서둘러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의 모습이 보여야 할 텐데 너무 이른 아침인지 기척도 없었다.
야채만 접시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컵에 물을 따르며 웨이터가 한국에서 온 분이냐고 묻는다. 새벽부터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면서. 저녁에 도착했을 사람들이 잠을 설쳐가며 회장이 머무는 호텔을 찾아 왔구나 싶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오셨어요? 식사는요?”
“했습니다. 결혼식까진 시간이 빠듯하지 않을까요?”
“준비할 것도 없어요. 목사 앞에서 선서만 하면 되는걸요.”
“그룹에서 사람들이 왔어요. 호텔에서 하지 그랬어요?”
“호텔까지 빌릴 필요가 뭐 있어요?”
“그럼 내일 오전까진 자유시간을 줬는데 괜찮겠습니까?”
“먼 길 왔을테니 관광이나 하도록 하세요. 내일 행사엔 팬타곤 사람들도 몇 명 온다니까 그렇게 알시고요.”
“그 사람들이 왜 오는거죠?”
“들러리 세운것이니까 신경 쓸 것은 없어요.”
숙은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내 초로의 신사에게 건냈다. 신사는 꾸벅 인사를 남긴 채 총총히 레스토랑을 떠났다.
“뉴욕 관광을 할까요?” 숙이 물었다.
“바쁘지 않아?” 오히려 내가 더 조급한 마음이 되어 숙에게 물었다.
“메모를 넘겼으니까 직원들이 알아서 준비 할꺼에요.”
“뭘 준비하라고 했는데?”
“한적한 교외에 장소를 마련하고 목사님을 주례로 모신 후 메모된 사람들에게 통지하라고 했어요.”
“내가 준비할 것은 없어?”
“없어요. 바쁠까봐 반지는 제가 준비했으니까요.”
“결혼 뒤에 피로연이 따르는게 이 나라 관습인데 어쩌지?”
“직원들도 왔다니까 저녁 식사를 호텔에서 할꺼에요.”
“그러면 되겠군.”
“당신이 많은 선물을 해줬지만 이번만은 꼭 한가지를 더 해 줘야해요.”
“내가 언제 선물을 많이 했었지?”
“당신에게 받고 싶은 선물이 있을 때 마다 제 손으로 직접 쇼핑을 했죠.
당신을 생각하며,
당신이 사주는 것이라 여기면서.”
“민망한 일이군.”
“이번에 꼭 해야할 선물은 내 손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고른 어떤 것이라도 좋아요.”
“알았어. 내 손으로 직접 골라 당신에게 주겠소.”
마음이 아팠다. 바쁘다는 핑계로 누구에게도 선물을 줘 본 적이 없다. 여자라는 것을 다른 인간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일을 하며 만나면 남자든 여자든 실력만 되면 대등하다고 생각했지 특별히 여자라는 것을 배려한 적도 없다. 다만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싶어하는 여자는 일과 무관하에 무한히 한 남자만 바라보며 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봤어야 했는데 무심한 마음은 그런 점을 너무 많이 놓치고 말았다. 여자가 치장한다는 것은 한 남자를 사랑하고 싶다는 표현이다. 그 남자로부터 사랑받고 싶어하는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돈을 아끼면서도 치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많은 소품 중에서 단 한 개라도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선택된 것이 있다면 더 아끼는 마음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쇼핑하는 여자의 마음 속에는 그런 갈망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원망도 함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물건을 고르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아까워한다. 몇 번인가 백화점에 간 적은 있지만 뭘 사서 누군가에게 줘야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이젠 내 손으로 숙이 좋아하는 것이든 싫어하는 것이든 가리지 않고 물건 하나를 고르고 싶다. 그렇게 갈망하는 마음을 숨기며 살았던 내 여자에게 그 것을 전하고 싶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 로비의 쇼파에 앉아 시내 관광 코스를 고르고 있는데 김학수가 호텔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오늘은 왠일?”
“네, 이젠 박사님 편 이잖습니까. 관광 가이드라도 해 드리려고요.”
“안그래도 되는데...”
“박사님껜 뉴욕이 낯선 곳이잖아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딜 다닐까 고민중이었어요.”
“시내 명소를 다니시렵니까? 아니면 머천다이 같은 곳에서 첨단 제품을 쇼핑하시겠습니까?”
“좋아. 자네가 생각한 것이 있다면 맡겨 보겠네.”
“그럼 대형마켓에서 쇼핑하고 차이나타운에서 식사를 하죠.”
우리는 김학수의 안내를 받으며 시내 쇼핑과 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마트 보다 몇배는 더 커 보이는 대형 할인점을 다녀보고 아끼와바라에서 본 것 보다 더 많은 전자제품이 쌓여 있는 쇼핑점도 들러보았다. 해가 늬엇할 때 까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느낀 것은 엄청난 교통량 때문에 한번이라도 길을 잘못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여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서울의 혼잡 정도는 이곳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주차를 시켜 놓고 가까운 곳은 걸어 다니며 쇼핑을 즐겼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차이나타운의 불빛은 점차 밝아지고 있다. 돌아다닌 거리가 늘어날수록 배가 출출해지고 있었다.
“이젠 차이나타운에 가서 식사를 하시죠.”
“영화에서 보니까 맨날 총질이던데 무섭지 않을까?”
“하하, 로보캅을 보셨나보죠?”
“몰라. 성룡을 받던가? 이연걸을 봤던가? 아무튼 맨날 발길질만 해 대는 영화를 봤으니...”
“편견입니다. 식당은 그냥 식당일 뿐이죠. 음식을 먹는 곳이죠.”
둥근 원탁이 놓인 방에 들어갔다. 커튼이 쳐지자 외부와 차단되고 은밀한 적막감이 깔리고 있었다. 메뉴판에서 음식을 몇가지 고르고 따뜻한 찻잔을 마시며 모처럼의 조용한 분위기에 잠시 명상에 빠져 들려는 순간이었다.
“박사님, 어제 드린 말씀대로 저도 박사님의 프로젝트에 합류하렵니다.”
“좋아. 자네같은 수재를 가까이 할 수 있다면 큰 힘이 되겠네.”
“저는 하드웨어 제어 분야에 익숙합니다만 생체 쪽엔 완전 백집니다.”
“나도 그렇네. 어차피 많은 역할 분담이 있을테니까 미리 겁먹진 말게.”
“어제 대화중에 시간에너지가 있던데 그 쪽 분야에 넣어 줄 수 있겠습니까?”
“자네의 역량이 된다면 그렇게 하지.”
“감사합니다.”
원탁 위에 놓인 조금 씩 올려지는 요리를 먹다 보니 어느새 배가 그득하게 불러 왔다. 매번 나오는 요리들이 신기해서 조금씩 욕심을 더 부렸더니 나중에 나온 요리엔 아에 젓가락을 대기가 힘들었다. 김학수가 호텔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으니 숙과 나는 요리에 겉들여 독한 술을 몇잔을 들이켰다.
호텔에 들어 온 나는 피곤함이 밀려들어 옷도 벗지 않고 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오늘 밤만 지나가면 결혼식이다. 한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이 가꿔온 많은 것들을 버린 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탁과장이 부러웠다. 나는 모든 것을 그대로 유지한 채 또 다른 여자의 인생에 올라타는 무모한 시도를 뻔뻔스럽게 하고 있다.
숙은 잠이 들락거리는 내 몸에서 한 점씩 옷가지를 벗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차가운 겨울날씨인 만큼 입고 있던 옷가지 수도 많을텐데 잠에서 얼른 벗어나며 그녀가 애쓰며 옷을 벗기는 것을 돕고 싶었지만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살포시 이불이 덮혀지고 품 안으로 파고드는 숙의 매끄러운 살결을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오늘 만큼은 폭풍 속에 있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다가오는 숙의 머릿결을 한 팔로 감싸 안으며 가슴에 닿은 그녀의 얼굴에 손을 얹고 깊은 잠속으로 달려갔다.
해가 떠 오른다. 겨울 아침은 해가 낮게 뜨며 창을 통해 강한 빛을 쏘아댄다. 커튼 사이로 날아든 햇살을 피하기 위해 눈을 찡그리고 있는데 귓 속에서는 샤워물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는 아우성이었다. 나는 그 아우성에 못이기는 척하고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숙이 샤워를 막 끝낸 물기 가득한 뽀얀 몸에 타올을 감싸고 침대 위에 걸터 앉았다.
“어서 씻어요. 오늘 결혼식이 잖아요.”
“몇신데 벌써 일어났어?”
“잠이 와요? 난 한 잠도 못잤는데?”
“그랬어? 잠결에 요란하게 들리던 콧소리가 당신 소린줄 알았는데?”
“어휴, 골아 떨어져선 세상 모르게 자면서 코를 골더니만 자기 소릴 들었나봐요?
피곤한 기색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행복에 겨워 날아갈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숙을 잠시 보라 보며 차질이 없도록 준비하는 것만이 내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이라 생각이 들어 자리를 떨치고 샤워실로 향했다.
호텔에 딸린 미용실을 들락거리며 머리 치장을 하고 있는 숙의 모습에 이어 직원들이 준비한 하얀 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 일생에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어보는 하얀 웨딩 드레스를 어처구니 없게도 유부남인 나를 위해 입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환하고 밝은 숙의 내면은 눈물이 바다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눈에 밟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리무진으로 결혼식장이 마련된 교회로 이동하는 동안 직원들은 숙의 모습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엄한 회장으로서의 위엄만 봐왔던 직원들에겐 밝은 미소에 들뜬 소녀 같은 그녀의 모습은 의외로 보였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단 한가지의 지식이라도 머리 속에 꼭꼭 심어 주려는 교수의 모습도 찾아 볼 수 없다. 차가운 겨울 날씨를 녹여 버릴 것만 같은 환한 미소만이 차 안을 가득 메웠다.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객들 대부분은 팬타곤 사람들 같았다. 김학수도 중국 관계자들과 함께 앞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회사의 임원들은 가슴에 꽃 다발을 하나씩 들고 축하를 위한 준비를 갖추고 있다. 두 사람이 각자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목사의 혼인선서가 끝나자 하객들은 우리의 주변을 에워싸며 준비해 온 선물을 내려놨다. 무엇보다도 가슴에 넘칠 정도로 차곡차곡 꽃 다발이 안겨질때가 제일 보기 좋다. 고국에서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하는 축복은 아니었지만 외국의 유명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진 결혼식인 만큼 숙의 마음은 나름대로 흡족했을 것같다. 우리네 사람들에겐 생경맞은 이중결혼이라는 걸림돌이 남아있겠지만 적어도 팬타곤사람들이나 중국쪽 사람들에겐 이국에서 치러지는 남의 결혼행사에 있어 속내까지는 알 바 없으므로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티가 열리고 있다.
외국에서 치러진 결혼파티에 초대된 직원들은 우리의 관계를 알면서도 외면하며 그 자리의 분위기에 점차 녹아들고 있다. 밤이 늦도록 밴드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차 적어질 때 숙도 수많은 축복의 말들 속에 다소 지친 내색을 하며 가볍게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어 왔다. 이젠 피로연을 끝낼 시간이 왔구나 싶어 하얀 장갑을 벗고 그녀의 빰을 만지며 홍조 띤 얼굴에서 어떤 의미를 읽어보려고 애써본다.
“이젠 늦은 시간이야. 사람들보고 끝내자고 해야겠지?”
“응, 나 피곤해요.”
“내 색시가 되고 말았네.”
“어차피 내 가슴 속엔 당신 밖에 없었어.”
나는 그런 숙의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찌르르 전기가 온 몸에 흐른다. 같이 살 붙이며 살았던 시간 보다 지금 부터 부부의 인연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나에게 맡겨진 그녀의 또 다른 인생을 책임질 시간이 왔구나 싶어 자신감이 불쑥 솟아나는 것 같았다.
“내일은 토요일 휴무이니까 호텔에서 묵을 사람들은 카운터에 접수시키세요.”
숙은 직원들에게 하객들이 하루밤 묵을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지시했다. 그렇지 않아도 빙글빙글 춤을 추는 사이에 눈 맞은 몇 명은 벌써 호텔 객실을 찾아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직원들도 모처럼 해외 나들이를 통해 경험해 보지 못한 백마타기를 갈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점잖은 체면만 빼면 동물이나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 섹스에 대한 갈망일테지 싶어 나는 젊은 직원 하나를 불렀다.
“각자에게 삼백불씩 줄테니까 콜을 부를 사람을 불러서 오늘 밤 즐기라고.
대신 콘돔 잊지말고.”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다들 몸이 근질거린다네요.”
나는 지갑에서 백불짜리를 잔뜩 꺼내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은밀하게 치러지는 그들만의 또 다른 밤을 위해 투자하고 싶다. 적어도 내겐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낯선 곳에서 낯선 여자를 접하는 두려움으로 성사시키지 못했던 백마타기를 어쩌면 다른 사람을 통해 대리 만족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피로연장을 빠져나온 우리는 새삼 신혼부부의 예의로써 서로를 대했다. 처음 만나 애듯하게 지내 온 날들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공식적인 부부로서 지내는 첫날 밤의 감정에는 미치지 못했다. 보드라운 살결들을 따라 천천히 손을 움직이고 있다. 아득한 느낌으로 받아들였던 내 여자에 대한 소유감이라고 할까 아끼며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속살에 대한 느낌이라고 할까 쫀득하며 감칠대는 따사로움이라고 할까 온 몸에 힘이 다 빠질 때까지 서로가 서로를 탐하며 긴 밤을 짧게 보내고 나니 아랫도리가 뻐근하다. 훌러덩 벗겨진 그곳은 휘감겼던 속살들로 인해 전신이 상처 투성이가 되어 찌릿한 아픔으로 다가왔다. 겹쳐지고 펴지며 왕복운동을 해 대던 그 놈은 상처된 몸으로 축 늘어졌다.
“몇일 더 있다 갈까?”
날이 밝아오자 숙은 오히려 몸을 침대에 더 밀착시키며 속삭였다.
“글쎄요. 얼른 돌아가서 정리할 것은 정리해야되지않겠어?”
“정리할게 뭐 있나요?”
“회사를 일주일도 넘게 비웠잖아.”
“시스템이 움직이는 것이지 사람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조종사가 빈 자리엔 변수가 발생하는 법이잖아.”
“난 괜찮아요. 당신이 프로젝트 때문에 오히려 안달이 난거군요?”
“그런 점도 있지. 미국쪽과 계약을 하려면 아무래도 국내 사정도 알아봐야 할테니까.”
“좋아요. 내일 새벽 비행기로 떠나죠.”
“오늘 저녁 비행기는 안되고?”
“여기서도 정리할게 있잖아요. 김학수씨는 어쩌고요?”
“하긴, 직원들도 모처럼 왔으니까 내일 떠나야겠어.”
아침을 먹기 위해 로비에 들어서자 삼삼오오 로비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는 직원들이 보였다. 나는 직원들에게 내일 비행기로 각자 스케쥴에 의해 돌아가고 오늘은 자유시간을 가지라고 말한 후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밤샘 작업 탓인지 입맛이 깔깔해서 과일스프를 먼저 먹고 야채만 주섬주섬 접시에 담아 자리를 잡았다. 웨이터가 다가와 시원한 물을 잔에 가득 따랐다.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후식으로 따뜻한 커피를 한잔씩 마신 후 다시 로비로 돌아왔다. 마땅한 스케쥴도 없었지만 매일 찾아오던 김학수가 보이지 않는 것이 여간 서운한 것이 아니다.
“오늘은 안오나봐요?”
“글세, 궁금해지네.”
“내일 돌아가면 한 동안 못볼텐데, 뭐라 언질을 해야하지 않아요?”
“어차피 그 사람들은 내 동태를 훤히 알고 있을텐데 따로 신경 쓸 것 없잖아.”
“그렇기는 해도 김학수씨는 괜찮은 사람 같더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프로젝트에 합류시켜서 키워 주려고 하거든.”
“여보, 나도 회사 정리하고 당신 프로젝트에 합류하면 안될까?”
“왜? 난 항상 그 자리에 있는데 뭘 걱정해?”
“아니, 욕심을 안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당신 없인 못살 것 같아.”
“어휴, 내가 그럴줄 알았다니까. 걱정말고 회사 경영이나 힘쓰라고.”
“싫어. 그까짓 회사야 팔았다가 다시 사면 그만이지만 당신과 헤어지는 것은 정말 싫어.”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어차피 프로젝트 하려면 당신 같은 재원이 항상 옆에 있어준다면 능률면에선 엄청 도움이 될꺼야. 하지만 일보다 사랑에 빠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알지?”
“흥, 당신은 어차피 여비서가 필요할텐데, 그년이랑 놀아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잖아.”
“어허, 무슨 소리? 내가 그렇게 바람기 많은 사람으로 보였어?”
“그렇지는 않지만 맨날 옆에 붙어 있는 여자가 꼬리라도 치면 못이기는 척하고 받아줄꺼아냐. 그럼 그년이 당신을 차지하게 될테고.”
“당신은 재원이야. 회사 경영자이기도 하지만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대학교수님이란 말이야. 그런 당신이 후진 양성을 위해 애쓰며 나와 대등한 관계로 살아야 할텐데, 겨우 내 비서 역할을 하려고 합류한단말야?”
“어때? 내 것은 다 버리더라도 당신을 챙기겠다는데.”
“좋아. 조금 더 생각해 본 후 결정하자. 어차피 당신도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면 나랑 대등한 역할분담을 만들어볼게.”
“어휴, 정말?”
“그럼, 만약이겠지만, 당신이 나보다 못하라는 법도 없잖아. 많은 연구 경험으로 후진들을 양성할 수도 있을테니까.”
사실 나는 여자를 여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남녀 모두 평등하고 대등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숙은 그런 대등함 보다도 더 우월한 능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을 버리고 프로젝트에 합류한다면 나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역할을 맡기고 싶다. 몸을 불태우며 한 밤의 섹스를 즐기는 것과 과제를 수행하는 것은 완전한 별개라고 생각한다.
“두분 식사 하셨어요?”
거칠고 반가운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어, 그렇지 않아도 자넬 기다렸네.”
“제가 꼭 해야될 일이라도 있나요?”
“아냐, 우린 내일 비행기를 탈 계획이네. 적어도 자넬 보고 다음에 만날 날을 약속해야 되지 않겠나?”
“그러셨군요. 저희 중국쪽에서도 박사님의 생각을 읽고 계십니다. 어제 토의한 결과 미국쪽에서 다국적 프로젝트를 띄우면 공동지분을 출자하겠다고 합니다.”
“밤새면 술만 먹은 것은 아니고?”
“일 때문에 왔는데 놀기만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네만, 어떻게 중국사람들이 욕심을 포기했다는 말을 믿을 수 있지?”
“대부분 겉 다르고 속다르지만 과학자들만큼은 안팎이 똑같잖습니까.”
“그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중국정부를 어떻게 설득할 생각인가?”
“미국이 덤벼드는데 중국이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이번 일은 박사님이 의도한 대로 움직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좋네. 자넨 안 돌아갈건가?”
“저도 내일 비행기를 탈 것입니다. 박사님이 저를 받아 들이기로 약속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중국내의 유능한 수재들을 수배할 겁니다. 적어도 제 역할때문에 프로젝트가 손상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네 역할은 국적을 초월하여 인류미래를 위해 자신을 투자할 인물을 찾는 일이네.”
“여기 제 모바일 번호가 있습니다. 언제라도 준비되시면 전화 주십시오.”
“그래, 내 것도 여기있네. 로밍서비스가 안되면 내가 자네에게 전화 주겠네.”
비행기 트랩을 올라 창가에 앉아 뉴욕 시내를 바라본다. 거친 버팔로 언덕을 넘어 캐나다를 다녀왔던 일보다 팬타곤 사람들을 만나며 프로젝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힘을 얻었다는 것이 이번 여행의 기대하지 않았던 큰 소득이었다. 국내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얻기 힘들었던 투자기회였건만 거대한 나라가 유지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원천기술은커녕 핵심기술도 변변치 않은 국내 사정을 보며 암담했던 지난 날들이 하늘을 날으며 도시를 꽁지 뒤로 던져버리는 창가의 풍경들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내가 다시 서울 땅을 밟았을 때 그들은 내가 어떤 경험을 하고 있었는지 한가닥 감을 잡기나 할까? 숫하게 살아왔던 지난날의 전철을 그대로 밟으며 아옹다옹 비슷한 것들에 색깔 입히기만 하면서 내가 잘났네 니가 못났네 하며 다툼질이나 해 댈까? 중소기업 육성이라는 정책을 내걸고 수십조원 아니 그 이상을 쏟아 부으면서도 몇사람들의 잔머리에 놀아나서 국민의 혈세가 진한 양주로 변하는 세상을 언제 끝내려나? 인터넷에서 쏟아지는 연구논문들을 주워서 그저 한글로 대충 번역만 한 채 내용의 심오함을 더욱 혼란스러운 언어로 치장한 채 자신의 업적이라며 깝죽대는 사람들, 단 한번도 납땜질로 손을 데어보지 않은 책상물림들, 머리에 든 것이라곤 어떻게 놀아도 일한 것처럼 보이며 대단하지 않으면서도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며 안일한 삶을 살아갈것인가에 몰두하는 인간들이 우굴거리는 땅을 밟기 위해 나는 또 비행기에 몸을 실었나?
비행기가 북극을 경유하며 서울로 향하고 있다. 몇일 떠나있던 그 곳에 다시 발을 들여 놓으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탁과장도 봐야겠다. 올챙이는 얼마나 컸을까? 아이들도 보고 싶다. 방학이라고 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이나 즐기면서 한자라도 더 공부시키려고 애쓰는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까?
야채만 접시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컵에 물을 따르며 웨이터가 한국에서 온 분이냐고 묻는다. 새벽부터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면서. 저녁에 도착했을 사람들이 잠을 설쳐가며 회장이 머무는 호텔을 찾아 왔구나 싶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오셨어요? 식사는요?”
“했습니다. 결혼식까진 시간이 빠듯하지 않을까요?”
“준비할 것도 없어요. 목사 앞에서 선서만 하면 되는걸요.”
“그룹에서 사람들이 왔어요. 호텔에서 하지 그랬어요?”
“호텔까지 빌릴 필요가 뭐 있어요?”
“그럼 내일 오전까진 자유시간을 줬는데 괜찮겠습니까?”
“먼 길 왔을테니 관광이나 하도록 하세요. 내일 행사엔 팬타곤 사람들도 몇 명 온다니까 그렇게 알시고요.”
“그 사람들이 왜 오는거죠?”
“들러리 세운것이니까 신경 쓸 것은 없어요.”
숙은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내 초로의 신사에게 건냈다. 신사는 꾸벅 인사를 남긴 채 총총히 레스토랑을 떠났다.
“뉴욕 관광을 할까요?” 숙이 물었다.
“바쁘지 않아?” 오히려 내가 더 조급한 마음이 되어 숙에게 물었다.
“메모를 넘겼으니까 직원들이 알아서 준비 할꺼에요.”
“뭘 준비하라고 했는데?”
“한적한 교외에 장소를 마련하고 목사님을 주례로 모신 후 메모된 사람들에게 통지하라고 했어요.”
“내가 준비할 것은 없어?”
“없어요. 바쁠까봐 반지는 제가 준비했으니까요.”
“결혼 뒤에 피로연이 따르는게 이 나라 관습인데 어쩌지?”
“직원들도 왔다니까 저녁 식사를 호텔에서 할꺼에요.”
“그러면 되겠군.”
“당신이 많은 선물을 해줬지만 이번만은 꼭 한가지를 더 해 줘야해요.”
“내가 언제 선물을 많이 했었지?”
“당신에게 받고 싶은 선물이 있을 때 마다 제 손으로 직접 쇼핑을 했죠.
당신을 생각하며,
당신이 사주는 것이라 여기면서.”
“민망한 일이군.”
“이번에 꼭 해야할 선물은 내 손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고른 어떤 것이라도 좋아요.”
“알았어. 내 손으로 직접 골라 당신에게 주겠소.”
마음이 아팠다. 바쁘다는 핑계로 누구에게도 선물을 줘 본 적이 없다. 여자라는 것을 다른 인간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일을 하며 만나면 남자든 여자든 실력만 되면 대등하다고 생각했지 특별히 여자라는 것을 배려한 적도 없다. 다만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싶어하는 여자는 일과 무관하에 무한히 한 남자만 바라보며 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봤어야 했는데 무심한 마음은 그런 점을 너무 많이 놓치고 말았다. 여자가 치장한다는 것은 한 남자를 사랑하고 싶다는 표현이다. 그 남자로부터 사랑받고 싶어하는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돈을 아끼면서도 치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많은 소품 중에서 단 한 개라도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선택된 것이 있다면 더 아끼는 마음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쇼핑하는 여자의 마음 속에는 그런 갈망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원망도 함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물건을 고르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아까워한다. 몇 번인가 백화점에 간 적은 있지만 뭘 사서 누군가에게 줘야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이젠 내 손으로 숙이 좋아하는 것이든 싫어하는 것이든 가리지 않고 물건 하나를 고르고 싶다. 그렇게 갈망하는 마음을 숨기며 살았던 내 여자에게 그 것을 전하고 싶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 로비의 쇼파에 앉아 시내 관광 코스를 고르고 있는데 김학수가 호텔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오늘은 왠일?”
“네, 이젠 박사님 편 이잖습니까. 관광 가이드라도 해 드리려고요.”
“안그래도 되는데...”
“박사님껜 뉴욕이 낯선 곳이잖아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딜 다닐까 고민중이었어요.”
“시내 명소를 다니시렵니까? 아니면 머천다이 같은 곳에서 첨단 제품을 쇼핑하시겠습니까?”
“좋아. 자네가 생각한 것이 있다면 맡겨 보겠네.”
“그럼 대형마켓에서 쇼핑하고 차이나타운에서 식사를 하죠.”
우리는 김학수의 안내를 받으며 시내 쇼핑과 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마트 보다 몇배는 더 커 보이는 대형 할인점을 다녀보고 아끼와바라에서 본 것 보다 더 많은 전자제품이 쌓여 있는 쇼핑점도 들러보았다. 해가 늬엇할 때 까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느낀 것은 엄청난 교통량 때문에 한번이라도 길을 잘못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여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서울의 혼잡 정도는 이곳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주차를 시켜 놓고 가까운 곳은 걸어 다니며 쇼핑을 즐겼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차이나타운의 불빛은 점차 밝아지고 있다. 돌아다닌 거리가 늘어날수록 배가 출출해지고 있었다.
“이젠 차이나타운에 가서 식사를 하시죠.”
“영화에서 보니까 맨날 총질이던데 무섭지 않을까?”
“하하, 로보캅을 보셨나보죠?”
“몰라. 성룡을 받던가? 이연걸을 봤던가? 아무튼 맨날 발길질만 해 대는 영화를 봤으니...”
“편견입니다. 식당은 그냥 식당일 뿐이죠. 음식을 먹는 곳이죠.”
둥근 원탁이 놓인 방에 들어갔다. 커튼이 쳐지자 외부와 차단되고 은밀한 적막감이 깔리고 있었다. 메뉴판에서 음식을 몇가지 고르고 따뜻한 찻잔을 마시며 모처럼의 조용한 분위기에 잠시 명상에 빠져 들려는 순간이었다.
“박사님, 어제 드린 말씀대로 저도 박사님의 프로젝트에 합류하렵니다.”
“좋아. 자네같은 수재를 가까이 할 수 있다면 큰 힘이 되겠네.”
“저는 하드웨어 제어 분야에 익숙합니다만 생체 쪽엔 완전 백집니다.”
“나도 그렇네. 어차피 많은 역할 분담이 있을테니까 미리 겁먹진 말게.”
“어제 대화중에 시간에너지가 있던데 그 쪽 분야에 넣어 줄 수 있겠습니까?”
“자네의 역량이 된다면 그렇게 하지.”
“감사합니다.”
원탁 위에 놓인 조금 씩 올려지는 요리를 먹다 보니 어느새 배가 그득하게 불러 왔다. 매번 나오는 요리들이 신기해서 조금씩 욕심을 더 부렸더니 나중에 나온 요리엔 아에 젓가락을 대기가 힘들었다. 김학수가 호텔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으니 숙과 나는 요리에 겉들여 독한 술을 몇잔을 들이켰다.
호텔에 들어 온 나는 피곤함이 밀려들어 옷도 벗지 않고 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오늘 밤만 지나가면 결혼식이다. 한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이 가꿔온 많은 것들을 버린 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탁과장이 부러웠다. 나는 모든 것을 그대로 유지한 채 또 다른 여자의 인생에 올라타는 무모한 시도를 뻔뻔스럽게 하고 있다.
숙은 잠이 들락거리는 내 몸에서 한 점씩 옷가지를 벗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차가운 겨울날씨인 만큼 입고 있던 옷가지 수도 많을텐데 잠에서 얼른 벗어나며 그녀가 애쓰며 옷을 벗기는 것을 돕고 싶었지만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살포시 이불이 덮혀지고 품 안으로 파고드는 숙의 매끄러운 살결을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오늘 만큼은 폭풍 속에 있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다가오는 숙의 머릿결을 한 팔로 감싸 안으며 가슴에 닿은 그녀의 얼굴에 손을 얹고 깊은 잠속으로 달려갔다.
해가 떠 오른다. 겨울 아침은 해가 낮게 뜨며 창을 통해 강한 빛을 쏘아댄다. 커튼 사이로 날아든 햇살을 피하기 위해 눈을 찡그리고 있는데 귓 속에서는 샤워물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는 아우성이었다. 나는 그 아우성에 못이기는 척하고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숙이 샤워를 막 끝낸 물기 가득한 뽀얀 몸에 타올을 감싸고 침대 위에 걸터 앉았다.
“어서 씻어요. 오늘 결혼식이 잖아요.”
“몇신데 벌써 일어났어?”
“잠이 와요? 난 한 잠도 못잤는데?”
“그랬어? 잠결에 요란하게 들리던 콧소리가 당신 소린줄 알았는데?”
“어휴, 골아 떨어져선 세상 모르게 자면서 코를 골더니만 자기 소릴 들었나봐요?
피곤한 기색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행복에 겨워 날아갈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숙을 잠시 보라 보며 차질이 없도록 준비하는 것만이 내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이라 생각이 들어 자리를 떨치고 샤워실로 향했다.
호텔에 딸린 미용실을 들락거리며 머리 치장을 하고 있는 숙의 모습에 이어 직원들이 준비한 하얀 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 일생에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어보는 하얀 웨딩 드레스를 어처구니 없게도 유부남인 나를 위해 입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환하고 밝은 숙의 내면은 눈물이 바다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눈에 밟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리무진으로 결혼식장이 마련된 교회로 이동하는 동안 직원들은 숙의 모습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엄한 회장으로서의 위엄만 봐왔던 직원들에겐 밝은 미소에 들뜬 소녀 같은 그녀의 모습은 의외로 보였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단 한가지의 지식이라도 머리 속에 꼭꼭 심어 주려는 교수의 모습도 찾아 볼 수 없다. 차가운 겨울 날씨를 녹여 버릴 것만 같은 환한 미소만이 차 안을 가득 메웠다.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객들 대부분은 팬타곤 사람들 같았다. 김학수도 중국 관계자들과 함께 앞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회사의 임원들은 가슴에 꽃 다발을 하나씩 들고 축하를 위한 준비를 갖추고 있다. 두 사람이 각자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목사의 혼인선서가 끝나자 하객들은 우리의 주변을 에워싸며 준비해 온 선물을 내려놨다. 무엇보다도 가슴에 넘칠 정도로 차곡차곡 꽃 다발이 안겨질때가 제일 보기 좋다. 고국에서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하는 축복은 아니었지만 외국의 유명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진 결혼식인 만큼 숙의 마음은 나름대로 흡족했을 것같다. 우리네 사람들에겐 생경맞은 이중결혼이라는 걸림돌이 남아있겠지만 적어도 팬타곤사람들이나 중국쪽 사람들에겐 이국에서 치러지는 남의 결혼행사에 있어 속내까지는 알 바 없으므로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티가 열리고 있다.
외국에서 치러진 결혼파티에 초대된 직원들은 우리의 관계를 알면서도 외면하며 그 자리의 분위기에 점차 녹아들고 있다. 밤이 늦도록 밴드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차 적어질 때 숙도 수많은 축복의 말들 속에 다소 지친 내색을 하며 가볍게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어 왔다. 이젠 피로연을 끝낼 시간이 왔구나 싶어 하얀 장갑을 벗고 그녀의 빰을 만지며 홍조 띤 얼굴에서 어떤 의미를 읽어보려고 애써본다.
“이젠 늦은 시간이야. 사람들보고 끝내자고 해야겠지?”
“응, 나 피곤해요.”
“내 색시가 되고 말았네.”
“어차피 내 가슴 속엔 당신 밖에 없었어.”
나는 그런 숙의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찌르르 전기가 온 몸에 흐른다. 같이 살 붙이며 살았던 시간 보다 지금 부터 부부의 인연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나에게 맡겨진 그녀의 또 다른 인생을 책임질 시간이 왔구나 싶어 자신감이 불쑥 솟아나는 것 같았다.
“내일은 토요일 휴무이니까 호텔에서 묵을 사람들은 카운터에 접수시키세요.”
숙은 직원들에게 하객들이 하루밤 묵을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지시했다. 그렇지 않아도 빙글빙글 춤을 추는 사이에 눈 맞은 몇 명은 벌써 호텔 객실을 찾아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직원들도 모처럼 해외 나들이를 통해 경험해 보지 못한 백마타기를 갈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점잖은 체면만 빼면 동물이나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 섹스에 대한 갈망일테지 싶어 나는 젊은 직원 하나를 불렀다.
“각자에게 삼백불씩 줄테니까 콜을 부를 사람을 불러서 오늘 밤 즐기라고.
대신 콘돔 잊지말고.”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다들 몸이 근질거린다네요.”
나는 지갑에서 백불짜리를 잔뜩 꺼내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은밀하게 치러지는 그들만의 또 다른 밤을 위해 투자하고 싶다. 적어도 내겐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낯선 곳에서 낯선 여자를 접하는 두려움으로 성사시키지 못했던 백마타기를 어쩌면 다른 사람을 통해 대리 만족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피로연장을 빠져나온 우리는 새삼 신혼부부의 예의로써 서로를 대했다. 처음 만나 애듯하게 지내 온 날들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공식적인 부부로서 지내는 첫날 밤의 감정에는 미치지 못했다. 보드라운 살결들을 따라 천천히 손을 움직이고 있다. 아득한 느낌으로 받아들였던 내 여자에 대한 소유감이라고 할까 아끼며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속살에 대한 느낌이라고 할까 쫀득하며 감칠대는 따사로움이라고 할까 온 몸에 힘이 다 빠질 때까지 서로가 서로를 탐하며 긴 밤을 짧게 보내고 나니 아랫도리가 뻐근하다. 훌러덩 벗겨진 그곳은 휘감겼던 속살들로 인해 전신이 상처 투성이가 되어 찌릿한 아픔으로 다가왔다. 겹쳐지고 펴지며 왕복운동을 해 대던 그 놈은 상처된 몸으로 축 늘어졌다.
“몇일 더 있다 갈까?”
날이 밝아오자 숙은 오히려 몸을 침대에 더 밀착시키며 속삭였다.
“글쎄요. 얼른 돌아가서 정리할 것은 정리해야되지않겠어?”
“정리할게 뭐 있나요?”
“회사를 일주일도 넘게 비웠잖아.”
“시스템이 움직이는 것이지 사람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조종사가 빈 자리엔 변수가 발생하는 법이잖아.”
“난 괜찮아요. 당신이 프로젝트 때문에 오히려 안달이 난거군요?”
“그런 점도 있지. 미국쪽과 계약을 하려면 아무래도 국내 사정도 알아봐야 할테니까.”
“좋아요. 내일 새벽 비행기로 떠나죠.”
“오늘 저녁 비행기는 안되고?”
“여기서도 정리할게 있잖아요. 김학수씨는 어쩌고요?”
“하긴, 직원들도 모처럼 왔으니까 내일 떠나야겠어.”
아침을 먹기 위해 로비에 들어서자 삼삼오오 로비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는 직원들이 보였다. 나는 직원들에게 내일 비행기로 각자 스케쥴에 의해 돌아가고 오늘은 자유시간을 가지라고 말한 후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밤샘 작업 탓인지 입맛이 깔깔해서 과일스프를 먼저 먹고 야채만 주섬주섬 접시에 담아 자리를 잡았다. 웨이터가 다가와 시원한 물을 잔에 가득 따랐다.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후식으로 따뜻한 커피를 한잔씩 마신 후 다시 로비로 돌아왔다. 마땅한 스케쥴도 없었지만 매일 찾아오던 김학수가 보이지 않는 것이 여간 서운한 것이 아니다.
“오늘은 안오나봐요?”
“글세, 궁금해지네.”
“내일 돌아가면 한 동안 못볼텐데, 뭐라 언질을 해야하지 않아요?”
“어차피 그 사람들은 내 동태를 훤히 알고 있을텐데 따로 신경 쓸 것 없잖아.”
“그렇기는 해도 김학수씨는 괜찮은 사람 같더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프로젝트에 합류시켜서 키워 주려고 하거든.”
“여보, 나도 회사 정리하고 당신 프로젝트에 합류하면 안될까?”
“왜? 난 항상 그 자리에 있는데 뭘 걱정해?”
“아니, 욕심을 안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당신 없인 못살 것 같아.”
“어휴, 내가 그럴줄 알았다니까. 걱정말고 회사 경영이나 힘쓰라고.”
“싫어. 그까짓 회사야 팔았다가 다시 사면 그만이지만 당신과 헤어지는 것은 정말 싫어.”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어차피 프로젝트 하려면 당신 같은 재원이 항상 옆에 있어준다면 능률면에선 엄청 도움이 될꺼야. 하지만 일보다 사랑에 빠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알지?”
“흥, 당신은 어차피 여비서가 필요할텐데, 그년이랑 놀아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잖아.”
“어허, 무슨 소리? 내가 그렇게 바람기 많은 사람으로 보였어?”
“그렇지는 않지만 맨날 옆에 붙어 있는 여자가 꼬리라도 치면 못이기는 척하고 받아줄꺼아냐. 그럼 그년이 당신을 차지하게 될테고.”
“당신은 재원이야. 회사 경영자이기도 하지만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대학교수님이란 말이야. 그런 당신이 후진 양성을 위해 애쓰며 나와 대등한 관계로 살아야 할텐데, 겨우 내 비서 역할을 하려고 합류한단말야?”
“어때? 내 것은 다 버리더라도 당신을 챙기겠다는데.”
“좋아. 조금 더 생각해 본 후 결정하자. 어차피 당신도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면 나랑 대등한 역할분담을 만들어볼게.”
“어휴, 정말?”
“그럼, 만약이겠지만, 당신이 나보다 못하라는 법도 없잖아. 많은 연구 경험으로 후진들을 양성할 수도 있을테니까.”
사실 나는 여자를 여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남녀 모두 평등하고 대등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숙은 그런 대등함 보다도 더 우월한 능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을 버리고 프로젝트에 합류한다면 나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역할을 맡기고 싶다. 몸을 불태우며 한 밤의 섹스를 즐기는 것과 과제를 수행하는 것은 완전한 별개라고 생각한다.
“두분 식사 하셨어요?”
거칠고 반가운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어, 그렇지 않아도 자넬 기다렸네.”
“제가 꼭 해야될 일이라도 있나요?”
“아냐, 우린 내일 비행기를 탈 계획이네. 적어도 자넬 보고 다음에 만날 날을 약속해야 되지 않겠나?”
“그러셨군요. 저희 중국쪽에서도 박사님의 생각을 읽고 계십니다. 어제 토의한 결과 미국쪽에서 다국적 프로젝트를 띄우면 공동지분을 출자하겠다고 합니다.”
“밤새면 술만 먹은 것은 아니고?”
“일 때문에 왔는데 놀기만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네만, 어떻게 중국사람들이 욕심을 포기했다는 말을 믿을 수 있지?”
“대부분 겉 다르고 속다르지만 과학자들만큼은 안팎이 똑같잖습니까.”
“그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중국정부를 어떻게 설득할 생각인가?”
“미국이 덤벼드는데 중국이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이번 일은 박사님이 의도한 대로 움직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좋네. 자넨 안 돌아갈건가?”
“저도 내일 비행기를 탈 것입니다. 박사님이 저를 받아 들이기로 약속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중국내의 유능한 수재들을 수배할 겁니다. 적어도 제 역할때문에 프로젝트가 손상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네 역할은 국적을 초월하여 인류미래를 위해 자신을 투자할 인물을 찾는 일이네.”
“여기 제 모바일 번호가 있습니다. 언제라도 준비되시면 전화 주십시오.”
“그래, 내 것도 여기있네. 로밍서비스가 안되면 내가 자네에게 전화 주겠네.”
비행기 트랩을 올라 창가에 앉아 뉴욕 시내를 바라본다. 거친 버팔로 언덕을 넘어 캐나다를 다녀왔던 일보다 팬타곤 사람들을 만나며 프로젝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힘을 얻었다는 것이 이번 여행의 기대하지 않았던 큰 소득이었다. 국내에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얻기 힘들었던 투자기회였건만 거대한 나라가 유지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원천기술은커녕 핵심기술도 변변치 않은 국내 사정을 보며 암담했던 지난 날들이 하늘을 날으며 도시를 꽁지 뒤로 던져버리는 창가의 풍경들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내가 다시 서울 땅을 밟았을 때 그들은 내가 어떤 경험을 하고 있었는지 한가닥 감을 잡기나 할까? 숫하게 살아왔던 지난날의 전철을 그대로 밟으며 아옹다옹 비슷한 것들에 색깔 입히기만 하면서 내가 잘났네 니가 못났네 하며 다툼질이나 해 댈까? 중소기업 육성이라는 정책을 내걸고 수십조원 아니 그 이상을 쏟아 부으면서도 몇사람들의 잔머리에 놀아나서 국민의 혈세가 진한 양주로 변하는 세상을 언제 끝내려나? 인터넷에서 쏟아지는 연구논문들을 주워서 그저 한글로 대충 번역만 한 채 내용의 심오함을 더욱 혼란스러운 언어로 치장한 채 자신의 업적이라며 깝죽대는 사람들, 단 한번도 납땜질로 손을 데어보지 않은 책상물림들, 머리에 든 것이라곤 어떻게 놀아도 일한 것처럼 보이며 대단하지 않으면서도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며 안일한 삶을 살아갈것인가에 몰두하는 인간들이 우굴거리는 땅을 밟기 위해 나는 또 비행기에 몸을 실었나?
비행기가 북극을 경유하며 서울로 향하고 있다. 몇일 떠나있던 그 곳에 다시 발을 들여 놓으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탁과장도 봐야겠다. 올챙이는 얼마나 컸을까? 아이들도 보고 싶다. 방학이라고 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이나 즐기면서 한자라도 더 공부시키려고 애쓰는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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