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나무 다리의 추억 (1)
1.
나는 40대 중반으로 딸과 아들 남매를 낳아 기르는 전형적인 주부이다. 남편은 무역업을 하며 생활에 아무런 불편 없이 살고 있다. 남편의 사업은 그런대로 잘되어서 지금은 직원이 100 여명 넘는 기업으로 키워 놓았고 또 인터넷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코스닥 등록을 눈앞에 두고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성공한 샐러리맨이었다.
큰 딸 지연이는 20세 한창 물오른 음악을 좋아하는 여대생으로 성악과에 재학중인데 장래에 세계적인 팝페라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큰딸은 얼굴도 예뻐 여고2학년때 일일 드라마에 남편의 친구인 모방송국 피디의 눈에 띄어 조연으로 발탁되어 출연을 한 뒤 흥행에 성공하여 후속 드라마에 주연급으로 캐스팅 되면서 많은 팬을 확보한 인기 탤런트로 급부상 중이다.
딸아이의 음악적인 재능을 아까워한 교수들은 그녀의 티브이 출연을 말렸지만 워낙 활달하고 욕심이 많은 딸은 적극적으로 교수진들을 설득하여 스타덤에 오르자 교수들도 학교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녀를 후원 하여 주었다.
아들은 그냥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대입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딸아이와는 달리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인데 항상 조용하게 자기 할일만 하는 모범생 으로 의대를 목표로 공부를 하고 있다.
친정은 P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마을에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오빠부부가 과수원 과 축산 그리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으며 4남 1녀로 나는 막내 외동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일찌감치 아들넷이나 있어 그만 날려고 했는데 어쩌다 내가 들어서서 엄마는 아버지 몰래 나를 낙태 시킬려고 약도 먹었다가 아버지한테 혼나서 어쩔수 없이 나를 낳았다.
초등학교 1학년때 이모가 우스게 소리로 한것이 나에겐 큰 충격으로 받아 들어져 엄마를 미워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등 아침에 일어나 보니 대문 밖에서 아이 울음 소리가 나 가보니 나였다는 등 온갖 좋지 않은 얘기를 어려서 부터 들어 왔던 터라 부모님에게 감정이 많았다.그러나 오빠들은 나를 무척이나 이뻐해주었다.
할아버지 때부터 농사를 짓고 있었으나 워낙 가난한 살림이라 변변치 못한 생활이 이어져 내려오는 소작농 이었으나 큰오빠가 월남에 근무하면서 살림이 조금씩 피어나 지금은 인근에서 남부럽지 않은 규모의 부농으로 자리를 잡았다.
오빠가 월남에 근무할 당시 아버지는 오빠가 송금해온 월급으로 무조건 땅에다 투자하여 몇년후 개발 붐으로 인해 엄청난 보상금을 받아 지금의 오빠가 부농을 일구는데 기반을 닦았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큰오빠의 책임감은 무서울 정도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동생들을 대학까지 보내려 애를 썼다 덕분에 나도 고등학교를 서울서 다닐 수 있게 되었고 오빠들도 대학을 졸업하고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당시만 해도 우리집은 찢어 지게 가난했다. 내 이름은 서 영미 약간 촌스러운 그런 이름이었다.
아빠 이름은 서 수달( 秀 達 ) 이었으나 발음이 영 좋지 않아 동네에서는 그냥 수달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난 언제나 수달이 딸이었다..인근 동네 에서도 수달이 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바로 우리 옆집에는 아빠가 시내 경찰서에 근무하는 나와 한 반인 김영욱 이네가 살고 있었다 영욱이 아빠는 아직 40대 초반의 경찰관 이었다. 영욱이는 위로 누나가 있었고 동생이 넷이나 되었다 그 집의 장남이었다. 동네에서 친구 라고는 영욱이 밖에 없었다. 동네 라곤 하지만 10 여가구 정도가 살고 있는 여느 시골 농촌과 다름이 없었다.
동네에서 학교 가는 길까지는 인가가 거의 없었다. 드넓은 논사이로 드문 드문 웅덩이가 있었고 개울이 흐르는 강둑을 따라 길이 있었고 개울 둑에는 커다란 미류나무가 주욱 자라고 있었다 논 두렁 사이를 지나면 밭으로 이어 지는 길이었다. 그밭에는 대개 보리를 심었다.
보리가 익어 갈때면 거의 우리 키만큼 자란 것 같았다. 드문 드문 밀 같은 것도 눈에 띄었다.보리가 우리 키 정도 자라면 길과 하늘 외에는 보이 않을 정도 였다.
동네 어른 들은 보리밭에서 문둥이가 나와 어린아이 간을 빼먹는 다고 문둥이를 조심하라고 했다 그래서 혼자 다닐때는 큰길로만 다녔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리밭에서 문둥이를 본적은 없었다.가끔 길거리나 장터에서 문둥이를 마주 칠대는 소스라치게 놀라 꽁지를빼곤 도망 다녔었다.
우리가 사는 동네엔 한쪽은 뚝으로 되어 있고 뚝방에는 커다란 오리 나무가 꽤 있었는데 해마다 물난리를 겼었다
특히 여름 장마철이면 어김없이 마당 까지 물이 들어와 항상 물난리를 겪어야 했다. 지금은 산업화로 사방에 길이 뚫리고 좋은 살기좋은 동네로 탈바꿈 했지만 그때만 해도 아스팔트도 깔리지 않는 그런 길을 다녀야만 했다.
그래서 여름이면 항상 질퍽 질퍽했고 더구나 학교는 약 15리 정도 되는 길이어서 우린 논두렁 밭두렁 사이로 걸어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학교 가는 큰길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한참을 더 돌아서 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지름길을 이용 했다 읍내 장날이면 동네 사람들 모두 그 길을 이용해 장을 보곤 했다.
그 길은 오리나무가 빽빽히 들어선 길도 있었고 또 시냇물도 흐르는 길도 있었고 논두렁을 지나면 보리밭 사이로 걸어가는 그런 길도 있는 평범한 길이었다 여름이면 미류나무에 붙은 매미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낭만적인 길이기도 했다.
시냇물에는 나무로 된 외나무 다리가 있었는데 장마철만 되면 외나무 다리가 떠내려가 우리는 할 수 없이 먼 길로 돌아 다녀야 했다.
혹시나 해서 그 길로 가다가도 외나무 다리가 끊겨 다시 큰길로 나와야만 했던 적도 여러번 있었다.
그 길은 우마차 한대가 간신이 갈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장마철에 냇물의 깊이는 우리 키로 한길도 안 됐으나 옷을 버리면서 건너기에는 물살도 거셌고 또 그럴 용기도 없었다. 남자아이들은 옷을 벗고 가방과 옷을 머리에 이고 건너기도 하였으나 여자인 나는 옷을 적셔 가면서 건널 용기는 없었다.
나혼자 라면 어떻게 건널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남자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팬티만 달랑 걸친 채 알몸으로 건너기에는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1,2 학년때는 옷을 벗고 팬티만 입은채 건넌적도 있었지만 가슴에 융기가 솟아나고 초경을 치룬 이후에는 남자 앞에 옷을 벗는 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가난 하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항상 양반의 가문이라며 행실을 단정히 하라고 가르켰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자라고는 엄마와 나뿐인 우리집에서 엄마는 나를 더욱 조신하게 가르쳤다
학교 등교를 할 때는 대략 7~8명의 아이들이 함께 장난도 치고 하면서 다녔지만 남자들에게 항상 당하는 쪽은 여자들이었다. 그래서 될수 있는대로 학교 등하교 때는 여자들 끼리만 다니는 것이 분문률이 되었다. 그러나 장난끼 많은 상급생들이 가끔 짖꿎은 장난을해와 울음을 터트리는 경우가 많았다. 치마를 올리고 팬티를 벗기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난 오빠들이 많아서 그런지 한번도 내치마를 들춘다거나 팬티를 끄집어 내리는 그런 심한 장난은 하지 않았다.
주로 누구누구와 뭐 했다는등 그대상은 주로 영욱이었다. 영욱이는 공부는 그리 잘하지 못했지만 언제나 내편을 들어 주었고 이웃에 살아서 그런지 서로 친하게 지내는 정도였다.
영욱이 엄마는 우리 엄마를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하루에도 몇번식 우리집을 드나 들었다.
먹을 것이 생기면 꼭 나누워 먹는 그런 이웃이었고 영욱이 아빠는 우리 동네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해 주는 해결사 노릇도 하였기 때문에 인기가 좋았다.
나한테는 작은 아버지가 한분 있었는데 영욱이 아버지가 미군부대에 취직 시켜 주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항상 영욱이 아버지를 고마운 사람이라고 입버릇 처럼 말씀 하시곤 했다.
영욱이 아버지는 신식이었다. 경찰복 대신 항상 양복을 입고 다니셨는데 내눈에는 우리 아버지보다 훨씬 멋있는 분이라고 느껴져 영욱이를 부러워 하곤 했다.
그당시 영욱이네집에는 텔레비죤과 전화가 있었다. 우리동네에 전화와 텔레비젼이 있는 집은 마을 입구에 있는 방앗간 집과 영욱이네 집 두집 뿐이었다. 다리네개가 달린 멋있는 텔레비젼은 양쪽으로 미닫이 같은 문이 달려 있어서 멋있게 보였다.
그당시 유행했던 여로 라는 연속극을 보기위해 동네 사람들은 영욱이네 집과 방앗간으로 모이곤 하였다. 나도 그시간에는 영욱이네 집으로 가서 맨 앞에 앉아 정신 없이 연속극을 보곤 했었다.
마을 입구 방앗간 옆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그곳은 항상 그늘이 있어 동네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방안간 집을 방앗간 집 또는 느티나무 집으로도 불렸다. 방앗간 한쪽 귀퉁이에는 가게가 있었는데 담배며 캬라멜이며 간단한 식료품과 속옷도 파는 없는 것이 없는 동네 잡화점이 있었다.
나와 영욱이는 돈만 생기면 그곳으로 달려가 군것질을 하곤 했다.
그러나 항상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돈이 모자랐다. 가게집 아저씨는 50 대 남자였는데 1년전쯤 이곳으로 흘러 들어와 서울로 이사간 가게 주인에게 가게를 인수하고 혼자 사는 남자였다.
떠도는 얘기로는 서울서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내려와 빚쟁이를 피해 숨어 산다는둥 또는 살인을 해서 지금 피신해 왔다는 둥 또는 바람을 피워서 전부인한테 쫒겨 났다는 둥 많은 얘기들이 돌아 다녔다.
나이도 50이 넘었다느니 40대 초반이라는둥 말이 많았지만 나에게는 관심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소문은 아랑곳 하지 않고 언제나 같은 표정으로 가게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가끔 물건을 하러 서울로 갈때는 몇일씩 문을 잠그고 가기도 하였다. 성은 안씨라고 했는데 정확한 이름은 몰랐다. 가게에는 부엌이 달려 있었고 그부엌을 지나면 방이 있었는데 그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호라비 살림이라 안봐도 뻔할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을이 작다보니 장사도 신통치 않았으나 그런것에는 통 신경을 안쓰는 것 같았다. 가끔 한가한 저녁때면 느티나무 아래에서 어른들이 장기나 바둑을 두면서 막걸리를 안씨 아저씨네 가게에서 시켜 먹기도 했다. 우리들은 그를 안씨 아저씨라고 불렀다.
초등학교 5학년 되던 여름에는 많은 비가 내렸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 되기전부터 내린비는 장마가 끝날때까지 그칠줄을 몰랐다 당연히 우리는 논두렁 길을 피해 먼길로 학교를 다녀야만 했다.
6월이 시작되기 전 며칠동안은 햇볕이 쟁쨍 내리쬐는 무더위가 시작 되었다.
그날도 여느때처럼 혼자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며칠전만 해도 비가와서 큰길을 돌아 다녔지만 2,3일 전부터 햇볕이 내리쬐어서 이제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무심코 논두렁 길을 택해 보리밭 사이를 걷고 있었다. 잘익은 보리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가끔 보이는 깜부기를 훑어 먹으며 걷고 있었다.
보리밭 사이길로 중간 쯤 지나왔을때 문득 어른 들한테 들었던 문둥이 생각이났다
여럿이 다닐적엔 그런 생각이 들지도 않았는데 혼자 여서 그런지 자꾸 그 생각이 났다
좌우를 둘러봐도 보리밭 뿐이어서 언제라도 문둥이가 튀어 나올것 같은 분위기였다.
문둥이는 특히 나이어린 여자 애들 간을 좋아한대...하필 이럴때 그런 말이 떠오르는지.....
오줌이라도 지릴것 같았다. 다시 돌아갈까 하다가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는 것이 앞으로 갈길보다 더 먼것 같았다. 스산한 바람소리와 함께 보리 이삭이 부딛치는 소리가 꼭 사람이 부시럭 거리는 소리처럼 들려 등골이 오싹 했다. 주위깊게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걸었다.식은 땀이 흘렀다.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르며 문둥이가 튀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문둥이를 만나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야 할것 같았다. 토끼처럼 간을 집에다 두고 왔다고 하면 믿어 줄까? 이런 저런생각을 하면서 보리밭을 거의 지났을 무렵 무엇인가 보리밭을 헤치고 이쪽으로 무엇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사사사사삭..."
나는 그자리에 오금이 저려 꼼작을 할수가 없었다. 평소에 달리기를 무척 잘해 운동회에서는 꼭 상을 받았지만 지금은 도무지 움직일수가 없었다.그러나 나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뛰었다.
보리밭만 넘어서면 문둥이도 돌아간다는 말을 들었다.
얼마나 뛰었는지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