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륜 - 12
17.
희진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민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간의 일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민재는 이번에 간 파견근무에서 간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매우 좋은 실적을 낼 수 있었다.
원래 육개월 걸릴 일을 절반인 삼개월 만에 달성해 버린 것이다.
민재는 뒷정리를 위래 그곳에 한달 정도만 더 머문 후 돌아 오려고 했다.
그런데 회사에서 그에게 또 한 차례 파견근무 명령을 내렸다.
회사는 민재가 우수한 능력을 보이자 그를 더욱 써먹고 싶은 듯 했다.
민재는 최대한 피해보려 했지만, 회사측 요구가 너무도 완강했다.
게다가 최악인 것은 옮긴 곳이 전화도 닿지 않는 후진국이었다는 점이다.
뭔가 전할 말이 있으면 숙소에서 차를 타고 열두시간을 달려 전보를 보내야만 할 정도였다.
민재는 집에 편지를 보낼 때 마다 열두시간을 달려 편지 한통을 보낸 후 다시 열두시간 동안 돌아 가야만 했다.
그 마저도 편지 내용이 길면 제대로 전해지지가 않았기에 최대한 중요한 말들만 쓸 수 밖에 없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민재의 편지가 짧아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 업무상 이전 근무지 근처에 볼 일이 있어 서른 시간을 달려 왔었다.
한창 일을 보고 예전 숙소로 돌아가서 쉬려했는데, 숙소 관리자가 전화벨이 계속 울렸다는 소리를 했다.
민재는 직각점으로 집이라고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온 것이었다.
희진은 혹시 자신이 쓴 편지를 받아봤냐고 물었다.
"당연히 받았지. 그런데 이거 섭섭하던데? 나야 사정이 이러니 편지를 짧게 쓸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여기 오기 전까지는 있는 말 없는 말 다 썼었다고. 그런데 당신은 겨우 세달째부터 편지를 그렇게 건성으로 쓰고 말야. 사랑이 식은거 아니야?"
그의 말에 희진은 자신의 예측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정말로 누군가 그녀 대신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군가의 배후는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지옥회......"
못하는 것이 없다던 말이 정말인 듯 했다.
어떻게 친가족까지 속일 정도의 분신을 만든 단 말인가?"
희신은 새삼 지옥회에 대한 두려움이 치밀어 올랐다.
애써 마음을 진정 시키고 민재와 통화를 이었다.
이번에 통화를 끊으면 언제 또 다시 통화를 하게 될지 몰랐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수화기를 잡고 있으려니 대화가 드문드문 끊어졌다.
민재는 자신의 주변 상황이나 겪은 일 같은 것들을 이야기 했는데 그녀는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몇달 동안 정체 불명의 집단에 잡혀가 성노예로 조교 받았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당신은 어땠어?" 라는 질문에 그저 "으응. 그냥 그랬어." 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결국 전화기에는 잠시간 대화가 없는 어색함이 형성되었다.
희진은 그 어색함이 가져다 주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억지로 입을 열었다.
"여보. 보고 싶어요. 빨리 와요."
"그래. 나고 보고 싶어."
마치 의례적으로 하는 듯 한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희진은 민재의 목소리를 조금 더 듣고 싶었지만, 오늘은 이것으로 만족했다.
최소한 남편이 무사하다는 사실은 확인하지 않았던가?
누군가 그녀 대신 이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았다는 사실이 소름 끼칠 정도로 끔찍했지만, 이젠 상관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는가?
"이제 안 좋은 일은 끝난거야. 좋은 일만 있을 거야."
희진은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희진은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의 식사를 챙겨주고 낮에는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몸의 문신 때문에 무용실을 가진 못한다는 것이었다.
희진은 아쉬운대로 집에서 스트레칭과 요가로 몸을 풀어 주었다.
며칠이 지났을 때, 희진은 처음으로 일상생활에서의 문제점을 깨달았다.
"하아아. 누가 이 몸 좀......"
잘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욕정이 서서히 피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근 며칠간 잠잠했던 것은 갑자기 변화된 환경 탓이었던 모양이었다.
희진은 하루에도 십수번씩 몸이 달아 올랐다.
어떻게든 욕정을 꺼뜨리기 위해 찬물로 샤워를 한다거나 요가를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욕정은 더욱 강하게 치밀어 올랐다.
특별하게 달궈진 그녀의 욕정은 일반적인 자위로는 전혀 달래지지 않았다.
버티타 버티다 참지 못할 때면, 결국엔 빼놓았던 피어싱을 다시 차게 되었다.
피어싱을 잡아 당기며 가학적인 자위를 해야만이 욕정이 어느 정도 해소 되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임시 방편에 불과 했을 뿐.
잠시 후면 또 다시 몸이 뜨거워 졌다.
희진에겐 하루 하루가 고문이었다.
더 큰 문제는 아이들에게 절대 내색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희진은 아이들이 없는 낮시간이나 밤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안방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를 달래야 했다.
몸이 타오르면 타오를수록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역시 28번이었다.
집에 돌아온 기쁨으로 그녀에 대해 잠시 잊고 있었지만, 몸이 욕정에 휩싸이게 되면 저절로 그녀가 떠올랐다.
희진은 밤마다 자신의 보지를 쑤시며 중얼거렸다.
"하아악. 주인님만 있었으면. 주인님이 보고 싶어. 주인님의 거친 손길이 그리워."
그렇게 시도때도 없이 찾아 오는 욕정을 제외하면 그런대로 평범한 일상이었다.
희진이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는 동안 어느 덧 두달이 훌쩍 지나갔다.
희진은 끓어 오르는 욕정을 어느 정도 참아낼 수 있게 되었다.
원래의 그녀가 돌아 온 만큼 아이들은 더이상 의심 같은 것은 품지 않았다.
희진은 이제 다시 아이들을 돌보는 주부가 되었다.
"요즘에 소영이가 자주 늦던데. 무슨 일이 있나? 수빈이는 요즘 부쩍 더 소심해진 것 같아."
희진은 여느 주부들 처럼 아이들을 걱정하며 살림을 하는데 집중했다.
간혹 너무 참기 힘들 정도로 욕구가 일어날 때면 방 문을 걸어 잠그고 피어싱을 이용한 가학적인 자위로 몸을 달래곤 했다.
물론 그런 자위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은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끓어 오르는 불길만 사그라 뜨리면 족했다.
한때는 병원을 갈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괜히 병원에 갔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아이들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 될것이라 포기했다.
지금으로서는 어떻게든 스스로의 의지로 욕정을 이겨내는 수밖에 없었다.
욕정을 어느 정도 다스리게 되면 곧바로 문신 제거술부터 받을 생각이었다.
다시 며칠이 지났다.
수빈이가 과학 경시대회로 인해 2박3일 동안 제주도로 떠나게 되었다.
전국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경시대회에 초대되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희진은 정말 기분이 좋아 외식을 하기로 했다.
세 가족은 오붓하게 만찬을 즐기며 한껏 기분을 냈다.
저녁에는 함께 노래방을 가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수빈이는 집을 나섰다.
그 날 저녁. 소영은 뭔가 우울한 일이 있었는지 씩씩거리며 들어서서는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쿵쾅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소영아. 왜 그러니? 무슨 일이야?"
희진은 걱정 되어 몇 차례나 물어 봤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희진은 방문을 몇 번 두들겨 봤지만, 소영은 짜증을 내며 상관 말라고 소리쳤다.
소영은 그날 밤이 될 때까지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새벽이 되서 잠들 시간이 되었을 때, 희진은 침대에 누우려다 소영이가 쿵쾅거리며 2층에서 내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화장실을 가는 모양이었다.
"그냥 놔둘까?"
그러나 요즘들어 소영이가 부쩍 짜증을 자주 내고 예전보다 더욱 거칠어 졌다는 것이 생각났다.
"아냐. 그래도 엄만데. 저 나이 때면 한창 사춘기라서 예민 할 때니까 고민도 많을 거야. 대화를 한 번 해봐야 겠어."
희진이 생각하는 동안 소영은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희진은 지금이 아니면 다시 대화할만한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안방을 나섰따.
2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들겨 보았으나 여전히 대답 소리는 없었다.
귀를 가져다 대보니 안에서 뭔가 음악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고 있었다.
희진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보았다.
화장실을 갔다오면서 잠구지 않았는지 문이 열렸다.
"소영아. 엄마 잠깐만 들어 갈게."
희진은 말을 하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희진의 책상에 놓인 컴퓨터 스피커에서는 요란한 음악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고, 모니터에서는 포르노가 틀어져 있었다.
그리고 소영은 머리엔 헤드셋을 끼고 책상 한 켠엔 턱하니 다리를 올린 채 입에는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것만 해도 더할 나위 없이 충격적이었는데, 희진을 더욱 비틀거리게 한 것은 소영이 한 손에 길다란 딜도를 들고 자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아..."
희진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도저히 이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영은 아직 그녀가 들어 온 것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희진의 머리속에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대로 눈치 못 채게 나갈까? 아냐. 딸이 잘못 된 짓을 하고 있으면 엄마가 고쳐 줘야지.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하면 어색하지 않게 잘 넘길 수 있을까? 아아. 그 착하던 소영이가 어째서......"
희진이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찬바람을 느낀 소영이 힐끔 뒤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넋이 빠진 희진을 보고는 놀라서 일어났다.
"아 뭐야 엄마? 왜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서 훔쳐 봐?"
잔뜩 화를 내며 소리치는 소영을 보며 희진은 일순간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저 엉거주춤하게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소영이 차고 있던 헤드셋에서 요란벅적지근한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것을 듣자 희진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소, 소영아. 이게 대체 무슨 짓이니? 담배에 그런......"
희진은 차마 자위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손으로 딜도만 가리켰다.
희진의 말에 소영의 얼굴이 일순 붉게 달아 올랐다.
그녀도 엄마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매우 창피했다.
"아 무슨 상관이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엄마 그만 나가!"
소영은 자신의 창피함을 감추려고 오히려 역정을 냈다.
그 모습에 희정은 이 일을 그냥 넘겨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소영! 너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 버릇이야?"
희정이 화난 음성에 사납던 소영도 움찔 했다.
"그, 그렇지만 엄마가 먼저 남의 방에......"
희진은 여기서 강하게 나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분명 노크 했어. 문이 부서지라고 두들겨도 네가 음악을 틀어 놔서 못들은 거잖아. 게다가 지금 방에 함부로 들어오고 말고가 문제니?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언제 부터 담배 폈어? 그리고 저...저딴거는 어디서 났어?"
희진이 다가오며 딱딱하게 말하자 소영은 더욱 목을 움츠렸다.
"그, 그게......"
소영은 변명을 하지 못하고 우물 쭈물 거렸다.
희진이 그런 소영에게 다가가서 들고 있는 담배와 딜도를 빼앗아 버렸다.
딜도는 기다란 양방향이었는데, 한 쪽 끝에는 소영의 것으로 보이는 애액이 잔득 묻어 있었다.
그것을 본 희진이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딸의 성기에서 나온 애액을 만진다는 것이 결코 기분 좋은 일은 못되었다.
"김소영!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일단 그냥 지나가는데, 내일 각오해! 너 이거 아빠한테도 말할 거야."
희진의 말에 소영의 얼굴이 확 일그러 졌다.
아빠에게 말한다는 말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든 것이다.
희진은 딸을 한 번 더 노려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 정도로 했으면 적당히 알아 들었겠지?"
희진은 자신이 소영을 엄하게 꾸짖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는 여지껏 아이들에게 화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냉정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 소영이 잘 알아들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등 뒤로 닫히는 문 너머로 그냥 들어 넘길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에이 씨발. 재수가 없으려니."
그 말에 희진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내가 잘못 들은게 아니지?"
그녀는 아이들에게 항상 바른 말을 써야 한다고 교육시켰다.
그래서 어딜 가든 그녀의 아이들은 예절 바르다른 소리를 들었었다.
그녀 앞에서 단 한 번도 험한 소리를 해본 적이 없었던 소영이 지금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를 향해.
희진은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소영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금 뭐라고 그랬니?"
막 침대에 몸을 눕히려던 소영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내가 뭘?"
"다시 한 번 말 해봐."
희진은 소영이 눕지 못하도록 잡아 일으켰다.
"아 왜 이래? 내가 무슨 말 했다고?"
소영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하지만 희진은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너 방금 분명히 엄마한테 나쁜 말 했어."
희진이 계속 쏘아 붙이자 소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씨발. 재수 없다고 했어! 됐어?"
짜악.
희진의 손이 소영의 뺨을 때렸다.
소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뺨을 감쌌다.
그녀는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희진은 그런 소영을 노려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 버릇이야? 너 왜 이래? 착한 엄마 딸 어디 갔어?"
희진이 울먹거리며 말하자 소영은 조금씩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맞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조금씩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때려? 엄마가 뭔데? 엄마가 뭔데 날 때려?"
소영이 악을 쓰듯 외치자 희진이 그녀를 붙잡았다.
"소영아. 너 이러지 마. 엄마한테 이러면 안돼."
희진이 붙잡자 소영은 고함을 치며 그녀를 밀쳐 버렸다.
"아 썅! 나 좀 그냥 내버려 두라고!"
그녀의 밀침에 희진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졌다.
쿵.
희진은 바닥에 넘어지자 머리가 어지러워 잠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 희진을 향해 소영의 욕설이 이어졌다.
"씨발. 나 원래 이런 년이야! 원래 이렇게 막 되먹고 추잡한 년이라고! 엄마같이 고상한 년이 뭘 알아? 뭘 아냐고?"
희진은 너무 큰 충격으로 머리가 혼란스러워 졌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처럼 현실감이 흐릿해졌다.
감각이 모호해지고 머리속에는 가장 강렬했던 기억들이 가득 채워졌다.
희진은 현재와 과거의 기억들이 뒤섞이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또 뭘 해야 하는지도 생각 할 수 없었다.
멍해진 희진이 할 수 있는 것은 몸과 뇌가 기억하고 있는 일들이었다.
땅을 기어 다니고 있는 자신. 그리고 자신을 향한 고함과 욕설, 폭력.
그 후에 그녀가 했던 단 한 가지 행동.
희진의 뇌리속에 철저히 각인 되어 있던 습관이 일어나 버렸다.
바로 욕과 폭력에 굴복하는 습관이었다.
희진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거의 무의식적으로 튀어 나온 말과 행동이었다.
지옥회에서는 누군가 자신에게 욕을 하는 즉시 가장 굴욕적인 모습으로 용서를 빌어야만 벌을 받지 않았다.
희진은 지옥의 고통을 다시 받지 않기 위해 수도 없이 용서를 빌었었다.
그 습관이 뜻밖의 상황과 장소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희진은 스스로 말을 내뱉고 나서,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곳은 지옥회가 아니고, 그녀 역시 노예의 신분이 아니라는 사실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리고 조금 전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딸, 소영이라는 사실도.
희진은 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소영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일순간 모녀의 눈이 마주쳤다.
이리저리 불안하게 흔들리는 희진의 눈. 그녀는 지금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를 노리는 듯 한 소영의 눈. 그녀는 희진을 샅샅이 훑어 보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시끄럽 던 방에 침묵이 찾아왔다.
바닥을 기고 있는 희진도,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는 소영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소영의 눈이 조금씩 포악해지기 시작했다.
소영은 후다닥 달려들어 희진의 치마를 걷어 부치려 했다.
"왜, 왜 이래? 소영아. 하지 마."
그러나 소영은 요지부동이었다.
같은 여자였지만 그녀의 악력은 희진보다도 훨씬 강했다.
희진은 어떻게든 치무를 벗기는 그녀의 손을 막으려 발버둥 쳤다.
그때 소영의 입에서 짜증스러운 한 마디가 떨어졌다.
"씨발. 가만히 있어!"
그 한마디에 희진은 반항을 멈췄다.
타인의 명령을 따르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해 진 탓이었다.
그리고 소영은 그녀의 치마를 걷어 부치고 엉덩이를 확인 했다.
선명하게 찍혀 있는 469 낙인. 그리고 그 위로 드러나 보이는 천박한 자지 문신.
소영은 이번엔 희진의 팬티를 내렸다.
털 위에 그려져 있는 보지 문신이 보였다.
그리고 축축히 젖어있는 희진의 보지.
소영의 눈이 희진의 얼굴로 향했다.
소영의 눈은 완전한 정복자의 눈으로 변해 있었다.
"맙소사. 엄마가 469 그 개년이었어?"
그녀의 한 마디로 모든 것은 끝났다.
희진은 딸, 소영이가 바로 자신이 그토록 사모하고 그리워 했던 검은 복면 28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부 희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