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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팅, 그리고 대화명

채팅, 그리고 대화명








1.

오래전이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채팅에 재미가 붙어 오랜만에 채팅방을 기웃거리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실 그게 아니고 요즘 채팅이 물이 좋다고 해서 적당한 여인 한명 꼬셔서

떡을 치려고 기웃거렸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곳에 가입도 하고 입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이 쉽지 채팅하면서 여자 한명 꼬신다는 게 쉬운 일인가요.

그저 노력만 하다가 하루가 지나버리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은 채팅방에 들어가다 문득 내가 사용하고 있는

대화명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나름대로 품위 있고 감성적이라는 단어만 골라서 썼는데

어차피 목적이 품위와 감성이 아니라 떡인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채팅을 할 때 사용하는 대화명으로 말하고자 하는, 원하고자 하는

모든 내용의 뉘앙스를 풍기겠다고 생각하고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대화명은 이랬습니다.






<한번줄래?>






정말 대단한 대화명이었습니다.

우선 채팅을 하고자 하는 목적이 명확하고 또한 돈 거래는 하지 않는다는

소신있는 인생의 지침이 포함된 명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대화명임에도 이상하게 그전보다 별로 반응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디가 문제였는지 곰곰이 생각하다 그 원인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대화명을 바꾸었습니다. 바꾼 대화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번줄까?>








그전의 그것보다 더 대단한 대화명이었습니다.

내가 스스로 몸을 낮추어 상대방을 배려하고 모든 서비스와 뒷책임을 감당하겠다는

신사적 매너와 떡에 대한 굳은 의지가 담긴 명작이었습니다.

나는 매우 뿌듯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늦은 관계로 그날은 좋은 대화명을 찾았다는 걸로 만족하고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했습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계속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2.

다음날 얼른 채팅 사이트에 접속하여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치고 접속하니 대화명을 적는 창은 안나오고

대신 이런 메시지가 떴습니다.




<귀하는 불건전 대화명 사용으로 신고되었으므로 본 사이트에서 영구제명합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불건전 대화명이란 단어와 영구제명은 확실했습니다.

몹시 실망했습니다.

며칠간 고생해서 만든 나의 명작인 대화명이 불건전 대화명이라니요.

주고 받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고 남에게 강제로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점잖게 의향을 묻는 의미가 담긴 대화명인데 그게 왜 불건전한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얼른 친구이자 이 시대가 낳은 최고의 변태인 빛나리에게 전화해서

주민등록번호를 물었습니다. 빛나리는 떨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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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깐! 빛나리가 떨고 있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민주화의 욕구가 강렬해진 1990년대 초반.

주변인물중 한사람인 이 시대의 또라이 ‘미친개’는

우리 사회의 선진 자동자문화를 이룩하고자 H자동차 회사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이 사회는 만만치 않아

자동차 영업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

영업실적이 갈수록 나빠지던 미친개는 드디어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미친개는 또 다른 친구이자 화류계의 거장인 Y형에게 전화를 때립니다.



미친개 : 야! 주민등록번호 좀 불러봐!

Y : 630XXX-10XXXXX 근데 왜?

미친개 : 아냐.... 그냥

Y : ......?




그러나 며칠 뒤 Y형은 미친개로부터 액센트 한 대를 선물받게 됩니다.

말이 선물이지 그게 무슨 선물입니까? 그냥 한 대 떠넘긴 거지요.

이 사건은 훗날 주변에서 거의 전설화되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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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빛나리는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빛나리는 몹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주민등록번호를 불러주면서도 예의 그 변태 행각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야, 너 꼬셔서 먹으면 나한테도 얘기해주라. 난 얘기 듣는게 더 좋더라. 으흐흐흐”






3.

다시 아이디를 만들고 채팅 사이트에 가입했습니다.

이번엔 대화명에 신중을 기했습니다.

서로 주고받는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나만의 의지와 현실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나온 대화명은 이러했습니다.





<18Cm>






이 얼마나 대단한 대화명입니까?

신체 특정부위의 사이즈를 표시해주어 채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선택의 폭을 넓혀주고

나아가 입맛에 맞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무한한 배려를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얼핏 들으면 욕처럼 들리기도 하니 이 또한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사실 내 거기가 18Cm가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릅니다.

어느 미친놈이 팬티 내리고 30Cm 자를 꺼내어 그거 길이를 재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마 이 시대의 변태 빛나리 말고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채팅 세계에서는 별로 이목을 집중시키진 못했습니다.

남들이 저 낯선 숫자에서 깊은 의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남들에 비해 내가 지나치게 앞서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며칠간 이 대화명으로 채팅을 하면 곧 남들도 나의 숭고한 의지를

알아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또 작업을 위해 사이트에 접속하니

낯설지 않은 문구가 채팅창에 떠올랐습니다.







<귀하는 불건전 대화명 사용으로 신고되었으므로 본 사이트에서 영구제명합니다>





정말 환장할 일이었습니다.

누가 신고하는 사람이 있는지 아니면 아르바이트로 모니터 요원을 두었는지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18Cm보다 28Cm라고 했어야 했다는 후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아이디가 제명된 일 후회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새 전화를 들어 Y형에게 주민등록번호를 묻고 있었습니다.




4.

그리고 또 가입을 했습니다. 이 정도면 의지의 한국인인 셈입니다.

이미 여러번의 경험으로 이 채팅사이트의 관리자는 숫자나 사이즈의 단위를

몹시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채팅을 통해 여자를 꼬시려는 노력을 했지만 별로 소득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번엔 대화명에 알바를 찾는 내용을 연상시키는 단어를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일단 ‘원조교제’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대화명을 만들려고 ‘원조’라는 단어를 치니 입력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채팅사이트는 불량 단어라고 정한 몇 단어가 아예 타이핑이 되지 않는

묘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연구의 연구 끝에 ‘원조’라는 단어 없이도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를 찾아내고야 말았습니다. 정말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었습니다.

원조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단어.

만나자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만나겠다는 의지가 담긴 단어.

바로 그 내용이 풍족하게 담긴 대화명은 이것이었습니다.







<용돈번개>






정말 대단한 대화명이었습니다.

일단 돈거래가 자연스럽게 된다는 메시지를 나타내고 있으며

말 그대로 언제든지 번개처럼 만날 수 있다는 기동력 또한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이 뛰어난 대화명을 바탕으로

예전처럼 일대일이나 데이트 신청을 하지 않고 방을 만들어서 상대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이미 대화명에 모든 의지가 담겨있으므로 별로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방제를 지었는데 그 방제는 이러했습니다.








<2차 대전과 40인의 도적>






뭔 뜻이냐구요? 난들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안에 있는 사람 대화명이 <용돈번개>인 것만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니까요.




그렇게 방을 만들고서야 모든 일이 끝난 것 같은 기쁨에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습니다.

그동안 채팅을 하기 위해, 그리고 대화명을 정하기 위해 고생했던 장면들이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속에서 마치 오래된 영화의 장면처럼 오버랩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상의 달콤함이 그 맛을 잃을 즈음 누군가 방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는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대화명을 보는 순간 나는 대화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그동안의 모든 과정들이 실망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한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대화명은 이러했습니다.








<한몸매알바걸>






나는 채팅방에 들어온 그녀에게 인사 대신 이런 대화를 남겼습니다.





“내가 졌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당황하고 있을 한몸매알바걸을 남겨 두고

황급히 채팅방을 빠져나왔습니다.




5.

요즘은 채팅을 하지 않습니다.

시간도 없고 왠지 시간만 죽이는 것 같아 선뜻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나마 그것도 없으니 ‘떡’도 점점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얼른 다시 시작을 해야 할텐데 좋은 대화명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언젠가 좋은 단어가 생각나면 다시 작업전선에 뛰어들어야겠지요.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이 시대의 변태 빛나리는 어디선가 채팅을 하고 있을 겁니다.

빛나리는 오늘도 이런 대화명으로 채팅을 하고 있을 겁니다.







<핥뚫뿕딺깖>




저게 뭔 뜻이냐구요? 저라고 알 수 있나요? 변태의 세계는 난해하거든요.








글을 마치는 일산마루의 한마디.








“사이버는 ‘대상’이 아니라 ‘매개’일 뿐이다”












- 일산마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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