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야설) 색몽전 21
색몽전
21
적붕유전의 서문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그 뒤로 네 가지의 절정무공의 구결이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적붕황이 기록대로 전반부는 적붕호황천의 삼종에 지존절학인 만수령대법, 천붕후, 천붕십이검의 구결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붕황이 혈검에서 찾아낸 아수혈마의 절기였다.
사살검결.
이것이 그 절기의 이름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내가 진기운용결로 검기 및 강기에 살기를 첨가하는 비법으로 설사 상대가 검기나 검강을 막아냈다고 해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살기는 상대방의 육체에 침투하여 서서히 상대방의 심맥을 파괴시키는 비결이다.
어떻게 보면 독문의 독강과 유사한 무학이라 할 수가 있다.
다만 다른 것은 이것은 독이 아닌 살기를 내력에 담는다는 것이 틀린 것이다.
그리고 이 구결을 보니 왜 아수혈마과 고금제일의 살인마라는 확실하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용비강이 이제껏 본 어떤 절기보다 악독하고 신랄한 것이었다.
(또 하나의 은원을 짊어지게 되었군.....)
용비강은 우울한 눈빛으로 적붕유전을 바라보았다.
다음으로 용비강이 본 것은 천붕십이검이었다.
용비강 역시 검을 수련한 검사이므로 변황 십대무학 중에 2위이자, 지난 500년동안 변황제일검 이름을 유지한 검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며 천붕십이검의 초식과 구결을 자세히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천붕십이검의 구결을 전부 다 본 용비강은 한 숨을 내쉬었다.
“휴우~ 적붕황의 글대로 스승님보다 한 수 위에 고수였군.”
“그런 적붕황을 이긴 아수혈마의 후예인 혈후의 경지는 도대체.....?”
“아직 천무오검중에 삼검만 완성을 내가 강호를 제대로 해쳐 나갈 수 있을까?”
적붕황의 천붕십이검을 본 용비강은 걱정이 앞섰다.
적붕황의 활동 당시인 40여년 전에 스승인 천무존은 당시 천무오검중에 현재 용비강이 완성시킨 삼검까지만 창안을 하였고 그것으로 중원제일검이 되었다.
천무삼검과 천붕십이검을 비교를 하니, 천붕십이검이 한 수 위였다.
그 후 20년 후에 창안을 한 천무사검과 동수이다.
그러므로 글에 적힌대로 당시에 적붕황을 압도한 아수혈마의 후인을 현재의 자신이 상대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과 함께 약간 겁이 나는 용비강이었다.
“휴우~ 이제 천무오검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나?”
천무오검, 천무존 독고한이 지난 20년동안 가사 상태에서 얻은 심득으로 만든 검결로 창안자인 천무존 역시 연마를 해 보지 못한 이론상의 검이었다.
천무사검이 천붕십이검과 동수이므로 혈마의 무학을 압도할 유일한 희망은 현재로서는 천무오검뿐이라 예상이다.
천하제일의 기재라 할 수 있는 용비강 역시 천무오검은 아무리 구결을 보고, 외우고 있어도 도저히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는 고난도의 상승검결이다.
그렇게 용비강은 머릿속으로 검결들을 하나 하나 떠오르며 머리를 굴렸다.
바로 그때였다.
구워어억....!
문득 용비강의 귓가에 만리천붕의 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용비강의 눈에는 만리천붕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리천붕의 눈빛에는 무엇인가 간절한 갈구를 담고 있지 않은가?
천붕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고민을 하던 용비강은 적붕왕의 글이 떠올랐다.
“혹시... 내가 빨리 만수령대법을 연마하기를 바라는 거야?”
만리천붕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생각을 말한 용비강.
용비강의 말에 만리천붕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적붕왕이나 만리천붕 모두 먼저 만수령대법을 연마기를 권하고 있었다.
용비강이 보기에는 적붕유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천붕십이검 같은데... 말이다.
만수령대법.
적붕유진의 적힌 내용으로 연마를 하면, 모든 동물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할 수 있는 대법이라 적혀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만리천붕에게 별로 필요가 없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이상했다.
적붕왕의 유언 및 만리천붕의 행동 때문에 우선은 만수령대법을 연마하기 시작한 용비강이었다.
유진에 적힌 구결대로 진기를 운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운기를 하는 도중, 진기가 머릿속 백회혈에 막혀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천붕이 크게 울음소리를 내었다.
쿠어어워!
천붕의 울음소리에 반응하여 진기가 요동을 쳤다.
동시에 몸속에서 이상한 기운이 일어나 단번에 백회혈을 관통을 하면서 만수령대법을 연성하였다.
진기를 거든 용비강은 매우 심기불편한 표정으로 만리천붕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운기조식 도중에 갑작스러운 행동은 주화입마를 올 수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천붕에게 주위를 줄 생각이었지만, 이 다음에 상황으로 자신이 주화입마에 빠진 것이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된 용비강이었다.
그 이유는....
-뭘 그렇게 고민하는 것이야!
그렇다.
만리천붕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놀랄 필요가 없다, 만수령대법 자체가 너희 인간과 나와 대화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법이니까.
-거기에 적혀져 있는 서두에 내용은 전부 엉터리야, 그 대법은 오직 나와 대화만 할 수 있다.
-백여년 전, 천기를 보았다. 당대 혈겁이 있고, 혈겁을 막기 위해 하늘에서 천괴성의 정기를 받은자를 내려보낸다는 것을 그자와 내가 인연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기다렸다, 그 자에게 금정신과가 인연이 있다는 것을 보고 금정신과가 있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망할 뱀새끼가 때문에 고생을 하다가 그대를 만나게 됐다.
용비강은 만리천붕의 말에 매우 놀라고 있었다.
이미 천기에 혈겁, 그리고 자신과 만리천붕의 만남이 예정이 되어 있다는 사실에......
“그런 모든 것이 정해지는 것 입니까!”
-아니, 혈겁은 여러 가지 가능성에 의해 일어난다. 그리고 하늘은 그에 대한 대비를 하지, 하지만 계시를 받은 사람이 실패를 할 때도 계시를 받지 않은 사람이 혈겁을 막을 수도 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운명의 흐름이 모여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그런 천기의 흐름을 본다는 것은 쉽지는 않다. 너희 인간들의 현인 정도는 겨우 혈겁과 천괴성 정도만 보지...... 나처럼 정확히 보기 위해서는 똑같이 4천년 이상을 살아야 할 것.....
-물론 나도 이제 천기를 볼 수가 없게 되었지만......
“예에? 천기를 볼 수가 없게 되었다니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시공의 맹약이라는 것이 있다. 이 세상이 탄생 할 때 만든 약속같은 것인데, 그것이 발동이 됐다.
-그래서 나 역시 더 이상 천기를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천기의 흐름에 관련된 자만이 조금이라도 흐름을 볼 수는 있지만, 나는 외부자라서 더 이상 천기를 볼 수가 없다.
-그건 그렇고.... 이것을 너에게 그것을 져야 할지 고민이구나?
“예?”
만리천붕의 말에 용비강은 의문이 일었다.
-원래는 너에게 줄 것은 이 몸의 도움, 금정신과, 그리고 천붕십이검 정도만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너의 힘이 천기를 보고 예상했던 힘보다 너무 약하다.
-그래서 할 수없이 너에게 그것을 줄 생각이다.
말과 함께 만리천붕은 양 날개를 흔들자.
강력한 바람이 일어났다.
동시에 한 쪽의 벽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동혈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저 안에는 이곳 붕검선부의 주인인 음... 너희 인간들 말로는 성수검선이라 불리었던 신선의 유산이 있다.
-이천년 전, 너희 인간들이 전설로 전해지는 봉신대전이 일어 났다. 그 후 천계를 위시한 다른 세계는 이곳 물질계의 관섭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만들어진 안배 및 맹약들이다.
-그런 힘이 내가 알기로는 일곱가지 정도가 된다.
-그 중 이곳에는 두 가지가 있지, 첫째는 성수검선이 환수의 세계에 존재인 이 몸을 이곳 물질계로 소환하여 맺은 계약인 만수령대법이다.
-그 계약으로 나는 만수령대법의 계승자들을 3000년 동안 도와주어야 한다.
-물론 그 계약기간동안 나는 물질계에 존재할 수 있지만, 그 계약이 끝나면 원래의 세상인 환수계로 돌아가야 한다.
-그 계약기간은 앞으로 약 백년 정도 남았다. 나는 한마디로 말년에 고생문이 열렸다 할 수 있다.
-그건 넘어가고, 두 번째로 저 안에 있는 성수검선의 검법이다.
-이 검법은 약 3000년 전에 성수검선이 인간에서 신선으로 넘어가기 전 인간의 육신을 벗기 위해 만들어낸 검법이다.
-등선을 하기 위해 몸안에 기운과 대자연의 기운을 소통 및 합일을 하기 위해 추었던 검무인 것이다.
-그는 제자들을 위해 이 검법을 남기고 떠났으나, 깨달음이 부족한 자들은 검법의 노예가 되어 참혹한 살인검법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후손들은 이 검법을 이곳에다 봉인을 하였다.
-그래도 후손들도 나름대로 이 검법의 약간 깨달음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 천붕십이검이다.
한마디로 저 안에는 천붕십이검의 원형인 하늘의 검이 있다.
그런 절대적인 검법을 자신에게 주겠다는 천붕의 말에 용비강은 매우 놀라면서, 또 한편으로 자신이 이 검법을 제대로 손에 넣을 수 있을지 걱정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용비강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지 천붕은 그 해결방법을 말하고 있었다.
-크크크... 현재의 허약한 상태로 천검법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천괴성의 정기와 금정신과의 조화의 힘으로 최악인 검의 노예가 아닌, 검법의 사용자 정도만 되면 성공인 것이다.
-검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앞으로 너의 평생에 과제가 될 것이다.
-자아, 어서 금정신과를 복용하고, 들어가거라.
천붕의 절대적인 말에 용비강은 할 수 없이 품안에 있던 금정신과를 꺼내 복용하고, 동혈안으로 들어갔다.
용비강이 동혈안으로 들어가자.
그 안에서 곧바로 엄청난 강풍이 일어났다.
그 바람은 용비강이 제대로 눈을 띄지 못할 정도로 강한 바람이었다.
그러나 용비강은 깨달았다. 이 바람이 천검법이라는 것을......
바람속에 있던 검의가 용비강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외부에서 들어온 기운이 자연스럽게 용비강의 몸을 움직여 각각의 동작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각각의 동작마다 새로운 기운이 몸속에서 일어나며, 용비강은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천검의 검무를 펼치면서 용비강은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검결들이 천검안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져 갔다.
용비강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렇게 검결이 천검안으로 빨려 들어가다가는 자신역시 천검안으로 흡수되어 검의 노예가 될 것이라 사실을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무결들을 떠올랐다.
하지만, 모든 무결들은 허무하게 천검에게 먹히고 말았다.
그러는 도중에 천검에 대항을 하는 무결이 아니 검결이 나타났다.
바로 천붕십이검과 천무오검의 제 오검인 천무초극심의 구결이었다.
천붕십이검은 천검을 연구하여 간신히 인간의 몸으로 흉내낼 수 있도록 만든 검법, 그리고 천무오검인 천무초극심은 천무존이 이십년간 가사의 상태에서 깨달음을 얻은 심검의 구결이었다.
천붕십이검의 구결과 천무초극심의 구결이 하나가 되어 용비강의 의식속에서 점점 하나의 날카로운 검이 되어 천검과 대결을 하였다.
그렇게 의식속에서 수십여초의 대결을 지났을 때 용비강의 자세는 점점 천검과 비슷한 자세로 변해 갔다.
의식 밖에 용비강은 모든 동작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펼치고 난 후 곧바로 혼절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용비강의 몸안에서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뿌드드득, 으드득.....
동시에 용비강의 피부는 갈라지고 뱀이 허물을 벗는 것처럼 새로운 흰 살이 나타났다.
바로, 환골탈태를 하는 것이다.
용비강은 새로운 무의 경지로 한 걸음 걸어갈 수가 있었다.
그렇게 용비강은 다시 깨어났을 때에는 며칠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깨어난 용비강의 눈에 맑은 정광이 일어나 매우 현기가 가득한 눈빛이었다.
그런 눈빛을 본 천붕은 뭔가 불만이 있는 말투로 용비강을 나무랐다.
-대자연의 정기가 모인 금정신과를 복용하고 하늘의 검을 보고 얻었는데, 겨우 이룬 경지가 화경이냐? 아무리 그래도 현경은 되어야지......
-하기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무 허약했어 이럴 줄 알았다면 그 뱀녀석의 내단도 줄 것을.....
-어떻든 전부 네 녀석의 운명이니.... 앞으로 고생해라!“
천붕의 말에도 용비강은 점잖게 웃기만 했다.
천붕의 거친 말이지만, 그 속에는 자신을 걱정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웃어, 너무 허약해 걱정인데.... 여유가 있구나.....
-적붕왕 뒤편에 있던 서고는 역대 적붕호황천의 지존들이 천붕십이검을 연마하기 위해 수집하던 수 많은 검결들이다.
-그 검결들을 보고 너의 마음속에 생긴 검을 다듬어 보아라.
-그 검이 완성이 되었을 때가 니가 현경에 경지로 들어갈 때이니......
“알겠습니다, 천붕.”
용비강은 웃으면서 천붕의 말대로 서고로 걸어갔다.
태양곡!
하북성의 소오대산의 산록에 자리한 계곡이다.
본래 그곳은 이름 없는 계곡이었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에 한 기인이 그곳에 장원을 짓고 살면서 강호무림의 명소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태양곡은 하나의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 성장은 지금부터 일갑자 전, 전대곡주인 화룡제와 당대 곡주인 태양대제시대에 최고조로 되었고 독성부, 유령궁, 천검문과 함께 무림사패라고 불리게 되었다.
거기다가 젊은 의협으로 명성을 떨치는 기린아 태양대제가 용태산이 곡주가 되면서 앞으로 십여년 후에는 사패가 아닌 무림일곡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명사들을 말하였다.
하지만 그 태양곡은 약 18년 전 어느 날 돌연 초토화되고 말았다.
그것은 불과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태양곡은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무참하게 불타고 말았다.
과연 누구의 짓인가?
당시 태양곡에는 이천여 명의 식솔과 식객들이 있었으나 그들 중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흉수들은 태양곡의 개 한 마리 남겨두지 않고 모조리 도륙해 버린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시체에 기름을 끼얹고 불까지 질러버려 누가누구인지 알아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태양대제 용태산도 그때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태양곡 식솔들의 시체들이 모두 불타버렸기에 때문에 그의 시신도 따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참사가 벌어진 후 처음 얼마 동안은 무림인들이 자주 태양곡을 방문하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곤 하였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태양곡 일대에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인적조차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1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태양곡은 온통 잡초만 무성해져 더할 수 없이 황폐한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주춧돌 하나 제대로 남지 않고 파괴된 데다가 잡초가 그 위를 뒤덮고 있어 어디에도 그 옛날 무림사패의 하나로 불리던 북화 태양곡의 위용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태양곡의 깊은 곳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무덤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높이는 십여 장에 달했으며 그 둘레가 백여 장에 이르는, 마치 제왕의 능 같이 엄청난 규모의 무덤이다.
그 무덤 앞에는 삼 장 높이의 자연석으로 세운 하나의 비석이 우뚝 서 있었다.
태양곡 천인지묘!
비석에는 누군가 금강지력으로 새긴 글이 그와 같이 적혀 있었다.
이 거대한 봉분이야말로 태양곡 이천 식솔들을 합장한 무덤이었다.
그 천인총 앞, 언제부터인가 지전을 태우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편히 잠드소서! 고인들의 복수는 소생이 기필코 하고야 말겠습니다!”
한 명의 청년이 천인총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너무 울어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청년...
그는 바로 용비강이었다.
용비강은 실로 18년 만에 고향집으로 돌아와 분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구우우! 끼룩!
용비강의 뒤쪽에는 덩치가 큰 만리천붕이 서서 동반자의 심정을 아는 듯 간간이 구슬픈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붕검선부에서 어느 천검을 습득한 용비강을 태운 만리천붕은 대괴벽을 떠나 이곳 하북성까지 날아 온 것이다.
용비강은 거의 반나절 가까이 끝없이 지전을 태웠고 그 때문에 그의 앞에는 재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는 삼천여 장의 지전을 마련해 왔다.
지전이 있어야만 저승의 문을 통과할 수 있다던가?
시간이 흘러 어느덧 황혼 무렵이 되었다. 사위는 온통 핏빛 노을로 물들고 있었다.
어느덧 용비강은 삼천여 장의 지편을 거의 다 태웠다. 그것을 다 태우는 데 거의 반나절이 걸린 것이다.
이윽고 마지막 지전이 재로 스러졌다.
(아버님도 과연 이 안에 묻혔을까?)
용비강은 비감한 눈으로 거대한 봉분을 주시했다.
그러다가 그는 두 눈에 결연의 빛을 떠올렸다.
(고인들께는 불경한 짓이나... 사인을 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용비강은 입술을 깨물며 몸을 일으켰다.
퍽! 퍽!
이어 신검 천무혼으로 봉분의 한쪽을 파기 시작했다.
구우우!
만리천붕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동반자가 무덤을 파는 모습을 주시했다.
이윽고 봉분 한쪽이 깊이 파이며 흙 속에 묻혀있던 사람의 뼈가 일부 드러났다.
뒤엉키고 포개진 채 묻혀있는 유골들 중 한 구를 용비강은 조심스럽게 드러냈다. 그 유골은 전체적으로 갸름한 것으로 보아 젊은 여인의 것인 듯했다.
용비강은 그 유골에 대고 무릎을 꿇고 합장하며 용서를 빌고는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유골을 살피던 용비강의 두 눈이 부릅떠지며 무서운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시체에서는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유골의 색깔이 기이하다는 점이었다.
보통의 뼈는 흰색을 띠기 마련이나 여인의 유골은 은은한 남색을 띠고 있지 않은가?
이검한은 급히 뼈의 일부를 뽀개보았다.
그 뼈 안쪽은 아주 새파란 색으로 물들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떤 극독에 중독된 현상이었다.
무림사패의 일파였던 태양곡은 믿어지지 않게도 단 하룻밤 사이에 누군가에 의해 멸망해 버렸다.
천하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지닌 무림사패의 하나인 태양곡을 단 하룻밤 사이에 초토화 시킬 수 있는 세력은 결코 존재치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 태양곡이 무력하게 멸망해 버린 원인이 마침내 밝혀진 것이다.
용비강은 원한과 분노로 두 눈을 이글거리며 염두를 굴렸다.
(태양곡의 식솔들께서는 이미 극독에 중독된 상태였다. 그래서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몰살당한 것이다!)
그는 터지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결코 용서치 않는다. 네놈들이 지옥 끝에 숨어 있다 해도 반드시 찾아내어 응징하고야 말겠다!)
헌데 그가 분노를 삼키며 복수의 결의를 다질 때였다.
“누군데 감히 고인들의 유해를 훼손하는 것이냐?”
돌연 용비강의 등 뒤에서 싸늘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헉!)
용비강은 움찔했다.
비록 격동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의 내공으로도 누군가 바로 지척까지 다가왔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다.
키아아악!
용비강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만리천붕이 분노의 포효성을 발하며 벼락같이 날아올랐다.
쏴아아아!
만리천붕은 그대로 왼쪽의 무너진 석축 뒤를 덮쳐갔다. 그 기세는 마치 거대한 바위덩이가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만리천붕의 발톱은 강철보다 더 단단하여 그것에 부딪치면 바위도 두부같이 으깨어지고 만다.
“감히 미물 따위가......!”
쩌어어엉!
직후 싸늘한 여인의 노갈과 함께 삼엄한 검기가 석축 뒤에서 뻗어 나왔다.
“위험하다!”
그 검기를 본 용비강은 다급한 음성으로 외쳤다.
카아아!
거의 동시에 만리천붕은 고통에 찬 신음성을 토하며 급급히 되 날아올랐다.
잘려져 흩날리는 깃털들, 언뜻 용비강은 만리천붕의 가슴이 붉은 피로 물든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자이기에 천붕에게 상처를 입혔단 말인가?)
용비강은 내심 경악했다.
만리천붕은 3000년 이상 산 영물로서 깃털과 피부가 무쇠같이 단단하여 아무리 예리한 신병이라도 만리천붕의 강철같은 깃털을 뚫고 들어가 상처를 내지는 못했다.
헌데 석축 뒤의 신비한 여인이 발휘한 검기는 놀랍게도 그 만리천붕의 가슴에 상처를 내버린 것이 아닌가?
물론 그 노을같은 검기도 만리천붕의 강철같은 깃털을 완전히 뚫고 들어가지는 못하여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카아아아!
만리천붕은 몸에 상처를 입자 흉성이 폭발한 듯 재차 사납게 울부짖으며 석축 뒤를 덮쳐가려고 했다.
“그만 둬요!”
용비강은 급히 소리쳐 만리천붕을 제지시켰다.
쿠르르르!
그러자 만리천붕은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즉시 되 날아올랐다.
“흥! 그래도 주인은 멍청하지 않군!”
그 직후 한 줄기 싸늘한 여인의 비웃음이 이검한의 귓전을 울렸다.
스읏!
이어 무너진 석축 뒤에서 하나의 인영이 훌쩍 날아올랐다.
날아오른 그 왜소한 인영의 주인은 역시 여인이었다.
이 여인은 일신에 새하얀 소복을 걸쳤는데 일견하기에도 그것이 상복임을 알 수 있었다.
상복을 걸친 이 여인은 얼굴에 두터운 면사를 쓰고 있어 나이와 용모를 알아볼 수 없다. 단지 상복에 감싸인 몸매가 제법 투실투실하게 살이 오른 것으로 보아 아주 젊은 여자는 아닌 듯했다.
한데 여인의 눈빛은 아주 기이했다.
그녀의 눈빛을 접한 용비강은 일순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여인은 마치 혼백이 죽어버린 듯 공허하고 음울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왼손에 짧은 보검을 들고 있었으며 오른손에는 종이로 만든 꽃 한 다발을 들고 있었다.
그녀 역시 문상을 온 듯했다.
“너는 누군데 감히 유체를 훼손.....!”
싸늘한 음성으로 소리를 지르던 상복여인은 말을 멈추었다.
“이, 이럴 수가...!”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용비강을 주시했다.
쿵쿵!
얼마나 놀랐는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그녀가 물러선 자리에는 뚜렷한 발자국이 나있었다.
“곡... 곡주?”
여인은 앓는 듯이 신음을 발하며 전신을 후들후들 떨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온통 경악과 불신, 분노등의 격동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곡주라고?)
용비강은 그런 여인의 태도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로구나!”
그 직후 여인은 사람을 잘못 보았음을 깨닫고는 쓰러질 듯 비칠거렸다.
그와 함께 그녀의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아아! 그 놈 일 리가 없다! 네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남아있던 시체마저 완전히 가루로 만들었는데......)
상복여인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마음속 상처가 다시 아파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아이는 곡주 아니 그 놈과 너무 닮았구나. 마치 이십 년 전의 그의 젋은시절을 보는 듯 하지 않은가?)
멍하니 용비강을 주시하던 상복여인의 몸에 돌연 부르르 경련이 스쳤다.
동시에 그녀는 어떤 예감을 떠오르며 두 눈에 물기로 젖어갔다.
(서...설마 저 아이가 옥수상아 언니의 핏줄이란 말인가?)
그녀는 믿어지지 않는 듯 의혹과 불신의 눈빛을 지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눈은 무엇 때문인지 삽시에 살기와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상복여인의 그 같은 모습을 지켜보던 용비강은 의아한 표정으로 검미를 찡그렸다.
(이상한 여자다!)
상복여인은 기뻐하다가 울다가 또 갑자기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토해내기도 한다.
용비강은 지금까지 그토록 감정의 기복이 격렬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혹시... 너 어린 놈의 성이 용씨가 아니냐?”
여인은 새파란 살기가 번져 나오는 무서운 눈으로 용비강을 노려보며 으르렁대듯 물었다.
용비강은 그녀의 살기 가득한 눈초리에 내심 긴장했다.
말투로 미루어 그녀는 용씨 가문과 무슨 원한관계가 있는 듯 하지 않는가?
용비강은 내심 경계하며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소. 내 이름은 용비강이오!”
그의 말에 여인의 눈빛이 다시 한 차례 홱 변했다.
“용비강! 네 녀석이 아직도 살아있었다니~!”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거의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언니의 성품상 아무리 증오해도 아무 잘못없는 아이를 죽게 만들지 못할 정도로 독한 성품이 아니니....!”
그녀는 마치 실성한 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비강은 기가 막혔다.
(이 여자, 정말 희로애락을 종잡을 수가 없구나!)
그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검미를 찡그렸다.
동시에 그는 여인의 신분에 대한 의혹이 구름같이 일어남을 느꼈다.
(혹시 이 여자는 아버님의 친인이 아닐까?)
그는 방금 전 여인이 자신을 보고 곡주라고 부른 것을 상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그 이후 상복여인이 내 보인 분노와 살기를 품은 모습에 용비강은 검미를 모으며 내심 긴장을 하였다.
(어쩌면 본곡에 적대적인 감점을 가진 사람일수도 있다!)
그는 내심 그렇게 추측하면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용비강은 망연한 눈빛으로 서 있는 상복여인을 향해 불쑥 말했다.
“부인은 누구요?”
“나? 내가 누구냐고?”
멍하니 용비강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은 그제야 퍼득 정신을 차렸다.
“내가 누군지 알고 싶으냐?”
그녀는 싸늘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어느덧 그녀의 두 눈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스산하고 음울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음울한 눈빛으로 용비강을 노려보며 말을 꺼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다면 나와 삼초를 겨루어보자. 네가 내 옷자락 끝이라도 건드릴 수 있다면 내 이름을 가르쳐주마!”
“삼초를 겨루자고요?”
용비강은 여인의 뜻밖의 제안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 여자, 내가 천하제일인의 제자임을 모르고 그런 제안을 하다니!)
그는 내심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겉으로 내색치 않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부인께서 얼마나 고명한 솜씨를 지녔는지 가르침을 받아보겠소!”
그는 정중하게 포권하며 말했다.
“건방진 놈!”
용비강의 그런 태도에 여인은 싸늘한 냉소를 터뜨렸다.
“어디서 한 가닥 배운 모양이다만 본녀가 보기에는 네 녀석은 햇병아리에 불과하다!”
차가운 조소와 함께 여인은 허리춤에 꽂았던 단검을 빼들었다.
쩌어엉!
그러자 범상치 않은 검기가 장내에 확 번졌다.
이 단검은 길이가 손잡이까지 다 합쳐도 한 자 반 남짓할 정도였다.
그러나 검신이 마치 가을 호수같이 새파란 빛으로 번득이고 있는 것이 일견하기에도 예사로운 보검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츠츠츠!
기이하게도 그 단검에서 번져나오는 검기는 마치 고기비늘처럼 보였다.
용비강은 여인의 손에 들린 그 예사롭지 않은 단검을 주시하며 내심 흠칫했다.
(혹시 저것은 춘추오대신검의 하나인 어장검이 아닐까?)
그는 내심 염두를 굴리며 경계했다.
“네놈도 무기를 들어라! 무릇 도검에는 눈이 없는 법,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여인은 싸늘한 눈으로 용비강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용비강은 포권을 하며 정중히 거절했다.
“어찌 여자분을 상대로 칼을 뽑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맨손으로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흥! 죽음을 자초하는군!”
그의 말에 여인은 차갑게 코웃음치며 두 눈 가득 냉혹한 살기를 번득였다.
이어 그녀는 천천히 단검을 자신의 귓전까지 끌어올려 검 끝으로 용비강을 겨누었다.
용비강은 여인의 특이한 기수식과 그 살벌한 기세에 내심 바짝 긴장했다.
“제 일초다!”
스악!
사나운 교갈과 동시에 여인이 벼락같이 일검을 찔러댔다.
(헉!)
직후 용비강은 눈을 부릅떴다. 갑자기 여인의 모습이 사라지고 천지사방이 온통 날카로운 검인으로 뒤덮이는 것이 아닌가?
여인은 한순간에 천여 번의 칼질을 해대고 있었다. 실로 듣도 보도 못한 무쌍한 검법에 용비강은 아연실색했다.
(이런 검법이 있다니...!)
절대지경의 경지에 오른 그였지만 순간적으로 여인의 검법을 피해낼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오래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우웃!”
용비강의 입에서 사나운 일갈이 터져 나왔다.
꽈르르릉!
동시에 그의 몸 앞쪽에서 벼락이 치는 듯한 가공할 굉음이 터져 나왔다.
빗발치는 장영과 함께 흰푸른 청광이 사방을 감쌌다.
무극장 제 일초 천허지허
천무존 독고한의 무극양의신공에 포함된 상승 장법을 시전한 것이다.
콰콰쾅!
굉렬한 폭음이 지축을 뒤흔들며 미친 듯한 경기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스팟! 스슷!
직후 크고 작은 두 인영이 후딱 물러섰다.
용비강은 가슴이 섬뜩해짐을 느꼈다.
(위험했다!)
냉약빙이 그를 위해 정성을 다해 지어준 검은 장포의 가슴섬 일부가 찢겨나가 있었다.
천기무영자의 만리무영비 경공과 천무존의 무극장을 쓰고도 여인의 일검을 완전히 피해내지는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놀라움은 상복여인의 놀라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이럴 수가! 나의 천수검결이 빗나가다니......!)
지금 그녀의 상복자락은 누렇게 그을려 있었으며 단정하게 빗어 올렸던 머리카락도 제멋대로 흩어져 있지 않은가?
비록 다치지는 않았지만 용비강이 내친 무극장의 기운이 살짝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그 육체적인 고통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천수검.
상복여인의 이 검은 어떤 전설적인 초고수의 검법으로 이제껏 단 한 번도 적을 제압하는데 실패한 적이 없었다.
사실 상복여인은 당금 무림의 십대고수들도 당해내지 못할 무서운 실력자였다.
헌데 오늘 뜻밖의 장소에서 그녀는 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어린 청년과 평수를 이룬 것이다.
“호호호!
상복여인은 돌연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용비강은 그녀의 웃음소리에 절로 소름이 오싹 끼쳤다.
직후 여인은 웃음을 뚝 그치며 용비강을 노려보았다.
“바득! 좋다. 제법 잔재주가 있구나. 하지만 너는 단지 본녀가 익힌 검법중에 가장 약한 천수검을 견식한 것에 불과하다.”
그녀가 이를 부득 갈며 말하자 용비강은 가슴이 섬뜩해짐을 느꼈다.
(방금의 검법이 가장 위력이 약한 것이었다고?)
그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중얼거렸다.
비로소 그는 세상은 넓고 기인은 모래알같이 많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천무존의 진전과 천검을 이은 용비강 자신과 평수를 이룰 수 있는 고수를 출도하자마자 만난 것이다.
잠시 경악에 잠겨있던 용비강은 이윽고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검을 쓰겠소! 허언한 것을 용서하시오!”
말과 함께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신검 천무혼을 천천히 뽑아들었다.
(저 검은!)
여인의 두 눈에 언뜻 경악의 빛이 스쳤다.
그녀도 그 유명한 천무존의 애병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천무혼을 확인한 그녀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분노하였다.
(그랬구나! 이 어린 놈이 바로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 이토록 강했던 것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그분과 이 아이를 인연을 맺게 하다니.....)
그녀의 눈빛은 놀라움과 함께 엄숙함으로 물들었다.
용비강이 천무존의 제자임이 밝혀진 이상 그녀로서도 감히 방심할 수 없었다.
“제 이초다!”
스악!
여인은 싸늘하게 일갈하며 어장검을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그어 내렸다.
(위험하다!)
여인의 이번의 검초는 지극히 평범한 일식이었으나 그것을 본 순간 용비강은 내심 부르짖으며 눈을 크게 떴다.
더할 수 없이 평범한 그 일식이 사실은 무서운 살기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아본 것이다.
그 일식은 느려보였으나 일단 적이 허점을 보이면 독사의 이빨처럼 실로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파고들 것이다.
용비강의 등에 일순 식은땀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그와 함께 손에 들린 천무혼이 벼락같이 앞으로 쓸려나갔다.
파아악!
그러자 검신에서 소용돌이가 일며 용비강은 순간적으로 서른 여섯번의 변화를 일으켰다.
유수천류검
천무존 독고한이 천무오검을 창안하기 전에 배우고 사용했던 비전검법으로 전설의 도문인 전진도교의 극상승 검법이다.
무당의 태극혜검, 화산의 매화검과 함께 도가의 삼대 검법이라 불리우고 있다.
유수천류검의 영역안에 들어오면 어떤 상대도 그 강대한 검의 흐름에 쓰러진다는 무쌍의 검법이다.
더욱이 용비강이 휘두르는 천무혼에는 무려 육갑자(360년) 수위의 내공이 실려 있었다.
꽈르릉!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한 우레성과 함께 무서운 잠경이 대기를 갈가리 찢어 발겼다.
“흐윽!”
“큿!”
그 속에서 여인의 고통스런 신음과 용비강의 둔중한 신음이 동시에 들려왔다.
뒤미처 안개처럼 스러지는 잠경의 소용돌이 사이로 장내의 광경이 드러났다.
용비강과 상복여인은 석상처럼 굳어진 채 대치하고 있었는데 여인의 면사가 거칠게 펄럭이고 있는 것이 아마도 용비강의 검기에 실린 막강한 내공에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듯했다.
용비강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의 뺨에는 한 줄기 피가 내비치고 있었으며 어깨와 가슴의 장포가 찢겨나간 모습이었다.
그는 서른여섯번의 변화를 일으켜서 여인의 치명적인 일검을 막아낸 것이다.
여인은 온통 경악의 시선으로 용비강을 주시하고 있었다.
(노... 놀랍구나. 저 녀석은 그분과 혈검에 육박하는 솜씨를 지니지 않았는가?)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내심 중얼거렸다.
그분, 그리고 혈검 그들이 누구기에 용비강과 대등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윽고 여인이 먼저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좋다. 이번 승부도 평수다. 본녀의 두 번째 검법인 칠절마검을 받아내고도 살아남은 것은 네놈이 처음이다!”
이어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다시 어장검을 쳐들었다.
“하지만 네놈이 과연 본녀의 세 번째 검인 혈영검을 받아내고도 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녀는 싸늘한 음성으로 말하며 천천히 검을 취했다.
용비강은 말없이 그런 여인의 모습을 주시했다.
(이번의 검식은 더더욱 흉맹할 것이다. 그녀를 이기려면 천무검을 써야만 한다!)
천무혼을 쥔 그의 손이 꿈틀거렸다.
천무검!
천하제일인 천무존 독고한의 모든 깨달음이 담은 당대의 천하제일 검법.
여인의 검법이 비록 괴이무쌍하다 해도 천무오검의 휩쓸리면 마치 수수깡처럼 으깨어져 나가고 말 것이다.
용비강은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천무오검을 써야만 하는가?)
그는 갈등에 빠졌다.
일단 천무오검을 쓰면 상복여인은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자신이 위험한 상황이라 해도 아무런 은원이 없는 여인을 죽인다는 것은 용비강으로서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오래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받아랏!”
상복여인이 사납게 외치며 어장검을 수평으로 그어냈기 때문이다.
쩌어엉!
어장검의 검신이 돌연 일 장 길이로 쭉 늘어났다.
물론 정말로 검신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어장검에서 강력한 검강이 뻗어나와 순간적으로 검신이 늘어난 듯 보였을 뿐이다.
그 검강은 여인의 전신 내공이 응결된 정화였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철벽이라 해도 흙처럼 베어버릴 수 있는 예리함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용비강의 검미가 미미하게 이지러졌다.
(빌어먹을!)
그는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며 천무혼을 마주 그어냈다.
쩌러러렁!
천무혼이 비스듬히 그어지며 검신에서 가공할 우레성이 터져 나왔다.
마치 하늘을 쪼개는 듯한 무서운 기세의 검법!
천무오검 제 일검 천무섬!
용비강은 차마 여인을 상대로 강대한 초식을 사용할 수 없어 천무오검의 일 검인 천무섬을 사용한 것이었다.
천지를 경동시킬 무시무시한 격돌이다.
피차 사력을 다한 이 일격이 격돌하게 되면 둘 중 누군가 회복불능의 타격을 받을 것이다.
용비강은 이미 그어진 여인의 검강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직후 여인도 용비강이 쪼개낸 천무섬의 기운에 큰 내상을 입을 것이다.
물론 그 경우 아무 상처없이 무사할 확률은 용비강 쪽이 더 많았다.
그는 당대의 제일의 신공인 무극양의신공을 연마한 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비강은 생각을 바꾸었다.
(그럴 수는 없다!)
그는 급히 검식에서 내공을 회수했다.
차마 그는 처음 만난 여인을 상처를 입힐 수 없었던 것이다.
헌데 용비강이 공력을 거둔 직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읏!
여인의 어장검에서 뻗쳐나온 검강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어장검은 그저 한 줄기 바람만 일으키며 용비강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용비강이 공력을 거두자, 순식간에 상복여인은 내공을 거둔 것이다.
진짜 절명한 내공운용이라 할 수가 있었다.
아니 화경의 경지에 오른 용비강도 흉내 낼 수 없는 기의 운용이다.
“......!”
“바보같은 놈!”
그녀는 어장검을 거칠게 검갑에 집어넣으며 냉갈했다.
“값싼 동정심은 네놈의 죽음과 직결될 뿐이다! 무림에서 살아남으려면 다시는 오늘 같은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라!”
그녀는 싸늘한 음성으로 말하며 빙글 돌아섰다.
비록 상복여인의 음성은 싸늘했으나 그녀의 말에는 은연중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을 용비강은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느낀 용비강은 당혹함을 금치 못했다.
“자... 잠깐만!”
그는 급히 여인을 불러 세우며 정중히 포권을 했다.
“부인의 방명을 알 수 있겠습니까?”
여인은 그의 물음에 싸늘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이름은... 잊었다. 단지 내 스스로를 부를 때는 한천선자라고 부를 뿐이다!”
“그리고 태양곡의 후예이니, 무덤의 뒤편을 잘 살펴보아라. 그곳에 태양곡의 연무관이 태양오관의 입구를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너의 가문의 절학을 취하는 것이 도리 일 것이다.”
스읏!
말을 마치자마자 여인은 질풍같이 허공으로 떠올라 멀어져 갔다.
비록 만리무영비만 못하나 신속하기 이룰 데 없는 경신술이었다.
“강호에 나가게 되면 지존회란 세력을 조심해라!”
멀리서 여인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한천선자!”
용비강은 상복여인이 사라진 곳을 주시하며 입 안으로 나직이 되뇌였다.
그는 마치 한바탕 꿈을 꾸고 난 기분이었다.
한천선자라 자칭한 신비여인...
그토록 무서운 실력자의 존재가 무림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은 실로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이해하지 못할 것은 그녀가 용비강 자신과 모종의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예감이었다.
비록 겉으로는 냉막하고 희노애락을 종잡을 수 없어 보였지만 그런 중에도 한천선자는 용비강에게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이다.
용비강은 망연히 한천선자가 사라진 곳을 주시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알 수 있겠지!)
그는 생각에서 깨어나 다시 시선을 봉분 속에서 드러난 여자의 유골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유골의 대퇴부 뼈의 한 조각을 조심조심 떼어냈다.
태양곡의 식솔들을 중독시킨 독이 무엇인지 알아내면 흉수가 누군지 알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것만이 흉수가 누구인지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증거였다.
용비강은 뼈의 조각을 취한 뒤 다시 유골을 원래 자리에 묻어 주고는 몸을 일으켜 봉분을 향해 합장하며 기원했다.
“극락왕생하십시요! 다시 돌아올 때는 흉수의 목을 잘라 와서 여러분의 제단에 바치겠습니다!”
그는 결의의 음성으로 맹세했다.
이어 그는 한천선자의 말대로 봉분의 뒤편을 걸어가 태양오관의 입구를 찾아냈다.
태양오관의 입구를 보며 다시 한번 한천선자의 정체에 의문이 일어났다.
어떻게 태양곡의 무공들이 비장된 연공관의 위치를 알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일단 이 의문 역시 다음에 만나면 알 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용비강은 태양오관으로 들어갔다.
콰르르.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태양오관의 문이 닫힌다.
용비강이 태양오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는 눈이 있었다.
바로 한천선자였다.
“아아! 곡주의 아들이 살아있었다니!”
탄식하는 한천선자의 눈빛은 분노와 회환, 그리고 기쁨등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빛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용태산! 네놈이 시작한 혈난을 네 아들이 정리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지옥에서 네 아들이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아라!)
(아아.... 그분 복수는 당연하지만, 많은 죄없는 사람들이 피를 흘리면 새로운 은원이 생겨 끝없는 혈란이 만들어 질것이다.)
(부디 네가 그 혈란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하늘이 나 설하연에게 속죄의 기회를 준 것일까?”
그녀는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상념에 휩싸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