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雨緣) (23)
민지를 방으로 데려와서 달랬지만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눈물로 내 가슴언저리를 축축하게 적신 것은 물론 오히려 목까지 푹 잠겨버렸다.
왼쪽 뺨의 너무나 선명한 자국, 마치 진흙 판에 찍어놓은 손도장처럼 벌건 그 모습에 내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생긴다.
품 안에서 떨고 있는 이 가녀린 아이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가증스러운 최악의 인간이었다.
7년이라는 긴 세월을 봐왔으면서도, 아니, 그런 걸 떠나 내가 사랑하고 또한 나를 믿고 따르는 소중한 여자였다.
그런데, 일단 먼저 믿어볼 생각은커녕 그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다짜고짜 손부터 날렸다.
‘ 정신 나간 새끼...이 미친 놈...이런 병신...’
스스로에게 아무리 욕설을 퍼부어봤자 이미 큰 상처를 받아버린 민지다.
이건 단지 배설을 위해 싸구려 잡지의 벌거벗은 여자를 보며 하는 용두질에 지나지 않았다.
“ 많이 아프지..미안해...”
“ 훌쩍~ 훌쩍~”
어느 정도 눈물이 가라앉은 민지의 뺨을 쓰다듬어보았다.
빨래판을 더듬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둘투둘한 감촉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 얼마나 아팠을까? 미안해...민지야...정말 미안해...’
너무나 미안해서 차마 입으로 그 말을 다시 내뱉지도 못했다.
마음 속으로만 두 번 세 번 용서를 빌 뿐이었다.
부푼 살갗이나 맞을 때의 통증쯤이야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혀진다.
하지만, 그녀가 받았을 마음의 충격을 생각하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평생 처음 맞아보는 따귀가 아니었을까 하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 이건 예감이 아니라 거의 확신이었다.
민지나 예지, 이 아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맞을 만한 짓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지켜 봐왔던 나이기에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 훌쩍....삼..촌...”
“ 그래, 민지야..”
감기에라도 걸린 것처럼 힘겹게 새나오는 잠긴 목소리가 내 가슴을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
“ 훌쩍..그 언니...어떻게 된 거야?”
걱정하는 척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런다는 게 확연히 느껴진다.
이런 아이에게 내가 한 짓이 기껏 그거였다니, 다시 한번 자신이 초라해진다.
“ 휴~ 글쎄다...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어...”
뭐라고 대답을 하겠는가? 떠났다고, 너와 둘이 잘 먹고 잘 살라고서 가버렸다고 해야 하나? 할 수 있는 말은 그냥 그 정도였다.
그보다 어떻게 된 건지 더 궁금한 게 바로 나였다.
어쨌던 두 여자가 만났었다는 건 이미 사실로 판명되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 그걸 꺼낼 만큼 정신이 아주 나가지는 않았었다.
물론, 이미 저지른 것만 해도 충분히 미친 짓이긴 하지만 말이다.
“ 쿨쩍~ 삼촌..사실은...”
그런 내 심정을 알아챈 건지, 아니면, 아직도 오해를 받을까 두려웠던지 더듬더듬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녀가 고마우면서도 너무나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아까 언뜻 들은 대로라면 민지는 내게 정말 억울하고 황당한 꼴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화를 내기는커녕 채 눈물이 다 마르기도 전에 눈치를 살피면서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 한다니, 나 자신이 이런 사태를 만들어 놓은 원흉이면서도 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녀를 더 꼭 끌어안으면서 부드럽게 등을 쓸어주었다.
“ 얼마 전에...”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바로 코앞에서 그렇게 매일 밤마다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이 했는데, 눈뜬 장님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모르겠는가.
자정이 넘은 시간 창 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는 예지를 발견하고 다가갔다가 수아와 나를 봤다고 한다.
그리고, 몇 날 며칠을 혼자서 끙끙대는 민지가 딱했던지, 예지의 손님인 척 살짝 보고만 오자는 제의에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내가 퇴근하기 일찌감치 전에 둘이서 갔을 때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주문한 생맥주를 가져온 수아가 자신의 술까지 들고 와서는 덥석 앉아버린 것이다.
물론, 그거야 충분히 있을 수가 있는 일이었다.
서로 직접 인사를 한 적은 없어도 아이들의 얼굴 정도야 이미 익히고 있었을 터이다.
하지만, 정작 민지를 놀라게 만든 건 그 다음부터였다.
대뜸 나를 많이 사랑하냐고 물었다고 했다.
‘ 어떻게? 어떻게 안 거지?’
결혼할 여자가 있다고 했으니 나와 같이 있던 수아를 아이들이 즉시 알아본 거야 당연했다.
그러나, 수아의 경우는 달랐다.
내가 민지와의 관계에 대해 비슷한 언급조차 한 적이 없었다.
‘ 가만, 혹시 그때?’
만약에 뭔가 낌새를 알아챘다면 그날밖에 없다.
민지의 전화를 받고 허겁지겁 뛰쳐나간 날, 내 딴엔 티를 안 냈지만 감정을 잘 들키는 나인만큼, 여자 특유의 예리한 육감에 걸렸을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그녀에게 전화를 하지 못한데다가 결국에는 민지와 관계까지 가지고 말았었다.
그 후로 수아를 볼 때마다 양심에 찔려 했던 내가 어떤 변화를 보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알아챘으면서도 모른 척을 해준 거다.
어쩌면, 애초부터 언젠가는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자격이 없다고,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며 항상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던 여자다.
그렇기에 본인의 신상을 밝히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내 곁에 누군가가 생겨서 안심할 수만 있게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작정이었던 것이다.
난 정말로 멍청한 놈이다.
제 딴에는 똑똑한 척, 자상한 척하면서 잘 한다고 하는 짓이 만날 엉망이었다.
“ ...너무 놀랐지만 지고 싶지가 않았어...그래서 사랑한다고, 죽도록 사랑한다고...미안해..흑...”
“ 민지야...”
그쳤던 울음이 다시 시작되었다.
따지고 보면 민지의 잘못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물어오는데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그게 더 웃긴 일이었다.
“ 아니야, 네가 잘못한 건 없어...미안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 흑...하지만, 하지만...그 언니 가버린 거지? 그렇지? 나 땜에...흑흑...”
민지는 지금 자책을 하고 있었다.
싸워서 이기겠노라고 당당하게 선언했었지만 그건 자신의 매력으로 내 선택을 바꾸겠다는 의미지, 그 여린 심성으로 경쟁자를 잔인하게 짓밟으면서까지 승리를 쟁취하는 아비규환의 전쟁은 무리였다.
“ 너 때문이 아니야...”
“ 흑..그래도...흡~”
자꾸만 미안해하는 민지의 입술을 덮어버렸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라서 버둥거리다가 곧 내 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미안함에 그리고 애잔한 마음에 부드럽게 쓰다듬다 나도 모르게 점점 더 몰입하고 말았다.
어느새 내 손이 밑으로 내려가 탐스럽기 그지없는 엉덩이를 거머쥐었다.
아랫도리로부터 불길이 일면서 성기가 벌떡 서는 걸 깨닫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 ..자~ 네 잘못이 아니니까 그러지 말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는데?”
“ ..으, 응...그게...”
엉덩이에 놓인 손은 그대로 두고서 부드럽게 애무를 했다.
그러자, 안심이 되는지 울음을 그치고 그 다음 이야기를 계속했다.
더 이상 별다른 건 없었다.
수아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고 한다.
어색한 분위기에 더 이상 있기도 곤란해서 잔을 비우고 나오려는데, 수아가 던진 ‘장우 오빠를 잘 부탁한다’는 마지막 말에 더럭 겁이 났단다.
불안해하는데 며칠 후에 갑자기 가게가 문을 닫아버렸다.
증발해버린 수아 때문에 내가 헤매고 있을 때, 민지도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 그래, 그랬구나...미안해. 어디 봐, 많이 아팠지?”
“ 아니야, 삼촌...”
“ 미안해, 정말 미안해...우리 착한 민지를 내가...”
“ 정말 아니야..삼촌...”
아직도 부푼 흔적이 남아있는 보드라운 뺨을 쓰다듬자 내 손등에다 손을 겹치면서 고개를 젓는다.
따스한 살결이 손바닥에 붙어오는 것만 같다.
미안한 한편으로도 너무나 사랑스럽다.
자꾸만 침이 고이면서 이미 발기가 돼버린 성기가 끄덕거리고 재촉을 했다.
하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시기만이 문제가 아니라 장소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밖에서 예지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섰을 것이다.
“ 민지야, 나 잠시만 나갔다 올 테니까, 갔다 와서 같이 점심을 먹자...알았지?”
“ 으, 응...삼촌...”
“ 그래, 고마워~ 쪽~”
계속 이렇게 있다가는 정말로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깐 워낙 경황이 없었지만 알아봐야 할 것들이 남아있었다.
민지에게 입을 맞춰주고서 일어섰다.
수아의 친척아저씨에게 물어서 집을 찾아갔었다.
아무 소용이 없을 거라는 말은 미리 들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하는 간절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더 심했다.
그녀의 행방은 말할 것도 없고 차디찬 냉대만 받고 쫓겨나다시피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특히나, 그녀의 아버지는 딸과 결혼을 하겠다는 내게, 웬 미친 놈을 다 본다는 식의 눈초리를 노골적으로 보냈다.
잠깐이었지만 그 집안의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극단적인 일인독재의 냄새가 확 풍겼다.
그에게 수아는 자신의 권위와 사회적인 명성에다 치명적인 흠집을 낸 아주 몹쓸 자식이었다.
그 기세에 짓눌려 다른 식구는 아예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터부시하고 있었다.
그나마 대문까지 따라 나온 어머니가 손을 잡으면서 잠시 눈물을 글썽이다, 안에서 부르는 남편의 고함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가를 닦고 급히 들어가버렸다.
그녀에 비하면 난 수백 배는 행복한 처지였다.
배신감에 완전히 인연을 끊다시피 했지만, 어쨌던 아버지를 포함한 새어머니나 배다른 여동생도 진심으로 잘해주었었다.
수아가 그런 억울한 냉대 속에서 느꼈을 막막함과 지독한 외로움을 생각하면 진저리가 쳐졌다.
남은 희망은 하나뿐이었다.
혹시나 필요할지 모른다면서 위임장과 더불어 맡겨두고 갔다는 인감도장을 믿었다.
어찌되었던 그것만큼은 꼭 찾으러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연락을 받고 헐레벌떡 쫓아온 것이다.
“ 아, 아저씨...”
“ 어, 그래 왔나?”
“ 네, 안녕하셨죠? 수아한테서 정말 연락이 온 건가요?”
“ 일단 앉게...”
“ 네...”
나 때문에 일부러 문을 연 것이 분명한 가게에서 둘만 썰렁하게 마주앉았다.
“ 사실...여기는 들어올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 네...그렇죠...”
“ 그래서 말이야...”
계약기간이 아직 까마득하게 남은 상황에서, 같은 조건에 들어올 사람이 있어야만 보증금을 빼서 보내줄 텐데, 근시일 내에 그럴 가능성이 적었다.
문제는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모르는 그녀에게 경제적인 여유가 그다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차라리 아저씨가 직접 임대계약을 승계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하하하~ 이 사람 보게? 걔는 내 조카야, 어디 남인가?”
“ 하지만...”
목이 메어왔다.
가족들마저 철저히 외면하는 가슴 시린 현장을 이미 보고 온 나였다.
그런 그녀를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치를 떨고 있던 중이었다.
전에 언뜻 들을 때 아저씨는 자기 가게를 열 준비를 하는 중에 잠깐 돕는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여기와는 다른 좋은 곳을 염두에다 두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 ..그리고 빨리 결정이 나야 그 애가 나타날 게 아닌가?”
“ ..네...하지만, 여기서 가게를 하시기에는...”
결국엔 나와 수아를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게 해주려는 배려였다.
“ 하하하~ 걱정 말아...그래도 내가 이쪽 밥을 먹은 지가 몇 년인데...”
“ 네...아저씨...”
“ 그런데...일이 생각처럼 안돼서 미안하군...”
“ 네? 그게...무슨?”
그런 감격도 잠시 미안해하는 아저씨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 오늘 연락을 해왔기에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당장에라도 올 줄 알았거든?”
“ 그, 그런데요?”
초조함으로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 미안하다면서...계좌번호와 사서함주소만 불러주더니 등기로 부탁하더라고...눈치를 챈 건지...”
“ 하아~~~”
한숨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아마 내가 추적할 걸 예상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얻은 건 있었다.
최소한 사는 지역은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우편사서함도 사는 곳과는 꽤나 멀리 떨어진 데다 만들었겠지만, 아무리 넓게 잡아도 한 도시를 벗어나지는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것만 해도 어디인가? 전국방방곡곡이라도 다 뒤질 작정이었었다.
“ 감사합니다...참...사서함주소는 어디던가요?”
“ 응, 그게...”
그나마 경기도여서 다행이었다.
평생 살아온 고향에서 아주 머나먼 곳으로 가기에는 무의식 속에 두려움이 있었던가 보았다.
일단 주소를 받아 적었다.
“ 다시 연락이 오면 다음날 등기로 보낸다고 하고 제게 바로 알려주세요...”
“ 으, 응? 그거야...아~ 혹시 직접 가보려고?”
“ 네...미리 가서 도착하는 날 아침부터 종일 기다려보려고요...”
“ 그러다가 안 나타나면 어쩌려고?”
“ 해보는데 까진 해봐야죠...그게 안되면 또 다시 생각을 하고요...”
“ 허~어~ 차라리 전화가 오면 내가 설득을 해볼까?”
“ 아니, 그러지 마세요...그러면 도망을 가버릴 거에요...”
“ 그래...그렇겠지...휴~~ 답답한 녀석 같으니...왜 멀쩡한 사람을 이렇게 애태우는지..”
“ 후후~ 앞으로 잘살기 위한 연습이라고 생각하면 되요...”
“ 하하하~ 고맙네..고마워...내가 이제야 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아...”
“ 무슨 말씀을요? 제 사람인데 당연한 거죠...”
술이나 한잔 하자는 아저씨의 말에 정말 기쁜 마음으로 따라 일어섰다.
사막 한가운데서 바늘을 찾는 막막한 심정이었는데 이제 당장에라도 그녀를 만날 것만 같았다.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막상 실패를 하자 허탈했다.
어렵게 휴가를 내서 사흘간 그 근처에다 방을 잡고 기다렸지만 끝내 나타나지를 않았다.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해서 찾아갔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도시에 있다는 느낌만은 확실히 들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굉장히 무모하지만 하나하나 훑으면서 직접 찾는 것 그 길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로 민지는 내가 퇴근할 때면 꼭 저녁을 해두고 기다렸다가 식사를 같이했다.
마치, 처제를 데리고 사는 신혼부부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까지 아름답지는 못했다.
그때 잠깐 애무를 하면서 욕정을 느끼긴 했지만, 아니, 그 이후로도 계속 갈구하고는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민지는 묵묵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 어서 와, 삼촌...”
“ 응, 그래...예지는?”
“ 좀 늦는 댔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 민지야...”
“ 응? 왜?”
“ 우리 술이나 한잔할까?”
“ 술?”
“ 그래...”
“ 알았어...”
“ 안주는 내가 만들 테니까 소주만 몇 병 사와..”
아무래도 술이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민지는 여전히 조심스러워하긴 했지만 내심으론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오늘 난 이미 회사에다 사직원을 제출하고 오는 길이었다.
물론 수리가 되려면 약간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쨌던 내 결심에는 변함이 없다.
현관문을 나서는 민지의 뒷모습을 보자 아련해지고 말았다.
멍한 표정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아니, 그러기 싫다는 얼굴로 민지가 쳐다보고만 있었다.
‘ 전혀 예상을 못했을까? 그래서 충격이 더 큰 걸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희미하게 예감을 했었기에 오히려 더 강하게 부정하면서 믿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때 드디어 민지의 입이 열렸다.
“ 아아악~ 왜? 왜? 도대체 난 왜 안 되는 거야? 왜~~!!!”
하지만 그건 말이 아니었다.
고통의 비명이자 뼈아픈 절규였다.
더 이상은 한마디도 듣지 않겠다는 듯이 두 귀를 양손으로 꽉 틀어막고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그녀의 모습이 나를 너무나 아프게 만들었다.
저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지금 저 아이는 폭주를 하기 직전이었다.
자칫 정신마저 붕괴가 될지도 몰랐다.
“ 민지야, 제발,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제발...”
“ 흐흑흑~ 흑흑~ 싫어, 무슨 말을 들으라는 거야? 흑흑흑~ 떠나겠다는 말? 싫어, 싫단 말이야...흑흑흑....”
발악하는 민지를 품에다 꽉 껴안고 귀에서 손을 떼어내게 해 계속 속삭였다.
그러자,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면서 마구 원망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격한 감정을 눈물과 하소연으로 한꺼번에 분출함으로써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조금 전 관자놀이와 목덜미에 새파랗게 떠오르던 정맥들도 이젠 사라졌다.
하지만 신체로 쇼크가 올 위기는 넘겼지만 아직 정신적인 문제가 남아있었다.
망설이다가 결심을 했다.
이 이야기가 민지에게 새로운 아픔으로 남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고 납득하는 데는 충분한 역할을 할 거다.
그리고, 여자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그걸 입에 담기가 너무나 싫은 나였지만 민지를 위해서 그 정도는 감수하는 게 당연했다.
이래저래 아무리 따져봐도 역시 이쪽이 남는 장사였다.
“ 그냥, 그냥 듣기만 해...대신 끝까지 들어...도중에 내 말을 끊지 말고...”
“ 흑흑흑...흑흑...”
민지의 귓가에다 계속 소곤거리자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내 부탁대로 말을 끊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정말로 착하고 다소곳한 아이였다.
마음이 찡하면서 콧등이 시큰해졌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일부러 억누르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지금부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울고 있을 것이 뻔했다.
민지에게 도중에 말을 끊지 말아달라고 한 건, 쉬었다가 다시 이어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야기는 딱 하나뿐이었다.
수아에게만 처음으로 했던 과거의 기억, 납득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민지 또한 그걸 알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으흐흐흑흑~~ 삼...촌....엉엉엉~”
“ 크흑~ 그래...울고 싶으면...큭~ 실컷 울어...”
“ 으아아앙~ 앙~ 미안해~ 흑흑흑~”
민지가 내 품에 안겨서 대성통곡을 했다.
스스로 많이 극복을 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여전히 쉽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수아에 대해서까지 같이 이야기하다 보니, 가슴이 슬픔으로 완전히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 ..그래서...난 그녀를 찾아야만 하는 거야...이해하겠니?
날 용서해줘...사랑해 민지야...이건 정말 진심이야....미안해...”
“ 흑흑흑흑....흑흑흑...”
하염없이 울기만 한다.
하지만 이미 민지가 모든 걸 체념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고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 그것도 육체적으로 깊은 사이에는 이런 게 장점이면서도 종종 반대로 작용한다.
상대의 무의식적인 반응에서도 그 심경을 너무나 생생하게 알아버리는 것이다.
그녀가 쏟아내는 비애와 탄식의 물줄기에다, 내게서 흘러내린 아픈 과거라는 작은 빗물이 합쳐지자, 갑자기 거센 강물이 되어서는 우리 두 사람을 슬픔의 바다 속으로 휩쓸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전히 거실바닥에서 부둥켜안은 채로 있었다.
엉덩이에 감각이 없고 민지를 껴안은 팔이 저릿저릿한 걸 보면 꽤나 지난 모양이었다.
눈물이 완전히 말라버린, 아니, 영혼까지 건조해진 듯한 민지의 낮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 ...얼마나 남은 거야....?”
“ 빠르면 사흘 길어도 일주일...”
내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낯선 느낌에 순간적으로 흠칫한 기분까지 들었다.
스스로의 음성이 이렇게나 공허하게 들리기는 처음이었다.
“ ..안 돌아올 거지? 찾아도...”
“ ...아마도...미안해...민지야...”
허수아비 인형처럼 맥없이 늘어져있던 민지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 미친 놈...무슨?’
문득 민지를 데리고 수아를 같이 찾으러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지, 둘 모두를 데리고 살기라도 할 것처럼 상상하는 자신이 가당치도 않았다.
이렇게 결정을 내린 이상엔 가능한 빨리 그리고 완벽하게 민지의 곁에서 멀어지는 것이 좋았다.
“ ....보내줄게...삼촌....”
“ ..민...지야....”
텅 빈듯한 민지의 속삭임이 마치 재판장의 사형선고처럼 들려왔다.
분명히 기다리던 대답인데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일인데도, 막상 느껴지는 이 아득한 절망감은 대체 이유를 모르겠다.
“ 대신에...”
“ 으, 응...그래..말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못할까? 내 영혼을 원한다고 해도 줄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 안아줘...삼촌이 가기 전까지 계속...”
“ 미, 민지야...”
“ 미련 없이 보내줄 수 있도록 내게 모든 기억을 남겨줘...그래야만 해, 그럴 수 있지? 삼촌...”
“ ..민지야....”
이젠 내가 눈물이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같이 가자는 이야기가 목구멍까지 나왔다가 다시 기어들어갔다.
왠지 그 말을 내뱉으면 민지가 기꺼이 따라 나설 것만 같아 두려웠다.
“ 사흘이 되든 일주일이 되든지 간에..나 지금부터 삼촌 방에서 같이 지낼 거야...”
“ 민지야...”
“ 예지한테는 내가 알아서 이야기할 테니까...삼촌은 그렇게만 알아...”
“ ..휴...그래..알았어...”
약하면서도 강하고, 뜨거우면서도 슬픔으로 가득 찬 저 눈동자를 보면서 뭐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런 것보다 내가 더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이젠 정말로 영영 떠나는 것이었다.
그간 참고 있었던 열정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것인지, 아니, 그보다는 남아있던 모든 걸 다 짜내고 있는 것일 게다.
민지는 마치 허물을 벗는 구렁이처럼 온몸을 비비 꼬고 꿈틀거리면서 하염없이 타올랐다.
끊임없이 울음을 터뜨리면서 몸에 난 구멍이란 구멍으로부터 수분을 쏟아내고 있었다.
눈물과 땀방울 그리고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애액까지 온몸이 물기로 미끈미끈했다.
“ 하아악~ 삼초온~ 사랑해~ 사랑해~”
“ 사랑해~ 민지야~ 헉헉~”
나도 이미 반쯤은 미쳐가고 있었다.
발기라고 된 성기가 푹 삶긴 어묵처럼 흐물흐물했다.
사정을 하고 또 했더니 이제는 절정의 순간에도 찔끔하면서 요도만 조여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쾌감보다는 회음부가 당기고 성기의 끝이 아팠다.
하지만, 그럼에도 민지의 몸 속에서 빼내고 싶지를 않았다.
그녀의 소원대로 내 모든 걸 쏟아 붓고만 싶었다.
정액이 동이 나서 피를 짜내다가, 그마저도 마르면 살을 녹이고 뼈를 부셔 그녀의 질에다 남기기를 원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시고 두덩에 피멍이 든 건 민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슬픈 정사라는 말이 그냥 멋을 부리는 건 줄로만 말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살이 부딪치고 성기와 성기를 마찰시키는 아찔한 쾌감이 커질수록 죽을 것만 같은 슬픔이 밀려왔다.
“ 허억~ 민...지..야...”
등잔의 기름이 모두 닳고 심지마저 다 타버린 것인지, 정신까지 아득해지는 느낌과 함께 민지의 몸 위로 무너져 내렸다.
뜨거운 신열이 느껴지는 탄력적인 여체가 물기에 흠뻑 젖어 출렁거린다.
알맹이가 몽땅 빠져나가 버리고 껍데기만 남은 공허함 속에서도, 가슴 속으로 서글픔이 사정 없이 밀려들었다.
이제는 정말로 모든 게 끝났다.
먼동이 밝아오고 있었다.
민지와 약속을 했듯이 드디어 떠날 때가 다가온 것이다.
“ 하아~ 하아~ 잊을 거야...모두 잊을 거야...삼촌의 얼굴도 이름도 다...”
“ 그래...그렇게 해...아니, 꼭 그래야 해...민지야...”
다짐이라도 하는지 가쁜 숨결과 함께 중얼거리면서도, 도저히 놓아주지 못하겠다는 듯이 내 몸을 더 칭칭 조여오는 민지가 애닯기만 했다.
“ 흑흑흑~ 흑흑...흑흑흑...”
“ ..민...지...야...”
나도 모르게 같이 눈물을 쏟아버릴 뻔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난 그럴 자격이 없었다.
나는 민지를, 사랑하는 한 여자를 배신하는 중이었다.
그런 만큼 뻔뻔하고 비열해야만 하는 것이다.
“ 안녕...내 사랑...”
침대 위에서 눈부신 나체를 드러내고 오열하는 민지를 뒤로 한 채 욕실로 향하면서 중얼거렸다.
낯선 도시인 탓인지 왠지 공기마저 다른 느낌이 든다.
일단은 지낼 곳부터 정해야 했다.
“ 한 장우...이제는 돌아갈 데도, 돌아볼 시간도 없어...”
이 하늘 아래 어딘가에 수아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