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의 눈을 가진 남자 <1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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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부 - 이중공사,그리고 운명의 그녀 part.3
"와.운동신경 좋으시네요."
입에 발린말을 생활화 해야하는 그지만 지금의 대사는 입에발린말이 아니었다.아현은 정말로 운동신경이 좋아보
였다.진짜 티칭프로 자격증이 없는 수혁으로써는 더이상 가르칠것이 없을 정도로 그녀는 점점 자세가 좋아지고
있었다.
"정말요?"
"그럼요!근데 이쪽 부분에서 허리를 좀 펴시고.."
모든 운동이 마찬가지겠지만 골프는 특히 자세가 중요한 운동이었다.골프장에서 코치와 눈맞는 것이 왜 비일비재
일어나는 것일까.자세를 잡아주다 보면 신체접촉이 불가피했다.수혁역시 아현의 등뒤에 딱 붙어 그녀의 허리와
등의 자세를 교정해줘야만 했다. 수혁은 그녀의 허리에 살짝 손을 덴것 뿐이었지만 감탄을 금치 못했다.너무나
완벽하게 쏘옥 들어가있는 그녀의 곡선에 놀라서였다.보통 여자와 붙게되면 아랫도리가 반응하는게 정상이지만
왠일인지 수혁은 가슴만이 콩닥거릴 뿐이었다.그녀가 처음으로 밝은 미소를 보여줬을땐 더더욱 울렁이는 심장을
진정시켜야만했다.
섭외를 한 유경의 연습장이었기에 손님들도 모두 조직의 선수들이었다.그들역시 수혁의 지금오다가 아현이란것을
알고 있기에 모두 바람잡이 역활을 할 생각도 안하고 멍하니 그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뱃살 출렁이는
아줌마오다에만 푹 쩔어서 먹고살아보겠다고 공사를 쳤던 그들로써는 눈부신 외모의 아현뒤에서 친절하게 코칭을
해주는 수혁이 마냥 동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누가 자세를 잡아준다는게 중요한거였군요."
아현은 살짝 웃으며 땀을 닦았다.수혁은 미소로 답하며 그녀에게 음료수를 건냈다.
"그런데...전에 있던 곳에서는 왜 레슨을 안받으시고..."
"아..거기요."
아현은 생각하자마자 싫은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좋은 표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귀여운 모습이었다.
"일단은 지나다니면서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주제에 레슨비명목으로 돈을 더 달라고 하는것도 웃기고.일단은
제가 좀 잘치는줄 착각하고 있었어요."
민망한지 살짝 웃는 그녀를 보며 수혁은 자기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지금은 착각이 아닐듯 한데요?아까와는 비교도 안되게 멀리 날아가잖아요.자세도 안정되었고."
"뭐...늘상 레슨해주는 티칭프로들이 하는 아부로는 안들려서 좋은데요?"
"전 아부를 못하는 타입이거든요."
"하하.일단 몇개 더 쳐볼게요."
"그러세요."
수혁은 그녀가 스윙폼을 잡을수 있도록 살짝 뒤로 물러서 주었다.수혁의 뒤로 물러서면서 눈이 마주친 바람잡이
역활을 제비들은 흠칫 놀라며 허둥지둥 다시 스윙을 하는 시늉을 했다.
"저것들이....아주 여자보고 헬렐레 해가지고 잡으라는 바람은 안잡고..."
수혁은 살짝 미간이 꿈틀했지만 아현을 보고 실실 웃는 이들의 멍청해보이는 시선이 마냥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나저나...어떻게든 오늘안에 첫 데이트를 끊어야 하는데..."
딱 봐도 까다롭고 도도한 그녀.유리나처럼 첫날 넘어뜨리는것은 백프로 불가능할지 모른다.꽤나 시간이 지난 지
금도 그녀의 얼굴엔 딱 두번 미소가 번졌을 뿐이다.그것도 환한 미소가 아닌 살짝 샐쭉 거리는 미소.그녀가 환
하게 웃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수혁은 그 답지 않게 멍하니 운동에 열중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휴...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늘 혼자 공치는것도 좀 그랬는데. 덕분에 너무 재밌었어요,실력이 는다는게
진짜 신나는 거네요."
"별말씀을.지금 들어가시려구요?"
"네.늘상 하는 운동시간을 훨씬 넘어가니 좀 힘들기도 하구요."
"언제라도.찾아오시면 스윙폼 잡아드릴게요."
"여기로....옮길까 하는데요?"
"네?"
수혁은 깜짝 놀라 아현을 바라보았다.이리로 옮길 거라는 생각은 아직 안한터였기 때문이었다.물론 그것이 독이
될리 없다.수혁에게 있어서는 하늘이 준 기회임에 틀림없었다.아현은 자신의 코칭이 꽤나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뭘그리 놀래요?좋은 레슨을 받을수 있어 바꾸겠다는거 뿐인데요."
"아뇨,저야 당연히 좋죠,그나저나,,,"
"그나저나 뭐요?"
아현은 수혁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는 가방에 골프클럽들을 챙겨 넣었다.
"왜이렇게 말이 안떨어지지."
식사나 같이 하실래요 라는 말.이 세계 뿐만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를 작업할때 가장 기본이 되는 대사다.수혁역
시 짧지 않은 순간동안 수없이 해본 대사이기도 하다.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늘상 당당하던 자신의 태도,
늘상 여자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자신의 눈에서 나오는 특별한 능력도 그녀 앞에서는 종적을 감춰버린다.
"식사 전이면...같이 식사나 하실래요?"
"식사?"
아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수혁을 바라본다.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모습을 본 수혁은 왠지 모르게 자신
의 생각이 훤히 읽혀버리는 듯한 착각에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한참이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생각에 잠겼던 아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방을 둘러메었다.
"좋아요. 운동을 했더니 배가 고프네요.그럼 옷좀 갈아입고 주차장에서 기다릴게요."
자신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는 문을 열고 나가는 그녀.수혁은 뛸듯이 기뻤다.행동 하나하나, 그녀는 너무나 매력
적이었다.여자를 후리는데 올림픽이 있다면 단연 국가대표에 뽑힐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혁의 마음을,그
녀는 본이 아니게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었다.
"단순히 이쁜게 아냐...저 여자는..."
수혁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자신도 이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주차장에서 그녀를 기다려야 할것이다.
"뭔가 모르게....마약같은 여자야.."
수혁이 문을 열고 나가자 여직원이 살짝 눈짓을 해보인다.김 노인이 제작해준 세미프로 자격증이 로비에 걸려있
는것을 다시한번 확인한 수혁은 앞에 놓인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고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경국지색의 미모에 재력을 갖춘 여자라."
드라마에서 그런여자가 나오면 늘상 비웃었던 수혁이지만, 이 일을 하고 나서부터는 절대 공상의 일이라는 생각
을 단한번도 하지 않았다.그가 이 바닥에 데뷔한지 1년을 훌쩍 넘긴 지금동안 그는 수많은 드라마주인공같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고,그녀들의 능력에 기대 많은 부를 축적할수 있었다.하지만 아현같은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녀에게는 미지의 신비로움같은 매력이 있다.단지 이쁘다고 해서 눈이 훽 돌아가버리는 그가 아니다.하지만 그
녀에게는 그저 이쁘다 라고 말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한 무언가가 있었다.
"음..기다리게 했군요. 가시죠."
어느새 산뜻한 옷차림을 한 그녀가 자신의 앞에 서있었다.수혁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음..차를 두대를 가져가는건 조금 그렇고, 제 차로 가시겠어요?"
자신이 했던 고민에 대한 답을 명쾌히 내려주는 그녀.수혁은 살짝 웃고는 조수석에 탑승했다.그러고보니 여자가
운전하는 차에 탄 것은 처음이었다.그녀의 차는 이미지와는 달리 귀여운 디자인의 차가 아닌, 외제 중형차였다.
"그나저나,어디서 식사하실 건가요?"
"흠...이 근처라면..."
수혁은 사실 이 근방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주 무대가 아니기 때문인것도 있지만 평소 유경이 운영하는 연습
장을 이용해본 경험이 없어서 였다.하지만 이 바닥에 있다보면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맛집등은 꿰차고 있는
법이었다.잠시 머리를 굴려 자신이 아는 식당과 이곳과의 거리를 계산한 수혁이 아현에게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
"이쪽으로 쭉 가시면 되요."
아현은 말없이 수혁이 이야기하는 방향으로 운전을 해나갔다. 스커트 밑으로 뻗은 하얀다리,그리고 옆에서본 그
녀의 얼굴선.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이 턱 막히게 하는것만 같았다.수혁은 지금이라도 유라를 통해 가능성을 확인
한 자신의 통안을 아현에게 걸고 싶은 충동에 휩쌓였다.왜 다른 여자들처럼 그녀는 쉽지 않은가.답답함 보다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저 집인가요?"
"아..네."
아현에게 안내한 곳은 그리스 레스토랑이었다.맛 보다는 까다로운 오다들의 분위기에 맞는 인테리어가 맘에들어
기억해 둔 식당이었다.
"아...꽤나 건물이 멋지군요."
"하하.저도 여기서 몇번 식사를 했는데 맘에 들어서.일단 들어가시죠."
고급레스토랑 답게 직원들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그들을 안내했다.아현역시 수혁의 생각대로 식당의 인테리
어가 꽤나 흡족한 모양이었다.지중해를 연상시키는 벽지와 고급스런 샹드리에.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조용한 음악
까지....살짝 어둠이 찾아올듯한 지금의 시간에 너무나 딱 어울리는 인상적인 인테리어가 아닐수 없다.
"어떤거 드시겠어요?"
"글쎄요.저는 처음이라 잘 모르겠군요."
"해산물 좋아하시면 제가 알아서 시킬까요?"
"네.좋아요."
수혁은 생선요리를 비롯한 새우등의 해산물요리를 주문했다.서버가 가고 나자 아현은 앞에 놓인 물잔을 만지작
거렸다.
"그러고보니 여태 제 이름을 안 밝힌거 같네요.코치님 성함은 명함으로 알고 있는데."
아현의 말에 수혁은 살짝 웃었다.
"아뇨.이미 알고 있어요.아현씨잖아요."
"어머..어떻게 알죠?"
살짝 놀라는 표정은 웃음기가 없는데도 너무나 귀여웠다.수혁은 자연스레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실 그쪽 연습장 직원에게 물어봤어요.실례인줄 알지만 알고 싶더군요."
"하하...뭐 기분나빠해야 할일은 아니군요.알고 싶어셨다고 하니까요."
"죄송해요.하지만 너무나 알고 싶었어요.친해지고 싶었구요."
"어머,저랑요?"
"네."
그녀는 바보가 아닌지라 어째서죠?라고 묻지 않았다.앞에 있는 남자가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
르는게 바보 아닌가.하지만 어떠한 긍정적인 반응도 보여주지 않자 수혁은 내심 실망했다.
"음...그러고 보니 이름말고는 서로 알고있는게 하나도 없는거네요?"
아현의 질문에 수혁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자신은 아현이 매일 몇시에 출근하는지 까지도 훤히 알 고 있
었지만...
"음..일단 전 나이는 스물여덟입니다.아시다시피 연습장하고 있고...다른 일도 몇개 건드려 놓은것도 있긴 하지
만...근데 이러고 보니 무슨 소개팅같군요.하하."
수혁은 그녀의 나이와 동갑으로 설정했다.까다로워 보이는 아현의 성격이 과연 연하남을 남자로 보기나 할까 하
는 생각에서 였다.
"저랑 동갑이네요."
"그래요?그렇게 안보이시던데."
"흠...나이가 더 들어보인다는 말이죠?"
"하하하 천만에요.더 어리다는 뜻이었어요."
"흠..입에 발린 말인건 알지만 기분은 좋은데요?"
"설마 입에 발린 말이겠어요."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수혁과 아현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었다.그녀가 IT회사의 오너라는것을 알고 있는 수혁은
자신도 조그만 디스플레이 사업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모든 여자들과의 대화는 공감대가 생명이었다.그러기 위해
서는 취미가 같거나,하는일이 같을수록 대화를 풀어나가기 유리했다. 수혁이 모든 오다를 공사전에 철저히 분석
하는것도,상철에게 더 많은 데이타를 요구하는것도 모두 그때문이었다. 역시나 효과가 있는지,아현과 수혁의 대
화는 끊기는 일 없이 계속 이어졌다.
"식사 나왔습니다."
둘의 앞에 정갈한 그리스 요리가 차려졌다.노릇하게 익은 해산물에 그리스 특유의 소스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아현은 둘 앞에 한잔씩 놓이는 와인을 보고 살짝 놀랐다.
"어머..와인은 시킨적이 없는데..."
"아...디너타임으로 넘어가셨기 때문에 메인요리를 시키시면 와인이 한잔씩 제공됩니다 고객님."
서버의 말에 아현은 당황한 표정으로 수혁을 바라본다.수혁은 자신도 몰랐다는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흠..차를 가져왔는데 와인이라니.이거 수혁씨가 드세요."
"아뇨.한잔정도는 괜찮을 텐데요.저 혼자 무슨맛으로 두잔이나 마셔요."
"그래도.."
"먹고 바로 운전하지 않는이상 이정도 와인은 괜찮아요.게다가 도수가 그리 높은 와인도 아니구요.해산물 요리와
와인이 얼마나 어울리는데요."
수혁은 살짝 웃으며 와인잔을 들었다.아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같이 잔을 들어 수혁의 잔에 살짝 건배해 주었다.
"오늘은 제가 사드리는거니까 많이 드세요."
"좋아요.사양하지 않을게요."
아현은 레스토랑의 분위기와 와인의 상큼한 맛.그리고 메인요리의 은은한 향에 금새 기분이 좋아졌다.게다가 앞
에 있는 수혁은 어쩜 그렇게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경영문제를 속속들이 시원하게 이야기 하는지, 자신도 모르게
대화에 푹 빠져들어 버린 그녀였다.
"그런 경우가 많아요.요새.중국쪽이 인건비가 싸니 무시할수도 없고,품질은 떨어지는데 불평할수도 없는 노릇이
고 말이죠."
"맞아요.휴우...정말...요새같아서는 진짜 파는것보다 만드는게 더 문제니 딱 그만두고 싶어진다니까요."
수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조금씩 아현의 마음속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는것이 느껴졌다.비록 와인한잔이지만
알콜의 힘은 정말 대단한 것일까?도도하게 대답만 하던 아현은 이제 자신이 대화를 이끌기 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호감에서 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조금은 친해졌다는 뜻도 된다.
"몰랐었어...이게...이렇게 기쁜 것이었구나."
자신은 고등학교 이후로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매료안이란 무기를 사용하면 여자와 친해지기 위해 이런저런 대화
를 나누거나 그녀의 환심을 사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이유는 모르지만 그녀는 매료안이 통
하지 않았고,자신은 사람대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그녀와 친해져야만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어느정도 그녀와 계
속해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자 수혁은 새삼스레 희열과도 같은 기쁨을 느꼈다.
"와...너무 잘 먹었어요.정신없이 대화하다보니 시간이 이렇게 지난지도 모르고 있었네요."
식사가 끝나고 커피한잔을 마실때까지 대화가 이어지다보니 그녀의 말대로 시간은 꽤나 지나있었다.헤어져야 할
시간이라는 것은 수혁도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 아쉬웠다.
"저기...괜찮으시다면 말이죠."
"네?"
"이렇게 대화가 끊기는것도 아쉬운데,가볍게 바에서 한잔 하실래요?"
아현은 큰눈을 껌벅 거리며 수혁을 바라보았다.여전히 맑고 깊은 그 눈.하지만 무언가에 막혀 들어갈수 없는것
처럼 방어막을 치고 있는 듯한 바로 그 눈이 자신을 향했다.
"뭐.....가볍게 한잔이라면...저도 좋아요."
-
늦여름의 어둠은 조금 늦게 찾아왔지만, 어둠이 완전하게 오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길거리의 네온사인은 주말을
맞아 거리로 몰려나온 사람들을 강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바 안에는 조용한 음악이 흘러 나왔고 공교롭게도 둘은
구석진 자리에 앉게 되었다.코너 뒤쪽으로 돌아들어간 부분으로 인적이 드문곳이었지만 주말이라 자리가 없었다.
사람이 많이 앉는 자리가 아닌 탓에 조명도 그닥 밝지 않은 은은함이 느껴진다.하지만 그런 은은한 조명이 아현
의 얼굴을 더욱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해주고 있었다.필시 그것은 수혁의 경우도 마찬가지 일것이다.조명이라는
것이 비추기에 따라서는 사람을 훨씬 더 멋있게 보여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자신을 멋지게 생각하고
있을까? 단한번도 하지 않은 고민을 하며 수혁은 칵테일을 권했다.
"음...알콜이 적어서 안심이긴 하네요."
"술을 잘 못하세요?"
"네.전 잘못해요.체질상 그런건지...소주는 한잔만 마셔도 뻗어버려요."
"음..그렇군요.절대 회식자리에서는 술을 마시면 안되는 타입이군요,"
"어머..왜요?"
"아현씨가 지금은 사장님이니까 상관없지만,직원이라면 아마 그걸 노리는 늑대직원들이 꽤 있을걸요?"
"하하하.하기야..대학교때도 그랬어요.그런 선배들이 무서워 한번도 술자리를 가지 않았죠."
"맞아요..."
게다가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서...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수혁은 목전에서 삼켜버렸다.
"이 여자를 갖는다면....어떤 기분일까."
수혁은 이 바닥에 데뷔해서 처음으로 오다에게 3천만원을 따냈던 일이 떠올랐다.그 때 자신은 얼마나 기뻐했던
가.하지만 그때와 비교를 해도 아현이라는 여자를 자기것으로 만들었을때와는 상대도 안될것만 같다.아현을 배려
한 수혁은 도수가 거의 없다시피한 은은한 칵테일을 권해주었다.평소의 그라면 그런 배려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 여자를 그날밤 갖기 위해 술을 계속 권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지금까지의 여자들처럼
마음만 먹으면 꺾을수 있었던 꽃이 아니다.아현은 절벽에 핀 아름다운 꽃과 같다.그것을 따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조심스럽지 않으면 안되었다.그리고 절벽처럼 드리워진 그녀의 마음의 벽도 깨야만 했다.
"그런데..."
"네?"
"수혁씨는 왜 제게 접근했나요?"
"접근요?"
"그래요.처음에 말을 건건 수혁씨였잖아요."
당돌하고도 도도하게 묻는 아현의 질문에 수혁은 잠시 술잔을 만지작 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모른다구요?말도 안돼.자기가 한 행동이면서요?"
"처음에 아현씨를 봤을땐 그저 이쁘다 라고 생각했어요.두번째 봤을땐 아 그때 그여자구나 했구요."
아현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수혁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세번째 그 연습장을 간날은 나도 모르게 그 여자를 찾았어요.그리고 한참을 기다리자 그분이 오더군요."
아현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드리워진다.마치 일출을 보는듯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나서 정신차려보니 제가 말을 걸고 있더라구요.웃기죠?"
수혁은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혼자 피식 웃어버렸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아현의
시선이 싫지 만은 않았다.
"웃기더라구요.그냥 그 사람도 나와같은 사람일 뿐인데.왜 떨린건지 모르겠어요.나 역시 나 잘난 맛에 사는 사람
이었는데...그냥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어요.그 사람에 비하면 나는 어울리지 않아.그사람이 날 바라봐 줄리가 없
다...라고 말이죠."
수혁은 자신도 모르게 작업성멘트가 아닌 본심을 이야기하고 있었다.사랑을 모르는 그가 이런말을 마음속깊이
우러나서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 일지도 몰랐다.하지만 아현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죄송해요.갑작스럽게 고백이 되어버렸군요."
"아뇨.아뇨....나쁘지 않았어요.다만 갑작스러워서 당황은 되지만요."
아현은 목이 탄지 칵테일 한모금을 살짝 들이키고는 잔을 만지작거렸다.둘의 사이에서 한참이나 정적이 흘렀다.
"사실,제가 아현씨를 본건 연습장이 처음이 아니에요."
"네?저를 어디서.."
"바닷가를 놀러간적이 있어요.친구들하고.강원도 쪽이었는데...그때 아현씨를 처음봤어요."
"아...그..그때..."
아현은 놀라면서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그때 자신은 혼자 문득 바다를 보고 싶어서 찾아간 것이었다.가슴속의
상처와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잊기 위해서...
"보는 순간 눈을 뗄수가 없었어요.아름답다.이쁘다.이런거 보다는....눈이...너무 슬퍼보였어요.바다를 보는 아
현씨 눈이 말이죠."
마치 꿈을 꾸는 듯이 말하는 수혁이었지만 아현은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아니,그보다 마치 기분좋은
꿈을 꾸는 아이처럼 설레어 보이는 수혁의 표정에 뭐라 말을 덧붙여 줄수 없었다.
"아...미안해요.급작스럽게 저 혼자 주저리주저리...당황스러우시겠어요."
"아뇨...아니에요..."
사실 당황스러운건 사실이었다.그저 고객관리의 일환으로 식사를 하자는 줄만 알았던 그녀였다.하지만 이건 명백
히 고백이자 작업이 아닌가? 타고난 미모덕에,그리고 제력덕에 이런식의 고백과 작업은 숱하게 겪어온 그녀였다.
결국 자신의 도도함과 냉랭함에 다들 포기하고 돌아섰지만, 수혁의 말은 뭔가 자신을 흔들어 놓는것만 같았다.
"그때...어째서 그렇게 슬픈 표정이셨는지....여쭤봐도 되나요?"
수혁의 말에 아현은 말없이 잔을 비웠다.찰나였지만 그녀의 눈에서 해변에 있을때와 같이 살짝 슬픔의 기운이 스
쳐 지나가는것을 수혁은 똑똑히 볼수 있었다.
"아....물으면 안되는걸 물어봤나봐요.죄송해요..그냥 못들은 걸로.."
"아뇨.그럴것도 없어요."
수혁은 그녀가 말을 할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주었다.아현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무언가를 회상하는 것처럼 조용
히 칵테일잔을 만지는 모습은 곁에 있는 수혁마져 차분하게 해주고 있었다.
"애인이 있었어요."
긴 정적이 끝나고 그녀가 입을 열었을때 수혁은 그녀의 말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쓰린것이 느껴졌다.그런 수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현은 말을 이어나갔다.
"5개월정도 만나서 사랑했고,결혼도 생각했어요.그런데 세상은 맘먹은 대로만 돌아가진 않더라구요."
그녀의 큰 눈망울에 살짝 이슬이 고이는게 보였다.수혁은 진심으로 눈물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랬다.그랬다가는
자신의 가슴도 갈기갈기 찢어질 것만 같았다.하지만 다행히 아현은 눈물을 꾹 참은건지 눈가가 촉촉해 지는것에
그쳤다.
"헤어졌어요. 그 사람은 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세번째나 낙방해버렸어요.그리고 상대적으로 자신감을 잃은
건지,절 만나기를 꺼려했어요."
수혁은 살짝 이해가 갔다.아현은 이쁜데다가 재력도 갖춘 여인이 아닌가.고시에 낙방한 자신의 상황과 심하게
비교가 되었을 것이다.결국 그것은 자격지심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그래서 헤어졌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너무나 답답했어요.애인이 없어진 상태에서 회사를 경영한다는거...진짜 힘들더군요.그래서 바다에 갔
어요.뭔가 바람을 쐬면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랬군요."
뭔가 이상했다.그녀의 예전남자의 말을 들었을 뿐인데,어째서 자신의 가슴이 살짝 쓰라려올까.수혁은 목이타는
마음에 앞에 놓은 칵테일을 벌컥벌컥 들이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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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갔다.이미 별이 없어진지 오래인 서울의 밤.하나둘씩 다음자리로 이동했다.깊은 밤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부터 술을 마시러 삼삼오오 술집을 기웃거리는 무리들이 대다수 였지만 아현과 수혁은 바에서 가볍게
마신 칵테일로 마무리를 하고는 그녀의 차에 올라탔다.
"제가 운전할게요.아현씨 많이 드셨어요."
"괜찮아요..저 운전할수 있어요."
"아뇨.위험해요.마지막에 마신술은 도수가 꽤 있는 술이었어요."
아현은 수혁이 딱 잘라 말하자 입을 다물었다.옛 남자를 이야기 하며 자신도 모르게 술을 들이켰던 것이다.술이
쎈 수혁은 운전대를 잡고는 그녀가 인도하는 방향으로 차를 몰아 나갔다.
"근데 절 바래다 주고 수혁씨는 어쩌려구요."
"택시타고 가면 되죠.들어보니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던데요 뭘."
그녀가 강남에 살다보니 수많은 환락가를 거쳐갔다.조수석에 앉은 그녀의 얼굴은 본래의 표정인 무표정으로 돌
아와 있었다.
"아현씨 그거 알아요?"
창밖을 바라보던 아현은 살짝 고개를 틀어 수혁을 바라보았다. 개의치 않고 앞만 보며 운전을 하면서 수혁은 말
을 이었다.
"좋은 책을 읽으면 마음에 계속 남아요.몇번이고 다시 보게 되고,몇번이고 마음속에 되뇌이게 되죠."
아현의 맑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다는것을 수혁도 알고 있었다.그는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떨쳐내려해도 그 내용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요. 그게 마음속에서 떠나버리는 때는 딱 한가지 경우뿐이죠."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그가 말하려고 하는것을 그녀는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좋은 책을 읽을때 뿐이에요."
어느새 차는 그녀의 집앞에 멈춰있었다. 강남쪽에서도 꽤나 고급스런 축에 속하는 오피스텔이었다.
"바래다 줘서 고마워요.식사도 고마웠구요."
시동이 꺼지고 내리는 일만 남았지만 아현은 핸드백 손잡이를 계속해서 만지작 거렸다.
"아현씨."
"네?"
"갑작스러운건 알아요.제가 다가가는 방법이 서툰것도 알고 있구요.하지만..."
수혁의 몸이 틀어지며 그녀쪽을 향한다.아현의 맑은 눈을 마주해버린 수혁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말을 이
어갔다.
"제가 좋은 책이 되어주고 싶어요.저는....그 남자처럼 도망가지 않을거니까요."
아현의 눈망울이 흔들린다.그녀는 처음으로 수혁의 앞에서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너무나 반짝거리는 입술.수혁
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갔다.마치 입을 맞추는 순간 심장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걱정마져 들었다.살짝 당황한
아현이었지만 조금씩 스르르 눈이 감겼다.
"드디어...."
수혁의 심장이 그녀의 입술에 닿는순간 미친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그렇게 조용히 차안에서의 둘의 키스는 꽤나
오랜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와.운동신경 좋으시네요."
입에 발린말을 생활화 해야하는 그지만 지금의 대사는 입에발린말이 아니었다.아현은 정말로 운동신경이 좋아보
였다.진짜 티칭프로 자격증이 없는 수혁으로써는 더이상 가르칠것이 없을 정도로 그녀는 점점 자세가 좋아지고
있었다.
"정말요?"
"그럼요!근데 이쪽 부분에서 허리를 좀 펴시고.."
모든 운동이 마찬가지겠지만 골프는 특히 자세가 중요한 운동이었다.골프장에서 코치와 눈맞는 것이 왜 비일비재
일어나는 것일까.자세를 잡아주다 보면 신체접촉이 불가피했다.수혁역시 아현의 등뒤에 딱 붙어 그녀의 허리와
등의 자세를 교정해줘야만 했다. 수혁은 그녀의 허리에 살짝 손을 덴것 뿐이었지만 감탄을 금치 못했다.너무나
완벽하게 쏘옥 들어가있는 그녀의 곡선에 놀라서였다.보통 여자와 붙게되면 아랫도리가 반응하는게 정상이지만
왠일인지 수혁은 가슴만이 콩닥거릴 뿐이었다.그녀가 처음으로 밝은 미소를 보여줬을땐 더더욱 울렁이는 심장을
진정시켜야만했다.
섭외를 한 유경의 연습장이었기에 손님들도 모두 조직의 선수들이었다.그들역시 수혁의 지금오다가 아현이란것을
알고 있기에 모두 바람잡이 역활을 할 생각도 안하고 멍하니 그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뱃살 출렁이는
아줌마오다에만 푹 쩔어서 먹고살아보겠다고 공사를 쳤던 그들로써는 눈부신 외모의 아현뒤에서 친절하게 코칭을
해주는 수혁이 마냥 동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누가 자세를 잡아준다는게 중요한거였군요."
아현은 살짝 웃으며 땀을 닦았다.수혁은 미소로 답하며 그녀에게 음료수를 건냈다.
"그런데...전에 있던 곳에서는 왜 레슨을 안받으시고..."
"아..거기요."
아현은 생각하자마자 싫은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좋은 표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귀여운 모습이었다.
"일단은 지나다니면서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주제에 레슨비명목으로 돈을 더 달라고 하는것도 웃기고.일단은
제가 좀 잘치는줄 착각하고 있었어요."
민망한지 살짝 웃는 그녀를 보며 수혁은 자기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지금은 착각이 아닐듯 한데요?아까와는 비교도 안되게 멀리 날아가잖아요.자세도 안정되었고."
"뭐...늘상 레슨해주는 티칭프로들이 하는 아부로는 안들려서 좋은데요?"
"전 아부를 못하는 타입이거든요."
"하하.일단 몇개 더 쳐볼게요."
"그러세요."
수혁은 그녀가 스윙폼을 잡을수 있도록 살짝 뒤로 물러서 주었다.수혁의 뒤로 물러서면서 눈이 마주친 바람잡이
역활을 제비들은 흠칫 놀라며 허둥지둥 다시 스윙을 하는 시늉을 했다.
"저것들이....아주 여자보고 헬렐레 해가지고 잡으라는 바람은 안잡고..."
수혁은 살짝 미간이 꿈틀했지만 아현을 보고 실실 웃는 이들의 멍청해보이는 시선이 마냥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나저나...어떻게든 오늘안에 첫 데이트를 끊어야 하는데..."
딱 봐도 까다롭고 도도한 그녀.유리나처럼 첫날 넘어뜨리는것은 백프로 불가능할지 모른다.꽤나 시간이 지난 지
금도 그녀의 얼굴엔 딱 두번 미소가 번졌을 뿐이다.그것도 환한 미소가 아닌 살짝 샐쭉 거리는 미소.그녀가 환
하게 웃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수혁은 그 답지 않게 멍하니 운동에 열중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휴...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늘 혼자 공치는것도 좀 그랬는데. 덕분에 너무 재밌었어요,실력이 는다는게
진짜 신나는 거네요."
"별말씀을.지금 들어가시려구요?"
"네.늘상 하는 운동시간을 훨씬 넘어가니 좀 힘들기도 하구요."
"언제라도.찾아오시면 스윙폼 잡아드릴게요."
"여기로....옮길까 하는데요?"
"네?"
수혁은 깜짝 놀라 아현을 바라보았다.이리로 옮길 거라는 생각은 아직 안한터였기 때문이었다.물론 그것이 독이
될리 없다.수혁에게 있어서는 하늘이 준 기회임에 틀림없었다.아현은 자신의 코칭이 꽤나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뭘그리 놀래요?좋은 레슨을 받을수 있어 바꾸겠다는거 뿐인데요."
"아뇨,저야 당연히 좋죠,그나저나,,,"
"그나저나 뭐요?"
아현은 수혁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는 가방에 골프클럽들을 챙겨 넣었다.
"왜이렇게 말이 안떨어지지."
식사나 같이 하실래요 라는 말.이 세계 뿐만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를 작업할때 가장 기본이 되는 대사다.수혁역
시 짧지 않은 순간동안 수없이 해본 대사이기도 하다.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늘상 당당하던 자신의 태도,
늘상 여자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자신의 눈에서 나오는 특별한 능력도 그녀 앞에서는 종적을 감춰버린다.
"식사 전이면...같이 식사나 하실래요?"
"식사?"
아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수혁을 바라본다.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모습을 본 수혁은 왠지 모르게 자신
의 생각이 훤히 읽혀버리는 듯한 착각에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한참이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생각에 잠겼던 아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방을 둘러메었다.
"좋아요. 운동을 했더니 배가 고프네요.그럼 옷좀 갈아입고 주차장에서 기다릴게요."
자신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는 문을 열고 나가는 그녀.수혁은 뛸듯이 기뻤다.행동 하나하나, 그녀는 너무나 매력
적이었다.여자를 후리는데 올림픽이 있다면 단연 국가대표에 뽑힐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혁의 마음을,그
녀는 본이 아니게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었다.
"단순히 이쁜게 아냐...저 여자는..."
수혁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자신도 이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주차장에서 그녀를 기다려야 할것이다.
"뭔가 모르게....마약같은 여자야.."
수혁이 문을 열고 나가자 여직원이 살짝 눈짓을 해보인다.김 노인이 제작해준 세미프로 자격증이 로비에 걸려있
는것을 다시한번 확인한 수혁은 앞에 놓인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고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경국지색의 미모에 재력을 갖춘 여자라."
드라마에서 그런여자가 나오면 늘상 비웃었던 수혁이지만, 이 일을 하고 나서부터는 절대 공상의 일이라는 생각
을 단한번도 하지 않았다.그가 이 바닥에 데뷔한지 1년을 훌쩍 넘긴 지금동안 그는 수많은 드라마주인공같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고,그녀들의 능력에 기대 많은 부를 축적할수 있었다.하지만 아현같은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녀에게는 미지의 신비로움같은 매력이 있다.단지 이쁘다고 해서 눈이 훽 돌아가버리는 그가 아니다.하지만 그
녀에게는 그저 이쁘다 라고 말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한 무언가가 있었다.
"음..기다리게 했군요. 가시죠."
어느새 산뜻한 옷차림을 한 그녀가 자신의 앞에 서있었다.수혁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음..차를 두대를 가져가는건 조금 그렇고, 제 차로 가시겠어요?"
자신이 했던 고민에 대한 답을 명쾌히 내려주는 그녀.수혁은 살짝 웃고는 조수석에 탑승했다.그러고보니 여자가
운전하는 차에 탄 것은 처음이었다.그녀의 차는 이미지와는 달리 귀여운 디자인의 차가 아닌, 외제 중형차였다.
"그나저나,어디서 식사하실 건가요?"
"흠...이 근처라면..."
수혁은 사실 이 근방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주 무대가 아니기 때문인것도 있지만 평소 유경이 운영하는 연습
장을 이용해본 경험이 없어서 였다.하지만 이 바닥에 있다보면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맛집등은 꿰차고 있는
법이었다.잠시 머리를 굴려 자신이 아는 식당과 이곳과의 거리를 계산한 수혁이 아현에게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
"이쪽으로 쭉 가시면 되요."
아현은 말없이 수혁이 이야기하는 방향으로 운전을 해나갔다. 스커트 밑으로 뻗은 하얀다리,그리고 옆에서본 그
녀의 얼굴선.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이 턱 막히게 하는것만 같았다.수혁은 지금이라도 유라를 통해 가능성을 확인
한 자신의 통안을 아현에게 걸고 싶은 충동에 휩쌓였다.왜 다른 여자들처럼 그녀는 쉽지 않은가.답답함 보다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저 집인가요?"
"아..네."
아현에게 안내한 곳은 그리스 레스토랑이었다.맛 보다는 까다로운 오다들의 분위기에 맞는 인테리어가 맘에들어
기억해 둔 식당이었다.
"아...꽤나 건물이 멋지군요."
"하하.저도 여기서 몇번 식사를 했는데 맘에 들어서.일단 들어가시죠."
고급레스토랑 답게 직원들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그들을 안내했다.아현역시 수혁의 생각대로 식당의 인테리
어가 꽤나 흡족한 모양이었다.지중해를 연상시키는 벽지와 고급스런 샹드리에.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조용한 음악
까지....살짝 어둠이 찾아올듯한 지금의 시간에 너무나 딱 어울리는 인상적인 인테리어가 아닐수 없다.
"어떤거 드시겠어요?"
"글쎄요.저는 처음이라 잘 모르겠군요."
"해산물 좋아하시면 제가 알아서 시킬까요?"
"네.좋아요."
수혁은 생선요리를 비롯한 새우등의 해산물요리를 주문했다.서버가 가고 나자 아현은 앞에 놓인 물잔을 만지작
거렸다.
"그러고보니 여태 제 이름을 안 밝힌거 같네요.코치님 성함은 명함으로 알고 있는데."
아현의 말에 수혁은 살짝 웃었다.
"아뇨.이미 알고 있어요.아현씨잖아요."
"어머..어떻게 알죠?"
살짝 놀라는 표정은 웃음기가 없는데도 너무나 귀여웠다.수혁은 자연스레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실 그쪽 연습장 직원에게 물어봤어요.실례인줄 알지만 알고 싶더군요."
"하하...뭐 기분나빠해야 할일은 아니군요.알고 싶어셨다고 하니까요."
"죄송해요.하지만 너무나 알고 싶었어요.친해지고 싶었구요."
"어머,저랑요?"
"네."
그녀는 바보가 아닌지라 어째서죠?라고 묻지 않았다.앞에 있는 남자가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
르는게 바보 아닌가.하지만 어떠한 긍정적인 반응도 보여주지 않자 수혁은 내심 실망했다.
"음...그러고 보니 이름말고는 서로 알고있는게 하나도 없는거네요?"
아현의 질문에 수혁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자신은 아현이 매일 몇시에 출근하는지 까지도 훤히 알 고 있
었지만...
"음..일단 전 나이는 스물여덟입니다.아시다시피 연습장하고 있고...다른 일도 몇개 건드려 놓은것도 있긴 하지
만...근데 이러고 보니 무슨 소개팅같군요.하하."
수혁은 그녀의 나이와 동갑으로 설정했다.까다로워 보이는 아현의 성격이 과연 연하남을 남자로 보기나 할까 하
는 생각에서 였다.
"저랑 동갑이네요."
"그래요?그렇게 안보이시던데."
"흠...나이가 더 들어보인다는 말이죠?"
"하하하 천만에요.더 어리다는 뜻이었어요."
"흠..입에 발린 말인건 알지만 기분은 좋은데요?"
"설마 입에 발린 말이겠어요."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수혁과 아현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었다.그녀가 IT회사의 오너라는것을 알고 있는 수혁은
자신도 조그만 디스플레이 사업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모든 여자들과의 대화는 공감대가 생명이었다.그러기 위해
서는 취미가 같거나,하는일이 같을수록 대화를 풀어나가기 유리했다. 수혁이 모든 오다를 공사전에 철저히 분석
하는것도,상철에게 더 많은 데이타를 요구하는것도 모두 그때문이었다. 역시나 효과가 있는지,아현과 수혁의 대
화는 끊기는 일 없이 계속 이어졌다.
"식사 나왔습니다."
둘의 앞에 정갈한 그리스 요리가 차려졌다.노릇하게 익은 해산물에 그리스 특유의 소스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아현은 둘 앞에 한잔씩 놓이는 와인을 보고 살짝 놀랐다.
"어머..와인은 시킨적이 없는데..."
"아...디너타임으로 넘어가셨기 때문에 메인요리를 시키시면 와인이 한잔씩 제공됩니다 고객님."
서버의 말에 아현은 당황한 표정으로 수혁을 바라본다.수혁은 자신도 몰랐다는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흠..차를 가져왔는데 와인이라니.이거 수혁씨가 드세요."
"아뇨.한잔정도는 괜찮을 텐데요.저 혼자 무슨맛으로 두잔이나 마셔요."
"그래도.."
"먹고 바로 운전하지 않는이상 이정도 와인은 괜찮아요.게다가 도수가 그리 높은 와인도 아니구요.해산물 요리와
와인이 얼마나 어울리는데요."
수혁은 살짝 웃으며 와인잔을 들었다.아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같이 잔을 들어 수혁의 잔에 살짝 건배해 주었다.
"오늘은 제가 사드리는거니까 많이 드세요."
"좋아요.사양하지 않을게요."
아현은 레스토랑의 분위기와 와인의 상큼한 맛.그리고 메인요리의 은은한 향에 금새 기분이 좋아졌다.게다가 앞
에 있는 수혁은 어쩜 그렇게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경영문제를 속속들이 시원하게 이야기 하는지, 자신도 모르게
대화에 푹 빠져들어 버린 그녀였다.
"그런 경우가 많아요.요새.중국쪽이 인건비가 싸니 무시할수도 없고,품질은 떨어지는데 불평할수도 없는 노릇이
고 말이죠."
"맞아요.휴우...정말...요새같아서는 진짜 파는것보다 만드는게 더 문제니 딱 그만두고 싶어진다니까요."
수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조금씩 아현의 마음속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는것이 느껴졌다.비록 와인한잔이지만
알콜의 힘은 정말 대단한 것일까?도도하게 대답만 하던 아현은 이제 자신이 대화를 이끌기 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호감에서 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조금은 친해졌다는 뜻도 된다.
"몰랐었어...이게...이렇게 기쁜 것이었구나."
자신은 고등학교 이후로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매료안이란 무기를 사용하면 여자와 친해지기 위해 이런저런 대화
를 나누거나 그녀의 환심을 사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이유는 모르지만 그녀는 매료안이 통
하지 않았고,자신은 사람대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그녀와 친해져야만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어느정도 그녀와 계
속해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자 수혁은 새삼스레 희열과도 같은 기쁨을 느꼈다.
"와...너무 잘 먹었어요.정신없이 대화하다보니 시간이 이렇게 지난지도 모르고 있었네요."
식사가 끝나고 커피한잔을 마실때까지 대화가 이어지다보니 그녀의 말대로 시간은 꽤나 지나있었다.헤어져야 할
시간이라는 것은 수혁도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 아쉬웠다.
"저기...괜찮으시다면 말이죠."
"네?"
"이렇게 대화가 끊기는것도 아쉬운데,가볍게 바에서 한잔 하실래요?"
아현은 큰눈을 껌벅 거리며 수혁을 바라보았다.여전히 맑고 깊은 그 눈.하지만 무언가에 막혀 들어갈수 없는것
처럼 방어막을 치고 있는 듯한 바로 그 눈이 자신을 향했다.
"뭐.....가볍게 한잔이라면...저도 좋아요."
-
늦여름의 어둠은 조금 늦게 찾아왔지만, 어둠이 완전하게 오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길거리의 네온사인은 주말을
맞아 거리로 몰려나온 사람들을 강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바 안에는 조용한 음악이 흘러 나왔고 공교롭게도 둘은
구석진 자리에 앉게 되었다.코너 뒤쪽으로 돌아들어간 부분으로 인적이 드문곳이었지만 주말이라 자리가 없었다.
사람이 많이 앉는 자리가 아닌 탓에 조명도 그닥 밝지 않은 은은함이 느껴진다.하지만 그런 은은한 조명이 아현
의 얼굴을 더욱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해주고 있었다.필시 그것은 수혁의 경우도 마찬가지 일것이다.조명이라는
것이 비추기에 따라서는 사람을 훨씬 더 멋있게 보여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자신을 멋지게 생각하고
있을까? 단한번도 하지 않은 고민을 하며 수혁은 칵테일을 권했다.
"음...알콜이 적어서 안심이긴 하네요."
"술을 잘 못하세요?"
"네.전 잘못해요.체질상 그런건지...소주는 한잔만 마셔도 뻗어버려요."
"음..그렇군요.절대 회식자리에서는 술을 마시면 안되는 타입이군요,"
"어머..왜요?"
"아현씨가 지금은 사장님이니까 상관없지만,직원이라면 아마 그걸 노리는 늑대직원들이 꽤 있을걸요?"
"하하하.하기야..대학교때도 그랬어요.그런 선배들이 무서워 한번도 술자리를 가지 않았죠."
"맞아요..."
게다가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서...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수혁은 목전에서 삼켜버렸다.
"이 여자를 갖는다면....어떤 기분일까."
수혁은 이 바닥에 데뷔해서 처음으로 오다에게 3천만원을 따냈던 일이 떠올랐다.그 때 자신은 얼마나 기뻐했던
가.하지만 그때와 비교를 해도 아현이라는 여자를 자기것으로 만들었을때와는 상대도 안될것만 같다.아현을 배려
한 수혁은 도수가 거의 없다시피한 은은한 칵테일을 권해주었다.평소의 그라면 그런 배려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 여자를 그날밤 갖기 위해 술을 계속 권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지금까지의 여자들처럼
마음만 먹으면 꺾을수 있었던 꽃이 아니다.아현은 절벽에 핀 아름다운 꽃과 같다.그것을 따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조심스럽지 않으면 안되었다.그리고 절벽처럼 드리워진 그녀의 마음의 벽도 깨야만 했다.
"그런데..."
"네?"
"수혁씨는 왜 제게 접근했나요?"
"접근요?"
"그래요.처음에 말을 건건 수혁씨였잖아요."
당돌하고도 도도하게 묻는 아현의 질문에 수혁은 잠시 술잔을 만지작 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모른다구요?말도 안돼.자기가 한 행동이면서요?"
"처음에 아현씨를 봤을땐 그저 이쁘다 라고 생각했어요.두번째 봤을땐 아 그때 그여자구나 했구요."
아현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수혁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세번째 그 연습장을 간날은 나도 모르게 그 여자를 찾았어요.그리고 한참을 기다리자 그분이 오더군요."
아현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드리워진다.마치 일출을 보는듯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나서 정신차려보니 제가 말을 걸고 있더라구요.웃기죠?"
수혁은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혼자 피식 웃어버렸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아현의
시선이 싫지 만은 않았다.
"웃기더라구요.그냥 그 사람도 나와같은 사람일 뿐인데.왜 떨린건지 모르겠어요.나 역시 나 잘난 맛에 사는 사람
이었는데...그냥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어요.그 사람에 비하면 나는 어울리지 않아.그사람이 날 바라봐 줄리가 없
다...라고 말이죠."
수혁은 자신도 모르게 작업성멘트가 아닌 본심을 이야기하고 있었다.사랑을 모르는 그가 이런말을 마음속깊이
우러나서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 일지도 몰랐다.하지만 아현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죄송해요.갑작스럽게 고백이 되어버렸군요."
"아뇨.아뇨....나쁘지 않았어요.다만 갑작스러워서 당황은 되지만요."
아현은 목이 탄지 칵테일 한모금을 살짝 들이키고는 잔을 만지작거렸다.둘의 사이에서 한참이나 정적이 흘렀다.
"사실,제가 아현씨를 본건 연습장이 처음이 아니에요."
"네?저를 어디서.."
"바닷가를 놀러간적이 있어요.친구들하고.강원도 쪽이었는데...그때 아현씨를 처음봤어요."
"아...그..그때..."
아현은 놀라면서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그때 자신은 혼자 문득 바다를 보고 싶어서 찾아간 것이었다.가슴속의
상처와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잊기 위해서...
"보는 순간 눈을 뗄수가 없었어요.아름답다.이쁘다.이런거 보다는....눈이...너무 슬퍼보였어요.바다를 보는 아
현씨 눈이 말이죠."
마치 꿈을 꾸는 듯이 말하는 수혁이었지만 아현은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아니,그보다 마치 기분좋은
꿈을 꾸는 아이처럼 설레어 보이는 수혁의 표정에 뭐라 말을 덧붙여 줄수 없었다.
"아...미안해요.급작스럽게 저 혼자 주저리주저리...당황스러우시겠어요."
"아뇨...아니에요..."
사실 당황스러운건 사실이었다.그저 고객관리의 일환으로 식사를 하자는 줄만 알았던 그녀였다.하지만 이건 명백
히 고백이자 작업이 아닌가? 타고난 미모덕에,그리고 제력덕에 이런식의 고백과 작업은 숱하게 겪어온 그녀였다.
결국 자신의 도도함과 냉랭함에 다들 포기하고 돌아섰지만, 수혁의 말은 뭔가 자신을 흔들어 놓는것만 같았다.
"그때...어째서 그렇게 슬픈 표정이셨는지....여쭤봐도 되나요?"
수혁의 말에 아현은 말없이 잔을 비웠다.찰나였지만 그녀의 눈에서 해변에 있을때와 같이 살짝 슬픔의 기운이 스
쳐 지나가는것을 수혁은 똑똑히 볼수 있었다.
"아....물으면 안되는걸 물어봤나봐요.죄송해요..그냥 못들은 걸로.."
"아뇨.그럴것도 없어요."
수혁은 그녀가 말을 할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주었다.아현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무언가를 회상하는 것처럼 조용
히 칵테일잔을 만지는 모습은 곁에 있는 수혁마져 차분하게 해주고 있었다.
"애인이 있었어요."
긴 정적이 끝나고 그녀가 입을 열었을때 수혁은 그녀의 말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쓰린것이 느껴졌다.그런 수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현은 말을 이어나갔다.
"5개월정도 만나서 사랑했고,결혼도 생각했어요.그런데 세상은 맘먹은 대로만 돌아가진 않더라구요."
그녀의 큰 눈망울에 살짝 이슬이 고이는게 보였다.수혁은 진심으로 눈물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랬다.그랬다가는
자신의 가슴도 갈기갈기 찢어질 것만 같았다.하지만 다행히 아현은 눈물을 꾹 참은건지 눈가가 촉촉해 지는것에
그쳤다.
"헤어졌어요. 그 사람은 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세번째나 낙방해버렸어요.그리고 상대적으로 자신감을 잃은
건지,절 만나기를 꺼려했어요."
수혁은 살짝 이해가 갔다.아현은 이쁜데다가 재력도 갖춘 여인이 아닌가.고시에 낙방한 자신의 상황과 심하게
비교가 되었을 것이다.결국 그것은 자격지심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그래서 헤어졌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너무나 답답했어요.애인이 없어진 상태에서 회사를 경영한다는거...진짜 힘들더군요.그래서 바다에 갔
어요.뭔가 바람을 쐬면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랬군요."
뭔가 이상했다.그녀의 예전남자의 말을 들었을 뿐인데,어째서 자신의 가슴이 살짝 쓰라려올까.수혁은 목이타는
마음에 앞에 놓은 칵테일을 벌컥벌컥 들이킬 뿐이었다.
-
밤이 깊어갔다.이미 별이 없어진지 오래인 서울의 밤.하나둘씩 다음자리로 이동했다.깊은 밤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부터 술을 마시러 삼삼오오 술집을 기웃거리는 무리들이 대다수 였지만 아현과 수혁은 바에서 가볍게
마신 칵테일로 마무리를 하고는 그녀의 차에 올라탔다.
"제가 운전할게요.아현씨 많이 드셨어요."
"괜찮아요..저 운전할수 있어요."
"아뇨.위험해요.마지막에 마신술은 도수가 꽤 있는 술이었어요."
아현은 수혁이 딱 잘라 말하자 입을 다물었다.옛 남자를 이야기 하며 자신도 모르게 술을 들이켰던 것이다.술이
쎈 수혁은 운전대를 잡고는 그녀가 인도하는 방향으로 차를 몰아 나갔다.
"근데 절 바래다 주고 수혁씨는 어쩌려구요."
"택시타고 가면 되죠.들어보니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던데요 뭘."
그녀가 강남에 살다보니 수많은 환락가를 거쳐갔다.조수석에 앉은 그녀의 얼굴은 본래의 표정인 무표정으로 돌
아와 있었다.
"아현씨 그거 알아요?"
창밖을 바라보던 아현은 살짝 고개를 틀어 수혁을 바라보았다. 개의치 않고 앞만 보며 운전을 하면서 수혁은 말
을 이었다.
"좋은 책을 읽으면 마음에 계속 남아요.몇번이고 다시 보게 되고,몇번이고 마음속에 되뇌이게 되죠."
아현의 맑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다는것을 수혁도 알고 있었다.그는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떨쳐내려해도 그 내용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요. 그게 마음속에서 떠나버리는 때는 딱 한가지 경우뿐이죠."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그가 말하려고 하는것을 그녀는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좋은 책을 읽을때 뿐이에요."
어느새 차는 그녀의 집앞에 멈춰있었다. 강남쪽에서도 꽤나 고급스런 축에 속하는 오피스텔이었다.
"바래다 줘서 고마워요.식사도 고마웠구요."
시동이 꺼지고 내리는 일만 남았지만 아현은 핸드백 손잡이를 계속해서 만지작 거렸다.
"아현씨."
"네?"
"갑작스러운건 알아요.제가 다가가는 방법이 서툰것도 알고 있구요.하지만..."
수혁의 몸이 틀어지며 그녀쪽을 향한다.아현의 맑은 눈을 마주해버린 수혁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말을 이
어갔다.
"제가 좋은 책이 되어주고 싶어요.저는....그 남자처럼 도망가지 않을거니까요."
아현의 눈망울이 흔들린다.그녀는 처음으로 수혁의 앞에서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너무나 반짝거리는 입술.수혁
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갔다.마치 입을 맞추는 순간 심장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걱정마져 들었다.살짝 당황한
아현이었지만 조금씩 스르르 눈이 감겼다.
"드디어...."
수혁의 심장이 그녀의 입술에 닿는순간 미친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그렇게 조용히 차안에서의 둘의 키스는 꽤나
오랜시간이나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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