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들의 오너 시즌 2 -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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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부>
#1- 여왕 현신.
수아는 활에 화살을 살짝 먹여놓고는 그것을 축 늘어뜨린채로,앞에 있는 미라를 바라보았다.자신의 근방에 불규칙하게 널부러져 있는 나무들.미라가 기이한 단검 두 자루로 부린 술법하나로 그것들은 깨끗하게 벌목되었고,직접공격보다는 음폐 엄폐 상태에서 싸울수 밖에 없는 수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조금만 더 성장했어도!’
수아는 분통이 터졌다.늘 자랑스럽게 생각한 트루피의 후예가,이렇게 발목이 잡힌것이 분했다.
한때 프로센에서는 트루피들의 아름다운 외모를 이용해서 노예로 팔아 넘기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기껏해야 활 한자루 뿐이겠지’라고 생각했던 소위 ‘트루피 정벌자’들은 몇번이고 쓴 고배를 마셔야 했다.마법사까지 대동하고 갔던 원정.하지만 트루피가 활하나로 부리는 오묘한 술법들에 그들은 결국 심연의 숲을 포기하고 왔어야만 했다.마법을 방불케 하는 궁술.절대 숲에서는 그들을 이길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아의 경우는 아직 성장이 부족했다.페어리라는 존재적 한계를 포함해서 그녀는 아직 마나의 수련이나,신체적 성장이 100퍼센트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슈웅!
수아의 화살이 직선거리에 서있는 미라에게로 날아갔지만,그녀는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피해버렸다.애꿎은 미라의 금발의 머리칼이 몇가닥 땅에 떨어졌을뿐.
‘역시 빠르다.활을 당기는것을 보지도 못했는데.’
미라가 수아의 화살을 피한것은 순전히 어쎄씬의 감각덕분이었다.하지만 수아는 여전히 분한듯,거리를 두고 서서 두번째 화살을 먹였다.미라의 시선이 재빨리 수아의 화살통에 가서 꽂힌다.남은 수량은 몇개 되지 않았다.
쉬우우우우!
미라의 몸에서 마나의 오오라가 일어나나 싶더니,이내 그것은 대지를 진동하기 시작했다.오행을 다루는 어쎄씬의 고유능력.수아는 재빨리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라 대지로 부터 전해지는 충격파를 피했지만,처음부터 그것을 노린 미라는 재빨리 단검을 집어 던졌다.
채애앵!
“이익!”
수아는 자신의 목줄기를 정확히 노리고 들어오는 단검을 들고있던 활로 겨우 막아내었지만,손목에 지릿한 전율이 흐르자 그만 들고 있던 활을 놓쳐버리며 지면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 끝이다!”
미라는 한자루 남은 단검을 거꾸로 쥐고 맹렬한 속도로 수아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땅에 주저 앉은채 분한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꾹 하고 감아버렸다.
‘응?’
두눈을 감아버린 수아는 아무런 충격이 느껴지지 않자 눈을 살며시 떴고,그녀의 눈은 놀라움으로 물들었다.자신에게 맹렬히 달려오던 미라가 그 반대방향으로 주르르륵 밀려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람?’
수아는 계속 밀려나가 나무등걸에 부딪힌 미라가 자신이 아닌 허공을 응시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얼른 고개를 위로 올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쉬우우우우우
하늘로 부터 맹렬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신기하게도 그것은 수아를 교묘하게 피해,미라의 몸으로 직격하고 있었고,미라는 단검을 지면에 꽂아넣었다.순식간에 지면이 솟구치며 바람을 방어하는 방어벽이 생겨났다.
‘노..노아?’
수아는 일어날 생각도 안하고는 침을 꼴깍 하고 삼켰다.저멀리 허공에서,블루블랙의 머리칼을 휘날린채 냉정한 표정으로 미라를 내려다 보는 노아의 모습이 보였다.평상시에 귀엽고 순진한 눈망울이 아닌,마치 사신처럼 냉정한 그녀의 두눈.그리고 그녀의 작은 몸을,커다란 새의 형상을 한 바람의 상급정령이 받치고 있었다.그녀는 바람의 정령에 의해 허공에 뜬채로,미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드드드드드...
이윽고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고,미라가 소환해낸 대지의 방어벽은 흡사 망치로 계란을 친것처럼 허무하게 부서졌다.
“큭!”
미라는 지면의 진동으로 인한 충격에 휘청거렸다.그녀가 손을 뻗자,수아의 근처에 있던 그녀의 단검이 빠르게 그녀의 곁으로 날아오며 미라의 손에 안착했다.
‘그때그...정령술사?’
그녀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무인도에 있던 준일행을 암살하라는 오너의 명령을 받고 갔었던 그녀.당시 블랙나이트인 세라와 호각으로 일대일 승부를 벌였을 정도로 어쎄씬으로써의 상위레벨에 있던 그녀였다.하지만 노아의 등장으로 허무하게 소멸되어 버린 전적이 떠오르자,미라는 밀려오는 긴장감에 단검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럴리가.철저하게 역할을 분담에서 온건데..그럼 다른 페어리들은 모두 당한건가?’
미라는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여전히 사신의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노아의 모습.그리고 바람의 상급정령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엄청나게 몰아치는 강풍. 그제서야 미라는 이번에 온 원정도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윌리엄스의 명은 준을 사살하라는 것이었고,수아를 해결한뒤 재빨리 준에게 가서 그를 제거할 생각이었던 것이다.노아나 세라,그리고 마유미나 리미쪽을 쳤던 이들은 모두 준에게 지원을 오지 못하도록 시간을 버는 역할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정령의 여왕이 저 트루피를 도우려 왔다는 것은...그들이 이렇게 빨리 무너졌다는건가.’
미라는 계속해서 차분히 생각할수 없었다.이번에는 그녀의 주변에서 엄청난 양의 물줄기들이 흡사 레이져 처럼 자신에게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미라는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고,그 물줄기가 관통한 지면에는 포탄을 맞은 것처럼 푹푹 패여갔다.
“또...너인가.”
그녀,노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미라는 흡사 저승사자의 말을 들은것처럼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평상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놀란 수아보다도,미라가 받은 정신적 충격이 훨씬 컸다.그녀의 등장은 이번 작전에 전혀 계산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화염의 인!”
미라의 양검이 교차하며,그것은 기이한 문양으로 움직였고,이윽고 이글거리는 불덩어리가 허공에 있는 노아에게 무자비하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노아!”
수아는 자기도 모르게 크게 소리쳐 버렸지만,이윽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노아를 바라보았다.어디선가 엄청난 물줄기가 솟구치며 미라가 생성해낸 화염구들을 간단하게 소멸시켰기 때문이었다.아까와 마찬가지로 노아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고,대기는 뿌연 수증기로 가득찼다.
“경고한다.”
화염의 인을 극성으로 짜낸 공격이 간단하게 무산되자 질린듯한 눈으로 노아를 바라보던 미라는 흠칫하고 놀랐다.노아의 입이 스르르 열렸기 때문이었다.
“죽고싶지 않다면,지금 도망가라.”
미라는 이를 악물고는 다시금 단검을 교차시켰다.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노아는 지금 자신에게 도주를 권하고 있는 것이었다.마치 자신은 언제든지 죽일수 있다는 듯한 말투.거기에는 애초에 ‘목표따윈 네가 아니다’라는 뉘앙스 마져 실려있었다.하지만 미라는 도망칠수 없었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거라.어차피 소멸되어도,너는 나에 의해 다시 태어날수 있다-
원정을 오기전 오너 윌리엄스가 했던 말이었다.페어리가 소멸될때는 죽음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며 죽어가지만,윌리엄스에게는 그저 다시 개화시키면 그만인 존재일 뿐이었다.하지만 미라는 그것을 어길수가 없었다.오너와 페어리란 절대적인 관계.그것을 거스를순 없는 것이었다.미라는 있는힘껏 마나를 끌어올렸다.그녀의 몸주변으로 우웅하는 파공음이 울려퍼졌고,그녀의 양팔은 각각 다른 인을 맺으며 허공을 갈랐다.
“대지의 인!화염의 인!”
미라가 죽도록 연습한,한번에 두개의 인을 맺는 인술이었다.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지면이 표족한 창이 되어 허공에 있는 노아를 향해 솟구쳐 올랐고,동시에 노아의 주변으로 수십개의 화염구가 날아들었다.
콰직!
미라는 단검을 떨굴뻔한것을 겨우 참아내었다.노아는 생채기 하나 없이 여전히 허공에 떠있었다.자신이 솟구쳐 오르게 한 대지의 인은 그녀의 근처에 도달하지도 못했다.그녀의 앞에 나타난, 바위로 된 사람의 형상을 한 거대한 땅의 정령이 미라가 소환한 대지의 창을 움켜쥐더니,다시 땅속으로 쳐박아 버렸기 때문이었다.그녀가 날린 화염의 구체 역시,맹수의 형상을 한 물의 정령의 입속으로 순식간에 빨려들어가 버렸다.
‘마..말도 안돼.도대체 한번에 몇개의 상급정령을..’
아예 넋이 나가 노아를 바라보는 수아.그리고 마나를 급히 끌어올린 탓에 2차 공격의 엄두도 대지 못하며 서있는 미라.노아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그녀의 목소리에는 범접할수 없는 위엄마져 서려있었다.
“내 앞에서 잔재주는 통하지 않아.”
아예 한쪽 다리가 풀려버린 미라.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노아의 양손이 천천히 허공에서 만났다.
“경고를 무시했으니.이대로 이 곳의 나무가 되거라.”
미라의 몸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그녀의 불신으로 물든 그녀의 두 눈동자로 자신의 몸을 관통한 그 무언가가 투영되었다.
“아..아아..어..”
미라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땅속에서 솟구친 한개의 나무줄기.그것이 자신의 몸을 밑에서 위로 순식간에 관통해 버린것이다.그것도 모자라,땅에서는 몇개의 굵은줄기가 더 자라나며 미라의 몸을 휘감았다.
“꺄아아아아!”
수아는 잔인하기까지한 장면에 눈을 질끈 감았다.노아의 부름에 의해 소환된 땅과 물의 상급정령은 천천히 자취를 감추었다.그리고 미라의 몸을 휘감은 줄기는 이윽고 커다란 나무가 되어 미라의 모습을 삼켜버렸다.나무 주변을 휘감는 은은한 금빛 가루들.그것만이 미라의 존재를 다시금 없에버렸다는 증명처럼 보였다.
“노..노아.”
수아는 볼수 있었다.새의 모습을 한 엄청난 크기의 바람의 상급정령이,자신의 여왕인 노아를 지면에 안착시키는 모습을.그리고 그런 노아의 냉정한 눈은 점점 초점이 흐려지며 스르르 감기고 있었다.
#2-리미의 분석
“다들..괜찮은거야?”
준은 겨우겨우 마나의 손실을 회복한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페어리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지만,군대군대 옷가지가 찢겨나간것으로 봐선 그들역시 급습한 윌리엄스의 부대와 격전을 치룬 모양이었다.
준은 이윽고 쇼파에 잠들어 있는 노아를 바라보았다.수아는 평상시와는 달리 아주 얌전히 노아의 옆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큰 힘을 발휘하고 난 후의 노아는 늘 저렇게 잠이 필요하니까요.”
“그건 알아.하지만,이렇게 빨리 윌리엄스가 올줄은 몰랐어.”
동감이라는 듯 리미는 고개를 끄덕였다.무거워진 좌중의 분위기.회의라는 전제하에 모였지만 다들 입을 열지 못했다.항상 적극적인 유나마져도 입을 다문채 준을 바라볼 뿐이었다. 언제나처럼 리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저희쪽에는 그때처럼 죽은 오너의 페어리들이 공격을 했습니다.물론 윌리엄스의 페어리도 하나 껴있긴 했습니다만...제니라는 페어리.기억 나시는지요.”
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염력을 다루는 마인드 컨트롤러.크룬전쟁때 윌리엄스가 크룬의 마스터에게 집어던져서 희생시켰던 바로 그 페어리였다.
“물론 세라의 검에 소멸되긴 했습니다.문제는...뭔가 석연찮은 점이 있다는 거지요.”
“석연찮은 점이라니?”
준의 되물음에 리미는 곰곰히 생각에 잠겼지만,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생각을 정리할때에 종종있는 그녀의 습관이라는 것을 모두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한참의 정적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선.저희쪽을 습격한 맴버에 있습니다.죽은 오너의 페어리들이 어떻게 왔느냐..이것이야 두번째 보는 광경이니 그렇다 치고, 저희를 암살하러 온 맴버 치고는 너무나 빈약한 조합이었습니다.”
“그게 무슨뜻이야?”
“지금 반윌리엄스의 오너는 단 둘뿐입니다.주인님과 차우씨지요.셋이었지만,사라케인씨는 전사했으니까요.차우씨와 비교하면,주인님은 차우씨보다 세배는 많은 페어리들을 데리고 있습니다.그중에는 세라와 노아가 끼어있고,빙백의 인이 맺힌 유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이번에 윌리엄스가 보낸 부대는 너무나 취약하다는 겁니다.”
준은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보니 그 역시 의문점이 생겼다.만약 자신을 죽이려 든다면,정예부대를 갖춰서 와야한다.그렇다면 윌리엄스 역시 직접와야 정상이 아닌가?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 그 자식이 우릴 무시한다는 거야?”
유나의 말에 리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그 반대야.오히려 윌리엄스는 주인님이 음공을 완성시키기 전부터 주인님을 경계했어.절대 그렇지 않아.”
“그렇다면 무슨 뜻인건데?”
이번엔 준의 물음.리미는 살짝 눈을 감았고,이윽고 생각을 정리하고는 말을 이었다.
“우선,윌리엄스 측이 완벽한 재정비가 된것은 아닐겁니다.그것이 첫번째 이유일수 있겠죠. 하지만 그게 다일수는 없습니다.재정비가 안된 상태라서 약한 부대를 보냈다는건,지략이 뛰어난 윌리엄스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단순한 발상이니까요.답은 간단합니다.윌리엄스는 무언가 시험해 보고 있는겁니다.”
“시험?”
“네.정확히 말하자면,죽은 오너의 페어리들이 얼만큼의 몫을 해줄까하는 시험이겠죠.”
“개자식.”
“당연히 그 페어리들을 어떻게 개화시켰는가..이것은 저도 감이 전혀 잡히지 않습니다만,세라에게 진압된 제니나,노아에게 소멸된 미라는 그저 그들의 인솔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정말 뒷통수 치는건 일가견이 있는 놈이야.”
“덧붙여서,저와 세라,마유미,유나와 노아가 있던 곳에 보낸 페어리들은 아마 저희의 발을 묶기위한 용도였을 겁니다.그리고 수아와 대적했던 미라에게 주인님에 대한 암살 미션이 내려졌었겠죠.”
“어째서?”
“당연합니다.주인님을 없에면,저희는 당연히 없어지는 존재들이니까요.적어도..이 세계에서의 오너간 싸움이란, 아무리 페어리가 강하더라도 왕을 잡으면 이기는 장기나 다름없는 겁니다.”
리미의 말에 준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리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오늘의 원정으로,윌리엄스는 무언가 정보를 얻었을 겁니다.그리고 아마 한동안은 페어리를 보내지 않겠죠. 완벽하게 정비가 되었을때,우리를 치러 올겁니다.”
준은 리미의 똘망똘망한 눈을 바라보았다.단순한 기습하나로 여기까지 유추해 내는 그녀의 능력.여러번 느꼈지만 정말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그럼 리미.네 말은 그 전에 우리가 치러 가자는 뜻이야?”
“저는 그저 책사일뿐입니다.모든 결정은 왕에게 달려있지요.”
리미의 말에 잠든 노아를 제외하고는 전원의 시선이 준에게로 향했다.어떤 길이던 따르겠다는 듯한 그들의 의지가 준에게도 느껴졌다.모두 제각각의 개성을 지닌 그들이지만,준은 이제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것만 같았다.
“좋아.우리쪽에서 먼저 간다.다만.”
“다만?”
유나의 되물음에,준은 옆에 있는 수아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도..정비를 갖춘후에,차우와 함께 영국으로 갈꺼야.큰 싸움을 조국에 피해를 주면서 까지 하고 싶지 않아.”
#3-심기일전
한동안 준부대의 본업(?)은 잠시 휴업에 들어갔다.무인도 때만큼 많이는 아니지만,그들에게는 수련을 겸비한 재정비의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츠츠츠츠츠..
뮤즈를 부리는 준의 중심으로 작은 회오리가 휘몰아 쳤다.그와 동시에 대기는 이질적으로 울렁이기 시작했고,그 일렁이는 경계에 있던 나뭇가지 하나가 우지끈 하고 부러져 버렸다.
김노인은 혼자 미친듯이 뮤즈를 부리는 준을 아무말없이 지켜보았다.평상시처럼 장난기 있는 표정이 아닌,심각한 얼굴이었다.
‘저녀석.결심했나보군.’
자신을 찾아온 준의 얼굴에서는 불굴의 의지마져 보였다.김노인은 그제서야 제자인 준이 윌리엄스를 직접 찾아갈 결심을 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인간의 욕심이란 어쩔수 없군.1세대 때도 그랬지만,욕심있는 한 오너가 꼭 균형을 깨려고 하지.’
그는 씁쓸했다.1세대 때에서의 오너분쟁을 잠재운것은 바로 김노인 자신이었다.허나,아이러니 하게도 2세대때는 자신의 제자가 그 역할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었다.그는 반사적으로 주변에 있는 준의 페어리들을 바라보았다.
흉흉한 세상이 되어버려 아무도 오지 않는 야산.게다가 유희가 결계를 쳐놓았으니 일반인들의 눈에 띌 염려는 없는 곳이었다.그리고 그 결계속 한구석에는,저마다 마법을 가다듬는 유나와 마유미의 모습이 보였다.유희는 아무말 없이 후배(?)들의 수련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몇번이고 연금술을 연성하는 리미의 모습과,엄청난 속도로 숲을 누비는 수아의 모습이 보였다.그리고 연신 천진난만한 눈으로 그들을 구경하는 노아의 모습까지도.
“응?”
문득 김노인은 의아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어느틈인가 세라가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었다.너무나 청순한 두 눈망울이,김노인을 향해 있었다.
‘허허.내가 이 아이가 오는 것을 느끼지 못하다니.많이 늙었군.’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세라는 살짝 그의 뒤에 있는 초희에게로 다가가 섰다.
“부탁이 있습니다.”
가면속에 있는 초희의 무심한 눈망울이 세라를 향했다.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세라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한번만 더..상대가 되어주세요.”
김노인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초희가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하다는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초희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그때의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뇨.제가 요청하는것은 대련도 아니고,그때의 패배를 되갚겠다는 자존심회복 차원의 대전신청도 아닙니다.”
“그 말은?”
“그냥...저에대해 알고 싶을뿐.”
의미심장한 세라의 말에 초희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는 슬쩍 김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초희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저쪽으로.”
세라는 굳게 결심한 표정을 하며 초희를 뒤따랐다.그녀가 세라를 이끌고 간곳은,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꽤 깊은 곳이었다.
“나 역시 대련은 사절이야.하지만,네가 필요하다면 협조해 주지.”
세라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이윽고 그녀의 손에는 마나의 일렁임이 일어나며 묵빛 소드가 소환되었다.역시나 초희의 손에도 목도가 들려있었다.
“그때 나와의 대련으로,벽의 너머가 보였나?”
세라는 초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아주 희미하지만,조금은 느낄수 있었지요.”
“그렇다면...그 벽을 넘을 무언가를 내게 보여봐.그럼 나는 그 다음의 벽을 보여줄 테니.”
초희의 말에 세라는 자세를 잡았다.그녀의 두 눈망울에 보이는 모습은,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초희의 자세였다.
“그럼 갑니다.”
그녀의 말과 동시에,세라의 검에서는 수십개의 검기다발이 쏟아지며 초희쪽으로 마치 해일처럼 밀려나갔다.주변에 있던 거추장스러운 나무들은 마치 수수깡처럼 깔끔하게 잘려나갔고,초희의 목도에서는 세라와 똑같은 크기의 검기다발이 세라의 검기와 대적하듯 뿜어져나갔다.
절정의 체술가 둘이 각자 자신의 절기를 뽐내는 모습은 마치 한폭의 그림과도 같이 아름다웠다.세라와 초희의 몸이 그리는 곡선과 월광에 반사되는 호수처럼 반짝이는 그녀들의 검기다발.세라와 초희의 몸은 공중에서 맞부딪히기도 하고,빠른 속도로 뒤로 떨어지며 검기를 날리기도 했다.
스르르릉.
그녀들의 검이 허공에서 수십번씩 교차했다.
‘느껴진다.’
세라는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환희에 아름답게 미소지었다.분명히 보이고 있었다.그간 적들하고 겨룰때,혹은 혼자서 명상을 할때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미지의 느낌과 초식들.그것들은 세라의 머릿속에 가지런히 정렬되며,부드럽게 세라의 몸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천천히 보이고 있었다.언제 어떤 방식으로 어떤 초식과 동작을 행해야 하는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레 자신의 몸이 움직여간다.
“세라..라고 했나?”
순식간에 엄청난 경합을 주고 받고는 거리를 두고 섰을때에,초희가 살짝 입을 열었다.
“너는 지금 거울과 싸우고 있어.내가 하는 것은 완벽한 너의 모습이니까.그런데 역설적이겠지만,난 너의 움직임을 카피하지 못했어.”
세라는 살짝 검을 늘어뜨리며 초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너가 보여준 것은..카피가 되지 않았어.네가..생각하지 않고 행했기 때문이야.”
초희는 품안으로 목도를 집어넣었고,세라의 검 역시 구상공간으로 스르르 빨려들어갔다.초희는 자신을 바라보는 세라에게 등을 돌린후,천천히 김노인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며,마치 혼잣말 처럼 중얼거렸다.
“체술은 학문이아니야. 머릿속에 담아 있는대로 실행하는게 아닌,움직이는 대로 흘러가는것.그런 검술을 한다면...나조차도 널 이길수 없어.”
“하아..하아..”
준은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듯 헐떡 거리며 주저 앉았다.수련이 끝나고 그들이 온 곳은 준의 아파트가 아닌,2층으로 된 통나무 집이었다.더이상 그 집에 편히 머물수 없으니 김노인이 제공해준 장소이기도 했다.
“좋은 곳이군요.유희씨가 영구결계를 쳐놓았으니..외부에선 아예 존재하지 않는 집이기도 하고.”
리미의 말에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모두들 녹초가 될 정도로 한 수련 덕분인지,항상 팔팔한 유나마져도 힘겹게 욕실을 향하고 있었다.
“주인님.”
“응?”
“내일은..수아를 데리고 나가세요.”
준은 뜬금없기 까지한 리미의 말에 저쪽에 앉아 새로 연성한 활을 당겨보는 수아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느껴지지 않으시나요?그녀는 다 자랐어요.”
“리미..”
준은 그녀의 말뜻을 이해할수 있었다.페어리로써 다 자랐다는 의미.그것은 바로 2차개화를 할수 있을 정도로 신체적인 성숙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알고 있습니다.강해지기 위해서 그런다는것...역시 웃긴 일이라는것도요.하지만,수아가 주인님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친해지는 시간이 여태까지 얼마나 되나요?”
그녀의 말이 옳았다.수아는 다른 페어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준과 함께 보낸 시간이 적었다.하필 굉장히 복잡한 시기에 태어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그때문에 수아와 준은 다른 페어리들과 준의 관계만큼의 친밀도가 없었다.
“내일은 하루종일,수아와 함께 있어주세요.그녀가 주인님을 믿고 따를수 있게.그리고 주인님역시 수아를 한명의 페어리로써 사랑하실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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