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香氣) - 프롤로그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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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나의 학교 일과는 단순하다. 8시에 등교. 9시에 수업 시작.
공부하고, 쉬고, 공부하고 ,쉬고 또 공부하다 쉬고, 그러다 점심먹고 다시 공부하고 쉬고 공부하고 쉬고 그리고 종례. 수업의 내용만 바뀔 뿐 단순 반복의 시간이었다. 태옆을 감아 놓은 인형처럼 같은 것만을 반복하는 일과. 그게 나의 학교생활이었다. 가끔가다 재밌는 일이 터지긴 하지만 그건 그저 구경거리 일뿐 언제나 내일이 아니라 딴사람의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참 재미없는 일상일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재미는 없다.
뭐 그렇다고 학교가 싫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나는 학교생활에 아주 만족한다.
청소 할 일이 있나, 빨래 해야 할 일이 있나, 가계부를 써야 하길하나...
가만히 있으면 밥 나와, 책보고 싶으면 책 봐, 자고 싶으면 자, 놀고 싶으면 놀 수도 있다.
집에서는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학교였다.
학교는 나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쉼터였다. 그런 쉼터를 내가 왜 싫어 하겠는가!!
오히려 수업이 너무 짧아서 불만이면 불만이지..
땡땡땡...
수업의 마지막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아직 종례시간이 남았지만 몇몇 아이들은 벌써부터 가방을 싸며 분주하게 움직여댔다. 마치 모든게 끝난듯 좋다며 환호성을 지르는 아이들.,
이리저리 교실을 뛰어 다니며 장난을 치는 아이들. 종례만을 앞둔 교실의 풍경은 어디나 그렇듯 시끄럽기 그지 없었다.
<야!! 선생님 오신다!!>
교실 문을 박차며 뛰어 들어온 아이가 숨어갈 듯한 얼굴로 헐떡이며 말했다.
조그만 체구의 아이의 얼굴은 비보라도 가져온 통신병처럼 비장하기까지해 웬지 모르게 우스워 보이기 까지 했다. 하여간 어느 교실가나 저런 놈들 꼭 있다.
얼마 안가 그 애의 말대로 한 여자가 교실로 들어왔다.
교실로 들어온 그녀는 천천히 교탁 앞에 섰다.
하얀 민소매블라우스에 밝은 브라운 계통의 스커트를 입은 여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화사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고운 얼굴선은 꽤 조화를 이뤄 저런 게 미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누구냐고?? 우리 담임이다.
<자~ 요새 날씨가 많이 덥죠, 오늘 하루 종일 공부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수고 했어요..>
역시 언제나 그랬듯 변함 없는 레파토리로 시작하는 종례시간.
더울땐 날씨가 덥죠, 추울땐 날씨가 춥죠, 좋을 땐 날씨가 좋죠.
기상청에서 근무하나?? 날씨 얘기만 하게...뭐 별로 상관은 없지만.
<자..그럼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고 이상 마치겠어요>
<차렷!! 선생님께 경..!1>
<아..잠깐..잠깐만요..>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반장의 말을 막자 여기저기서 어우~하는 서운함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종례시간을 질질 끄는것만큼 짜증 나는건 없으니까..
선생 역시 미안 했던지 이쁜 얼굴에 어색한 웃음을 가득 지은채 귀엽게 웃었다.
<저기 강혁이하고 은비는 이따가 상담실로 좀 와줘요~ 그럼 이상.. 아! 인사는 생략할께요^^>
드디어 모든 수업이 완전히 끝나자 너도 나도 교실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뭐가 그리 급한지 가다가 넘어지는 놈들도 더러 보인다. 저렇게 있기 싫은걸 어떻게 참았을까..보충수업이라도 한다고 하면 학교 때려칠지도 모를 놈들이야..진짜..
<야!! 한강혁!! 무슨 일이야 왜 우리 어리버리 최가 널 보자고 하는 거야??>
<나만 보자고 했냐?? 딴애도 같이 보자고 했지...>
<그래두 상담실에선 혼자 볼거 아냐!!>
갑자기 내 앞에 다가와 마치 애인이라도 뺏긴 놈처럼 날뛰고 있는 이 자식. 짧고 단정하게 자른 스포츠 머리가 꽤나 남자다운 느낌을 주고 있는 이 놈은 내 지루한 학교생활에 사귄 몇 안되는 친구중 하나이다. 이름은 유경호.
<야..진정하고...너는 상담실에서 뭐하겠냐??>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너랑 우리 마누라랑 같이 있는 다는데 남편인 내가 가만히 있게 생겼어!!>
지랄..가관이다..아까는 담임을 어리버리 최라고 맘대로 부르더니 이번엔 지 마누라라네..
참 이 자식은 다른 건 다 좋은데 꼭 담임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변해.. 그렇다. 이 자식은 담임을 좋아한다. 아니 자기 입으로는 열렬히 사랑하고 있단다.. 목숨도 바칠수 있을 만큼..
뭐.. 학교 다닐때 선생님 한번 안 좋아해본 사람이 어딨겠냐마는 이 자식은 좀 중증이다.
아니 많이 심각하다. 머릿속에서는 담임과 벌써 결혼한 상태까지 간걸보니...저번엔 아직 연얘 초기 단계였는데..
<야!! 유경호!!>
<응.말해.>
<너 저번주에 상담 했지??>
<응?? 어. 했지 아주 행복한 시간이었지..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미래를 얘기하고 토론하고 아주 의미있고 뜻깊은 시간이었어. 근데 그건 왜??>
아직도 모르겠다는 듯 멀뚱 멀뚱 쳐다보는 친구 놈의 얼굴에 스크류 펀치를 먹이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은 나는 차근 차근 말을 뱉었다.
<저번주에 나 상담 못했잖아... 집안일 때문에..>
<아..그럼 상담이야??>
이제 알았냐 이자식아!!
<그래두 둘이 같이 있잖아..>
많이 수그러 들긴 했지만 아직 불만이라는 듯 퉁퉁 거리는 이놈.
더 이상 이런 무의미한 대화를 하고 싶지는 않아..
어쩔수 없다.. 마지막 수단이다.
<아무일 없어..설마 니..마.누.라를 건들기야 하겠니...^^>
<그지!!역시 넌 내 친구다.. 그럼 그래야지!!하하하!!>
마누라란 말이 듣기 좋았던 듯 큰소리로 호탕하게 웃는 경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불쌍한 놈.. 어쩌다가 저리 됐을까... 옛날엔 안 저랬는데.. 남자답고 시원시원 했는데.. 누굴 좋아하면 저렇게 되어버리는 건가?? 아무것도 안보이고 오직 한사람만 보이게 되는 걸까?? 그게 서로하는 사랑이든 혼자하는 외사랑이든..
여전히 호탕하게 웃고 있는 경호를 애써 외면한 채 주위를 둘러 보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빠져나가고 비어버린 교실 안에는 몇몇의 아이들만 남아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 역시 거의 끝나가는지 교실 청소의 마무리 투수인 대걸레를 들고 여기저기 다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순간 내 시야에 한 아이가 들어왔다.
책상에 기대 앉아 친구들과 도란도란 수다를 떨고 있는 아이. 아이의 주변에는 그녀의 친구들로 보이는 몇몇 애들도 있었지만 내 눈에는 오직 그 애만 들어 왔다.
어깨까지 오는 생머리를 핀으로 묶어 옆으로 넘긴 그 애는 단정한 옷 차림재로 깔끔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교복 치마 밑으로는 가늘고 이쁘게 뻗은 다리가 한껏 소녀의 싱싱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웬지 모르지만 심장이 뛴다. 저 앨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몸이 떨려온다. 아...미쳤나봐.. 순간 그녀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윽..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어떻게 봤을까?? 봤을꺼야..이상하게 생각하겠지..아..왜 고개를 돌렸을까..그냥 능청스럽게 딴데 보는 건데..
아니면 좀 천천히 라도 돌리던가 홱 돌려가지고... 비웃을 거야..바보 같다고 생각할꺼야..
한가지 행동에 수십가지 후회가 밀려 들어왔다. 바보 같아...정말...
<저기...>
이런 저런 자책 중에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보왔다.
언제 왔는지 내 눈앞에는 아까 바라보던 그녀가 서 있었다.
옆에 있던 경호 자식은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두근!! 두근!! 두근!!
다시 또 시작하는 심장. 이 망할 놈의 심장. 바로 눈앞에 있어서 그런지 아까보다 더 뛰는 것 같다. 아니 뛰는 것도 모자라 폭발할 것 같다. 다행이 눈앞의 그녀는 내 이런 상태를 모르는 것 같다. 그저 당황하는 내가 이상한지 쳐다만 볼뿐이었다.
<너 담임이 왜 우리 부르는 건지 알아??>
<상담>
뭐야 이자식아!! 좀더 부드럽게 말해야지!! 그리고 고개는 왜 돌려!!
<아...그리고 보니까 저번에 못했구나..까먹구 있었네^^>
이제야 생각 낫다는 듯 머리를 콩 치며 귀엽게 웃는 그녀. 고개를 돌리고 있어 보이는 건 아니지만 느낄수 있다. 그녀가 웃고 있다는 걸.. 그리고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청소가 완전히 끝났는지 교실은 조용하기 이를 데 없다.
<언제 가는거야??>
어색한 분위기가 좀 이상했던지 다시 말을 걸어오는 그녀.
좋아!! 이번엔 점 더 상냥하게..
<몰라.>
으악~~~이게 상냥한거냐!!
미친놈,병신,바보,멍충이!! 이제 완전히 날 싫어 할 거야.
어떻게 말 한마디를 제대로 못하냐!!
<그..그래??>
그녀도 이번엔 좀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다. 하긴 생각해서 말을 걸었는데 이따위로 대답했으니..천천히 그녀가 내 곁을 떠나는게 느껴진다. 한걸음 한걸음 멀어져만 가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보고 싶지만 입은 떨어지지 않고 고개는 들리지 않는다.
아..한심하다..차라리 내가 경호 자식 같았으면...그 자식이라면 나처럼 바보 같인 안했을텐데..
부스럭 부스럭 책가방을 메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나 역시 주섬주섬 책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드르륵...탁..
교실 문 닫히는 소리가 내 귀에 천둥 소리처럼 크게 들려왔다.
갔다..가버렸다.. 휴... 모처럼 말을 걸어 줬는데..그 기회를 이렇게 차버리다니...
그것두 아주 뻥 하고 말야.. ㅠㅠ
나는 어깨를 축 늘어 뜨린채 흐느적흐느적 상담실로 걸어갔다.
상담실 앞에선 나는 문에 걸려있는 푯말에 잠깐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상담중)
먼저 들어 간 건가?? 하긴 아까 나갔으니까..
쾅!!
갑자기 들려오는 충격음. 동시에 나는 이마를 엄습하는 통증에 머리를 쥐어 싸며 신음했다.
<어머!! 뭐야?? 부딪힌거야?? >
그랬다. 상담실 문 앞에 서있던 중에 갑자기 열려버린 문짝에 내 머리가 부딪혀 버린것이었다. 상담실 문을 열고 나온 그녀는 머리를 쥐어 싸고 쭈그려 있는 나를 보며 놀란 듯 나에게 다가왔다.
<괜찮니?? 미안..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많이 아퍼??>
<아냐..괜챃아..신경 쓰지마..>
나는 애써 태연한척 남자답게 몸을 일으켰다. 이마가 욱씬 욱씬 거리는게 깨질 듯이 아팠지만 꾹 참았다. 이런 걸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진짜 괜찮아?? 엄청 세게 부딪힌 것 같은데..>
<괜찮아..이정도 가지고 뭘...하하>
<그래도...어머..어떻게..너 이마에 혹났어>
<괜찮아..괜찮....뭐!!혹??>
나는 황급히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문지르는 손길에 느껴지는 불룩 튀어 나온 살덩어리..
명백한 혹 이었다.
<아..진짜네..제대로 났어..아...>
나는 옆에 그녀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톡 올라와 버린 혹을 만지작 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훗..후후...>
뭐가 좋은 걸까?? 이마를 만지작 거리는 나를 보며 실실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나는 어이 없이 바라보았다. 웃을 때 마다 고운 양쪽 볼에 새겨지는 보조개가 귀여운 아기 같은 느낌을 주어 보기 좋긴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의 나로서는 그녀의 귀여운 웃음을 좋게만 받아 드릴수는 없었다.
<아...미안 미안..정말 미안....그냥..훗...>
내 시선을 의식 했는지 그제서야 웃음을 참으며 사과를 하는 그녀. 하지만 한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는 없었는지 연실 킥킥 대고 있다.
아.. 쪽팔려.. 뭐라고 할수도 없고.. 이도 저도 할 수 없어 난처한 상황 중에 때마침 상담실의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저기..강혁이 왔니?? 어.. 왔구나..들어와^^>
<네.>
나는 아직도 웃음을 멈추지 못해 킥킥 대는 그녀를 뒤로 하고 얼른 상담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우.. 짜증나... 오늘 일진 진짜 사납네...
문밖에서는 두 여인이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찬찬히 상담실을 둘러 보았다. 중앙에 놓여져 있는 접대용 식탁과 그 양옆으로 배치되어 있는 쇼파. 그리고 구석에 덩그라니 놓여진 냉장고. 그 이외는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실내. 사실 이 상담실이 라는 것이 말이 좋아 상담실이지 대부분은 교사들의 휴게실 정도로만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었기에 그리 대단한 것은 없었다.
<여기 앉어~ 그리고..차라도 한잔 마실래??>
<아뇨,괜찮아요^^>
언제 들어 왔는지 내 앞에서 차를 권하는 선생님의 말을 가볍게 사양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선생님 역시 내 맞은편에 앉아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우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름 이강주. 나이 26세. 한국의 명문 한국교대를 졸업한 엘리트 여성.
별자리는 처녀자리. 혈액형은 O형. 2남 1녀 중 막내. 현재는 집에서 독립해 혼자 살고 있음. 성격은 막내라 그런지 덤벙대는 경향이 있고 잔 실수가 많지만 활달하고 배려 깊어 주위사람들을 편하게 해줌. 현재 동광 고등학교 2학년 3반 담임을 맡고 있고 있음.
중요사항 - 현재 애인 없음.
내 머릿속에서 그녀에 대한 정보가 촤르륵 넘어 갔다.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냐고?? 다 정보통이 있지. 뭐 그건 중요 한게 아니구..
진짜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니 확실히 미인이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세미 롱의 갈색 머리는 갸름한 얼굴형에 잘 어울려 세련된 느낌이었고, 언뜻 언뜻 보이는 가는 목덜미의 하얀 속살도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떨리게 만드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확실히 경호 그 자식이 미쳐서 빠져들만 했다.
<그래~ 학교생활은 재미있니?? 뭐 힘든건 없구??>
<네.. 별로 힘든 건 없어요.>
평범하게 시작한 상담은 아무 무리 없이 부드럽게 진행 되어갔다.
힘든건 없냐, 고민은 없냐, 공부는 잘 되가냐, 앞으로 하고 싶은게 뭐냐.
늘 듣던 특별할 것 없는 질문들. 그렇게 상담은 순조롭게 끝나는 듯 했다.
<그리고..아! 애들 말 들어 보니까 니가 그렇게 요리를 잘한다며??>
<아뇨..그냥 사람 먹을 만한거 몇 개 만들 수 있는 정도죠..^^>
<아냐.. 소문이 자자 하던데!!>
나는 선생님의 칭찬에 가볍게 겸손을 떨듯 웃었다.
여기까지 소문이 난건가?? 내 요리 실력이.. 하긴 내가 좀 한 요리 하긴 하지.. ㅋㅋ
<언제 그렇게 요리를 배운거니?? 선생님은 요리만 하면 개밥으로 줘서 요리 잘하는 사람 보면 신기하더라..>
<그냥 어쩌다가 배우게 됐어요.^^>
<어머님이 좋아 하시겠다. 아들이 요리를 잘해서.. 가끔씩 니가 요리도 해드릴꺼 아냐.>
<어머니는 못 드시죠 돌아가셨으니까.>
너무 태연하게 말했던 내가 이상했던 걸까?? 한순간 선생님은 놀란 얼굴로 한동안 나를 바라 보았다.
모르고 계셨나??
<돌아....가셨다구..?>
<네. 4년 전에 교통사고로 두 분 다 돌아 가셨어요.>
<그렇구나.. 미안..>
<아뇨, 괜찮아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침묵. 나의 아픈 곳을 건들었다는 미안함 때문일까??
아님 선생으로서 좀더 신중하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일까.
한동안 선생님은 말을 잇지 않았다.
뭐 처음 보는 반응은 아니었다. 나에게 부모님의 일을 물어보고 얘기를 들으면 누구나가 다 저런 표정을 지었으니까.. 그래도 좀 씁씁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수 없다. 부모님의 얘기를 들춰서가 아니라 날 바라보는 저 눈빛이 날 아프게 만든다.
어떻게 너무 불쌍해... 어린 것이 어떡하나..
두 눈 가득 동정의 눈빛을 머금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
그리고 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처해 하는 모습
물론 이해는 한다. 불쌍하겠지 어린 나이에 부모도 없이 자란 내가.
하지만 저런 시츄에이션은 이쪽에서 사양한다.
부모가 없다는 건 장애가 아니다. 그분들은 남들보다 조금 일찍 가신 것 뿐이고
난 그분들을 조금 먼저 일찍 보낸 것 뿐이다.
추억은 언제나 내 머릿 속에 있고 부모님은 언제나 내 맘 속에 살아있다.
그게 다 이다. 난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이 내 힘으로 누나와 함께 잘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살 것이다. 그거면 된거 아닌가??
쓸데없는 동정은 하는 입장에선 부담 없는 선의이겠지만 받는 입장에선 악의이다.
그리고 저런 표정 역시 나에겐 악의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뭐 담임 입장에선 어쩔수 없는 거겠지만..
<저...이제 끝난 건가요??>
<어?? 어.. 그런 것 같아.. 미안.. 내가 너무 오래 끌었지??>
<아뇨^^>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담임을 보며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안녕히 계세요^^>
<그래..조심해서 들어가고..내일보자^^>
드르륵..쾅
<하아...>
집에나 가야겠다. 상담실 문을 닫은 나는 긴 한숨을 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걸음 한걸음이 무겁게 느껴진다. 갑자기 우울한 하루다..
쏴아~~~~
이런... 비오네... 언제부터였는지 잔뜩 흐려진 하늘에서는 굵은 빗줄기가 시원하게 내리고 있었다. 비온다는 소리 안했는데.. 기상청은 뭐한거야.. 맨날 틀려.. 진짜 일기예보는 믿을게 못된다.
<진짜 일기예보는 한번도 맞는 적이 없다..그지?>
<내말이...어??!!>
갑자기 들려오는 미성에 고개를 돌린 나는 입이 벌어진지도 모른 채 놀라고 말았다. 그녀다.. 분명 그녀다.. 근데 아까 분명 먼저 갔을 텐데...혹시...날 기다린건가?? 터무니 없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뒤엉켰다.
<너..먼저 간 거 아니었어??>
<어...그게...갈라고 했는데 갑자기 비가 와서..그냥 지나가는 빈 줄 알고 잠깐 기다리면 되겠지 하고 있는데 영 그칠 기미가 안보이네..>
벽에 기대어 잔뜩 흐려진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 그녀의 맑은 눈길엔 시원하게 비를 쏟아내고 있는 하늘이 미운 듯 원망의 빛이 담겨있었다. 그래.. 그럼 그렇지..으이구..니가 경호냐!! 혼자 망상을 하고 있게!!
<저기...혹시...너 우산 있니??>
<엉?? 우산?? 있긴 있는데... 아!! 너 이 거 쓸래??>
내가 세상에서 때려 죽어도 안 믿는 말이 딱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상 캐스터가 보도해주는 날씨 얘기이고 또 나머지 하나는 우리 누나가 매일 내뱉는 일등 신부감이 될거야!! 라는 말이다. 난 진짜 이 두 가지 말은 콩으로 메주를 쓴데도 그메주로 된장을 만든 데도 안 믿을거다.
그런 연유로 항상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준비성을 보이는 나였기에 나는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자신 있게 그녀에게 내밀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한건 했다!!
<와!! 진짜?? 잘됐다!! 근데..이거 나 주면 너 어떡할라고??>
<나야 뭐..여기서 잠깐 기달리지 지나가는 비 같기도 하고 좀 있으면 그칠 것 같아.>
쏴아아~~
내 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더욱더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내리는 비. 어찌나 세차게 내리는지
빗물 부딪히는 소리가 우레 소리 처럼 크게 들려왔다.
<아닌....것 같은데..??>
<그..그런가?? 아냐..금방 그칠거야..하하하>
무안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 겸연쩍게 웃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진짜 난 어쩌나..누나한테 전화할까?? 아냐..그 인간은 절대 나올 인간이 아냐..바쁘다고 하면서 그냥 비 맞고 가라고 할 인간이야.. 그럼 애들한테 전화 할까?? 아니지..그 자식들도 어디 피씨 방에서 놀고 있느라 전화도 안받을 텐데.. 아이구..어쩌냐... 천상 비를 맞고 달려야 하나??
이런 저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의 팔뚝에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천천히 내 머리위로 씌워지는 검은 색 우산..
나는 놀란 토끼 눈으로 내 옆으로 바짝 다가온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이러구 갈건데..너는 어떡할래??>
내 머리 위로 우산을 씌운 그녀는 나를 보며 장난기 섞인 말투로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이 내 눈에 마치 세상에 둘도 없는 보석처럼 빛나 보였다.
<음..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도 않구.. 그렇다고 니껄 나 혼자 쓰고 갈수도 없잖아.. 내 선량한 양심 상..>
내가 한동안 말이 없자 무안했는지 눈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며 얘기하는 그녀..
애꿎은 바닥을 차며 투덜 거리는 모습이 마치 뿔난 개구쟁이처럼 보여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날 뻔했다.
<정 싫으면 그냥 니가 쓰고가..내가 그냥 비 맞고 갈테니까.. 내 옷 적시기 싫다고 남에 옷적시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냐!! 그냥 같이 쓰고 가자..>
<그래?? 그럴까??>
나의 승낙이 반가웠던 걸까?? 그녀는 얼굴 가득 함박 웃음을 띄우며 나를 바라 보았다. 혹시 얘도 날 좋아하나??
<하하...다행이다..걱정했잖아...혹시나 니가 진짜루 그래 나 혼자 쓰고 가지..뭐.. 할까봐..^^>
내 흉내를 내는 듯 목소리를 깔며 어색한 몸짓으로 말하는 그녀. 그럼 그렇지...근데 얘는 날 어떤 놈으로 아는 거야?? 내가 그렇게 치사한 놈으로 비쳐졌나?? 이미지 관리 좀 해야겠는데..
우리는 천천히 빗속으로 들어갔다. 빗줄기는 여전히 거셌다. 많이 가늘어 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많은 양의 비가 우산으로 위로 떨어지고 있었고 우산이 그리 큰 것이 아니어서 우리는 잔뜩 몸을 움츠린 채 조심조심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은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녀도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천천히 천천히 빗속을 걸어갔다. 뭔가 말을 꺼내야 할까?? 오늘은 뭐 했니?? 재미있었니??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니?? 상담은 어땠니?? 선생님이 뭘 물어 봤니?? 집에 가서는 뭘할꺼니??
의미없는 수많은 질문들이 내 머리 속에서 떠오르며 뒤얽혔다. 하지만 역시 입에서만 맴돌뿐 나는 입을 열지 못 한 채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갔다. 바보.. 말 한마디 붙일 용기도 없다..나란 바보는..
<저기.. 괜찮으면 이쪽으로 좀 붙어..>
<응... 왜??>
정적을 깨고 울리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
<아니..니 어깨....옷에 비 맞잖아...>
<아...이거..>
그녀의 말대로 언제 맞았는지 우산 밖으로 삐져 나와 있던 내 왼쪽 어깨는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작은 일인용 우산을 두 사람이 같이 쓰고 있으니.. 거기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주먹 두개가 들어 갈 만큼의 큰 간격까지 있었기에 내 몸의 반은 우산의 보호를 벗어나 고스란히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괜찮기는.. 어머.. 벌써 다 젖었네.. 안되겠다.>
정말 안되겠다 싶었는지 뭔가 결심한 듯 한 그녀는 한 발자국 내 옆으로 다가왔다.
말이 좋아 한 발자국이지 좁은 우산속의 그 한발자국에 우리의 몸은 완전히 밀착되어 갔다.
<됐다. 이제 안 맞지?? 좀 불편하긴해도 이게 낳겠다...히히^^>
이제야 제대로 됐다는 듯 만족의 미소를 짓는 그녀. 하지만 난 그녀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수 없었다.
흐흡...
내 팔에 닿은 그녀의 부드러운 살갗이 날 숨막히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느껴져오는 그녀의 체온이 날 들뜨게 했고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오는 그녀의 향기가 내 코끝을 간지럽힌다. 그리고 간간히 들려오는 그녀의 고른 숨소리가 내 귓가에 맴돌아 내 심장을 두들긴다.
아무것도 생각 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어느새 사방에서 울리던 지겨운 빗소리도 어느새 멈춰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 우산 속의 공간과 단절된 느낌이었다. 내가 지금 느낄 수 있는 건 이 우산속의 그녀 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4달이라는 짧지만은 않은 시간을 같은 교실 안에서 보냈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본건 처음이다.
잡티 하나 없는 뽀얀 얼굴에 크고 동그랗게 뜬 눈에 붙어있는 가는 속눈썹은 아직 완전히 여물지 못한 여성스러움을 내뿜고 있다. 바람에 실려온 비에 맞았는지 하얗고 가는 목에는 송글송글 물방울이 맺혀 웬지 모를 청순함을 풍긴다.
두근 두근.
왜 안그러나 했다. 이젠 아주 자동이구나. 근데 이번엔 강도도 아주 쎄다. 혹시나 그녀에게 들리는 건 아닐까 걱정 일 될 정도로 이 망할 놈은 세차게 요동질 쳤다.
<저기...괜찮아??>
<뭐...뭐가??>
설마 들킨 건가?? 하긴 소리가 좀 컸어야지. 아이씨. 뭐라고 변명하지..
<아니...아까....그 머리...부딪힌거 말야..>
<아...그..그거?>
아이씨....얜 또 쪽팔리게 그 얘기는 왜 또 꺼내..
<괜찮아...이정도 가지고 뭐..>
<아까 보니까 세게 부딪힌거 갔던데... 봐..아직도 여기 혹 있잖아..>
순간 그녀의 작은 손이 나의 이마를 어루 만져 왔다. 여린 손끝이 혹 난 이마를 부드럽게 쓸며 지나가자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미안?? 아펐어??>
<아...아니...>
<미안해서 어떡하냐..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 때문에 그렇게 된거잖아..>
<응?? 아냐..문 앞에 우두커니 서있던 내 잘못이 더 크지.. 신경쓰지마..>
<그래두.. 흉지는 거 아냐??>
<아냐..집에 가서 약이라두 바르면 괜찮아 질거야..^^>
괜찮다는 내 말에도 연신 미안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모습이 나는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져 그녀를 꼭 껴안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안돼.. 참아야 돼.. 넌 변태가 아냐 변태가 아냐..
자신을 애써 추스르며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 다 왔는지 눈앞에 활짝 열려있는 교문이 보였다.
벌써 다 온건가.. 우리 학교 운동장이 이렇게 좁았나?? 기합 받을 때는 오지게 넓더만 오늘은 왜 이런거야?? 그러게 건물 좀 작작 짓지.. 이래 가지고 애들이 운동장에서 운동이나 제대로 하겠어.. 애꿎은 학교를 탓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교문 밖을 벗어났다.
<난 이쪽으로 가서 버스 타는데..너는 어디로 가??>
<아.. 난 저 쪽으로가...지하철 타거든...>
<아...반대네... 그럼 여기서 헤어져야겠다. 우산은...>
<우산은 니가 가져가서 내일 줘..난 지하철 역까지 뛰어 가면 되니까..>
<그래도..니껀데...>
<아냐..진짜로 괜찮으니까..그럼 낼 보자...>
<야...잠....잠깐!!>
나는 혹여 라도 그녀가 우산을 가져가라고 따라 올까 빗속을 정신없이 뛰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멀리 서 있는 그녀가 손을 흔들며 나에게 뭐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 주고는 다시 빗속을 뛰어 갔다. 근데 뭐라고 그런거지?? 뭐.. 우산 가져가라는 소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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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비를 피하기 위해 외진 건물의 입구로 들어간 나는 교복에 묻은 물기를 털어 내며 투덜거렸다. 달려오는 그 짧은 사이에 젖었는지 교복은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로 축 늘어져 살결에 착 달라 붙어있었고 신고 있던 신발 역시 고인 빗물이 튀겨 안에 들어 갔는지 축축해진 신발 밑창이 발바닥을 적셔 심히 찝찝한 기분을 주고 있었다.
완전 비 맞은 생쥐 꼴이군..그냥 우산을 가지고 올걸 그랬나..지하철역까지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아냐.. 사내 자식이 되가지고 이정도 가지구 뭘... 여자를 비 맞게 할 수는 없잖아!! 그래 잘 한거야!! 근데 쫌 후회되긴 하다.^^;;
<아.....진짜 비 오지게 많이 오네...>
끊임없이 내리던 빗줄기는 그칠 기미도 없이 여전히 그 위세를 뽐내며 힘차게 내리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많이 온다냐...하늘에 있는 물탱크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난 그다지 비를 좋아 하는 편이 아니다. 찝찝하고 끈적끈적 하고 그러다가 비 맞아서 젖기라도 하면 그 더러운 기분은..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비를 싫아하는 이유는 역시 집안일 때문이다. 비가 오면 역시 제일 곤란한게 역시 빨래다. 빨아도 잘 마르지도 않으니까.. 그러면 빨래 안하면 되잖아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오산이다. 그래 안하면 당장은 좋다. 하지만 그 다음 날이 되면?? 산처럼 쌓여있는 빨래는?? 가뜩이나 우리 한 여사가 내놓는 엄청난 빨래 거리 때문에 평소에도 짜증이 치미는 난데 그게 이틀이나 쌓여 있으면..아우 생각하기도 싫다. 차라리 그때 그때 해치워 버리는 게 낫지..
그리고 우리 한 여사가 또 좀 까탈스러워야지... 손 하나 까딱 안하면서 뭐가 그렇게 잔소리가 많은지 습기가 차서 눅눅한 침대에서는 단 1분도 누워 있기 싫어 하셔 수시로 침대보를 갈아줘야 하고 수시로 눅눅해진 옷을 다려 입혀야 한다. 단 하나라도 빼 먹으면 날아 오는건 역시 정직한 주먹 뿐.
이러니 내가 비오는 날을 좋아 할 수가 있나.. 아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 있다면 바로 여름. 그것도 장마가 시작 된 여름. 덥고 찝찝하고 끔찍하다 진짜!!
근데 어째 거리에 사람이 없냐.. 비 맞기 싫어서 다 들어갔나?? 그래두 한명도 안보이는건 좀 이상한데..
난 의아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 보았다.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에 보이는 건 역시 굵은 빗줄기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 거리에 원래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뭐야..저건?? 순간 나의 시야에 빗속을 뚫고 걸어가는 하나의 인영이 보였다. 사람?? 아니 사람이라고 하기엔 실루엣이 너무 작아.. 나는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좀더 가늘게 뜨고 그 물체를 바라보았다.
뭐야...개 잖아?? 분명 그것은 개였다. 아니 강아지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작은 몸짓을 갖고 있는 그것은 천천히 천천히 저 멀리 횡단 보도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근데 왜 저렇게 비틀거리지?? 마치 술 마신 것 처럼... 근데..저개...혹시...
나는 뭐에라도 홀린 사람처럼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비가 내 몸을 흠뻑 적셔 왔지만 나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강아지에게로 다가갔다.
<도치??>
내 말을 들은 것일까?? 횡단보도를 건너던 강아지가 멈춰서 나를 바라 보았다.
똑같아.. 우리 도치하고.. 근데....이거 진짜 술 마셨나?? 왜 이렇게 눈이 풀려있어?? 말 그대로 강아지의 눈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눈의 초점도 정확하지 않았고 헤 벌어진 입 사이로는 혓바닥이 축 늘어져 할딱 거리거고 있었다. 근데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람같아 나는 나도 모르게 괜찮으세요?? 라고 안부를 물을 뻔했다.
그때였다. 멍하니 서있던 강아지의 얼굴이 처음으로 나 아닌 다른 곳을 향해 돌려진 것은..
강아지만을 보고 있던 나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저 멀리서 무서운 기세로 빗속을 달려오고 있는 차 한대를..
나는 다시 강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서 차가 오고 있는데도 이 멍청한 강아지는 피할 생각이 없는 듯 여전히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익숙한 장면이 떠올랐다.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에서 강아지를 안고 있는 꼬마.
그 팔에서 빠져 나와 도로로 뛰쳐나간 강아지..
그리고 달려오는 차 한대...
차가 지나간 뒤 바닥을 적시는 핏물..
순식간 이었다. 머릿 속에서 벌어 진 그 상황도 내가 강아지를 향해 뛰쳐 나가는 지금도.. 어느샌가 내 몸은 강아지를 향해 뛰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고 그 다음 머리가 움직였다.
구해야 해!! 반드시!!
나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강아지를 낚아 채갔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손에 느껴지는 감촉은 없었다. 이상한 느낌에 멈 춰선 나는 고개를 돌려 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언제 갔는지 강아지 한 마리가 우두커니 서있었다. 내 손에 있어야할 그 강아지가.. 이런..썅.. 강아지와 자리가 뒤바뀌어 버린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 보았다. 여전히 빗 속을 뚫고 차 한대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엔 나를 향해 오고 있다는 것.. 비 때문에 내가 보이지 않는 지 전혀 멈출 기미가 없어 보인다. 하긴 지금 멈춰도 소용 없을 것 같다.
썅... 좆 됐네...
꽝~~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날아 가는 것이 느껴졌다. 공중에 떠있는 그 시간은 무척이나 오래 느껴져 내가 날고 있는 건 아닌가 착각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올라가면 언젠가는 떨어지는 법.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내 몸도 곧 땅에 떨어졌다. 두 눈의 시야가 방에 불을 끄듯 조금씩 어두워져 갔고 몸을 차갑게 적시던 빗방울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통증은 없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거 생각만큼 대단한건 아닌가 보다. 아프지도 않고... 그럼 엄마, 아빠도 안 아프셨을려나?? 좀 틀린가?? 아..이따 만나면 물어 봐야겠다.. 만날 수나 있을라나?? 만나면 누나가 나한테 했던 거 다 일러 줘야겠다.. 때리고 구박했던 거 다 일러서 혼내달라고 해야지..말하니까 벌써 보고 싶네...엄마 아빠...
공부하고, 쉬고, 공부하고 ,쉬고 또 공부하다 쉬고, 그러다 점심먹고 다시 공부하고 쉬고 공부하고 쉬고 그리고 종례. 수업의 내용만 바뀔 뿐 단순 반복의 시간이었다. 태옆을 감아 놓은 인형처럼 같은 것만을 반복하는 일과. 그게 나의 학교생활이었다. 가끔가다 재밌는 일이 터지긴 하지만 그건 그저 구경거리 일뿐 언제나 내일이 아니라 딴사람의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참 재미없는 일상일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재미는 없다.
뭐 그렇다고 학교가 싫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나는 학교생활에 아주 만족한다.
청소 할 일이 있나, 빨래 해야 할 일이 있나, 가계부를 써야 하길하나...
가만히 있으면 밥 나와, 책보고 싶으면 책 봐, 자고 싶으면 자, 놀고 싶으면 놀 수도 있다.
집에서는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학교였다.
학교는 나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쉼터였다. 그런 쉼터를 내가 왜 싫어 하겠는가!!
오히려 수업이 너무 짧아서 불만이면 불만이지..
땡땡땡...
수업의 마지막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아직 종례시간이 남았지만 몇몇 아이들은 벌써부터 가방을 싸며 분주하게 움직여댔다. 마치 모든게 끝난듯 좋다며 환호성을 지르는 아이들.,
이리저리 교실을 뛰어 다니며 장난을 치는 아이들. 종례만을 앞둔 교실의 풍경은 어디나 그렇듯 시끄럽기 그지 없었다.
<야!! 선생님 오신다!!>
교실 문을 박차며 뛰어 들어온 아이가 숨어갈 듯한 얼굴로 헐떡이며 말했다.
조그만 체구의 아이의 얼굴은 비보라도 가져온 통신병처럼 비장하기까지해 웬지 모르게 우스워 보이기 까지 했다. 하여간 어느 교실가나 저런 놈들 꼭 있다.
얼마 안가 그 애의 말대로 한 여자가 교실로 들어왔다.
교실로 들어온 그녀는 천천히 교탁 앞에 섰다.
하얀 민소매블라우스에 밝은 브라운 계통의 스커트를 입은 여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화사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고운 얼굴선은 꽤 조화를 이뤄 저런 게 미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누구냐고?? 우리 담임이다.
<자~ 요새 날씨가 많이 덥죠, 오늘 하루 종일 공부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수고 했어요..>
역시 언제나 그랬듯 변함 없는 레파토리로 시작하는 종례시간.
더울땐 날씨가 덥죠, 추울땐 날씨가 춥죠, 좋을 땐 날씨가 좋죠.
기상청에서 근무하나?? 날씨 얘기만 하게...뭐 별로 상관은 없지만.
<자..그럼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고 이상 마치겠어요>
<차렷!! 선생님께 경..!1>
<아..잠깐..잠깐만요..>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반장의 말을 막자 여기저기서 어우~하는 서운함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종례시간을 질질 끄는것만큼 짜증 나는건 없으니까..
선생 역시 미안 했던지 이쁜 얼굴에 어색한 웃음을 가득 지은채 귀엽게 웃었다.
<저기 강혁이하고 은비는 이따가 상담실로 좀 와줘요~ 그럼 이상.. 아! 인사는 생략할께요^^>
드디어 모든 수업이 완전히 끝나자 너도 나도 교실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뭐가 그리 급한지 가다가 넘어지는 놈들도 더러 보인다. 저렇게 있기 싫은걸 어떻게 참았을까..보충수업이라도 한다고 하면 학교 때려칠지도 모를 놈들이야..진짜..
<야!! 한강혁!! 무슨 일이야 왜 우리 어리버리 최가 널 보자고 하는 거야??>
<나만 보자고 했냐?? 딴애도 같이 보자고 했지...>
<그래두 상담실에선 혼자 볼거 아냐!!>
갑자기 내 앞에 다가와 마치 애인이라도 뺏긴 놈처럼 날뛰고 있는 이 자식. 짧고 단정하게 자른 스포츠 머리가 꽤나 남자다운 느낌을 주고 있는 이 놈은 내 지루한 학교생활에 사귄 몇 안되는 친구중 하나이다. 이름은 유경호.
<야..진정하고...너는 상담실에서 뭐하겠냐??>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너랑 우리 마누라랑 같이 있는 다는데 남편인 내가 가만히 있게 생겼어!!>
지랄..가관이다..아까는 담임을 어리버리 최라고 맘대로 부르더니 이번엔 지 마누라라네..
참 이 자식은 다른 건 다 좋은데 꼭 담임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변해.. 그렇다. 이 자식은 담임을 좋아한다. 아니 자기 입으로는 열렬히 사랑하고 있단다.. 목숨도 바칠수 있을 만큼..
뭐.. 학교 다닐때 선생님 한번 안 좋아해본 사람이 어딨겠냐마는 이 자식은 좀 중증이다.
아니 많이 심각하다. 머릿속에서는 담임과 벌써 결혼한 상태까지 간걸보니...저번엔 아직 연얘 초기 단계였는데..
<야!! 유경호!!>
<응.말해.>
<너 저번주에 상담 했지??>
<응?? 어. 했지 아주 행복한 시간이었지..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미래를 얘기하고 토론하고 아주 의미있고 뜻깊은 시간이었어. 근데 그건 왜??>
아직도 모르겠다는 듯 멀뚱 멀뚱 쳐다보는 친구 놈의 얼굴에 스크류 펀치를 먹이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은 나는 차근 차근 말을 뱉었다.
<저번주에 나 상담 못했잖아... 집안일 때문에..>
<아..그럼 상담이야??>
이제 알았냐 이자식아!!
<그래두 둘이 같이 있잖아..>
많이 수그러 들긴 했지만 아직 불만이라는 듯 퉁퉁 거리는 이놈.
더 이상 이런 무의미한 대화를 하고 싶지는 않아..
어쩔수 없다.. 마지막 수단이다.
<아무일 없어..설마 니..마.누.라를 건들기야 하겠니...^^>
<그지!!역시 넌 내 친구다.. 그럼 그래야지!!하하하!!>
마누라란 말이 듣기 좋았던 듯 큰소리로 호탕하게 웃는 경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불쌍한 놈.. 어쩌다가 저리 됐을까... 옛날엔 안 저랬는데.. 남자답고 시원시원 했는데.. 누굴 좋아하면 저렇게 되어버리는 건가?? 아무것도 안보이고 오직 한사람만 보이게 되는 걸까?? 그게 서로하는 사랑이든 혼자하는 외사랑이든..
여전히 호탕하게 웃고 있는 경호를 애써 외면한 채 주위를 둘러 보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빠져나가고 비어버린 교실 안에는 몇몇의 아이들만 남아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 역시 거의 끝나가는지 교실 청소의 마무리 투수인 대걸레를 들고 여기저기 다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순간 내 시야에 한 아이가 들어왔다.
책상에 기대 앉아 친구들과 도란도란 수다를 떨고 있는 아이. 아이의 주변에는 그녀의 친구들로 보이는 몇몇 애들도 있었지만 내 눈에는 오직 그 애만 들어 왔다.
어깨까지 오는 생머리를 핀으로 묶어 옆으로 넘긴 그 애는 단정한 옷 차림재로 깔끔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교복 치마 밑으로는 가늘고 이쁘게 뻗은 다리가 한껏 소녀의 싱싱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웬지 모르지만 심장이 뛴다. 저 앨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몸이 떨려온다. 아...미쳤나봐.. 순간 그녀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윽..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어떻게 봤을까?? 봤을꺼야..이상하게 생각하겠지..아..왜 고개를 돌렸을까..그냥 능청스럽게 딴데 보는 건데..
아니면 좀 천천히 라도 돌리던가 홱 돌려가지고... 비웃을 거야..바보 같다고 생각할꺼야..
한가지 행동에 수십가지 후회가 밀려 들어왔다. 바보 같아...정말...
<저기...>
이런 저런 자책 중에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보왔다.
언제 왔는지 내 눈앞에는 아까 바라보던 그녀가 서 있었다.
옆에 있던 경호 자식은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두근!! 두근!! 두근!!
다시 또 시작하는 심장. 이 망할 놈의 심장. 바로 눈앞에 있어서 그런지 아까보다 더 뛰는 것 같다. 아니 뛰는 것도 모자라 폭발할 것 같다. 다행이 눈앞의 그녀는 내 이런 상태를 모르는 것 같다. 그저 당황하는 내가 이상한지 쳐다만 볼뿐이었다.
<너 담임이 왜 우리 부르는 건지 알아??>
<상담>
뭐야 이자식아!! 좀더 부드럽게 말해야지!! 그리고 고개는 왜 돌려!!
<아...그리고 보니까 저번에 못했구나..까먹구 있었네^^>
이제야 생각 낫다는 듯 머리를 콩 치며 귀엽게 웃는 그녀. 고개를 돌리고 있어 보이는 건 아니지만 느낄수 있다. 그녀가 웃고 있다는 걸.. 그리고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청소가 완전히 끝났는지 교실은 조용하기 이를 데 없다.
<언제 가는거야??>
어색한 분위기가 좀 이상했던지 다시 말을 걸어오는 그녀.
좋아!! 이번엔 점 더 상냥하게..
<몰라.>
으악~~~이게 상냥한거냐!!
미친놈,병신,바보,멍충이!! 이제 완전히 날 싫어 할 거야.
어떻게 말 한마디를 제대로 못하냐!!
<그..그래??>
그녀도 이번엔 좀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다. 하긴 생각해서 말을 걸었는데 이따위로 대답했으니..천천히 그녀가 내 곁을 떠나는게 느껴진다. 한걸음 한걸음 멀어져만 가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보고 싶지만 입은 떨어지지 않고 고개는 들리지 않는다.
아..한심하다..차라리 내가 경호 자식 같았으면...그 자식이라면 나처럼 바보 같인 안했을텐데..
부스럭 부스럭 책가방을 메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나 역시 주섬주섬 책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드르륵...탁..
교실 문 닫히는 소리가 내 귀에 천둥 소리처럼 크게 들려왔다.
갔다..가버렸다.. 휴... 모처럼 말을 걸어 줬는데..그 기회를 이렇게 차버리다니...
그것두 아주 뻥 하고 말야.. ㅠㅠ
나는 어깨를 축 늘어 뜨린채 흐느적흐느적 상담실로 걸어갔다.
상담실 앞에선 나는 문에 걸려있는 푯말에 잠깐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상담중)
먼저 들어 간 건가?? 하긴 아까 나갔으니까..
쾅!!
갑자기 들려오는 충격음. 동시에 나는 이마를 엄습하는 통증에 머리를 쥐어 싸며 신음했다.
<어머!! 뭐야?? 부딪힌거야?? >
그랬다. 상담실 문 앞에 서있던 중에 갑자기 열려버린 문짝에 내 머리가 부딪혀 버린것이었다. 상담실 문을 열고 나온 그녀는 머리를 쥐어 싸고 쭈그려 있는 나를 보며 놀란 듯 나에게 다가왔다.
<괜찮니?? 미안..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많이 아퍼??>
<아냐..괜챃아..신경 쓰지마..>
나는 애써 태연한척 남자답게 몸을 일으켰다. 이마가 욱씬 욱씬 거리는게 깨질 듯이 아팠지만 꾹 참았다. 이런 걸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진짜 괜찮아?? 엄청 세게 부딪힌 것 같은데..>
<괜찮아..이정도 가지고 뭘...하하>
<그래도...어머..어떻게..너 이마에 혹났어>
<괜찮아..괜찮....뭐!!혹??>
나는 황급히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문지르는 손길에 느껴지는 불룩 튀어 나온 살덩어리..
명백한 혹 이었다.
<아..진짜네..제대로 났어..아...>
나는 옆에 그녀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톡 올라와 버린 혹을 만지작 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훗..후후...>
뭐가 좋은 걸까?? 이마를 만지작 거리는 나를 보며 실실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나는 어이 없이 바라보았다. 웃을 때 마다 고운 양쪽 볼에 새겨지는 보조개가 귀여운 아기 같은 느낌을 주어 보기 좋긴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의 나로서는 그녀의 귀여운 웃음을 좋게만 받아 드릴수는 없었다.
<아...미안 미안..정말 미안....그냥..훗...>
내 시선을 의식 했는지 그제서야 웃음을 참으며 사과를 하는 그녀. 하지만 한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는 없었는지 연실 킥킥 대고 있다.
아.. 쪽팔려.. 뭐라고 할수도 없고.. 이도 저도 할 수 없어 난처한 상황 중에 때마침 상담실의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저기..강혁이 왔니?? 어.. 왔구나..들어와^^>
<네.>
나는 아직도 웃음을 멈추지 못해 킥킥 대는 그녀를 뒤로 하고 얼른 상담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우.. 짜증나... 오늘 일진 진짜 사납네...
문밖에서는 두 여인이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찬찬히 상담실을 둘러 보았다. 중앙에 놓여져 있는 접대용 식탁과 그 양옆으로 배치되어 있는 쇼파. 그리고 구석에 덩그라니 놓여진 냉장고. 그 이외는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실내. 사실 이 상담실이 라는 것이 말이 좋아 상담실이지 대부분은 교사들의 휴게실 정도로만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었기에 그리 대단한 것은 없었다.
<여기 앉어~ 그리고..차라도 한잔 마실래??>
<아뇨,괜찮아요^^>
언제 들어 왔는지 내 앞에서 차를 권하는 선생님의 말을 가볍게 사양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선생님 역시 내 맞은편에 앉아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우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름 이강주. 나이 26세. 한국의 명문 한국교대를 졸업한 엘리트 여성.
별자리는 처녀자리. 혈액형은 O형. 2남 1녀 중 막내. 현재는 집에서 독립해 혼자 살고 있음. 성격은 막내라 그런지 덤벙대는 경향이 있고 잔 실수가 많지만 활달하고 배려 깊어 주위사람들을 편하게 해줌. 현재 동광 고등학교 2학년 3반 담임을 맡고 있고 있음.
중요사항 - 현재 애인 없음.
내 머릿속에서 그녀에 대한 정보가 촤르륵 넘어 갔다.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냐고?? 다 정보통이 있지. 뭐 그건 중요 한게 아니구..
진짜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니 확실히 미인이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세미 롱의 갈색 머리는 갸름한 얼굴형에 잘 어울려 세련된 느낌이었고, 언뜻 언뜻 보이는 가는 목덜미의 하얀 속살도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떨리게 만드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확실히 경호 그 자식이 미쳐서 빠져들만 했다.
<그래~ 학교생활은 재미있니?? 뭐 힘든건 없구??>
<네.. 별로 힘든 건 없어요.>
평범하게 시작한 상담은 아무 무리 없이 부드럽게 진행 되어갔다.
힘든건 없냐, 고민은 없냐, 공부는 잘 되가냐, 앞으로 하고 싶은게 뭐냐.
늘 듣던 특별할 것 없는 질문들. 그렇게 상담은 순조롭게 끝나는 듯 했다.
<그리고..아! 애들 말 들어 보니까 니가 그렇게 요리를 잘한다며??>
<아뇨..그냥 사람 먹을 만한거 몇 개 만들 수 있는 정도죠..^^>
<아냐.. 소문이 자자 하던데!!>
나는 선생님의 칭찬에 가볍게 겸손을 떨듯 웃었다.
여기까지 소문이 난건가?? 내 요리 실력이.. 하긴 내가 좀 한 요리 하긴 하지.. ㅋㅋ
<언제 그렇게 요리를 배운거니?? 선생님은 요리만 하면 개밥으로 줘서 요리 잘하는 사람 보면 신기하더라..>
<그냥 어쩌다가 배우게 됐어요.^^>
<어머님이 좋아 하시겠다. 아들이 요리를 잘해서.. 가끔씩 니가 요리도 해드릴꺼 아냐.>
<어머니는 못 드시죠 돌아가셨으니까.>
너무 태연하게 말했던 내가 이상했던 걸까?? 한순간 선생님은 놀란 얼굴로 한동안 나를 바라 보았다.
모르고 계셨나??
<돌아....가셨다구..?>
<네. 4년 전에 교통사고로 두 분 다 돌아 가셨어요.>
<그렇구나.. 미안..>
<아뇨, 괜찮아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침묵. 나의 아픈 곳을 건들었다는 미안함 때문일까??
아님 선생으로서 좀더 신중하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일까.
한동안 선생님은 말을 잇지 않았다.
뭐 처음 보는 반응은 아니었다. 나에게 부모님의 일을 물어보고 얘기를 들으면 누구나가 다 저런 표정을 지었으니까.. 그래도 좀 씁씁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수 없다. 부모님의 얘기를 들춰서가 아니라 날 바라보는 저 눈빛이 날 아프게 만든다.
어떻게 너무 불쌍해... 어린 것이 어떡하나..
두 눈 가득 동정의 눈빛을 머금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
그리고 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처해 하는 모습
물론 이해는 한다. 불쌍하겠지 어린 나이에 부모도 없이 자란 내가.
하지만 저런 시츄에이션은 이쪽에서 사양한다.
부모가 없다는 건 장애가 아니다. 그분들은 남들보다 조금 일찍 가신 것 뿐이고
난 그분들을 조금 먼저 일찍 보낸 것 뿐이다.
추억은 언제나 내 머릿 속에 있고 부모님은 언제나 내 맘 속에 살아있다.
그게 다 이다. 난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이 내 힘으로 누나와 함께 잘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살 것이다. 그거면 된거 아닌가??
쓸데없는 동정은 하는 입장에선 부담 없는 선의이겠지만 받는 입장에선 악의이다.
그리고 저런 표정 역시 나에겐 악의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뭐 담임 입장에선 어쩔수 없는 거겠지만..
<저...이제 끝난 건가요??>
<어?? 어.. 그런 것 같아.. 미안.. 내가 너무 오래 끌었지??>
<아뇨^^>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담임을 보며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안녕히 계세요^^>
<그래..조심해서 들어가고..내일보자^^>
드르륵..쾅
<하아...>
집에나 가야겠다. 상담실 문을 닫은 나는 긴 한숨을 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걸음 한걸음이 무겁게 느껴진다. 갑자기 우울한 하루다..
쏴아~~~~
이런... 비오네... 언제부터였는지 잔뜩 흐려진 하늘에서는 굵은 빗줄기가 시원하게 내리고 있었다. 비온다는 소리 안했는데.. 기상청은 뭐한거야.. 맨날 틀려.. 진짜 일기예보는 믿을게 못된다.
<진짜 일기예보는 한번도 맞는 적이 없다..그지?>
<내말이...어??!!>
갑자기 들려오는 미성에 고개를 돌린 나는 입이 벌어진지도 모른 채 놀라고 말았다. 그녀다.. 분명 그녀다.. 근데 아까 분명 먼저 갔을 텐데...혹시...날 기다린건가?? 터무니 없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뒤엉켰다.
<너..먼저 간 거 아니었어??>
<어...그게...갈라고 했는데 갑자기 비가 와서..그냥 지나가는 빈 줄 알고 잠깐 기다리면 되겠지 하고 있는데 영 그칠 기미가 안보이네..>
벽에 기대어 잔뜩 흐려진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 그녀의 맑은 눈길엔 시원하게 비를 쏟아내고 있는 하늘이 미운 듯 원망의 빛이 담겨있었다. 그래.. 그럼 그렇지..으이구..니가 경호냐!! 혼자 망상을 하고 있게!!
<저기...혹시...너 우산 있니??>
<엉?? 우산?? 있긴 있는데... 아!! 너 이 거 쓸래??>
내가 세상에서 때려 죽어도 안 믿는 말이 딱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상 캐스터가 보도해주는 날씨 얘기이고 또 나머지 하나는 우리 누나가 매일 내뱉는 일등 신부감이 될거야!! 라는 말이다. 난 진짜 이 두 가지 말은 콩으로 메주를 쓴데도 그메주로 된장을 만든 데도 안 믿을거다.
그런 연유로 항상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준비성을 보이는 나였기에 나는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자신 있게 그녀에게 내밀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한건 했다!!
<와!! 진짜?? 잘됐다!! 근데..이거 나 주면 너 어떡할라고??>
<나야 뭐..여기서 잠깐 기달리지 지나가는 비 같기도 하고 좀 있으면 그칠 것 같아.>
쏴아아~~
내 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더욱더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내리는 비. 어찌나 세차게 내리는지
빗물 부딪히는 소리가 우레 소리 처럼 크게 들려왔다.
<아닌....것 같은데..??>
<그..그런가?? 아냐..금방 그칠거야..하하하>
무안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 겸연쩍게 웃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진짜 난 어쩌나..누나한테 전화할까?? 아냐..그 인간은 절대 나올 인간이 아냐..바쁘다고 하면서 그냥 비 맞고 가라고 할 인간이야.. 그럼 애들한테 전화 할까?? 아니지..그 자식들도 어디 피씨 방에서 놀고 있느라 전화도 안받을 텐데.. 아이구..어쩌냐... 천상 비를 맞고 달려야 하나??
이런 저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의 팔뚝에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천천히 내 머리위로 씌워지는 검은 색 우산..
나는 놀란 토끼 눈으로 내 옆으로 바짝 다가온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이러구 갈건데..너는 어떡할래??>
내 머리 위로 우산을 씌운 그녀는 나를 보며 장난기 섞인 말투로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이 내 눈에 마치 세상에 둘도 없는 보석처럼 빛나 보였다.
<음..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도 않구.. 그렇다고 니껄 나 혼자 쓰고 갈수도 없잖아.. 내 선량한 양심 상..>
내가 한동안 말이 없자 무안했는지 눈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며 얘기하는 그녀..
애꿎은 바닥을 차며 투덜 거리는 모습이 마치 뿔난 개구쟁이처럼 보여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날 뻔했다.
<정 싫으면 그냥 니가 쓰고가..내가 그냥 비 맞고 갈테니까.. 내 옷 적시기 싫다고 남에 옷적시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냐!! 그냥 같이 쓰고 가자..>
<그래?? 그럴까??>
나의 승낙이 반가웠던 걸까?? 그녀는 얼굴 가득 함박 웃음을 띄우며 나를 바라 보았다. 혹시 얘도 날 좋아하나??
<하하...다행이다..걱정했잖아...혹시나 니가 진짜루 그래 나 혼자 쓰고 가지..뭐.. 할까봐..^^>
내 흉내를 내는 듯 목소리를 깔며 어색한 몸짓으로 말하는 그녀. 그럼 그렇지...근데 얘는 날 어떤 놈으로 아는 거야?? 내가 그렇게 치사한 놈으로 비쳐졌나?? 이미지 관리 좀 해야겠는데..
우리는 천천히 빗속으로 들어갔다. 빗줄기는 여전히 거셌다. 많이 가늘어 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많은 양의 비가 우산으로 위로 떨어지고 있었고 우산이 그리 큰 것이 아니어서 우리는 잔뜩 몸을 움츠린 채 조심조심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은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녀도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천천히 천천히 빗속을 걸어갔다. 뭔가 말을 꺼내야 할까?? 오늘은 뭐 했니?? 재미있었니??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니?? 상담은 어땠니?? 선생님이 뭘 물어 봤니?? 집에 가서는 뭘할꺼니??
의미없는 수많은 질문들이 내 머리 속에서 떠오르며 뒤얽혔다. 하지만 역시 입에서만 맴돌뿐 나는 입을 열지 못 한 채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갔다. 바보.. 말 한마디 붙일 용기도 없다..나란 바보는..
<저기.. 괜찮으면 이쪽으로 좀 붙어..>
<응... 왜??>
정적을 깨고 울리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
<아니..니 어깨....옷에 비 맞잖아...>
<아...이거..>
그녀의 말대로 언제 맞았는지 우산 밖으로 삐져 나와 있던 내 왼쪽 어깨는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작은 일인용 우산을 두 사람이 같이 쓰고 있으니.. 거기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주먹 두개가 들어 갈 만큼의 큰 간격까지 있었기에 내 몸의 반은 우산의 보호를 벗어나 고스란히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괜찮기는.. 어머.. 벌써 다 젖었네.. 안되겠다.>
정말 안되겠다 싶었는지 뭔가 결심한 듯 한 그녀는 한 발자국 내 옆으로 다가왔다.
말이 좋아 한 발자국이지 좁은 우산속의 그 한발자국에 우리의 몸은 완전히 밀착되어 갔다.
<됐다. 이제 안 맞지?? 좀 불편하긴해도 이게 낳겠다...히히^^>
이제야 제대로 됐다는 듯 만족의 미소를 짓는 그녀. 하지만 난 그녀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수 없었다.
흐흡...
내 팔에 닿은 그녀의 부드러운 살갗이 날 숨막히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느껴져오는 그녀의 체온이 날 들뜨게 했고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오는 그녀의 향기가 내 코끝을 간지럽힌다. 그리고 간간히 들려오는 그녀의 고른 숨소리가 내 귓가에 맴돌아 내 심장을 두들긴다.
아무것도 생각 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어느새 사방에서 울리던 지겨운 빗소리도 어느새 멈춰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 우산 속의 공간과 단절된 느낌이었다. 내가 지금 느낄 수 있는 건 이 우산속의 그녀 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4달이라는 짧지만은 않은 시간을 같은 교실 안에서 보냈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본건 처음이다.
잡티 하나 없는 뽀얀 얼굴에 크고 동그랗게 뜬 눈에 붙어있는 가는 속눈썹은 아직 완전히 여물지 못한 여성스러움을 내뿜고 있다. 바람에 실려온 비에 맞았는지 하얗고 가는 목에는 송글송글 물방울이 맺혀 웬지 모를 청순함을 풍긴다.
두근 두근.
왜 안그러나 했다. 이젠 아주 자동이구나. 근데 이번엔 강도도 아주 쎄다. 혹시나 그녀에게 들리는 건 아닐까 걱정 일 될 정도로 이 망할 놈은 세차게 요동질 쳤다.
<저기...괜찮아??>
<뭐...뭐가??>
설마 들킨 건가?? 하긴 소리가 좀 컸어야지. 아이씨. 뭐라고 변명하지..
<아니...아까....그 머리...부딪힌거 말야..>
<아...그..그거?>
아이씨....얜 또 쪽팔리게 그 얘기는 왜 또 꺼내..
<괜찮아...이정도 가지고 뭐..>
<아까 보니까 세게 부딪힌거 갔던데... 봐..아직도 여기 혹 있잖아..>
순간 그녀의 작은 손이 나의 이마를 어루 만져 왔다. 여린 손끝이 혹 난 이마를 부드럽게 쓸며 지나가자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미안?? 아펐어??>
<아...아니...>
<미안해서 어떡하냐..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 때문에 그렇게 된거잖아..>
<응?? 아냐..문 앞에 우두커니 서있던 내 잘못이 더 크지.. 신경쓰지마..>
<그래두.. 흉지는 거 아냐??>
<아냐..집에 가서 약이라두 바르면 괜찮아 질거야..^^>
괜찮다는 내 말에도 연신 미안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모습이 나는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져 그녀를 꼭 껴안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안돼.. 참아야 돼.. 넌 변태가 아냐 변태가 아냐..
자신을 애써 추스르며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 다 왔는지 눈앞에 활짝 열려있는 교문이 보였다.
벌써 다 온건가.. 우리 학교 운동장이 이렇게 좁았나?? 기합 받을 때는 오지게 넓더만 오늘은 왜 이런거야?? 그러게 건물 좀 작작 짓지.. 이래 가지고 애들이 운동장에서 운동이나 제대로 하겠어.. 애꿎은 학교를 탓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교문 밖을 벗어났다.
<난 이쪽으로 가서 버스 타는데..너는 어디로 가??>
<아.. 난 저 쪽으로가...지하철 타거든...>
<아...반대네... 그럼 여기서 헤어져야겠다. 우산은...>
<우산은 니가 가져가서 내일 줘..난 지하철 역까지 뛰어 가면 되니까..>
<그래도..니껀데...>
<아냐..진짜로 괜찮으니까..그럼 낼 보자...>
<야...잠....잠깐!!>
나는 혹여 라도 그녀가 우산을 가져가라고 따라 올까 빗속을 정신없이 뛰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멀리 서 있는 그녀가 손을 흔들며 나에게 뭐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 주고는 다시 빗속을 뛰어 갔다. 근데 뭐라고 그런거지?? 뭐.. 우산 가져가라는 소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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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비를 피하기 위해 외진 건물의 입구로 들어간 나는 교복에 묻은 물기를 털어 내며 투덜거렸다. 달려오는 그 짧은 사이에 젖었는지 교복은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로 축 늘어져 살결에 착 달라 붙어있었고 신고 있던 신발 역시 고인 빗물이 튀겨 안에 들어 갔는지 축축해진 신발 밑창이 발바닥을 적셔 심히 찝찝한 기분을 주고 있었다.
완전 비 맞은 생쥐 꼴이군..그냥 우산을 가지고 올걸 그랬나..지하철역까지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아냐.. 사내 자식이 되가지고 이정도 가지구 뭘... 여자를 비 맞게 할 수는 없잖아!! 그래 잘 한거야!! 근데 쫌 후회되긴 하다.^^;;
<아.....진짜 비 오지게 많이 오네...>
끊임없이 내리던 빗줄기는 그칠 기미도 없이 여전히 그 위세를 뽐내며 힘차게 내리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많이 온다냐...하늘에 있는 물탱크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난 그다지 비를 좋아 하는 편이 아니다. 찝찝하고 끈적끈적 하고 그러다가 비 맞아서 젖기라도 하면 그 더러운 기분은..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비를 싫아하는 이유는 역시 집안일 때문이다. 비가 오면 역시 제일 곤란한게 역시 빨래다. 빨아도 잘 마르지도 않으니까.. 그러면 빨래 안하면 되잖아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오산이다. 그래 안하면 당장은 좋다. 하지만 그 다음 날이 되면?? 산처럼 쌓여있는 빨래는?? 가뜩이나 우리 한 여사가 내놓는 엄청난 빨래 거리 때문에 평소에도 짜증이 치미는 난데 그게 이틀이나 쌓여 있으면..아우 생각하기도 싫다. 차라리 그때 그때 해치워 버리는 게 낫지..
그리고 우리 한 여사가 또 좀 까탈스러워야지... 손 하나 까딱 안하면서 뭐가 그렇게 잔소리가 많은지 습기가 차서 눅눅한 침대에서는 단 1분도 누워 있기 싫어 하셔 수시로 침대보를 갈아줘야 하고 수시로 눅눅해진 옷을 다려 입혀야 한다. 단 하나라도 빼 먹으면 날아 오는건 역시 정직한 주먹 뿐.
이러니 내가 비오는 날을 좋아 할 수가 있나.. 아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 있다면 바로 여름. 그것도 장마가 시작 된 여름. 덥고 찝찝하고 끔찍하다 진짜!!
근데 어째 거리에 사람이 없냐.. 비 맞기 싫어서 다 들어갔나?? 그래두 한명도 안보이는건 좀 이상한데..
난 의아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 보았다.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에 보이는 건 역시 굵은 빗줄기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 거리에 원래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뭐야..저건?? 순간 나의 시야에 빗속을 뚫고 걸어가는 하나의 인영이 보였다. 사람?? 아니 사람이라고 하기엔 실루엣이 너무 작아.. 나는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좀더 가늘게 뜨고 그 물체를 바라보았다.
뭐야...개 잖아?? 분명 그것은 개였다. 아니 강아지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작은 몸짓을 갖고 있는 그것은 천천히 천천히 저 멀리 횡단 보도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근데 왜 저렇게 비틀거리지?? 마치 술 마신 것 처럼... 근데..저개...혹시...
나는 뭐에라도 홀린 사람처럼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비가 내 몸을 흠뻑 적셔 왔지만 나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강아지에게로 다가갔다.
<도치??>
내 말을 들은 것일까?? 횡단보도를 건너던 강아지가 멈춰서 나를 바라 보았다.
똑같아.. 우리 도치하고.. 근데....이거 진짜 술 마셨나?? 왜 이렇게 눈이 풀려있어?? 말 그대로 강아지의 눈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눈의 초점도 정확하지 않았고 헤 벌어진 입 사이로는 혓바닥이 축 늘어져 할딱 거리거고 있었다. 근데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람같아 나는 나도 모르게 괜찮으세요?? 라고 안부를 물을 뻔했다.
그때였다. 멍하니 서있던 강아지의 얼굴이 처음으로 나 아닌 다른 곳을 향해 돌려진 것은..
강아지만을 보고 있던 나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저 멀리서 무서운 기세로 빗속을 달려오고 있는 차 한대를..
나는 다시 강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서 차가 오고 있는데도 이 멍청한 강아지는 피할 생각이 없는 듯 여전히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익숙한 장면이 떠올랐다.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에서 강아지를 안고 있는 꼬마.
그 팔에서 빠져 나와 도로로 뛰쳐나간 강아지..
그리고 달려오는 차 한대...
차가 지나간 뒤 바닥을 적시는 핏물..
순식간 이었다. 머릿 속에서 벌어 진 그 상황도 내가 강아지를 향해 뛰쳐 나가는 지금도.. 어느샌가 내 몸은 강아지를 향해 뛰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고 그 다음 머리가 움직였다.
구해야 해!! 반드시!!
나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강아지를 낚아 채갔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손에 느껴지는 감촉은 없었다. 이상한 느낌에 멈 춰선 나는 고개를 돌려 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언제 갔는지 강아지 한 마리가 우두커니 서있었다. 내 손에 있어야할 그 강아지가.. 이런..썅.. 강아지와 자리가 뒤바뀌어 버린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 보았다. 여전히 빗 속을 뚫고 차 한대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엔 나를 향해 오고 있다는 것.. 비 때문에 내가 보이지 않는 지 전혀 멈출 기미가 없어 보인다. 하긴 지금 멈춰도 소용 없을 것 같다.
썅... 좆 됐네...
꽝~~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날아 가는 것이 느껴졌다. 공중에 떠있는 그 시간은 무척이나 오래 느껴져 내가 날고 있는 건 아닌가 착각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올라가면 언젠가는 떨어지는 법.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내 몸도 곧 땅에 떨어졌다. 두 눈의 시야가 방에 불을 끄듯 조금씩 어두워져 갔고 몸을 차갑게 적시던 빗방울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통증은 없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거 생각만큼 대단한건 아닌가 보다. 아프지도 않고... 그럼 엄마, 아빠도 안 아프셨을려나?? 좀 틀린가?? 아..이따 만나면 물어 봐야겠다.. 만날 수나 있을라나?? 만나면 누나가 나한테 했던 거 다 일러 줘야겠다.. 때리고 구박했던 거 다 일러서 혼내달라고 해야지..말하니까 벌써 보고 싶네...엄마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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