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팅과 포커
채팅과 포커
1.
요즘 같은 세상엔 작업을 하려면 일단 채팅을 해야 합니다.
채팅 인구가 워낙 많으니 취향에 맞는 사람을 찾을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여차저차 진도가 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 진행과정에는 만나서 대화하거나 또는 전화로 대화하는 것과는 달라
매우 지루한 공방전이 필연적으로 따라다니게 됩니다.
그런 경우에 경험이 많거나 또는 노하우가 있는 사람이면
상대를 판단하는 능력이 생겨 시간도 절약하고 좋은 상대도 찾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노하우는 필요한 겁니다.
2.
어느 날 채팅을 했습니다.
늘 그렇듯 이러저러해서 여차저차하여 이러쿵저러쿵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서로의 의중이 대충 확인되어가고
대화의 진도가 어느 정도가 진행되었다고 생각될 즈음 넌지시 물었습니다.
일산마루 : 근데 어떻게 생겼어요?
이 질문은 얼핏 생각엔 매우 멍청한 질문으로 보입니다.
마치 옷가게 주인에게 옷이 어울리느냐는 질문과도 같고
또 식당주인에게 이집 음식 맛있냐는 질문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멍청한듯한 이 질문은 보기와는 달리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오로지 글자와 말투만으로 상대를 성격과 미모, 그리고 성적매력을
파악해야 하는 채팅에서 외모에 대한 확인작업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설령 상대방이 사실과 상반되게 자신의 외모를 표현하더라도
오가는 문자의 작은 틈에서 진위를 가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근데, 어떻게 생겼어요?’라는 질문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는 질문이면 상관없습니다.
예를 들면 ‘섹시해요?’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도 좋고
‘이뻐요?’라고 애교 있게 물어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상대를 예상해야 하므로
질문은 적절한 순간에 자연스럽게 던지면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평범한 대화중에 ‘가슴 커요?’ 라는 질문과 또는
‘오랄 섹스 좋아해요?’ 라는, 황당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은 미모를 판단하기엔 적절치 않지만 이 여자랑 떡을 칠 수 있는지 없는지
가늠하기엔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만약 상대가 화내고 나가면 시간 절약한 거라 생각하면 아주 흡족합니다.
그리고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문맥상의 정확한 분석보다
그 뉘앙스만 파악하면 됩니다.
다만 매우 주의해야 할 부분은 ‘귀엽다고 하더라구요’와
‘통통해요’라는 두 가지 대답입니다.
이 두 가지의 답변은 매우 위험한 답변이니
한번쯤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대화가 잘 되어가는 어떤 순간, 적절한 타이밍을 노려
질문을 던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른 상대의 대답에 담긴 묘한 뉘앙스를 찾아내려 했습니다.
그러자 내 질문에 상대가 대답했습니다.
채팅여인 : 남들이 저보고 맛있게 생겼대요.
3.
여태껏 수많은 채팅을 하고
상대방에게 어떻게 생겼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많이 했지만
이런 대답은 정말 처음이었습니다.
정말 하늘이 보내준 감사의 선물이었습니다.
내가 바라던 바로 그 대답, 바로 그 상황이었습니다.
이쁘고 안 이쁘고의 문제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얼마나 섹시하냐 섹시하지 않느냐,
한번 줄 용의가 있느냐 없느냐 인데
그 불안한 기대를 완전히 해갈해주는 가뭄의 단비였습니다.
사람을 외모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가끔 채팅으로 만난 사람중에 ‘공부만 잘하게’ 생긴 스타일이 있습니다.
커피숍에 앉아 대화하는 것은 어떨지 모르지만 ‘떡’이라는 개념에 대입시켜 보면
그게 자꾸 뒷걸음을 치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적당히 섹시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오랜 사고이기도 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채팅여인의 그 대답은
나로 하여금 신체 특정 부위의 크기가 심하게 변하는 현상을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그 특정부위의 크기 및 경도의 변화는
반드시 그 여인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불러오고 있었습니다.
채팅은 포커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포커는 상대가 보이고 채팅은 상대가 안 보이는 것이 다르지만
상대와 나의 미묘한 신경전이라는 면에서 매우 비슷합니다.
포커를 칠 때 상대가 베팅하는 순간, 카드를 받고 베팅을 하는
약간의 시차를 읽을 줄 알아야 하고 베팅을 외치는 음성의 떨림과
동작의 부자연스러움을 체크해야 하듯이
채팅에서도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하는 공백에서 생긴 약간의 틈,
그리고 문맥에서 느껴지는 묘한 감정의 변화를 읽을 줄 알아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굳이 게임이라고 말한다면 냉정한 사람이 이기는 게임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날의 상대는 모든 면에서 확신이 생겼습니다.
특히 문제의 대답인 ‘맛있게 생겼다’는 부분에서는 왠지 모를
설레임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제 조금 더 작업의 마무리에 신경 쓰고 서두르지 말고
포커를 칠 때처럼 냉정함을 잃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채팅을 열심히 하듯 공부를 했으면 지금쯤 여기서 글을 쓰면서
혹시라도 어떤 섹시하고 예쁜 여자가 불쌍하게 생각해서
한번 (만나)주지나 않을까 하는 비참한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성 없는 행복한 상상일 뿐이고 현실을 냉정한 법입니다.
그냥 눈앞의 현실에 충실해야 합니다.
4.
며칠 뒤 결국 그 문제의 채팅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채팅으로 다져온 나의 연구와 이론이
현실에 있어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번개가 그렇듯
당연히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스타일의 여인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이번엔 확신을 가지고 기대를 했는데 매우 실망이었습니다.
이론과 경험에 너무 의지한 나의 완벽한 착각이었습니다.
채팅은 포커입니다.
패를 펼쳐보기 전엔 절대로 섣부른 예상은 금물입니다.
남의 행동과 말을 근거로 어떠한 예상을 한들 패를 열어 확인해 보기 전까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번 채팅과 또한 그 채팅으로 이루어진 만남을 통해
나는 것을 새삼스레 느낍니다.
앞으로 채팅할 때 공력을 더 쌓던지 아니면 마음을 비우고 하던지
심각하게 택일해야 할 시점이 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채팅여인에게 불만은 없습니다.
그 여인은 내게 거짓말을 하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은 정말 빵처럼 생겼거든요.
글을 마치는 일산마루의 한마디 -
내게 필요한 것은 빵이 아니라 떡이다.
일산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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