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雨緣) (22)
중개사사무실에서 전화를 받고는 주말에 집을 보러 가기로 했다.
사실 그 사이에도 몇 번쯤은 그런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더 나은 물건이 나올 거라는 말에 곧바로 기다리겠다고 했던 건, 현재의 상태가 이대로 계속 유지되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 자신의 비겁함을 더 이상은 보고 있기가 겸연쩍어서 드디어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 어?”
주말 낮에 같이 가자는 말을 전하려고 퇴근길에 들렀던 수아의 가게가 닫혀있었다.
그것도 잠시 자리를 비운 게 아니라, 문 위에다 사정상 당분간은 휴업을 한다는 방까지 내붙였다.
이상한 생각과 더불어 불안감이 확 밀려든다.
여태까지 이런 일이 단 한번도 없었다.
더군다나, 어젯밤 정류장에 바래다줄 때까지도 그 비슷한 이야기조차 듣지를 못했었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서....”
몇 번을 걸어봐도 똑같은 안내멘트만 되풀이됐다.
왠지 불길한 예감에 심장의 박동이 점점 더 빨라졌다.
순간적으로 온갖 상상들이 밀려들었다.
‘ 혹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민지와의 일이었다.
그게 마음에 걸릴 때마다 수아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주리라는, 그런 낯간지러운 다짐으로 양심의 가책을 회피했었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부닥치고 보자 자신이 그녀에게 어떤 지독한 짓을 했는지, 또한 얼마나 뻔뻔스러운 놈인지가 한눈에 보였다.
“ 아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마치 지금 그녀의 상태를 대변이라도 하는 것처럼, 불이 꺼져 적막하기 짝이 없는 가게를 망연자실하게 쳐다보다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허둥지둥 몸을 돌리다가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 내가 지금 어디로 가려는 거지?’
가슴 속에 북풍한설이 몰아치면서 온몸으로 냉기가 흘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건지, 자기자신이 정말 징그럽기까지 해서 온몸으로 소름이 쫙 끼쳤다.
수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육체 은밀한 곳에 숨은 점 하나와 가장 깊은 속까지 샅샅이 꿰차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신상은 이름 석자와 나이 그리고 과천에 산다는 정도가 다였다.
알지도 못할뿐더러 그다지 알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어린 외모를 핑계 삼아서라도 장난인 척 주민등록증 정도는 얼마든지 볼 수가 있는 일이었다.
물론 변명거리는 있다.
아픔이 있는 듯한 그녀이기에 스스로 이야기할 때까지 기다려 편안하게 해준다는 것, 그러나 그건 진짜 핑계이자 비겁한 변명밖에는 안 된다.
과거는 덮어두더라도 최소한 사는 곳과 가족사항 정돈 알아두는 게 정상이었다.
어쩌면, 그런 점이 오히려 그녀를 내심 서운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 나란 놈은 정말...’
완전히 발가벗겨져 시베리아의 허허벌판에다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이다.
자신은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고 자위를 하면서 득도라도 한 양 뿌듯해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보통사람 축에 낄 자격이 없었다.
맥이 쭉 빠졌다.
스스로가 한심한 와중에도 서글픔이 가득 밀려왔다.
비록 수아에게 비열한 짓거리들을 해댔지만, 그녀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갈 곳이 없었다, 아니, 몰랐다.
너무나 비참하면서도 초라하다.
가슴이 콱 막혀오면서 눈앞이 습막으로 뿌얘졌다.
“ 후우~ 수아야...”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려보자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고 절절한 그리움에 목이 메인다.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봐야 기껏 내 방 아니면 혼자서 술집 구석에 처박혀 소주잔이나 기울이겠지만.
그래도 설마 했던 한 가닥 기대마저 나를 배반했다.
사흘 동안 내가 한 거라고는 퇴근 후에 여전히 꺼진 가게간판을 확인하고서, 방의 창문을 열어둔 채 저녁 내내 쳐다보며 술잔을 기울이다 새벽녘에야 취해 잠드는 일뿐이었다.
수아의 핸드폰은 당연히 계속 불통이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지, 민지나 예지도 그 동안은 내 방에 얼씬 않아서 너무나 고마웠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다른 날보다 더 오래 그리고 많이 마신 탓에, 점심 때가 다되어 눈을 떴는데도 숙취가 남아있었다.
골이 지끈지끈 아파오고 갈증으로 목이 바짝 타왔지만 손끝 하나도 꼼짝하기가 싫었다.
‘ 똑~ 똑~’
그렇게 멍하니 누워서 천장만 쳐다보는데 갑자기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예전 같으면 예지였겠지만 지금은 민지일 가능성이 컸다.
사흘 동안 지켜보더니 오늘에야 더 이상 참지를 못했던 모양이다.
“ 들어와...”
“ 삼촌...”
역시 예상대로였다.
민지가 소반에다 컵을 받쳐들고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들어섰다.
손에 든 저건 언젠가처럼 꿀물일 것 같았다.
“ 속은 괜찮아? 이것부터 좀 마셔...”
“ 으, 응...고마워...”
몸을 일으켜 받아 마시자 달콤한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면서 갈증을 채워주었다.
“ 후우~ 살 것 같네...안 그래도 목이 말랐는데...”
“ 삼촌....”
옆에 다가와 앉은 민지가 잔잔한 음성으로 부른다.
애정이 가득 담긴 따스한 울림, 그리고 향긋한 체취가 맡아지면서 아래쪽으로부터 불덩이가 올라왔다.
‘ 이 상황에서도 그 생각부터 나냐? 이 미친 놈...’
아무리 며칠 동안 금욕을 했다지만, 대책 없이 단단해져 버린 자신의 성기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건 본능만이 아니라 심정적으로도 민지를 안고 싶었다.
감미로운 여체의 유혹도 유혹이지만 많이 힘들고 외로웠던 것이다.
수아 그녀의 빈자리가 너무나 컸다.
그걸 민지를 통해 채우려 하는 자신의 얄팍함에 비웃음이 가면서도, 저 아이의 따스한 품에서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머리로 뭔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창문을 닫으러 몸이 먼저 움직였다.
“ 어?”
“ 삼촌?”
그때 창으로 보이는 뜻밖의 광경에 나도 모르게 소리가 튀어나왔다.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놀란 듯한 민지의 부름에도 대답을 할 정신이 없었다.
눈을 몇 번이나 깜박여봐도 잘못 본 건 아니었다.
“ 미, 미안 나중에..수...민지야..나중에...”
“ 삼촌~!”
자칫 ‘수아’ 라고 부를뻔한 아찔했던 순간이다.
민지에게 빠르게 내뱉고는 황급히 방을 쫓아 나왔다.
수세미같이 난리북새통인 머리카락이나 눈곱이 낀 것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거실을 달려 나와 슬리퍼를 대충 꿰고서 뛰었다.
문득 수아를 처음 만났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날듯이 계단을 뛰어내렸었다.
“ 하아~ 하아~”
아주 짧은 거리였지만 전력질주를 한 탓인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하지만, 그런 건 지금 눈앞의 열린 가게 문을 보는 순간 머리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수아가 마침내 돌아온 것이었다.
“ 수아~.....”
문을 벌컥 밀고 들어서면서 부르다가 멍하게 서버렸다.
“ ..누구?”
애타게 기다렸던 수아는 온데간데없이 웬 중년의 남자가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도 놀랐는지 멈칫하다가 물어왔다.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다.
“ 수아, 수아는 어디 갔나요?”
“ 수아? 아~ 영수?”
“ 네, 영수요...어디 잠시 나간 건가요?”
영수라는 말을 듣는 순간 ‘누군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손이라도 덥석 잡고 싶을 정도였다.
하기야 처음 만났을 때 잠깐 들어보고 한번도 입에 담은 적이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쨌던, 수아를 알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 굉장히 친근감이 느껴졌다.
“ 혹시, 그쪽이 한 장우 씨?”
“ 네? 네, 네...맞습니다만...”
기대했던 대답 대신에 전혀 엉뚱한 말이 나왔다.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
뭣 때문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여간에 안 좋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 아, 맞군...자...그러면 일단 이쪽으로 좀 앉죠...할 이야기가 있는데...”
“ 네? 네...”
점점 더 불안해진다.
이제는 예감이 아니라 뭔가 나쁜 소식을 들을 것만 같다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남자가 권하는 대로 맞은 편의 의자에 앉았다.
“ 그러니까 영수..아...내 소개부터 먼저 해야겠군...난 영수한테 친척아저씨뻘이 되는 사람이오..”
“ 아~ 네, 반갑습니다...처음 뵙습니다...”
수아의 친척이라는 말에 한결 안심이 되었다.
어쨌던 생판 모르는 남이 수아는 물론 내 이름까지 안다는 것보다는 나았다.
최소한 수아가 감당하기 힘든 어떤 일에 휩쓸린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 참, 그 아이하고는 가깝다고 들었는데.....”
“ 네, 맞습니다...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긴장감이 풀리면서 앞에 앉은 이 사람에 대한 친근감이 급격히 커졌다.
우리 둘에 대해 이 정도로 안다는 건 수아에게 들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녀가 그만큼이나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란 걸 의미한다.
“ 휴~...그러면 내가 말을 편하게 해도 되겠나?”
“ 네,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 그래...이렇게 이야기하면 빨리 알아듣겠군...그 동안 내가 그 아이 주방 일을 도왔었지..”
“ 아~!”
“ 역시...바로 알아듣는군...”
한번도 마주치지는 못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수아는 단지 지인이라고만 했었는데 이제 알고 봤더니 친척이었던 것이다.
‘ 왜 그랬을까? 그렇게까지 자신의 신상에 대해 밝히고 싶지 않았던 건가?’
의문점이 생겼지만 지금 당장은 그냥 지나갈 일이었다.
어쩌면 그간 그녀에 대해 몰랐던 많은 부분을 알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다시 긴장이 되면서 목으로 침이 넘어갔다.
“ 둘이 합치기로 했었다지?”
“ 네? 네...맞습니다...”
저 이야기까지 한 걸 보면 내 예상처럼 많이 친밀한 사이인 것 같았다.
“ ..언젠가 내게 그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어...
사실 그 아이는 그런 일을 의논할만한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 네에? 그, 그러면 가족이?”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면 전에 내게 언뜻 말했던 부모님의 허락을 받는 문제는 뭘 의미했는지가 혼란스러웠다.
아니, 그런 걸 떠나서 지금 이 사람이 한 이야기대로라면 천애고아라는 뜻이다.
가슴이 저려오면서 눈물이 쏟아질뻔했다.
“ 아~ 내 말을 오해하지는 말게...부모 형제가 멀쩡히 다 생존해 있으니까...”
“ 네....”
내 얼굴에 그런 게 너무 드러났던지 바로 해명을 해준다.
약간은 민망하고 맥이 빠졌지만 대신 안도감이 들었다.
조금 전에는 그녀의 외로운 처지가 내 가슴을 마구 짓눌렀다.
“ ...휴우~~ 자네, 영수 그 아이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지?”
“ 네? 그러니까 그게 어떤 걸...”
“ 그러니까 그 애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 말이야...”
“ 네...뭔가 힘든 일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리느라...”
“ 그래...그랬을 거야...그러니까 내게 그런 고민을 털어놨을 테고...”
변명을 늘어놓으면서도 얼굴이 뜨거워졌다.
자신의 무심함과 이기심이 속속들이 까발려지는 것만 같았다.
“ 먼저 자네한테는 미안하네...”
“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느닷없는 사과에 더 민망해졌다.
지금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였다.
“ 사실..그 아이가 내게 상의를 했을 때, 내가 권했어...
붙들라고..그렇게 좋은 사람이면 일단 같이 살라고 그랬어...
그렇게 살다가 정이 깊어진 다음에 나중에 다 털어놓으라고...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아무래도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렇더군...그러면 안 되는 건데...”
“ 아, 아닙니다..감사합니다...안 그래도 수아가 주저하는 것 같아서 설득에 고민이 많았거든요..”
“ 허~ 이제부터 이야기를 들어보면 내가 왜 이러는지를 알게 될 거야...”
“ 네? 네....말씀해주세요...저도 그녀에 대해서 듣고 싶은 게 너무 많습니다..”
“ ...그래...어차피 모두 알아야 하니까...잠시만...목이 좀 말라서...”
“ 네...”
그도 긴장이 되었던지 일어서서 물 두 잔을 따라가지고 되돌아왔다.
“ 마시게...목이 마를 텐데...”
“ 감사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듣고 싶어서 초조했지만 그렇다고 재촉을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나도 목이 많이 말랐던 게 사실이다.
차가운 물이 넘어가면서 혼란스러웠던 머리와 가슴 속을 한결 차분하게 했다.
“ 이야기가 좀 길겠지만...그래도 처음부터 하는 게 좋겠지?”
“ 부탁 드립니다...”
물을 마시고서도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간 수아에 대해 전혀 몰랐던 걸 알게 되었다.
여자가 이런 가게를 한다는 점에서 내가 추측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의 아버님이 교직에 계신 분이라는 건 정말 뜻밖이었다.
소문과 평판에 유달리 민감한 곳인 만큼, 자식이 그것도 딸이 술장사를 하도록 허락했다는 게 이해가 잘 안 갔다.
아니, 그 반대로 수아가 굉장히 어렵게 허락을 받아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모두 풀렸다.
놀랍게도 평범하던 그녀의 삶에 급격한 굴곡이 시작된 건 바로 결혼부터였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건 내가 그 말을 듣고도 생각보다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쩌면 난 어렴풋이 짐작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미안해하고 두려워했던 게, 그런 전력 때문이라는 가정을 직접 해본 적은 없어도 내 육감은 느꼈던 모양이다.
희한하게도 그걸 깨닫자 안심이 되고 있었다.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들고 혹시나 하는 의심을 들게 했던,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이 최소한 거짓은 아니었다는 게 확인되었다.
난 수아가 다른 남자의 아내였던 것과는 상관없이 그녀를 내 동반자로 원했던 것이다.
그것보다는 그 다음부터 계속되는 이야기가 나를 마구 뒤흔들었다.
전문대를 졸업하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진 결혼은 양가 아버지들의 인연이었다.
같은 교직에 계시는 분끼리의 술자리에서, 농담 비슷하게 자식이 크면 사돈을 맺자던 약속이 지켜진 경우였다.
문제는 바로 그거였다.
남자들끼리 서로 상대를 보고 자식도 의례히 그렇겠지 했던 게 패착이었다.
수아의 전 남편은 전형적인 마마보이였다.
더군다나 처가에서 물려받은 재산으로 인해 어머니가 주도권을 가진 집안이었다.
결혼을 한 얼마 후에 남편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어머니의 지원으로 사업을 시작하면서 몇 년 동안은 나름대로 행복한 생활이었다.
하지만, 그건 사업이 실패를 하면서부터 모든 게 바뀌었다.
그나마 시아버지의 든든한 직장덕분에 시집식구가 길거리로 나앉는 일까지는 없었지만, 널찍한 아파트에서 살던 수아 부부는 작은 전세로 옮겨야 했다.
그리고, 남편의 진면모가 드러났다.
어머니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 이상에는 그냥 나약한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처는 물론 어린 자식까지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음에도, 처음 몇 번 정도 지인의 소개로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나중엔 그런 시도조차 포기하고서 집안에 처박혀 사업구상이라는 미명하에 빈둥거리며 술만 펐다.
자존심만 남은 남편 몰래 수아가 친정에서 도움을 받으며, 겨우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아이가 커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에는 아이가 엄마의 품에서 떨어질 만해지자 그녀가 직접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모성애의 힘이란 게 그런 건가 보았다.
내세울 학력이나 경력도 없었지만 무작정 부닥쳐서는, 보험부터 시작한 인연으로 자동차영업에까지 뛰어들며 살림이 조금씩 펴갔다.
하지만, 세상일은 언제나 그렇듯이 예상치 못한 불행이 또다시 찾아왔다.
IMF 경제위기로 온 나라가 휘청거리는 여파를 그녀 또한 피해갈 수는 없었다.
“ 하~ 그 놈의 IMF만 아니었으면...”
긴 한숨과 함께 담배를 무는 모습도 나도 모르게 주머니로 손이 갔지만, 급하게 나오느라 챙기지를 못했을뿐더러 손위어른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슬며시 주머니에서 손을 빼는 순간 그가 테이블 위의 담배를 내게 밀었다.
“ 피우게...”
“ 아, 아니 전 괜찮습니다...”
“ 괜찮아....그리고, 아마 이게 필요할 거야...지금부터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 네? 네...”
다시 사양을 하려다가 뒷말에 담배를 잡았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어질 이야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들었다.
‘ 도대체 어떤 사연이길래 저런 말까지 하는 걸까?’
순간적으로 그 이야기는 건너뛰고 수아의 행방만 묻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누구의 아내였었고 아이의 엄마였다는 건 지금 내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단지, 그녀의 그 크고 맑은 눈빛과 따스한 미소가 그리워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쩌면 그녀의 가장 큰 아픔이자 비밀이었을 사연을 꼭 알고 싶기도 했다.
“ 휴우우~ 그러니까...”
뽀얗게 내뿜어지는 담배연기와 함께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건 내게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다.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언제부턴가 내 뺨을 적시는 뜨거운 물줄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 ..자네는...참 정이 많은 사람이구먼...
하~~ 영수 그 아이하고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데...내 욕심이겠지...
그 아이도 그걸 바라지를 않고....인생이란 게 뭔지...크흠...”
그도 목이 메이는지 헛기침을 하고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꺼냈다.
“ ..영수가 자네를 만나게 되면 전해달라고 했네...아마 찾아올 거라고...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것도 그 아이의 부탁이었어...
난 잠시 나가있을 테니 마음이 가라앉거든 천천히 보게...”
“ 흑..흑...네...”
울음이 멈추지를 않았다.
떨리는 손을 내밀어 종이를 받아 들었다.
혹시나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남아있을까 하고 꼭 쥐어봐도 싸늘한 감촉만 느껴졌다.
그가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 흑흑...수아야..제발...제발...그러지마...”
혼자 있게 되자 참았던 울음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런 이야기를 전하게 하고 이렇게 서신까지 준비했다면 무슨 결심인지는 뻔하다.
이 못난 여자가 스스로 떠나려는 것이다.
‘ 안돼...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
왜 그렇게 운명적으로 느껴졌는지, 솔직히 민지에게 끌리는 마음이 더 큰데도 뭔가가 계속 자신을 그녀에게로 떠민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과 수아는 서로가 존재해야만 온전해질 수가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서 잃어버린 엄마의 모습을 찾고 죄책감을 잊을 수 있었듯이, 수아도 내게서 뭔가를 발견했다.
그때 제주도에서 갑자기 내 아기라고 부르면서 엄마가 되어주겠다고 한 진짜 의미를 알았다.
그녀 역시 자신의 아이를 떠나 보냈던 것이다.
IMF가 터지면서 수아가 다니던 회사 역시 인원을 정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정리해고의 바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영업을 배로 뛰고, 야근에다 거래처 접대자리는 물론 부서의 회식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귀가를 하는 시간이 늦어지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더군다나 대부분 술냄새를 풍기면서 들어오다 보니 남편과의 잡음이 잦아졌다.
바로 운명의 그날도 그랬다고 한다.
전날 대판 부부싸움이 있었음에도 어쩔 수 없이 늦을 수 밖에 없는 상황, 불안한 마음과 함께 밤늦게 돌아왔을 때 만취가 되어 정신 없이 잠든 남편만이 보였다.
그리고, 집안을 뒤진 수아가 발견한 건 욕조에 떠있는 아이의 시신이었다.
여자 하나 잘못 들어와서 집안을 말아먹은데다 아이까지 잡았다는, 시어머니의 악다구니도 묵묵히 받아들이며 이혼서류를 내미는 남편에게 도장을 찍어줬다고 한다.
이미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는데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졸지에 자식을 잃고 이혼녀가 되어 돌아온 딸을 친정아버지 또한 냉랭하게 대했다.
아까 친척아저씨가 말한 고민을 털어놓을만한 사람이 자신 밖에 없다는 말이 그거였다.
동네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따가운 눈초리에 근 2년간을 대부분 집안에서만 지내던 딸이, 술장사를 하겠다는 소리에 그녀의 아버지는 경멸 어린 눈초리를 보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절대 내 귀에 들어오지 않게 하라’는 딱 그 말만 던졌다고 한다.
그녀가 이 먼 곳에까지 와서 가게를 연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 것보다도 수아는 아는 사람을 만나기가 두려웠던 게 분명했다.
그랬기에 전혀 경험도 없는 이 일을 시작했을 것이다.
“ 수아야....”
곱게 접힌 종이를 부스럭거리며 펼치자, 그녀의 체취가 느껴져 가슴이 무너지는 것만 같다.
작고 동글동글한 글자가 예쁘게 적힌 모습이 눈물로 인해 흐릿하게 보였다.
재빨리 눈을 문지르고는 다시 들여다봤다.
‘ 오빠
미안해요. 이런 말은 안 하기로 약속했는데...
이제는 다 아셨죠?
전 오빠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여자에요..자격도 없고...
오빠를 만나서 너무 행복했어요.
이제는 용기가 생겼어요..그러니까 제 걱정은 마세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오빠를 그렇게나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안심이 되요...
너무 착하고 예쁘고...오빠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아가씨에요...
아시죠? 제가 사람을 잘 본다는 거...
괜히 저 같은 거 생각한다고 울리면 안 되요..알았죠?
제게 준 행복만 가지고도 전 평생을 웃으며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고마워요...이 말도 안 하기로 했는데...제가 바보라서 자꾸만 까먹네요? 호호호
괜히 절 찾으려고는 마세요..어디로 갈지는 집에도 알려주지를 않았으니까..
저랑 약속하는 거에요..꼭 행복하겠다고...
사랑했어요...오빠가 주신 사랑 죽는 날까지 가슴 속에다 간직할게요...’
하늘이 꺼지는 것 같았다.
마지막 희망마저 산산이 부서졌다.
군데군데 번진 자국이 보이는 종이 위로 물방울이 떨어져 새로운 꽃이 피고 있었다.
종이 위로 퍼져나가는 까만 잉크와 함께 내 마음 속도 검게 물들어갔다.
그때였다.
번쩍하고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 민지? 민지가?”
그제서야 모든 게 명확해졌다.
지난 사흘간 왠지 자신을 피하는 것만 같던 민지의 태도, 그녀가 수아를 찾아갔던 게 틀림없었다.
가슴 속에서 뭔가가 터져 나오더니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나를 삼켜버렸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혹시나 구겨질까 편지를 조심스럽게 다시 접어 주머니에다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가게 밖으로 뛰쳐나왔다.
“ 어? 자, 자네?”
“ 죄송합니다...나중에 다시 찾아 뵐게요...”
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그가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수아의 주변에서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해준 고마운 분이었다.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를 드리고는 집으로 내달렸다.
‘ 쾅~’
현관문을 요란하게 열고서 뛰어들자, 점심준비를 하고 있었던지 주방에서 민지가 화들짝 놀란다.
“ 사, 삼촌?”
겁을 먹은 듯한 얼굴, 분명히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표정조차 가증스럽게 느껴진다.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그 가엾은 여자의 가슴에다 난도질을 해놓고는, 저런 가녀린 모습을 연기하다니 정말로 화가 났다.
“ 너....”
“ 사, 삼촌...”
한걸음한걸음 다가가자 주춤주춤 물러선다.
확실했다.
아무리 내가 화가 난 모습이라도 찔리는 게 없다면 저럴 리가 없었다.
머리 속에서 뭔가가 ‘툭’ 하고 끊어졌다.
‘ 짝~’
“ 악~!”
실내를 울리는 타격음과 함께 민지의 몸이 비틀하더니 주저앉는다.
멍해졌다.
손바닥이 화끈거려온다.
‘ 내가 민지를 때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단연코 살아오면서 여자에게 손을 댄 건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그게 민지이라니!
“ 흑흑흑...흑흑....”
“ 민..지...야...”
바닥에 주저앉은 채 뺨에다 손을 대고서 넋이 빠져 쳐다보던 민지가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찔한 느낌과 함께 현기증이 일었다.
“ 흑흑흑...아니야...흑흑...아니란 말이야...흑...”
“ 미, 민지야?”
가슴이 저려왔다.
그리고 들려온 민지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지금 민지는 뭔가를 이야기하려 하고 있었다.
“ 흑흑흑...그냥...궁금해서...한번만 보고 싶었을 뿐이야..흑흑흑...그랬는데...앙~~~”
“ 민지야...미안해...정말 미안해...”
“ 엉엉엉~ 그랬는데...엉엉~ 나더러 삼촌을 잘 부탁한다고...
흑흑흑...난 무서워서 삼촌한테 말도 못하고...”
“ 하아~ 민지야...”
민지의 어깨를 껴안자 내 가슴에다 얼굴을 묻고서 오열을 했다.
그때 언제 나왔는지 안방 문 앞에 서있는 예지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