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묵인(默認) - 하 -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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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묵인(默認) - 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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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엄마를 정신병원에 데려갈 수는 없었다.
  우울증의 원인 중 하나가 나와의 성관계에 있는 만큼 자칫하다가는 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집안 일을 내가 하는 것이었는데, 왜 그런 방법을 선택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한 것일까?
  아무튼 난 변태 놈을 만난 이후 집안 일을 무지하게 열심히 했다.
  집안 구석구석 걸레질을 하고,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화단을 가꾸고, 정원 청소하고, 도자기를 닦고, 거실 가구배치를 새로 하는 등등에서부터 엄마가 식사 준비할 때 옆에서 도와주고, 장보러 갈 때 따라가고, 길에서 파는 음식을 엄마에게 먹여주기까지 하는 등 내 딴은 내 생활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며 엄마를 위해 최대한으로 노력을 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저 그랬다.
  되려 멍하게 앉아 있는 시간만 늘어났고, 집안 일도 안 하는 바람에 힘이 넘치는 지 새벽까지 물고 늘어지는 통에 코피가 다 터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엄마는 키스만은 계속 피했다. 입으로 매일같이 내 물건은 빨아주면서 말이다. 아마도 키스가 싫은 것이 아니라 나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을 거북해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당시의 엄마는 가급적이면 나와 시선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이 역시도 확인은 되지 않는다.
  엄마 왈,
   [글쎄. 그랬나?]
  이러니 말이다.


  어째건 나의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는 그렇게 엄마에게 헌신(?)만 하다 끝났다.
  덕분에 여자친구와는 소원해지면서 온갖 협박(?)을 다 받아야만 했고, 기말고사를 치고 난 다음에는 내 중학교 때 친구랑 잤다는 메시지까지 보내왔는데 그때는 진짜 머리가 휙 도는 줄 알았었다.
  물론 오래지 않아 거짓말로 드러나긴 했지만 어째건 그런 식으로 여자친구 역시 상당히 이상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밤 11시에 술에 잔뜩 취해 우리 집으로 쳐들어 오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거실에 앉아서는
   [혁이랑 결혼시켜주세요. 저 혁이와 결혼하고 싶어요.]
  라며 엄마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급기야는 내 애를 가진 적도 있었네, 이미 자신의 가족들은 나를 사위로 여기고 있네 하며 그야말로 술주정을 아주 제대로 부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자친구의 그런 술주정을 엄마가 다 받아 주었다는 점이었다. 아주 딸을 대하는 것처럼 등까지 다독여가며 받아주는데 그 때만큼은 예전의 엄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내 여자친구에게 한 해서였을 뿐, 여자친구가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의 엄마는 금새 그 모습을 잃어버렸다.
  마치 파도에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허망하게 말이다.


  그날 밤.
  난 내 방에서 참 많이 울었다.
  서러워서가 아니라 엄마와 내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닫는 순간 그냥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멈추려 해도 터진 둑으로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계속해서 흐르는데 정말 감당이 안 되었다. 닦아도 안 되고, 눌러도 안 되고, 그래서 나중에는 닦지도 않고 그냥 눈물이 흐르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나는 엄마에게 반말을 썼다.
  어차피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면 차라리 과거를 지워버리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을 바로 말투의 변화로 보았다.
   [그 애는 언제 간 거야?]
  난 국을 떠먹으며 여자친구에 대하여 반말로 물었다. 내 말투에 엄마는 힐끗 나를 보았으나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새벽에.]
   [미안해.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을 거야.]
   [……]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어제 그 애가 한 말 중에 임신 이야기는 거짓말이야. 그 애 가족들에게 인사했다는 이야기도 그렇고.]
  그러나 엄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고, 그것을 끝으로 식사가 끝날 때까지 대화는 중단되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나는 엄마의 우울증을 의식해 식사시간 내내 재잘대는 새처럼 끝없이 이야기를 했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 난 정색을 하고 입을 떼었다.
   [부탁이 있어.]
   [말해.]
  아직 식사를 마치지 않은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국을 떠먹었다.
   [꼭 들어주어야 해.]
   [……]
   [앞으로 나에게 존댓말을 하도록 해.]
   [……!]
  엄마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여전히 엄격한 표정으로 엄마를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있건 없건, 친척이 있건 없건 무조건 해! 대신 난 너에게 무조건 반말을 할 거야. 명심해 둬. 지금부터 넌 내 엄마가 아니라 내 여자야!]
  엄마는 말이 없었다. 그저 저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난 그런 엄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응시하면서 내 의지를 보여주고자 애썼는데 너무 눈에 힘을 많이 준 탓에 눈이 따끔거리기까지 했다.
  시간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그래서 엄마가 혹시 평소처럼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괜스레 난 초조해졌다. 혼자 바보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해서 말이다.
  그러나 한 참 만에 입을 뗀 엄마는
   [좋아요.]
  라고 대답했다.
  그때 난 속으로 “해냈다!(?)”를 외쳤었는데, 지금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대체 뭘 해냈는지 모르겠다. 한 거라곤 엄마에게 일방적으로 내 생각을 요구한 것 밖에 없는데 말이다.


  어째건 그렇게 시작된 엄마와 나의 새로운 시도는 생각보다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일단 가장 큰 변화는 주변에 사람이 있을 경우 대화하기 아주 어려워 졌다는 점이다. 물론 주변사람들이 모르는 사람일 경우에는 상관 없었다. 엄마를 ‘여보’라고 부르든, 이름을 부르든 그들은 우리에게 그다지 신경도 안 썼으니까. 겨우 보이는 반응이라곤 내가 옷 가게에서 엄마를 ‘여보’라고 부르자 점원이 잠시 당황스러워한 것이 전부였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있으면 달랐다.
 ‘여보’라 부를 수도, 그렇다고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으니 그저 자연스레 시선이 마주칠 때까지 기다리거나 아님 다가가서 손으로 툭툭 건드린 다음에 대화를 해야 했다. 물론 아는 사람이 동네사람이거나 친구들 정도라면 호칭 사용에만 제한이 있을 뿐 그 외의 반말은 편하게 할 수 있었으므로 사실상 그리 큰 문젯거리라고는 할 수 없었다.
  진짜 문제는 친척들 하고 있을 때였다.
  무조건 엄마와 대화 안 하기 전법으로 나가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친척들이 보는 앞에서 대화를 해야 할 때도 있는데, 그때마다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물론 연기한다 생각하고서 예전처럼 나는 엄마에게 존댓말하고, 엄마는 나에게 반말을 하면 되었겠으나, 엄마와 나는 결코 그런 타협은 하지 않았다. 끝까지 나는 엄마에게 반말을, 엄마는 나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물론 친척들이 들을 수 없게 귓속말로 대화를 주고 받았지만 말이다. 덕분에 친척들로부터 뭐 하는 짓이냐며 꽤 눈치도 받고, 핀잔도 들어야만 했었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일단 엄마가 키스를 허용했다. 뿐만 아니라 엄마의 표정이 다시금 밝아지면서 의욕을 되찾기까지 했다. 물론 단순히 말투 변경 때문에 그런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우울증은 대개의 경우 3~6개월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자연 치유가 되니까. 하지만 난 말투의 변경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확신한다. 엄마도 시인했듯이 나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면서부터 내가 다르게 느껴졌다고 했으니 말이다. 즉 우울증을 발생시켰던 원인인 모순이 말투 변경으로 상당부분 완화 되었던 것이다.
  혹시 이해가 안 되는가?
  그럼 오이디푸스 왕을 생각해보자. 다들 알겠지만,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4명을 자녀까지 두고서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 다시 말해 출생의 비밀만 드러나지 않았다면 그들이 불행할 이유가 없었다는 말이다. 또한 설령 출생의 비밀이 드러났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비난하지 않거나, ‘우리가 모자 일리가 없어!’라며 거짓부정이라도 지속적으로 했더라면 그들의 삶이 결코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인정한다. 그대들의 주장은 옳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그대들까지 설득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어째건 그렇게 엄마와 난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나갔다.
  엄마와 아들이 아닌 독립적인 여자와 남자로 말이다. 게다가 냉수 놓고 결혼식을 치른다는 말처럼 엄마와 난 둘만의 의식도 치렀다. 케이크에 촛불 켜고 반지를 주고 받으며 말이다.
  그런데 엄마에겐 그런 의식이 생각보다 많이 중요했나 보았다.
  그것을 기점으로 거실에 걸려있던 가족사진을 떼어버리는 가 하면, 내 어린 시절과 아버지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앨범을 통째로 어디론가로 치워버렸고, 이웃사람들에게 ‘혁이 엄마’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취미로 사 모았던 그 많던 장신구들도 모조리 치워버렸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때문에 집에선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상가를 둘러보러 시골에서 올라온 할아버지가 달라진 집안 분위기에 기함을 하신 것이다. 왜냐면 엄마가 치워버린 가족사진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중심으로 백부님들 가족과 우리가족, 숙부님과 고모들 가족까지 4대 31명이 찍혀있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무척이나 아끼는 사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엄마가 치워버린 아버지의 장신구는 할머니가 직접 챙길 정도로 애착을 가지는 물건이었다.
  일단, 엄마는 가족사진의 경우 액자가 떨어지면서 사진이 찢어져 버렸다고 둘러대는 것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장신구는 그렇지 못했다. 도둑놈이 그것만 딸랑 가져갈 리도 만무하고. 그래서 끝내 죽은 남편이 생각나 버렸노라고 실토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눈물까지 흘리면서 말이다. 난 그때 처음으로 엄마의 눈물을 무조건 믿어선 안될 것 같다며 엄마에게 상당히 실망했다.
  그렇게 착한 얼굴을 하고선 그런 가식적인 울음이라니.
  확실히 여자는 아무리 착해 보여도 꼬리가 아홉 달린 구미호적인 모습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상당히 찜찜한 기분이었다. 내가 무식하게 근육만 키운 놈을 죽이려고 설쳤었던 날, 밖으로 나가려던 나를 막으면서 엄마가 흘렸던 눈물도 혹시 거짓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엄마를 멀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느 때부터인가 엄마를 사랑하게 된 난 엄마를 향해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17년을 보아온 얼굴인데도 잠시라도 떨어지면 그립고, 보고 싶고, 애가 탔다. 물론 그런 감정은 여자친구와 교제할 때에도 느낀 것이긴 했다. 하지만 강렬함에 있어서는 아주 차원이 달랐다.
  정말이지 그렇게까지 미치도록 엄마를 좋아하는 내 자신이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이했다.
  그날은 엄마와 내가 처음으로 데이트를 하는 날로 우리는 팔짱을 끼고서 아주 보란 듯이 시내를 활보했다. 그것도 우리를 큰누나와 막내 동생쯤으로 보는 점원 앞에서 ‘여보’ ‘당신’을 해가면서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데이트는 아주 즐겁고, 또 행복했다.
  하지만 무식하게 근육만 키운 놈과 마주치면서 그 날의 행복은 깨졌다.
   [아... 오...오랜만이네.]
  그러면서 놈은 여자와 낀 팔짱을 풀었다. 느낌상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려는 것 같았다. 그날 놈의 눈빛은 여전히 나에게 겁먹은 눈빛이었으니 말이다.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뭐…… 그렇지.]
   [헬스클럽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올 초에 가보니 다른 사람이 하는 것 같던데.]
  할아버지를 통해 이미 알고 있음에도 난 그렇게 물어보았는데, 내 나름대로는 기선 제압용으로 물어 본 것이다. 연 초에 놈에게 사과도 할 겸 헬스클럽을 찾아 갔었는데, 웃기게도 놈은 그런 나를 보자마자 도망을 가버렸었다. 그것도 내가 못 본 줄 알고 차 뒤로 바짝 허리를 낮춘 체 말이다.
   [아…… 일하는 사람이야. 잠시 여행 좀 다녀오느라.]
  예상대로 놈은 꽤나 당황해 했다.
   [그랬군요.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성탄절이 되십시오.]
  그리고 난 엄마와 함께 놈의 곁을 지나 앞으로 걸어갔다.
  놈이 나를 보고 도망을 간 이상 놈에게 사과할 필요성도 못 느끼는데다, 놈을 보자 엄마의 과거가 떠오르면서 주체하기 힘들만큼 질투심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놈을 보기 이전에도 엄마의 과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특히나 완벽에 가까운 엄마의 위선과 가식을 직접 목격한 탓에 내 의심은 사실상 의처증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길에서 놈까지 만났으니, 나의 질투와 불안은 점점 더 커져만 갔고 급기야는 엄마에게
   [내 아이를 낳아 줘.]
  라는 요구까지 하게 되었다.
  도무지 꺼질 줄을 모르는 질투와 불안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엄마와 나 사이에 뭔가 확실한 끈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난 그것을 ‘아이’라 보았던 것이다. 모자간 이니 혼인신고를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부부처럼 산다고 소문을 낼 수도 없었으므로 사실상 그것은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물론 엄마는 당연히 거절했다.
  하지만 난 그때부터 콘돔을 사용하지 않은 체 작정을 하고 엄마의 몸 속에 내 씨앗을 밀어 넣었다. 그것도 임신가능성이 높은 날에는 아침 저녁으로 씨앗들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엄마는 좀처럼 임신하지 않았고 시간은 무심히 흘러 고등학교 시절의 두 번째 여름방학을 맞았다.


  도대체 왜 임신이 되지 않는 걸까?
  혹시 내가 [씨 없는 수박]인 건가? 내 나이 겨우 19살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공포였다. 도서관, PC통신 등등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여기저기를 찾아보며 혹시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살펴보았으나 의심되는 거라곤 내가 무정자증이거나 희소정자증일 가능성뿐이었다.
  솔직히 밤에 잠이 오질 않았다.
  뿐만 아니라 엄마를 가질 욕망도 일어나지 않았고, 삶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공부를 해서 뭐하나 하는 생각에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학교를 갔다가 오면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있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들곤 했다.
  그러다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 주말을 이용해 이모네 가족들과 계곡으로 놀러 가게 되었다. 난 이모의 권유로 마지못해서 따라갔는데, 그곳에서 뜻밖에도 엄마가 루프라는 장치로 피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쪽에서 그렇게 아이를 원하면 아이를 가지는 것도 괜찮지 않아?]
  바위에 걸터 앉은 이모의 말이었다. 당시 난 혼자 있고 싶은 마음에 계곡 안쪽으로 올라와 큰 바위 뒤의 넓은 바위에 누워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엄마와 이모가 반대 편 쪽에 온 것이었다.
   [혁이랑 차이 나는 게 좀 그렇지만, 어차피 재혼할 때 혁이를 데리고 갈 것도 아니잖아. 언니 시댁에서 그렇게 하도록 허락도 안 할 테고.]
   [말했잖아. 그 사람과는 결혼 못한다고.]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1년이 넘게 만나고 있다면서 왜 결혼을 못한다는 거야? 혹시 그 바람둥이 놈 때문이야?]
  난 직감적으로 이모가 말하는 바람둥이가 무식하게 근육만 키운 그 놈이란 것을 알았다. 긴장했다. 내 아이 집착의 근원인 엄마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말이다.
   [말해 봐. 그런 거야?]
   [아냐. 그 남자는 이미 잊었어.]
  엄마의 대답은 쉬웠다. 강하게 부정하는 것도 아닌 너무나 당연한 것을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쉬웠다. 다행스런 맘에 난 나도 모르게 숨을 길게 내 쉬었다.
  이모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럼 뭐가 문제야? 혹시 가정 있는 남자야?]
   [그런 건 아냐.]
   [그럼 뭔데? 무슨 희귀병이라도 걸렸어?]
   [아냐. 정상적인 남자야.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그리고 그 남자도 알아. 우리가 결혼할 수 없다는 거.]
   [뭐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결혼할 수 없다는 거 아는 남자가 애를 낳자고 조른단 말이야?]
  그 말에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모의 말이 이어졌다.
   [다 그만 두고. 언니! 그냥 내 말대로 해. 여기서 올라가는 대로 병원 가서 루프부터 빼. 보아하니 언니가 만나는 남자가 꽤 문제 있는 남자 같은데, 그냥 그 남자 말대로 아이부터 가져. 언니가 무슨 처녀도 아니고 흉 될 거 없잖아. 그리고 나서 그냥 밀어붙이는 거야.]
   [……]
   [생각할 거 없어. 그냥 눈 질끈 감고 하는 거야. 그리고 아이를 가질 거라면 한시라도 빨리 가지는 게 좋잖아. 언니 나이도 벌써 35살이야. 지금 가진다고 해도 내년이나 되어야 애를 낳는데, 나이를 생각해야지.]
  그러자 엄마가 웃는 듯 말이 없었다. 난 엄마의 표정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들키면 안되었으므로 그냥 그대로 있으면서 엄마의 표정을 상상했다. 분명 엄마는 다소 서글픈 듯한 표정으로 웃었을 것이다.
  잠시 간의 침묵이 지나고 이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언니. 혹시 만나는 남자가 어린 남자야?]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모의 그 말에 난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 앉는 기분이었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는지 곧이어 이모의 말이 들려왔다.
   [어머! 맞나 보네!!]
  그리고 이모는 어머, 어머를 연발했다.
   [몇 살인데?]
   [30살?]
   [아니다. 결혼을 못할 정도니까 한 25살?]
   [뭐야 그 보다 더 어린 거야?]
   [24살?]
   [23살?]
   [설마 22살?]
  이모의 입에선 속사포처럼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기세로 보아 쉽사리 끝낼 것 같지가 않았다. 엄마는 한 참 만에 입을 뗐다.
   [17살!]
   [뭐어!!! 언니 미쳤구나 17살이면 미성년자에다가 어머! 혁이랑 동갑이잖아!]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내 눈에는 세운 무릎에 머리를 얹은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경험상 그것은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겠다는 무의식적인 엄마의 의사표시였다.
   [혹시 혁이 친구랑 그렇게 된 거 아냐?]
   [응? 말해봐. 언니. 그런 거야?]
   [뭐야 그건 아냐? 그럼 어떻게 만났는데?]
   [혹시 동네 애야?]
  이모의 입에선 여전히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으나 예상대로 엄마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이후 휴가 내내 이모는 엄마 곁에 똥파리처럼 착 달라 붙어서는 어떻게든 엄마가 만나고 있는 남자에 대하여 더 알아내려 애를 썼지만 끝내 이모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휴가는 그렇게 끝났다.
  집에 돌아 온 날 밤.
  난 엄마에게 그야말로 풀 서비스를 했다. 피임기구를 몸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은 것은 서운했지만, 어째건 그 사실이 밝혀짐으로 인해 여름방학 내내 나의 어깨를 짓눌렀던 성불구자란 단어를 멀리 날려보낼 수 있게 되었으므로 나로선 더없이 기분이 좋았다. 또한 비록 나라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이모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점도 무척이나 나를 흥분시켰다.


 


 

 

 

 


8.

 

  관계를 가질 때의 엄마는 상당히 수동적이다.
  먼저 키스를 요구하는 법도 없고, 내가 요구하기 전까지는 내 물건을 만지지도 않았으며 입으로는 더더구나 해 주지 않았다. 꼭 내가 먼저 키스해야 했고, 만져달라 해야 했고, 빨아달라 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번 요구를 하면 그 이후로는 확 돌변해서 알아서 만지고, 빨고 했으니 어떤 면에선 편했다.
  그리고 엄마는 나의 요구를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변두리 심야극장에서 관계를 요구해도 엄마는 머뭇거리면서도 결국은 응해주었고, 으슥한 공원에서 관계를 가지는 것도, 친척들이 왔을 때 안방 화장실에서 관계를 가지는 것도 엄마는 거절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내가 말도 없이 엄마의 항문에 삽입을 할 때조차도 엄마는 가만히 있었다. 물론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나의 요구는 근육질의 괴물 놈이 엄마에게 했던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지만 말이다.
  놈은 항문섹스를 아예 첫 관계 때부터 시작한데다, 아파트로 엄마를 부를 때면 발가벗기고서 목에다 개 목걸이를 채운 뒤 바닥을 기어 다니게 했으며, 생판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관계를 가지는가 하면, 자신의 친구와 함께 엄마를 유린하기도 했으며, 반대로 생판 처음 보는 여자와 즐기는 시늉까지 했어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송추계곡에서 들었던 대로 놈은 엄마에게 스와핑까지 요구했었고 말이다.
  정말이지 그 놈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놈이었다.
  도대체 엄마는 놈의 어떤 것이 좋았던 것일까? 아니 그렇게 엄마를 막 대하는 놈이 엄마와 결혼해 줄 것이라 믿고 있었던 근거는 대체 무엇일까? 아무리 사랑이 맹목적이라지만 도무지……


  어째건 성불구자 소동에서 깔끔하게 벗어난 나는 더 이상 아이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았다. 엄마가 놈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이 분명한 이상 굳이 아이를 가지는 모험을 할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엄마가 피임을 한 이상 내가 피임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나는 여전히 엄마 몸 속에 사정을 하였다. 그것도 쾌감을 배가시키기 위해서 여전히 아이를 가지자는 말을 해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섹스를 끝낼 때마다
   [이번에는 임신이 되겠지?]
  라고 번번히 그렇게 물었는데, 그 때마다 엄마는
   [아마두요.]
  라고 대답했었다. 참 여자란 엄청나게 가증스러운 종족 같았다. 뱃속에다 피임기구를 넣어 놓고서 어쩜 그렇게 선한 표정으로 본인도 진심으로 아이를 원하는 것처럼 말을 하는지 말이다. 그래서 어떨 때에는 근육질의 괴물 놈이 엄마를 꼬신 것이 아니라 엄마가 놈에게 지능적으로 꼬리를 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어째건 그렇게 우리는 다시 행복한 생활을 영위해나갔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물론 마냥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고3이 되면서 성적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아 꽤나 스트레스를 받으며 신경질을 많이 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난폭하게 엄마 몸을 탐한 탓에 엄마는 거의 1년 내내 키스마크와 멍 자국을 문신처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엄마의 희생을 바탕으로 난 대학에 합격했다. 그것도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에 말이다. 합격 소식을 들은 날은 정말 날아갈 것 같았다. 너무 좋은 나머지 엄마와 온 시내를 휘저어 다니며 기쁨을 한껏 발산했다. 하지만 그 기쁨도 고급 레스토랑에서 끝이 났다.
  엄마가 임신 소식을 알린 것이다.
  물론 엄마로선 기쁜 소식이라 여기고서 잔뜩 벼르다가 그 곳에서 한 말이었겠지만, 이미 아이에 대한 생각을 접은 지 오래인 나에게 그 말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인지 축하한다는 말 대신
   [루프 언제 뺀 거야?]
  라는 말부터 먼저 나왔다.
  그러자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듯 말이다. 그리고 왜 기뻐하지 않느냐는 듯 말이다. 하지만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엄마의 시선을 외면하면서 팔꿈치를 식탁에 올리고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 대학교를 포기하고 직장을 잡아야 하는 걸까?
  - 남편도 없는 엄마가 아이를 낳게 되면 더 이상 이 집에서 살 수 없을 텐데……
  - 아파트도 남 주고 우리가 살 집은 어떻게 구하지?
  - 아이 때문에 엄마와 내 사이를 의심하는 사람도 생기지 않을까?
  - 만약 아이의 유전자 검사를 하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하지?
  정말이지 아이를 낳자고 엄마를 조를 때에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여러 문제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며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런 내 심경을 눈치 챈 것인지, 아님 내가 기뻐해주지 않아 상처를 받아서인지 그날 엄마도 더는 말하지 않고 무거운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했다.


  그날 이후 엄마와 난 서로를 외면했다. 엄마는 엄마대로, 나는 나대로 한 지붕 두 가족처럼 서로 말도 하지 않았고, 잠자리를 같이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설을 맞이하였다.
  작년 추석에 할머니가 고생스럽더라도 앞으로는 우리들이 시골로 내려왔으면 하고 바란 탓이 우리들은 시골에 있는 할아버지 댁으로 모두 내려갔다. 참고로 그 시골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의 고향인데, 말이 고향이지 친척은커녕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이어서 사실상 할머니에게도 타지나 다름없었다. 단지 할머니의 어린 시절이 그 곳에 있을 뿐이었다. 어째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곳의 전통 기와집을 사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지은 지 50년이 넘었다는 그 집은 보기완 달리 내부는 상당히 현대화 되어 있는 집이었다. 게다가 “ㄱ”자 형의 그 집에는 새로 지었다는 별채까지 포함해 방만 7개나 되어서 친척들이 다 모였음에도 여유 있게 지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제야 우리들은 할머니가 내려오라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물론 작은 백모님은 할아버지가 쓸데없는데 돈을 쓴다며 궁시렁 대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설을 보낸 뒤 백부님들과 숙부님들은 다시금 우르르 서울로 올라갔다. 하지만 엄마와 난 그 곳에서 설 연휴를 보낸 뒤에도 계속 남아 있었다. 명분은 할머니가 감기에 걸려 이를 수발하기 위함이었으나 사실 핑계였다. 엄마도 그랬겠지만, 나 역시 엄마와 단 둘이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내 아이를 가진 이상 임신에 대하여 뭔가 말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당시의 난 그런 심적 여유가 없었다.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즉, 당시의 내 생각엔
   [축하해. 우리 낳아서 잘 기르자.]
  라고 말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난 설 연휴를 포함해 거의 일주일을 방에만 틀어박혀 생활했다. 가끔 할아버지의 바둑 상대가 되어드리긴 했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반면 엄마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하루 종일 왔다 갔다 무엇을 옮기고, 닦고, 청소하고, 다시 옮기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대문의 난간에 걸려 넘어지면서 팔에 꽤 큰 상처가 났다.
  당시 마루에 나와 있던 난 반사적으로 엄마에게 달려가 상처를 치료해주긴 했으나 따뜻한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할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조심하지 못한 엄마에게 화가 나서이기도 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자리를 비켰을 때,
   [아이는 괜찮아?]
  라고 말한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말을 할 때 할아버지는 엄마 뒤쪽에서 다가오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엄마가 [괜찮아요.]라고 나에게 존댓말로 대답했을 때에는 할아버지는 엄마의 바로 뒤에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못들은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체 우리 곁을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그 사이 엄마와 나 사이의 냉전기류는 완전히 걷혀서 예전으로 돌아갔는데, 엄마 팔에 난 상처를 치료해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물론 실질적인 원인은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직업학교에 가기로 결정함으로써 내가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것에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엄마와 난 다시 관계를 회복한 뒤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눈을 피해 우리들만의 행복을 나누었고, 밤에는 엄마 방으로 건너가 부부관계까지 가지는 대담성도 보였다.
   [최대한 알아보기는 하겠지만, 잘 안될 경우엔 월셋방이라도 얻자.]
  앞으로의 계획에 대하여 말을 한 것은 시골집에 머문 지 보름째 되는 날로 자정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밖은 보름달로 인해 이른 새벽만큼이나 밝았다. 생각 같아서는 엄마와 산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시골인 탓에 그럴 수 없었다. 그날은 소위 ‘동고사’라 불리는 당산제를 지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엄마 배 위에서 소리 안 나게 성적 쾌락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어째든 배부르기 전에 나가야 하지 않겠어?]
   [3월 말에 아파트가 빌 거에요.]
   [아파트? 그거 내년까지 계약된 거 아냐?]
  난 옆으로 몸을 세우며 엄마를 보았다. 작년 초에 내후년까지 사용하기로 재계약 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세든 사람들과 이야기가 잘 되었어요.]
   [전셋돈은 어떻게 하고? 할아버지 다 드린 거 아니었어?]
   [이미 말씀 드렸어요. 3월 전에 해 주신다고 했으니 너무 걱정 말아요.]
  엄마의 말에 난 멍한 기분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새삼 “엄마는 엄마구나” 하는 기분이 들어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다. 즉, 자기 여자를 챙기기는커녕 되려 여자에게 도움이나 받는 병신 같은 놈이라 느껴진 것이었다. 웃기겠지만 당시의 난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도움을 받으면 병신이라는 그런 생각 말이다.


  화가 난 가운데 다리를 세우자 마자 엄마의 몸 위로 다시 올라갔다.
  이미 두 번째인 데다, 내 물건을 세우면서 엄마의 그 곳을 손으로 적당히 만진 탓에 별다른 애무 행위 없이 난 그대로 삽입을 했다. 그리고 상체를 세운 체로 엄마의 어깨를 양 손으로 눌렀는데, 소위 펌프질이라 불리는 행위를 강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임신 초기라 너무 세게 하면 안돼요.]
  내 의도를 알아차린 엄마가 그렇게 말했지만, 난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허리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윽]
  하는 엄마의 신음이 절로 엄마의 입에서 터져 나왔고, 엄마는 놀란 듯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거처하는 안방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는 하나 그렇다고 아주 안 들릴 정도로 먼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 탁, 탁, 탁 -
   [윽, 윽, 윽]
  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엄마는 ‘윽윽’ 대었는데, 그건 희열의 소리가 아니라 몸이 흔들리는 충격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나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엄마가 내 거친 펌프질에 성적인 쾌락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소리는 그렇게 내었어도 엄마의 음부에선 흥건하게 물을 흘렀고, 몸은 더욱 뜨겁게 달아 올랐으니 말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내 엄마는 뜨거운 여자다. 이는 비유적으로 뜨겁다는 것이 아니라 진짜 말 그대로 뜨겁다는 말이다. 어찌나 열이 많은지 여름에는 같이 누워 자기 힘들 정도고, 겨울에는 따로 난방을 하지 않아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추위를 모를 정도였다. 물론 이는 다소 과장해서 말한 것이긴 하나 그런 과장이 그다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내 엄마는 정말로 열이 많다.
  그런 엄마가 성적으로 흥분을 하면 더욱 뜨거워 지는데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 불덩이처럼 달아 오른다.
   - 탁, 탁, 탁 -
   [흑, 흑, 흑]
  어느 사이 엄마는 단내 나는 윽윽대는 소리와 함께 단내 가득한 숨도 같이 뱉어냈다. 그것은 절정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소리로 여기에서 조금 더 흥분을 하면 엄마는 호흡이 불규칙해지면서 온 몸을 꿈틀대며 무엇이든 끌어 안고, 휘어 감으려 하는데 그것은 절정이 임박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난 엄마의 어깨를 눌렀던 손을 풀고서 허우적대는 엄마의 팔 사이로 상체를 내리면서 엄마의 다리를 받혔던 나의 다리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엄마는 내 몸을 팔과 다리로 강하게 휘감았는데, 그것은 흡사 낙지가 내 몸에 들러붙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내 엄마는 절정에 올랐다.
   [흐흑-]
숨이 멎는 소리와 함께 엄마는 내 몸을 부술 것처럼 강하게 안으며 온 몸을 부르르 떨었는데, 보통의 경우라면 난 그 진동을 참지 못하고 절정에 올랐다. 하지만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엄마가 절정의 여운까지 다 음미한 뒤까지도 내 물건은 엄마의 몸 속에서 생생했고, 그것을 엄마에게 확인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움직여 보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날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느 사이엔가 엄마는 잠 들어 있었으니 말이다.


  다음날,
아침을 먹으며 나는 할아버지에게 서울로 올라 갈 것 임을 알렸다. 마음의 준비가 끝난 이상 시골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직업학원에 들어가야 하루라도 빨리 취업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왠 일인지 할아버지는
   [대학교 등록 할 때까지는 있거라.]
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올라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별수 없이 엄마와 난 더 머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이상한 것은 그 이후에 보여준 할아버지의 행동이었다. 뜬금없이 할머니를 고모 댁에 보내더니 이후로는 방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뿐만 아니라 바둑을 두기 위해 내가 찾아가도 마다하셨고, 동네에서 사람이 찾아 와도 몸이 좋지 않다며 물리치기 일쑤였다.
  덕분에 엄마와 나에게 꽤 많은 시간이 주어지긴 했지만, 할아버지의 이상한 행동이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봐야 생각날 때마다 할아버지가 있는 안방을 보는 것이 엄마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지만 말이다.


 


 

 

 

 


9.

 

  시골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곳이었다.
50여 가구 대부분이 사돈 아니면 친척으로 얽히고 설켜 있음에도 파벌이 나누어져 있었으며 파벌간에는 서로 잘 어울리지도 않았다. 엄마와 난 그런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런 저런 이야기도 듣고 함께 산책도 하고 그랬는데, 신기하게도 마을사람들과 대화하는 엄마는 평소 내가 알고 있는 엄마가 아니었다. 어찌나 붙임성이 좋은지 마을 사람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며 금새 깊은 이야기까지 털어 놓게 만들었는데, 정신병원 의사나, 전문 카운셀러를 하면 대성할 것 같았다. 정말이지 그런 모습의 엄마는 내가 아는 엄마가 아니었다.
   [남편인교? 참 잘 생겼대이. 색시가 속 좀 썩겠구만은]
마을의 끝 집에 있는 할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그런 말을 했다. 약한 치매 끼가 있는 그 할머니는 오래된 기억은 선명하게 떠올리면서도 바로 전날의 일은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를 볼 때마다 매번 그런 소리를 한 것이었다.
물론 엄마와 나의 관계에 대하여 제대로 밝히지 않은 우리의 잘못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그 탓에 마을 사람들은 엄마와 나의 관계에 대하여 제 각각으로 알고 있었다. 어떤 이는 남매로, 다른 이는 고모와 조카로, 또 다른 이는 부부로 알았다. 우린 사람들의 그런 착각에 대하여 그냥 웃음으로 일관했고, 그들의 오해는 그렇게 풀리지 않고 굳어지면서 때론 작은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솔직히 엄마와 난 마을 사람들의 그런 오해를 즐겼다.
  어째거나 마을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엄마와 나를 모자(母子)로 보지 않았고, 많지는 않았지만 마음 사람들 몇몇은 우리를 부부로까지 보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를 부부로 보아주는 사람들-전부 다 할머니다-앞에서는 일부러 엄마의 허리를 팔로 두른 체 걸어가거나, 아님 볼에다 입맞춤 하는 제스처를 취해 보이기도 했었다.
  물론 그런 행동이 나중에 할아버지나 할머니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어차피 엄마의 임신으로 인해 앞으로 이 곳에 두 번 다시 올 일이 없었으므로 우린 상식의 범위에서 용인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단, 그 상식의 범위에서 벗어난 경우가 있다면, 바로 치매 할머니 집에서였다.
   [할머니. 제 색시는 어때요? 예쁘죠?]
   [그렇고 말고. 이렇게 고운 색시가 또 어디 있겠누.]
   [그렇죠? 제 색시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죠?]
   [아유~두말하면 잔소리지. 그래. 애는 몇이나 두었노?]
   [아직 여기 배속에 있어요.]
난 엄마의 배에다 손을 대었다. 그러자 엄마도 그 상황을 즐기는 듯 정말 새색시처럼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혔고 할머니는 좋겠다는 말을 연발하며 엄마에게 몸조심 하라는 둥, 무거운 거 들면 안 된다는 둥 두서도 없는 이야기를 마구 늘어 놓았었다. 이것이 그 마을에서 우리가 상식을 벗어나 행동한 유일한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서울로 가기로 한 날이 되었다.
  3일전에 출타했다가 어제 저녁 늦게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아침을 물린 직후 엄마와 나를 방으로 불러들였는데, 솔직히 우린 아파트 전세금을 계좌이체가 아닌 현금으로 직접 주려나 보다 하고 들어갔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입에서 흘러 나온 말은 놀라 뒤로 자빠질 정도로 충격적인 말이었다.
   [너희가 부부처럼 산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말에 난 그대로 몸이 굳었다. 변명거리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런 우리들의 반응에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아이까지 가진 마당에 탓할 생각 없다. 단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듣고 싶으니 말해보거라.]
   [죄송해요. 아버님]
충격에 빠진 내가 멍하게 있는 사이 엄마가 입을 떼었는데 놀란 기색도 없이 담담했다.
 [용서를 구하기엔 저희들 죄가 너무 크다는 것은 저희도 알고 있어요. 따라서 용서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아이는 낳을 거에요. 또한 이미 말씀 드렸듯이 아버님 집에서도 나갈 거구요. 그리고 이 사람과 부부로 살아 갈 거에요. 비록 사람들 앞에서 축복받으며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이 사람과 저만의 결혼식까지 올린 부부니까요.]
  그리고 엄마는 말을 끊었다. 아마도 할아버지의 반응을 보려는 것인 것 같았는데, 할아버지는 침묵으로 일관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엄마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이 사람의 앞길을 막으면서까지 계속 부부처럼 살 생각은 없어요. 때가 되면 물러 날 거니까 그건 걱정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태어날 아이도 제 호적에 올릴 거니까 그 점도.]
   [그리 할 것을 뭣 하러 지금까지 온 게냐. 네가 데리고 놀다 버려도 되는 술집작부도 아닌데, 겨우 그렇게 하려고 아이까지 가진 게냐?]
  아까와 달리 할아버지의 음성은 매우 엄격했고, 이번엔 엄마가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내가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할아버지. 모든 잘못은 제게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이 사람을 강제로 범한 것도 저고, 아이를 가지자고 한 것도 저입니다.]
  차마 그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듯 할아버지는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굳히더니 나를 쏘아보았는데, 할아버지의 눈매가 매섭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밀리면 안 된다고 느낀 난 할아버지의 눈을 마주 응시하며 어떻게든 강한 의지를 드러내려 애썼다.
  한참 만에야 할아버지는 인상을 풀며 입을 떼었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할 셈이냐?]
   [대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할까 합니다. 물론 기술이 없으므로 당장은 직업학교부터 다녀야 하겠지만 1년은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기술을 배울 생각인 게냐.]
   [좀 더 자세히 알아보아야 하겠지만 현재로선 자동차정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취업도 취업이지만 제가 군대에 가버리면 이 사람이 아이와 힘들어 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 기술로 취업과 군대를 동시에 해결할 생각입니다.]
  미리 생각해두었던 것이므로 내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쳤다. 또한 이 정도면 남자가 준비할 것으론 부족함이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에게 부족해 보였나 보았다.
   [그 뿐이냐?]
   [예?]
   [너희가 정상적인 부부도 아닌데 그것만으로 준비가 끝날 거라 생각하냔 말이다.]
   [……]
  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즉흥적으로 또 무엇이 필요하냐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뒤이어 엄마가 거론했던 호적문제가 떠올라 말을 삼켰다. 당시에 아이의 호적 문제에 대하여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간의 침묵이 지나고 할아버지는 문갑을 열어 종이봉투를 꺼내 우리 앞에 내려 놓았다.
   [등록금 납부 영수증과 유학에 필요한 서류들이다. 서울에 올라가는 대로 그기 써있는 유학원에 제출하거라. 나머지는 그쪽에서 알아서 할 게다.]
   [유학이라니요?]
내가 놀라 물었으나 할아버지는 내 말에는 신경도 안 쓰고 엄마를 보았다.
   [1년 정도 있다가 돌아오너라. 부족하면 더 있어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아이가 사람을 알아 보기 전에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알겠느냐?!]
   [……]
   [설명이 더 필요하느냐?]
   [아니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그만 나가보거라.]
  그리고 할아버지는 돌아 앉았고, 나는 엄마를 따라 방을 나왔다.
  도무지 뭐가 뭔지. 난 그날 처음으로 연륜의 차이를 실감했다. 도저히 내가 극복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말이다. 나는 엄마를 따라 올라갈 준비를 마친 다음 문 밖에서 할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대학교는 입학하자마자 휴학 계를 내고서 곧장 엄마와 함께 유학 길에 올랐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어학연수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해 9월 엄마는 딸을 낳았다.
  하지만 아이는 외국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조산원에서 낳았는데, 외국에서 그대로 아이를 낳을 경우 내 아이로 입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내가 외국인인 탓에 친모가 밝혀지지 않을 경우 아이를 강제로 빼앗기는데다 자칫하면 유괴범으로까지 몰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출산을 앞두고 귀국하여 지방의 한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은 뒤 내 아이로 입적을 시켰다.
  아이는 엄마를 닮아 무척이나 예뻤다.
  물론 갓 태어났을 때에는 찌그러진 찐빵 같은 게 영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어찌나 예쁘게 변하던지 내 신경은 온통 아이에게로만 향했다. 그 탓에 엄마가 질투를 하기도 했는데, 당시엔 그런 건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엄마가 짜증을 내건 말건 난 그냥 아이만 보면서 입이 헤 벌리고는 정신을 못 차렸다.
  아이의 출생에 대해서는 할아버지에게만 알렸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엄마가 아이를 낳은 지역의 아파트에서 약 1년을 생활한 뒤 이듬해 추석에 친척들에게 아이의 존재를 알렸다. 물론 내가 유학 가서 사고를 쳐 낳은 아이로 말이다. 그 탓에 난 친척들의 차가운 시선을 감내해야만 했고, 엄마는 졸지에 손주를 떠맡은 불쌍한 여인이 되어 친척들의 동정을 한 몸에 받으면서 엄마와 나의 천륜을 거스른 행위는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녹아 들었다.
  하지만 잃은 것도 만만찮았다.
  할아버지에 의해 엄마와 난 별거를 해야만 했는데, 엄마는 딸과 함께 시골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했고, 나는 서울의 그 큰 집에서 혼자 살아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1년 동안은 아예 만나지도 못하게 하는 바람에 엄마와 난 상당히 고통스런 시간을 감내해야만 했었다. 물론 이는 할아버지가 심술이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엄마와 내가 다시 모자관계로 돌아갈 수 있게끔 하기 위한 할아버지 나름의 조치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작년 말.
  엄마는 나의 딸 세령이와 함께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아내가 아닌 나의 엄마가 되어서 말이다. 물론 여전히 서로의 몸을 탐하며 살을 섞고는 있다. 하지만 엄마와 나는 더 이상 꿈 같은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으며, 이마저도 때가 되면 그만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준비일까?
  엄마는 얼마 전 길에서 우연히 만난 옛날 내 여자친구가 솔로라는 것을 알고는 집으로 저녁초대를 했고, 내일 저녁이면 그녀가 우리 집으로 온다.


 

 


- 끝 -

 

 

 

 

 

 

P.S :

근친상간이 흥미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시 고고한 여자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와 비슷한 것은 아닐까요?


내용보다는 근친상간이란 글자에 더 흥분하는 현실이

생각보다 많이 웃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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